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읽어본 서평 하나가 눈에 띄길래 옮겨놓는다(밀린 페이퍼들도 많건만!).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무더운 여름에 벽돌쌓기 -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론'이 그것인데, 좀 놀라운 사실이지만 <문화예술>(1991년 7월호)에 게재된 것이니까 15년전 글이다(본문에도 나오지만 타르코프스키의 <희생>도 개봉되기 전이다!). 세는 나이로 33살에 쓴 것.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씨네필' 평론가를 능가하는 영화광(이자 영화도서광)이 등장하지 않은 것 역시 놀랄 만한 일이다(더불어 좀 놀라운 건 임권택 감독과의 대담을 제외하면 그가 아직 단 한권의 영화비평서도 간행하지 않은 사실이다. '책'에 대한 결벽일까?). 글은 각가 1990년과 1991년에 나온 에이젠슈테인의 책 4권과 타르코프스키의 책 1권에 대한 서평인데, 격세지감이 느껴지게도 에이젠슈테인의 책들은 현재 모든 절판됐다. 그의 책들이 다시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보태면서 다시 읽어보도록 한다. 강조와 덧붙인 말들은 나의 것이다(이런저런 오타들도 수정했다).
예술의 이론에 관한 분야 중에서도 우리에게 영화만큼 그 공허한 여백이 넓은 분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우선 첫 번째로 '영화야 그냥 보면 되지, 뭐 이론까지 알 필요가 있겠어요'라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영화 이론에 황폐함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뉴 크리티시즘이나 구조주의, 벤야민이나 바슐라르의 텍스트들을 구해서 보기도 하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스타 백과사전이나 영화음악에 대한 '잡동사니' 지식들이 나열된 책들이 서점의 영화난을 메우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두 번째 이유는 영화인 자신들의 문제이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그야말로 '이론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구태여 참고도서(?)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 평론가들의 활동을 전문적이라고 부르기에는 현실적으로 일정한 한계가 있다(*요즘은 사정이 좀 나아졌으리라고 본다. 그 사이에 우리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영화감독들이 여럿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이론은 60년대에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성숙하였다. 문학과 미술비평이 이론(더 정확하게는 내러티브와 격자틀, 담론과 표상/재현의 이론)을 받아들여 영화는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터가 되었고(우리처럼 문학이 아니다 !) 잘 알려진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튼, 장 보드리야드, 장 뤽 낭시, 마르슬렝 플레네, 쥴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라이, 데이비드 로지, 질르 들뢰즈 등이 가세하였다. 그래서 영화라는 영토를 철학의 장소이자 정신분석학의 공간, 여성 해방의 억압 장치이자 권력의 이중 시선에 사로잡힌 감옥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이들의 영향권에 놓인 새로운 영화인들이 차례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 팀 버튼의 <가위손> 등은 관객을 당혹시켰고, 영화평 난에는 영화와 아무 관계없는, "고독한 현대인의 사랑과 절망, 그리고…"하는 상투적인 문장만이 가득 메워졌다. 영화는 우리의 논의와 아무 관계없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몽타쥬 이론이고, 또 하나는 미장-센 이론이다. 그러나 그간 여러 사정으로 미장-센 이론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몽타쥬 이론은 거의 소개 될 기회를 놓쳤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몽타쥬 이론이 소련 영화감독들에 의해 제창되었으며 게다가 그 근간에 흐르는 역사적 배경이 20년대의 볼셰비키 혁명의 선전 사업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타쥬 이론의 아버지 세르게이 미카이로비치 에이젠슈테인은 명성을 얻은 만큼 실제로 그의 이론과 영화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못하다.
