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신간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에 대해서는 몇 개의 관련 페이퍼를 쓴 바 있는데,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창비주간논평'에 책에 대한 논평이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 필자는 시인이자 <창작과 비평>의 편집위원인 이장욱이다. 이 논평의 제목은 '카라따니 코오진과 근대문학의 '종언''(06. 05. 02)인데, '가라타니 고진'을 굳이 '카라따니 코오진'이라고 표기해주는 것은 창비사의 표기관행이자 '실천'이다. '에세이'를 '에쎄이'라고 애써 표기하는(가령,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에쎄이스트의 책상'이라고 표기하는) 이 관행/실천이 창비의 자부심이자 고집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나는 비록 동의하지 않지만). 논평의 결론은 그러한 '고집'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의 제목은 (근대)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종언'이다. 수많은 문학 위기론들이 있지만, 카라따니의 '종언'은 확실히 치열하면서도 담백한 데가 있다. '위기'라는 표현에는 어떤 각성에 대한 촉구 혹은 안간힘이 담겨 있지만, '종언'에는 그게 없다. 그의 생각에, 문학의 종언은 "단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맥락이 담겨 있다. 하나는 매체의 발달 등 다양한 역사적 변화 때문에 오늘의 문학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영향력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문학 자체가 왜소해졌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앞의 것은 역사적 조건의 문제고, 뒤의 것은 비평가를 포함한 창작자들의 주관적 상황 문제다. 물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돼 있으며, 그래서 시대적 · 윤리적 과제를 감당했던 문화적 주류로서의 (근대)문학은 제 역사적 소임을 다한 것으로 판명된다. 카라따니에 따르면, 오늘의 인간 사회가 처해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 문학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 시대는, "끝났다."

-아마도 이 주장에 대한 진지한 반응은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하나는 본래의 문학이 그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데 동의하고 문학을 떠나는 것이다. 어디로? 우리가 직면해 있는 수많은 난제들을 감당해내기 위한 운동의 영역으로. 이것은 실제로 카라따니 자신이 (비록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뉴 어쏘씨에이션 운동"(NAM)을 통해 자본주의사회의 내부로부터 다른 삶의 방식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의 종언론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새삼스럽다는 느낌까지 듦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이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이 실천적인 지점이다. 그는 '위기론'이나 들먹이며 제 존재를 확인하려는 나약한 비평가가 아닌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정말 문학을 떠나야 한다는 데 나는 동의한다. 확실히 문학에 초월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가 역사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상적 관념에는 과거의 문학이 후광으로 남아 있으며, 이 후광에 의지해서 시인, 작가, 비평가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기만족을 얻는 것은 곤란하다.

-두번째는 "종언" 같은 극단적인 표현의 문제를 지적하고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문학이 당대사회에 대해 과거처럼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혹은 "운동으로서의 문학"이 그 계몽적 소임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독자적인 "내면성"을 상실하고 "그저 오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소설의 전성기였던 저 19세기에도 그러했듯이, 문학은 이질적인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대에 스며들고 당대에 접속하며 당대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독자층의 이탈 등 오늘의 객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문학의 '죽음'이 확실해 보인다면?

-이 사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미 주변화된(죽어버린) 시와 소설들은, 오히려 그 주변성(죽음)으로 인해서, 더 첨예하게 삶과 세계를 대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아가, 이 주변성(죽음)의 자유로움이야말로 정확하게 오늘의 문학이 지닌 가능성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농담처럼, 이렇게 말해보자. 근대문학이 죽었다, 그러자 완강한 체제를 끈질기게 교란하는 유령의 문학이 태어났다! 유쾌하고 불편한, 유령으로서의 문학. 그것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이 유령의 존재 자체가, 그가 교란하려는 거대한 씨스템의 일부라는 데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식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주관적 반성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일 터이다. 실제로 카라따니의 종언론은 오늘의 문학에 대해 여러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지적 · 도덕적 요청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문학에 대한 질타이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업성에 잠식된 문학에 대한 질타이며, 리스먼(D. Riesman) 식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타인지향형" 문학에 대한 질타이다. 이 질타에서 창비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주류 문학정론지로서의 <창작과비평>은 그 위상에 합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여전히 지난 시대의 "후광효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창작자로서 나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에 이르고자 했는가? 허망한 차이를 유의미한 개성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에는 "시차"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이곳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기갱신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런 이질적인 생각들이 혼재된 상태에서 나는 책을 덮었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세 가지 반응과는 별개로, 카라따니식 종언론을 돌파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 '문학 자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종언"을 확신하게 된 계기를 한국문학의 사례에서 찾고 있지만, "종언"이라는 자극적인 단정으로 우리 문학이 온전히 규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늘의 문학은 저 불가피했던 계몽과 독백의 시대를 넘어서, 아니 그 시대들을 등에 지고, 여전히 전진중이다.

