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 붐과 심리학 열풍이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출판 트렌드로 자리잡은 게 아닌가 싶다(그러니까 이건 2006년 출판사회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한해를 정리하기엔 조금 이른 감도 있지만, 이러한 트렌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시류와 무관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단은 참고자료가 될 만한 기사들을 모아놓는다.

 

북데일리(06. 11. 16) 자기계발서를 위한 변명

우리는 흔히 문학을 경외의 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인문학은 어렵고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대체로 외면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 도서들이 베스트셀러 수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다. 기초학문의 기반 없이 응용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듯이 인문학의 토대 없이 수준 높은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문학과 인문학 서적들이 외면 받지는 않듯이 모든 자기계발 도서들이 각광 받지는 않는다.

기초적인 교양이 부족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바뀌고, 자기관리를 통해 자신을 수양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동기 부여를 하게 하는 '자기계발' 도서에 대해 너무 인색한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닌가. 자기계발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비슷비슷한 내용들을 이리저리 다른 색깔로 편집하고, 누가 말하느냐 등의 차이만 있을 수도 있다. 제목만 다를 뿐 얘기하는 것들은 다들 별 차이가 없는 '말들의 향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런 책을 찾는 이유는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지 못한 삶에 대한 태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경영 등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에 비해 삶의 지혜를 얻는 것에 무지한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들은 소위 '가정교육'을 통해 부모로부터, 대가족 생활을 통해 습득하고, '고전'들을 통해서 배웠지만 이제 그 역할을 '자기계발' 도서가 대신하는 것은 아닐까?

늘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전통과 고전도 꼭 필요하지만, 지금 현재의 현실을 다룬 실용서들도 필요하다. 실용서적에 대한 천대는 조선시대에 경학(유교 경전)만 중시하고, 실학(잡학)을 천시하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 현대사회는 복잡한 생활만큼이나 챙겨야 하고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들 투성이다.

학문의 근간인 인문학의 중흥 못지 않게 실용서적에 대한 정당한 권리 찾기도 중요하다. 더이상 '처세서'라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기계발, 실용서적에 대한 서자 취급은 그래서 온당하지 않은 처사다. 개인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삶을 살아라>(시대의 창. 2004)는 책을 보고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행복한 일을 하는 건 죄의식을 가질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행복한 이기주의자>(21세기북스. 2006)는 이런 나의 마음을 더 튼튼하게 굳히게 하고, 더 큰 용기를 준 책이다. 이 책은 비슷한 내용을 말하지만, 말하는 방식이나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또 다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듯이 자신에게 맞는 상품을 고르면 된다.

책도 이미지 상품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는 제품 중에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는 제품이 있는가? TV나 MP3, 문구, 어느 회사 제품이든 성능의 차이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식상품인 책도 결코 다르지 않다. 예술영화만 영화가 아니듯 같은 메시지라도 어떻게 풀어가고, 설득하고 표현해 내느냐에 따라 A급 영화가 되기도 하고, B급 영화가 되기도 한다. 어떤 상품을 만드는 회사가 소비자가 자신들의 물건을 구매하지 않는다고 소비자를 비난하는가? 소비자가 원하는 책, 독자들이 찾는 책에 대한 고민은 진정으로 했던가?

책도 이젠 어렵고 난해한 책은 좋은 것이고,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책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거두어야 한다. 인문학이 더 낮게, 더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그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지식와 학문의 성채를 높이 쌓아 위세를 보일 게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즐길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수준이 있다. 앙코 있는 빵이 맛있다는 사람은 빵에 관한 한 초보자고, 앙코 없이 달지도 않고, 그윽한 뒷맛을 아는 사람이 고급 빵을 먹을 줄 아는 소비자이듯이 독서에도 수준이 있다. 스토리는 별 상관도 없는 액션영화를 좋아하면서 영화 보는 재미를 붙이듯이 처음엔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 그렇게 차츰차츰 영화 보는 눈이 생겨 내용이 심오한 영화로 넘어가듯이 독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사부'를 만난다는 건 정말 삶에 있어서 한 줄기 '태양'이다. 역할 모델을 가진다는 건 내게 있어 확고한 가치관을 갖는 것 이상이다. 책은 그런 점에서 나를 수양하게 하는 전범이기도 하지만, 늘 나를 게으르지 않게 하고, 깨어 있게 하는 활력소다. 그리고 그런 책들 중에서 자기계발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이 나에겐 수위를 차지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급 인문학을 즐기지 못하는 질 낮은 독자라는 혐의를 씌워도 어쩔 수 없다.(신기수 시민기자)

