어젯밤에 당일배송으로 주문한 책의 하나는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 2>(프로메테우스, 2011)이다. 자본권력을 다룬 전작 <제1권력>(프로메테우스, 2010)을 읽을 터라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지도 않고 바로 주문을 넣었다. 아침에 리뷰가 뜬 걸 보니 러시아의 지배계급과 권력지도에 관해 다룬 책이다.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해도 될 만하다. 마이리스트로 만들어놓으려고 하다가 자세한 리뷰기사가 있길래 기사를 옮겨놓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 러시아 지배층 가운데 로마노프 왕가의 후손들은 아직도 최대 이권 집단이라고 지적"이 요지 가운데 하나일 텐데(일종의 족보결정론?), 푸틴도 거기에 해당하는지 읽어봐야겠다... 

    

세계일보(11. 11. 12) 러시아 지배계급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항해 온 것은 빈곤을 낳은 하나하나의 문제들이지,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가 결코 아니었다. 소련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했다지만, 사실상 그들 지도자는 대부분 귀족계급 내지는 자본주의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래서야 무슨 실험을 했다고….” 이 책은 이른바 ‘좌파’의 원조격인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이면을 고발하면서, 민중운동을 명분으로 내건 사회주의 진보 지식인들의 본모습을 들춰낸다. 저자가 겨냥한 인물들은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친 칼 마르크스, 민중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자며 국가혁명론을 들고 나선 블라디미르 레닌,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완성하자고 외친 트로츠키, 스탈린 등이다.

우선 16세기 중반부터 러시아를 통치한 로마노프 왕가의 혈연을 따라간다. 이에 열거한 인물들은 죄다 로마노프 왕가와 직계 혹은 모계로 연결돼 있다. 저자는 이들이 권력서클을 이룬 과정, 인민 대중을 수탈하는 과정, 기득권 보호 행태 등을 고증자료를 토대로 비판한다. 특히 민중 봉기를 부추기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맹점을 통렬히 고발하고 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유명한 저자는 지난해 ‘제1권력 1’을 펴내 JP모건과 록펠러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거대자본가들이 미국을 좌지우지했던 갖가지 행태들을 열거했다. 지난해 이 책은 출간 직후 일본 공산당 이론가들이 공식 항의하고 반박하는 소동을 빚으면서 30만부 이상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책은 이제껏 전해진 소비에트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종래 인식을 뒤집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종래 ‘좌·우’이념이라는 이분법적 틀을 깨고 ‘러시아혁명(공산주의혁명)은 대체 무엇이었나’라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이를테면 소비에트 독재를 연 인물 가운데 한 명인 흐루시초프는 로마노프 가문의 대귀족이었다. 이어 이오시프 스탈린, 몰로토프, 미코얀 등의 크렘린 수뇌부는 거의 로마노프 가문과 유대관계 또는 혈연으로 연결된 사실도 밝혀진다.

흐루시초프는 100% 프롤레타리아 출신임을 간판으로 내걸고 소비에트운동에 앞장선 인물. 러시아 정부 공식 문헌에도 도네츠크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로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왕가의 일원이었으나,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완수하는 주역으로 면모를 탈색한다. 이렇듯 노동자와 농민이 지배한다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구소련의 최고 권력 집단 ‘볼셰비키 정부’를 구성한 인물들은 대부분 귀족 집안의 후손이거나 그 후광을 업고 있었다. 이런 게 사실이라면 사회주의 이념을 추종하고 있는 국내 진보 사상가들의 이념적 혼돈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금도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혁명의 아버지를 떠받들고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선조는 로마노프 왕가를 추종한 귀족이었다. 레닌의 외조부는 1847년 카잔의 영주였으며 가장 유복한 계급이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자유 기운이 한창 무르익을 때 반체제 인사로 이름을 알린 사하로프. 그는 수소폭탄이라는 인류 최대의 흉기를 스탈린에게 만들어 바친 인물로 묘사된다. 서방에서는 그를 반체제 양심인사의 상징으로 치켜세우곤 했다. 하지만 지금 러시아에서 사하로프를 떠받들거나 존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보리스 옐친의 금고지기 출신으로, 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구단 첼시의 구단주이자 석유재벌인 아브라모비치 역시 귀족집단 ‘울리가르히’ 중 한 명이다.

