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을 다시 들먹이게 된 건(*이 글은 2004년 2월말에 씌어졌다), 순전히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Blank Slate>(사이언스북스) 때문이다. 무려 900쪽에 이르는 이 신간은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에 이어지는 책인데, 아침에 어제일자 문화일보를 보고 오늘 서점에서 실물을 확인했다.

 

 

 

 

촘스키만큼 유명한 이 언어학자 혹은 인지과학자의 책들은 <언어 본능>(그린비, 1998)이 번역돼 있지만(*2004년 소소에서 재출간됐다), 더 많이 번역소개되어야 한다. 다니엘 데넷과 함께 '핀커의 모든 책'이라 할 만큼 그의 책들은 수준있는 지식과 교양, 그리고 유익한 문제의식으로 넘쳐난다. 이런 교양서들은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똑똑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니 읽을 도리밖에(물론 분량에 대해선 할말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 어느 분이 번역중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신바 있기 때문에 책의 출간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출간소식이 반갑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책값(40,000원)보다는 책제목 때문이다. 물론 책값이 원서보다 두배 가까이 비싼 건 부담스럽지만(원서의 경우 핀커의 모든 책은 염가본이 나와 있고, 또 중고로는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로크의 'tabula rasa'를 의역했다는 'blank slate'를 꼭 '빈 서판'으로 옮겨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제목은 책의 얼굴이거늘). 잘 아는 바대로, '타불라 라사'(혹은 창비식 표기로 '타불라 라싸')는 '백지(상태)'란 뜻이고, 모든 철학교양서 및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냥 '타불라 라사'라고 하든가(이게 차라리 '서판'이란 말보다는 친숙하다),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서판'이란 말은 글씨를 쓰는 판이 아니라, 글씨를 쓸 종이를 깔아놓기 위한 판을 말한다. 이게 원의에 맞는 것인지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글씨판' 같은 말 대신에, 잘 쓰지 않는 '서판'을 번역어로 선택한 것은 아쉽다. 영한사전에 'slate'는 글쓰기용 '석판'으로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석판'은 '서판'과는 다른 것이다(전자는 글씨를 쓰는 판이고, 후자는 글씨를 쓰기 위한 판이다). 이것이 내가 이 제목에 대해 찜찜해 하는 이유이다. 앞으로 이 책을 거명할 때 매번 '빈 서판'이라고 해야 하다니...

 

 

 



두번째 책은 (다빈치)이다.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1898-1972)의 선집으로 그의 판화작품들과 글, 그리고 해설을 모은 책이다. 사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겨지게 된 계기는 호프스테터의 출세작 <괴델, 에셔, 바흐>(까치글방, 1999) 덕분이 아닌가 싶다(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호프스태터의 책은 1980년 퓰리처상 수상작인데, 과감한 가설과 흥미로운 논증으로 이루어진 수준급의 교양서이며, 사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의 에셔 파트는 거의 전적으로 이 책에 의존하고 있다(초판에서 진중권은 참고문헌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런 에셔의 책으로 이 신간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세번째 책은 베른하르트 타우렉의 <레비나스>(인간사랑)인데, 제목대로 독일에서 나온 레비나스 입문서이다. 나는 이런 류의 독일산 입문서에서 별로 재미를 못봤기 때문에, 이 책의 경우도 적극 추천하는 입장은 아니다. 먼저 읽는 분의 소감을 기다린 연후에야 구입을 하든지 말든지 할 생각이다(*나중에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역시나 별로 읽을 만하지 않은 책이었다). 사실 레비나스 입문서로 더 권장할 만한 것은 언젠가도 언급한바 있지만,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다산글방, 2001)와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이다(*레비나스에 대해서는 '지겨울 만큼' 언급했다!). 참, 내가 재미를 못본 책은 D. 호르스터의 <로티>(인간사랑, 2000)와 키멜레의 <데리다>(서광사, 1996)이다. 번역이 부실한 탓도 있겠지만, 원저도 그다지 신통찮아 보인다.

 

 

 



네번째 책은 서강대 영문과 신경원 교수의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여성>(소나무)이다(저자는 여러 논문에서 '이리가라이'라고 표기해왔는데, 단행본에서는 불어식으로 '이리가레'라고 표기했다. 국내에서는 '이리가레이'까지 세 가지가 혼용되고 있는데, 좀 통일되었으면 싶다). 이 책을 소개한 건 순전히 그 희귀성 때문이다(*나로선 그 이상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리가레의 책들이 여러 권 소개되고 있지만, 크리스테바에 비추어 그의 지명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을 독톡하게 착취/전유한 그의 페미니즘적 정신분석이론은 오히려 크리스테바보다 더 틈실해 보이며,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그래서, 바람직한 건 이런 논문집보다는 그녀의 주저인 <반사경> 같은 책이 번역되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두 사람과 함께 프랑스 페미니즘 3인방이라 불리는 엘런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출구>(동문선)도 번역돼 나왔다(*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페미니즘과 문학>(문예출판사, 1990)에 식수의 글 일부가 번역소개된 거 같은데, 번역이 아주 부실한 책의 하나이기에 잊혀질 만하고, 이번이 본격적인 소개라고 해야 할 듯싶다. 역자는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책세상)과 푸코의 <정신병과 심리학>(문학동네)을 번역한 바 있는 박혜영 교수. 아마도 크리스테바의, 얼만전에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신간 <검은 태양>(동문선)보다는 번역이 나을 성싶다. 번역은 역시나 불만스럽다. 프로이트의 '사물'(영어로는 Thing)을 아예 불어 '사물'의 음역인 '쇼즈(Chose)'로 번역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혹시나 싶어 영역본까지 있는 이 비싼 책을 산 나 자신이 한심하다...

