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이정우-홍윤기 논쟁에 답한다"란 부제로 노마디즘은 한 '발원지'라 할 이진경씨가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을 옮겨온다. 이게 어쩌다 상반기 인문학 '최대 논쟁'의 모양새를 갖춰가는 듯하다(거꾸로 우리 인문학이 얼마나 '조용한 동네'인가를 반증한다!). 어쩌다 구경꾼의 자리에 서게 되어 이 '네버엔딩' 티격태격을 중계하게 됐는데, 어지간하면 좀 말리고 싶어진다! 이 글이 '종료 휘슬'의 역할을 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한겨레 21(06. 06. 23) 노마디즘은 침략주의인가

 -나는 철학자의 책을, 그것도 원문으로 몇 번이고 읽어야 철학이나 철학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역이 있어도 엔간하면 번역서를 읽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철학이란 철학적 문헌을 다루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유하고 사유를 삶으로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래서 '엔간한' 번역서들만 양산되는 것인가?). 그래서 훌륭한 이론과 개념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혹은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사유를 삶에서 분리된 것으로, 고상하고 그저 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이나 사상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최근 유목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철학자 이정우(왼쪽)씨와 홍윤기씨의 논쟁이 전개됐다. 발단은 천규석씨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이다.(사진/ 좌-한겨레 서정민 기자, 우- 한겨레 김태형 기자)

‘들뢰즈’를 전공한 분이 원전 타령?

-그렇기에 나는 농사꾼도, 노동자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의 극단화된 분업이 가로막아서 그렇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마르크스/엥겔스가 말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바로 그것 아닌가? 뒤집어 얘기하면, 그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런데 농사꾼이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굳이 대비해서 말하자면, 농사꾼이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즉, 농사꾼임에도 철학을 할 수 있다는 기대 밖의 가능성보다는 농사꾼이기에 자신의 삶을 걸고 그것으로 얻어낸 사유의 강도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꾸로 자신의 철학에 따라 농사를 짓게 된 철학자 역시 존경한다.

-내가 알기엔 들뢰즈도 그렇다. 그는 스피노자를 전혀 읽지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사유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반면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잘 알지만 그저 알 뿐이라면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말에 값하기 어렵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원전을 읽지 않았다면 들뢰즈 철학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는 말을, 푸코나 들뢰즈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말하는 것이 무척 당혹스럽다.

-들뢰즈도 푸코도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들어 발언할 주체의 자리를 제한하려는 이런 태도를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같다. 그것은 담론의 권력이 작동하는 가장 통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언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들뢰즈의 사상이 서양철학사의 정점에서 나온 철학이라는 말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는 철학사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지적 권력에 대해, ‘주류’(majority)를 형성하며 그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은 차라리 철학사와 대결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철학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사꾼이든 철학자든 다른 사상이나 철학자에 대해 언급할 때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모든 이론을, 더구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론을 성실히 엄밀하게 읽고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면 극단적인 비난이나 비판의 말은 아껴야 하지 않을까?(*알다시피, 이 '정확성'에 대해서 이진경씨와 '대학원생' 간에 논쟁(?)이 붙기도 했었다. 응답이 없는 논쟁이었기에 '논쟁 없는 논쟁'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예를 들어 들뢰즈가 억압으로부터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다는 말, 욕망의 해방이란 대중문화 수용자가 유행이나 이미지 등을 즐기는 찰나적 해방이라는 말, 인간의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말은, 들뢰즈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이유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욕망은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투여된다는 것, 따라서 성적인 것으로 환원해선 안 된다는 것이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대학원생'의 새로운 <안티 오이디푸스> 번역은 언제 나오는지?).

-그리고 욕망이 해방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혁명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었기에 있을 수 있었다”)을 주장한 것은 분명하지만, 욕망과 억압, 욕망과 권력을 대비시키는 단순한 구도는 거꾸로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령 정치학의 근본 문제란 “어째서 대중은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고 말할 때, 그는 욕망이 억압을 원하는 사태(파시즘의 경우가 대표적이다)가 바로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권력과 욕망이 다른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권력이 바로 욕망인 것이다.” 욕망은 어떤 배치를 형성하는지에 따라, 혹은 어떤 배치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혁명을 향하기도 하고 권력을 향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는 욕망의 배치를 이해하고 변환시키는 것이다.

‘전쟁기계’ 개념은 무엇인가

-유목주의와 전쟁기계에 대한 비판도 이와 비슷하다.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은 가치와 가치의 충돌이고, 어떤 지배적인 가치와 대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썼고, 들뢰즈는 카프카의 책이나 클레의 그림을 ‘전쟁기계’라고 했다. 전쟁기계란 기존의 지배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집합적 배치의 이름이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안을 통해서 기존의 가치, 이미 지배적 장치와 결합된 가치에서 탈주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과 충돌하게 된다. 대개는 국가 장치나 지배적 가치가 탈주선을 가로막으며 시작되는 충돌이다. 여기서 ‘전쟁’이 발생한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전쟁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하나의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몽골의 유목민들. (사진/ REUTERS NEWSIS/ ANDREW WONG)

-유목민의 전쟁도 이러하다. 유목민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유목하며 자유로이 이동할 뿐이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는 정착민들은 울타리를 쳐서 그들의 유목 행로를 차단하고 저지한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거기다.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은 이동과 유목에 적합하지만, 전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정착민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만들 때조차 그들의 전쟁기계가 조직의 모델이 된다. 이처럼 국가가 장악한 전쟁기계로 인해 유목적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로 오해되고 혼동된다(*그러므로 사단은 유목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착민에게 있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고 간주하는?).

