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중순에 '사마리아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다. 물론 러시아 TV에서 방영된 <사마리아>를 보고 느낀 소감을 주로 적은 것이었다. 당시엔 잡담들까지 잔뜩 늘어놓았었는데, 영화와 관련한 내용으로만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    

 

 

 

 

러시아에서 뤽 베송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영화의 ‘거장’으로 확실하게 대우 받고 있는 사람은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이다. <도그빌>의 제작노트가 올해 처음 나온 영화비평총서의 하나로 <독일의 가을>을 찍은 독일 감독 클루게의 책과 함께 지난 여름에 나오기도 했고, STS 채널에서는 지난주까지 ‘봉까르바이’에 이어서 이번주부터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을 방영한다. 거꾸로 봉까르바이(왕가위)는 현재 홍콩영화, 혹은 중국어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 기타노 다케시이고,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은 김기덕이다.

나는 김기덕의 최신작인 <빈집>은 아직 보지 못했고, 그 외에도 몇 편을 보지 않았지만(내가 본 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나쁜 남자> 등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보지 않은 건 <수취인 불명>, <해안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등이다, 는 건 그때 얘기이고, 나는 거명된 영화들을 모두 보았다) 일요일 밤에 본 <사마리아>는 일종의 ‘누빔점’으로서, 그의 영화들을 소급적으로 해석하도록 자극하는 영화였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마무리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국내외의 과대/과소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사람의 ‘영화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며, 따라서 나의 주된/한정된 관심은 그의 영화 ‘텍스트들’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판타지, 혹은 트라우마(외상)란 무엇일까에 쏠린다.

자신의 판타지를 영화적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시대의 또 다른 ‘영화작가’ 홍상수와 구별된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홍상수의 영화는 철저하게 판타지를 부정/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와는 대척관계에 놓여 있다. 그건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홍상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실의 디테일(혹은 그가 ‘표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김기덕만큼 디테일을 과소평가하는 감독도 드물다(그 점이 나로 하여금 그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영화들을 저예산으로, 속성으로 찍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많은 예산과 많은 시간이 필요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러니까 김기덕은 블록버스터나 ‘세밀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란 디테일과 상호배제적이다. 우리가 꿈(=판타지)을 꿀 때 사소한 디테일들에 주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다만, 몇 가지 상징만이 중요하게 사용될 따름이며, 그것들의 의미작용만이 관심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플롯과 몇 가지 상징, 그것이 김기덕의 판타지를 구성하는 재료의 전부이다. 11일회 촬영만으로 완성했다는 <사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원조교제’의 디테일이 다 생략돼 있다. ‘더럽다’는 대사는 자주 나오지만, 정작 더러운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인가? 그런 디테일은 감독의 판타지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언제나 그렇지만, 판타지를 구하기 위해 디테일을 희생한다. 대신에 몇 가지 자극적인 상징(이 상징의 가시적 등가물은 ‘피’이다)을 늘어놓음으로써 그러한 ‘희생’을 보상/은폐하고자 한다. 즉, 그의 영화에서 소위 과격한 장면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여자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카바하기 위해 화려한 액세서리들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희생된 디테일과 대체된 상징들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주로 전자의 편에 서 있지만(나는 디테일을 편애한다, 해서 영화에서의 판타지나 알레고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후자의 자리에서 <사마리아>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러시아어로 더빙된 걸 봤기 때문에, 디테일한 대사들은 놓쳤지만, 사실 그런 디테일 정도는 김기덕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대범한 사람이니까(그는 해병대 출신이 아닌가?!).



먼저, 줄거리. 여진과 재영이라는 두 여고생이 있다. 여진은 망을 보고 재영은 몸을 판다(걔네들 말로 ‘발랑 까진 것들’이다). 소위 원조교제인데, 명분은 유럽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란다. 그러다가 재영은 단속 나온 경찰들을 피하려고 여관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죽고(1부), 여진은 그런 재영을 ‘위로’하기 위해 유업(遺業)을 이어서 다시 몸을 판다. 아니, 이번엔 아저씨들을 ‘산다.’ 돈을 지불/환불해주는 건 여진이니까. 그런데, 그런 행각을 형사인 여진의 아버지가 뒤쫓게 되고, 그는 딸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에게 복수를 하는바 끝내는 살인까지 하게 된다(2부). 아버지는 여진을 데리고 죽은 아내/엄마의 산소에 갔다가 오는 길에 여진에게 운전을 가르친다. 그리고 아직 소나타를 서툴게 모는 여진을 홀로 남겨놓은 채 그는 동료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호송된다(3부). 이 1, 2, 3부의 타이틀은 각각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이다.



그럼, <사마리아>는 “딸의 원조교제를 목격한 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를 다룬 영화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표면적인 플롯만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영화는 너무 싱겁다.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답지도 않다(그런 복수라면, 오히려 박찬욱에게 더 어울리는 테마 아닌가? “딸을 납치당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 말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표면적인 줄거리를 좀더 세심하게/삐딱하게 읽는 것이다. 즉, (1)여진과 재영의 ‘원조교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2)‘딸(여진)과 아버지’는 어떤 관계인가? (3)‘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는 것들이 다시 해명되어야 할 물음들이다.

영화는 재영의 바수밀다 얘기로 시작된다. 인도의 창녀인데, 같이 잔 남자들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다나 어쨌다나. 그러니까 바수밀다는 기독교의 ‘성녀’인 셈이다. 창녀이면서 성녀(혹은 보살, 아님 부처? 불교에서는 정확하게 뭐라고 이르는지 모르겠다). 사실,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다 창녀이거나 성녀이며, 그건 그의 기본적인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판타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성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텅 빈)‘실재’를 가질 수 없는데, 그는 언제나 못 미치거나 넘어서기 때문이다.

라캉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비유로 든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는 있지만, 정확히 거북이에 이르지는 못한다. 즉,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과소평가하거나(창녀) 과대평가한다(성녀). 그러니까, 남성의 판타지 속에서 창녀와 성녀는 서로의 이면일 뿐이며, 대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바수밀다냐 사마리아냐”가 아니라, “바수밀다나 사마리아나”이다. <사마리아>의 1, 2부는 그래서 잉여적이면서 불가피한 반복이며, 판타지의 경제 안에 있다. 재영은 아저씨들한테 돈을 받고 섹스를 했지만, 여진은 돈을 (되갚아)주면서 섹스를 한다. 둘을 합산하면 등가교환일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등가교환으로서의 “성관계란 없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동시 오르가즘이란 없다.”) 언제나 한쪽이 더 주거나 덜 주는 관계이다.