저자는 이런 인물들이 움직이는 러시아가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도 분명히 적시한다. 양심적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면서 민중운동 내지 사회주의를 명분으로 한 특권층의 행태를 고발한다. 그는 현재 러시아 지배층 가운데 로마노프 왕가의 후손들은 아직도 최대 이권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로마노프 왕가가 지배한 제정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로 바뀌고, 현대에 와서 다시 제정 러시아로 돌아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지배계급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서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낭만적 성향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맹종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국내 사회 운동가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리부동의 인물들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공산주의 이념을 내걸고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실험했던 장본인들은 실상 당대의 자본가 내지 귀족 계급 출신이었다. 저자는 로마노프 왕가로 대표되는 러시아 지배계층의 본모습을 고발하면서 현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정승욱 선임기자)  

1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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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0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소셜미디어'가 주제이고 세 권의 책에 대해 간략히 적었다. 주로 언급한 책은 클레이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 2011)이다.  

책&(11년 11월호) 실시간 소통의 혁명

세계인구 70억 시대가 됐다. 2000년에 60억명을 돌파한 지 11년만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70억 인구 시대는 ‘지구사’에서 유례가 없는 새로운 시대다. 지난 1750년 세계인구가 8억 명 수준이었고 1950년에 25억 명이었던 걸 고려하면 우리가 얼마나 ‘예외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인구가 많아지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물론 늘어나는 인구만이 사회변화의 동력은 아니다. 새로운 발명과 기술적 진보 또한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다. 예컨대 최근 10년간 우리의 일상생활과 소통방식을 가장 파격적으로 변화시킨 소셜미디어가 그렇다. 과연 지금 우리 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의 저자인 IT전문가 클레이 셔키는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에서 우리 시대 변화의 핵심을 ‘새로운 대중의 탄생’으로 보고 역사적 사례와 견준다. 산업화 초기였던 1720년대 영국의 런던은 도시 전체가 술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도시생활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시름을 달래기 위해 진을 마셔댔기 때문이다. 하나의 도시 현상으로서 ‘진 열풍’은 사람들이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이었고 사회 구조 개혁이 진행됨에 따라 잠잠해졌다. 이어서 산업화 시대에서 탈산업화 시대로의 전환기에 사람들이 진 대신에 빠져든 것은 시트콤이다. 우리도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지만 서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수명이 늘어나면서 여가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이 시간을 텔레비전 시청에 할애했다. 텔레비전 시청은 고독감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 활동을 감소시키고 대인간 접촉을 줄게 만들었다. 미국의 경우 전체 미국인이 일 년 동안 텔레비전 시청에 쓰는 시간은 대략 2000억 시간이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동적 문화소비에 반기를 든 젊은 세대가 등장하면서 또 한 번 새로운 전환이 마련된다.  