-오늘의 서정시는 압도적으로 규격화된 도시적 삶의 '바깥'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언어로 환기하고 있으며, 가부장적 언어를 탈피한 시들은 다양한 일탈자들의 영혼을 새로운 언어에 각인시키는 중이다. 소설은 어떤가. 오늘의 삶과 역사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수행하는 소설들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으며, 새로운 시점과 인칭을 통해 스스로 ‘질문’이 된 소설들이 있으며, 또 유희 자체를 부정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소설들도 있다. 이들은 서로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 문학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하는 중이다. <트랜스크리틱>에서 카라따니가 쓴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한국문학은 여전히 끊임없는 "이동(移動)"과 "전회(轉回)" 중에 있다.

-이런 신뢰와 애정은 문학을 떠날 수 없는 자의 자기위안에 불과한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라따니의 표현을 변용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문학으로 돌아오라.

(*)"이 책을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식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주관적 반성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일 터이다"라는 데 이 논평의 핵심이 있다.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그러한 방식이 왜 '가장 생산적'인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역사적 조건'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창작자들의 주관적 상황'의 문제는 대개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문제는 이 '진정성'의 존재 자체가, 그가 돌파하려는 거대한 시스템(종언적 상황)의 일부라는 데 있겠지만 말이다...

06.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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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5 14:10   좋아요 0 | URL
카라따니 코오진 이라고 하나봐요.?

페일레스 2006-05-05 14:30   좋아요 0 | URL
자꾸 때리다님/ からたに こうじん을 '가라타니 고진'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쓴 것이죠. 제2장 '표기 일람표'를 보면 어두에서 'か'를 '가'로 읽는다고 되어 있고, 제3장 제6절 '일본어의 표기'를 보면 '장모음은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Karatani Koujin이 가라타니 고진이 된 겁니다. 반면에 창비 표기법은 그 외국어의 음을 그대로 살린 거라고 볼 수 있겠죠.

yoonta 2006-05-05 17:05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고진이나 카라따니 코오진이나...외국어음을 그대로 살린 표기라고는 별수없죠..외국어음을 그대로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그 나라문자로 번역하지 말고 쓰는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우리 나름의 룰 대로 발음하는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런점에서 로쟈님의 의견(창비식 표기에 동의할수없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로쟈 2006-05-06 00:14   좋아요 0 | URL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해준다는 '원음주의'는 여러 차례 지적한 대로, 한 가지 '원칙'이긴 하지만, 결코 만족할 만한 원칙은 아니며 온전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밝히자면, 가령, 발음에는 '강세'를 비롯해서 갖가지 발음규칙들이 개입하는데, 그걸 반영하기 위해서 형태 표기를 포기한다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표기의 대원칙은 '현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파리(Paris)'의 창비식 표기는 '빠리'인데, 이게 현지음에 가까운 것도 아닙니다. '빠히'라고 해야 아마 더 가까울 것입니다. 즉, '빠리'는 '파리'와 '빠히' 사이의 어정쩡한 표기일 따름입니다. 문제는 그걸 대단한 '원칙'인 양 과시/과장할 때입니다. 굳이 '에쎄이스트'를 고집하는 건 보기에 불편합니다...

페일레스 2006-05-06 00:00   좋아요 0 | URL
yoonta님, 로쟈님/ 제가 쓴 댓글에 어폐가 좀 있군요. 창비 표기법은 그 외국어의 음을 그대로 살린 거라고 (창비에서 생각하는) 거겠죠. 저는 얼마 전에 '원음주의'란 닿을 수 없는 이데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외래어 표기법으로 전향(?)했습니다. 저도 로쟈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지난 토요일(*이 글은 2003년의 2월 중순에 쓴 것이다) 일간지 북리뷰란 두 곳에서 지난번에 소개한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가 1면에 올랐다. 바로 한겨레와 조선일보에서. 언젠가 이진경의 <노마드>도 두 일간지는 1면에 올렸었는데, 책을 보는 안목이 비슷한 것인지?

조선일보의 경우는 유독 학술적 유행에 민감하다. 동인문학상을 접수한 경우와 마찬가지일 텐데, 학술/사상 분야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혹은 과시하기 위해서인 듯싶다. 들뢰즈나 레비스트로스의 책을 크게 소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들의 학술적 권위(명성)을 조선일보와 동일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얼마전 쿤데라님이 소위 '수집주의'에 대해 비판한 바 있는데, 실상 그 수집주의의 심리적 메커니즘에도 그러한 동일시에의 욕망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일상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유명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그 욕망은 야콥슨/라캉의 용어를 빌면, 환유적이다.(그리고 물론 그 욕망은 성취되지 않는다! 라캉의 공식이 보여주듯이.)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반가웠던 것은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왕>(동문선)이다(*연극과인간 버전도 조금 나중에 출간됐다). 나는 이 작품을 오래전에 밀란 슬라덱의 마임 공연으로 먼저 본 적이 있다. 예술의 전당에 공연을 보러 갔는데, 슬라덱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그의 공연 비디오를 대신 보게 된 것. 그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이, 바로 원조 부조리극쯤에 해당하는 <위뷔왕>이었다(그때는 '우부대왕'쯤으로 이해했다). 그러다가 작년인가 마침 영역본을 구할 수 있었고, 이번에 우리말 번역이 나왔으니 이제 시간을 내서 즐기는 일만 남았다.