해서 원조교제라는 한국사회의 이슈 혹은 치부는 <사마리아>의 소재일 뿐이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바수밀다/사마리아라는 보편적 (여성)신화, 혹은 판타지이다. 가장 단순한 거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의 ‘아빠’이다(당연한 일이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여성은 항상 ‘대상’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영이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고, 여진이 친구를 대신에서 원조교제에 나선다는 설정은 이 문제적인 아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기 위한, 무대화/장면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그건 근친상간에의 판타지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딸 여진은 딸이면서도 동시에 딸 이상의 존재였는바, 아빠의 연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아빠’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쓴 건데, 두 부녀가 사는 집안에 부재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이다. 이때 아버지는 ‘부권적 기능’의 대행자로서의 ‘아버지의-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들 부녀는 부재하는 엄마/아내의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한다. 여진에게 아빠는 아빠이면서 엄마이고, 아빠에게 여진은 딸이면서 아내이다. 먼저, 아빠이면서 엄마. 부녀가 나오는 첫 장면에서 아빠는 ‘앞치마’를 입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보고서 ‘어수룩한 김기덕이 또 한 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40대 중반의 강력반 형사인 아빠가 앞치마를 입고 밥을 차리고 또 그걸 벗지도 않고 밥을 먹는다는 건 비현실적인 설정 아닌가?), 영화를 다 보고 뒤집어서 생각하니까 ‘의도적인’ 설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두른 ‘앞치마’는 그가 집안에서 ‘엄마’를 대신하고 있다는 기호인 셈.

그리고 딸이면서 아내. 역시 같은 첫 장면에서 아침을 차린 아빠는 여진을 깨우기 위해서 헤드폰을 머리에 끼워주고 달콤한 음악을 들려준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장면을 본다면, 이건 남편이 연인으로서의 아내에게 하는 애정표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진은 아빠에게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가정에 부재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당연하게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아버지와 딸이 각각 아버지와 딸로서의 제자리를 찾으면서 끝난다. 그러한 자리 찾기에 대응하는 것이 '판타지에서 현실로'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핵심인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여진의 원조교제를 알게 된 ‘아빠’가 딸을 바로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미행하면서, 같이 잔 ‘아저씨들’한테만 분노를 표출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딸을 제지하지 않는가? 딸이 충격을 받을까봐서? 그런데, 여진의 원조교제는 죽은 친구를 위로한다는 명목의 ‘자발적인’ 행위이며, ‘애꿎은’ 아저씨들 또한 여진의 연락을 받고서 그녀의 바수밀다 판타지(=재영 판타지) 혹은 바수밀다행, 즉 ‘보살행’에 동원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제정신이 좀 아닌) 여진이 아버지에게 발각된다고 해서 ‘충격’을 받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 사정을 아빠가 몰랐다고 해도, 딸이 수첩에 적힌 아저씨들 모두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까지 뒤를 쫓아다니는 게 딸을 아끼는 아빠의 ‘상식적인’ 행동인가?(어디까지 가나 보자?!)

아마도 보다 적절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그에게서 딸이자 연인으로서의 여진에 대한 욕망이 금지된 욕망이자 판타지의 대상이었다면, 그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것은 그 금지된 욕망이 너무도 쉽게 구현된 현실이었다. 그가 당혹과 매혹을 동시에 느낄 법한 것은 판타지와 현실의 그러한 일치, 혹은 근접조우이다. 그는 여진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판타지를 대리적으로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러한 아저씨들(혹은 자기 자신)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에게 새겨진 ‘법’(상징적 질서)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게 아빠의 두 얼굴이다. 자상하면서도 아주 잔혹한.



김기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아빠’ 또한 다른 딸들에 대해서는 아저씨들이 여진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시선을 던졌을 거리고 얘기했는데(내 기억이 맞다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즉, 금지된 욕망, 금지된 향락에 대한 자기징벌인 셈. 그가 딸에 대한 이중적인 욕망의 주체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것은 이 욕망/향락의 주체를 제거함으로써이다. 화장실에서 그가 죽인 아저씨는 자신의 분신, 곧 자기 자신이었던 셈. 더불어 그를 대신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한 또 다른 아버지/아저씨를 상기해보자. 요컨대, 그가 ‘아버지’로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은, 즉 ‘아빠’에서 ‘아버지’로 이행하게 되는 것은 이 두 죽음을 대가로 지불함으로써이다. 모든 판타지의 끝은 죽음인 것(혹은 판타지에 의해서 유예되는 것이 죽음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가 2부이다.

3부 소나타는 ‘현실’의 장면이다. 부녀가 먼저 찾는 것은 아내/엄마의 무덤이다. 그들이 서로 대행해왔던 엄마/아내는 죽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는 아빠는 싫다는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려고 한다(이게 중요하다!). 이제껏 그는 딸에게 무얼 강요하거나 금지해본 적이 없을 듯한데(즉, 그는 ‘부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해서 여진이 역할모델로 찾은 것이 친구인 재영이다), 이번만큼은 고집대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강요에 뒤이어서야 강가에 세워둔 차에서 잠깐 잠이 든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매장하는 꿈을 꾼다(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 설정이다). 즉, 그녀에겐 더 이상 다정다감한 ‘아빠’가 아닌 (억압적인) ‘아버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더불어 그녀에겐 ‘죄의식’이란 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여진은 아빠의 연인(=판타지)이 아닌 딸(=현실)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아빠가 헤드폰을 끼워주던 ‘연인’으로서의 여진은 죽은 것이다.



한편으로 이 여진의 꿈은 2부에서 자신의 분신들을 죽게 하거나 죽임으로써 판타지로서 벗어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즉, 이 꿈의 주체는 아버지여도 무방하다. 그는 ‘연인’으로서의 딸을 죽임으로써 ‘딸’로서의 딸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 딸은 어떤 딸인가? 바수밀다나 사마리아 같은 신화적 판타지에 둘러싸인 여성이 아니라, ‘초급 운전자’로서 자기 앞가림도 아직 제대로 잘 못하는 10대 소녀이고, 적당히 어수룩하면서 폼잡으며 멋부리는 고딩이다. 한마디로 (약간 귀여운) 멍텅구리(nothing)이다.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법’이 개입돼 있다. 한 가지는 사회의 실정법으로서 살인자인 아버지를 잡아가는 법이고, 다른 한가지는 ‘운전하는 법’으로 가시화된 ‘아버지의-이름’이란 법이다(두 법은 같은 방향의 길을 간다). 이러한 법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딸은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을 잠식하고 있던 판타지(상상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이다.



나는 영화 <사마리아>를 얘기하면서, ‘바수밀다’나 ‘사마리아’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속임수라고 생각한다(감독 자신이 그런 걸 믿는다면, 설마 싶지만, 그건 자신의 속임수에 그 자신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건, 재영이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며 돈을 모은다는 말을 ‘진담’으로 믿는 수준의 속임수이며 핑계이다. ‘유럽’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건 유럽이라는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런 판타지를 차폐막 삼아서 가리고자 했던 건 아마도 죽음충동일 것이다. 아마도 재영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돼 있었을 것이다(그것이 이 소녀가 ‘더러운’ 아저씨들과의 관계에서 밝은 면만 보는 이유이리라). 그러니까 단속에 쫓겼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여진의 원조교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영의 죽음은 이 소녀에게 자신도 금지된 쾌락, 보살행에 나설 핑계가 되어 주었다. 사실, 그러한 비행(非行)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제지해 줄 대타자(the Other)로서의 ‘아버지’이다(수렁에서 건진 내 딸!). 그러니까 여진이 기대하는 대타자의 시선은 죽은 재영의 시선이 아니라 (엄마가 아닌)‘아버지’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아버지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되며, 이 영화는 그 시선의 욕망과 윤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한 부녀의 자기 자리 찾기에 대한 것이다...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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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5-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죽이네요. 최곱니다!