클레이 셔키는 이 전환의 두 가지 배경으로 전 세계의 교육받은 인구 사이에서 연간 1조 시간이 여가시간이 생겨난 것과 자신이 관심을 가진 활동을 추구할 수 있게 해주는 공공 미디어가 발명‧확산된 것을 든다. 즉 소셜미디어의 발명과 그것을 적극 활용하는 세대의 등장이 우리 시대를 과거와는 다른 시대로 호명하게 해준다. 텔레비전을 덜 보는 대신에 지금의 젊은 세대는 빠른 대화형 미디어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발견하며 행동한다. 저자는 네 살짜리 딸과 DVD를 보던 친구의 얘기를 들려주는데, 화면을 보던 아이가 갑자기 화면 뒤쪽으로 가 뭔가를 찾더라고 한다. “왜 그러니?”라는 물음에 아이는 “마우스 찾아요.”라고 대답했다. ‘마우스가 없는 화면’은 뭔가 빠진 걸로 간주하는 세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세대와는 분명 다르게 세상을 지각할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바로 그런 세대를 새로운 대중으로 합쳐놓는다. 그들이 가진 ‘1조 시간’과 ‘인지 잉여’, 곧 ‘남는 머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어쩌면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변화의 문턱에 우리는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소셜미디어 전략 컨설턴트인 제이 베어와 애버 나스룬드는 그러한 변화를 ‘실시간 혁명’이라고 부른다. <실시간혁명>(더숲)에서 저자들은 급변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에 기업과 조직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충고한다.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현행 비즈니스 문화의 철저한 개조를 요구하는 이 혁명적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와 기지, 인간화, 소셜미디어의 포용 같은 것들이다. 예컨대 음악가 데이브 캐럴이 유나이티드 항공의 처사를 고발한 유튜브 비디오를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자 그가 가진 기타의 브랜드 회사인 ‘테일러 기타’는 나흘 만에 ‘<유나이티드가 기타를 부수었네>라는 노래에 대한 테일러 기타의 반응’이란 제목의 2분짜리 비디오를 올려서 망가진 기타가 어떻게 수리되는지를 보여주었고 열띤 호응을 얻었다. 적극적인 소셜미디어의 활용이 기업의 이미지를 단시간에 제고시킨 대표적 사례다.   

소셜미디어의 폭발적 확산은 소셜미디어의 ‘소리 없는 혁명’을 학문적 차원의 연구대상으로도 만든다. 설진아 교수의 <소셜미디어와 사회변동>(커뮤니케이션북스)은 소셜미디어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소셜미디어와 사회변동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조명한다. 이미 우리는 여러 차례의 국내외 선거를 통해서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고, 저자 또한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에 주목한다. 문제는 기존의 선거법이 새로운 매체 서비스에 적용하기에는 불합리한 내용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소셜미디어와 선거법 개정에 대한 사회적 숙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변화의 물꼬는 제도 개선의 수준을 넘어서 곧 사회구조 변혁에까지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실시간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11.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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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1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2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국사람 2011-11-12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위 내용과는 상관이 없지만 이명박 자서전이 나와서 올립니다.
The Uncharted Path: The Autobiography of Lee Myung-Bak.
http://www.amazon.com/Uncharted-Path-Autobiography-Lee-Myung-Bak/dp/1402262914,
아마존 서평 별5개 3개, 별1개 28개
청와대 자금으로 출판했을텐데 국민세금 엄한데 쓰는 짓 계속하는군요. 자서전을 자기 임기중에 출판하는 미국 대통령은 본 적이 없는데 이 양반은 임기 끝나면 감옥에 가 있을까봐 이러는지.....
욕먹을 짓은 이렇게 골라가며하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로쟈 2011-11-12 10:18   좋아요 0 | URL
한 '캐릭터'하는 양반이죠. 제목대로 Uncharted Path를 가는 듯해요...
 

격주간 기획회의(30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마감이 지나 편집자의 애를 태우며 보낸 원고인데 당초 쓰려고 했던 책이 너무 두꺼워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급하게 따로 읽고 쓴 글이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 2011)과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 2011)을 나란히 읽고서 백석 시 읽기에 관해서만 적었다.   

기획회의(11. 11. 05) 흰 당나귀와 나타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을 읽었다. 각각 14인의 시인과 철학자를 짝지어놓고 시를 통해 철학을, 철학을 통해 시를 읽는 책이다. 전작인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동녘)을 먼저 읽었기에 이어서 읽었다고 하면 독서의 이유로 자연스럽겠지만, 사실은 예기치 않은 독서였다. 각 분야의 전문가 22인의 글 모음집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에 실린 강신주의 ‘한국의 사랑’을 읽은 것이 계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답하여 그는 “한국인의 내면을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란 생각에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꺼낸다. 여인의 이름은 조선권번의 기생이었던 김영한(1916-1999). 사랑에 짝이 없을 수 없으니 그이가 사랑한 남자는 백기행(1912-1995).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였다. ‘김영한과 백기행’이라고 하면 알아보기 힘들겠다. 백기행은 시인 백석(白石)의 본명이고, 그가 김영한에게 붙여준 이름이 ‘자야(子夜)’이다. 해서 강신주가 들려주려는 건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이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28)를 읽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시 말이다. 백석과 자야의 사례로 ‘한국의 사랑’을 읽어내는 저자를 좇아서 백석의 시 읽기를 사례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 대한 리뷰를 대신해 보기로 한다.   

