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도 있지만 날씨는 많이 누그러졌다. 바람도 가을티를 더 내는 바람이고. 가을이 오기 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지만 또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고 아무래도 더 바빠질 것이다(이제 이런 딴짓을 할 새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9월이면, 또 연례행사처럼 떠오르는 게 21세기의 화두처럼 돼 버린 9.11이다. 오늘 뉴스에서는 뉴욕경찰이 희생자들의 음성이 담긴 비상통화 테이프를 공개했다고 전한다:

"9.11 테러 5주년을 앞두고 뉴욕경찰 당국이 테러 당시 구조를 요청한 희생자들의 음성이 담긴 비상 통화테이프 1천6백여건을 공개했습니다. 이번 통화 테이프 공개는 희생자 유족들이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 공개를 요구하는 재판을 벌여 이뤄졌습니다. 공개된 내용에는 애절하게 구조를 기다리는 희생자들의 목소리와 구조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의 소리, 생존자 구조를 위해 사투를 벌이는 구조대원들의 음성 등이 생생하게 담겨있었습니다."  

이 외상적(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한 문학적 응전 혹은 애도가 문학전공자라면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출간된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 2006)은 주목할 만하다. 어제 한겨레에 실린 최재봉 기자의 리뷰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 굳히게 됐는데, 흥미로운 건 그의 아내인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또한 이번에 같이 출간됐다는 점. <사랑의 역사>(민음사, 2006)가 그것이다. 아마도 두 작가가 부부라는 걸 고려한 듯한데, '뉴욕 최고의 문학커플'이라고 하니까 관심과 질투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질투는 뭔가?). 좀 무거운 9.11 얘기는 가을에 하도록 하고, 좀 가벼운 커플 얘기에 초점을 맞춰서 두 작가와 작품에 대한 리뷰들을 따라가본다. 

중앙일보(06. 08. 19) 고독과 폭력으로 헝클어진 두 개의 '사랑 퍼즐'

-모처럼 소설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 나란히 출간됐다. 지은이들이 부부 사이란 것도 눈길을 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니콜 크라우스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다. '분더킨트(wunderkind.신동)'라 불릴 정도다. 1977년생 남편 조너선이 2002년 발표한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LA타임스가 선정한 그 해 최고의 책이 됐고 '가디언 신인작가상'과 '전미 유대인 도서상'을 받았다(*그러니까 25살에 떴다는 얘기이다. 프린스턴대 재학시 조이스 캐롤 오츠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이에 질세라 세 살 많은 아내 니콜이 2005년 발표한 <사랑의 역사>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됐다. 문학과 철학에 심취하던 명문대 재학 시절 만났고 죽어도 글을 쓰겠다는 야망도 같고 문단의 평가에서도 어느 한 쪽이 기울지 않으니 천생연분이지 싶다(*부부간에 상대방보다 더 잘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한 작품은 10대 소녀가, 다른 하나는 아홉살 소년이 이야기를 이끈다. 언어의 실험과 퍼즐식 짜맞추기에서 독자의 폭넓은 상상력을 요구하는 두 소설은 각기 독창적이고 전혀 다른 이야기다. 부부가 발표 전까지 서로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것을 먼저 읽든지 뒤의 것이 앞의 것을 거의 완전히 지워버릴 정도로 둘이 전혀 다르다. 그러면서도 다 읽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랑의 역사>는 '사랑한다'는 말이 의미를 상실한 시대에, 절절한 사랑을 담은 한 권의 책이 돌고 도는 구조다. 그 밑에 인간의 짙은 고독과 전쟁의 폭력이 깔려 있다. 작가를 꿈꾸는 폴란드계 유대인 레오는 첫사랑 소녀 알마를 찾고 있다. 레오가 알마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원고는 나치의 학살이 시작되자 언론인 친구 즈비에게 넘어간다. 칠레로 망명한 즈비는 현지에서 만난 로사의 사랑을 얻기 위해 레오의 원고를 스페인어로 베껴 전한다. 알마라는 이름만 제외하고 모든 이름이 바뀐 소설은 다시 칠레를 여행하던 미국 청년 다비드의 손에 들어간다. 그는 연인 샬럿에게 이 소설을 선물하고 둘이 낳은 딸을 알마라고 이름 짓는다. 다비드를 암으로 잃은 뒤 일에만 매달리던 샬럿은 책을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10대 소녀가 된 알마는 동생 버드와 함께 자기 이름과 같은 소설의 주인공을 찾아나선다. 한편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고 미국으로 탈출해 열쇠공이 된 레오. 그는 앞서 미국으로 이민온 첫사랑 알마(소녀 알마와는 동명이인)를 찾지만 알마는 레오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책도 연인도 자식도 잃어버린 레오. 그러나 그는 삶이 아름답고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것을 믿는다. 레오의 믿음은 엄마에게 새 연인을 찾아주려는 소녀 알마의 노력과 만나게 된다.

-이 극적인 만남의 이면에 작가 니콜의 기지와 작품의 활력이 숨어 있다. 소설을 정치적 비판이 아닌 일상의 드라마로 만든 힘은, 자신이 신이라 믿는 엉뚱한 소년 버드의 풀이에 있다. "레오 거스키이며 즈비 리트미노프이며 메레민스키이며 또한 모리츠인 그 사람"을 찾아 누나와 연결하는 버드의 '오해 속 지혜'가 소설을 푸는 열쇠다. 과연 인생은 무겁지만 지혜는 가볍고, 인간은 우울하지만 신은 즐겁다.

-남편 조너선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사진, 그림,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는 문체 등에서 아내의 작품보다 훨씬 실험적이다. 초반부에는 책장이 다소 느리게 넘어간다. 그러나 죽음과 상실의 공포, 그리고 사랑과 표현의 한계라는 주제는'사랑의 역사'와 동일하며, 막바지에 한 줄기 햇살처럼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도 비슷하다. 12살 소년 오스카는 9.11 테러로 죽은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열쇠를 발견한다. 열쇠가 담긴 봉투에는 '블랙'이라고 씌어 있다.