-자유로운 행로를 차단하는 울타리가 잊혀진 채, 유목이 남의 땅을 침범하고 침략하는 것으로 비난되듯이. 그러나 소유나 울타리가 없다면 침범이나 침략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유로운 이동이 만들어낸 길들이 침략의 길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을 차단하려는 소유의 벽, 울타리와 성벽(만리장성!)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따라서 “들뢰즈가 유목민이 정착민 다음에 출현했다고 했다”는 말은 부적절한 말이다.)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다른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따라서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그것을 확장된 민족주의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유목민을 차라리 “움직이지 않은 자”로서 정의했다. 즉,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앉아서도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유목주의라고 정의한다. 유목민을 이주민과 구별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한다는 이유만으로 신자유주의와 유목주의를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를 이동하는 자본이란 어디를 가도 오직 돈밖에 모르는, 하나의 목적에 고착된 정착민이고, 잘 봐줘야 자신이 착취하던 것이 다 소진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시 착취하기 시작하는 이주민일 뿐이다.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자사의 광고 카피로 삼았다고 해서 노마디즘을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가가 게바라를 상품화했다고 해서 그를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태주의자의 적대감 이해 못해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생산성으로 유목과 농경을 비교하는 것은, 정확하게 공업에 의해 농업을 축출했던 논리를, 개발주의의 논리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유목민이 불모의 땅에서 산다는 조건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비교된다는 것은 접어둔다고 해도, 자본과 개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자기가 사는 땅을 그로부터 지키려는 농민이나 갯벌이나 산을 개발에서 지키려는 생태주의자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는 전쟁기계가 된다(배치가 달라지면 생태주의나 농업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생태주의자가 유목주의에서 위협과 적대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06. 06. 25.

P.S. 끝으로 내가 갖게 되는 의문: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앉아서도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유목주의라고 정의"할 경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반복'하는 몽골의 유목민들은 '이주민'으로 재정의되어야 하는 것인가?("유목민인 줄 알지만, 착각이야. 너희는 이주민들일 뿐이야!") 그들은 노마디즘이란 '영토'에서도 아무런 거처 없이 '자유로이' 이동해가야만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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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26 12:16   좋아요 0 | URL
오타 지적 ^^; 맨 처음 로쟈님의 '서문'에 '마리고' 싶습니다.

로쟈 2006-06-26 12: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yoonta 2006-06-26 13:08   좋아요 0 | URL
몽골의 유목민들은 말그대로 "외형상의 유목"이겠죠. 들뢰즈의 노마디즘(유목주의)는 이와는 다른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겠구요. 몽골 유목민이라고 할때의 유목민은 어디까지나 외형상(들뢰즈의 유목주의로 봤을때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이주민"으로 바꿔부를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그건 그렇고 로쟈님 코멘트에서도 볼수있듯 이진경씨는 비생산적인 이정우,천규석/홍윤기씨 논쟁보다는 "대학원생"의 물음에 대답해주면 더 재밌을것 같은데 말이 없네요. 김재인씨가 어떤 걸 지적했는지는 잘 기억은 안나는데 대답이 없는 것은 자신이 오류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걍 무시하는건가요?

로쟈 2006-06-26 13:19   좋아요 0 | URL
'외형상의 유목'이라고 하시니까 잠시 웃음이 났습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굴러온 돌' 얘기가 자주 나오던데,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노마디즘'이야말로 '굴러온 돌' 아닌가요? "그래, 이주민이라고 안 바꿔도 돼. 그냥 유목민이라고 해줄께. 한데, 너네는 그냥 외형상상의 유목민일 뿐이야. 명심하라구!" 같은 건가요?^^

<노마디즘>과 <천 개의 고원> 사이에서 무엇이 오고갔고, 무엇이 더 오고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도 당장은 지적할 수 없는데, 그런 '거래'야 당사자들이 알아서들 하겠지요. 서로 손해볼 게 없다거나, 아니면 대꾸해봐야 손해라는 판단을 했는지도...

yoonta 2006-06-26 13:48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게 원래 그런거잖아요. 일상적인 시선(지배적 시선)으로부터 조금 다르게 보기.. 굴러온 돌(들뢰즈의 노마디즘)이 박힌 돌(실제의 유목민들)에 대해서 딴지를 걸수 있다는 것..그러고 보니 그것도 벌써 노마디즘의 '실천'이군요..^^

로쟈 2006-06-26 14:15   좋아요 0 | URL
저는 유물론자여서(이진경씨의 정의는 좀 다르지만) 사유란 삶의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르게 보기' 같은 '애교'가 거창한 '실천'이 되는 지점은 삶의 무게를 떠안을 때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건 '멋있는 노마디즘'이 아니라 유목민들은 거친 손등입니다...

yoonta 2006-06-26 14:27   좋아요 0 | URL
근데 웃긴건 정작 그 실제의 유목민들이 자신을 "유목민"이라고 정의하는가?하는 건 또 아닌것 같아요. "거친 손등"을 가진 실제의 유목민들은 자신을 굳이 유목민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을 할필요도 없는거죠. 그냥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니. 그렇다면 유목민이라는 꼬리표자체가 외부적인 시선 혹은 관념적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그런 사유의 카테고리안에서의 들뢰즈의 시선은 또 새로운 의미가 있단거겠죠..^^

니브리티 2006-06-27 14:1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유물론에 따르면 저는 '관념론자'임에 틀림 없군요..^^'' 저는 사유와 삶은 별개이거나 불일치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오히려 저는 유물론의 다른 방식으로 정신이 직접 물질/삶이 되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체셔고양이처럼, 그 몸이 사라진 뒤에도 강력하게 남는 웃음이라는 정서(!)--정말 지젝은 탁월하다니까요--말이에요.