 

일단 강신주는 김자야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근거로 시의 ‘나타샤’가 자야를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관계를 좀 특이하게 푼다. 시의 마지막 연을 읽어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특이하다’고 한 건 그가 이 시에서 화자 백석의 욕망 대상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석에게 자야는 분열된 존재로 보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타샤가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글쓰기 재주까지 갖춘 지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흰 당나귀는 성적 매력을 풍기는 관능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물론 정신분석적 해석이다. 백석의 의식 속에서 자야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다면 정작 분열된 건 백석의 의식 자체다. “결국 백석은 있는 그대로의 자야가 아니라 상상 속의 자야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백석은 자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사랑의 대상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다. 나타샤가 ‘지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흰 당나귀는 ‘관능적인 여성’을 상징한다. 흔한 경우로 지적인 여성과 관능적인 여성이 각기 다른 두 여성이라면 백석의 사랑은 분열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면모가 자야라는 동일한 여성의 속성이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럼에도 강신주는 “이렇게 분열된 의식 속에서 온전한 사랑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고 적는다. 우리는 지적이거나 관능적인 여성, 어느 한쪽만을 사랑하는 건 온전한 사랑이지만 지적이면서 관능적인 여성을 사랑하는 건 온전하기 어려운 사랑인가. 하는 의문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야’와 ‘상상 속의 자야’는 무엇에 대응하는 것일까. 지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인 여성이 ‘있는 그대로의 자야’이고, 그것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는 것이 ‘상상 속의 자야’인가. 이것은 특이하면서 좀 예외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다.  

통찰이 없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관능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백석에게 있어 자야는 나타샤의 측면보다 기생의 측면으로 더 강하게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강신주는 적는다. 어떤 관능성인가. 이에 대한 설명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 실린 백석 편에서 보충적으로 읽을 수 있다. 백석이 감각에 얼마나 민감했던 시인이었던가를 얘기하면서 저자는 특히 이 시의 의성어들에 주목한다. ‘푹푹’과 ‘응앙응앙’ 같은 의성어이다. “‘푹푹’은 눈이 내리는 소리인 동시에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고, ‘응앙응앙’도 하얀 눈을 만지듯이 나타샤를 애무하는 백석의 손길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의성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의 화자가 혹은 백석이 푹푹 나리는 밤눈 속에서 그런 연상을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시의 지배적 분위기는 관능적 에로티시즘보다는 ‘쓸쓸함’에 더 가깝다. 첫 연에서 ‘가난한 나’와 ‘아름다운 나타샤’의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라는 걸 암시한 다음에 백석은 둘째 연에서 이렇게 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시의 나머지 대목은 그렇게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는 화자의 취기가 불러낸 환영이다. 만약 나타샤와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 공간은 ‘여기’가 아니라 ‘어데서’이다. 그러니 그 사랑의 시제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저자가 이 시의 성격을 “스물일곱 젊은 시인이 겪고 있는 사랑의 열병이 차가운 눈발과 대조되어 낙인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애절한 시”라고 규정한 대로다. 하지만 거기서도 ‘푹푹’ 눈이 내리는 소리가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기도 하다면 ‘사랑의 열병’과 ‘차가운 눈발’의 대립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애절함과 쓸쓸함만이 묻어나는 시는 또 아니다. 그것은 ‘나는 나타샤를 사랑한다’는 핵심문형이 어떻게 변주돼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1연에서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라고 ‘나’와 ‘나타샤’가 행으로 분리돼 있다. 2연에서는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나’라는 주어가 빠져 있다. 3연에서는 “나타샤와 나는”이 주어로 붙어 있지만 ‘사랑’이 빠져 있다. 4연에 와서야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로 온전한 문형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5연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표현을 통해 환상을 통해서일망정 두 사람의 사랑은 ‘완성’된다. 