 



 

 

끝으로, 두 주쯤 전에 나온 <들뢰즈>(이룸). 저자는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한 논문과 저서, 그리고 번역서까지 내고 있는 박성수 교수(*그의 최신간은 <애니메이션 미학>(향연, 2005)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전공한 저자가 들뢰즈주의자로 전향(?)하게 된 동기야 알 수 없지만, 그런 대로 튼튼한 이론적 베이스를 갖추고 들뢰즈의 예술론을 소개하고 있기에 신뢰할 만하다... 이것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처음 1장을 읽고 좀 실망하게 되었다. 36쪽에 있는 이런 문장을 보라: '그(엡스텡)는 이러한 전적인 타자성, 낯설음을 숭고로 규정하면서, 칸트가 숭고에 대해 보다 높은 능력의 환기를 통해서 쾌감으로 전화되는 조화의 관점을 비판했다.' 뫼비우스처럼 꼬인 이 문장은 어떻게 읽어도 말이 안된다. 정확한 문장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정확한 사고를 할 거라고 기대하기는 무망하다. 이런 실수가 우연적/일회적인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우스개 하나. 동문선의 신간 중에는 건국대 영문과 김종갑 교수의 <문학과 문화 읽기>도 들어있는데(김교수는 에릭 매슈스의 <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동문선에서 역간한바 있다), 이 번역본 전문 출판사는 책 겉표지에 '김종갑 지음'이 아니라 '김종갑 옮김'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저자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아직 책을 회수한 기미는 안 보이므로 그대로 참아두기로 한 모양이다. 책이 재판을 찍으면서 수정할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저자는 역서 한권을 더 늘리는 데 만족해야 할 듯. 그런 동문선의 목표는 1년의 100권의 책을 내는 거라고 한다(물론 80% 이상이 번역서). 번역에의 그 '놀라운 열정'을 치하하면서, 번창을 기원한다...

2004.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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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에 나온 책으로 가장 꼽을 만한 건(* 이 글은 2004년 2월 하순에 씌어졌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이다. 리쾨르, 가다머에 이어서 한동안 또 헤겔 자료를 수집하는 우연히 겹쳐서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직 책을 통독하지는 못했지만, 이 신간은 헤겔과 스피노자의 이름이 들어간 책 가운데, 가장 장정이 유려하며 번역 또한 가장 신뢰할 만하다. 물론 방점이 더 들어가야 하는 쪽은 후자이다.

 

 

 

 

역자 진태원씨는 스피노자 전공자로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고, 곧 <법의 힘>을 역간할 예정으로 있다(*물론 <법의 힘>은 2004년 여름에 출간됐고, 이어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도 작년에 역간됐다). 역자의 '자신감'은 상당한 분량의 해제와 역주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이학사) 정도가 이에 대적할 만하다(내가 요즘 한밤중에 몇 페이지씩 들춰보고 있는 책이다). 당분간은 스피노자보다는 데리다 번역에 더 전념할 계획인 것으로 보이는데, 언젠가는 <에티카>의 새로운 번역을 출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발리바르와 함께 알튀세르 사단을 형성하고 있는 피에르 마슈레의 책들로는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1994)와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 2003)가 이미 번역돼 있는바, 두 권의 책은 문학론에서 마슈레의 주저일뿐만 아니라 알튀세르 사단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1970년대에 나온 전자는 진작에 영역되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책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역본은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역자는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데, 보드리야르로서는 불운한 일이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론 레닌의 톨스토이론에 대한 비평문과 바르트의 구조주의 비판 등에 흥미를 갖고 있지만, 쥘 베른이나 미셸 투르니에에 관한 글들도 관심이 있는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하다. 후자는 생각없는 책값 때문에 아직은 구매할 생각이 없는데, 뒤져보니까 영역본인 <문학의 대상>을 내가 이미 갖고 있었다. 나중에 '휴양지'에서나 한번 읽어볼 생각이다(*나중에 읽어본 바에 따르면,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는 무슨 생각으로 번역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책이다).

 

 

 



마슈레의 책에 이어서 2월의 책으로 꼽을 만한 인문번역서는 부르디외의 <중간예술>(현실문화연구)이다. 지난주에 나온 이 책은 부르디외가 1/3 가량을 쓴, 사진에 관한 공동연구서이다. 부르디외의 책이야 간간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이 책이 유독 반가운 것은 먼저 동문선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단골' 번역자들이 번역하지 않았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나 정말 그간의 사정이 그럴 만했다.

