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신간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동아시아, 2006)이다. 지난번 <자유론>(아카넷, 2006)이 출간되었을 때 '이사야 벌린과 우파적 교양'이란 제목으로 관련 페이퍼를 적으면서 언론리뷰들을 옮겨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사야 벌린의 1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됐다는 이 책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할 리뷰가 올라와 있지 않다.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가 쓴 소개 정도가 예외적인데,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은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의 1주기에 맞추어 열린 추모 학술회의의 발표문과 토론 내용을 엮은 책이다. ‘고슴도치와 여우’ ‘다원주의’ ‘민족주의와 이스라엘’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 영국과 미국 등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해 심도 높은 논의를 벌였다."

 

 

 

 

그 세 가지 주제를 편집한 이들이 각각 마크 릴라, 로널드 드워킨, 로버트 실버스이다. 실버스는 생소하지만(<숨겨진 과학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실버스가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크 릴라와 드워킨의 경우는 이미 다른 저서들이 소개돼 있다(특히나 로널드 드워킨은 존 롤스 이후의 가장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이름이 높다). 이들 외에도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쩌 같은 걸출한 철학자들이 저자로 참여하고 있다.

리뷰의 내용을 마저 옮기면, "고슴도치와 여우’란 벌린의 논문에서 따온 개념으로, 거칠게 구분하자면 고슴도치와 여우는 각각 일원론과 다원주의에 해당한다.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강조한 벌린은 물론 다원론적 여우의 손을 들었다. 벌린의 생전에도 그러했지만 학술회의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다원주의를 지향한 벌린이 그 자신 유대인으로서 유대 민족주의인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대해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의 지인이기도 했던 아비샤이 마갈릿 예루살렘 헤브루대 교수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 남아야 하고, 이스라엘 내 무슬림 성지들은 무슬림 당국의 치외법권 아래 두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유엔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벌린의 마지막 편지를 공개했다."

이사야 벌린의 최초의 저작이 <칼 마르크스>(1939, 1978 4판)이며,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한 에세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고슴도치와 여우>(1953)는 그의 두번째 책이다(얇은 책이다). 고슴도치와 여우가 각각 일원론과 다원론을 상징한다고 돼 있는데, 벌린이 비유하고 있는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선호하는 작가는 톨스토이이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아마도 투르게네프일 것이다. 그리고 이 투르게네프와 마르크스는 생몰연대(1818-1883)가 동일하다. 그런 우연의 일치 때문만은 아니지만(사실 벌린이 <칼 마르크스>를 쓰게 된 계기도 아주 우연적이다), 나는 이사야 벌린을 이해하고자 할 때 핵심적인 키워드 두 가지는 '마르크스'와 '투르게네프'가 아닌가 싶다.

사실 러시아 태생(리가 출신이다)의 유태인이기도 하지만 벌린은 러시아 문학과 사상에 정통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그걸 확인시켜주는 저작이 <러시아 사상가들>(1978)이다(책 표지에 실린 이들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게르첸과  벨린스키, 그리고 투르게네프이다). 벌린의 지적 유산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나는 이들 작가/사상가들에 대한 그의 평가와 그가 받은 영향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더불어 바라는 바는 이 책 또한 번역/소개되는 것이다.  

얼마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브라이언 매기가 편집한 <현대철학의 쟁점들은 무엇인가: 거장들과의 대화>(심설당, 1985/1989)를 들춰볼 기회가 있었는데, 전체 15장(15명의 철학자들과의 대화)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바로 이사야 벌린 경과의 대화이다('아이사야 벌린 경'이라고 표기돼 있다). 철학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란 질문에 대해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신념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가정들에 대해 비판적인 검색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벌린은 몇 가지 사례를 예로 든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바로 일상적인 견해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위대한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입센의 희곡의 주인공과 투르게네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혹은 포스터의 <가장 긴 여행>들에 나오는 주인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어서 보다 '철학적인' 대담이 오고가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벌린이 입센, 투르게네프, 포스터 등의 작품들을 거명하는 태도이다. 명망있는 철학자이지만 그는 위대한 문학에 대한 존경 또한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하니, 벌린을 읽기 위해서는 적어도 투르게네프 정도는 읽어주는 게 좋겠다. 포스터의 책은 <기나긴 여행>으로 올해 번역돼 나왔지만,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은 진작에 번역/소개돼 있잖은가. 그러한 기본적 태도가 빠지게 될 경우 <전야> 혹은 <전날밤>이라 소개돼 있는 작품 'On the Eve'를 <크리스마스 이브에>라고 엉뚱하게 옮기게 된다(영역본 제목의 'Eve'는 크리스마스와 전혀 무관하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전야>(1860)는 결과적으론 러시아 농노해방(1861)의 '전야'를 보여주게 된 작품이다). 문학에 대한 무지는 철학도의 자랑이 아니라 근심이어야 한다.    

 

벌린의 관한 자료와 이미지들을 뒤적거리다 보니까 존 그레이의 <이사야 벌린>(1996) 같은 책도 눈에 띈다. 200쪽이 안되는 분량이기에 입문서로서 유용할 듯싶은데, 영어권에서도 고작 세번째로 출간된 관련 단행본이라고 한다. 이왕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을 챙기기 시작한 바에야 이 정도는 금방이라도 소개해줄 필요가 있겠다...

06. 10. 26.

P.S.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비전비엔피, 2007)이 최근에 출간됐다. 반가운 일이다. 소개를 옮겨보면, "20세기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낭만주의의 뿌리>등으로 국내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이사야 벌린의 문학평론서. 인간을 '여우형'과 '고슴도치형'으로 구분한 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분석하고 있다.(...) 벌린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은 기본적으로 문학평론서지만, 비단 문학적 지식만이 아닌 철학, 역사 등의 다양한 인문학의 지식과 통찰을 얻게해주는, 올바른 의미의 교양서적이다." 그러니, '교양인'이라면 챙겨두어야 할 책이다...

07. 04. 05.

P.S.2.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도 드디어 출간됐다. '러시아 문학과 사상'에 관한 강의를 맡을 때마다 아쉬웠는데, 이젠 강의 교재로 집어넣어야겠다!.. 

08.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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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사스 2006-10-27 02:00   좋아요 0 | URL
오늘 우연히도 회사에서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름은 들어봤다만…'하며 도로 내려놨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철학자였군요. ^^: 재밌게 읽고 사본 한 부를 제 서재에 비치했습니다.

로쟈 2006-10-27 08:43   좋아요 0 | URL
회사가 출판사이신가요? 벌린이 비치돼 있는 걸 보면.^^
 

한 드라마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노래가 '돌리고 돌리고..." 하는 것인데, 요즘 자주 되뇌이는 말이 "밀리고 밀리고..."이다. 책읽기에 국한하더라고 읽을 책과 읽어야 할 책들이 연이어 밀리고 있다. 그래서 '밀리고 밀리고'인데, 이제 곧 '치이고 치이고' 국면으로 넘어갈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스케줄 속에서 이 모양이라면 간혹 바쁘다는 연예인들이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고 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겠다. 하긴 먹는 건 다 챙겨먹으니까 나로선 이 정도 밀려서 쓰러지진 않겠다. 라면을 끓일 물을 올려놓고 막간에 몇 자 적는다. 그렇게 막간에 적기에는 제목이 좀 거창한다. 역사의 막간극이라...