내가 알기에 <위뷔왕>의 초연은 굉장한 스캔들이었고, 이후에 자리는 위비왕 연작을 썼는데, 번역본의 분량으로 봐선 한 작품만이 번역된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감상과 함께 다루기로 하겠다. 참고로, 자리와 <위뷔왕>에 대해서는 신현숙의 <20세기 프랑스 연극>(문학과지성사, 1997)이 요긴하다.

 



 

 

<위뷔왕>과 함께 동문선에서 펠릭스 가타리의 <세 가지 생태학>이 번역돼 나왔다. 마찬가지로 얇은 분량에 비싼 책값이다. 들뢰즈와의 공저들을 뺀 가타리만의 책으론 <분자혁명>(푸른숲, 1998)이 있지만,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이 책은 조만간 구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 돈들어갈 구멍은 막을 수가 없다!). 때문에 이 신간에 대해서도 뭐라 말할 수 없다. 누군가 그의 작업에 대해서 리뷰를 해주었으면 싶다. 참고로,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최명관 역, 민음사)는 김재인의 새번역으로 다시 출간된다고 한다(<안티 오이디푸스>로). 시기는 올연말쯤이고 출판사는 같은 민음사이다(*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번역의 오류들이 개선되고 더 좋은 번역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러한 노력이 일부 저자나 책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나 도스토예프스카야(1846-1918)의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한 나날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두번째 아내인 속기사 안나의 회고록을 번역한 것이다. 책의 러시아초판은 1925년에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인 L. 그로스만의 편집으로 나왔고(800쪽 정도 분량) 2판은 더 축약된 형태로 1972년에 튜니마노프 등의 편집으로 나왔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우리말 번역은 이 2판을 토대로 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영역본은 1975년에 B. 스틸만의 편역으로 나왔고, 이 책을 옮긴 것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문음사, 1986)이다. 분량으로는 <나날들>이 <아내>의 2배 가량 된다.(*러시아어본을 나는 재작년에 모스크바에서 구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1859-1952)의 <경험으로서의 예술>(책세상문고)이 번역돼 나왔다. 듀이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은 14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문고본은 처음 3개 장만을 번역해 싣고 있다. 문고본 분량 때문인 것 같은데, 좀 유감스러운 일이다. 듀이 관련 연구서들은 역자가 더 읽을 만한 책 목록에서 소개하고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거기에 빠진 것이 이 책의 완역본이 이미 나왔었다는 사실인데, <예술론>(희성출판사, 1986초판, 1990재판)이 그것이다. 이 책을 서점에서 샀는지 헌책방에서 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책장에서 먼지묻은 책을 꺼내 새로 나온 번역본과 잠시 비교해 보았다(물론 새 번역의 가독성이 더 좋은 편이다).

교육철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은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교육과학사, 1996)도 이미 번역돼 있다(580쪽 분량의 두툼한 책이다). 하지만 역시나 전체적으론 소략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듀이 철학에 대한 업그레이드된 해석은 신실용주의를 제창하는 리처드 로티의 여러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로티의 듀이 다시 읽기는 라캉의 프로이트 다시 읽기에 비유될 수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1843-1941)의 <황금가지>(한겨레신문사)가 다시 번역돼 나왔다. 물론 축약본이지만,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래도 절판된 삼성출판사판을 대신해서 <황금가지>의 우리말 표준번역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듯하다. 물론 여기에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까치글방, 2001)가 곁들여져야 구색이 맞는다.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를 읽으며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는데, 그나마 아직까지 이 분야에 무관심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그리스신화 열풍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권도 사지 않은 때문. 최근 중국신화까지 가세하고 있는 형편인데, 신화 혹은 신화론에 관심을 두려는 독자는 먼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참고로 아주 극소수의 한국 신화 관련 서적 중에 표준적인 것은 서대석의 <한국의 신화>(집문당, 1997)이다.