한겨레(06. 11. 03) 행복찾는 언니들의 ‘눈칫밥’ 해결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행복만 찾는다면 이기주의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1세기북스에서 낸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의 불안을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간 책이다.

이른바 ‘자기계발서’는 미국 시장과 국내 시장이 짧은 시차를 두고 연동하는 분야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거의 즉각 한국에서도 번역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예외에 속한다. 미국에서 출간된 지 20년이나 된 이 분야의 고전이기 때문이다. 20년이면 자기계발서 분야에선 거의 선사시대에 속한다고 할 터인데, 2000년대 한국에서 싱싱한 현재형으로 통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책은 전 세계에서 150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한다. 국내에서 지난 4월 말에 출간돼 15만부 넘게 독자 손에 들어갔다. 초대형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독자의 마음을 잔잔히 그리고 단단히 사로잡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의 호소력을 제쳐 놓으면 이 책은 우선 디자인이 눈에 띈다. 형광빛이 도는 짙은 분홍으로 표지를 덮은 것은 이전의 자기계발서에서는 흔치 않은 시도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서평을 올린 한 독자(아이디 do8633)는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훌륭한 편집 디자인”이라고 평가했다. 캘리그래퍼 강병인씨가 손으로 쓴 제목 글씨도 독자의 시선을 자극한다. 강병인씨는 전통술 ‘산사춘’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21세기북스에서 그의 글씨를 채택한 것이 선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시원시원한 필선이 이 책이 전하려는 행복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 듯하다. 이 책의 출간 이후로 여러 종의 책에서 강병인씨의 글씨가 제목으로 등장했다.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한 책이 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사회생활에서 좌우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풀어준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놓여 자신의 소망이나 욕망을 차압당하기 쉬운 젊은 여성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다. 책을 기획한 21세기북스 류혜정씨는 “독자의 70% 정도가 여성이고, 그 중에서도 20~30대 여성이 주요 독자층을 이룬다”고 밝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복을 찾아 누리고 싶은데, 그렇게 살면 욕먹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어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웨인 다이어는 심리학자로서 임상심리를 통해 터득한 ‘행복 비법’을 독자에게 털어놓는다. 그가 강조하는 요점은 ‘합리적 개인주의자’인데, 그것은 ‘저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와는 다른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기답게 삶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얻고 주위에 그 행복을 나누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행복 쟁취 전략은 이렇다. 1.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라. 2. 자신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를 떼라. 3. 자책도 걱정도 하지 말라. 4. 미지의 세계를 즐겨라. 5. 의무에 끌려다니지 말라. 6.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 7. 화에 휩쓸리지 말라.

지은이의 조언 가운데 특히 이채로운 것이 ‘정의의 덫을 피하라’이다. 지은이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정의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받은 부당함이나 불공평에 대한 분노로 괴로워하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잡음으로써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다.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전형적인 태도를 지은이는 이렇게 요약한다.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검증될 수 없다. 내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가치를 구하려 든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가치가 될 뿐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너무도 열심히 살아가는 나머지 주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릴 여유가 없다.”

한겨레(06. 11. 10) 심리학 '빅뱅'

“무엇에 기대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세상이 됐습니다. 이제는 삶의 근거를 저마다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의 삶, 자기의 사랑의 서사를 스스로 써야 하는 때가 된 거죠. 자기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데 심리학만큼 좋은 길잡이가 있을까요?”