로쟈 2006-06-27 17:20   좋아요 0 | URL
"사유와 삶은 별개이거나 불일치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관념론 맞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잠옷을 입으면 되는 것이죠...
 

슬라보예 지젝의 문제작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도서출판b, 2006)이 드디어 번역/출간됐다. 원서는 2004년판으로 돼 있지만, 기억에는 2003년말에 출간됐고 나는 그 즉시 아마존에서 구입했었다. 한데, 1년간 러시아에 나가 있느라 책을 뜯어볼 시간이 없었고 귀국 후에도 책을 읽는 일은 이래저래 미뤄졌었다. 그건 단지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고 곧 번역서가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자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된 것.

책은 아마도 (지젝의 독자들 때문이 아니라) 들뢰즈의 독자들 때문에 꽤 팔려나가고 한동안 회자될 듯싶지만, 지난주 언론의 리뷰에서는 '지젝의 그림자'도 찾기 어려웠다(예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기자도 읽어야 쓸 것 아닌가? 아마 내주쯤에는 '정상적인' 리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읽은 기사들 중 가장 비중있게 다룬 것이 '들뢰즈 속 헤겔의 그림자'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국일보의 리뷰였다.   

"라캉 정신분석학과 헤겔, 마르크스를 융합해 현대 분석철학의 독창적인 영지를 확보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들뢰즈'라는 또 하나의 우람한 정신의 새 면모를 선뵌다(*'현대 분석철학'? 이 얼마나 '독창적인' 해석인가!). 들뢰즈가 제기한 개념인 '기관 없는 신체'(기관으로서 부여된 기능적 고정성에서 탈피해 다른 '기관'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질료)를 뒤집어 놓은 책의 제목처럼, 그는 들뢰즈의 공저서가 아닌 '의미와 논리' 등 단독 저서들을 텍스트 삼아 그 속에 내포된 헤겔의 그림자를 포착한다. 그리고 들뢰즈가 '생성' 이전의 '잠재'의 철학자임을 부각하고 있다."

그렇다, 이게 전부다! 해서 좀더 기다렸다가 괜찮은 리뷰를 읽게 되면 옮겨올까 생각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마당이나 쓰는 기분으로 몇 마디 거들기로 한다. 러시아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와 관련한 대목을 중심으로.

 

 

 

 

들뢰즈와는 다른 진영에 속해 있는 철학자의 들뢰즈론이라는 점에서 <신체 없는 기관>은 여타의 들뢰즈론과 구별되며 바디우의 <들뢰즈 - 존재의 함성>(이학사, 2001)에 근접한다(사실 지젝과 바디우는 절친한 사이라고).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들뢰즈에게서 헤겔의 그림자를 보거나 그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들뢰즈가 살아있다면 뜨끔하거나 기겁할 일이겠다). 그 문제는 복잡하니까 남겨놓도록 하고, 여기서는 지난 2003년 방한시 지젝이 '신체 없는 기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내용 중에서(이 강연 내용은 단행본의 후반부에 포함돼 있다) '신체 없는 기관'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한 '카메라의 눈'과 관련하여 지가 베르토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따라가본다. 아래에서 강연문 '신체 없는 기관'이 포함돼 있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로부터의 인용은 쪽수만을 적어준다. 

"(*히치콕의 <현기중>에서) 주체로 귀착되지 않으면서 주관화된 두 쇼트는 다름 아닌 순수하고 전-주체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초과분은 봉합-논리에 수용도어 객관적 쇼트와 주관적 쇼트의 표준 절차의 수준으로 환언(*환원)된다. 우리가 이 과도함(*과잉)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특정 주체의 완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상으로서의 응시'다. 그렇다면 (혁명영화의 절정기였던) 1924년에 지가 베르토프가 만든 옛 소련 무성영화의 고전인 <영화의 눈(Kino-Eye/ Kino-glaz)>에서 베르토프가 (카메라의) 눈을 영화의 상징으로 삼고 이 '자율적 기관'으로서으 눈을 통해 신경제정책(NEP) 하에서 구소비에트연방의 현실의 단편을 제시하며 1920년대 초반의 모습을 전달하는 것은 그리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332-3쪽, 강조는 지젝의 것)

"무엇을 흘깃 훔쳐보다(to cast an eye over something)'라는 관용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눈에서 안구를 뽑아 주위에 던진다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 동화에 나오는 엽기적 백치 마르탱이 어머니가 아들이 영영 맞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아들에게 교회에 가서 그곳에 있는 여자들을 좀 훝어보고(cast an eye over the girls there) 오라고 했을 때 한 행동이다. 그는 우선 푸주한에게 가서 돼지의 안구를 샀으며, 그후 그것을 교회로 가져가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던졌던 것이다. 후에 마르탱이 어머니에게 여자들이 자기의 행동에 그리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지 않다고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혁명 영화의 소임이다: 즉, 카메라를 부분대상으로 사용하여 주체에게서 도려내어져 주위로 자유롭게 던져질 수 있는 '눈'으로 만드는 것이다."(334쪽, 강조는 나의 것)

"베르토프 자신을 인용하면: 영화의 카메라는 손부터 발까지, 또 발부터 눈이나 다른 부분까지 가장 효율적인 순서로 관객의 시선을 이끌고(관객의 안구를 질질 끌고 다니고)(drags the eyes of the audience), 세부를 조직할 때는 일반적으로 몽타주 기법을 구사한다."(*강조는 원문에 따름. 리차드 테일러와 이안 크리스티 편, <영화 공장: 러시아-소비에트 영화 문건 1896-1939>로부터의 인용인데, 334쪽 각주에는 <영화의 요인(The Film Factor)>로부터의 인용으로 잘못 기재돼 있다. 'Factory'를 'Factor'로 잘못 본 것. 참고로 테일러는 헉명기 러시아 영화에 정통한 영화학자이다.)