역자는 주형일씨이고, 그간에 <문화의 세계화>(한울, 2000), <소리없는 프로파간다>(상형문자, 2002) 등을 우리말로 옮긴바 있다(*이후에 <사회보장의 발명>, <섬광세계> 등이 역저로서 더 등장했다) . 재미있는 책들을 번역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공갈 번역자는 아니다. <중간예술>의 한 장은 이미 오래전에 <사진의 사회적 정의>(눈빛, 1989)로 번역 소개된바 있다(물론 영역본도 당연히 나와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사진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을 사회학적 시각에서 보완해줄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세번째 책은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의 정치>(백성)이다. 레이코프는 마크 존슨과 함께 인지언어학 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의 저작은 우리말로도 여럿 번역/소개돼 있다. 대표작인 <삶으로서의 은유 Metaphors we live by>(서광사, 1995)를 비롯해서, <인지의미론 Women, fire, and dangerous things>(한국문화사, 1994), <시와 인지 More than cool reason>(한국문화사, 1996), <몸의 철학 Philosophy in the flesh>(박이정, 2002) 등이 그것이다. 아직 제대로 독파한 적은 없지만, 계속 관심을 갖고 그의 책들은 사모았었는데, 이번에 나온 이 '언어학자'의 '정치론'은 가장 뜻밖의 책이다(원저는 'Moral politics'이고,1996년에 출간됐다).

언론인인 역자도 그리고 두서없이 책을 내는 출판사도 모두 생소하지만, 저자의 지명도 때문에 서점에서 이 책을 주저없이 사들었다. 책의 부제는 '보수주의자들은 알고 있는데, 진보주의자들은 모르는 것들'인데, 보수와 진보의 논리를 인지언어학적인 논리에 따라 차별화시켜서 논하고 있다고. 방법론은 좀 단순해 보이지만 한번 시간을 내서 읽어봐야겠다(*알다시피, 최근에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출간됐고,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바 있다).

 

 



 

네번째 책은 권영민 교수의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민음사)이다. 거의 77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지용의 시 거의 전편을 다시 읽어나가는 책이다. 오래전 김학동 교수의 선구적인 <정지용 연구>(민음사, 1997) 이래로 1987년에 해금된 이 대표적 근대시인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돼 있는바, 신간은 그간의 성과를 집약하면서 지용시 연구와 해석의 새 단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 해설서의 저자가 전공이 한국근대소설인 것도 약간은 이채로운데, 서문을 잠깐 읽어보니까 지용시와의 인연은 학부시절 헌챙방에서 우연히/어렵게 구한 시집 <백록담>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고 있었다(*정지용 관련서들로는 최동호 교수의 <정지용 사전> 등이 필독서이다).

어쨌거나 시를 읽고 음미하는 일의 기본을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찬찬히 따라읽어봄 직하다. 그간에 표나게 지용주의자를 자처했던 비평가로 유종호 선생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번 저서에 대해서 어떻게 평할지 궁금하다. 아울러 다른 시인들에 대한 '자세히 읽기'도 이참에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싶다(나는 시를 여기저기 부분부분 인용하며 쓴 연구논문들보다는 이런 류의 전작 읽기를 더 선호하며 신뢰한다). 참고로, 문외한으로서 시를 한번 읽어볼까 하는 이들에겐 유종호의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1995)를 일독하고, 바로 이런 류의 책으로 돌진해보기를 권한다.

 

 

 



물론 시쓰기가 그렇듯이 시읽기에도 무슨 정도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시 전집이 나온 김춘수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김춘수 전집은 예전에 문장사에서 오규원이 편집/기획하여 낸 데 이어 두번째인데, 시전집만을 놓고 보면 그간에 민음사에서 <김춘수시전집>(1994)이라고 한번 더 나온 적이 있다). 그의 무의미시와 무의미시론은 지용시와는 전혀 딴판이다(한국현대시론은 이 무의미시론과 김수영의 반시론, 딱 둘밖에 없다. 후배들이 분발할 일이다!) 그러니까 시 또한 단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들', 즉 복수로 존재한다고 봄이 옳다. 각자의 길은 각자가 내는 것이다. 참고로, 작년에 나온 이 분야의 성과로는 이남호가 엮은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과 대표시 해설서 <이 쓸쓸한 날에 저 어지러운 구름 그림자>(현대문학, 2003)가 있다.

 

 

 



다섯번째는 사전류이다. <이진영의 동시통역 기초사전>(이대출판부) 같은 것도 요긴해 보이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개념 사전이다. 잘 알다시피, 사전은 그 나라 지식문화의 결산이면서 집약이다. 그런 의미에서 3권까지 출간된 <우리말 철학사전>(지식산업사, 2001-3)은 다소 미흡하더라도 적극 격려되어야 한다(*2005년에 4권이 나왔다).

 

 

 

 

이번에 나온 건 <우리말 철학사전> 같은 공동작업의 소산이 아니라 개인 저작인데, 하나는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 - 철학>(산처럼)이고, 다른 하나는 이정우의 강의록인 <개념-뿌리들>(철학아카데미)이다. 박이문 선생의 48번째 책이라는 신간은(나는 그의 책을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20권이 안될 거 같다), 아마도 저자의 장점이 가장 잘 발휘된 책인 듯싶다. 그 장점이란 건, 사유의 시작단계에서 마치 농부가 밭을 고르듯이, 개념들을 잘 정돈해 줌으로써 옆길로 새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걸 미리 방비해주는 것이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권할 만하지만, 그들이 이런 책의 재미를 음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김성곤 교수의 <사유의 열쇠 - 문학>은 올초에 나왔다).

이정우의 신간 역시 서양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뿌리(그리스철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음미해본다(*2004년에 2권이 나왔다). 사실 하이데거-가다머 라인의 철학이란 그러한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기'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이런 작업의 의의는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책들과 더불어서 사유의 기초가 되는 이 개념들과 그 번역의 문제에까지 일반의 관심이 확대/심화되기를 기대한다...

