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기획회의(30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마감이 지나 편집자의 애를 태우며 보낸 원고인데 당초 쓰려고 했던 책이 너무 두꺼워 다 읽지 못하는 바람에 급하게 따로 읽고 쓴 글이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 2011)과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 2011)을 나란히 읽고서 백석 시 읽기에 관해서만 적었다.   

기획회의(11. 11. 05) 흰 당나귀와 나타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동녘)을 읽었다. 각각 14인의 시인과 철학자를 짝지어놓고 시를 통해 철학을, 철학을 통해 시를 읽는 책이다. 전작인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동녘)을 먼저 읽었기에 이어서 읽었다고 하면 독서의 이유로 자연스럽겠지만, 사실은 예기치 않은 독서였다. 각 분야의 전문가 22인의 글 모음집 <한국학의 즐거움>(휴머니스트)에 실린 강신주의 ‘한국의 사랑’을 읽은 것이 계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답하여 그는 “한국인의 내면을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란 생각에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꺼낸다. 여인의 이름은 조선권번의 기생이었던 김영한(1916-1999). 사랑에 짝이 없을 수 없으니 그이가 사랑한 남자는 백기행(1912-1995).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였다. ‘김영한과 백기행’이라고 하면 알아보기 힘들겠다. 백기행은 시인 백석(白石)의 본명이고, 그가 김영한에게 붙여준 이름이 ‘자야(子夜)’이다. 해서 강신주가 들려주려는 건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이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28)를 읽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시 말이다. 백석과 자야의 사례로 ‘한국의 사랑’을 읽어내는 저자를 좇아서 백석의 시 읽기를 사례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 대한 리뷰를 대신해 보기로 한다.   

 

일단 강신주는 김자야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근거로 시의 ‘나타샤’가 자야를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관계를 좀 특이하게 푼다. 시의 마지막 연을 읽어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특이하다’고 한 건 그가 이 시에서 화자 백석의 욕망 대상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석에게 자야는 분열된 존재로 보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타샤가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글쓰기 재주까지 갖춘 지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흰 당나귀는 성적 매력을 풍기는 관능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물론 정신분석적 해석이다. 백석의 의식 속에서 자야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다면 정작 분열된 건 백석의 의식 자체다. “결국 백석은 있는 그대로의 자야가 아니라 상상 속의 자야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백석은 자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사랑의 대상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다. 나타샤가 ‘지적인 여성’을 상징한다면 흰 당나귀는 ‘관능적인 여성’을 상징한다. 흔한 경우로 지적인 여성과 관능적인 여성이 각기 다른 두 여성이라면 백석의 사랑은 분열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면모가 자야라는 동일한 여성의 속성이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럼에도 강신주는 “이렇게 분열된 의식 속에서 온전한 사랑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고 적는다. 우리는 지적이거나 관능적인 여성, 어느 한쪽만을 사랑하는 건 온전한 사랑이지만 지적이면서 관능적인 여성을 사랑하는 건 온전하기 어려운 사랑인가. 하는 의문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야’와 ‘상상 속의 자야’는 무엇에 대응하는 것일까. 지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인 여성이 ‘있는 그대로의 자야’이고, 그것이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돼 있는 것이 ‘상상 속의 자야’인가. 이것은 특이하면서 좀 예외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다.  

통찰이 없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관능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백석에게 있어 자야는 나타샤의 측면보다 기생의 측면으로 더 강하게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강신주는 적는다. 어떤 관능성인가. 이에 대한 설명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 실린 백석 편에서 보충적으로 읽을 수 있다. 백석이 감각에 얼마나 민감했던 시인이었던가를 얘기하면서 저자는 특히 이 시의 의성어들에 주목한다. ‘푹푹’과 ‘응앙응앙’ 같은 의성어이다. “‘푹푹’은 눈이 내리는 소리인 동시에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고, ‘응앙응앙’도 하얀 눈을 만지듯이 나타샤를 애무하는 백석의 손길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의성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의 화자가 혹은 백석이 푹푹 나리는 밤눈 속에서 그런 연상을 떠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시의 지배적 분위기는 관능적 에로티시즘보다는 ‘쓸쓸함’에 더 가깝다. 첫 연에서 ‘가난한 나’와 ‘아름다운 나타샤’의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라는 걸 암시한 다음에 백석은 둘째 연에서 이렇게 쓴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시의 나머지 대목은 그렇게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는 화자의 취기가 불러낸 환영이다. 만약 나타샤와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 공간은 ‘여기’가 아니라 ‘어데서’이다. 그러니 그 사랑의 시제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저자가 이 시의 성격을 “스물일곱 젊은 시인이 겪고 있는 사랑의 열병이 차가운 눈발과 대조되어 낙인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애절한 시”라고 규정한 대로다. 하지만 거기서도 ‘푹푹’ 눈이 내리는 소리가 성교를 연상시키는 의성어이기도 하다면 ‘사랑의 열병’과 ‘차가운 눈발’의 대립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애절함과 쓸쓸함만이 묻어나는 시는 또 아니다. 그것은 ‘나는 나타샤를 사랑한다’는 핵심문형이 어떻게 변주돼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1연에서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라고 ‘나’와 ‘나타샤’가 행으로 분리돼 있다. 2연에서는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나’라는 주어가 빠져 있다. 3연에서는 “나타샤와 나는”이 주어로 붙어 있지만 ‘사랑’이 빠져 있다. 4연에 와서야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로 온전한 문형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5연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표현을 통해 환상을 통해서일망정 두 사람의 사랑은 ‘완성’된다. 

‘철학적 시읽기’는 보통 시를 통째로 파악하기에 이러한 ‘내러티브’에는 덜 주목한다. 대신에 저자는 백석의 시에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란 오감으로 세계를 느꼈던 시인의 ‘감각의 풍성함’을 읽어내며 이것을 일본의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과 연관 짓는다. 시와 철학을 동시에 읽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지적인 여성(나타샤)과 관능적인 여성(흰 당나귀)을 동시에 사랑하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11.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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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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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17: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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