로쟈 2006-05-2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사람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죠.^^

외로운 발바닥 2006-05-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 방송을 통해 중간중간 보아서 거의 다 보긴 했는데, 그냥 원조교제에 관한 이상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었다니 놀랍네요. 역시 무엇이든 아는만큼 보고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

로쟈 2006-05-2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뜻'까지는 아니고, 그냥 '의미가 없지 않은' 정도입니다. 뭔가를 말하거나 쓰도록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인' 영화일 수도 있구요...

kleinsusun 2006-08-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신문에서 김기덕 기사를 보고, 김기덕에 대한 다른 기사들을 찾아 보다 로쟈님의 글을 보게 되었어요. <사마리아>를 보고 뭔가 위악적이다.....라고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를 알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p.s) 연합뉴스 기자에게 보냈다는 김기덕의 e-mail은 아무리 봐도.... ㅠㅠ

로쟈 2006-08-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은 그 자신이 본래 자학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그게 창작의 에너지이기도 하구요. 그의 영화들이 모두 쓰레기이면 쓰레기만도 못한 영화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
 

한국일보사와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위대한 세기: 피카소’전이 지난 20일부터 9월 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번에 전시되는 피카소 작품들은 세계 20여 곳의 미술관과 재단, 화랑, 개인 소장가들로부터 빌려왔으며, 대부분 국내에서 처음 전시되는 것들이라고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5. 23)에는 피카소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출간한 바 있는 작가 김원일씨가 이 전시회를 둘러본 소감을 적어놓고 있어서 옮겨온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피카소를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시기별 대작과 걸작 등 140여 점으로 만나는 이번 전시는 사실상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피카소 회고전이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5만여 점의 작품과 92세로 붓을 거둔 생애 자체가 이제 20세기의 전설이 된 피카소의 대표작 140여 점을 모아 전시한 서울시립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그림을 동경해 해외에 나갈 때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을 둘러보고, 그의 화집을 사모아 오다 몇 해 전 그의 전기를 썼던 필자로선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가 위대한 점은 그를 현대미술의 한 유형에 가둘 수 없는 자유분방했던 창작혼에 있다. 1900년 촌티를 못 벗은 스페인의 지방 화가로 파리에 입성한 후 청색시대, 분홍빛시대, 짧은 원시미술시대를 거쳐 입체주의, 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두루 섭렵하고 고전의 자기식 해석법인 ‘변형’의 또 다른 시도와 도자기 작업 끝에, 누구도 도달한 적 없던 최상의 경지를 정복한 피카소는 그야말로 시각예술의 모든 장르를 깨부순 활화산이었다.



-19세에 예술의 메카 파리로 나와 곤궁했던 초기, 가난한 이웃들의 애환을 슬픈 빛 청색으로 표현했던 ‘모성’‘곡예사, 어린이와 개’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단연 시선을 끄는 대작 ‘솔레르씨의 가족’은 가난한 양복점 주인의 가족을 정감 있게 표현한 청색시대의 걸작이다. 현대미술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 후 브라크와 함께 경쟁적으로 분석적 입체주의를 실험했던 시기의 ‘비둘기’도 전시됐다. 사물을 각과 선으로 자르는 수법의 이 그림은 현대 추상미술의 시발점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절대적이다.



-그의 세 번째 연인이었던 러시아 무용수 올가를 로마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고전주의로 복귀한 시기의 ‘우물가의 세 여인’을 통해 피카소 미술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빨간 카페트 위의 기타’는 평생 서로 질투하며 사랑했던 경쟁자 마티스의 색의 대비를 재해석케 하는 40대 피카소의 대표적인 주제다. 피카소의 대표적 걸작으로 흔히들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등을 연상하지만 ‘무용’을 제외해선 안 된다.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통, 엘뤼아르 등과 사귀기 시작했던 1925년에 그린 ‘무용’은 야만적이고도 난폭한 기법으로 파리 화단을 경악케 했던 작품이다. 나는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그려진 그 대작 앞에 오래 서있었다. 혼란스러운 꿈의 세계를 생생한 현실과 결합시켜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분해한 이 광란의 춤 그림 앞에서 ‘평면회화가 이제 갈 데까지 가버렸다’며 놀랐을 당시 파리 화단 평자들의 탄성이 들리는 듯 했다.



-당대 최고의 부르주아였으면서도 평생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피카소는 ‘스페인 내란’을 거쳐 군부 프랑코가 무력으로 조국을 장악하자 격분하여 탁구대보다 큰 대작 ‘게르니카’(1937)를 그렸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전 수 없는 밑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에 전시된 ‘미노타우로스’와 ‘우는 여인’도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미노타우로스의 광폭성과 전쟁에 수난 당하는 여인의 비극적 모습이 스페인 내란의 참상을 상징하는 한편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한 그의 현실참여 정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게르니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본 다섯번째 연인 도르 마르를 모델로 한 초상화도 여러 점 전시되어 있는데, ‘게르니카’가 색을 배제했듯이 초상화도 어두운 톤이 주조를 이룬다. 스페인 내란과 2차 세계대전이 피카소로 하여금 밝은 색조를 거부케 했던 것이다.



 

 

 

-피카소가 40대에 만난 네 번째 연인으로 청초한 마리 테레즈와 60대에 들어 만난 여섯 번째 연인 프랑수와즈 질로, 일곱 번째로 마지막 연인이 된 자클린느 로크의 초상화도 보인다. 마리 테레즈는 관능적이고 부드럽게, 프랑수아즈 질로는 이지적으로, 로크는 현모양처로서 모성성에 입각하여 각각 달리 해석했다. 평생 일곱 여자와 산 그가 한 여성을 만날 때마다 그의 그림도 변모를 거듭했음을 보는 것도 피카소 그림감상의 포인트다. “소설가가 자서전을 쓰듯 나는 그림으로 자서전을 쓴다”고 말했듯, 피카소의 그림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을 연대순으로 보면 그의 삶 자체가 올곧게 담겨 있다.



-피카소는 만년에 자신의 그림에 영감을 준 들라클루아, 벨라스케스, 마네의 그림을 재해석한 ‘변형’을 시도했는데,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출품돼 있었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십 장의 밑그림을 그리는 실험을 되풀이했는데, 밑그림 자체가 곧 완성품으로 평가된다. 90이 넘어서까지 담배를 즐긴 그는 “이제야말로 늙었다. 그러나 담배 맛은 20대 시절 그대로다”라고 말했듯.‘담배 피우는 남자’를 많이 그렸다. 관음증에 시달린 말년의 애교 넘치는 펜화 수채화와 함께 담배 문 남자상도 여러 점이 전시된 게 볼만 했다.