-오스카는 뉴욕에 사는 블랙이라는 이름을 가진 216명을 차례로 만난다. 이것이 그가 아버지를 애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스덴 폭격을 겪은 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이 두려워 자식(오스카의 아버지)마저 외면한 할아버지 역시 죽은 아들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면서 용서를 빈다. 이들의 긴 애도는 마지막에 이르러 아주 엉뚱한데서 해결된다. 암으로 죽은 아버지의 유품인 열쇠를 찾던 블랙이라는 사람과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오스카가 만나면서 닫혔던 문이 열린다. 그런데 혹시 이 모든 '블랙씨 찾기'는 아빠를 잊은 것처럼 보이던 엄마가 창조한 플롯은 아닐까?

-열쇠 모티프, 세대 간의 대화, 복잡한 플롯을 해결하는 방식, 유대인이라는 가족사가 드러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두 작품은, 그리고 아내와 남편은 다르면서 닮았다. 라이벌이면서 천생연분은 가능할까? 부부가 똑같이 성공하고 싶은 우리 시대 연인들에게 두 소설은 다름과 닮음의 멋진 예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폭력의 어두움이 일상이 된 문명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든다.(권택영 교수/ 경희대 영어학부)

동아일보(06. 08. 19)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우리에게는 조숙하고 위악적이어서 매력적인 어린 화자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새의 선물>의 진희, <양철북>의 오스카,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 <자기 앞의 생>의 모모, 그리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등장하는 크라우스 형제까지. 열 살을 채 넘지 않은 이 아이들은 그 어떤 어른들보다 성숙하게 삶의 모순을 바라보고 기록한다. 아직은 우리에게 낯선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주인공, 오스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홉 살 소년 오스카는 혼란의 역사 한가운데에 서서 그 어느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언어로 ‘지금-여기’의 삶을 말한다.

-이 책은 9.11 테러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한 개인과 가족 그리고 그들에게 할애된 미래를 한꺼번에 앗아간 역사적 사건은 폭력에 의해 좌초될 수밖에 없는 인생의 근원적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세 명의 화자의 육성이다. 9·11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오스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할아버지, 죽은 언니를 잊지 못한 채 유령처럼 떠도는 남편을 지켜봐야만 했던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흥미로운 점은 오스카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슬픔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소설 사이사이에 직접 찍은 사진이나 노트를 삽입한다. 마치 ‘거기 있음’을 증명하는 사진이나 영상처럼, 작가는 기록된 모든 사유들을 그 자체로 보여 주고자 한다.

-이 책에서 일차적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삶의 비의(秘意)를 알아 버린 듯한 조숙한 아이의 위악이지만 결국 밑줄을 긋게 하는 부분들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상실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다. 작가는 상실이란 인생의 비의가 아니라 본질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횡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상상력임을 제안한다. 자꾸만 사라져 가는 언어의 질감, 밑줄을 긋던 손길마저 잠시 멈추게끔 하는 사유의 힘이 이 책을 관류하고 있다.

-작가의 부인 니콜 크라우스도 작가다. 크라우스의 작품 <사랑의 역사>도 이번에 함께 출간된다. 두 사람 모두 뉴욕 문단의 ‘분더킨트(신동)’로 통하며 독자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국내에서는 어떤 반응을 얻을지 궁금하다.(강유정 문학평론가)

 

한겨레(06. 08. 18) 9·11 그순간 잃어버린 말 ‘사랑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미국의 젊은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29)가 지난해 발표한 소설이다. 미국 문학계에서는 부인 니콜 크라우스(32)와 함께 ‘신동’으로 불린다는 작가의 두 번째 장편으로 포스트모던한 형식 실험을 적극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수십 장의 흑백사진, 한 페이지에 한 줄만 싣거나 아예 백지 상태로 비워 놓은 페이지들, 문틈으로 엿듣는 상태를 표현하느라 토막토막 끊어진 문장들, 이미 쓴 글 위에 몇 겹씩 겹쳐 써서 아예 까맣게 뭉개진 페이지, 그리고 오탈자를 골라 표시한 빨간 흔적과 글씨 연습을 한 총천연색 낙서장까지, 소설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들이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라면 이런 기법상의 특징들보다는 이 소설이 9.11 테러를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에 더 큰 관심을 보일 법하다. 얼마 전에는 미국의 원로 작가 존 업다이크(74)가 <테러리스트>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해 화제와 논란을 함께 낳은 바 있다. 작가들이 최초의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 이 미증유의 사태를 상대로 한 문학적 대화에 나서고 있다는 뜻이겠다.

-소설은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아홉 살 소년 '오스카 셸’이 이별과 상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 과정을 추적한다. 죽은 아버지의 유품에서 찾아낸 수수께끼의 열쇠, 그 열쇠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블랙’이라는 성씨를 가진 이를 찾아 드넓은 뉴욕 시내를 순례하는 오스카의 여정은 얼핏 무모해 보이지만, 오스카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 절박한 의미를 지닌다.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야(…)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더 이상 상상하지 않게 될 테니까”(356쪽)라는 것이 그의 변명인데, 테러에 대한 어린아이다운 공포는 소설 앞부분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일 년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무슨 이유에서인지 샤워를 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웠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은 더더욱 그랬다. 현수교, 세균, 비행기, 불꽃놀이, 지하철의 아랍인들(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닌데도),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등 공공장소의 아랍인들, 비계, 하수구, 지하철 격자창, 주인 없는 가방, 신발, 콧수염을 기른 사람들, 연기, 매듭, 높은 건물, 터번, 나를 공포에 빠뜨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59쪽)

-그런데 오스카가 이토록 아버지의 흔적 찾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다. 사건이 있던 날, 그는 학교에서 일찍 귀가해 전화기에 남겨진 아버지의 네 개의 메시지를 듣는다. 비행기와 충돌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있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음성이었다. 네 개의 메시지를 다 듣고 난 직후 아버지의 전화가 다시 걸려오는데, 어쩐 일인지 오스카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 몸이 얼어붙은 것이다. 1분 27초 동안,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짖음, 유리 깨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긴박한 목소리가 메아리쳤음에도 오스카는 전화를 받지 못했고, 결국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 전화 역시 끊긴다. 그는 이 사실은 물론 마지막 순간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 자체를 다른 가족, 특히 엄마에게는 비밀로 한다.