기타, 일본근대문학과 관련된 무게있는 저작들이 두어 권 더 나왔지만, 당장의 관심을 벗어나기에 제외한다. 전공인 분들의 '열렬한'소개가 더 나을 거 같기에...

2004.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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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5월에 띄운 모스크바 통신문 가운데 '이론 이후에 무엇인 오는가?'라는 게 있었다. 당시에 모스크바에서 우편으로 받은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3월호)를 읽다가 해외서평란에 소개된 글을 읽고 간단한 코멘트를 적은 것이었는데, 그걸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텍스트>에서 ‘직업상’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해외서평란에 연재된 것인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맑시스트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신작 <이론 이후(After Theory)>(2003, 256쪽)에 대한 매튜 프라이스란 사람의 서평이 번역/소개돼 있었다(*이글턴의 책은 번역본이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제목은 ‘자기비판(The Self Critic)’이고, 부제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가 이제는 그들이 문학이론을 폐기하길 바라고 있다”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서평에서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문학이론입문>(1983)의 이글턴이다. 이 책은 국내에 2종(창비, 1986/ 인간사랑, 2001)이 번역돼 있고, 내가 알기엔 원저도 최소한 2판 이상을 찍었다(나는 원저의 2판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친숙한 건 창비에서 나온 <문학이론입문>인데,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건, 책이 나온 지 얼마 안된 시점인 학부 1학년 때 공대에 다니던 동창생의 하숙방에서였다. 물론 서점에서도 이 책을 봤지만, 비로소 이 책을 ‘알아’보고 흥미를 갖게 된 게 그때였던 것인데, 공대생도 읽는 문학이론서를 인문대생이 아직 읽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묘한 경쟁/분발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이 책을 최소한 서너 번은 읽었는데, 책이 재미있기도 했고 ‘문학학회’의 이론 교재로서도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소개돼 있는 문학이론입문서는 이글턴의 것 말고도, 레이먼 셀던의 책이나 입슈/포케마의 책 등이 있지만, 역시나 가장 개성이 강하면서도 권장할 만한 것은 이글턴의 책이다(셀던의 책도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있고 많이 읽히지만, ‘교과서’적이어서 개성이 떨어진다). 약간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8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문학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인용하는 문학이론서로는 1위가 르네 웰렉과 펜 워렌의 <문학의 이론>이었다는 사실이다(2위가 미셸 제라파의 <소설의 사회사>였다). 요즘은 누가 웰렉/워렌을 읽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적절한 시기’에 <문학의 이론>을 대체했다.

그런데, 제목과는 다르게,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문학이론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소개하면서 한편으론 공박하는 책이었다. 결론도 ‘정치적 비평’이 아니었나? 앞의 서평 부제는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로 이글턴을 지칭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이글턴은 그러한 ‘이론’의 정치성을 폭로하면서, 이론의 과학성/객관성이라는 ‘허상’을 예리하고 비판하는 ‘반골적인’ 이글턴이다(그의 재치있고 신랄한 문체는 사르트르에 견줄 만했다!). 그러니까, 내가 읽기에는 이미 <문학이론입문> 시절부터 이글턴의 문제의식 속에 ‘이론 이후’가 함축돼 있었던 것인데, 신간은 웬 ‘뒷북’인가 싶기도 하다. “이론의 황금기가 지나간 지는 오래되었다”고?

 

 

 



현재 맨체스터대학의 ‘문화이론’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이글턴은 신간에서 이론이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으로 진단/고발한다, 고 한다. 예컨대, “학계라는 거친 바닷가에서는 프랑스철학에 대한 관심이 매혹적인 프렌치키스에 대한 관심에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일부 문화연구 서클에서는 자위행위의 정치가 중동의 정치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데리다를 이용해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프렌즈>를 해체”하게 되었는바, 이글턴은 이것을 ‘정치적 재앙’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론이 언제나처럼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렇듯 이론(특별히 ‘포스트모던 이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즉, 이론은 ‘문턱’이지만, 비평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해방’ 혹은 ‘진리’는 이론 속에서 구해질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과연 새로운 주장인가? 이글턴이 언제 이론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를 늘어놓은 적이 있는가? 이론은 언제나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던가?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이러한 입장이 과연 이글턴에게서 ‘변화된’ 입장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정세의 변화에 따른 방점의 이동은 있을지언정(이론은 진보적일 수도 있고, 보수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지지도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이론관’이다), <이론 이후>에서 제기하고 있는 건 이미 20년전 <문학이론입문>에서도 충분히 암시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결론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이 정말로 달라졌으며, 나는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었다. (2)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서평자(혹은 어쩌면 이글턴 자신이)가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신간을 읽어봐야겠지만, 내 생각에 이글턴은 문학이론을 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폐기하길 바랄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는 단지 이론의 오용/남용과 오염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오용/오염이 제거될 수 없는 거라면, 물론 이론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이론 이후의 이론’, ‘이론 이후에 관한 이론’일 것이다. 이글턴에 충실할 때, 우리는 이론이라는 ‘문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이론은 전부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소한’이다). 비유컨대, 우리는 ‘언어’에 구속돼 있지만, 우리의 자유는 언어 ‘이전’이 아닌 ‘이후’에 얻어질 수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구원이 또한 우리의 비천한 삶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밝혀두자면, 상당한 식견과 적절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이 해외서평을 번역하고 주를 단 역자에게서 나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좋은 번역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글턴의 이 신간이 번역된다면, 그 적임자의 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한가지 궁금한 건, 역자의 주8)에서 이글턴의 ‘포스트모던 사상’을 공박하고 로티와 함께 지목하다는 스탠리 피쉬의 대표작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1980)가 <이런 기준의 텍스트는 있는 것인가?>로 번역된 점이다. 'Class'란 말이 여기서 중의적이긴 하지만, 보통은 ‘수업’이나 ‘교실’로 옮기기 때문인데,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Class'를 ‘기준’으로 옮긴 것은 특이해 보인다. 참고로, 피쉬의 이 책을 패러디한 글의 제목 중에는 'Is There a Fish in This Text?'란 것도 있다...