그러나 한·소 수교의 기점으로 해빙무드가 열렸고, 게다가 대학 내에서는 공공연히 '영문판' 텍스트들이 읽히고 수업 교재로 사용되고 기말고사 시험문제로 출제되는 상황에서 번역본 한 권 없을 수 있겠는가라는 각성이 일어 금년 상반기에만 네 권의 번역본이 출판되었다(*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에이젠슈테인이 살았던 시대는 1917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영화야말로 '선동의 최선의 무기'라고 영화 사업을 부흥시키던 20년대, 그는 당시 '혁명에 흥분한' 청년이었고, 그래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철저한 영화론을 생각해 내기에 골몰했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쥬 이론은 할리우드의 초기 무성영화에서 얻어낸 결론이었다. 당시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일종의 눈속임인데, 그 눈속임의 비밀은 커트와 커트 사이에 숨어 있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A쇼트와 B쇼트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놀랍게도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에서 테제와 안티 테제를 통해 진테제가 도출된다는 도식 바로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에이젠슈테인은 이 '발견'을 '조립하다'라는 불어 monter의 명사형montage(몽타쥬)라고 불렀다. 그후 편집/데꾸빠쥬의 연구를 몽타쥬 학파라고 불렀고, 더 나아가 이 방법론은 제3세계 영화인이나 진보적 시네 아티스트들의 좌우명이 되었다(*러시아어에서는 '몽타주' 대신에 따로 '편집'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이후에 나온 책이지만 러시아 몽타주이론에 대한 가장 요긴한 해설은 김용수의 <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열화당, 1996)을 참조할 수 있다).
그렇다면 4권의 책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 만일 에이젠슈테인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하고, 그의 영화도 본적이 없다면 <이미지의 모험, 영화론과 영화 작품>(전양준 편집, 열린책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우선 이 책은 친절하다. 전체 구성은 그의 이론적 논문과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동시에 배열해 놓고 있다. 그래서 이론보다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에 대해서만 알고 싶은 사람들은 논문을 생략하고 영화 소개만 쫓아가면 되도록 충실하게 구성해 놓았다. 또한 이론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핵심적 논문인 '영화의 원리와 표의 문자', '영화 형식의 변증법적 접근', '영화에 있어서의 4차원'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에이젠슈테인을 읽는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슨 교훈을 얻을 것인가라는 안내로 영국의 영화학자(이자 감독인) 피터 워렌의 야심적인 저서 <영화에서의 의미와 기호> 제1장 '에이젠슈테인의 미학'을 번역해서 첨가하였다. 이쯤 되면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입문으로서는 가슴 든든한 소개서를 갖게 된 셈이다(*피터 웰렌의 책은 이후에 <영화에서의 기호와 의미>(영화진흥공사, 1994)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원저는 1969년에 초판이 나온, 영화학에 기호학적 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책이다. 영어권에서는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1998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그러나 편저자의 소개처럼 몽타쥬의 이론이 에이젠슈테인에서 시작해서 고다르로 완성되었다면, 고다르의 그 유명한 논문 '몽타쥬', '나의 멋진 근심'은 왜 빠졌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독자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아직도 고다르에 관한 '멋진' 책을 시중에서 단 한권도 구해볼 수 없는 것은 매우 근심스러운 일이다. 고작해야 오래전에 절판된 리처드 라우드의 <장 뤽 고다르>(예니, 1991)가 전부인가?).
그래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본격적인 논문집 <몽타쥬 이론>(이정하 역, 예건사)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는 실제 작업에서 부딪치는 논쟁적 이슈들, 2부에는 이론적 논문들, 3부에는 몽타쥬론 확립 이후의 작업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꼼꼼하다는 것이다. 번역자는 혹시나 독자들이 에이젠슈테인의 논쟁적 이슈를 쫓아오다가 놓칠까 끈기 있게 주석을 달고 있다. 만일 몽타쥬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국내 번역본으로서 아직 이 이상은 없다(*아래의 책은 현재 러시아에서 새롭게 출간중인 에이젠슈테인 전집 중 <몽타주>(무제이 키노, 2000). 그의 몽타주론을 집성하고 있는 책으로 만일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필독서가 되겠다).