-소설은 주인공 오스카와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 사람을 화자로 삼아 진행된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 그러니까 오스카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할머니는 손자에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서전 형식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1963년 5월 21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아이에게’라는 제목으로 쓰기 시작한 할아버지의 편지는 2차대전 당시 독일 드레스덴에서 겪은 폭격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고통스럽게 증언한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사랑하는 여자를 폭격으로 잃고 미국으로 건너와 그 여자의 동생과 결혼한 할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지 못하고 독일로 떠났다가 아들이 죽은 뒤에야 귀환한다. 자신의 상처를 아내와 나누려 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선택은 할머니에게 또 다른 상처로 남고, 할머니는 소설 말미에서 손자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너에게 지금까지 전하려 했던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란다, 오스카.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할머니가.”(439쪽)

-결국 소설의 세 화자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했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소통’의 결여라 할 수 있다. 오스카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그리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한 마디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것이 이들 모두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던 것. 오스카가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실어증인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손자를 향해 거듭해서 ‘미안하다’는 글씨만 써 보이는 소설 말미의 눈물겨운 장면,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각자의 아버지이자 아들이 되는 사람의 텅 빈 관을 파헤쳐 그 안에 할아버지가 40년 동안 할머니에게 보냈던 내용 없는 편지를 채워 넣는 상징적인 장면은 뒤늦은 사랑의 고백에 해당된다.

-할아버지 못지않게 드레스덴의 악몽에 시달리던 할머니는 이런 꿈을 꾼다. “꿈 속에서, 무너진 천장이 우리 머리 위에서 전부 다시 만들어졌어. 불길은 폭탄 속으로 도로 들어갔고, 폭탄은 위로 올라가 비행기들의 몸통 속으로 도로 들어갔어. 비행기 프로펠러들은 거꾸로 돌았지. 드레스덴을 가로지르는 시계 초침처럼.”(428쪽) 사건과 시간을 되돌리는 할머니의 ‘마술’은 오스카에게도 전수된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오스카는 아버지에게서 ‘뉴욕의 잃어버린 여섯 번째 구’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으로 되돌아가며,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가 마지막 문장이 된다.



-마지막 문장으로 소설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독특한 소설의 마무리는 15장의 사진이 담당한다. 9·11 당시 불 붙은 무역센터 건물 바깥으로 추락하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인데,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어 책장을 빠르게 넘겨 보면 남자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솟아올라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출판사 민음사는 이번에 포어의 부인 크라우스의 소설 <사랑의 역사>(한은경 옮김)도 함께 번역 출간했는데(*모처럼 성공적인 기획인 듯하다), 이 소설가 부부가 배우자에게 바친 헌사가 눈길을 끈다(*소설 안에 쓰지 않은 게 다행이다). 각자 상대방을 ‘내 아름다운 여신’과 ‘내 인생’이라 지칭하며 자신의 사랑을 경쟁적으로 과시하는 듯한 형국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6.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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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6-12-03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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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경향신문의 21세기 책 깊이 읽기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1901-1991)의 <현대세계의 일상성>(1968)을 다루고 있다. 그 친숙한 '일상성'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도록 한다.

 

 

 

 

경향신문(06. 08. 19) 로봇화된 일상…탈출구를 찾아라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앞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알 듯하다. 하지만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들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일상이란 너무 자명해서 굳이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일상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어떨까. 너나 없이 손사래치며 뒤로 물러날 것이다.

-성긴 언어의 올로 일상을 붙잡으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거칠게나마 윤곽마저 그려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철로 만든 새장 같다. 새장 안은 온갖 자질구레한 물품들로 꽉 차 있다. 옷장, 냉장고, 침대, 주방기구, 장난감 따위의 물품 목록은 끝이 없다. 거기에서 줄거리 없는 인생들이 하품나는 나날을 견디고 있다. 일상은 지루하고 공허하며, 일상의 삶은 초라하고 지리멸렬하다. 권태와 환멸은 일상에 딸린 부록이다.

-일상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상은 내동댕이쳐진 채 부패해왔다. 일상이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보들레르는 현대 도시의 세속적 일상을 생생한 감각으로 묘파해냄으로써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불렸다. 발터 베냐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19세기 파리의 일상을 거대한 몽타주로 재현하려 했다. 비록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현대적 이미지들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했다(*여기에도 베냐민 지파 사람이 또 있군).



-현대의 일상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인 분석과 성찰은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을 기다려야 했다. 이 책은 현대의 일상을 치장하고 있는 가면을 벗겨내고, 그 밑에 감춰져 있는 현대 세계의 내면을 폭로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나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르페브르의 저작에서 풍부한 영감을 얻었다. 1960년대 유럽 사회가 분석 대상이지만, 르페브르의 문제 의식은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며 여전히 유효하다.

-르페브르는 왜 하필이면 일상을 문제 삼았을까. 그가 보기에 일상의 견고성은 혁명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렸다. 더구나 일상을 문제 삼지 않는 태도 자체가 문제였다. 일상을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르페브르의 문제 설정이었다. 그는 현대인을 ‘호모 코티디아누스’(Homo Quotidianus, 일상인)로 명명한다. 일상인은 로봇을 닮았다. 특정한 행위만을 반복하도록 프로그램화된 로봇 말이다.

-로봇화된 현대 일상인의 행태를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은 소비의 영역이다. 르페브르는 현대 세계를 ‘소비 조작의 관료 사회’로 이름 붙인다. 현대인들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상품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바깥의 힘과 의지에 종속된다. 그 ‘바깥’은 자본가나 기술관료, 정치권력이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등이다. 소비 조작 사회에서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보다 우월하고, 이미지나 기호가 상품의 본질을 집어삼킨다.

-르페브르는 소비사회의 전형적 표본으로 자동차를 꼽는다. 자동차의 쓸모는 이동수단이다. 현대인은 이동 목적으로만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는다. 자동차에는 여러 겹의 이미지와 기호가 포개져 있다. 그것은 신분과 위엄, 안락과 힘, 모험과 속도의 상징이다. 소비자들은 자동차에 덧씌워진 상상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또한 자동차는 도로교통법으로 자신의 법을 일상에 강제한다. 이처럼 자동차는 현대인의 욕망을 비틀고 일상을 정복한다. 상품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것은 광고의 마법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광고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상품의 언어다. 그것은 소비자를 유혹한다. 블루진은 영원한 젊음으로, 고급 주택은 부와 성공으로, 다이아몬드는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첨단 가전제품은 가정의 행복으로 변주되어 일상을 포위한다. 광고 이미지의 후광을 빌리지 않으면 상품은 빛을 잃는다. 오늘날 광고는 이미지의 독재자로 군림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소비 조작 사회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과연 있는가. 르페브르는 마르크스의 정신적 후예답게 유토피아주의자다. 그람시의 어법을 빌리면 ‘지성의 비관주의자, 의지의 낙관주의자’다. 르페브르의 기획은 영구 문화혁명이다. 문화혁명의 강령은 간결하다.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하라!” 자신의 육체와 욕망, 시간을 타인에게 저당 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되찾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소외를 넘어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자는 선언이다(*강령만을 놓고 보자면, 나는 '르페브르주의자'에 속하겠다).

