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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강 / 199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롤랑 바르뜨가 쓴 롤랑 바르뜨>
오래 전, 가장 감명깊게 읽은 자서전은 융의 것이다. 융의 자서전은, 진정, 고전적 의미의 자서전의 절정이다. 융은, 꿈속에서 만난 여인이 일생의 여자가 되고, 면접 전날의 꿈으로 정신과 의사가 되고, 자신의 삶에서 겪은 것, 자신이 꾼 꿈들이 집단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사상으로 태어나면서 삶과 사상과 같이 흐르는 운명적인 삶을 차분히 회상한다, 노년에 도달한 여유와 삶을 관조하는 편안함으로. 모든 것을 이룬자의 넉넉함으로.
바르뜨는 다르다. 바르뜨가 사고로 죽기 5년 전에 씌여진 이 책은, 단상들의 집합이다. 몇 개의 문장들이 모여 사소한 의미를 이루다 바로 흩어지고, 전혀 관계없는, 혹은 약간의 연상적인 관련이 있는 다른 단상이 나타난다. 바르뜨는 자신을 때로는 삼인칭 '그'로, 때로는 일인칭 '나'로 부른다. 그의 자기인식은 파편적이고, 순간적이고, 신랄하면서도, 변명조이고, 자질구레한 것들에 집착하다가 몇 가지 사유에 붙잡혀 흔들리기도 한다. 여기엔, 글과 같이 가면서 응축되는 일관성도, 회고적으로 완성되는 통일성도 없다. 바르뜨에게 바르뜨는 별로 서로 알지 못하고 관계도 없는 수많은 바르뜨들의 놀아남, 즐김, 그러니,복수성의 육체의 즐김이기 때문이다.
책의 핵심은 '자본주의''주체''복수성''육체''즐김' 다섯 단어에 있다. 처음 두 단어는 암적이고, 뒤의 세단어는 명시적이다. 바르뜨의 사유는 68년을 겪은 뒤 자본주의와, 그 자본주의가 만들어내었다고 판단하는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이고, 그 움직임의 결과는 복수성, 육체, 즐김의 발견이다.
철학속으로 들어간 들뢰즈, 역사 속으로 들어간 푸코, 인류학 속으로 들어간 레비 스트로스와 달리, 바르뜨는 언어 속으로 들어간다. 언어 속에서, 그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주체의 확고함, 일관성, 지속성을 가능케 하는,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해, 탄생시키는 바탕이 바로 언어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언어의 틀을 느끼고,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언어적인 방식으로. 바르뜨가 그래서 도착한 대상은 역설적이게도 육체이다.
그의 자서전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그가 육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이다. '아마추어'란 단상과 '피아노의 운지법'이란 단상에서 바르뜨는 매번 다른 운지법을 시도해보는 즐거움 때문에 포기하게 되는 연주의 익숙함,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하는, '잘 해야하는' 강박이 없는 즐기는 자로서의 아마추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순수한 즐김, 육체성의 향유. 매번 태어나는 다른, 복수의 바르뜨. 지속적 연습을 통해 생성되는 신경회로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가능해지는 연주의 능숙함 대신, 매번 다른 운지법을 시험하면서 뇌와 육체의 상호작용, 즐거운 변형가능성, 새로운 반응들의 생성과 소멸을 즐기기. 투자와 축적, 향상과 발전, 능숙함과 우월함의 자본주의적 개념을 버리고, 순수한 현재성으로 육체의 존재로, 그러므로 본질적인 즐김으로 돌아서기, 진정 68년도적인.
개인적인 육체와 그 즐김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대안이 되느냐,는 반론에 그가 할 말은 없다. 내가 할 말도 없다. 각자에게 각자의 방식이 있듯, 바르뜨는 그의 감정의 모든 양상에 대한 타고난 섬세함, 모든 독사에 대한 거부감,주체성에 대한 오랜 사유를 통해 이 곳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사회와 정치에서 해야될 일이 있듯, 개인의 일상에서 해결되어야할 일이 있을 것. 위태로운 길임에는 틀림없으나, 아름다운 길임에도 틀림없다. 자본주의가 이용하는 고정되고 계획된, 꾸며지고 연출된, 봄과 보여짐이 서로 엉덩이를 긁어대는 즐김과 육체 안에서, 바르뜨의 탈주체적인 육체와 즐김을 구별해내고 만들어내는 것은, 그러니 가벼우나 힘든 일, 결국은 너무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다른 이에게 이 책이 바르뜨가 그토록 좋아한 즐김의 방식으로 읽히기를 희망한다, 얼굴을 간질이는 깃털들처럼, 정확하게 햇빛을 반사하는 먼 곳의 유리창처럼. 목 옆의 두드러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