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구내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서 반갑고 놀라웠던 책은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이다. 기분상으론 '횡재'한 느낌이었지만, 거저 책을 얻은 것도 아니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얌전하게 두고온 책이니 야단스레 떠들 일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반가운 마음이 다 가시지 않는 것은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이 나온 걸 눈여겨보았고, 연말에는 즐겨읽던 일간지의 '엑스 리브리스'에서 역사부문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었기 때문에(<치즈와 구더기>의 저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책과 함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어둔 까닭이다. 아래가 러시아어본이다.

Cover. Прошлое - чужая страна. Пер. с англ. Лоуэнталь Д.

 

 

 

 

 

 

 

해서 저자나 책의 지명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내겐 읽어볼 만한 '대단한 책'으로 각인됐고, 귀국한 이후에 원서를 구해볼 생각을 했었다. 그게 어쩐 일로 흐지부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책의 두께와 만만찮은 가격이 걸림돌이었을까? 하드카바의 러시아어본도 상당한 고가의 책이다). 그러던 차였으니까 아무런 예고없이 출간된 국역본이 조금 과장하자면 잃었던 혈육을 되찾은 것 같은 '감동'을 전해준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어정쩡하게 시중에 깔린 탓에 지난주 리뷰들에는 다 빠졌지만, 아마도 이번 주말 북리뷰란들에는 큼지막한 서평들이 실린 것이다.  

하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그다지 여유로운 성격이 못되는 나는 이곳저곳에서 책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려고 했고, 아직 알라딘에 충분한 책소개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른 곳에 있는 책소개라도 여기에 옮겨놓는다(출판사측 리뷰인 듯한데, 알라딘에는 왜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나로선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와 함께 올여름의 끝무렵에 읽어볼 책으로 꼽아두고 있는 책이다(좀 여유가 있다면,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대출해서 읽어보아도 좋겠다).

 

 

 

 

-과거는 왜 낯선 나라인가? 19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현재와 유사하다는 가정 아래 규정하고 판단했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항상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되었고, 중요한 사건들도 항상 유사한 동기나 열정에 의해 촉발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사실 과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삶은 지금의 삶과는 아주 다른 존재방식과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낯선 나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사실상 과거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과거가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사실상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나라이기 때문에 인지될 수도 판단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불변하고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우리와 상호작용하며, 과거와 현재가 융합하는 유산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과거는 실재하지만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 알려질 수 없으며’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된다’고 말한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재해석된 과거가 과거의 진실을 전복시키기보다는 과거의 의미를 이해하고 과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로 부활한다. 이 책의 1부에서 논의되었듯이 과거는 우선 선택적으로 이용된다. 과거는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으로서 혜택을 주기도 하지만 현재를 억압하거나 과거의 악행이라는 족쇄를 현재에 채우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하고 확대하기도 하며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하거나 삭제하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 인식과 이용의 기본 태도에서부터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거의 개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기억에만 의존하던 시대와 달리 역사가 씌어진 이후부터는 과거가 훨씬 믿을 만하고 확실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역사 역시 해석자의 주관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현재의 필요라는 요구의 개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건 이후 연달아 일어난 이후의 새로운 사건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현재 서술자의 지적 혜택이라는 문제도 개입되어 있다. 또한 기억과 역사는 모두 과거로부터 살아남은 물질적 흔적들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데, 유물 역시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과거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개조하고 변형시키는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3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과거가 현재에 가져다주는 분명한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합의된다’고 느껴진다고 말한다. 과거는 아주 일차원적으로는 개인의 향수를 달래주고 안정감을 제공하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월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 목적에 맞게 합의되고 개조되는 것이다. 게다가 훼손된 과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보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할 때조차도 사실상 현재의 방법론으로 과거를 조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재해석된 과거는 조금의 진실도 담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폄하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아니다’이다. 저자는 역사가 다시 기록되듯이 과거가 현재의 지식과 가치가 변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피한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과거는 불변하는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기억, 역사, 유물의 누적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누적물이라는 개념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개조된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그것을 만들어낸 자들뿐 아니라 이를 물려받은 사람들의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뿐 아니라 현재의 전망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며, 또한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부활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다. 과거가 변화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과거는 또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의 신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단지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처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렇듯 끊임없이 변화하며 현재로 부활하는 과거는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을 떨쳐내는 데 이바지하며 자유롭게 선택된 미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결론 부분을 저자는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도 결국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비로소 과거를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단순히 보존되기만 하는 세습된 유산은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된다. 과거는 길들여짐으로써―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용인하고 기뻐함으로써―가장 잘 이용된다.”