-그 동안 서너 차례 피카소 그림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세계 23곳의 기관 및 개인 소장처가 협조하에 그의 전 생애의 그림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전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미술 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자신의 교양 수준 점검을 위해 일차 관람해볼 만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전시다.

06. 05. 23.

 

 

 

 

P.S.  미술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피카소 전 초대권을 얻은지라 한번쯤 시간을 내보려고 한다. 영어판 대형화집도 우연히 염가로 구한지라 나름대로의 '준비'도 된 듯하다. 더불어, 미리 읽어볼 만한 책으로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아트북스, 2003)와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디자인하우스, 1996)을 꼽아본다. 전자는 도서관에서 대출했고, 후자는 소장도서지만 아마도 박스에 있는 듯하여 이 또한 대출해야 할지 모르겠다. 8월에는 몇 마디 더 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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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5-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일님이 쓴 책 피카소에 대한 전기도 꽤 좋은 책입니다.

로쟈 2006-05-2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작가를 닮았다면 진중한 맛이 있겠습니다.

바람돌이 2006-05-2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전시도 보고 싶어요. ㅠ.ㅠ

로쟈 2006-05-2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료가 좀 되는 듯하더군요...

해적오리 2006-05-24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께요. ^^
 

 

 

 

 

오늘자 한국일보(06. 05. 23)의 '이재현의 가상 인터뷰' 꼭지는 최근에 <모크샤>(싸이북스, 2006)가 출간됨으로써 다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 편을 다루고 있다. 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이 '가상 인터뷰'들 가운데 내가 전문을 다 읽은 건 이번 헉슬리 편이 처음이다. 그건 그만큼 이 신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책들' 코너에서 번듯하게 소개하려고 했지만, 지난 주말 한겨레의 리뷰를 비롯해서 언론에서 비교적 크게 다루고 있기에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에 대해서 몇 마디 하기가 어렵게 돼 버렸다. 해서, 일단은 그 '대안'으로 이 가상 인터뷰를 옮겨오고 몇 마디 군소리를 덧붙인다.

-영국의 소설가, 시인, 비평가. 그의 대표작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룬 고전 소설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ㆍ1932)이다. 원래 이 소설은 그의 친구인 생물학자 홀데인(J. B. S. Haldane)이 에세이 <다이달로스 혹은 과학과 미래>(Daedalus, or, Science and the Futureㆍ1923)에서 미래 사회의 과학기술의 진보를 너무 낙관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묘사했던 것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쓰여졌다.

-헉슬리보다 먼저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도 에세이 <이카로스 혹은 과학의 미래>(Icarus, or The Future of Scienceㆍ1924)에서 홀데인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다룬 바 있다.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로 밀랍으로 만든 날개로 하늘을 날려고 시도한다.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dystopia)는 가상적 미래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세계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1953년 헉슬리는 정신과 의사 입회 하에 환각제 메스칼린을 복용한 이래 10년에 걸쳐 메스칼린 네 번, LSD 네 번, 사일러사이빈 두 번 등 총 10번의 환각제 복용에 의한 환각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메스칼린은 미국 남서부 인디언들이 애용했던 페요테 선인장에서, LSD는 맥각균으로부터, 사일러사이빈은 멕시코 무당들이 신성시했던 버섯으로부터 합성 추출해낸 환각 물질이다. 헉슬리는 자신의 환각 체험에 기대서 사이키델릭 문화의 고전, 또는 히피의 경전이라고 이야기되는 에세이 <지각의 문>(1954), <천국과 지옥>(1956) 등을 집필했다(*<지각의 문>에서 그룹 '도어즈'이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헉슬리는 시인 윌리엄 버로우즈,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와 더불어 20세기 사이키델릭 문화의 선구적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재현(이하 현): 선생님, 최근 한국에서 선생님의 저서가 번역되었습니다. <모크샤>라는 제목의 책인데요. 약물 복용에 의한 환각 체험을 다룬 각종 에세이, 칼럼, 강연, 인터뷰, 서신, 르포 등을 엮은 책이지요. ‘환각의 사회문화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헉슬리: 모크샤(Moksha)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해방 또는 해탈을 뜻한다네. 내가 말년에 쓴 다른 소설 <섬>(1962)에서 가상의 섬 주민들이 복용하는 환각제의 이름이기도 하지.



현: <멋진 신세계>의 등장 인물들은 ‘소마’(Soma)라는 약물을 복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 소마와 모크샤는 어떻게 다른가요?

헉슬리: 소마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통치 수단이고, 모크샤는 정신이 고양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 중독성이 있는 소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도피를 하게 만들지만 모크샤는 그렇지 않네.

현: 선생님의 관점이 바뀐 것이로군요. 그 사이에 선생님의 환각 체험들이 있었던 것이구요.

헉슬리: <지각의 문>에서 썼던 것처럼 우리 지각의 문은 평소에 흐려져 있네. 내 주장의 요점은 환각 체험에 의해서만 그 흐려진 지각의 문이 열린다는 거지.

 

 

 



현: <지각의 문>이라는 구절은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인용한 것이고, 록 그룹 도어즈의 이름은 바로 선생님의 글 <지각의 문>에서 따온 것이지요?

헉슬리: 판타지 소설 <나르니아 연대기>의 저자로 알려진 C. S. 루이스의 <위대한 이혼>도 바로 블레이크의 그 작품과 연관이 있네만, 블레이크의 원작에서의 해당 대목은 이러 하다네. “지각의 문이 깨끗이 닦인다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나타나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그 스스로를 이미 닫아버렸기에/ 그의 동굴의 좁은 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현: 블레이크는 <신곡>의 단테나 <실락원>의 밀튼과는 달리, 지옥을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장소로 보았던 거로군요.

헉슬리: 그렇지. 블레이크의 관점에서는 천국이야말로 지각이 통제되어 있는 권위주의적인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지. 블레이크의 목적은 관습적인 윤리와 제도적 종교의 억압적 성격을 사람들에게 밝히려고 했던 거야. 그 당시로서는 매우 전복적이고 선구적인 주장이었지.

현: 그럼, 선생님은 환각제의 복용을 옹호하시는 겁니까?

헉슬리: 나는 환각제 복용이 부정적인 효과를 줄 수도 있고 중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경고해 왔네. 다만 우리의 제한된 지각의 틀을 넘어서는 초월의 계기를 환각제 복용이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지.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환각제를 복용하면 좋다는 얘기야. 환각제를 달리 정신 활성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현: 그러니까, 선생님의 주장은 일부 환각제가 술이나 담배, 혹은 의사가 처방해주는 각종 수면제나 진정제보다도 훨씬 더 그 사회적, 문화적 효용이 뛰어나다는 것인가요?