몽타쥬론을 처음 발견한 것은 에이젠슈테인이 아니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학교 선생님이었던 클레쇼프는 학생들과 함께 그 유명한 '쿨레쇼프 실험'을 했다. 그는 한 여인의 얼굴을 찍어서 똑같은 필름을 3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필름에 각기 잠자는 아기의 얼굴, 먹음직스런 빵,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연결시켰다. 그 결과 아무 영문을 모르는 관객들은 여인의 연기에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아기의 얼굴에 이어 놓은 여인의 얼굴에서는 자비를, 빵에 이어 놓은 여인에게서는 배고픔을, 그리고 칼에 이어 놓은 여인에게서는 공포를 보았다. 쿨레쇼프의 제자였던 에이젠슈테인과 푸세볼로드 푸도프킨은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푸도프킨은 몽타쥬를 벽돌쌓기라고 불렀다. 그는 영화가 모여서 하나의 의미를 이룬다고 보았다. 반면 에이젠슈테인은 충돌이라고 받아들였다. 전혀 다른 의미의 쇼트를 굳이 '함께 놓아'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한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은 그의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켰다. 몽타쥬로 충돌뿐만 아니라 견인(끌어당기기, attraction)의 효과까지도 끌어냈다. 이 복합적 개념은 단순히 작가의 의지만이 아니라 관객의 마음까지도 고려하는 것으로, 그는 견인의 구성을 통해 관객의 정신적 과정을 형상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즉 관객은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동 창조자가 되는 셈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에 늘 불만을 갖고 있었다. 관객은 영화를 실제 사건처럼 바라보고, 작가는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에이젠슈테인에게 새로운 이론을 근거를 제공해 준 것은 일본의 가부키 연극이었다. 가부키 연극에서는 사실이나 사건의 실제성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사건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즉, 가부키 연극은 플롯이나 동작의 열거로는 이해될 수 없다. 여러 요소들 간에 이루어지는 전체적 조화의 형식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참고로, 불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관련서는 자크 오몽의 <몽타주 에에젠슈테인>이다. 이 책은 영역돼 있다).
여기에서 에이젠슈테인의 중립화 개념이 발전하였다. 리얼리티는 더 이상 영화를 통제할 수 없게 되고, 화면의 수많은 요소들로부터 생겨나는 충격, 그 연쇄 작용이 영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영화의 질료인 쇼트 내의 견인들을 편집하는 문제가 남는다. 질료에 대한 통찰력을 가부키 연극에서 얻었듯이 편집 개념은 일본의 상형문자에서 명확해졌다. '새(鳥)'와 '입(口)'이 합쳐져서 '노래한다(鳴)'는 뜻이 되는 것에서 에이젠슈테인은 역동성의 근거를 발견하였다. 상형문자의 한 글자 한 글자가 견인일 때, 견인의 충돌이 가져오는 변화는 도일한 개념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질료가 영화 자체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세포'이고, 이 세포들은 편집을 통해 살아 있는 영화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모든 옳은 이야기라면 현장에서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거기에 답을 주는 것이 <영화 연출 강의>(V. 니즈니 기록, 이경윤 번역, 예건사)이다. 이 책은 에이젠슈테인이 쓴 책은 아니다. 소련의 국립영화학교인 VGIK에서 그가 강의할 때 학생이었던 V. 니즈니가 노트를 다시 복원시켜 강의록으로 펴낸 것이다. 그래서 얼핏보기에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읽는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고리는 모두 놓치는 셈이다. 오히려 쉬운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몽타쥬 이론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간에 나온 몽타쥬 이론을 철저하게 학습한 뒤에 행간 사이의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올바른 독서 방법일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이 '감동'적인 것은 다른 책과 달리 여기서는 선생님으로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그래서 모든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 결론이 아니라 결론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그 과정을 연구하고 토론하여 익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다.
이제 마지막 한 권이 남았다. <영화의 형식과 몽타쥬>(정일몽 번역, 영화진흥공사)는 영미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에이젠슈테인의 'Film form', 'Film Sense'(Jay Leyda 옮김, 1975) 두 권을 번역한 것이다. 이미 이 두 권은 부분적으로 발췌되어 나오기는 했으나 한 권으로 완역되기는 처음이다(*역자인 레이다는 초기 소련영화 전문가인데, 그의 <소련영화사1>(공동체, 1988)이 번역된 바 있다. 왜 요즘은 이런 책들도 읽어볼 수 없는가?).
이 책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 하나는 위의 책들에 빠져 있는 논문 중에서 중요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에이젠슈테인의 번역 논문 목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러나 영어판의 단점이 그대로 번역되어 있다. 영어판의 번역자인 제이 레이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번역 과정에서 상당 부분을 생략하거나 요약하였다. 그래서 최근에는 영국의 영화전문연구소(BFI, British Film Institute)에서 재번역을 하고 있는 실정인데(*책은 1991년에 출간됐다), 불행히도 이 번역은 제이 레이다 판을 따르고 있어서 충분한 이해 없이 생략된 의미까지 잡아내기 힘들다.