 

 

 



끝으로 자연과학서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은 '인류의 성과 지능의 진화'라는 부제를 단 앨리슨 졸리의 <루시의 유산>(하나번역출판)이다. 저자는 국제 영장류 동물학회장을 역임한 진화생물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500쪽이 넘는 분량이 나로선 아직 부담스럽다(물론 나는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 한권을 고르라면, <루시의 유산>과 접전을 벌이다 떨어질 만한 책이 하워드 블룸의 <집단정신의 진화>(파스칼북스)이다. 450쪽이 넘는 이 책은 한마디로 '개체 선택주의'나 '유전자 선택주의'에 맞서서 '집단 선택주의'를 기초로 한 진화론을 주장하는 책이다. 저자의 경력이나 주장으로 봐서 '신과학'류의 책이 아닐까 의심이 갔는데, 저명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추천이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사이비는 아는 듯싶다. 같은 저자의 <루시퍼 원리>(파스칼북스)도 번역돼 있다. 하지만 나로선 이 두 과학서를 읽을 만한 여력이 당분간은 없을 것 같다...

 

 

 



덧붙임: 새로 나온 시집 두 권을 적어둔다. 먼저, 황동규의 신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0년에 나온 <버클리풍의 사랑노래>에 이어 딱 3년만에 나온 셈. 사적인 인연이 겹쳐서 황동규의 거의 대부분의 시집을 사서 읽었지만(하지만/때문에 그의 전집은 안 갖고 있다!), 나는 그의 초기시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김춘수의 평에 의하면, 황동규는 당대의 테크니샹이다. 그러니까 기교파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노년(?)의 그의 시들은 자못 인생파적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시적 어법(기교상으로 그의 시의 핵심은 긴장tension이다)은 여전하지만, 선불교를 연상시키는 그 '인생파적' 깨달음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나왔으니까 사두어야겠다.

어제 문화일보를 보고 안 것인데, '노가다 시인' 김신용의 <버려진 사람들>(천년의 시작)이 다시 나왔다. 공사장 품팔이를 하다가 우연하게 등단하게 된 그의 데뷔작인데, 1988년에 고려원에서 나왔다가 한달만에 절판된 시집. 한창 시집들을 많이 사던 때였고 서점에서 본 기억도 있지만, 그때는 사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의 두번째 시집인 듯싶은 <개같은 날들의 기록>(세계사)만을 갖고 있다. 박노해나 백무산이 정통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 분류된다면, 김신용은 룸펜 프롤레타리아 시인쯤 될까? 마치 초기 고리키의 경우처럼. 요즘은 드물어진 시적 정서와 만날 수 있을 듯싶다. 혹은 88년 여름 거의 매일같이 바닷가 백사장을 헤매던 청춘의 한 페이지와도...

2003.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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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지난 주 또한 눈에 띄는 책이 많지 않았다(*이 글은 2003년 1월말에 쓴 것이다). 서점에 들러 그 자리에서 몇 권 사는 걸로 충분할 정도였으니까(물론 밀린 책들은 적잖고, 2월에 그 중 상당수를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계획으로 있다). 개인적으로 이럴 땐 도서관의 책들을 대출해서 제본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을 쓴다. 지난 한달 동안만 10여권 이상 제본하고 복사한 듯하다. 움베르토 에코도 지적한 바 있지만, 복사의 문제점은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는 절대로 복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우리가 아는 쟁쟁한 학자들 또한 생애의 대부분을 복사와는 전혀 거리가 먼, 필사의 시대를 살았다. 환갑이 아직 먼 한 '젊은' 국문과 교수도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 2만장의 카드를 작성했다고 한다(그래봐야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인데!). 하루종일 필사할 수 있는 분량이래봐야 오늘날 1-2분이면 복사할 수 있는 분량이다. 그렇지만, 나를 포함한 요즘 세대는 대부분 그것조차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복사해 두는 걸로 읽기를 대신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수집가보다는 애독가가 윗길이라는 사실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책을 모으는 즐거움이 대신할 수는 없다! 지난주에 책을 낸 '수집가' 조희봉씨도 <전작주의자의 꿈>(함께읽는 책) 일간지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대담 회고록인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이 나왔다. 원서는 1988년에 나온 책이고, 대담자는 디디에 에리봉. <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인 에리봉은 잘 알려진 푸코 전기(<미셀 푸코>, 시각과언어, 1995)의 저자이면서, 이런 분야의 전문 대담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곰브리치와의 대담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 1997)이 그것인데,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알라딘 서평란을 참조하시기 바람).

레비스트로스의 책은 지난주 책소개들에서 다 빠져 있는데, 아마도 출판사측에서 신문사들에 책을 미처 돌리지 못했기 때문인 듯싶다. 어쨌거나 이 책은 가장 좋은 레비스트로스 입문서이다(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대담이나 자서전들을 아주 좋아한다). 레비스트로스를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주경복의 <레비스트로스>(건대출판부, 1996) 혹은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스트로스>(시공사, 1998)와 함께 읽는 게 좋을 거 같다.