‘철학적 시읽기’는 보통 시를 통째로 파악하기에 이러한 ‘내러티브’에는 덜 주목한다. 대신에 저자는 백석의 시에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란 오감으로 세계를 느꼈던 시인의 ‘감각의 풍성함’을 읽어내며 이것을 일본의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과 연관 짓는다. 시와 철학을 동시에 읽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지적인 여성(나타샤)과 관능적인 여성(흰 당나귀)을 동시에 사랑하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11.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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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9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학은 인문학의 무덤인가

이번주부터 격주로 주간경향에 북리뷰를 싣는다. 첫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 이미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서평에서는 나대로 중요하다 싶은 대목을 간추렸다.    

주간경향(11. 11. 15)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 

“인문학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다!” 미국의 저명한 인문학자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미래>에서 던지는 메시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예언이나 확신이 아니라 희망이다. 이 희망이 인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인문학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진지한 자기반성을 통해서 제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물음은 자연스레 인문학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포함한다. 문제의 발단은 한 세대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인문학은 가장 명망 있는 학문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은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원자탄을 발명하고 달 착륙 우주선까지 쏘아올린 자연과학이 급부상하여 학문의 패권을 차지한다. 가장 높은 명성과 경제적 후원을 누리게 됐다는 뜻이다. 자연과학에 뒤이어 사회과학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에 얹혀 갔고, 일부 인문학자들조차도 ‘인문과학자’이고 싶어 했다. 이렇듯 인문학을 둘러싼 학문 지형의 변화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경우 학문의 판도 변화와 함께 인문학에 들이닥친 또 다른 문제는 1970년께부터 갑자기 인문학 박사 학위자들이 빠지게 된 구직난이다. 카우프만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지목하는데, 첫째는 베이비붐 시대의 출산율이 주춤하면서 대학의 성장 또한 정체돼 버린 것이고, 둘째는 교수직이 1970년대를 기점으로 과거 25년간 젊은 사람들로 채워짐으로써 퇴임으로 인한 공석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요컨대 인구 문제와 인력 수급 문제가 ‘인문학의 위기’를 낳았다.  

대학의 팽창과 함께 미국에서는 1950년에서 1970년까지 약 2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인문학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들은 학위를 채 끝내기도 전에 대학에서 자리를 제안받곤 했다. 교원에 대한 수요가 전례 없이 증가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인문학에 대한 가수요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되었고 결국은 철학분야에서만 2000여 명의 박사학위자가 교직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예술과 인문학 분야의 박사학위자 80% 이상이 자기 전공분야에서 직업을 찾을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한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고 덧붙이는데 사실 더듬어보면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경우는 미국보다 딱 한 세대 뒤인 1980년에서 2000년까지 대학이 우후죽순으로 증가했고 대학 진학율이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섰다. 인문학 교원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대학원 진학자도 증가했고 상당수는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에 교원으로 임용됐다. 하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출산율 저하와 함께 대학의 성장이 한계에 도달하고 인문학 전공자는 수요에 비해 초과 배출됐다. 카우프만의 책이 처음 출간된 게 1977년이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도 적실성을 갖는다면 이런 공통적인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이렇다고 하면 해법은 무엇인가. 특이하게도 저자는 인문학자의 유형론에서 문제의 단초와 해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인문학자는 그 마음가짐(에토스)에 따라 통찰가형과 사변가형, 저널리스트형과 소크라테스형으로 나뉜다. 각각은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문제는 어느 한 가지 유형으로 편중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학의 교수들은 점점 사변가가 되어갔고 한 시대의 신념과 도덕을 엄밀하게 따지면서 문제 삼는 소크라테스적 에토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소크라테스형의 실종은 매카시즘의 광풍과도 관련이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 여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각자의 좁은 전공분야만 파는 사변가 역할에 안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대학의 인문학 연구마저도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숲’이 아닌 ‘잎사귀’ 연구에 치중하고 있는 게 전공논문 편수로 교수의 업적을 평가하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것이 “미국의 낙선한 부통령의 비서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카우프만은 꼬집는다. 사변가들만이 득실거린다면 인문학의 미래는 없다. 인문학이 인류의 미래가 되기 위해선 인문학자들의 마음가짐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게 카우프만의 주장이다.  