 

 

 

 

다른 게 아니고 얼마전 <테오리아>란 책을 소개한 게 빌미가 되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들춰보고 있다. '역사의 막간극'이란 표현은 그 서문에 나온다. 20세기의 가장 음울한 고전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을 이번에 처음 손에 든 건 아니다. 사실. 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1995)이니까 최소한 10년은 됐다. 우리말로 이해가 잘 안 돼서 존 커밍의 영역본(1972)도 구했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부정의 변증법> 영역본이 악명이 높은데, 영역본 <계몽의 변증법>도 사정이 크게 나아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새로 읽을 계획을 하게 된 건 2001년에 국역본 개정판이 출간되고 2002년에는 스탠포드대학에서 새로운 영역본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1997년에 나온 Verso판은 개역본이 아니다). 이 새 영역본을 구한 게 작년 봄이었는데, 아마도 다른 일들에 치어 부득불 책읽기가 미루어졌던 듯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계몽의 개념'에 대해서는 러시어본도 확보해놓은지라 나름대로는 '중무장'을 하고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그리고는 읽은 게 두 저자가 1969년 4월에 붙인 개정판 서문이다. <계몽의 변증법>의 초판이 나온 건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인데(이미지는 속표지이다), 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오랜동안 절판상태였다고. 그런 사정을 밝히고 있는 게 이 서문의 시작이다. "<계몽의 변증법> 초판은 1947년 암스테르담의 퀘리도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는데, 현재는 상당 기간 동안 절판 상태에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재출판을 결심하게 된 것은 수많은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적지 않은 생각들이 오늘날도 유효하며 그후에 나온 우리의 이론적 노력에 이 책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믿음 때문이다."(문학과지성사판, 9쪽) 

참고로 말하자면, 국역본 문예출판사판과 문학과지성사판은 이 서문에 국한하자면 거의 동일하다. 처음 두 문장에서만 '쾌리도'가 퀘리도'로, '현재까지'가 '현재는'으로 '절판 상태에 있었다'가 '절판 상태에 있다'로 바뀐 게 전부이다. 반면에 영역판은 동일한 문장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면 개역판이다.

아무려나 그렇게 해서 출간된 게 물론 독어본 개정판이고, 이후에 판을 거듭해왔을 이 책은 오늘날에는 아주 번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계속해서 서문은 두 저자간의 지적 기질이 일으키는 긴장이  책의 '생동하는 요소'라고 자부하는 대목에 이어서 책의 의의를 밝혀준다: "책 속에서 말해진 모든 내용을 오늘날도 아무 수정 없이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태도는 진리를 역사적 운동에 대치되는 어떤 불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이론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 책은 나치 테러의 종말이 눈에 보이는 시점에서 씌어졌다. 사실 적지 않은 부분들이 오늘날의 현실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느낀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그 당시도 '관리되는 사회'로의 전이를 그렇게 단순화시켜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책이 씌어지던 40년대말 나치시대와 '관리사회'로의  이행이 전면화되어가는 것으로 보이는 60년대 말 사이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이 저작에서 '관리되는 시회로의 전이' 양상에 대해 과소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현실적인 유효성을 갖는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세계사의 참혹한 양상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세계가 거대한 세력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이들이 필연적인 충돌을 향해 치닫는 시대에 참혹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그 시대에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에 불과하다."(9-10쪽, 강조는 나의 것)

좀더 이어지는 문단을 여기에서 끊은 것은 뭔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참혹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와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에 불과하다"가 잘 호응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내가 갖고 있는 두 영역본과 대조해보았는데, 나로선 부정문이 긍정문으로 잘못 옮겨졌다고 밖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설마 국역본과 영역본의 역자들이 각기 다른 독어본을 대본으로 사용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두 영역본에서의 번역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한번 날리고 다시 친다. 날리고 날리고).

"In a period of political division into immence power-blocks, set objectively upon collison, the sinister trend continues.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just as little mere historical episodes as, according to the Dialectic, was Fascism in its time."(1972판)

"In a period of political division into immence biokcs driven by ab objectlve tendency to collide, horror has been prolonged.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ny more than, according to the Dialectic, fascism was at that time."(2002판)

여러 번 대조해 읽어보았지만 아무래도 국역본은 오역인 듯싶다. 그리고 논리상으로도 국역본의 문장은 지지될 수 없다. <계몽의 변증법>이 과연 1930-40년대의 파시즘을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으로 간주하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그 반대 아닌가? 파시즘을 계몽의 불가피한/필연적인 귀결로 간주하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제시한 통찰이고 두 저자의 음울한 결론 아닌가? 그러니까 근대적 이성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우슈비츠라는(최근에는 아감벤 또한 이런 식의 통찰에 합류하는 것이고).

해서 최소한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그 시대에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이 결코 아니다." 정도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계몽의 변증법>이 갖는 '현재성'과 결부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모든 번역에 필연적으로 오역이 끼여들기 마련이지만 부주의로 말미암은 듯한 이런 류의 오역은 불가피한 오역이 아니다. "진보 앞에서조차 멈추지 않는 비판적 사유"라면 미심쩍은 대목들을 한번 더 확인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런 오역과 맞부닥치게 되면 이후의 여정이 빡빡하리란 예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저 '오역의 막간극' 정도이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이어지는 문단: "이 책에서 인식된 '총체적 통합'으로의 발전은 완전히 분쇄된 것은 아니지만 잠시 중단되고 있다. 그러한 총체적 통합은 독재와 전쟁을 거쳐 자신을 실현시키고 위협을 가한다. 이와 결부된 것으로서 계몽이 실증주의, 즉 실제 '일어난 사실의 신화'로 넘어가고, 마지막에는 지성이 정신의 적대자와 같아지는 현상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관은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꿈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실증주의적으로 정보를 약탈하러 다니지도 않는다.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그러한 역사관은 철학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두 영역본의 참조할 때 첫 문장 또한 "이 책에서 인식된 '총제적 통합'으로의 발전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완전히 분쇄된/종결된 것은 아니다."가 의미에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방점이 어디에 놓이느냐의 문제이다. 더불어, '총체성'이나 '전체성'에 대한 두 사람의 뿌리깊은 불신을 이런 대목에서는 떠올려보는 게 좋겠다. '전체는 비진리이다'라는 게 아도르노의 맥심이다. 그러니까 '총체적 통합으로의 발전'이라는 양상은 두 사람에게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전체주의 비판과 맞물리는 것이 실증주의 비판이다. 실증주의란 '실제 일어난 사실' 그 자체의 존립과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는 입장이다(이 경우 철학은 불필요하다). 저자들은 그것을 '신화'로 치부한다. 두 사람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그들의 역사주의적 태도는 철학의 거부나 부정이 아니라 '철학 비판'이다(이 '철학 비판'이 곧 '비판이론'인 것인가?).

서문의 말미는 헌사와 바람으로 채워져 있다. 먼저, 책을 프리드리히 폴록(1894-1970)에게 헌정한다는 내용. 이건 1947년본에서나 1969년본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호르크하이머의 절친한 친구였던 폴록은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연구소 창립멤버였다. 이어지는 바람. 초판에 비해서 별로 수정된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저자는 이 책이 '일차적인 자료' 이상의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시켜나가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 되었다...

06.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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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10-29 12:00   좋아요 0 | URL
확실히 72년 영역본이 2002년 영역본보다 문장이 어려운것 같네요.2002년판 문장에서.. "NOT~~~~ any more than~~~fascism"부분은 직역하면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파씨즘 이상은 아니다." 정도인것 같은데 로쟈님 말씀대로...그만큼의 전체주의적 문제점들을 전후세계도 가진다는 이야기가 맞군요..상대적으로 72년 영역본의 문장은...지금봐도 너무 난삽하게 영역한것 같네요...-_-

biocs는 blocks의 오자같네요..^^

로쟈 2006-10-29 12:06   좋아요 0 | URL
오타는 수정했구요, 제가 읽는 문장은 생략문입니다.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ny more than, according to the Dialectic, fascism was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t that time." A가 B가 아닌 것은 C가 D(=B)가 아니었던 것과 같다. 독어본의 문장도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yoonta 2006-10-29 12:4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과거의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단순한 역사의 막간극이 아니다.".라는 말씀 ^^ 사전을 뒤적여보니..not ~any more than구문은 no more ~ than 구문과 같은 뜻으로.."~이 아닌것은 ~이 아닌것과 같다"라고 되어있네요.. 독해연습 하나하고 갑니다..^^

로쟈 2006-10-29 13:03   좋아요 0 | URL
저는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경탄스럽습니다!..
 

얼마전에 전해들은 것이지만 한국문학의 '전복적 상상력' 혹은 '수상한 활력'에 대한 심포지엄이 개최된다고한다. 문단의 동향에 관심을 가져온 이라면 대략 어떤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다. 발표문들은 아마도 겨울호 계간지에 실릴 듯도 한데, 개인적인 의견은 그때 붙이도록 하겠다. 

경향신문(06. 10. 26) '전복적 상상력’ 심포지엄, 한국문학 전위 ‘수상한 활력’ 찾기

사진 위부터 황병승, 강영숙, 강정씨.

