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작가' 대열에 들어선 이인성씨의 첫 작품이 발표되었다. 불문과 교수직에서 명예퇴직하고 한동안 창작을 위해 칩거중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창작이란 게 욕심을 낼수록 잘 안되기도 하니까) 해를 넘기지 않고 새소설을 탈고한 것. 이 '중견작가'의 재기의 신호탄이 될지는 더 두고봐야겠지만 '문학에 대한 순교자적 태도'를 강조하는 초발심만큼은 기억해둠 직하다. 문학-수도사들이 갈수록 드물어지는 세태이기에...  

한국일보(06. 12. 02) 교수직 버리고 전업작가로 8개월 보낸 이인성씨

"강의와 논문 부담에서 벗어나니 마음은 편하고 자유로운데, 거꾸로 더 큰 부담이 하나 생겼어요. 이러다 제대로 된 소설을 못 쓰면 어쩌나 하는…”

소설 쓰기에만 전념하겠다며 지난 2월 서울대 불문과 교수직에서 명예퇴직한 소설가 이인성(53)씨가 전업소설가로서 첫 번째 소설을 내놓았다.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실린 80여쪽짜리 중편 <돌부림>. 돌연한 퇴직으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학교를 떠난 후 꼬박 8개월을 매달려 쓴, <악몽> 연작 3호로 3년 만에 세상에 내놓는 작품이다.

“학교를 그만둔 후 첫 소설 쓰는 게 특히 부담이 됐어요. 어찌 됐거나 이젠 마무리가 돼서 편하긴 한데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들질 않네요.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글이 많이 느슨해진 것 같습니다.”

섬세한 언어의 조탁,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미로 속을 헤매게 하는 치밀한 통사 구조, 이야기 자체를 휘발시켜버리는 난해하고 해체주의적인 글쓰기로 독자를 매료시키기도, 더럭 겁먹게도 하는 그는 1980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해 26년간 학생과 학자라는 생업을 갖고 글쓰기에 봉직해왔다.

소설집 <낯선 시간 속으로>(1983), <한없이 낮은 숨결>(1989), <강 어귀에 섬 하나>(1999), 장편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1995), 산문집 <식물성의 저항>. 26년간의 비블리오그래피를 이 5권의 책만으로 채우고 있는 것은 문학에 대한 그의 엄격한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자발적 과작(寡作)임에 틀림없다.

“<악몽> 연작을 마무리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게 가장 급한 일이에요. 서너편만 더 쓰면 되는데, 내 스타일상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고, 다만 이 작업이 끝날 때까지 다른 일은 벌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의 소설을 줄거리로 요약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도 없지만, <돌부림>은 마애불이 새겨진 거대한 돌덩어리를 마주한 현실의 ‘나’와 돌 속에 갇혀 망상과의 사투를 벌이는 의식 속의 ‘나’가 번갈아 화자 노릇을 하며 악몽과도 같은 의식의 흐름을 전개해가는 작품이다. ‘이인성 소설’의 키워드 중 하나라 할 의식의 분열이 역시 소설의 주축을 이룬다.

병이죠. 분열이라는 주제는 제 병이라 못 벗어나요. 억압돼있던 온갖 욕망들이 터져나오던 90년대 이후 나를 사로잡았던 건 과연 욕망이라는 게 뭐냐 하는 문제였어요. 욕망에 대한 탐구랄까요. 한편으로는 욕망을 터뜨리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제하고도 싶은 마음. 그러다 보니 분열이라는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됐죠. 그 물음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연 욕망의 끝자리가 뭘까, 욕망에 시달려가면 결국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하는 물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악몽 아닐까요, 욕망의 최후 종착지는.”

소설만으로는 삶의 곤궁을 피할 길 없어 이런저런 생업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게 오늘날 소설가들의 현실이고, 그 중 대학교수는 가장 각광받는 직업이지만, 그는 “걸핏하면 책 몇 권 내고 문예창작과 교수 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정작 나는 학교라는 안정된 직장에 있으면서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없고, 나부터 해방을 좀 시켜야겠다 생각했죠. 제가 자유롭게 살라고 선동해서 거리로 뛰쳐나간 친구들이 꽤 많거든요. 노래판, 영화판, 연극판으로 나가있는 그 친구들을 보면서 이젠 내가 저들 쪽에 가서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데요. 또 실제 나와 보니까 그냥 살겠더라구요. 수입은 학교에 있을 때에 비해 형편없이 줄었지만 불편한 건 없어요. 나는 연금이 나오니까 조건도 좋고.”

Madame Bovary-4

그는 불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불필요한 단어는 단 한 마디도 작품 속에 들여놓지 않으며 일생을 걸고 작품을 썼던 <마담 보바리>의 플로베르를 가슴 깊이 품고 있다(*사진은 클로드 샤브롤의 <마담 보바리>에서 보바리역의 이자벨 위페르. 불필요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외모와 표정 아닌가?).

“요새는 그런 말하면 웃기는 소리 한다고들 할 테지만 문학에 대한 순교자 같은 태도가 저한테는 암시하는 바가 커요. 문학에 순교하는 그런 태도, 저도 끝까지 그런 태도로 문학을 하고 싶습니다.”(박선영 기자)

06. 12. 02

 

 

 

 

P.S. 내가 좋아하는 이인성의 책은 산문집 <식물성의 저항>(열림원, 2000)이다. 더디 읽히는 소설들과 다르게 그의 산문들은 잘 읽힌다. 그리고 재미있다. '문학에 대한 순교자적 태도'를 집약해주는 말이 또한 '식물성'이기도 하므로 '이인성 입문'을 겸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좀 이외일 수 있지만,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문학과지성사, 1995)이다. 장르를 '코미디'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이런 류의 소설들이 나는 은근히 좋다. 뭐 읽는 거야 독자의 자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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