-르페브르의 어떤 명제들은 이미 진부해져버렸다. 상품의 이미지와 기호가 소비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문화분석의 상투어로 통한다. 장 보드리야르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은 르페브르의 통찰을 넘어섰다. 그것은 선구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일상의 냉혹성과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르페브르의 탁월한 안목이었다. 오늘날 일상의 성채는 더욱 견고해지고 아무도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거꾸로 혁명은 일상을 꿈꾸는가?). 그럼에도 인간의 총체성을 향한 열망은 결코 훼손되지 않는 가치로 남아 있다. 우리가 르페브르를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박천홍|도서평론가)

06. 08. 19.

P.S. 르페브르의 주저들이 더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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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인도 출신의 미국대학 교수 가야트리 스피박(1942- )의 저서가 한권 더 번역되었다.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갈무리, 2006)가 그것인데, 이전에 출간된 <포스트식민 이성비판>(1999), <다른 세상에서>(1987) 등을 포함하면 스피박의 알짜들은 챙길 수 있게 되었다(신간은 1993년에 나온 책으로 <다른 세상에서>와 함께 양대 주저로 꼽히는 <포스트식민이성 비판>보다 먼저 나온 책이다).

한겨레의 자투리 소개는 이렇다: "포스트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이론가로 알려진 가야트리 스피박은 난해한 저술로도 유명하다. 스피박의 사유체계를 국내에 소개해온 태혜숙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를 번역했다. 제목이 반영하듯 이 책은 제국주의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지식인 전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따져 묻는다. 그 질문은 인도출신으로 미국 명문대 교수로 재직중인 스피박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제국의 안에서 어떻게 (제국의) 바깥을 사고할 것인가’라는 화두가 이 책을 관통한다."

그리고 서울신문: "해체론적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서술한 문화연구서. 인도 출신으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거장인 저자는 초국가적 문화연구를 통해 미국의 다원주의 또는 다문화주의가 유포하는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다. 저자는 오늘의 지구촌 현실에서 영어를 매개로 한 문화접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만큼 무엇보다 번역의 필요성과 효과를 집중 조명하는 ‘번역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비판의 정치학에서 이제 번역의 정치학 또는 협상의 정치학으로 바뀌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하면, 이 책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스피박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될까? 예전에 소개한 바 있지만, 이미 <스피박 넘기>(앨피, 2005)도 출간돼 있고, 역자인 태혜숙 교수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여이연, 2001)에도 스피박식 페미니즘을 소개는 논문들이 포함돼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얇은 책으로는 박종성 교수의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살림, 2006)도 있으므로 스피박 읽기의 '초보'를 대신해도 되겠다. 그나저나 '번역의 정치학'과 관련한 주제라면 건너뛸 수도 없겠는데, 스피박 넘는 게 어디 또 쉬운 일인가...

06.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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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9 14:55   좋아요 0 | URL
스피박 넘기를 번역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어서, 이 책 어려워 보여요. 읽으면 어떨까요? 하니까, 읽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이해 못할 거라고. 저도 동의했어요ㅡ.ㅜ

로쟈 2006-08-19 15:15   좋아요 0 | URL
스피박도 동의할 겁니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읽은 오늘자 한겨레의 문화면은 영화 <괴물>과 <한반도>에 대한 김소영-정성일-허문영 3인방 평론가들의 대담을 싣고 있다. <한반도>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지난주에 <괴물>은 보았고 나로서도 하고픈 이야기의 가닥을 잡아가는 중이다(물론 비디오로 영화를 한번 더 본 다음에 무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영화판의 봉준호가 어쩌면 문학판의 김영하는 아닐까라는 것이다(우연히도 오늘 구내서점에서 손에 든 <작가세계> 가을호의 특집은 '김영하'이다). 즉, 내가 비교하고픈 것은 강우석과 봉준호가 아니라 김영하와 봉준호이다.

 

 

 

 

둘은 모두 이데올로기/정치/역사 시대에 대한 포스트정치적 포지션을 공유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포지션이 그들의 유희정신을 지탱해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대담에서 정성일이 일부 그런 지적을 하고 있다. 여건이 된다면 나는 이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이른바 '포스트정치 시대의 예술'의 행방에 대해서 두 사람은 각각 문학과 영화에서 가장 유력한 답안을 써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도 아래 대담은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기에 일독할 만하다. 단,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께는 권하지 않겠다.

한겨레(06. 08. 18) ‘한반도’ 이어 ‘괴물’ 흥행 대박…정치영화 논쟁 점화

-<괴물>과 <한반도>, 제작비 100억원대의 ‘정치영화’ 두편이 동시에 나온 건 한국 영화사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두 영화의 정치적 어법과, 두 영화를 둘러싼 담론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김소영 영상원 교수, 영화평론가 정성일,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허문영 셋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에서 셋은 <괴물>의 1천만명 관람을 놓고, 비극적 감정을 의도적·유희적으로 단절시켜온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의 어법이 이제 확실한 대중성을 확보했음을 입증한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반면 <괴물>의 시선이 냉소적이냐 아니냐, 냉소적이라면 그걸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해 오래도록 논란이 계속됐다. 대담 전문은 18일 발행되는 <씨네21> 567호에 실린다. (‘괴물’의 결말부분을 미리 알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정성일=<괴물>을 두고 만들어지는 담론엔 의아한 구석이 있다. <괴물>이라는 영화를, 영화로만 가두려는 담론이 있고, 2006년 한국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판본으로 읽으려는 담론이 있다. 또 대중이란 무엇일까라는 방식으로 좌표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도 있다. 민노당의 한 기획위원이 <괴물>에 관한 글을 썼는데 타이틀이 ‘괴물은 북한이다’였다. 이런 식으로 ‘괴물은 무엇이다’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있다고 생각한다. 괄호 안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제 <괴물>의 담론은 봉준호 감독을 떠나 사회 안에서 괴물을 누구에게 뒤집어 씌우는가의 문제로 전화한 듯하다.