2000년대 한국 문학을 향해 흔히 던지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자리가 마련된다. 계간 ‘실천문학’이 2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하는 심포지엄 ‘한국 문학과 전복적 상상력’이 그것이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은 물론 문학판 안에서조차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변화한 한국 문학의 전위에 대해 평가해보는 자리다. ‘문학’이라는 아성, 특히 리얼리즘·모더니즘 등 외부 세계에 어떤 현실·진리가 존재하고 문학은 그것을 재현한다는 식의 근대문학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21세기 문학을 규정하려는 평론가들의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심포지엄의 총론 발제를 맡은 평론가 손정수씨(계명대 교수)는 “예술로서의 문학과 상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구분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서는 희미해진 반면, 제도적 차원에서만 뚜렷하다”며 “특히 예술로서의 문학은 소규모 취미공동체 내에서만 유통되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손씨는 여기에 ‘교육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범주를 하나 더 보태는데 이는 근대문학 초창기에 계몽 또는 교양의 역할을 하다가 오늘날에는 홈쇼핑 방송에서 논술교재용으로 판매하는 동서양 고전처럼 상품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손씨에 따르면 공공적 성격이 강한 상품·교육으로서의 문학은 자본주의체제에서 자립하는 반면, 사적 활동인 예술로서의 문학은 정부지원에 의해 지탱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그렇다면 예술로서의 문학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손씨는 “문학의 정치성이라는 근대문학의 전제는 사라졌다”면서 그 대신 “2000년대 이후 문학의 종말을 둘러싼 음산한 풍문들 속에서도 수상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지칭하는 작품은 편혜영·김애란·김숨·백가흠·김유진 등의 소설, 황병승·강정·장석원·김행숙·이장욱 등의 시이다. 이 작품들은 ‘분석자의 시선이 사라지고 피분석자의 언어만이 드러나 있는 것’, 즉 관찰·묘사·해석·대안 등 기존 문학적 관습에서 벗어난 것이다. 손씨는 여기서 미래 문학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인터넷 블로그와 같은 자발적 글쓰기, 공동체의 구성원이 하고 싶은 말을 작가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말하는 방향”이라는 전망이다.

한편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를 분석한 평론가 신형철씨(서울대 강사)는 2000년대 ‘뉴웨이브’라 명명된 시의 핵심이 ‘자아에 대한 발본적 반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서정시와 생태시를 가능하게 했던 전인적 ‘자아’ 대신, 분열되고 해체된 ‘주체’가 시에 등장했다는 뜻이다. ‘죽을 때까지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으리’(황병승의 ‘시코쿠’), ‘토끼는 달리면서 자꾸만 토끼 아닌 것이 된다’(강정의 ‘들판을 토끼’) 등의 시구가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신씨는 “‘정상’의 시선에서는 변태와 괴물, 환상과 엽기일지 모르지만 ‘금지에의 저항’이 아니라 ‘유혹에의 거절’만이 가능한 시대에 탈고백, 반계몽, 무질서가 갖는 전복적 미학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에서 평론가 심진경씨(서강대 강사)는 민족과 국경이 사라진 전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그려낸 소설로 강영숙의 장편 ‘리나’(랜덤하우스)와 한유주의 작품집 ‘달로’(문학과지성사)를 든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진 1990년대의 작가들이 인도·티베트·몽골·중국 등 해외체류경험을 통해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정서를 그렸다면 강영숙과 한유주는 더이상 자본주의 아닌 곳이 없는 현실에서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만들어낸다. 심씨는 “강영숙의 주인공 ‘리나’는 단순한 탈북자가 아니라 세계의 여러 국경을 떠도는 이주자이며 한유주의 화자는 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 기억에 대한 기억만이 가능한 신세대의 표상”이라고 밝혔다.(한윤정 기자)

06. 10. 26.

P.S. 컬쳐뉴스에서 실제 진행된 심포지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 2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된 계간 『실천문학』 심포지엄에서 손정수 문학평론가가 총론을 발표하고 있다

컬쳐뉴스(06. 10. 30) 한국문학의 '내파력'은 어디서 오는가?

편혜영, 김애란, 김숨, 강영숙, 백가흠, 황병승, 강정, 장석원 등 소위 요즘 잘나가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의 작품은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과 같은 전통적 문학 범주로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동시대 작가로서 공통된 경향성을 보이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문학에 따라다니는 공통된 수사가 있다. 바로 ‘전복적 상상력’이 그것인데, 기존의 문학적 형식이나 내용의 틀을 깨트리는 이 ‘전복적 상상력’은 2000년대 문학이 가진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계간 『실천문학』은 이번 겨울호 발간에 앞서 2000년대 한국문학이 지닌 이 같은 ‘전복적 상상력’을 보다 냉철히 성찰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 10월 27일(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관에서 개최된 문학 심포지엄 ‘한국문학과 전복적 상상력’은 2000년대 문단에 제출되고 있는 시와 소설에서 발견되는 ‘전복적 상상력’이 한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인가를 구체적으로 논하는 격론의 장이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총론 ‘한국문학의 전복적 상상력’과 소주제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 읽기’,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 읽기’로 진행됐다. 심포지엄 총론을 맡은 손정수 문학평론가는 「‘전복적 상상력’을 전복하는 상상력」이라는 발제에서 “2000년대 이후 문학의 종말을 둘러싼 음산한 풍문들 속에서도 시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수상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이 새로운 경향은 귀족적이라고 비판되곤 하는 모더니즘 내러티브의 순수한 추상화를 향한 초월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의 길을 걷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최근의 문학 작품에서는 증상에 대한 처방이 아니라 증상만 드러나는 경우가 빈번하다”면서 때문에 “누구나 문학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인터넷 블로그와 같은 자발적 글쓰기의 형식은 미래적 글쓰기의 존재방식의 한 측면을 암시”한다고 밝혔다. 결국 “기존의 문학 관념을 벗어난 곳에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놓여 있”으며, “문학의 현재적 존재방식 자체를 전복 혹은 변화시키는 상상력, 즉, 텍스트 차원의 ‘전복적 상상력’을 전복하는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토론에서 “문학의 전복성은 주변성이 아니라 중심의 가운데에서 그것을 해체하거나, 중심의 중심성, 척도의 정당성 자체를 뒤흔드는 혁명성에 있다”면서 “문학이, 문단이 제도화된 상황에서 인터넷을 통한 자발적 글쓰기가 아마추어리즘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서영인 문학평론가는 “근래에 들어 문학의 새로움을 증명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이전의 원리들에 의거해 설정되고 있다”면서 “지금의 문학이 이전의 것과 다르다면 그리고 그 이전의 문학 역시 새로운 것으로 명명된 바 있다면, 지금의 새로움을 말하기 위해서는 좀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젊은 시인의 전복적 언어읽기’를 분석한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2000년대 한국시의 뉴웨이브’에 대해 “새로워서 좋다”가 아니라 “좋은데 새롭다”고 전제하면서, “뉴웨이브의 핵심은 ‘나’에 대한 발본적 반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뉴웨이브”들을 “‘상투적인’ 서정시”들과 구분하면서 “그들은 ‘나’의 단독성을 보증해주지 못하는 세계에서 ‘자아’라는 헛된 정체성(동일성)과 작별”하고 “세계 여기저기에서 ‘나’를 재확인하는 서정적 여행을 그만”두고, “‘나’의 진실을 찾아 비서정적, 탈서정적 여행을 떠난다”고 분석했다.