11. 11. 07. 

P.S. 짐작엔 분량상 지면에서는 세 문장이 빠졌는데, 그중 하나는 "대학원 진학자들 가운데 “인문학이 의학이나 다른 유용한 전문지식들과 달리 별 쓸모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이다. '인문학 위기'가 실상은 '인문학자의 위기'라고 할 때 음미해볼 대목이다. 참고로 카우프만은 대학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것도 사변가형만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그러한 현실이 바뀔 수 있을까. 미국 대학은 과연 30년 전과는 사정이 달라졌는가. 선뜻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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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8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9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우프만은 아렌트가 학자가 아니고 저널리스트라며 평가절하하는데 로쟈 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로쟈 2011-11-09 07:48   좋아요 0 | URL
아렌트는 원래 저널리스트활동을 했으니까요. 한데, 카우프만의 분류대로라면 최소한 '통찰가'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좀 인색한 평가에요. 요즘에 아렌트 전공자는 있어도 카우프만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나름의 역사적 평가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9 16:12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의 나치전력 때문에 그와 사귄 아렌트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 정서가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물론 이런 식의 평가가 올바르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로쟈 2011-11-11 09:32   좋아요 0 | URL
비판의 논거가 생각보다 자세하지 않아서 '사감'이 얹힌 게 아닐까 싶은 거죠. 하이데거의 전집이 나오는 거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하고...

노이에자이트 2011-11-11 16:11   좋아요 0 | UR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굉장한 찬반논쟁을 일으켰고...아마 이런 일 때문에 카우프만은 아렌트가 센세이셔날한 것을 노리는 사람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달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현장에서 행한 지젝의 연설문을 프레시안에서 옮겨놓는다. 연설 소식은 접했지만,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미처 챙겨놓지 못했었다. 지젝에 관한 포스팅조차도 상당히 오랜만인 듯싶다. 이달에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자음과모음, 2011)가 출간되면 다시금 자주 포스팅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 먼저, 일단은 아래 연설문부터 읽어보시길. 지젝의 기본 관점이 압축돼 있다. 영어판 타이틀은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Don’t fall in love with yourself)"이다.   

프레시안(11. 10. 18) [지젝 뉴욕 연설 전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이혼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WS) 시위의 진원지인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했던 연설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젝은 지난 9일 1000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이 연설을 했고, 그 연설은 이번 시위의 상징이 된 '인간 마이크'를 통해 전달됐다. (☞동영상 기사 보기) 다음은 미 <ABC> 방송이 제공한 지젝의 연설문 전문(☞원문 보기)과,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 중의 발언 내용을 종합해 재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카니발은 싸구려가 될 것이다"

카니발은 싸구려가 될 것이다. 여기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여러분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 이 시간들의 진정한 가치를 시험하는 것은 앞으로 닥칠 날들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일상 생활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지치고 피로한 노동자들과 사랑에 빠지라. 우리는 시작이다. 끝이 아니다. 우리의 기본 메시지는 이것이다. "금기는 깨졌다. 지금 우리는 가능한 가장 좋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대안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은 멀다. 그리고 우리는 곧 진짜 어려운 질문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원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어떤 사회 조직이 현존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가? 지난 세기의 대안들은 분명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월스트리트의] 사람들과 그들의 태도를 비난하지 말자.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사람들을 부패하게 하는 시스템(체제)이다. 해답은 '월스트리트가 아닌 메인스트리트'가 아니다. 메인스트리트가 월스트리트 없이 기능할 수 없는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적에 대해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항의를 희석시키는 거짓 동료의 잘못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카페인 없는 커피를, 알콜 없는 맥주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그들은 우리를 무해한 도덕적 항의자들로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겨우 콜라 캔을 재활용하거나, 몇십 달러를 자선 기금으로 내거나,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사면서 수익의 1%가 제3세계의 어려운 이들에게 간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세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3세계에]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한 이후, 결혼정보회사가 우리가 데이트하는 것까지 아웃소싱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정치참여마저 아웃소싱되는 것을 지켜봤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찾아오길 원한다.