그의 책으론 98년에 완역 출간된 <슬픈 열대>(한길사)가 가장 많이 읽히지만, 이론적인 주저에 해당하는 것은 <구조인류학>이다. 나는 2권짜리 영역본을 갖고 있는데, 우리말로는 김진욱의 번역으로 종로서적에서 1권이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더불어 <야생의 사고>(한길사, 1996)도 번역돼 있다. <신화의 의미>도 <신화를 찾아서> 등으로 번역돼 있고, 오래전 걸로는 <인종과 역사>의 문고본 번역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전체적으론 빈곤하기 짝이 없다. 그의 후기 주저인 <신화론>(혹은 <신화학>)은 전 4권에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아마도 우리말 번역서를 기대하기는 힘들 거 같다(*한데, 출간됐다! 알다시피 2004년에 <신화학> 1권이 나왔고, 나머지 권들도 차례로 나올 거라고 한다). 우리말 번역서라면 아마도 3,000쪽이 넘어갈 듯싶다. 그의 데뷔작이자 박사학위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만 해도 500쪽이 넘는다(친족 개념이 희박한 나로선 이 책을 굳이 읽을 생각이 아직 없긴 하지만). 참고로, 인류학자 이광규 교수가 레비스트로스의 열혈팬으로서 그의 이론을 한국의 친족/가족 관계에 적용한 책들을 쓴 바 있다.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해설서/연구서로는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90)을 참조할 만하다(초판이 8,000원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25,000원이다! 그만큼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레비스트로스부터 푸코, 알튀세르, 라캉을 모두 읽은 한국 학자는 내 생각에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이 책에서 김교수가 인용한 문단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입장을 'superrationalism'이라고 부른다. 번역하자면, '초강력합리주의'쯤 될까?('초합리주의'라고 번역하는 건 좀 약하다!)

미리엄 글룩스만의 <구조주의와 현대 마르크시즘>(한울, 1994)도 절반은 레비스트로스에 할애하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알튀세르.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은 여성학자 글룩스만의 박사학위논문이다.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1997)에서도 구조주의 파트에서 소쉬르 다음으로 레비스트로스를 다룬다. 하지만, 언젠가 서평에서 쓴 대로,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수준 이하다. 어제 소쉬르에 관한 부분을 원문 대조해서 다시 읽어봤는데, 똑똑한 학부생의 번역보다 못하다(역자는 소쉬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 보인다). '능기' '소기'를 거꾸로 번역하는 건 이 책에서 아주 흔한 오역의 사례일 뿐이다.

대담에서도 나오지만, 레비스트로스는 현장 인류학자들로부터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그에 대한 자기변호를 또한 이 대담에서 읽을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 비판으로 아주 유익한 것은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민음사, 1996)이다. 상당한 무게 있는 이론서인데, <문화의 수수께끼>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해리스의 이론적 입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해리스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이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슬픈 열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거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자가 아닌 작가로서도 이름이 남을 만한 학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 그 레비스트로스가 아직 살아있다! 지난 80년대 초반인가 우리나라를 다녀가기도 했던 이 노인류학자는 1908년생으로 메를로퐁티나 시몬느 보부아르와 동년배이다(메를로퐁티와는 교생실습도 같이 했다). 노화학자들 말로 80세까지는 건강관리를 잘하면 살 수 있지만, 100세 이상 사는 건 (장수)유전자 덕분이라고 한다. 아마도 작년에 세상을 뜬 가다머와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 또한 장수 가계에 속하는 모양이다. '역사적 인물들', 책 속의 인물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간혹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레비스트로스 얘기가 너무 길었다. 나머지는 짧게 줄이자.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후, 2003)이 번역돼 나왔다. 작년에 나온 <해석에 반대한다>(이후)에 이은 책이고, 앞으로 '투명성'에 대한 그의 최신작으로 이어질 거라고 한다. 손택은 미국을 대표할 만한 에세이스트 비평가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에 대해서는 지난주 일간지 서평들에서 많이 다루어졌기에 군말하지 않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좀 긴 리뷰를 쓰고 싶다.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백년글사랑, 2003)이 나왔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목차를 검색해 보니, 예상대로 이전에 묶였던 산문집(<생명의 황홀>)과 많이 겹친다. 때문에 나로선 새로 살 생각이 없는 책이지만(아마 표제글 외 몇 편 정도가 내가 안 읽은 글일 듯싶다), 그의 산문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권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소개한다. 황동규와 더불어 정현종 또한 대단히 뛰어난 산문가이다. 어줍잖은 글들을 읽느니 그의 글을 한번 읽어보시길.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문학동네, 2003)이 나왔다. 연대출신인 성석제는 기형도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정현종의 제자이기도 하다. 시로 데뷔했지만, 엽편 소설로 이름을 날리다가 급기야는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는데, 그의 장기는 이 신작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다. 사실 나는 그의 책을 아직 한권도 사보지 않았지만(검토단계이다), 그가 우리시대의 재능있는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언젠가 <씨네21>에 실린 칼럼을 읽고 책값 3,000원 벌었다는 생각을 했다).