신 평론가는 “많은 사람들이 뉴웨이브의 시가 내용 없고 질서 없는 장광설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시 독자의 이반을 초래하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이 세상의 깨달음과 지혜라는 것들이 대개 엇비슷하게 닮아있다는 사실에 피로를 느끼는 독자들은 이들의 시에서 어떤 역설적인 가능성을 읽어내기도 한다”면서 “탈-고백, 반-계몽, 무-질서가 궁극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분간 이 미학들의 전복성은 소진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래파’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한국 시단에 반향을 일으킨 권혁웅 문학평론가는 토론에 앞서 “미래파라는 말은 텅 빈 명명이자 일종의 여백”이라며 “이 여백을 통해 실재하는 것들의 자리가 조금이나마 드러난다면 그것으로 이 용어의 쓸모는 다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황병승에게 이성복이 없었다면, 장석원에게 김수영과 황지우가 없었다면, 강정에게 함성호와 진이정이 없었다면 (중략) 이들의 출현은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라면서 “이들의 시가 전복적인 것은 그 전대의 영향을 미묘하게 변형하고 비켜가고 극단화해서 마침내 새로운 차원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성혁 문학평론가는 신형철 평론가가 ‘좋은데 새롭다’는 것을 마케팅 미학인 ‘새롭기 때문에 좋다’와 구분지어 명명한 것과 관련해 “좋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사용가치가 없다면 교환가치도 가질 수 없다”며 “발표자는 교환가치의 불모지인 문학마저 ‘새롭기 때문에 좋다’라는 마케팅 미학에 흡수된 양상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젊은 소설가의 전복적 서사 읽기’에서 심진경 문학평론가는 민족과 국경의 경계가 사라진 전지구화 시대, 미디어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문학적 현실을 그리고 있는 강영숙의 장편소설 『리나』와 한유주의 단편집 『달로』를 통해 ‘허공에서 글쓰기’라는 문학적 경향을 읽어낸다.

심 평론가는 “이들 소설의 인물들은 단일한 기원이나 정체성을 주장하기 보다는 세계를 스쳐지나가듯 여행하면서 유령처럼 희미하게만 존재한다”며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견인해왔던 현실적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공중부양하는 이들 소설에서 ‘허공’은 새롭게 발견한 문학적 공간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허공에서 글쓰기는 다국적 기업의 논리가 지배하고 미디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경험하게 된 후기자본주의적 현실과 그리 멀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허공은 무중력의 탈현실적 공간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명철 문학평론가는 “『리나』는 근대적 경계로부터 발산되는 문제들에 맞서는 ‘포월의 서사’가 아니라 악무한의 현실로 빚어진 관념의 공간-국경을 넘는 ‘이월의 서사’에 자족할 뿐이며, 『달로』 역시 주체와 그 주위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시간의 물질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이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났다면, 벗어난 이유들에 대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강민 문학평론가는 “모든 것은 매개된 기억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한유주의 소설은 과연 2000년대 소설의 새로운 희망일까?”라고 물으며, “2000년대 작가의 진정한 새로움이란 탈주체, 탈근대를 표방한 1990년대 미시서사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 속에 새롭게 태어난 것일 수박에 없는데, 한유주의 경우 1990년대 문학의 연장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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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6-10-2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정 시인 사진은 처음 보네요.
예전에 한번 본 '비행선'이라는 밴드의 보컬하고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같은 사람이군요..;;
성기완 시인도 그렇고 참 다재다능한 사람들이네요

로쟈 2006-10-2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로만 버티기도 힘들다는 게 다재다능의 이면이 아닐까요...
 

한겨레의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번역가의 괴로움'이란 칼럼을 읽게 되었다. 제목 자체가 최근에 문제된 '대리번역' 파문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건 칼럼을 읽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가브리엘 마르케스 전문 번역가로 유명하다는(아마도 마르케스의 노벨상 수상에도 일조했을 듯싶다) 그레고리 라바사를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

 

 

 

 

<백년의 고독> 혹은 <백년 동안의 고독> 영역본의 그의 작품이라는데(국내에도 여러 번역본이 출간돼 있다), 마시멜로보다는 라바사에 흥미를 느껴서 몇 가지 검색을 해보았다. 한겨레의 칼럼과 함께 재작년 뉴욕타임즈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0. 24) 번역가의 괴로움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의 대리번역 또는 이중번역 논란으로 모처럼 번역가들한테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덕분에 번역가들의 어려운 처지도 약간 드러났으나, 아무래도 나쁜 인상이 더 클 것 같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번역가들이 주목받는 건 흔히 부정적인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서다. 독자들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고 느낄 때나 ‘도대체 누가 번역했어’ 하며 이름을 확인하는 게 보통이다. 번역의 어려움을 알 만한 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도 원전을 강조하고 번역서와 번역가를 낮춰보는 경향이 꽤 있다.

하지만 훌륭한 번역가가 문화에 이바지하는 바는 셈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 점은 미국의 유명 번역가 그레고리 라바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22년 쿠바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60년대 초부터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쓰는 작가 약 30명의 작품 60권 정도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남미 문학이 이렇게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70년에 번역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은 또하나의 훌륭한 창작품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 말엔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라바사에게도 번역은 쉽지 않은 작업인 듯하다. 책 전체를 미리 읽지 않고 읽어가면서 번역하기로 유명한 그는 지난해 쓴 회고록 <이것이 반역이라면>에서 번역을 모순적으로 규정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그저 ‘단어들을 따라가기’로 묘사하다가, 다른 대목에서는 ‘개인적인 선택에 근거한’ 아주 주관적인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번역은 미묘하고 까다로운 일이다. 독자들이 이런 어려움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만, 책을 잡을 때 ‘이름 없는 봉사자’인 그들을 한번 생각해주는 정도의 관심은 필요할 것이다.(신기섭 논설위원)

A Translator's Long Journey, Page by Page

By ANDREW BAST

Published: May 25, 2004

On Gregory Rabassa's crowded bookshelves is a first edition of "Rayuela," the experimental 1963 novel by the Argentine novelist Julio Cortázar. Mr. Rabassa had just finished his Ph.D. in Portuguese in the mid-1960's when an editor at Pantheon — who had noticed his work editing a failed literary magazine at Columbia University — asked him to translate Mr. Cortázar's book from Spanish into English. Without having read what has been called a "fiendishly esoteric" novel, Mr. Rabassa sat down and typed a draft in English, word by word. In 1967 Mr. Rabassa's work, titled "Hopscotch" in English, won the first National Book Award for translation.

"I've got 50 of them behind me," Mr. Rabassa said, reflecting in the Upper East Side apartment he shares with his wife, Clementine. He has a slight build and white hair that he wears like a crown. He is surrounded by novels written by literary giants like Jorge Amado, Mario Vargas Llosa, José Lezama Lima and Gabriel García Márquez, the original Spanish or Portuguese edition beside his published English translation.

Now, at 82, Mr. Rabassa is finally going to publish his own first full-length book, "If This Be Treason: Translation and Its Dyscontents," a playful reflection on his life's work that New Directions is planning to bring out next spring.

"My thesis in the book is that translation is impossible," Mr. Rabassa said. "People expect reproduction, but you can't turn a baby chick into a duckling. The best you can do is get close to it."

If that is true, then Mr. Rabassa has gotten about as close as one can. He is widely considered one of the greatest practitioners of his craft. "Rabassa's great gift is to find the music in English that is true to the language of a wide range of writers in Spanish," said Dan Simon, the founder of Seven Stories Press, which has published some of Mr. Rabassa's translations. "Had Rabassa become a diplomat or brain surgeon, we could easily imagine not having readable translations of Cortázar and García Márquez."

Yet for all the accolades, translation is still a difficult and poorly understood art. Often the translator's name will not even appear on the cover of the book, Mr. Simon said, yet "a poor translation of a text kills it in the market."

Walter Benjamin, the German literary critic, once wrote, "No translation would be possible if in its ultimate essence it strove for likeness to the original."

Mr. García Márquez has said that Mr. Rabassa read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sat down and then rewrote it in English. (He also said that Mr. Rabassa's translation improved on the original.)

But Mr. Rabassa contends that rewriting is not at all what he does: "I'm reading the Spanish, but mostly I'm reading it in English, and it comes out that way.

"When I talk about it, I say the English is hiding behind his Spanish. That's what a good translation is: you have to think if García Márquez had been born speaking English, that's how a translation should sound."

In the case of Cortázar, Mr. Rabassa developed a relationship with him, and they became good friends, spending days and nights listening to 78's of Count Basie and Lester Young. Mr. Rabassa translated Luis Rafael Sánchez and lounged with him on the beaches of Puerto Rico. And after translating "Seven Serpents and Seven Moons" by Demetrio Aguilera-Malta, a former Ecuadorian ambassador to Mexico, he ended up with one of the author's paintings hanging on his apartment wall.