 

 

 


헉슬리: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도 덜하고 부정적 효과도 없다네(*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옹호는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에서도 읽을 수 있다. 가끔씩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마초 파동'은 도덕적 알리바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또 인류는 알콜 중독으로 인해서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써버리고 있어. 이러저러한 비용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 금지한다고 해서 환각 체험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환각제를 지혜롭게 사용하자는 게 내 주장이야. 내가 해 본 바로는 메스칼린, LSD, 그리고 사일러사이빈은 대마초보다도 부작용이나 중독성이 덜한 반면 그 효과는 훨씬 더 뛰어난 환각제일세.



현: 저는 해보지 않아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헉슬리: 환각 체험을 통해 내가 추구하려는 초월은 인간 정신 속의 또 다른 가능 세계로 가는 것이네. 이 세계는 평소에 우리가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인데, 환각제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는 게 내 주장일세.

현: 그 초월적 환각은 종교적이거나 예술적인 체험에 의한 것과는 어떻게 다른 건지요?

헉슬리: 크게 보면 한편으로 같은 것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종교나 예술에서의 초월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 반면에 환각제는….

현: 그렇지만 환각제의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헉슬리: 아까 얘기한 대로 그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담배나 술보다 덜 하다니까 그러는군, 자네는. 문제는 그것들에 빠져서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길을 찾는 거야.

현: 하지만 환각제 복용은 한국에서 아예 토론의 여지가 없는 이슈예요. 무조건 나쁘다는 거지요.

헉슬리: 그것은 사회문화적 관습에 해당하는 것이네.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이슈가 과학적, 심리학적, 정치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반면에 한국에서는 애당초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일 뿐이네. 내 관점에서는 의사가 처방해주는 신경안정제야말로 아편과 마찬가지로 나쁜 것이라네. 어쨌든 간에 모든 마취제, 흥분제, 진정제, 환각제들은 원시인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태고적부터 쓰인 것이지. 그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야.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아편은 인민의 종교”라고 했던 것이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저작이 오오키 고오스케의 <마약-뇌-문명>(정신세계사, 1991)이다. 요점은 우리 뇌 안에 마약 수용체가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마약복용도 가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마약에는 체내마약과 체외마약이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마약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 한가지는 체내마약으로서의 도파민이 문명의 산파라는 것.  

현: 그 말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패러디한 것인데요. 선생님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요?

헉슬리: 아닐세. 내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등장인물인 버나드 마르크스와 레니나 크로운이 부정적으로 다뤄지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네. 버나드 쇼와 마르크스, 레닌에 대한 내 평가를 담고 있는 인물들일세.

현: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서 사회주의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지요. 그런데 환각제의 복용은 사상적인 범죄보다 더 죄질이 나쁜 것으로 처리가 되어왔습니다.

헉슬리: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네. 내 관점에서는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 한다든가 배기량이 더 큰 차를 사려고 한다든가 아이들을 일류대학 보내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중독 현상이라네.

현: (허걱!) 선생님 말씀은 마치 그런 일들이 범죄일 수도 있다는 걸 함축하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얘깁니다.

헉슬리: 그렇게 타협적, 패배주의적으로 얘기해버린다면 자네는 ‘짝퉁’ 지식인에 불과한 거라네. 내 주장은 이 모든 것에 관해서 편견 없이 차근차근 제대로 따져보자는 것일세.

현: 글쎄요? 요즘 한국 정치판에서는 짝퉁이 명품보다 더 인기가 있어요.

헉슬리: 그럴수록 환각 체험이 더 필요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네. 내 책에서 말했듯이 “환각 체험은 아름다움과 참됨, 강렬한 미와 강렬한 진실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라네.

현: (헉) 더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 할 문제로군요, 선생님 주장은. 아무튼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06. 05. 23.

 

 

 

 

P.S. 참고로, 한국대중문화의 키워더 가운데 하나인 '대마초 사건'에 관한 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대중예술평론가인 이영미이며, '한겨레21'(546호, 2005. 02. 02)에 실렸던 내용이다. 제목은 '노래 군기, 확실히 잡다'.

-1975년 대마초 사건은 청년문화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유신정권이 만들어낸 기막힌 사건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포크나 록을 하던 가수 윤형주·김세환·신중현·김추자·이장희 등과 영화감독 이장호에 이르기까지 청년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던 대중예술인들을, 대마초를 피웠다고 구속하고 공식 활동을 완전히 금지해버렸다.

-대마초 바람은 1960년대 미국의 히피이즘에서 우리나라 청년문화로 스며들었다. 우리의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는 미국의 그것과 일치했으나 미국의 반전과 평화, 반청교도주의를 표방했던 ‘60년대 정신’과는 달리 일제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들의 새로운 대중문화·생활문화 세대교체 바람이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말하자면 미국 청년문화에서 대마초나 마약이 프로테스탄티즘이나 월남전 징집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었던 것에 견줘,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회의식을 동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시 젊은이들이 대마초에 대해 마약으로서의 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삼베의 재료인 대마는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담배 피우듯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호품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우리의 청년문화가 그다지 높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을 동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전 사회를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싶어했던 유신정권으로서는 그 정도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허용할 수 없었다. 파시즘은 취향의 영역까지 파고들어왔으며, 노래나 영화 같은 예술은 물론이고 패션이나 언어습관까지 통제하고 싶어했다. 이미 대마초 사건이 일어나기 몇년 전부터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경범죄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외래어로 된 가수 이름은 양파들(어니언스), 토끼소녀(바니걸즈), 김세나(김세레나) 등으로 바꿔야 했고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토요일밤에>)의 가사가 “긴 머리 분홍치마”로 바뀌는 해프닝이 속출했다.

-어떻게든 이 체제에서 살아남아 활동을 계속해보려던 이들의 노력은 확연했다. 조영남은 방송에서 김민기의 <아침이슬>의 “태양은 묘지 위에”를 “대지 위에”로 바꿔 불렀고, 쉐그린은 아예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머리 긴 채로 명동 나갔죠.… 바로 그때 이것 참 큰일났군요. 아저씨가 오라고 해요./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짧은 치마 입고 명동 나갔죠.”(<어머님 말씀>) 같은 ‘건전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일찌감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건전가요를 지었던 신중현은 1975년에 나온 음반에서 <뭉치자> 같은 노골적인 건전가요를 지어 부르는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그는 대마초 사건의 수괴로 지목돼 구속됐다.

-대마초 사건은 1970년대 대중예술사의 전·후반기를 나누는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이전까지는 일부 대학생·고등학생들의 전유물이었던 포크와 록이 1974년 드디어 어니언스의 <편지>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으로 남진과 나훈아를 제치고 최고 인기가요가 되고, 영화계에선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과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 완전히 대세를 장악하던 상황은, 대마초 사건으로 급전직하의 국면을 맞이했다. 상당수의 대중예술인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됐고, 포크와 록은 트로트 등 기성의 취향과 결합해 기성 가요계로 편입됐다. 이제 가수들은, 청바지가 아니라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성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대마초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군기를 잡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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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24 10:26   좋아요 1 | URL
**님/ 퍼가셔도 됩니다. 한데, 이미지 하나가 먹통이 됐네요...