06. 06. 28.

P.S. 주말 북리뷰들을 훑어봤는데, 국민일보와 한국일보 등만이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 대한 서평을 싣고 있다. 이 중 한국일보 안준현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07. 01) 과거는 낯선 나라다 '변화하는 과거 자유로운 미래'

-이승만,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과거인가. 공산 독재를 막은 ‘자유민주’ 국가의 수립기이자 숙명 같은 가난을 떨쳐낸 경제 건설의 눈물 나는 여정이었을까. 아니면 친일파와 손잡고 분단을 이끈 원통한 세월이자 장기 집권을 위해 인권과 노동을 짓밟은 암흑 같은 독재의 시기였을까.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지만 과거는 이미 실재했던 확실한 대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미래는 다양한 예측의 영역인 반면, 과거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실체를 가진 확실한 기록으로서, 단 하나의 올바른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날선 대립도 이런‘고정불변의 과거, 올바른 진리’라는 사고의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는 곧잘 이용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현재를 억압하는 족쇄를 얻기도 했으며,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 확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 삭제해 왔다.

-하지만 과거 역시 미래처럼 변화의 가능성이 늘 열려 있는‘낯선 나라’라는 게 저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방대한 인문학 지식과 깊은 성찰로‘그리워하고, 돌아보고, 변형시키는’, 인류와 과거의 관계 맺기를 탐구한다. “과거는 아주 다른 존재 방식과 사고와 믿음의 세계이며, 우리가 걸어온 길이되 현재와 단절된 세계이다.”

-특히 향수(노스탤지어)가 일종의 소비산업이 되고, 박물관, 역사테마공원, 유적 등이 관광지가 된 현대에서 과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저자는 ‘과거 바라기, 과거 알기, 과거 변화시키기’의 세 주제로 과거에 접근한다. ‘과거 바라기’는 소설과 영화, 17~18세기 영국 프랑스, 빅토리아시대 영국, 남북전쟁 전후 미국 등의 구체적 예를 들어가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심리를 파고든다. “과거는 어떻게 우리를 풍요롭게 혹은 빈곤하게 하는가.

-우리는 왜 과거를 포용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는가.”‘과거 알기’는 과거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억, 역사, 유물’이라는 세 경로를 통해 고찰한다. ‘과거 변화시키기’는 과거를 인지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과거를 변화시킨다는 묘한 역설을 얘기한다. 현대 미국 영국에서의 과거 유산 복원이나 개조 움직임 등을 통해 인간이 과거를 어떻게, 왜 변화시키며, 그런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핀다.

-저자의 결론은 과거는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과거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도, 미래에 볼 과거도 아니다. 과거는 어떤 시기 특정한 사건을 넘어서는 연속적인 기억과 역사와 유물의 누적물이며, 이 점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택 가능한 전망을 제공하는 ‘자유롭게 하는’과거가 된다. “과거라는 누적물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 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 개조된 부분까지 포함한다. 과거는 그것을 만든 자들뿐 아니라 물려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의 증거다.”

-1985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되는 등 명저로 통했지만 방대한 분량과 쉽지 않은 내용 탓인지 지금까지 번역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인 역자들은 후기에서 “다양한 자료와 지식에 매혹되어 논점을 잃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라며, “끝도 없이 고유명사를 제시하며 새로운 지식을 강요하는”이 책을 다 읽는 것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긴 여정’이 될 것이라고 했다(*아무도 나서지 않는 번역으로의 긴 여정에서 돌아온 역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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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17 08:17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선생의 비평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 제목이 좀 낯익은데,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를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둘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보니 L. P.하틀리의 소설 <중개인>에 나오는문장이라고(로웬덜의 책은 장서용으로 구입만 해놓고 읽진 않았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