Yet Mr. Rabassa has also produced brilliant translations without developing any relationship with the author. Jorge Armado and Mr. García Márquez wanted nothing to do with their books in English.

Mr. Rabassa said he typed his translation of Mr. García Márquez's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page by page, just as he did with Cortázar's novel. Yet unlike his blind excursion with "Hopscotch," Mr. Rabassa had already read Mr. García Márquez's magical epic about the Buendía family, before he tried the translation. "I knew it was a damn good book, but it wasn't as much fun knowing all about it," he said.

Sitting in his armchair, nibbling on a greek pastry, Mr. Rabassa explained that titles pose their own challenge. He translated the 19th-century Portuguese classic "Memórias póstumas de Bráz Cubas" by Joaquim Maria Machado de Assis, which literally means "The Posthumous Memoirs of Brás Cubas." When Noonday Press issued the novel with the title "Epitaph of a Small Winner," Mr. Rabassa complained.

"You don't mess around with a classic," he said. "That's like calling `Madame Bovary' the story of a middle-class adulteress." (Oxford University Press published the book with Mr. Rabassa's translated title in 1997.)

Half of Mr. Rabassa's book will consist of reflections on each of the many authors he has translated, and half will be a memoir of how he ended up as a translator. The epilogue, he said, will be printed unfinished, as "translation is never finished."

Mr. Rabassa was born in Yonkers in 1922. His father was a Cuban sugar broker, but, he said, "the old man didn't speak much Spanish around the house." The young Mr. Rabassa studied French and Latin in high school; then at Dartmouth, he said, he "began collecting languages." There he studied Portuguese, Russian and German. In conversation, his voice wanders seamlessly among the five he still speaks.

"I'd dabbled in Italian," Mr. Rabassa said. "But then I bought a beautiful edition of Dante. I used Spanish and Portuguese — they're so similar to Italian — as I went along, substituting the real Italian words, and finally I was talking Italian."

In 1942 Mr. Rabassa volunteered for the Army and, because of his language skills, ended up in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Mr. Rabassa translated encryptions, or what he called English into English, and he also conducted interrogations.

When he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after spending time in Italy and Northern Africa, Mr. Rabassa lived on Morton Street, watched Charlie Parker play in Greenwich Village and wrote poetry. He studied for his master's in Spanish at Columbia, then, tired of the language, kept on with his studies but finished his doctorate in Portuguese. At a cocktail party Mr. Rabassa met an administrator at Queens College and he ended up being hired as a professor there. He still teaches the freshman lecture course Hispanic Literature in Translation.

"When I began teaching," he said, "I was the same age as my students, and I still labor in the delusion. So it's a good, youthful operation."

Mr. Rabassa says that although he is translating a new generation of Hispanic writers, little has changed since he translated the giants. Despite the differences in writing styles, the way he approaches the text is essentially the same.

"They're all so different, the ones I did," he said. "I think it works because I don't think I have a translation style. It's a positive feeling I have about them. I find a lot of instinct in what I do. You have to just hit it right. I'm never sure whether something is right, but I know damn well when something is wrong."

0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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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6-10-24 01:48   좋아요 0 | URL
* 퍼 갈께요...요즘 정지영씨와 관련되어 있는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맘이 찹작함을 많이 느끼는데, 괜찮은 글인 것 같습니다.

이네파벨 2006-10-24 10:11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갈께요...고맙습니다.

sommer 2006-10-24 17:29   좋아요 0 | URL
익명의 내면성을 외재화하는 게 번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마치 헤겔의 변증법을 외재화된 자기 의식으로 귀환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고찰로 파악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기인 2006-10-24 21:46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갑니다. 공익하면서는 번역 알바나 할까 생각중인데, 페이와 노고를 대비해보면 정말 답 안나오는 일이기도 해서... 고민중입니다. 다시 사교육계에 투신(?)해야 하나 하고 ㅠㅜ

로쟈 2006-10-24 23:00   좋아요 0 | URL
호의적인 반응들을 보여주셔서 다행입니다. 번역, 더 나아가 '좋은 번역'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대우가 좀 달라져야 한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계몽'에 가장 긴요한 수단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인 연극'에 이어지는 글이다. ‘도착적인 새끼 악마’는 'Imp of the Perverse'의 번역이며, 국역본 <향락의 전이>에서 이 절은 '고상한 '성도착의 도깨비''란 제목을 달고 있다(내가 갖고 있는 건 초판이어서 개역판에는 변화가 있는지 모르겠다). 

 

 

 

 

좀더 면밀히 고찰하면, 귀부인-대상의 접근불가능성은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을까? 피해야 할 원칙적인 실수 증의 하나는 이 접근불가능성을, 우리는 그 열매가 금지되는 한 그것을 탐낸다는 식의, 단순한 욕망과 금지의 변증법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혹은, 다음과 같은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공식을 따라서 그렇게 환원하는 일이다.  

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 

"…성애적 욕구의 심리적 가치는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쉬워지자마자 감소한다. 리비도를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장애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족에 대한 자연적 저항이 충분하지 않았던 곳에서 항상 사람들은 사랑을 즐길 수 있기 위해 인습적인 장애물을 설치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궁정식 사랑은 그저 가장 급진적인 전략의 하나로 나타날 뿐인데, 그것은 곧 대상을 획득불가능하게 만드는 관습적 장애물을 설치하여 대상의 가치를 드높이는 전략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라캉은 세미나 20 <앙코르>에서 외관상 유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성적 관계의 부재를 대체하는 가장 세련된 그 방법은 그 길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가장하는 것이다.”(라캉, <앙코르>, 불어판, p.65)

따라서 요점은, 대상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부가적인 관습적 장애물을 우리가 설치한다는 것, 단지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외부적 장애물은, 그 장애물이 없다면 대상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환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귀부인-물(Lady-Thing)의 장소는 원천적으로 텅 빈 곳이다. 그녀는 그 주위로 주체의 욕망이 구조화되는 일종의 블랙홀로 기능한다. 욕망의 공간은 상대성 이론의 공간처럼 구부러져 있다. 대상-귀부인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은 간접적인, 우회적인, 구불구불한 길 뿐이다. 곧장 직진해서 가면 우리는 반드시 목표를 잃는다. 이것이 라캉이 궁정식 사랑과 관련하여 “심리적 경제에서 우회의 협상에 귀속시켜야 하는 그런 의미”를 환기시켰을 때 염두에 둔 것이다.  

정신에서의 우회는 쾌락원칙의 영역에서 조직되는 모든 것과 현실의 구조로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모든 것 사이의 교섭을 조절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액포(vacuole, 液胞)의 영역을 그 자체로 눈에 띄게 만들기 위해 조직되는 우회와 장애물이 또한 존재한다…… 궁정식 사랑과 관련된 테크닉들은 - 그리고 그것들은 무엇이 때로 사실fact이 되는가를, 이러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고무 속에서 성적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지각할 수 있게 한다 - 억제, 미결정, 방해된 사랑(amour interruptus)의 테크닉이다. 궁정식 사랑이 자비의 선물(le don de merci)이라고 신비롭게 언급된 것 이전에 설정하고 있는 단계는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 프로이트가  <세 개의 에세이(Three Essays)>에서 전희(前戱)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했던 용어로 표현된다.(라캉, 앞의 책, p.152)  

 

 

 



그런 이유로, 라캉은 왜상(歪像; anamorphosis)의 모티프를 강조한다. 즉 대상은 그것의 측면에서, 부분적이고 뒤틀린 방식으로, 그 자신의 그림자로서 보여질 때에만 지각될 수 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단지 텅 빈 공동만을 보게 될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시간적 왜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상은 끊임없는 연기[지연]를 통해서만, 그것을 확인[참조](reference)할 수 있는 지점이 부재하는 상태로서만(as its absent point of reference) 획득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상은 말 그대로 창조된 어떤 것인데, 그 대상의 장소는 에워싸여져 있으며, 그 대상은 [주체의] 우회, 근접, 성공 일보직전(near-miss)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창조된다. 승화가 작동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라캉적 의미에서의 승화는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적 의미의 승화와는 달리] 대상이 물의 위엄으로 승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승화는 일상적 현실의 부분인 어떤 대상이, 불가능한 물의 장소에서 발견될 때 발생한다. 인위적 방해물들이 기능하는 곳은 이 곳이다. 방해물들이 우리가 어떤 평범한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갑자기 막는다. 그 방해물들이 대상을 물의 지위를 대리하는 것으로 상승시킨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 ‘금지된 것’으로 바뀌는 방식이다 : 이 변화는 물과 인위적인 방해물들 때문에 접근 불가능하게 된 어떤 실정적인 대상 사이의 단락(短絡; short circuit) 때문에 일어난다.