이어서 지젝은 카메라에 대한 이러한 베르토프적 통찰을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연계시킨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괴이한 순간들 중 하나는 자신의 영상과 얼핏 맞닥뜨렸을 때 그 영상이 자신에게 시선을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다. 한번은 거울 두 개로 머리 측면에 이상하게 돌출된 부분을 살펴보려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갑자기 내 옆얼굴이 흘깃 보였다. 그 영상은 내 모든 몸짓을 이상한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본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거울상이 우리로부터 분리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의 시선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다리언 리더)"(334-5쪽) 즉, 전-주체적, 혹은 탈-주체적 영상(이미지)가 태어나게 되는 것.

"이 괴기한 경험은 자신의 영상의 한 부분이지만 거울과 같은 대칭적 관계를 회피하여 라캉이 '대상 소타자(*대상 a)로서의 응시'라고 부른 것을 예증한다. 이 불가능한 지점으로부터, 즉 '밖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볼 때의 외상적 특징은 내가 응시를 위한 외부대상으로 대상화되었다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대상화된 것이 내 응시 자체라는 것이다. 대상화된 응시는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므로 내 응시가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니며 내가 그것을 도둑맞았음을 뜻한다."(335쪽) 즉, '내 것이(었)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응시', 그것이 '신체 없는 기관'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이러한 주제에 잘 들어맞는 영화가 김성호 감독의 <거울 속으로>(2003)가 아닐까 싶다. (아직 보지 않았지만) ''동일한 형상의 사물을 비춰주면서도 반대적인 면을 보여주는 거울의 양면성을 세심하게 포착한 심리스릴러"라면 말이다. 더구나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고전영화 <현기증>의 뼈대에 거울공포란 소재를 도입해 현대적인 공포영화로 만든 작품"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젝은 잠시 <로스트 하이웨이>를 경유해서 다시 <현기증>(1958)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간다.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가 금문교 밑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마들렌(킴 노박)을 구한 다음인 그의 아파트 장면을 자세히 분석해볼 것을 제안하면서.

하지만, 이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야겠다. 스코티는 마들렌을 들고 가는 게 무거웠겠지만, 독자들은 지젝을 이 정도 읽는 것도 버겁다! 벌써부터 '이론적 현기증'을 느낀다면 엄살이라고 해야 할까? 겨우겨우 버티고(Vertigo) 버틴 분들은 이제 <신체 없는 기관>으로 손을 뻗으시면 되겠다. 굿럭!..

06.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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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2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보고 싶어라!!!! 근데 제대로 읽으려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릴 듯 하네요..


근데 지젝이 분석철학의 대가였군요.ㅋㅋㅋ
글고 저 신체없는 기관이 맞나요, 신체 없는 기관이 맞나요?

로쟈 2006-06-2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못 썼나요? 단순한 국어 상식에 의지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덧붙여,'제대로' 사는 건 더 오래 걸립니다!..

비로그인 2006-06-25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단순한 국어 상식인가요? 책들 마다 표기가 달라서.....

근데 제목만 훝어봐도 재기가 철철 넘치는 군요.
제목이 죄다 패러디인데.

언제가, 아마도 경험일원론의 세기가 될 것인가?
들뢰즈 뒤에 달라붙기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ㅋㅋㅋ
 

해마다 이맘때면 한국전쟁 관련서들이 출간된다. 올해는 아니어서 관련서들을 검색해보다가 눈에 띄는 사진집에 대한 소개 기사를 옮겨온다. 간략한 기사는 '민중의 소리'(06. 06. 22) 서재진 기자의 것이다.

  

-6.25 한국전쟁 발발 56주년을 앞두고 한국전쟁 당시의 상처들을 담은 사진집 2권이 사진전문 눈빛 출판사에서 20일 발간됐다. 소설가 박도씨가 2004년 2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의 사진자료실에서 찾아낸 한국전쟁 사진 230여점을 선별,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를 펴낸 것.

-이와 함께 지난 2004년 발간했던 <지울 수 없는 이미지1>에 담았던 사진과 그 후 찾아낸 사진 중 100장을 골라 전쟁을 직접 체험한 김원일 문순태 전상국 이호철 등 소설가 4명의 증언 에세이를 함께 실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동시에 발간했다.

-소설가 박도씨는 두번째 사진집에서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 혹독한 전쟁기를 어 떻게 이겨내셨을까"에 중점을 두고 사진을 골랐다고 밝혔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는 그래서 전란 속에서 신음하는 민초들의 참혹한 모습이 담겨있다. 사진집의 1부에는 전쟁 중의 남대문, 서울역, 국회의사당 등 당시 보기 드물었던 컬러 사진 40점이 수록돼 있고, 2부에는 전쟁으로 울부짖는 피란민과 고아, 전쟁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이 전쟁 포로 및 군의 활동상과 함께 실려있다.