김소영=보통 공포영화나 괴수영화에서는 타자성이라는 위치가 중요하다. 이 영화의 괴물에 타자성이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모호하게 처리됐다. 미군의 독극물이 탄생시킨 괴물이라고 명확하게 시작은 하는데 그 다음부터 더 이상의 발전이나 확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다양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하다. 괴물은 북한이다, 미국이다, 사회적 약자다 하는 식으로.



허문영=<괴물>과 <한반도>가 탈식민지 사회에 작동하는 제국주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두 영화는 다르다. <한반도>에서 국새를 찾는 이유는, 제국주의 질서로부터 국민국가의 주권을 완전한 형태로 만든다는 국가적 기획과 맞물려 있다. 여기서 <한반도>를 기본적으로 우파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건, 국민국가를 완전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완전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정을 하는 거다. 반면 국민국가의 하위 단위 계급인 집단, 지역, 가족, 개인 등이 완전히 배제된다. 영화는 인물의 사적인 동기를 전혀 배제한 채 오로지 견해로만 이뤄진다. 이처럼 국민국가 단위 아래 모든 층위의 단위를 무시한 영화는 거의 처음 본다. 그만큼 국민국가라는 단위에 대한 신뢰나 신앙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괴물>로 옮겨오면 똑같이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시선이 있음에도, 이 질서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지 설명이나 서사적 장치가 매우 모호하다.

정=<한반도>가 우파 이데올로기를 담보하고 있는 국민영화인 건 명백하다. <괴물>이 정치적인 영화이기는 하지만 좌파영화인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차라리 <한반도>가 냉전영화라면 <괴물>은 포스트 정치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괴물>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한국영화에 처음 도착한 포스트 폴리티컬 영화가 아닐까(*나는 이러한 지적에 공감한다. 그리고 이 점은 보다 세밀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다). 다만 의아한 건 이 명징하게 드러난 정치적한 영화를 왜 사람들은 가족영화로 덮어씌우고 싶어하는가다. 만일 가족에 관한 영화라면 강두의 딸 현서를 살리면 안 됐냐고 질문하고 싶다. 현서를 죽였다고 해서 이 영화가 장르 영화의 관습을 거스르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또 어떻게 모든 가족이 현서를 찾는 데만 매달릴 수 있나. 삼촌, 고모 모두 목숨 걸고 거기 매달릴 만한 모티브가 무엇인가. 국민주의만큼 납득할 수 없는 가족주의가 이 가족들을 사로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가지고 이 영화의 정치성을 덮어씌우고자 하는 걸 볼 때 포스트 정치영화의 불안한 미래가 느껴졌다.



허=이 영화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규정하는 방식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영화 자체가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처음부터 현서가 죽는 설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는 오히려 가족영화로 남지 않기를 처음부터 계획했던 듯하다. 가족이 가족을 지키는 게 아니라 지키는 와중에 사회적 연대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꼬마 세주를 구하는 장면, 그리고 세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장면에 있다고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명백한 설정이기 때문에 가족에서 출발한 영화가 빈민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은 충분히 평가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정=재미있는 건 <한반도>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반면 <괴물>에 대해서는 어떤 동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가지 질문하자면 <한반도>와 <괴물> 모두 완벽할 정도로 로맨스가 증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두 영화 모두 로맨스의 작은 스파크조차도 완전히 지우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본단위에 대한 출발점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같다.

허=두 영화에 로맨스가 부재한 이유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반도>가 공적인 견해로만 이어지기 때문에 로맨스라는 사적영역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만명이라는 관객이 들었다는 건, 국민국가의 완성이라는 영화적 의제가 동시대인에게 시급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걸 방증한다. 반면 <괴물>에는 로맨스를 개입시킬 수 있는 이야기상의 여백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봉 감독은 단편에서 장편까지 한번도 로맨스를 그린 적이 없다. 로맨스를 그리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로맨스는커녕 이 영화에서 가족들 간의 감정적, 정서적 연대는 충실하지도 않다. 가족애를 드러내는 순간 영화는 그 정서의 지속을 중단시킨다. 그것이 완전하거나 숭고하지 않다는 걸 끊임없이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봉준호에게선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라는, 대작영화을 만들면서도 끝내 대중적 코드를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안간힘 같은 게 느껴진다(*좋은 지적이다).

 

 

 



김=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그게 감독이 인지하는 대중적 코드로 등장하는 것같다. 슬픔을 지속시키지 못하게 하는 방해하면서 재미를 유발하는 장치들 말이다. 다른 요소들이 틈입해서 파토스(정념)의 지속이 끊어질 때 사람들이 웃는 등의 엇박자식 리듬감이 실제로 대중적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닌가. 이건 박찬욱 감독의 코드이기도 하다.

정=2006년 여름 <괴물>의 대중적 호소력이 바로 이거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의 영화에 전위적 측면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팝’(pop)하다고 생각하다. 구태여 정의하자면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아방 팝 정도? 봉준호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만화적인 리듬과 팝한 감각이 있다. 또 이게 봉준호와 박찬욱을 잇는 선이 아닌가 생각된다. 봉 감독은 “오늘날 한국 관객들은 해피엔딩보다 비극을 즐기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방점은 비극의 호소력이 아니라 ‘비극을 즐긴다’는 거다. 비극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때 파토스가 없는 건 당연하다. 비극은 그저 구경거리가 되고, 미토스(이야기)가 밀쳐내는 정도에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축소인지 치환인지 대체인지는 토론해야 겠지만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뀔 때 대중적 감성이라는 건 급격한 퇴행이라고 생각한다.

허=여기서 두가지를 구분해야 되지 않을까. 한국 관객들이 비극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역대 흥행작의 대다수가 비극이다. 그 비극들은 <괴물>과 반대로 파토스의 과잉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식 비극은 팝한 거다. 봉준호와 박찬욱은 찍는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비웃음이 있다. 정치적 의제를 꺼내는 사람도 비웃고, 어떤 것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게 하는 끊임없는 조소가 있다. 또 그게 불러일으키는 유희적 요소도 있다. 그래서 2000년대에 비극적 대중 영화들을 즐기는 방식과 <괴물>을 즐기는 방식은 전혀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파토스의 과잉이 호소하는 대중적 요소가 있고 그것이 주류였으며 그게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영화를 300만~500만명대에 멈추게 하는 저지선이었다. 이제는 파토스 과잉뿐 아니라 파토스의 유희적 단절로 호소하는 방식도 그만한 대중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괴물>이 증명하고 있다.