심리치료에 관심이 많은 작가 ㄱ씨는 심리학에 보통사람들의 흥미가 커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연인관계,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관계의 숲 속에 외로운 나그네처럼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 날은 어두워지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각자 나그네가 된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럴 때 심리학이 등불 구실을 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 검색창에서 ‘심리학’으로 검색하면 무려 900종 가까운 책이 뜬다. 행복·공감·욕망·만족·성격 따위 수많은 주제어 뒤에 ‘심리학’이 따라붙은 책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출간된다. 가히 심리학의 시대다. 심리학 책들이 출판 시장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1990년대에 한 차례 출간됐고 2002년 개정판이 나온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21세기북스 펴냄)은 지금까지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영업 기술을 알려주는 책에 가깝다. 타인 혹은 고객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냄으로써 판매 목표를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용서인 셈이다.

심리학 책의 최근 흐름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관심의 방향이 ‘나’로 돌아섰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보는 눈치의 심리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자기 분석 심리학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나’를 주목한 전환점 <사람 풍경>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을 펴낸 교양인 출판사의 이승희 편집집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어보니 대다수가 ‘나를 알고 싶어 이 책을 샀다’고 쓴 게 의외였다”고 말했다. 타인의 심리가 아니라 자기의 심리가 1차적 관심사인 셈이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를 낸 사이 출판사 권선희 대표도 같은 말을 한다.

“책을 내기 전에 시장조사를 했는데, 대형서점 심리학 코너를 찾는 독자들이 하나같이 책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봍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호기심 차원을 넘어 나를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진지한 태도가 잡히더라고요. ‘이거 내 얘긴데’ 느낄 때 책을 사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나’를 넣어 책 제목을 지었습니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는 지난 7월에 나와 지금까지 7천부 정도가 팔렸다. 가볍지 않은 내용인 걸 감안하면 만만찮은 부수다. 심리학 책 흐름을 ‘자기’로 돌린 상징적 계기가 된 책으로 소설가 김형경씨의 <사람 풍경>(예담 펴냄)을 꼽는 이들이 많다. ‘심리 여행 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지은이가 자기 자신의 심리를 알아가는 과정을 홀로 떠난 세계 여행과 겹쳐놓음으로써 설득력 있게 읽힌다.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의 풍경이 곧 자기 안에 펼쳐진 내면의 풍경임을 이 책은 알려준다. 2004년 12월에 초판 발간 후 5만부 남짓 나간 이 책은 지난달 출판사를 바꾸고 책표지도 재단장해 새로 나온 뒤 1만4천부 정도가 더 나갔다.

최근에 나온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씨가 쓴 <관계의 재구성>(궁리 펴냄)도 ‘관계의 가시에 찔려 휘청거리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사람 풍경>과 비슷한 노선에 서 있다. 다만 <사람 풍경>이 여행을 소재로 했다면, 이 책은 영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 다르다.

심리학에 관한 관심이 진지해지면서 처세서의 심리 실용서와는 무게가 다른 책들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지난해 7월 나온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지음, 에코의서재 펴냄)는 미국에서 발달한 실험심리학 속으로 직진해 들어간다. 행동주의 심리학 창시자 버러스 프레데릭 스키너의 심리학을 비롯해 10가지 심리 실험을 흥미로운 이야기체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4만부나 팔렸다. 비슷한 시기에 북폴리오 출판사에서 나온 <유혹의 심리학>(파트리크 르무안 지음)도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1만5천부 가량 팔렸다. 내용만 좋으면 사서 읽는다는 독자군이 형성된 셈이다.