△이미 숨진 엄마의 시신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남매의 모습

△집단학살 현장에서 수습된 시신 중에서 가족을 확인한 유족들이 울부짖고 있는모습.(1950년.10월 함흥)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부상당한 여인들이 응급구호소에 모여 있는 모습.(1951년.2월 수원)

△미 공군 전투기가 원산 시가지를 폭격하는 모습.(1951년)

△월미도에서 체포된 뒤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검색을 당하고 있는 북한군 모습.(1950년 9월)

06. 06. 24.

 

 

 

 

P.S. 한국전쟁 관련 주요 저작들을 꼽아본다. 소련의 문서고가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에 관한 새로운 진실들이 더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최근에 나온 정병준의 <한국전쟁>(돌베개, 2006)은 그러한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고. 이에 대한 동아일보의 소개기사.

 

 

 

 

"<한국전쟁>은 전쟁 발발 과정을 옛 소련과 미국의 문서 등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특히 6·25전쟁 직전 국군 17연대가 황해도 해주로 먼저 침공하자 북한이 반격해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남침 유도설’의 허구를 명백히 입증한다. ‘해주 공격설’은 개전 직후 북한군에게 형편없이 밀리던 국군이 선전용으로 퍼뜨린 것에 불과하며 당시 국군이 이미 궤멸상태여서 침공 능력도 없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남침유도설의 허구는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러시아 TV에서 방영한 한국전쟁 관련 다큐프로그램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북침'을 주장하면서 TV로는 조작된 필름을 내보냈었다("사실은 정반대였다"라면서 필름을 다시 거꾸로 돌리며 나레이터가 해설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래는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사이트에서 찾은 김일성(1912-1994)의 사진(1950년 11월에 찍은 모습이다. 그의 나이 38세때니까 내 나이로군!). 소련군 장교 출신이었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찾아서 스탈린의 지지를 확인받고 1950년 6월 '통일전쟁'을 감행했다(그의 항일투쟁 경력은 소련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러시아 방송은 보도했다. 러시아 역사에서는 빈번했던 일이지만, 김일성은 전설적인 항일투쟁 영웅 '김일성 장군'의 참칭자였다).

그리고 아래는 미군이 북한군의 회유를 목적으로 뿌린 삐라(삐라에도 진실은 있다! 말해지지 않은 진실, 수령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을 이른바 '대리전'으로 규정하는 전통적 시각이 이미 담지돼 있다(이와는 반대로 '내전'으로 규정하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시각이다). 그것이 사실판단의 문제인지, 해석의 문제인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아무려나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했던 당사자들의 역사적 책임이 감면되는 것은 아니다. 한홍구 교수의 김일성에 대한 평가를 들어본다. 한겨레21(04. 07. 08)의 역사이야기 칼럼 중 '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의 일부이다.

-김일성은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상태에 놓여 있던 1937년 보천보전투를 통해 혜성같이 나타났지만,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에서는 민족의 태양에서 괴뢰집단의 괴수로 전락했다(*1937년이면 김일성의 나이 25살 때의 일이다). 괴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꼭두각시란 뜻이다. 제 민족을 가리키는 말 중에서 가장 고약한 괴뢰란 말을 남과 북은 서로에게 마구 써먹었다. 지금도 수구언론은 ‘국방백서’가 ‘북괴’를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을 트집잡고 있다.

-김일성을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로 모는 것은 해방 직후에 남쪽에서 정권을 잡은 친일파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그런데, 김일성에게 조언을 했던 소련 선전 담당자의 회고가 그렇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1950년대 중반부터 주체를 앞세우고, 자주노선을 추구했음에도 ‘괴뢰’란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이 ‘꼭두각시’는 소련의 해체로 자신을 조종할 배후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혼자서 춤을 추는 ‘괴뢰’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괴뢰였다.

-김일성은 참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항일무장 투쟁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아니, 모든 조선 사람의- 소중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항일무장 투쟁 시절 이래 김일성의 꿈은 조선민족 누구나가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었다. 쌀밥에 고깃국은 김일성에게는 사회주의 건설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살아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심장이 고동을 멈춘 직후부터 그를 어버이로 섬기던 이북 주민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일치될 수 없다. 아니, 남쪽 사회 내부에서도 김일성을 놓고 평가가 일치할 수 없다. 그가 항일무장 투쟁의 영웅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해도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데, 그는 분단과 전쟁을 거쳐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첨예한 남북 대결의 주역이었다. 이북의 역사가들은 항일영웅 김일성의 업적을 너무나 과대포장했기에, 이북 밖의 학자들은 김일성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이북 학자들에 비하면 그를 깎아내린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또 그 주된 원인을 설사 미국 탓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김일성은 이북의 경제난과 인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남쪽 사회 내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만큼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단 하룻밤이라도 한데서 새어본 적이 없는 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단 한번도 발품을 팔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 속의 밀림 속에서 밤을 지샌 투사들을 모욕하게 할 수는 없다. 항일투사 김일성에 대한 폄하는 곧 1930년대 후반 이래의 우리의 항일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폄하가 된다(*친일파에 대한 혐오가 김일성의 우상화를 정당화하는가? 김일성을 폄하하면 갈데없는 친일파인가?).

-김일성을 한국전쟁의 ‘전범’으로 규탄하는 일은 친일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탈출구였다. 그들에게 모든 역사는 1950년 6월25일에 시작하는 것이었다(*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현대사의 기원이다!). 그 이전에 우리가 왜 분단됐는지,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일제의 압제하에서 누가 일제의 앞잡이였고, 누가 항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이 찾아왔는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군대를 동원한 자가 모두 뒤집어쓰는 그런 게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들, 특히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이 누구 손에 죽었는가도 상관이 없었다.