김=엇박자나 비극적 엔딩이 흥행에 장애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로 보면 전부 플러스로 작용한 게 이 영화를 전환점으로 만드는 것 같다. 비극을 유희로 받아들이는 건 김기영 감독의 특성이다. 호스티스인 딸은 울고 있는데 엄마는 몰래 돈 세고 있는 장면 등의 모멘트를 박찬욱이 거의 빌려갔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식 잃은 부모들 사이에 돈 얘기 나오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보다는 인간적인 버전으로 봉 감독이 조롱과 비웃음을 유희할 수 있도록 영화에 넣는 것 같다. <괴물>이 대중영화의 새로운 분수령이라는 건 우리가 함께 도달한 결론인 것 같다. 대중적 감성의 재구성, 그게 전에는 300만~500만명이었다면 이제는 1천만명까지 가는 수준이 됐다.



정=<괴물>에 대해 허문영과 결정적으로 견해 다른 게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장면이다. 허문영은 연대를 얘기했는데, 나는 연대에 대한 봉준호의 비웃음으로 보인다. 통상적 연대라면 끝에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살아가야 하며, 에필로그는 없어야 한다. 강두가 밤에도 안자고 깨서 두리번거리는 에필로그는 1980년대라는 마법의 순간, 모두가 연대해서 싸웠던 그 마법을 깨버리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장면이 로케이션임에도 굳이 에필로그만 세트 촬영을 해서, 그곳을 시뮬라크라(복제물)화한다. 실제하는 세상으로부터 상상적인 시뮬라크라로 물러났을 때 무슨 의미인가. 그게 연대라면 마지막 질문은 이거다. 왜 현서랑 같이 살지 않았나. 현서는 이 모두를 묶는 매듭인데 그걸 끊어놓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와 세상을 시뮬라크라화했을 때, 그 연대가 무슨 의미인가. 정치적 이성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실망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허=운동권 출신인 남일은 도바리의 천재이지만 그가 던진 화염병은 목표를 명중하지 못한다. 여기엔 저항운동을 상징하는 게 있다. 적으로부터 도망은 잘 치지만 정작 적을 맞추지는 못하는 것. 그러나 부수적인 기능은 한다. 현서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세주를 구했다. 여기서 그나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감독은 묻는다. 바이러스나 괴물은 없지만 원인은 남아 있다. 그걸 유일하게 강두는 지켜본다. 그 옆에 밥먹는 아이가 있는데 혈연은 아니다. 이 설정에서 모든 것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럼 당신은 누구를 믿겠냐고 묻는 것이다.



김=그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낙관적인 해석이다. 이 영화에서 모성의 부재와 함께 또 하나 흥미로운 건 트라우마의 부재다. 세주는 괴물과 관련된 온갖 걸 다 보고 겪은 목격자이자 피해자인데 마지막에 보면 잘 먹고 잘 잔다. 모든 트라우마를 희석시키는 놀라운 결말이고 관객에게도 트라우마를 안 남긴다. 괴물이 살아날까, 독극물이 또 괴물을 만들어낼까 등등의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적으로 끝난다기보다는 트라우마를 없애면서 끝내는 결말이 아닌가. 내가 말한 허무함, 비관이란 건 영화가 이처럼 트라우마를 견지하지 않기 때문에, 세주에게서 그것을 없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허=이 영화의 정치적 각성의 수준을 과장해선 안 된다. 그건 새로운 게 아니라는 거다. 21세기에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유될 만한 비관, 전망없음, 불안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의 특별한 비관적, 냉소적 시선을 읽는 건 이 영화의 정치적 사고를 지나치게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봉 감독은 미군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드는 순간부터 비관과 냉소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이 이 정도라는 거다. 그것이 뭘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없지만 깨어있는 행위를 영화는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해결 못하는 무력한 이 세상에서 봉준호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까.(정리 임범 김은형 기자)

06. 08. 18.

 

 

 

 

P.S. 참고로, 김영하(1968- )와 봉준호(1969- )는 대학 동문이다. 대학시절에 교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른바 '포스트정치'란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김영하의 회고담.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고 한다: "'우연히'였다. 학창 시절,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무협지에 빗댄 우스갯소리를 하이텔에 올렸고, 이것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이텔에 올린 글이 하이텔에 참여했떤 여러 사람들에게회자되고 이것을 본 출판업자가 장편으로 늘릴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발표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협학생운동>(1992)이었다. 이후 '월간중앙' '뉴스메이커' 등에 당신의 정치현실을 빗댄 <거대한 뿌리> 등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글들을 쓰면서 이와는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자의식이 생겼다." 그 '다른 글'이 자신이 주문받아서 썼던 '정치소설' 이후의 소설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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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에 대해서 평하는 내용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얻어가요. 놀라운 영화랄까..;;

로쟈 2006-08-1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론가들의 지적대로 여백이 많은 영화인지라 백인백색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죠...
 

필요 때문에 번역 문제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작년 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기획회의> 18호(2005년 4월) 특집이 '번역출판의 오늘을 말한다'였다는 걸 알게 됐다. 특집기사들 중에서 한기호 소장의 글 '문제의 본질은 번역자다: 번역출판의 제도적 측면'을 옮겨온다.