 

 

 

끝으로, 작년 연말에 나온 대학출판부 책 2권을 적어둔다. 하나는 콘라트 로렌츠의 <현대문명이 범한 여덟 가지 죄악>(이대출판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은 이전에 문고본(삼성미술문화재단) 등으로 나왔던 책이다. 역자의 변을 들어보니, 다시 번역해 낼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고, 나도 이전의 문고본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없기에 다시 손에 들었다. 로렌츠는 니코 틴버겐, 칼 폰 프리슈 등과 더불어 1973년에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한 동물행동학 1세대 학자이고, <공격성에 대하여> <솔로몬의 반지>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물론 올초에 결정판 전기라 할 <콘라트 로렌츠>(사이언스북스, 2006)까지 출간됐다).

다른 하나는 백낙청 외, <성찰과 모색>(서울대출판부, 2002). 부제는 '영미문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설정을 위하여'로 돼 있고, 6편의 연구논문이 실려 있다. 현단계 한국영문학계의 문제의식과 그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책이다...

2003.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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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05 11:02   좋아요 0 | URL
전 언제쯤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라고 쓰려다, 생각해보니 전 이런 책을 끝내 읽지 못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버렸어요. 어려운 책을 갈수록 기피하게 되더라구요... 아무튼 리스트 중에서 성석제 책은 읽었답니다.

로쟈 2006-05-05 17:4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못 읽었습니다.^^

마태우스 2006-05-05 23:17   좋아요 0 | URL
아아, 그렇군요!! 하여간 로쟈님이 고른 책은 뭔가 달라 보여요
 

 

 

 

 

오늘자 한국일보(06. 05. 04)에 서경식(1951- ) 도쿄경제대 교수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렇게만 말해도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만, 보다 친철하게 말하자면 <나의 서양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기행> 등의 책을 쓴, 가장 최근에는 <난민과 국민 사이>를 쓴 저자 서경식을 말한다(그의 불행했던 가족사에 대해서는 굳이 더 적지 않는다).

내가 처음 읽은, 그리고 유일하게 읽은 책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이지만(벌써 14년전이다. 이 책은 이후 200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지속적인 관심은 유지하고 있었더랬다. 얼마전에는 <난민과 국민 사이>(돌베개, 2006)를 '최근에 나온 책들'에 올려놓기도 했는데, 방학때쯤 읽을 짬을 내볼까 생각중이다. 이 인터뷰는 그 '워밍업'으로 적합해 보인다.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아스포라(diaspora). 원래는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흩어져 사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켰던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자기가 속했던 공동체를 떠나도록 강요된 사람 모두를 가리킨다. 굳이 우리 말로 바꾸면 ‘역사적 이산 민족’에 해당한다.

-재일동포 2세인 서경식(55) 도쿄경제대학 교수. 그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재일동포 문제에 천착해온 사람이다. 올초 발간된 <디아스포라 기행>이나 최근 나온 <난민과 국민 사이> 모두 그의 일생의 주제인 ‘디아스포라’에 닿아 있다. 하인스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혼혈인, 외국인 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그를 만나 우리의 관심권 밖에 있는 재일동포 문제에 관한 의견 등을 들어보았다.

-그렇게 오고싶어 했던 한국에 오셨는데, 어떤 활동을 하실 생각입니까.(그는 성공회대 연구교수 자격으로 4월초 한국에 왔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싶습니다. 한국인의 사고와 생활방식,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어요. 제 나이 벌써 50대 중반이니, 앞으로 내 조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 기회도 없을 겁니다. 저를 포함한 재일조선인(그는 재일동포 대신 재일조선인이라고 표현했다) 2, 3세는 대부분 따로 한국어를 배우지 못해 한국어가 서툰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익히고 싶습니다. 제가 책을 몇 권 냈지만 모두 일본어로 썼어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한국에 번역됐는데, 그러자니 뜻이 제대로 전달되는 건지 저도 궁금하고 좀 답답했습니다.”

-한국에 온 뒤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사실 제법 고생 좀 했습니다. 국적은 분명 한국인데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이유로 휴대폰 계약조차 힘들었어요. 게다가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일본이 발행한 외국인등록증명서를 요구했습니다. 이 증명서는 재일외국인 통제가 주목적이기 때문에 과거 한국 정부가 일본측에 폐지를 요구했던 겁니다. 그런데도 그런 증명서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한국 국적의 재외국민을 통제의 대상, 관리의 대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제 한국어 발음이 좀 어눌해서 그런지 저를 좀 자연스럽게 대해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류의 불편은 어느 사회나 있는 것이므로 저는 이 역시 우리 조국에서 하는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 교수에게 조국은 어떤 존재입니까.

“일본에서 저는 국가가 없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국가란 국민에게 의무를 지우기도 하지만 반대로 국민을 보호하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 같은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물론 귀화를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귀화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거부한 것입니다. 차별과 멸시가 심하면 심할수록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에 밀려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제가 말한 조국은 국가 기구가 아니라 사람과 문화를 일컫는 겁니다.