-김일성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민족의 태양에서 소련의 괴뢰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온 전범으로 추락해갔다. 분단된 조국에서 그가 계속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가 북쪽에 있는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형제들의 수령,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평양은, 아니 전 이북이 흐느꼈다. 물론 박정희가 죽었을 때도 착한 백성들은 연도에 나가 슬피 울었다.

-그러나 그 강도가 똑같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이건 넌센스 같은 질문 아닌가?) 다 독재자들의 세뇌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거대한 가족국가의 가부장이었던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의사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이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것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정치종교학일 것이다)...

-(*한교수의 결론) <세기와 더불어>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김일성은 20세기의 인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의외의 평가이다. 민족주의나 공산주의가 실용주의인가? 더구나 실용주의자로서라면 그는 실패한 것 아닌가?). 덩샤오핑은 쥐를 잘 잡는다면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떻냐는 흑묘백묘론을 설파하여 유명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이 그보다 25년 전에 밥만 잘 먹을 수 있으면 되었지 왼손으로 먹건 오른 손으로 먹건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작은 나라 이북에서 그의 말은 법이 되고 그의 경험은 철학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와 권력을 누렸고, 유례가 없는 권력승계를 이루었다. 나도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부자간의 권력승계가 탐탁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비난만 하다 보면, 정치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상식을 깨고 20년가량 북을 다스린 사실을 잊게 된다.(*적절한 지적이다. 북한의 권력세습은 상식 밖이다 혹자는 미국 부시 정부도 일종의 '세습 정권'이라고 평하지만)...

 

 

 

 

-김일성, 그는 레닌이 되기에는 너무 오래 집권했고, 호치민이 되기에는 일가친척이 너무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나중에 비록 왜곡됐을지언정, 그가 세운 나라에는 분명 동학농민군의 꿈과, 의병과 독립군의 꿈과, 항일 빨치산의 꿈이 담겨 있었다. 어린 누이가 빚에 팔려 첩살이 가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당 간부가 되고, 장군이 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그런 나라였다. 소수의 빨치산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 건국 반세기 이후에 한국전쟁 때보다 더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 10년이란 세월은 아직 형제들의 수령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것일까?(*아마도 100년은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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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6-06-24 18:1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로쟈님.....^^

로쟈 2006-06-25 00:41   좋아요 0 | URL
몇 개의 사진을 추가했습니다...

yoonta 2006-06-25 00:53   좋아요 0 | URL
로쟈님 페이퍼를 즐겨 보는 사람으로서 느끼는건데..최근들어 이미지올리는 센스가 많이 향상되신 것 같다는..^^

IshaGreen 2006-06-25 00: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눈팅만 하다가 처음 글 남기네요. 퍼갈께요^^ (되죠?^^;)

로쟈 2006-06-25 10:09   좋아요 0 | URL
'이미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 주의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인데, '센스'의 문제이기에 앞서 '품'의 문제입니다.^^

로드무비 2006-06-25 10:14   좋아요 0 | URL
많은 품, 약간의 센스도 필요하죠.
감사히 퍼갑니다.

로쟈 2006-06-25 17:52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

쿠자누스 2007-03-31 11:15   좋아요 0 | URL
러시아가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남한관 문 열어
시사저널 [683호] 2002년 11월 26일


"일어 안내원에게 남쪽에서 온 선물만 따로 진열한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반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왜 없겠습네까. 있습네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전에는 독립된 전시 공간이 없다가 10일 전쯤 전시실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선물이 다 있는데 유독 김영삼 대통령의 것만 없었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그이는 수령님 돌아가셨을 때 조문도 못하게 했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동아일보>가 김일성 주석의 보천보전투 소식을 알린 기사를 동판으로 떠서 선물한 것...눈에 띄었다....

안내원의 마지막 말이 ... ‘이 분들이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수령님을 깊이 흠모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라는 것이다

로쟈 2007-03-31 18:54   좋아요 0 | URL
김일성의 항일투쟁 전력을 '왜곡'하는 게 아니라 그 김일성이 김성주와 동일인이 아니라는 얘깁니다(그러니까 김성주가 자신을 김일성으로 참칭하면서 부분적인 항일투쟁 경력을 '영웅적인' 것으로 턱없이 과장한 것이죠). 러시아에서 굳이 김일성의 전력을 왜곡/폄하할 이유는 전혀 없지요. '김일성 신화'를 복창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은 문화일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기사는 "中 한손엔 '마르크스' 한손엔 '공자' "였다. 중국의 현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두 인물이 마르크스와 공자라는 건 흥미로우면서도 의미심장하다(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한 출판사 사장은 원고료를 독촉하러 간 소설가에서 '마르크스와 장자'에 관한 썰을 한참 풀어대는데, 그게 우스개가 아니라 '현실'인 것! 비록 '장자'가 '공자'로 대체됐지만). 두 사람이 현재의 중국 이해의 키워드인 것. 이 키워드들과 관련한 허민 베이징 특파원의 두 기사를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06. 23) 중국의 '두 얼굴' 통치 이데올로기

-한쪽에서는 마르크스연구원이 문을 열고, 다른 한쪽에서는 공자(孔子)학원이 세워진다. 한 손엔 마르크스의 어록, 다른 한 손엔 공자의 말씀이 쥐어져 있다. 최근 마르크스주의와 유교이념을 양대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중국의 두 얼굴이다. 마르크스 살리기가 도농차별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처방이라면, 공자 부활은 화해 분위기 정착과 평화 이념 전파를 위한 문화적 통치도구다.