비로그인 2008-09-03 08:57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아갑니다.^^
 

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인데, 막간 창고 정리를 한다. 이미 모스크바 통신에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란 제목으로 올렸던 글에서 김훈의 <현의 노래>에 관한 대목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2004년 7월초에 씌어진 그 글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업그레이드 버전은 '양파, 혹은 문체에 대하여')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때문에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먼저 문체에 대한 글을 참조하시는 편이 좋겠다). 나머지는 나의 수다이다(단, 이 '수다'는 18세 이상만 접근가능한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유의하시길).  

 

 

 

 

갑작스레 ‘정치론’을 꺼내들기 전에(*이 '정치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하겠다) 내가 몇 마디 거들었던 소설은 김훈의 <현의 노래>였다. 나는 김훈의 문체를 얘기하면서 그의 ‘허무주의’를 지적했고, 보다 구체적으론 그의 허무주의가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는 걸 주장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란 구절을 제시하면서 ‘질퍽거리는 구멍’을 김훈 문학행위의 핵심으로,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아갈마’(=숨겨진 보물)로 규정했다. 지젝을 흉내내어 말하자면, 그의 문학행위는 그 ‘질퍽거리는 구멍’을 중심으로 순회한다.

이에 대해서 ***님은 (어제 읽어보니까)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 ‘여성의 성기’를 가리킬 뿐이라고 반박하는 답글을 달아놓았는데, 좀 의외의 답글이다. 내가 제시한 건 그것의 ‘지시적 의미’가 아니라 ‘해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그 ‘질퍽거리는 구멍’의 주인은 “왕의 죽어 썩어가는 육체를 피해 도망친” ‘아라’이다. 나는 인용한 구절에서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라고 했다. 즉, ‘야로=김훈’이며, ‘질퍽거리는 구멍=허무주의의 근거’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하면, ‘질퍽거리는 구멍’은 ‘아라의 성기’일 뿐이라는 ***님의 지적은 ‘야로’는 ‘김훈이 아니라 야로일 뿐’이라는 얘기인데, 이게 ‘반박’으로서 성립하는 것인지? 혹은 ***님은 그것이 ‘반박’이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것인지? 이건 메타언어로서의 비평 원론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냥 농담으로 간주하겠다(혹 진담이라고 밝혀주신다면, 다음 번에 제법 진지하게 ‘반박’하도록 하겠다).

김훈의 에세이들을 얼마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적’ 상상력 혹은 묘사는 음(陰)과 양(陽), 즉 암컷-수컷의 대립과 교접을 근간으로 구축돼 있다(‘여자-남자’라고 말하는 건 김훈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암컷-수컷’이라고 말한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라는 시리즈의 제목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라는 음(陰)과 암컷(성)이야말로 (야로가 아니라) 작가 김훈이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 채워 넣어야 할 구멍이고, 먹여 살려야 할 구멍이며, 궁극적인 미스터리이자 ‘적막’이다. 나는 이 또한 김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The Origin of the World'(1866).

내가 개진한 것은 그러한 상식을 좀더 보충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보충하는 김에 더 확장하자면,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vagina)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로서의 팔루스(phallus)에 대응하는 ‘여주인-기표(Mistress-signifier)’라 할 만하다. 라캉에게서 팔루스가 생식기관으로서의 남근, 즉 페니스(penis)와 구별되듯이, 바기나는 생식기관으로서의 음문(陰門), 즉 불바(vulva)와 구별된다. 프로이트에서 라캉으로의 이행, 혹은 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가 <‘아버지’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페니스’에서 ‘팔루스’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다면(그리고 <‘징후’에서 ‘징환’으로> 또한 주요한 표어이다), 우리는 거기에 <‘불바’에서 ‘바기나’로>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기표’의 짝으로 ‘여주인-기표’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라캉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소쉬르/야콥슨’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바,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것이 ‘구조주의자’ 라캉의 맥심이다. 실제로, 라캉은 야콥슨과 깊은 교우를 가졌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소개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러시아의 언어학자 야콥슨을 알게 되며, 야콥슨은 프랑스에 갈 때마다 라캉의 집에 머물곤 했었다(레비 스트로스의 회고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참조). 유의할 것은 여기서의 전회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즉,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언어학적으로 전회시킴과 동시에,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으로 전회시킨다. 그 전회는 <‘랑그’에서 ‘랭귀스테리’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는바, 알다시피 ‘랭귀스테리’란 ‘랭귀지(언어)+히스테리’이다. 여기서 ‘탈구조주의자’ 라캉의 ‘또 다른’ 맥심이 나올 수 있는바,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가 그것이다(물론 이건 그가 직접 언명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리한 것이다.)

단순하게 대비시켜 말하자면, <에크리>(1966)의 저자로서 구조주의자 라캉이 ‘무의식의 언어’에 관심을 집중한 데 반해서(그의 주된 관심은 ‘상징계’였다), 흔히 ‘후기 라캉’이라 불리는 탈구조주의자 라캉은 ‘언어의 무의식’에도 관심을 돌린다(그의 주된 관심은 ‘실재’였다). 조이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실, 이 ‘언어의 무의식’에 관해서라면, 이리가레와 함께 라캉의 ‘나쁜 딸들’의 하나인 크리스테바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는바, 그녀의 <시적 언어의 혁명>(1973)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그녀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불가리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가 일약 프랑스 지성계의 히로인으로 떠오르게 되는 건 <바흐친, 말, 대화 그리고 소설>(1967)을 발표함으로써이다(그녀가 26세 때의 일이다). 이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일부 오역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안 그래도 상당히 난해한 논문이지만). 해서 요컨대, 라캉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야콥슨에 대한 참조는 기본적이며, 크리스테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흐친에 대한 참조는 필수적이다.

 

 

 



다시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 해부학적으로 ‘팔루스’란 단어는 원래 (남성의) 음경과 (여성의) 음핵, 즉 클리토리스를 가리키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에서는 “결여 혹은 상실의 기표”를 뜻한다(욕망은 언제나 이러한 결여와 관련된다). 그것이 ‘기표’라는 점에서, 음경과 무관하지만 한편으로 ‘결여/상실’의 기표라는 점에서는 음핵과 무관하지 않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여성의 음핵은 결여한/상실한 남성적 음경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해서 팔루스는 페니스, 즉 남근이 아니지만 ‘남근적’이라는 이유에서, 라캉 정신분석학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격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바기나는? 해부학적 기관이 아닌 상징 혹은 기표로서의 그것은 ‘결여의 결여’, ‘상실의 상실’의 기표이며, 미스터리의 기표이고 ‘여주인-기표’이다. 즉, 남성에겐 미스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남성’은 다 드러나 있다!), 남성에게는 결여가 결여돼 있으며, 상실이 상실돼 있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바기나는 ‘지옥’의 기표이며, 팔루스가 결여/상실하고 있는 것은 그 ‘지옥’이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하고만 관련짓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욕망의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바로 ‘결여의 결여’와 관련된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이며,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는 자’가 무엇인가를 갖고자 욕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자 욕망한다(즉 소유에 대한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소유에 대한 욕망도 있다). 주인-기표가 무엇인가를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주인’ 행세를 한다면, 여주인-기표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안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여주인’ 행세를 한다. 즉 칼이 아니라 칼집이 주인이며, 마개가 아니라 구멍이 주인인 것이다. 즉, 여주인.