 

 

 

 

-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내내 나는 <아타 트롤>(창비, 1991)의 경험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뛰어난 서정시인이자 정치풍자시의 대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대표적 장편풍자시 <아타 트롤>과 12편의 시사시를 번역 수록한 이  책은 1991년에 시인 김남주의 번역으로  창비에서 출간됐다(*이 책은 현재 절판중이다). 당시 그 회사 영업책임자이던 나는 교정지에서 접한  번역문의 유려한 문장에 반해 <아타 트롤>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아타 트롤>을 다룬 석사논문을 찾아 읽어보았는데 논문 속의 인용문은 교정지의 번역문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석사논문 속의 인용문은 그냥 뜻이나 통하게 옮겨놓았다고나 할까? 내가 만약 그 인용문 수준의 글부터 읽었다면 과연 <아타 트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게 되었을지, 책이 만약 그런 수준이었다면 책을 구해 읽었을지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날 표면적으로는 번역출판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전체 발행종수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5%에서 2003년 29.1%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만화와 아동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두 분야를 제외하고는 역사 분야가 평균 성장률과 비슷하고 나머지는 모두 밑돌고  있다. 결국 출판시장의 성장에 비추어보면 질적으로 상당한 퇴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번역출판을 놓고 단순한 통계수치만으로 ‘상당한 양적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 없지 않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은 2004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됐다. 2004년에  번역서는 전체 발행종수 35만394종의 28.5%인 10만88종으로 2003년과 비슷하다. 만화(3108종)와 아동(2245종)을 합하면 여전히 번역서의 절반을 넘는다. 단지 아동은 늘어나고 만화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번역서의 번역 수준은 우리 출판의 아킬레스건이다. 한 마디로  앞에서 예를 든 석사학위논문 인용문 수준의 번역문을 그대로 담은 책들이 줄줄이  출간되고 있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이 영미 문학 대표작 가운데 ‘친숙하게 읽혀온’ 작품의 변역 수준을  평가한 결과에 따르면 “영미문학의 번역은 양적인 풍요와 질적인 빈곤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상 작품들의 번역서로 최종 검토 대상이 된 완역본은 총 573종인데 이중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모두 61종(11%)에 불과하다.

-대략 10권  중 한 권 정도가 믿고  읽을만한 번역본인 셈이다. 추천본이 없는 작품도 전체 작품의 3분의 1이 넘는다. 소설의 경우에는 추천본이 전체 번역본의 6%에 불과”했다. “비소설의  경우는 추천본 비율이  높으며(29%), 추천본의 종수가 가장 많은 것도 ‘햄릿’(10종)”이었지만 “검토본 가운데 반수 이상(54%ㅎ310종)이  표절본으로 그대로 베낀 것부터 짜집기, 윤문潤文까지 다양한 형태를 확인” (1)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표절의 책임은 대부분 출판사에 있다. 특히 잘 팔리는 책, 독자에게 친숙하게 읽혀온 문학서적의 경우에는 출판사가 기존에 출간된 책을 적당히 윤문해 중복 출판하는 경우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번역출판으로 꽤 명성을  날린 출판사들도 실제로 이런  행태를 자행하고 있음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영미문학연구회의 평가결과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책임은 먼저 번역가가 질 수밖에 없다. 미디어 평론가 변정수는 그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편집자들이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고  지적한다.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섀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2)을 하고 있는 셈이다.

-꼼꼼하게 공들인 번역으로 소문난 유명 역자들은 편집자가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는 완벽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겠지만 대부분은 편집자가 ‘공역자’에 준하는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 거의 ‘재번역’을 해야 하는 수준의  번역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편집자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상 대다수의 편집자는 원문대조도 하지 않고 오탈자나 잡아내는 수준의 교열에  머무른다. 그래서 전문편집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런  편집자들이라도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는 학자 번역자의 경우에는 십중팔구 재번역해야 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교수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학자들이 번역에서 그들만이 이해하는 용어로  그들만의 ‘언어게임’을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아타 트롤> 수준의 번역보다 못한 번역 원고가 그대로 출판사로 들어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편집자들은 ‘교수’가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조교’나 다른 대행자들이 번역을 대신한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 다반사다.  

-상황이 이런데도 편집자들이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감수하면서 십중팔구 믿지 못하는 교수에게 매달리는 것은 ‘손을 볼 필요가 없는’ 번역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능한  몇몇 번역가들은 밀린 일이 많아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하는 것이 전문번역회사다. 한 출판번역전문회사의  대표는 “국내 산업번역 규모가  1조원 대에 달하고 그리고 영상미디어 번역이 5천억 원, 출판번역시장이 5천억 원에 달한다”고 전망했는데 시장은 이렇게 크지만 양질의 번역을 빠르게  해줄 수 있는 번역가가 많지 않아 이런 업체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번역전문회사는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시켜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에 불과하다. 이 회사들은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출판사가 지급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원고를 여러 사람에게  쪼개서 번역한 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죽 읽어가면서 획일성만 기하기 마련인데 이런  원고의 수준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들이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들이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병폐가 있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전문번역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번역료가 낮기 때문이다. 상위 출판사의 경우 영어는 3500-4000원, 일본어는 2500-3500원, 프랑스어나 독일어는 3500-4000원 수준이다. 물론 수준이 보장되는 전문번역가는 이보다  높은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낮은 경우가 더 많다.  일본의 법인 또는 단체가 일본책의  한국어 번역료를 통상 10,000-15,000원 수준에서 지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번역료가 어느 수준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번역료는 몇 년  전의 수준에 머문 것이어서 물가상승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갈수록 뒤쳐지고 있어 번역에 ‘목숨’을 거는 번역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최근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고전 번역 지원사업에서는 번역 원고료를 10,000원 안팎으로 책정하고 있다. 나도 신청중인 과제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대우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번역에 나서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구나 인세일 경우 한달 평균 100여 만원 정도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번역에 '목숨' 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전문영역에 속하는 책들을 맡아주어야 할 학자들은 번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사명감에 충만하거나 특별한 인간관계가 아니면 일부러 나서려  들지 않는 것이다. 우선 번역료가 너무 싸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번역을 학문적  업적으로 여겨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출판사는 고육책으로  번역료와 인세를 병행하는 정책을 쓰기도  한다. 기본 번역료는 보장하되 번역료 이상으로 책이 팔리는 경우에는 인세를 추가로 지급하는 방식인데 실제로는 추가 인세가 지급되는 경우가 흔치 않아 확실한 ‘유인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사례처럼 인세로 계약한  대중서가 1백만 부나 팔려 평생의 고생을 보상할 수준의 인세가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경우가 매우 드물기는 해도 이런 제도가 도입되면 번역자가 어느 정도 번역에 책임을 지려 들 것이다. 하지만 출판사는 기본 번역료를 감당하기도 어렵다.

-인문학, 철학, 과학 분야의 전문분야 출판사인 이제이북스는 지난 3년 동안 60권의 책을 펴냈지만 2쇄를 발행한 책이 단 2종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3)  이 출판사가  나름대로 번역에 매우  많은 공을  들여왔고 초판을 1000부 밖에 발행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출판사의 출혈투자가 없이는 도저히 책 출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제이북스의 경우는 며칠 전에 다룬 바 있다). 15,000원  정가의 책인 경우 1000부가 다 팔린다  해도 매출액은 1천만 원 내외다. 이 금액 모두가 번역료로  지급되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기에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출간 즉시 적자가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니 대다수 출판인은 출판을 기피한다.