06.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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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를 이용해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프렌즈>를 해체”하게 되었는바,

ㅋㅋㅋ

눈팅 2006-05-3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턴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에서 얼핏 생각나는 구절: "요즘 작가들은 탐스런 사과와 같은 작품이 아니라 축축한 겨드랑이와 같은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론 이후의 이론’이라는 표현은 벤야민의 '희망 없는 희망'이나 데리다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 이후의/없는 모더니즘이 아닐까요...

로쟈 2006-05-22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자주 써먹게 되는 구호들이기도 합니다...

비로그인 2006-05-2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근데요 이글턴의 문학 이론 입문 개정판 번역 상태가 어떠한가요? 역자가 질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의 역자이던데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지라... 초판의 판매량이 더 높은 것도 번역 상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도 가구요..

로쟈 2006-05-2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 번역판을 추천합니다. 인간사랑판은 검토해보지 않았지만, 기대할 만한 번역이 아닐 거라고 봅니다... 거기에 비하면 초판/개정판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006-06-23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교재'류의 책은 이름있는 책들이 이름값을 합니다. 베리의 책이 훌륭하다면, 입소문이 더 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2006-06-24 0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tois 2006-07-0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에 학생이 첫시간에 들어와서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라고 질문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 강의나 수업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맥락에도, 중의적 해석의 가능성에도 합당합니다. 참고로 이 책 아주 재미있습니다.
 

지난주에도 깜짝 놀란 만한 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이 글은 2004년 1월 중순에 씌어졌다), 제법 관심이 가는 책들이 여러 권 나왔다. 제일 먼저 손꼽고 싶은 것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후)이다. 이 책을 꼽은 것은 물론 시의성 때문이다. 소개글에 의하면, “<타인의 고통>은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을 비롯해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한 (저자의) '지적' 개입이다.” 원제는 'Regarding the Pain of Others'(2003)인데, 전체가 131쪽밖에 안되는 얇은 책이고(행간도 넓다), 일종의 포르노그라피로서의 전쟁사진론 정도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번역되면서 250쪽이 넘는 책으로 부풀려졌다(값은 15,000원).

 

 

 



처음엔 장삿속이겠거니 했는데, 인터넷서점의 책소개를 참조해보니까 영어판에 없는 도판 48장이 한국어판에는 들어가 있다고 한다(나는 아직 책의 실물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복사했다). 게다가 역시 원서에는 없는 4편의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책은 원서보다도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번역 또한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번역한 바 있는 경험자가 맡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간다. 손택은 촘스키만큼이나 현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지식인인데(그가 좌파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9.11 관련으로 뉴욕타임즈에 실린 칼럼을 나는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9.11 관련 필독서의 한권이 될 만하다고 본다.

 

 

 

 

두번째 책은 실천문학사에서 ‘실천인문총서’의 한권으로 나온 <문화의 숙명>이다. 부제는 ‘기어츠의 문화이론에 대한 발전적 논의’이고, 원제는 The Fate of "Culture" : Geertz and Beyond(1999). 기어츠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화유물론의 마빈 해리스가 과학 정향적인 인류학을 대표한다면, <문화의 해석>(까치, 1998) 등을 통해 ‘중충적 해석’(두꺼운 묘사)을 주창하는 기어츠는 인류학을 일종의 해석학으로 간주한다. 재미있는 것은 해리스와 기어츠 둘 다 인도네시아에서 현지조사 작업을 했다는 것.


 

 

 


덕분에 그의 저작은 문학적인 풍모마저 풍기는바, <슬픈 열대>의 레비-스트로스가 이에 견줄 만하다. 신간은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 7인이 기어츠의 문화이론의 의미와 그 영향에 대해 조명하고 있는”데, 이중 문학비평가이자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그린블래트 교수는 ‘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의 대표자로서 유명하며, <마르탱 게르의 귀향>(지식의풍경, 2000)으로 유명한 여성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도 필진에 참여하고 있다.



 

 

 

세번째 책은 조르주 귀스도르프의 <신화와 형이상학>(문학동네). 원제는 'Mythe et Methaphysique'(1984)이며, 이름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저자 귀스도르프는 1912년생으로 48년에 바슐라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책소개에 의하면, “이 책은 '철학개론'이라는 부제를 붙여 1953년에 출간한 것을 30년이 지난 1983년 개정판 서문을 더하여 재출간 것으로, 지은이는 양차 세계대전 직후 이성 중심적 사유에 큰 회의를 느끼고 인간 존재 규명으로서의 철학을 신화라는 비이성적 영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 요컨대, 반세기 전 사르트르가 주름잡던 시대의 책이다. 요즘 신화, 판타지 열풍에 대해 좀 숙고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만한 책처럼 보인다.