만일 이 책들을 읽고 결론지어 소련 영화를 모두 몽타쥬 영화라고 부른다면 그건 좀 이르다. 만일 <봉인된 시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저, 김창우 번역, 분도출판사)을 읽는다면 그 반대의 진영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되지는 않았지만 대학 영화 서클이나 비디오 감상회를 통해서 '전 작품'이 소개된 희귀한 경우이다(*타르코프스키는 80년대 대학가의 '전설'이었다. 그의 유작 <희생>이 국내 개봉관에서 처음 상영된 것이 1994년의 일이니까 이 글이 씌어진 시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여전히 '전설'인 셈이었고).
그는 1962년에 <이반의 소년시절>로 데뷔하여 1986년에 유작이 된 <희생>까지 단 7편을 연출한 극단적인 과작의 시네 아티스트이다(*그의 책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과작'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강요된 것이다). 특히 그의 영화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카톨릭의 삼위일체를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려는 예술적 소망은 고통스러우리만큼 끈질기고 황홀하리만큼 기적적인 화면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흔히 그를 영상 시인이라 부르는데, 그 자신은 영화가 시적이라고 불리는 것을 극도로 경멸하고 비판해 왔다. 더구나 근거 없는 상징적 해석에 대해서도 단연코 반대했으며, "제발 부탁인데 화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영화적인 상식으로 보면 그의 영화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철저하리 만큼 러시아 문화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특히 반에이젠슈테인 전통에 서서 편집된 영화보다는 장시간 촬영을 선호하기에, 빠른 영화에 익숙해 있는 관객에게는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서구의 영화 평론가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관객 자신의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그 속에 들어가 앉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만일 <봉인된 시간>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대한 해설이나 자서전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그의 영화에 관한 이론적 서술이며, 에이젠슈테인의 거대한 흐름 아래 자기 선언을 할 수 없었던 그 반대 진영의 변명이기도 하다.
타르코프스키의 이론의 핵심은 시간과 공간이다. 그의 지금까지의 영화 이론이 시간을 근거로 한 공간이었지만, 그 자신은 시간을 '조각하는' 공간을 제시한다. 그래서 시간을 정지시켜 세워진 공간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물을 물질적 관념으로 다룬다. 이제 그의 영화에서 몽타쥬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이미지는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획득한다.
이 책은 독일어판을 원본으로 했는데 영어판에 비해서 차이점이 많다.(더 중요한 것은 독일어 판을 구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번역의 정확성을 따져 볼 수 가 없다). 이를테면 <희생>의 마지막 장면에 6분(정확하게는 6분40초)의 장시간 롱 테이크가 나온다. 번역본에는 "나의 전 작품 중에서 가장 긴 장면, 아마도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긴 장면일 듯한 6분 짜리"(304쪽)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의심스럽다. 영역본에는 "이것이 6분 동안 불이 나는 장면을 지속하여 찍은 이유이며, 달리 방법이 없었다"(227쪽)라고만 되어 있다.
(*)영역본에서 이 대목은 "That may be why the fire scene lasts a full six minutes; it could not have been done any other way."로 옮겨져 있다. 국역본은 독어본을 대본으로 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러시아어본이 원본이라는 점이다. 확인결과 <봉인된 시간>의 러시아어본은 2002년에 출간되었다. '희귀본'인지 잘 눈에 띄지 않는 책이며 나도 아직 구하지 못했다.
혹시 번역자가 인위적으로 해설(?)을 곁들인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영역본에 근거해보자면 그런 의심을 가질 만하다), 더구나 이 영화의 첫 장면은 그 보다 더 긴 14분 15초 동안 지속되며 <향수>에서도 온천장을 횡단하는 9분 20초 짜리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영화사에서 6분 롱 테이크는 길다고 말할 수 없다. 10분을 넘는 지속 장면 영화는 수도 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고다르, 얀초, 오시마, 마이클 스노우, 등등)
이러한 몇 군데를 제외하면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과 영화 이론의 보편성을 추구한 이 난잡한 서적을 그렇게 깔끔하게 번역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영역본과의 대조에만 의지해서 말하더라도 국역본은 생각보다 많은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다. 보다 정확한 교정본이 출간되었으면 싶다). 에이젠슈테인의 책과 함께 읽으며, 우리에게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소련 영화의 깊이와 너비를 음미하는 것도 이 무더운 여름에 안목 있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여름에 읽지 못한 독자라면 가을에라도).
06.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