접근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귀부인이라는 전통은 살아 있고, 예컨대 우리 세기의 초현실주의에서 더욱 그렇다. 그것은 루이스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상기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거기서 한 여성은 일련의 불합리한 트릭을 통해 그녀의 늙은 애인과의 성적 재결합의 순간을 끊임없이 지연시킨다(예컨대 남자가 그녀를 결국 침대로 데려갔을 때, 그는 그녀의 잠옷 속에서 그녀를 완전히 벗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많은 버클이 달린 구식 코르셋을 발견한다). 영화의 매력은 근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한계와 사소한 경험적 장애물 사이의 바로 이 터무니없는 단락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궁정식 사랑과 승화의 논리를 그 가장 순수한 형태 속에서 발견한다. 어떤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이나 행위는 일단 그것이 물(Thing)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 접근할 수 없거나 성취 불가능한 것이 된다. 물은 쉽게 닿을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체 세계는 어떻게든 대상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측량할 수 없는 우연성을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데 순응해왔다.  

브뉘엘은 이러한 역설적 논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단순한 욕망을 충족하는 것의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그의 모든 일련의 영화들은 이러한 모티프를 변주한다. <범죄에 대한 수필(The Criminal Life of Archibaldo de la Cruz)>에서 주인공은 간단한 살인을 하기를 원하지만 그의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추방당한 천사(The Exterminating Angel)>에서는 파티를 마치고 난 일군의 부자들은 문턱을 넘어 그 집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The Discreet Charm of the Bourgeoisie)>에서 두 커플은 함께 식사를 하기를 원하지만 예기치 않게 생기는 복잡한 일들이 항상 이 단순한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방해한다...

 

 

 

이제 통상적인 욕망과 금지의 변증법과 관련하여 무엇이 차이를 결정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금지의 목적은 대상으로의 접근을 보다 어렵게 만듦으로써 대상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자체를 물(物)의 수준으로, 그것을 중심으로 욕망이 조직되는 ‘블랙홀’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라캉은 정당하게도 통상적인 승화의 공식을 뒤집는데, 그 공식이란 리비도를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에서 이러한 욕구와 명백한 관련이 없는 대상으로 이동시키는 것과 관련된다. 예컨대 파괴적 문학비평은 승화된 공격성이 되고, 인간 육체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는 승화된 관음증이 되는 등등 그런 식이다. 반대로 라캉이 승화로써 의미하는 바는 리비도를 ‘쓸모없는’ 물의 공동에서, 물의 자리를 점유하는 순간 숭고한 속성을 획득하는 어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궁정식 사랑에서 귀부인의 역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결국 우회의 역설이다. 우리의 공식적 욕망은 우리가 그 귀부인과 자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우리의 소망에 관대하게 굴복하는 귀부인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귀부인으로부터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은 단지 또 다른 새로운 명령이고, 또 한 번의 연기(延期)일 뿐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신은 그 자신의 부정한 성적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한 난봉꾼의 우화를 소개한다. 그러나 그가 간통에 대한 대가로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그가 결국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게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귀부인의 충실한 하인이라면, 선택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아마도 그는 귀부인에 대한 그 자신의 욕망을 즉각적으로 만족시키기보다는 교수형을 더 선호하리라. 그러므로 귀부인은 하나의 독특 단락(段落)으로서, 욕망의 대상 그 자체가 그 자신의 목표달성을 방해하는 힘과 일치하는 독특한 단락으로서 기능한다. 어떤 면에서, 대상은 그 자신의 퇴거이자 철회인 것이다.

우리가, 종종 언급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되었던, 여성의 ‘남근적’ 가치, 즉 ‘여성=남근’이라는 라캉의 동일화를 인지해야만 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 의지해서이다. 말하자면, 똑같은 역설이 거세의 기표로서의 남근적 기표를 특징짓는다는 말이다. ‘거세란, 향락이 거절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 결과, 향락이 욕망의 법이라고 하는 뒤집혀진 사다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캉, <에크리 선집>, p.324)

이러한 ‘경제적 역설’은 얼마나 그럴 듯한 것인가, 욕망의 기계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주체는 향락을, 그 무슨 고귀한 대의(Cause)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향락]에 접근할 수 있기 위해서,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인가? 혹은 - 동일한 역설에 대한 헤겔의 공식을 인용하자면 - 어떻게 우리는 동일성을 그것을 상실하는 것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가? 이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남근 즉 향락의 기표가 동시에 거세의 기표이어야만 한다는 것, 즉, 하나의 동일한 기표가 향락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상실을 의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향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바로 그 작인이 우리로 하여금 향락을 거부하게 만드는 일이 가능해진다.

다시 귀부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귀부인을 서양의 형이상학적 열정의 의인화로 간주할 수 있으며, 특수한 실체 혹은 대상을 모든 존재의 근거로 격상시키는 형이상학적 오만의 과도하다 못해 거의 희화(戱畵)적인 사례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좀더 면밀히 고찰해본다면, 무엇이 이러한 형이상학적 혹은 더 단순하게 철학적 오만을 구성하는가? 아마도 놀라운 사례로 보일만한 것을 거론해보자.

맑스의 경우, 그가 생산을, 생산․분배․교환․소비라는 네 가지 요소의 총체성의 한 계기(moment)이면서 동시에 그 네 가지 요소를 망라하는 총체성이자 그 총체성에 특별한 색조를 부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때, 거기에선 특수하게 철학적인 차원이 작동한다.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절대화’, 즉 총체성의 특수한 한 계기를 총체성의 근거로 상승시키는 것, 균형 잡힌 전체의 조화를 ‘방해하는’ 그와 같은 오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거론해보자. 오스틴(John L. Austin)의 작업과 뒤크로(Oswald Ducrot)의 작업 말이다. 그들의 작업을 ‘철학’으로 간주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정당한가? 모든 동사를 수행문(performatives)과 사실(확인)문(constatives)으로 구분한 오스틴의 구분은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확인)문을 포함한 모든 명제는 이미 수행적이다, 라는 오스틴의 ‘불균형적이고’ ‘과도한’ 가정과 함께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즉, 수행적인 것은 전체의 두 계기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라는 가정 말이다(*뒤크로의 책으론 토도로프와 공저한 <언어과학백과사전>이 유명하다. 나는 영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대기호학연구소 번역으로 <기호학사전>(우석, 1990)으로 번역돼 나온 적이 있다. 그다지 신뢰할 만한 번역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레마스와 쿠르테 공저의 <기호학 용어사전>(민성사, 1988)만큼 가관은 아니었지만).