그들[1%]은 우리가 '비미국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당신들에게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때, 기독교성(Christianity)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 성령이다. 성령이란 사랑으로 결합된 믿는 이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가 기독교성이다. 여기 있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 월스트리트의 저들이야말로 거짓 우상을 좇는 이교도다.

그들은 우리가 폭력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점령' 같은 우리의 말이 폭력적이라고. 그렇다. 우리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단지 마하트마 간디가 폭력적이라고 할 때와 같은 맥락에서만 폭력적이다. 우리는 기존의 방식을 멈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순수한 상징적인 폭력을 매끄러운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폭력에 비길 수 있을까?

우리는 '루저'라고 불렸다. 하지만 진정한 루저들은 월스트리트에 있지 않은가? 그들이 우리들의 돈(세금) 수천 억 달러를 날리지 않았는가? 우리는 사회주의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존재한다.

그들은 당신이 사유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투기적 행태가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온 결과 사람들이 힘들게 일해 이룩한 사유재산을 날려 버렸다. 우리가 여기서 몇 주 동안 밤낮으로 사유재산을 파괴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 많이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수천 채의 집들이 빚에 넘어간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만약 공산주의가 1990년 무너진 그 체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유럽이나 미국의 자본주의보다 더 역동적인 중국 자본주의 말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중국 자본주의의 성공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혼에 이르렀다는 불길한 징조다.

여러분이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있다는 협박에 굴하지 말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맥락이 있다면 우리는 '공유'(the commons)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공유, 사유화된 지식의 공유, 생명공학의 공유 말이다. 이들은 현 체제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그들은 당신이 꿈을 꾼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꿈을 꾸는 것은 지금의 방식이 몇 가지 장식만 바꿔 달면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악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꿈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체제가 천천히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고전적인 만화의 한 장면에 대해 알고 있다. 절벽에 다다른 고양이는 발밑이 허공이라는 것을 모른 채 계속 걸어가다가, 아래의 심연을 내려다본 순간 비로소 추락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은 월스트리트의 권력자들에게 '이봐, 아래를 봐'라고 일깨워주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변화는 가능한가? 오늘날 언론을 보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분포가 이상한 방식으로 돼있다. 개인적 자유의 영역과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점점 가능하게 돼간다. (아니면 그렇다는 말을 들은 것이거나)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is impossible)라는 말처럼, 우리는 온갖 기괴한 섹스를 즐길 수 있고, 모든 음악, 영화, TV 시리즈도 인터넷에서 내려받을 수 있으며, (돈만 있다면) 우주여행도 누구에게든 가능해졌다.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유전자 치료를 통해 강화할 수 있고, 우리의 정체성을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변형시켜 영생이라는 테크노-그노시스적인 꿈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사회적 경제적 관계에서는 '할 수 없다'의 폭격을 맞을 것이다. 전체주의적 테러를 불러올 것이라는 이유로 집단적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없고, 당신을 비경쟁적으로 만들고 경제위기를 불러온다는 이유로 과거의 복지국가 모델을 고수할 수도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도 없다. 그리고, 그리고…. 긴축정책이 취해지면서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얘기만 반복적으로 들었다.

만일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약간만 올리자고 한다면 그들은 경쟁력을 잃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의료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돈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가 되자는 것이냐며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곧 영생도 가능해진다는데 당장의 의료 혜택을 위한 약간의 지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원한다.