 

 

 



네번째 책은 험프리 카펜터가 쓴 <톨킨 전기>(해나무). 500쪽이 넘는 이 책은 "J.R.R.톨킨 저작권협회가 유일하게 공식 인증한 톨킨 전기"라고 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 덕분에(나는 아직 1편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일부 마니아들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지게 된 작가 톨킨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라면 빼놓을 수 없을 법하다. 이미 톨킨의 전기로는 <톨킨 - 판타지의 제왕>(작가정신, 2003)이라고 나온 것이 있는데, 분량은 신간보다 다소 얇지만, 표지가 유사하기 때문에 자칫 헷갈릴 수도 있겠다. 전문가들이 권장하는 건 단연 <톨킨 전기>라는 걸 유념해야겠다.

 

 

 

 

톨킨의 영화만 보는 게 다소 멋쩍은 독자라면, 얼마전에 나온 <철학으로 반지의 제왕 읽기>(이룸, 2003)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겠다. 제목에 ‘철학’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잘 팔려나가는 책이다(*그밖에도 여러 종의 관련서들이 나와 있다). 물론 이 분야의 히트작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한문화, 2003)이지만.

 

 

 



톨킨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환상적인’ 남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강연집도 소리없이 작년말에 출간됐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르네상스)가 그것인데, 원제는 'This Craft of Verse'(2000), 그러니까 ‘시의 기교’쯤으로 번역되는 책이고, 보르헤스가 1960년대말에 하버드대학에서 여섯 차례 특강한 내용이라고. 원제에서 알 수 있지만, 내용은 전적으로 시에 관한 것이다. 200쪽이 안되는 분량에 다소 부담스런 책값이지만, 보르헤스의 강연을 유료 청강한다는 기분으로 손에 들면 되겠다(*이후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볼 만한 보르헤스 입문서는 김홍근의 <보르헤스 문학전기>이다).

 

 

 



다섯번째 책은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 책이지만, 신간은 가장 원문에 가깝게, 충실하게 (시적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해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 나와 있는 번역서들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만은 틀림없으므로 아직 이 고전이 서가에 안 꽂혀 있는 이라면 이참에 구입해 두시기 바란다(지난번에 나온 <팡세>와 마찬가지로).

고전 중에 한권 더 소개하자면,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이반 부닌(1870-1953)의 대표작(1910년작) <마을>(삶과꿈)이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부닌 전공자로서 이미 <비밀의 나무>(원제는 <어두운 가로수길>)를 2000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바 있는데 이 책은 이미 절판됐다. 그러니 당장 안 읽을 책이라도 사두는 수밖에. 대학원 첫 학기에 부닌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좀 게을러서 이 중편소설을 읽어두지 못했다. 왠지 인도인의 인상을 풍기는 이 작가에게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었고.

개인적으로 나는 체호프와 부닌, 그리고 고리키가 톨스토이 문학의 유산을 3등분해 가지고 있는 걸로 본다. 톨스토이의 미학(체호프)과 종교성(부닌), 그리고 민중성(고리키)이 그것이다. 불교철학과도 깊은 친연성을 갖고 있는 부닌은 오히려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나는 그 낯설지 않다는 점이 불만이지만). 관심있는 분이라면, 그의 짤막한 단편 중에서 <사랑의 문법>(소담출판사, 1996)에 실려 있는 <일사병>을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비교해서 읽어보시길.



 

 

 

기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동경대의 정교수가 된 강상중 교수의 신간 <내셔널리즘>과 <세계화의 원근법>(이산)이 동시에 출간됐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도 사놓고 안 읽었기 때문에, 이 신간들마저 소화할 만한 여력/자격이 안된다(*강상중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재일 강상중>(삶과꿈, 2004)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젠 원로급 문학비평가라고 해야 할 김병익씨의 ‘책으로 쓰는 자서전’ <글 뒤에 숨은 글>(문학동네)도 나왔다. 아마도 인생을 정리할 만한 나이에 도달한 듯싶다. 책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겸연쩍어서라고. 김병익의 제자를 자처하는 고종석이 추천사를 쓰고 있기도 한데, 김병익은 고종석이 그렇듯이 일급의 비평가/소설가라기보다는 일급의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온당하다(이건 폄하의 의미가 아니다).(*김병익의 책은 이후에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게으른 산책자의 변명> 등이 더 출간됐다.) 

 



또, 장서가라면 탐이 날 만한 책이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이다. 전질이 20권인데, 나는 당장에라도 몇 권은 살 용의가 있었지만, 전질을 세트로 판매하기 때문에(게다가 비닐포장돼 있다) 나는 책의 내용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사람이 수고했겠지만, 제일 공이 큰 사람은 아무래도 열린책들의 돈줄인 프랑스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형형색색의 이 초간본총서 20권이 그의 ‘나무’에 매달린 열매들처럼 보인다(서점에 나란히 배열돼 있기도 하고)...

 

 

 



끝으로, 내주가 설연휴이니만큼 선물용 도서 두어 권. 지난주 서평 1면을 장식하고 분야별 주간베스트 1위에 오른 얀 아르튀르-베르트랑의 <발견: 하늘에서 본 지구 366>(새물결). 아는 사람을 알겠지만, 이 책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지구를 찍은 366장의 사진과 그에 대한 간략한 논평을 싣고 있다. 사진의 사이즈가 생각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부피에 비해선 저렴해서(33,900원인데, 요즘 갈비짝을 생각해보라) 연초에 선물하기엔 딱 좋은 책이다(독서의 부담이 없기 때문에!).