모든 서술어가, 그것의 정보전달적(informative) 가치를 넘어서서, 논쟁적(argumentative) 가치를 소유한다는 뒤크로의 논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단지 각각의 서술어에서 정보전달적 가치와 논쟁적 가치를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실증 과학의 영역에 머문다. 어떤 정보전달이 어떤 논쟁적 태도에 ‘적합한가'에 대한 특별한 양태를 확인하려 할 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보전달적 내용을 포함하는 서술어는 단지 압축된 논쟁적 태도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그로부터 어떤 논쟁적 태도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그 서술어의 ’순수한‘ 정보전달적 내용을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도한‘ 가정과 함께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전부가 아닌(not-all)'의 역설에 직면한다 : ’서술어의 내용의 어떠한 측면도 어떤 논쟁적 태도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은 채로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서술어의 모든 내용은 논쟁적이다’라고 하는 언뜻 명백해 보이는 보편적 결론을 끌어낼 수 있게끔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분명히 규정될(pinned down)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속하는 잉여, 빠져나가는 그 잉여는 라캉적 의미의 실재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숙고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론적 차이란] 총체성의 (특수한 형태이지만 근거로 격상된 그) 근거와, 이 근거를 빠져나가는, 그리고 그 자신은 그 근거 안에서 ‘근거지어질’ 수 없는 실재 사이에서 언제나 벌어지는 거리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말하자면, ‘비-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오만도 제거된 ‘균형 잡힌’ 총체성이 아니며, 여하한 특수한 양상 혹은 실체도 근거로 격상되지 않는 그런 총체성(보다 더 하이데거적 용어로 말하자면 '존재자들의 전체(the Whole of entities)'도 아니다. 실체들[존재자들]의 영역은 그것의 아래에 놓여져 있는[가정되어 있는](sup-posited) 근거로부터 그것의 일관성을 얻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형이상학’은 근거와 [그것을] 빠져나가는 실재―그것의 실정적인 내용(‘현실’)은 근거에 근거지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거의 영역을 빠져 나가고 근거를 침식하는 실재―사이의 차이에 대한 통찰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다시 귀부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이 바로 귀부인이 형이상학적 근거의 또다른 이름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근거 자체를 근거지어주는 자기 철회적인 실재(the self-retracting Real)의 다른 이름인 까닭이다. 그리고 모든 실체의 형이상학적 근거의 또 다른 이름이 ‘최고 선(supreme Good)’인 한, 물로서의 귀부인은 근본 악(redical Evil)의 구현체로서 지적될 수 있다. 에드가 앨런 포가 그의 단편에서 '도착적인 영혼(spirit of perverseness)'이라고 불렀던 그 악의 구현체 말이다.


 

 

 

 

-이러한 영혼에 대해서 철학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착perversness이란 것이 인간 마음의 원초적 충동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나에게는 내 혼이 살아 있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열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수백 번 저질러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거스르면서, 단지 그것이 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을 어기려는 집요한 기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검은 고양이>)  

-...사실 그것은 동기 없는 움직임(a mobile without), 동기화되지 않은 동기(a motive not motiviert)다. 그 자극 때문에 우리는 납득할 수 있는 어떤 목적[대상] 없이 행위 한다. 혹은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서 이해해 본다면, 우리는 [앞서 말한] 그러한 자극 때문에, 우리가 해서는 안된다는 그 이유로 [무언가를] 행한다는 식으로 전제를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론들 중에서 이보다 더 부조리한 논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이 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잘못이며 실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종종 우리를 몰아가고 그것을 실행하라고 부추기는 어떤 정복할 수 없는 힘이 된다는 사실은 내가 숨쉬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내게는 확실한 것이다. 잘못 그 자체를 위해 잘못을 저지르려는 이러한 압도적인 기질은, 분석이 되거나 다른 내적 요소로 분해 되거나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그리고 원초적인 충동-요소란 말이다.(<도착적인 새끼 악마>)

 

동기화되지 않은 불필요한 행위(acte gratuit)로서의 범죄가 예술에 대해 갖는 친화성은 낭만주의 이론의 표준적인 주제이다.(낭만주의 예술가 집단은 죄인으로서의 예술가라는 관념을 구성한다) 포의 공식(동기 없는 움직임, 동기화되지 않은 동기)이 직접적으로 미적 경험에 대한 칸트의 결론(‘목적 없는 합목정성’, 등등)을 상기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러한 명령 ― ‘너는 [너에게 그것이] 허락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 한다’, 즉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수행되는 어떤 행위의 순수하게 부정적인 근거 ― 은 오직 변별적인 상징적 질서 내에서만, 즉, 그러한 부정적 결정이 긍정적 목적지(그 목적지 내에서는 특질의 부재가 긍정적 특질로 기능하는 그런 목적지)를 갖는 상징적 질서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포의 ‘도착의[도착이라는] 새끼 악마’는 따라서 행위의 동기화가 행위가 그것의 경험적 대상과 맺는 외부적인 연결을 끊어버리고, 행위의 동기 그 자체를 오직 자기-참조의 내재적 원환에 근거 짓는 지점을 표시한다. 요컨대, 포의 ‘새끼 악마’는 엄밀하게 칸트적인 의미에서 자유의 지점에 상응하는 것이다. 

칸트와의 이와 같은 관련성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욕망하는 능력은 초월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념적 대상과 동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라캉은 욕망하는 능력의 선험적 지위를 논증해내려고 한다. 즉, 정념성과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우리 욕망의 어떤 동기부여(이러한 비-정념적인 욕망의 대상-원인은 대상 a이다)를 공식화할 수 있는 가능성 말이다. 포의 ‘도착의 새끼 악마’는 그러한 순수한 동기부여의 직접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내가 ‘오직 그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를 수행할 때, 나는 경험적-우연적 대상과 관계 맺지 않고, 보편적-상징적 영역 안에 머무른다. 말하자면,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비-정념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내기를 잘못 걸었다 : 정념적 동기부여의 윤리학이라는 영역을 일소해버림으로써, 그는 선을 가장하고 악을 행할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을 근절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한 것은 보통의 병리적[정념적] 악보다 훨씬 더 기괴한(uncanny) 악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젖힌 일이다.

06. 10. 23.

P.S. 참고로, <도착적인 새끼 악마(The Imp Of The Perverse)>(1845)의 원문을 옮겨놓는다. 국역본 단편전집에 포함돼 있는지는 확인해봐야겠다.

In the consideration of the faculties and impulses – of the prima mobilia of the human soul, the phrenologists have failed to make room for a propensity which, although obviously existing as a radical, primitive, irreducible sentiment, has been equally overlooked by all the moralists who have preceded them.  In the pure arrogance of the reason, we have all overlooked it.  We have suffered its existence to escape our senses solely through want of belief – of faith; – whether it be faith in Revelation, or faith in the Kabbala.  The idea of it has never occurred to us, simply because of its seeming supererogation.  We saw no need of the impulse – for the propensity.  We could not perceive its necessity.  We could not understand, that is to say, we could not have understood, had the notion of this primum mobile ever obtruded itself; – we could not have understood in what manner it might be made to further the objects of humanity, either temporal or eternal.  It cannot be denied that phrenology, and in great measure, all metaphysicianism, have been concocted à priori.  The intellectual or logical man, rather than the understanding or observant man, set himself to imagine designs – to dictate purposes to God.  Having thus fathomed to his satisfaction, the intentions of Jehovah, out of these intentions he built his innumerable systems of mind.  In the matter of phrenology, for example, we first determined, naturally enough, that it was the design of the Deity that man should eat.  We then assigned to man an organ of alimentiveness, and this organ is the scourge with which the Deity compels man, will-I nill-I, into eating.  Secondly, having settled it to be God's will that man should continue his species, we discovered an organ of amativeness, forthwith.  And so with combativeness, with ideality, with causality, with constructiveness, – so, in short, with every organ, whether representing a propensity, a moral sentiment, or a faculty of the pure intellect.  And in these arrangements of the principia of human action, the Spurzheimites, whether right or wrong, in part, or upon the whole, have but followed, in principle, the footsteps of their predecessors; deducing and establishing everything from the preconceived destiny of man, and upon the ground of the objects of this Creator.

It would have been wiser, it would have been safer to classify, (if classify we must,) upon the basis of what man usually or occasionally did, and was always occasionally doing, rather than upon the basis of what we took it for granted the Deity intended him to do.  If we cannot comprehend God in his visible works, how then in his inconceivable thoughts, that call the works into being?  If we cannot understand him in his objective creatures, how then in his substantive moods and phases of creation?

Induction, à posteriori, would have brought phrenology to admit, as an innate and primitive principle of human action, a paradoxical something, which we may call perverseness, for want of a more characteristic term.  In the sense I intend, it is, in fact, a mobile without motive, a motive not motivirt.  Through its promptings we act without comprehensible object; or, if this shall be understood as a contradiction in terms, we may so far modify the proposition as to say, that through its promptings we act, for the reason that we should not.  In theory, no reason can be more unreasonable; but, in fact, there is none more strong.  With certain minds, under certain conditions, it becomes absolutely irresistible.  I am not more certain that I breathe, than that the assurance of the wrong or error of any action is often the one unconquerable force which impels us, and alone impels us to its prosecution.  Nor will this overwhelming tendency to do wrong for the wrong's sake, admit of analysis, or resolution into ulterior elements.  It is a radical, a primitive impulse – elementary.  It will be said, I am aware, that when we persist in acts because we feel we should not persist in them, our conduct is but a modification of that which ordinarily springs from the combativeness of phrenology.  But a glance will show the fallacy of this idea.  The phrenological combativeness has for its essence, the necessity of self-defence.  It is our safeguard against injury.  Its principle regards our well-being; and thus the desire to be well, is excited simultaneously with its development.  It follows, that the desire to be well must be excited simultaneously with any principle which shall be merely a modification of combativeness, but in the case of that something which I term perverseness, the desire to be well is not only not aroused, but a strongly antagonistical sentiment exists.