-번역료가 낮은 근본적인 원인을 출판사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책을 읽지 않는 독자를 탓해야 할까? 물론 탓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독자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독자들은 철학을 쉽게 풀어주고 독해가 가능한 책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부실한 번역이 독자들을 떠나가게 만들었다는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뼈아픈 지적을 더 수용하려 들 것이다.

-결국 이 땅의 번역출판 부실은 어느 일방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내수시장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제도적 후원시스템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선험적인 연구자들이 결론내린 바  있다.

-김선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 연구논문(4)에서 “전문 번역가의 부족, 낮은 번역료, 오역 및 중복 출판, 출판사의 과도한 저작권 확보 경쟁 등과 같은 출판사 내·외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번역출판이 활성화되기 위한 방안으로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 개발, 번역활동 지원 단체의 확충,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 확보 등을 제시했다.

-이런 결론은 지난 수십 년간 내려졌고 물론 간헐적인 대응책은 있어왔지만 근원적인 대책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문 번역인은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지원자만 모아놓고 교육만 시키면 해결이 될 것인가? 그보다는 전문적인 번역자가 전문편집자와 함께 일을 해가면서 번역의 질적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래서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주요 인문출판사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번역학교를 따로 꾸리고 있는  것은 모범적인 사례가 된다. 이 단체는 이미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책을 여럿 내고 있으며 고전을 재해석한 ‘리라이팅’ 시리즈처럼 저작의 단계로도 올라서서 인문출판의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 이런 모임이 더욱 많아져야 할 것이다(*한데, 이 리라이팅 시리즈도 작년부터는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이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에서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이 근원적으로 가동되어야  할 것이다. 비단 이것은 번역서뿐만이 아니라 출판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도서관의 기본적인 존립목적인 정보 접근 평등성을 위해 도서관 스스로가 양서를 다양하게 구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도서관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소기의 성과를 빨리 이루려면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성화가 시대적 소명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역 주민도 이용하는 기초생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학교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정책적·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 양서의 경우 5000-10,000부 정도가 소비될 수 있다면, 출판사들은 구태여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도 안정된 경영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출판뿐만 아니라 기초학문과 교육이 사는 길이고 결국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 일이다. 우수한 번역서를 여기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기에 번역출판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예산타령만을 일삼지만 이런 일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일 뿐이다.

-다양성은 무척 중요하다. 그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전문성도 중요하다. 지금 구조에서는 번역출판을 통해 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어떤 약삭빠른 출판사가 입도선매식으로 저자권계약을 맺어놓은 다음”에 “자격 없는 역자들을 동원하여 오역·졸역본의 출판을 남발하는 경우”에는 “저작권을 보호함으로써  마구잡이 번역을 막겠다는 원래의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역설적 결과”(5)가 수시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물건이나 언어에는 반드시 그 배경에 주류와 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계통도에서 상위에 올라있는 책을 먼저 계약해놓고 책을 출간하지 않으면 하위에  해당하는 책을 펴낸 출판사는 고통만 겪을 확률이 높다. 이것은 원저작은 보지 못하고 비평서만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상호 협조와 양해를 통해  바람직한 조정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황이 매우 열악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앞의 ‘연구공간 수유+너머’도 희망적인 사례지만 영미문학연구회가 분석한 책들이 출간된 같은 시기에도 “고전  번역에 가담한 새로운 세대 전문연구자들의 활약은 고무적이다. 또  초기에 나온 번역본이 이후 어떤 번역본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 경우도 적지 않아 우수한 번역진의 층이 얇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더 좋은 번역환경이 마련되고, 다수의 독자들이 좋은 번역을 선별해  읽을 수 있다면 번역 풍토의 획기적인 개선도 기대”(6)할 수 있다는 지적도 우리에게 기대를 갖게 만든다. 따라서 바람직한 비평을 통해 좋은 책을 선별해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다양하게 정착되는 일 또한 바람직한 번역출판이 이뤄지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것이다.

(1)「번역 평가 왜 필요한가」<한국일보> 2004.2.16
(2)변정수,「번역 출판의 원숭이들」<기획회의> 8호 2004.11.5
(3)김현미,「우리말로, 철학하기, 출판으로 철학하기 -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
   <기획회의>10호 2004.12.5
(4)김선남,「국내 번역 출판물의 현황과 화성화 방안 연구」<한국출판학연구> 제43호 2001
(5)한정숙,「학술서적 번역 이것이 문제다」<국민일보> 1996.8.12
(6)김영희, 같은 글

06.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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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18 03:4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로쟈 2006-08-18 08:15   좋아요 0 | URL
제목에 오타가 났었네요. 번역가 ->번역자.

이네파벨 2006-08-18 10:45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갑니다...
눈물날만큼 공감가는 이야기들이지만...제가 번역 시작한지 수년이 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질게 없는 이야기들이어서.....갑갑합니다.

릴케 현상 2006-08-18 13:19   좋아요 0 | URL
아타 트롤이지 않나요?

열매 2006-08-18 13:39   좋아요 0 | URL
인문학술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곳이 바로 대학 출판부입니다. 서울대학이나 연세대학, 이화대학(*그나마 요즘은 뜸하지만) 등을 제외하고 고전 번역이나 학술서를 제대로 출판하는 곳이 어디 있었나 싶습니다. 성균관대의 경우 이런 대학 본연의 출판 임무보다 상업성을 고려한 기획으로 여타 출판사 뺨치더군요. 대학출판부라면 명색이 대학이 해야할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한국엔 언제 일본의 호세이(法政)대학이나 켐브릿지, 옥스퍼드, 하버드 출판부같은 명성있는 출판부가 나올지...

로쟈 2006-08-18 14:11   좋아요 0 | URL
이네파벨님/ 아마도 수십 년은 걸리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자명한 산책님/ 수정했습니다.^^
열매님/ 결정적인 건 재정 문제겠지요. 요즘은 대학출판부 책들도 안 나갈 경우 심히 눈총을 받는다더군요(대학구성원들도 다들 경영마인드로 무장해가고 있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