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인문학의 무덤인가

이번주부터 격주로 주간경향에 북리뷰를 싣는다. 첫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 이미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서평에서는 나대로 중요하다 싶은 대목을 간추렸다.    

주간경향(11. 11. 15)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 

“인문학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다!” 미국의 저명한 인문학자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미래>에서 던지는 메시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예언이나 확신이 아니라 희망이다. 이 희망이 인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인문학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진지한 자기반성을 통해서 제기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물음은 자연스레 인문학이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포함한다. 문제의 발단은 한 세대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인문학은 가장 명망 있는 학문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은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원자탄을 발명하고 달 착륙 우주선까지 쏘아올린 자연과학이 급부상하여 학문의 패권을 차지한다. 가장 높은 명성과 경제적 후원을 누리게 됐다는 뜻이다. 자연과학에 뒤이어 사회과학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에 얹혀 갔고, 일부 인문학자들조차도 ‘인문과학자’이고 싶어 했다. 이렇듯 인문학을 둘러싼 학문 지형의 변화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경우 학문의 판도 변화와 함께 인문학에 들이닥친 또 다른 문제는 1970년께부터 갑자기 인문학 박사 학위자들이 빠지게 된 구직난이다. 카우프만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지목하는데, 첫째는 베이비붐 시대의 출산율이 주춤하면서 대학의 성장 또한 정체돼 버린 것이고, 둘째는 교수직이 1970년대를 기점으로 과거 25년간 젊은 사람들로 채워짐으로써 퇴임으로 인한 공석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요컨대 인구 문제와 인력 수급 문제가 ‘인문학의 위기’를 낳았다.  

대학의 팽창과 함께 미국에서는 1950년에서 1970년까지 약 2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인문학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들은 학위를 채 끝내기도 전에 대학에서 자리를 제안받곤 했다. 교원에 대한 수요가 전례 없이 증가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인문학에 대한 가수요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되었고 결국은 철학분야에서만 2000여 명의 박사학위자가 교직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예술과 인문학 분야의 박사학위자 80% 이상이 자기 전공분야에서 직업을 찾을 수 없는 현실과 직면한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고 덧붙이는데 사실 더듬어보면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경우는 미국보다 딱 한 세대 뒤인 1980년에서 2000년까지 대학이 우후죽순으로 증가했고 대학 진학율이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섰다. 인문학 교원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대학원 진학자도 증가했고 상당수는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에 교원으로 임용됐다. 하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출산율 저하와 함께 대학의 성장이 한계에 도달하고 인문학 전공자는 수요에 비해 초과 배출됐다. 카우프만의 책이 처음 출간된 게 1977년이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도 적실성을 갖는다면 이런 공통적인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이렇다고 하면 해법은 무엇인가. 특이하게도 저자는 인문학자의 유형론에서 문제의 단초와 해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인문학자는 그 마음가짐(에토스)에 따라 통찰가형과 사변가형, 저널리스트형과 소크라테스형으로 나뉜다. 각각은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문제는 어느 한 가지 유형으로 편중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학의 교수들은 점점 사변가가 되어갔고 한 시대의 신념과 도덕을 엄밀하게 따지면서 문제 삼는 소크라테스적 에토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소크라테스형의 실종은 매카시즘의 광풍과도 관련이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 여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보다 각자의 좁은 전공분야만 파는 사변가 역할에 안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대학의 인문학 연구마저도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숲’이 아닌 ‘잎사귀’ 연구에 치중하고 있는 게 전공논문 편수로 교수의 업적을 평가하는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것이 “미국의 낙선한 부통령의 비서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카우프만은 꼬집는다. 사변가들만이 득실거린다면 인문학의 미래는 없다. 인문학이 인류의 미래가 되기 위해선 인문학자들의 마음가짐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게 카우프만의 주장이다.  

11. 11. 07. 

P.S. 짐작엔 분량상 지면에서는 세 문장이 빠졌는데, 그중 하나는 "대학원 진학자들 가운데 “인문학이 의학이나 다른 유용한 전문지식들과 달리 별 쓸모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이다. '인문학 위기'가 실상은 '인문학자의 위기'라고 할 때 음미해볼 대목이다. 참고로 카우프만은 대학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것도 사변가형만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그러한 현실이 바뀔 수 있을까. 미국 대학은 과연 30년 전과는 사정이 달라졌는가. 선뜻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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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8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9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우프만은 아렌트가 학자가 아니고 저널리스트라며 평가절하하는데 로쟈 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로쟈 2011-11-09 07:48   좋아요 0 | URL
아렌트는 원래 저널리스트활동을 했으니까요. 한데, 카우프만의 분류대로라면 최소한 '통찰가'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좀 인색한 평가에요. 요즘에 아렌트 전공자는 있어도 카우프만 전공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나름의 역사적 평가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09 16:12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의 나치전력 때문에 그와 사귄 아렌트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 정서가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물론 이런 식의 평가가 올바르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로쟈 2011-11-11 09:32   좋아요 0 | URL
비판의 논거가 생각보다 자세하지 않아서 '사감'이 얹힌 게 아닐까 싶은 거죠. 하이데거의 전집이 나오는 거에 대해서도 불만스러워하고...

노이에자이트 2011-11-11 16:11   좋아요 0 | UR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굉장한 찬반논쟁을 일으켰고...아마 이런 일 때문에 카우프만은 아렌트가 센세이셔날한 것을 노리는 사람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