An appeal to one's own heart is, after all, the best reply to the sophistry just noticed.  No one who trustingly consults and thoroughly questions his own soul, will be disposed to deny the entire radicalness of the propensity in question.  It is not more incomprehensible than distinctive.  There lives no man who at some period, has not been tormented, for example, by an earnest desire to tantalize a listener by circumlocution.  The speaker is aware that he displeases; he has every intention to please; he is usually curt, precise, and clear; the most laconic and luminous language is struggling for utterance upon his tongue; it is only with difficulty that he restrains himself from giving it flow; he dreads and deprecates the anger of him whom he addresses; yet, the thought strikes him, that by certain involutions and parentheses, this anger may be engendered.  That single thought is enough.  The impulse increases to a wish, the wish to a desire, the desire to an uncontrollable longing, and the longing (to the deep regret and mortification of the speaker, and in defiance of all consequences,) is indulged.

We have a task before us which must be speedily performed.  We know that it will be ruinous to make delay.  The most important crisis of our life calls, trumpet-tongued, for immediate energy and action.  We glow, we are consumed with eagerness to commence the work, with the anticipation of whose glorious result our whole souls are on fire.  It must, it shall be undertaken to-day, and yet we put it off until to-morrow; and why?  There is no answer, except that we feel perverse, using the word with no comprehension of the principle.  To-morrow arrives, and with it a more impatient anxiety to do our duty, but with this very increase of anxiety arrives, also, a nameless, a positively fearful, because unfathomable, craving for delay.  This craving gathers strength as the moments fly.  The last hour for action is at hand.  We tremble with the violence of the conflict within us, – of the definite with the indefinite – of the substance with the shadow.  But, if the contest has proceeded thus far, it is the shadow which prevails, – we struggle in vain.  The clock strikes, and is the knell of our welfare.  At the same time, it is the chanticleer-note to the ghost that has so long over-awed us.  It flies – it disappears – we are free.  The old energy returns.  We will labour now.  Alas, it is too late!

We stand upon the brink of a precipice.  We peer into the abyss – we grow sick and dizzy.  Our first impulse is to shrink from the danger.  Unaccountably we remain.  By slow degrees our sickness, and dizziness, and horror, become merged in a cloud of unnameable feeling.  By gradations, still more imperceptible, this cloud assumes shape, as did the vapor from the bottle out of which arose the genius in the Arabian Nights.  But out of this our cloud upon the precipice's edge, there grows into palpability, a shape, far more terrible than any genius, or any demon of a tale, and yet it is but a thought, although a fearful one, and one which chills the very marrow of our bones with the fierceness of the delight of its horror.  It is merely the idea of what would be our sensations during the sweeping precipitancy of a fall from such a height.  And this fall – this rushing annihilation – for the very reason that it involves that one most ghastly and loathsome of all the most ghastly and loathsome images of death and suffering which have ever presented themselves to our imagination – for this very cause do we now the most vividly desire it.  And because our reason violently deters us from the brink, therefore, do we the more impetuously approach it.  There is no passion in nature so demoniacally impatient, as that of him, who shuddering upon the edge of a precipice, thus meditates a plunge.  To indulge for a moment, in any attempt at thought, is to be inevitably lost; for reflection but urges us to forbear, and therefore it is, I say, that we cannot.  If there be no friendly arm to check us, or if we fail in a sudden effort to prostrate ourselves backward from the abyss, we plunge, and are destroyed.

Examine these and similar actions as we will, we shall find them resulting solely from the spirit of the Perverse.  We perpetrate them merely because we feel that we should not.  Beyond or behind this, there is no intelligible principle.  And we might, indeed, deem this perverseness a direct instigation of the Arch-Fiend, were it not occasionally known to operate in furtherance of good.

I have said thus much, that in some measure I may answer your question, that I may explain to you why I am here, that I may assign to you something that shall have at least the faint aspect of a cause for my wearing these fetters, and for my tenanting this cell of the condemned.  Had I not been thus prolix, you might either have misunderstood me altogether; or with the rabble, you might have fancied me mad.  As it is, you will easily perceive that I am one of the many uncounted victims of the Imp of the Perverse.

It is impossible that any deed could have been wrought with a more thorough deliberation.  For weeks, for months, I pondered upon the means of the murder.  I rejected a thousand schemes, because their accomplishment involved a chance of detection.  At length, in reading some French Memoirs, I found an account of a nearly fatal illness that occurred to Madame Pilau, through the agency of a candle accidentally poisoned.  The idea struck my fancy at once.  I knew my victim's habit of reading in bed.  I knew, too, that his apartment was narrow and ill ventilated.  But I need not vex you with impertinent details.  I need not describe the easy artifices by which I substituted, in his bed-room candlestand, a wax-light of my own making, for the one which I there found.  The next morning he was discovered dead in his bed, and the Coroner's verdict was, ‘Death by the visitation of God’.

Having inherited his estate, all went well with me for years.  The idea of detection never once entered my brain.  Of the remains of the fatal taper, I had myself carefully disposed.  I had left no shadow of a clue by which it would be possible to convict, or even to suspect me of the crime.  It is inconceivable how rich a sentiment of satisfaction arose in my bosom as I reflected upon my absolute security.  For a very long period of time, I was accustomed to revel in this sentiment.  It afforded me more real delight than all the mere worldly advantages accruing from my sin.  But there arrived at length an epoch, from which the pleasurable feeling grew, by scarcely perceptible gradations, into a haunting and harassing thought.  It harassed because it haunted.  I could scarcely get rid of it for an instant.  It is quite a common thing to be thus annoyed with the ringing in our ears, or rather in our memories, of the burthen of some ordinary song, or some unimpressive snatches from an opera.  Nor will we be the less tormented if the song in itself be good, or the opera air meritorious.  In this manner, at last, I would perpetually catch myself pondering upon my security, and repeating, in a low, undertone, the phrase, “I am safe.”

One day, whilst sauntering along the streets, I arrested myself in the act of murmuring, half aloud, these customary syllables.  In a fit of petulance, I remodelled them thus: – “I am safe – I am safe – yes – if I be not fool enough to make open confession!”

No sooner had I spoken these words, than I felt an icy chill creep to my heart.  I had had some experience in these fits of perversity, whose nature I have been at some trouble to explain, and I remembered well, that in no instance, I had successfully resisted their attacks.  And now my own casual self-suggestion, that I might possibly be fool enough to confess the murder of which I had been guilty, confronted me, as if the very ghost of him whom I had murdered – and beckoned me on to death.

At first, I made an effort to shake off this nightmare of the soul.  I walked vigorously – faster – still faster – at length I ran.  I felt a maddening desire to shriek aloud.  Every succeeding wave of thought overwhelmed me with new terror, for, alas! I well, too well understood that, to think, in my situation, was to be lost.  I still quickened my pace.  I bounded like a madman through the crowded thoroughfares.  At length, the populace took the alarm, and pursued me.  I felt then the consummation of my fate.  Could I have torn out my tongue, I would have done it, but a rough voice resounded in my ears – a rougher grasp seized me by the shoulder.  I turned – I gasped for breath.  For a moment, I experienced all the pangs of suffocation; I became blind, and deaf, and giddy; and then, some invisible fiend, I thought, struck me with his broad palm upon the back.  The longimprisoned secret burst forth from my soul.

They say that I spoke with a distinct enunciation, but with marked emphasis, and passionate hurry, as if in dread of interruption before concluding the brief, but pregnant sentences that consigned me to the hangman, and to hell.

Having related all that was necessary for the fullest judicial conviction, I fell prostrate in a swoon.

But why shall I say more?  To-day I wear these chains, and am here!  To-morrow I shall be fetterless!  –  but 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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