책을 좀 읽는 분에게라면, 전설로 회자되던 <신영복의 엽서>(돌베개)가 어떨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육필 원고를 영인한 책이다. 책은 “신영복 선생이 사형 선고를 받은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시절부터 1988년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옥중생활 전 기간에 씌어진 기록과 엽서들”을 담고 있는데, “철필로 새기듯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와 여백을 이용해 그려넣은 작은 그림 등은, 영인본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세월의 깊이와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한다”고. 책값은 조금 더 비싼 38,000원. 이런 책들은 갖고 있기에 아깝기/비싸기 때문에 선물하기에 적당하다.

 

 



 

덧붙임: 손택의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엘 갔다가 벤자민 바버의 <지하드 대 맥월드>(문화디자인)가 눈에 띄길래, 같이 사들고 왔다. 작년 8월에 출간된 걸로 돼 있는데, 그때 내가 바쁘긴 바빴다 보다. 책이 나왔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서 신간인 줄 알았다. 바버는 <강한 민주주의>(인간사랑, 1992)가 번역/소개된 바 있는 저명한 정치학자이고, <지하드 대 맥월드>는 9.11을 미리 예견한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바버의 책으론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일신사, 2006)가 최신간이다). 지젝도 <실재의 사막...>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요지는 과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지젝은 사회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어쨌든 책도 두툼하고 반가운 책이다.

그리고 시몬 듀링의 <푸코와 문학>(동문선)이 번역돼 나왔다. 언제 또 판권은 구했는지, 동문선은 이것저것 안 거드리는 책이 없어 보인다. 원제는 'Foucault and literature : towards a genealogy of writing'(1992)이다. 이미 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인데, 읽어볼 기회가 생긴 거 같다. 단, 역시나 비인간적인 책값이 문제이다. 399쪽에 26,000원. 들뢰즈와 문학을 다룬 책들도 여러 권 있는데, 분위기를 맞추자면, 이들도 곧 번역돼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내 저자들의 책에 관심이 소홀했던 것 같아서 한권 더 추가하면, 임철규 교수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이 출간됐다. 440쪽에 22,000원. 연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의 가장 큰 공헌은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한길사)를 역간한 것이다. 개인 저작으로는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 1994)에 이어 오랜만에 나오는 책인 거 같다. 사실, 눈(eye)에 대해서라면, 역사나 미학 말고 철학과 정신분석학에서도 할말이 많은 주제이다. 오늘 책을 검색하다 보니까 장 스타로뱅스키(Starobinski)의 영역된 저작중에는 <살아있는 눈(The Living Eye)>(Harvard Univ Pr, 1989)도 들어 있었다. 관심을 가져볼 만하고, 관련문헌도 제법 많은 주제이다...

2004.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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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이 밝았다(*이 글은 2004년 1월초에 씌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발행년도가 2004년이라고 찍힌 책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한두 주 가량은 시차적응을 못한 책들이 좀 나왔고, 또 나올 것이다. 작년년말에 나온(사실은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일부가 이미 2004년이라고 박혀서 나온 것처럼. 새해에도 새로운 저자들이 탄생하고, 새로운 책들이 육체를 얻을 것이다. 책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감동적인 것은 해돋이가 아니라, 그러한 책들의 풍경이다(불쌍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제일 먼저 손에 꼽을 만한 것은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한겨레신문사)이다. 2001년 12월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정식으로 각인시킨바 있는 이 러시아계 한국인은 소비에트 교육체계의 탁월성을 입증하는 산증인인지, 한 인간의 지적 성취는 교육체계와 무관함을 입증하는 돌연변이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하여간에 내가 아는 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우리세대 외국인들(?)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 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그해의 책으로 꼽은바 있고, 아주 감격적인 독후감을 쓰기도 했는데(이 독후감의 일부는 신문광고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의 게으름과 타성적인 사고를 후려치는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그의 자전적 약력에 대해서는 공저인 <젊은 날의 깨달음>(인물과사상사, 2005)을 참조할 수 있다).

이번 신간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란 문제의식으로 채워져 있는데, 사실 나는 이 책을 인터넷서점에 주문하는 것보다 빨리 사보려고 네댓 군데의 서점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구할 수 없었다. 서점들의 아둔한 감각에 혀를 찰 수밖에. 해서, 순수하게 2003년의 책이지만, 2004년에도 아직 손에 들지 못한 책이다. 아마도 모레쯤 사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실, 박노자의 책을 추천한다는 것은 다반사(茶飯事; 먹고 마시는 일)이기에, 크게 떠들 만한 일도 아니다.

 

 

 



두번째 책은, 조광제의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강해록인 <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학사)이다. 이 책도 나오긴 작년에 나왔지만, 발행일자는 2004년 1월 10일로 돼 있는 ‘미래의 책’이다. 그러니 공식적으론 아직 읽으면 안되는 책이기도 하다. ‘강해’라는 건 강의와 해제를 말한다. 저자가 철학아카데미에서 국역본 <지각과 현상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 메를로-퐁티 ‘선생님’의 주저를 풀어서 강의한 내용이다.