다시, 야로의 말, 김훈의 말을 보자.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결여/상실이며, 부재이고 적막이다. “이 빨아당기는 속살” 앞에서,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이다. 속수무책이다. 왜인가? 그는 구멍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결여의 결여이고, 상실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주인-기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그는 여주인-기표를 욕망하며, 상실이고자 결여이고자 한다.

나는 게이에의 욕망, 팔루스를 제거함으로써 상상에서건, 실제에서건 ‘여성’(=암컷)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 구멍(=바기나)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지배하는 ‘여주인’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신의 구멍으로, 부재로, 결여로, 상실로, 적막으로, 미스터리로, 지옥으로 여주인은 주인을 할딱이게 하며 지배한다(천문학에서의 反물질 혹은 ‘암흑물질’은 이 여주인-기표의 천문학 버전이라 할 만하다). 혹 이런 것이 라캉 정신분석학의 페미니즘 버전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거울상?

레비-스트로스가 <친족의 기본구조>(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다)를 구성하면서 여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것에 대하여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아닌가란 질문을 받자, 그는 그것이 편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답한다(즉, 남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친족의 체계’도 이론적으론 가능한 것이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많은 건 사실이고 따라서 더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그것이 오른손잡이에 대한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어쩌다 보니 그러기가 쉬웠을 뿐인 것. 라캉의 욕망이론이나 ‘팔루스’론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그렇다면, 유표적 언명으로서 “여성은 없다”란 그의 테제의 거울상 버전은 “남성은 없지 않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이상한 것은, 즉 유표적인 것은 ‘여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없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남자가 없지 않다고 상상해봐?”). 오, 없지 않아서 불행한 것들이여! 무덤 속에 들어가 썩을 것들이여!..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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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모, 못볼 걸 봐서..........황급히 스크롤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로쟈 2006-05-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경고'해두지 않아서 죄송합니다(한데, 사진이 아니라 '누드화'일 뿐인데요)...
 

이전에 29회까지 연재했던 ‘최근에 나온 책들’의 30회를 쓰기로 한다(*이 글은 2004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졌고, 모스크바통신에도 나누어서 올린 적이 있다. '에피소드' 시리즈의 '에필로그'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시 올려놓는다. 31회부터는 '로쟈의 노트2'에 연재돼 있다).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제 한국식당에 갔다가 지난 토요일자 동아일보의 복사본 한 부 들고 왔기 때문이다. 토요일자에는 물론 북리뷰(‘책의 향기’)란이 실려 있다(동아일보는 아직 타블로이드판 북리뷰를 내지는 않는 모양이다). ‘책의 향기’에 소개된 신간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끄는 책 5권 꼽아보았다. 물론 이 선택은 나의 주관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반드시 꼽혀야 하는 것들로는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원제는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등이 있고,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도 슬그머니 출간됐지만, 지난주 북리뷰에는 빠진 걸로 봐서 이미 그 전 주에 다 ‘소화’되었던 모양이다. 언급한 저자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신뢰하는 이들이며(번역자들 또한 어느 정도 수준급이다), 그 책들은 모두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리라고 본다. 서울에 있었다면, 벌써 각 권의 몇 페이지씩은 읽어 넘겼을 테지만, ‘현지사정상’ 나는 이 책들을 인터넷서점의 ‘보관함’에 넣어두는 걸로 일단은 만족한다.

 

 

 


그럼,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무엇이냐? 그건 학술면에서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리차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이다. 원제가 'The Extended Phenotype'인 이 책의 2판이 1999년에 나왔는데, 국역본은 이 2판을 옮긴 듯하다(2판에는 다니엘 데넷의 후기가 들어가 있다). 알다시피, 도킨스의 출세작은 <이기적 유전자>이며, 이 책 역시 1판과 2판(개정판)이 있는바, 우리말로는 둘 다 번역돼 있다. 1판은 이용철 번역으로 동아출판사에서 나왔었고(현재는 품절된 걸로 보인다), 2판은 홍영남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현재도 잘 나가고 있다). 이번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은 그 후속작인데, 도킨스 자신이 (자신있게!)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유전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개체들마저도 자신의 운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아마도 책은 그 사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예컨대, “거미줄, 흰개미집, 새의 둥지와 같이 동물이 만들어낸 인공물들도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더 효율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확장된 표현형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논리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보면 우리의 문화와 문명도 결국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전자의 전략과 그 결과로서의 ‘확장된 표현형’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side-effect)이나 오작동(malfunction)이다. ‘눈먼 유전자’들의 전략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목표한 타깃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Not in our genes)!”라는 반박도 충분히 가능하다(하지만, 그런 반박의 타깃은 나이브한 ‘유전자 결정론’일 뿐이다). 즉, 진화는 적응(adaptation)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의 표현을 빌면) 외적응/굴절적응(ex-adaptation 혹은 exaptation)의 산물이기도 하다(지젝, <이라크>, 83쪽). 좀더 쉽게 말하면, 진화는 ‘의도한 적응’과 ‘의도하지 않은 적응’의 복합적 산물이다(가령, ‘의도하지 않은 아이’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하는 커플들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뒤집어 말하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조차도 ‘조물주-유전자’의 확장된 손(=섭리)이 만들어낸 ‘효과’일 뿐이며, 유전자의 메시지(=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다만 상상계-상징계-실재라는 프리즘을 관통하면서 굴절될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혹은 그 분리 자체가 ‘진리’일는지도 모른다), 이 두 ‘문턱’에 대한 참조 없이 우리의 마음과 문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물론 언제나 그렇지만, ‘수다’는 어느 때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말은 이런 책들을 읽으시라는 것이다. 그것도 진지하게 말이다.

 

 

 

 

오래 전 얘기지만, 한 대학 신입생이 당시에 과 조교였던 나에게 추천도서를 물어왔다. 내가 골라준 책 세 권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한권을 덧붙인다면, <장자>를 집어넣고 싶다). 물론 그 신입생이 이후에 이 책들을 다 읽었을 거 같지는 않지만, 만약에 다 읽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조개삿갓이나 말미잘, 수달 등과 다른 점은 그런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그런 읽기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우리의 게으른 정신은 저 혼자 알아서 크지 않으며 끊임없는 자양분과 닦달을 필요로 한다). 물론 ‘수달의 친구들’은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도킨스는 다윈-예수의 바울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는 라캉-예수의 바울인 지젝과 유사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과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또한 유사한 운명을 겪은 책들이다. 각각 <이기적 유전자>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어제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다. *위의 이미지)이라는 ‘처녀작’으로 (본인들도 놀랄 만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도킨스나 지젝이 자신들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리고 보다 ‘대담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 후속작들인 <확장된 표현형>과 <그들은…>이다. 하지만, 이 책들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점은 두 저자 모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가 도킨스를 처음 읽은 것은 11-2년쯤 전이다. <도덕적 동물>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의 <3인의 과학자의 그들의 神>(정신세계사)를 읽고, 그 3인의 과학자 중 한명인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눈뜨게 됐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게 <이기적 유전자>(동아출판사)의 1판이었다(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은 몇 년 뒤에 나왔다). 당시에 (적어도 국내에서는) 거의 주목 받지 않은 책이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미 제목만으로도 책은 나에게 숨통을 터 주었다. 이후에는 물론 ‘도킨스의 모든 책’이다(그러면서 알게 된 이가 <다윈 이후>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이다).