어쩌면 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조합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어쩌면 우리가 영생을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더 많은 연대와 건강보험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시간여행과 대안적 역사를 TV나 영화, 소설의 소재로 삼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대안을 꿈꾼다는 면에서 좋은 징조다. 중국 정부는 그런 이야기가 진지한 역사적 사건을 경박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안적 현실로의 가상 속에서의 탈출조차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서방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런 금지는 필요치 않다. '이데올로기'는 최소한의 진지함마저 갖춘 대안적 역사 이야기를 막을 충분한 물질적 힘이 있다. 지배 체제는 우리의 상상력마저 막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은 쉽게 떠올린다. 종말론적 영화는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끝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구 동독에서 유래된 오래된 농담이 있다. 동독 노동자 한 명이 시베리아에 일하러 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당하기 때문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암호를 정하자. 만약 나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 보통 쓰는 파란 잉크로 글씨가 쓰여 있다면 사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는 부분은 거짓말인 것으로 하자."

한 달 후 그의 친구는 파란 잉크로 쓰인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여긴 모든 것이 완벽해. 가게는 물건으로 가득차 있고 식품은 풍족하고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잘 돼. 극장은 서방에서 온 영화를 틀어주고 예쁜 여자들이 줄을 서 있어. 근데 딱 하나 없는 건 빨간 잉크야."

이게 지금까지의 우리의 상황 아닌가? 우리는 원하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딱 하나 빠진 게 빨간 잉크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부자유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빨간 잉크의 부족이 오늘날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의 분쟁을 묘사하기 위해 쓰는 모든 용어들, 예를 들어 '테러와의 전쟁',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은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신 우리의 인식을 미혹시키는 틀린 용어라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 있는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당신들이 우리 모두에게 빨간 잉크를 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여러분이 1년에 한 번씩 만나 맥주나 마시면서 오늘을 떠올리며 '아, 그때 우린 젊었고 참 멋졌지'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달라. 사람들은 진정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정말로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번역_곽재훈기자) 

11.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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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6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7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06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 마이크'가 뭔가 했더니 동영상을 보니 알겠네요 ㅎㅎ "여기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여러분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 멋지군요. 그런데 동영상의 연설 내용과 원고 내용이 순서가 좀 다르네요. 나중에 취합해서 따로 정리한 모양이죠?^^

로쟈 2011-11-07 07:53   좋아요 0 | URL
네 편집자의 말이 그렇네요.^^

허스키 2011-11-0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가 기대됩니다.

로쟈 2011-11-07 07:53   좋아요 0 | URL
감사.

허스키 2011-11-07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년여 전의 포스팅에 댓글을 달았는데 아무래도 못 보실것 같아서 여기에 다시 조언을 얻고자 올립니다. 검색을 하다보니 마티에서 나온 김서영씨께서 번역한 <시차적 관점>의 번역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들이 몇몇 보입니다. 로쟈님께서 보시기엔 어떤가요?

로쟈 2011-11-07 07:53   좋아요 0 | URL
저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교정돼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허스키 2011-11-0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교정되어야 할 부분은 이 저서의 구입을 고려하게 할 만한 것인가요? 그정도로 큰 문제는 아닌건가요?

로쟈 2011-11-07 10:51   좋아요 0 | URL
미심쩍은 부분은 원서와 같이 보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도 만만찮은 분량의 책이라 번역본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무네숲 2011-11-0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저공비행을 즐겨찾기 해놓고 가끔 이곳에서 언급해주시는 좋은책을 구매하곤 하는 독자이자 소비자입니다. 우선 왕성한 지적탐닉?활동에 경의를 표하고싶고요, 저에게는 다소 생소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한 길라잡이 역활을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지젝 역시 로쟈님 덕분에 만난(저에게는 다소 난해한 부분도 있는)인연이 되겠는데요, 앞으로도 나름 지식에 눈을 떠가는 혹은 그러하고픈 이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로쟈 2011-11-09 07:45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도움이 되신다니 저도 기쁩니다.^^

은도끼 2011-11-0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나무아빠님의 의견과 똑같은 말을 꼭 하고팠던 사람입니다^^
갑자기 생각난건데 로쟈와 함께 지젝읽기가 나오면 친필사인 이벤트를 하심이....예약구매하겠습니다~~^^

로쟈 2011-11-09 07:46   좋아요 0 | URL
이벤트까진 모르겠지만 조촐한 행사는 있을 거 같습니다.^^

2011-11-29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3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