‘거의 독학하다시피 한 연구’라는 저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는 바이지만, 메를로-퐁티에 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더구나 지난번에 나온 국역본조차도 조광제에 의하면, 오역의 범벅이기 때문에(“<지각의 현상학> 번역문에 대한 분석", <아카필로> 제8호, 2003) 일반 독자가 메를로-퐁티를 읽어낸다는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신간의 의의는 원전 독해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세번째 책은 실천윤리학의 거장인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의 <세계화의 윤리>(아카넷)이다. 이 책도 발행일자가 2003년 12월 30일이니 벌써 한 해 묵은 책이다. 원제는 . 지젝은 여러 글들에서 현재의 세계화의 일면성과 불충분성(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열변들에는 정치적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 빠져있기 십상이다)을 비판하는데(즉 그는 현재의 ‘세계화’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싱어의 주장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책의 소개에는 그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전 지구 공동체적 윤리'를 내세운다고 하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일독해 보시길. 한편, 싱어의 생명윤리학 책으론 <동물해방>(인간사랑, 1999), <삶과 죽음>(철학과현실사, 2003) 등이 번역돼 있다(*이후에도 싱어의 책은 줄기차게 출간된 바 <윤리의 기원과 역사>, <응용윤리>, <생명윤리학1> 등이 모두 그의 책들이다.) 


 

 


 

네번째 책은 처음 소개되는 두 작가의 소설이다. 멕시코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후안 룰포의 대표작 <뻬드로 빠라모>(민음사)와 옛 유고의 현대작가 다닐로 키슈의 <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책세상)이 그것이다. 모두 처음 소개되는 작가/작품들인 만큼, 내가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없다. 룰포의 소설에 대해선 마르케스가 “스페인어로 씌어진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는 것과 키슈의 작품은 수용소 문학 범주에 들어간다는 점 정도를 덧붙인다(*키슈의 책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다루고자 한다).

 

 

 

 

영화감독으로의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작가 폴 오스터의 신작(시나리오) <다리 위의 룰루>(열린책들)도 번역돼 나왔는데, 그는 이 작품을 현재 영화화하고 있다고(*오스터의 책들도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다. 매년 두어 권 이상씩. 거의 '아메리카의 하루키'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웨인왕의 <스모크> 등의 시나리오를 쓴 바 있다. 사실, 오스터에 대해선 아직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에 군말은 삼가겠다.

 

 

 



다섯 번째 책은 하이네의 이야기시집 <로만체로>(문학과지성사, 2003)인데, 나는 아직 <노래의 책>(문학과지성사, 2001)도 사두고 읽지 않았으므로, 신간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 다만, 하이네의 경우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러시아낭만주의(1820-40)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시인이기 때문에 ‘직업적인’ 관심을 좀 갖게 된다(*하이네의 최신간은 <낭만파>(한길사, 2004)이다).

 

 

 

 

그런 관심에서 좀 벗어나면, 한달쯤 전에 나온 스티븐 킹 걸작선 정도를 읽어보면 어떨까도 궁리중이다(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미국의 현역 작가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비평계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작가가 스티븐 킹이지만, 나는 아직 그를 읽어본 적은 없다. 다만, 이번에 작품선집이 나왔으므로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그를 아메리칸 스타일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평하기도 하므로.

사실, 스티븐 킹에 대한 관심은 어젯밤에 읽은 대담집에서 지젝이 <샤이닝>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에 생겨난 것이다. 이 대담집은 작년에 학교 도서관에 주문해서 구한 책 가운데(하지만 발행년도는 2004년이다), (지젝이 편집한) 4권짜리 <라캉 연구선집>과 함께 가장 성공작이라고 할 만한 책이며, 지젝 입문서로 가장 좋은 책이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시간이 나는 대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다. 올해의 책읽기도 이제 첫걸음은 뗀 셈이다...

 

 

 

 


덧붙임: 폴 오스터의 책은 <다리 위의 룰루>와 함께, 소설 <환상의 책>과 에세이집 <타이프를 치켜세움>이 열린책들에서 동시에 출간됐다. 이쯤되면, 일종의 문화상품이다. <다리 위의 룰루>는 본문에서 영화화하고 있다고 했지만, 1998년에 이미 만든 영화이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걸로 봐서, 상업성이 없거나 예술성이 '지나치게' 뛰어난 영화인 듯. 소설 <환상의 책>도 사라진 미남 배우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가상의) 영화 한 편의 내용이 통째로 들어가 있다고 한다. 오스터는 아무래도 비주얼이 가장 강한 작가인 듯. 짐작엔 우리 작가 중에, 김영하나 김경욱 스타일이 아닌가 싶다. 아니 좀 경쾌한 윤대녕이라고 할까? 일본 작가론 하루키 스타일. 뉴요커의 '실존'을 가벼운 멜랑콜리로 터치하기(내가 상상하는 폴 오스터)...

2004.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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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5-20 10:08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김영하나 김경욱도 아니고 좀 경쾌한 윤대녕은 더더욱 아닌데요...훨씬 더 박진감이 넘칩니다. 산문집 [굶기의 예술]을 감탄하며 읽었는데 그거와는 또다른 진경이 소설에서 펼쳐집니다. 나른한 봄날에 [달의 궁전]이나 [거대한 괴물]을 읽어 보심이...

로쟈 2006-05-20 10:24   좋아요 0 | URL
<굶기의 예술>은 저도 읽었습니다. 그의 소설들에 조금 흥미를 느낄 때쯤 너무 떠버려서 한편으론 의혹을 갖게 됐습니다. 하루키 소설도, 언젠가 한 지인이 <상실의 시대>를 26번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코엘료의 <연금술사> 같은 소설도 마찬가지인데, 저는 진짜 소설은 '독서에의 저항' 같은 것을 유발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 다른 한가지는 아직 매력적인 서평/비평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