◆ 되살아난 공자 = 중국에서의 공자 부활은 국내용과 국제용,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먼저 국내적으로는 정부와 학계가 앞장서 공자붐을 일으키고 있다. 공자어록이 출간되고 주요대학에 유교연구원 또는 유학원이란 이름의 공자사상연구소가 세워지고 있다. 정부는 공자 탄생일인 9월 28일 공자의 고향 산둥(山東)성 취 푸(曲阜)에서 정부 고위관리와 외교사절 등이 대거 참석하는 기념행사를 벌일 계획이다.

-나라 밖에서는 공자학원 설립 운동이 활발하다. 아프리카를 순방 중인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방문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르완다에도 공자학원이 세워졌다. 앞서 지난해 말엔 케냐 나 이로비대학에 아프리카 첫 공자학원이 개설됐다. 이들 3개국 이 외에도 아프리카 각국의 5개기관이 공자학원 개설을 신청해 놓고있어서, 아프리카에서의 공자학원은 곧 8개로 늘어날 예정이다. 해외의 공자학원은 중국문화 전파의 첨병이다. 공자학원은 2004 년 12월 서울에 1호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세계 각국에 모두 75개가 설립됐다. 중국 정부는 올 연말까지 이를 100개로 확대한 다는 계획이다.



◆돌아온 마르크스 =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권력 장악 이후 눈에 띄는 국가적 차원의 중요 프로젝트를 들라면 그중 하나 가 ‘마르크스주의 공정’이다. 지난해 12월 16일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이데올로기 담당)이 한 공식석상에서 “당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무제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마르크스주의 연구 공정’이 정식 출범됐다.



-이후 중국 사회과학원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가 연구원으 로 승격됐고, 최근 국가급 및 성시(省市)급 연구원들이 속속 들 어서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앞으로 10년동안 이 공정을 진행시키면서 3000여명의 학자들을 참여시켜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정치학, 경제학 등 제반 분야 연구 성과를 방대한 저작으로 담아낼 예 정이다(*마르크스주의가 한국에서는 '혁명철학'일는지 몰라도 중국에서는 '관변철학' 혹은 '통치이데올로기'이다. 그나저나 3000여명의 학자라... 쪽수가 많긴 많은 나라군!) .

-언론도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의 최대매체인 신화통신과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최근 각각 ‘홍색의 기억(紅色記憶)’이란 고 정란을 두고 사회주의혁명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다(*'인민일보'란 말 대신에 굳이 '런민르바오'라고 써주어야 할까?). 중공 중앙당 교의 한 정치학 교수는 “중국식 사회주의체제의 이해와 구축을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를 중국의 실정에 맞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런민(人民)대학의 한 사회학 교수는 “국내적으로는 충성심을 고취하고 국가권위를 확립시키며 민족적 응집력을 높이고, 국제적 으로는 평화와 조화이념을 강조하는 데 공자말씀보다 좋은 게 없다”고 강조했다.

 

 

 

 


문화일보(06. 06. 09) 공자가 살아야 중국이 산다?

-“한국에서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면서요.”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 모 교수의 느닷없는 질문에 기자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의 질문이 몇년전 한국의 베스트셀러를 거론한 것이란 사실을 안 것은 오래지 않았다. “과거 한동안 중국에서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조화사회를 건설하려면 공자가 다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교수는 왜 죽은 공자를 다시 살려내야 하는지 메모지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설명했다. “지금 전환기의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이즘만으로는 되지 않는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요구하고 있다. 화해와 평화이념을 갖고 있으면서도 흔들리는 체제를 안정시키며 통치의 권위를 보장해주는 국가경영의 화두가 필요하다. 바로 유교사상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일련의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이 왜 어느날 갑자기 “조화가 소중하다”며 ‘공자 왈(曰)’ 했는지, 왜 갑자기 국가를 영광되게 하는 8가지와 욕되게 하는 8가지라는 ‘바룽바치(八榮八恥)’를 설파했는지 알 것 같다. 왜 지도부가 기회만 있으면 ‘허셰(和諧)론’을 강조하고 중국 외교부가 거액을 들여 해외에 중국문화 원이란 이름으로 ‘공자 학원’을 세우고 있는지도 이해가 된다. 모두가 다 유교이념의 전파다.

-그러고 보니 민간이나 학계쪽에서도 이미 공자의 부활을 위한 크고 작은 시도들이 있었다. 지난해 말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스승의날을 현행 9월 11일이 아니라 공자 탄생일인 9월 28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런민(人民)대는 그해 9월 학기부터 ‘국학원(일명 공자연구원)’을 설립했고 사회 과학원은 ‘유교연구중심’을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공자 왈 맹자 왈’ 하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독경(讀經)운동’이 번진 것도 이때였다.

-중앙당교의 교수는 말했다. “지금은 조반(반란을 꾀함)이 아니 라 조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대 홍위병들은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강화를 받들어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부르짖었다. 기존 질서는 붉은깃발 아래 압사했고 모든 혁명적 선동과 가치의 전복이 정당화됐다. 공자가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는 이 논법은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조반의 시대는 곧 공자 수난의 시대였다.