-조국의 분단은 재일동포에게도 부담이 될 것 같은 데요.

“그렇습니다. 제 할아버지가 충청도 지방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1928년입니다. 살만 했다면 낯선 곳으로 갔겠습니까. 저희 집안 뿐 아니라 일제시대에 200만명 이상이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갔습니다. 현재의 재일조선인 대다수는 그때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해방이 되고 남북의 단독 정부 수립,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되지만 재일조선인 사회는 한동안 분단되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친척이나 친구가 민단 소속도 있고, 조총련 소속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60년대 이후 재일조선인 사회도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남북이 통일을 이룬다면 우리 재일조선인들도 자유롭게 한반도의 남과 북을 오가며 조국을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재일조선인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비해 지위가 많이 올라간 것 아닙니까.

“전에는 공무원, 교수, 변호사, 대기업 직원 등은 되기가 어려웠습니다. 좋은 직업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극심한 가난을 겪은 사람이 많습니다. 사회 관습적으로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인과 결혼하려면 부모가 말리는 일이 많았고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따돌림이 심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요. 제한적으로나마 공무원이 될 수 있고 건강보험과 연금에도 가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타성은 아직도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인에게 재일조선인은, 식민지배와 이에 따른 남북 분단 등 그다지 직시하고 싶지 않은 자신들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껄끄럽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일조선인 1세는 거의 없으며 2, 3세가 80~90%입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밖에 모릅니다. 우리 말도 잘 못하지요.”

-일본내 한류 바람과 독도 문제가 재일동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한류가 한국과 일본의 상호 이해에는 도움을 줄지 몰라도 재일조선인의 삶에는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독도는 일본이 권리를 주장하면 안 되는 곳입니다.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두 나라가 마찰을 빚을 때마다 살기가 어려워 집니다.”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경제 통계를 인용하면서 일제 때 고도성장이 이뤄졌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또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수치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수치가 보여주지 못하는 생생한 개인의 체험이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제 때 일본으로 200만명 이상이 건너가 이 가운데 150만명 정도가 해방 후 귀국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를 포함한 많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태어났고 차별 속에서 자랐습니다. 만주로도 100만명 이상이 나갔습니다. 그들이 만주에서 얼마나 어렵게 농지를 일구었는지는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시 한국 인구의 6분의 1 정도가 딴 나라로 떠돌았습니다. 일제 하의 한국이 그만큼 먹고 살기 어려웠다는 것이지요.”

-문화 예술 전반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문학과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게다가 60, 70년대에는 차별 때문에 재일조선인이 직업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진입이 자유로운 문학, 미술 등을 많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소설가도 꿈꿨고 그림과 영화도 동경했습니다. 지금도 일본의 문화계, 체육계에 재일조선인이 많은 것도 저와 비슷한 이유 때문입니다.”

-저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국내에서도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미술은 따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까.

“학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차별 많은 일본에서 현실 문제를 잊고 그림을 감상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지고 사심없이 작품과 대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일보가 5월20일부터 피카소 작품전을 한다고 하는데요, 저는 피카소 그림에 매료돼 22년 전 일본에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건너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전시된 ‘게르니카’를 직접 보겠다는 일념으로요. 직접 본 ‘게르니카’는 책이나 화첩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주었습니다. 프랑코 정부에 맞서 싸우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야만 했던 피카소가 저의 관심 영역의 하나인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에 더 각별한지도 모르겠습니다.”(대담=박광희기자)

06. 05.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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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로소 2003년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세월은 지나간 것만으로도 코믹하군!)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은 많지 않다. 이럴 땐 다행스러우면서도 좀 심심하다. 물론 10년 전쯤보다는 사정이 좋아진 것만은 틀림없다. 그 시절엔 매일같이 서점에 들렀어도 '신간'은 가물에 콩나듯했으니까.

 

 

 

 

그래도 눈에 띈 책은 파스칼 브뤼크네르(1948- )의 <번영의 비참>(동문선)이다(*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이 저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를 나는 알렝 핑켈크로트와 함께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그래서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책은 모두 산다. 특이하게도 매 2년마다 소설과 에세이를 번갈아가면서 낸다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책은 모두 7권이다.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과 <영원한 황홀>(동문선, 2001), 그리고 <번영의 비참>(원저는 2002)이 에세이이고, <비터문>(산하, 1993), <출생파업>(하서, 1994), <새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작가정신, 2000), <아름다움을 훔치다>(문학동네, 2001)이 소설이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산 책은 <출생파업>인데, 물론 그 당시엔 이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책도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아, 브뤼크네르! 하게 된 것이 <순진함의 유혹>을 읽고서이다(이 책에 대한 좀 빈곤한 서평을 쓴 바 있다). 그 책은 아직도 내가 읽은 에세이들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걸작이다. 이후에는 당연히 '브뤼크네르의 모든 책'이다. 해서 나는 뒤늦게 수소문했지만 구하지 못한 <비터문>(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영화의 원작소설이다)을 빼놓고는 그의 책을 다 갖고 있다(*2005년말에 나온 <길모퉁이에서의 모험>까지 포함해서).