나는 작년에 <확장된 표현형>의 원서(2판) 또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장서용’으로 사서 서가에 꽂아 두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도 몇 권 더 갖고 있다). 번역본이 나온다면 <이기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굳이 원서를 살 필요는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 번역본에 이제야 나와서 다소간 ‘유감’이지만, 그 유감은 ‘반가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

 

 

 



두번째 책은 거의 모든 언론의 북리뷰에서 톱으로 다룬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원저(Who are we?)가 올해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아마도 곧장 국역본이 나온 듯하다. <문명의 충돌>도 나는 읽지 않았지만(하도 떠들어대기 때문에 안 읽어도 내용을 아는 것 같은 책들이 있다), ‘미국의 정체성’이란 제목이 더 걸맞은 이 책 또한 굳이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적어도 돈 주고 사서는). 하지만, 읽을 ‘필요’는 있는 책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세계관보다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한미관계에만 관심을 집중해 온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 책이야말로 평균적인 백인 사회의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의 절반은 이라크 침공의 명분 상실에도 불구하고 올 11월의 미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을 여전히 테러라는 적을 응징할 선봉장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전혀 신비롭지 않지만, 여전히 ‘미스터리’인 이러한 현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앵글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생각을, 그 이데올로기를 알 건 알고 직시할 건 직시해야겠다. 더불어 헌팅턴의 두 가지 예언, 즉 ‘문명의 충돌’과 (히스패닉으로 인한) ‘미국의 붕괴’ 중 한 가지만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후자 말이다(그것만으로도 그는 정치학자로서는 별볼일 없더라도 예언가로서, ‘선지자’로서는 후세에 이름이 남을 것이다).

 

 

 



세번째 책은 레너드 쉴레인의 <알파벳과 여신>(파스칼북스)이다. 저자는 생소하지만(*2005년엔 그녀의 책으로 <자연의 선택, 지나 사피엔스>도 출간됐다), 640쪽이란 분량이 마음에 들었다(가격도 만만찮지만. 3만 4천원이면 그 정도 두께의 러시아 책을 최소한 5권은 살 수 있다). 원제는 “The Alphabet versus the Goddess”(1998)이다. 그러니까 우리말 제목의 ‘과’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의 대립적/적대적 관계이다(즉 ‘알파벳 대 여신’).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외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문자 언어, 특히 알파벳은 선형적, 추상적, 남성적으로 특징되는 좌뇌적 사고를 강화하고 종합적, 시각적, 여성적 우뇌의 기능을 퇴보시켰다. 우뇌적 가치에 대한 좌뇌적 가치의 승리는 여신을 죽이고 가부장제와 여성 천시 사상을 가져왔다.”

물론 ‘가설적인’ 주장이지만(이러한 주장이 입증되려면, 비문자 사회, 즉 원주민 사회에는 가부장제나 여성 천시 사상이 생소한 것이어야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럴 거 같지 않다), 그걸 이 만한 분량으로 밀어붙인 노고에 대해서는 치하할 만하다. 아무튼 저자는 “이미지로의 회귀 현상을 의미 있게 보고, 앞으로 좌뇌와 우뇌, 남성과 여성의 가치, 문자와 이미지가 균형을 찾고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잠깐 든 생각은 요새 한글(=알파벳)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딸아이가 점차 문자에 익숙해지는 것이 그 아이의 행복과 무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다.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네번째 책은 얇은 프랑스 소설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열린책들).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고르기 힘들었을 것이다(*책은 1998년에 나왔던 것이 재출간된 형태이고, 오르세나의 소설들은 <새들이 전해준 소식>을 포함해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알고 보니 제목의 ‘두 해 여름’은 번역가인 소설의 주인공이 “독자로서 경탄하고 번역자로서 낙담했다”고 한 나보코프의 소설 <아다>(‘에이다 혹은 아더’)를 번역하면서, 진탕 고생하면서, 보낸 기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실제의 번역자를 모델로 했다는 이 소설에는 기껏 번역을 해놓으니까 “내 걸작을 망쳐놓았다”고 타박하는 작가 나보코프도 등장하는바,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번역에 대한 한바탕 소동을 다루면서 저자는 번역가에 대한 예찬으로 소설을 마무리짓고 있는 듯하다. “내가 서가에 꽂힌 책의 반은 번역가들 덕분에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번역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번역가는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바다를 건너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하니, ‘한 해의 겨울과 또 다른 해의 여름’을 번역에 바치고 있는 나로서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번역자는 고작 200쪽짜리를 쓰고/옮긴 것이니 번역의 괴로움을 말하기에는 뭐하다(내가 옮기고 있는 원서는 640쪽 가량이다).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이 옮기고 있는 <아다>라면 사정이 좀 다를 테지만(나보코프의 이 소설은 ‘신기하게도’ 우리말 번역본이 있다. 물론 지금은 구하기 힘들 테지만).

나보코프 또한 번역일에 낯설지 않은데, 그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러시아어로 옮긴바 있고,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방대한 주석을 달아서 영어로 옮겼으며, 그의 아들 드미트리와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씌어진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러시아어로 다시 옮겼다. 참고로, 그의 외아들 드미트리 나보코프는 아버지 나보코프의 영어본/러시아본 전 작품의 저작권을 갖고 있으며 가장 엄격하게 저작권을 관리/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국내에 나보코프의 책들이 잘 번역돼 나오지 않는 것은 그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너무 시간을 끌고 있다. 빨리 끝내도록 해야겠다. 마지막 책은, 복간된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이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인데, 이번에 개정판이 다시 나온 것. 서문에서 김훈은 “여기에 모이는 글 부스러기들은 대부분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라면 “그걸로 밥을 먹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건 김훈답지 않다. “그걸로 법을 먹게 해준 만큼” 그 글 부스러기들은 위대하지는 않을지언정 부끄러울 이유도 없다(밥벌이가 부끄러운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내가 이미 15년 전에 읽었던 것일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조금씩 교정을 보기도 했고, 새로 들어간 글도 있고, 새로이 시인 이문재의 발문도 챙겨 넣은 모양이니까 여기서 소개해도 부끄럽지는 않겠다…

2004.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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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3:19   좋아요 0 | URL
**님/ 서재주인에게만 생색을 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