-그후 40년, 시대가 확 바뀌었다. ‘무한 욕망’과 ‘사적 소유’라는 양대 복음을 추동력으로 진행된 시장경제적 발전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됐다. 하지만 그 부산물로 빈부격차, 부정부패, 체제불안, 사회저항이 생겼다. 이 같은 모순과 갈등구조를 치유하기 위한 통치 이념이 절실히 요구되면서 체제안정, 권력순응, 질서유지, 권위숭상이 귀하게 여겨지게 됐다. 민족적 응집력을 높이면서도 평화와 조화이념을 강조하기 위해 위정자들은 결국 공자의 부활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쯤 되면 죽었던 공자가 중국에서 다시 살아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중국 정부는 공자 탄생 2557주년을 맞아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9월28일 공자의 고향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일 계획이다. 지난해의 경우 중앙방송(CCTV)을 통해 기념행사가 생방송된 뒤 국민들의 애국심이 한껏 고취됐다는 보고가 있다. 앞으론 중국의 새 지도부 출범 때마다 공자의 묘에 가서 제례를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교이념이 언제까지 중국사회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지는 미지수다. 공자의 부활 자체가 사회경제적, 시대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깨어난 공자는 자신의 부활을 달가워할까.

06.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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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6. 06. 23) 북리뷰에서 저자 인터뷰 기사를 옮겨온다. <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시공아트, 2006)의 저자 김규원씨와의 인터뷰인데, 타이틀은 "진짜 잘 노는 법 보여드리죠". 월드컵이란 '축제'도 현재 진행중이므로 한번쯤 귀기울여볼 만하다.  

 

 

 

 

-축제의 첫 장은 역시 술로 시작하고 있었다.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긴 색은 샹그리아 술병에서 흐르는 붉은색이다. 기대했던 진한 붉은색 대신 분홍빛이 감도는, 그래서 색정이 달콤하게 뚝뚝 흐르는 액체가 유리병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분홍빛 알콜로 얼굴을 내민 팜플로나는 곧 핏빛 축제로 젖어 이방인을 맞는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 시내를 가로지르며 더운 콧김을 내뿜는 황소떼가 달려가고 비명과 탄성이 온거리에 울려퍼진다. 살벌한 소몰이에 자칫 어리숙한 관람객은 목이 꺾이고 배가 뚫리는 일도 다반사. 순교자 성 페르민을 기리며 13~14세기께 시작된 성 페르민 축제는 오늘날에도 죽음의 광란까지 마다않는 ‘붉은 축제’다.



-‘축제연구자’ 김규원(39·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연구원)씨는 지난 10년 동안 산 페르민 축제를 비롯해 축제 문화가 발달한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장난감 산업 박람회라는 실용적 목적을 유감없이 달성하는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장터 축제, 개성있는 정원의 잔치가 펼쳐지는 쇼몽 쉬르 루아르 축제, 2차 대전의 폐허를 딛고 독창적인 공연으로 승부해 명성을 얻은 아비뇽과 에든버러 페스티벌…. 축제 속에 풍덩 빠져 그 감흥을 소상히 적은 <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시공아트 펴냄)는 서로 다른 빛깔과 향취를 뿜어내는 축제의 매력을 전하는 낭만적인 기록이다.

-대학에서 조경을 공부한 김씨는 95년 도시계획을 전공하러 유학길에 올랐다가 문화지리학을 전공한 프랑스인 스승의 말에 솔깃해 축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축제를 만나면서 도시를 즐겁게 연구할 수 있었어요. 축제는 압축적으로 도시를 보여주거든요.” 이 도시의 어떤 역사적, 정치적 상황이 이런 축제를 만들었을까, 도시마다 왜 축제는 다를까, 축제가 펼쳐지는 공간은 어떤 곳인가…. 축제를 경험할수록 이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99년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저마다 축제아닌 축제를 열어 ‘축제 망국론’까지 터져나오던 시기였다. 그만큼 ‘축제 연구자’가 절실했다. 김씨는 곧 문화관광정책연구원에서 축제를 평가하고 장기 계획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축제가 행사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아요. 축제는 자발적이고 즉흥적이고 우연에 기대지만, 행사는 스케줄이 있어야 하고 시간에 맞춰야 하고 실수가 없어야 하지요.”(*즉 '행사'는 '축제'의 적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유사하게 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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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축제가 즐거움을 주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축제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며 같은 행위가 반복되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따라하고 재미를 느끼지요. 여수진남제에서 시민들이 <뱃노래>를 따라 부르며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요. 또 하나는 속죄양 또는 희생제물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는 모든 ‘잘되는’ 축제엔 반드시 ‘죽이는’ 의식이 있다고 했다(*사실, 이 내용 때문에 기사를 옮겨왔다. 축제의 비결은 '죽이는 의식'에 있다는 것! 이건 바타이유의 종교론이기도 하다).

-꼭 양이나 소를 잡지 않아도 여러가지 상징적 행위들이 있지요. 풍어제에서 배를 띄워 바다로 보내는 거나, 짚인형을 태우거나, 풍자적 언어로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하회마을에서 탈춤을 추며 양반을 사정없이 씹거나, 쾰른 카니발에서 시장을 본딴 인형을 태우는 의식 등은 바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축제의 속성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없이, 그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즐거움만을 제공하려는 ‘하이서울 페스티벌’의 실패는 이런 데서 온다고 그는 지적했다(*누가 좀 죽어줘야 했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응용하자면, 비도덕적인 축제나 도덕적인 축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잘 만든 축제와 잘 만들지 못한 축제만이 있을 뿐이지요.”(*축제는 '선악의 저편'에 있다.)

-그래서 그는 “축제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고도의 예술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현대 추상화를 잘 그리는 기술을 가르쳐줄 순 없잖아요. 딱딱한 문체로 축제 보고서를 쓰다보니, 축제의 본질적인 매력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화려한 축제의 체험담을 펴낸 까닭은, “좀더 많은 사람들이 축제의 감흥을 깨달아 진짜 잘 노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라고 강조했다.

06.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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