이번에 나온 <번영의 비참>은 '종교화한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대략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부르주아(학자건 장사꾼이건)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들을 '천국의 얼간이들' 혹은 '배부른 천민들'이라고 부른다(이 또한 마음에 든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 책을 몇 쪽밖에 읽지 않았지만, 역자의 무식이 좀 근심스럽다. 영문과를 나오고 통역대학원을 나왔다는 역자는 시작부터 노벨상 수상작가인 '네이폴(혹은 나이폴)'을 '나이파울'로 옮겨서 찜찜하게 만들더니, 여러 고유명사를 매끄럽지 않게 옮겼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역자가 경제학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관련번역서들에 대해서 무지하며 읽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경제학자로서 클린턴 행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던 '로버트 라이시'(Reich)를 '로버트 라이히'로 옮기고, 우리말로도 번역된 그의 신간 <부유한 노예>(김영사, 2001; 원제는 '성공의 미래')를 <완전한 미래>(불역본 제목이다)로 옮겼다(나는 우리 번역서와 번역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민음사, 2001: 원제는 '접속의 시대')을 <접근의 시대>로 옮겼다(최소한 '접속의 시대'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대표작인 <거대한 변환>(민음사, 1997)은 <대변혁>이라고 옮겼다(최소한 '거대한 전환'이라고 옮겨야 하다). 그리고 갤브레이스의 책들의 번역도 우리말 번역서들을 참조하지 않았다. 이상의 지적은 주로 책의 말미에 붙은 '원주'에 관한 것인데, 본문을 읽는 데 큰 지장을 줄 거 같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번역서가 되려면 이러한 디테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세기 러시아 작가 플라토노프(1899-1951)의 단편들이 세계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번역돼 나왔다. 제목은 <귀향>이고 표제작 외 서너 편의 단편이 책으로 묶였다. 플라토노프는 불가코프와 함께 20세기 후반에 '발견'된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다. 그의 대표작은 장편소설인 <체벤구르>인데(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란 평을 듣기도 했다(*<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다). 내친 김에 <체벤구르> 또한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연극의 한 장면.

<귀향>에 실린 단편들 중에 '포투단 강'은 예전에 <러시아문학>이란 저널에 실린 적이 있는데, 작가의 금욕주의를 떠올리게 한 기억이 있다. 읽을 만한 소설들이기에 일독을 권한다.

 

 

 

 

<현대과학철학논쟁>(아르케, 2002)의 수정 번역판이 나왔다. 원제는 <비판과 지식의 성장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으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 출간 이후 과학적 지식의 합리성/객관성을 놓고 벌어진 쿤과 포퍼 진영의 일대 격돌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학술서로선 상당히 오래전의 책이기 때문에(그게 단점은 아니지만) 이후의 논쟁에 대해서 보완해줄 수 있는 책이 필요한데, 지아우딘 사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 2002)이 거기에 적합하다. 사르다르 또한 내가 주목하는 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녀의 책은 얄팍한 분량에 비해서 상당한 정보량을 갖고 있는 아주 잘 씌어진 책이다.(*그의 책들 가운데 <문화연구>는 번역이 불만족스러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끝으로 존 피스크의 <대중문화의 이해>(경문사, 2002)가 번역돼 나왔다. 피스크의 책으론,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와 <TV읽기>(현대미학사, 1994)가 이미 나와 있다. 피스크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순전히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원제는 '커뮤니케이션학 입문') 덕분이다. 그 책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커뮤니케이션학 입문서이면서 가장 좋은 기호학 입문 교재이다(우리 번역본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긴 하다). 나는 군더더기말이 많은 교재를 꺼리는 편인데(맨투맨 같은 영어교재), 피스크의 책은 아주 간결하며 설명이 압축적이다. 그리고 다른 기호학 책들이 자세히 다루지 않는(이건 치명적인 결함인데) 기호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다룬다.

움베르토 에코가 정의한 대로, 기호란 "거짓말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때문에, 거짓말로서의 기호와 이데올로기의 관련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것은 기호학에서 아주 핵심적이지만, 불행하게도 에코를 비롯한 기호학 이론서나 교재들에는 그러한 내용이 빠져 있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만으로도 피스크의 책은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나 또한 그러한 교재를 써보고 싶다). 새로 나온 <대중문화의 이해>에 눈길을 주는 건 바로 그 피스크의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 신뢰한 사람에 대해선 인심이 후한 편이다...

2003. 0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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