북폴리오는 <유혹의 심리학> 성공에 힘입어 아예 ‘마인드북스’라는 심리 시리즈를 세우고 <욕망의 심리학> <마음의 치유>를 잇따라 펴냈다. 이 시리즈의 하나로 최근에 나온 책이 <여자의 심리학>이다. 나르시시즘 문제 가운데 특히 ‘여성의 나르시시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화려함과 초라함, 자주성과 의존성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자기애적 인격장애’ 여성들의 자기 진단과 자기 치유를 돕는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립과 의존이라는 두 개의 대조적인 행동양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즉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남에게 의존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일절 거부하면서 지나치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이런 해결방식은 이들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사회과학의 시대 가니 심리학이…

이 책은 나르시시스트 여성들의 고통과 극복을 보여줌으로써 같은 장애로 힘들어하는 여성들에게 ‘마음의 길찾기’ 를 함께 해보자고 권유한다. 책의 부제도 그래서 ‘자신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당신을 위한 심리분석’이다.

박미라(한겨레문화센터 ‘치유 글쓰기’ 진행자·전 <이프> 편집장)씨는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다보니 사람들이 심리적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 세대는 ‘가족 부양’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목숨 걸고 돈만 벌었는데, 그 거친 삶이 자식 세대의 내면에 상처를 안겼고, 그 결과로 자기 마음을 알고 다스리는 데 관심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 시대가 사회과학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심리학은 시대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고통의 원인을 구조적 불합리에서 찾았던 것인데, 이제는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구조적 고통은 그것대로 극복해야 하지만, 그 구조를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죠. 저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그만큼 세상을 개선하는 일도 잘 할 수 있겠죠.”(고명섭 기자)

06.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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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1-17 12:43   좋아요 0 | URL
'베스트 트렌드'라고 해야겠군요(제가 기억하는 기점은 류시화의 책들입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경향은 새로운 '공세국면'인가 봅니다...

가을산 2006-11-17 13:39   좋아요 0 | URL
서점에 가보면 신간 서적매대에 갈 수록 많은 면적을 차지해 가는 자기계발서, 부자되기 책들 보면 심란해요.

비로그인 2006-11-18 14:53   좋아요 0 | URL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다른 명칭으로 오래전 출간된 적이 있었지요..
워낙 번역이 엉망이라서 독자가 재해석 해야할 지경이었는데..
이번 책은 좀 낫더군요. 괜찮은 책입니다.

내가 견지하는 삶의 양상이, 또는 아이덴티티가 크게 빗나간 것은 아니라는
안도 감을 주는 책.. 자기계발서


로쟈 2006-11-18 23:57   좋아요 0 | URL
저는 성격이 좀 고약해서인지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책들을 더 좋아합니다.^^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물론 그때의 세계문학은 문학이라면 하품이 먼저 나오는 회사원들이 '세계문학'이란 주제가 등장했을 때 '대처'하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세계문학'이다. 인문학 전공의 대학원생들이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지는데, 여기서부터는 웃음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근대의 서사시>와 <세상의 이치>의 저자 프랑코 모레티가 책임편집을 맡은 <소설(Tne Novel)>(2006) 정도를 '교양'으로 읽어줘야 하기 때문이다(두 권의 단행본 외에도 모레티의 소설론들은 여러 차례 국내 문학잡지들에 게재된 적이 있다). 본래의 이탈리아어본은 네 권짜리인데, 영어본은 그걸 간추린 것인지, 추가적으로 더 출간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국역본이 나온다면 아마도 모레티의 책들을 낸 바 있는 새물결출판사에서 나올 듯하다. 하지만, 언제?  

몇달 전 도서관에 주문했던 책을 나는 어제 대출할 수 있었는데, 두 권 합하여 1,7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론 집성'이라 할 만하다(소설 대백과사전!).  'The New York Sun'지에 실렸던 서평 'Taking a Novel Approach'(06. 07. 26)을 읽어보면  책의 대략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The sheer size of "The Novel" (Princeton University Press, $99.50 per volume), a new two-volume compendium of scholarly essays on every aspect of the history and nature of the genre, makes a sort of claim. Clearly, a literary form that requires some 1,700 pages of examination must be inherently problematic: Its origins, its techniques, its effects on readers must cry out for expert investigation. Yet the claim posed by "The Novel" (and still more by its original Italian version, Il romanzo, which is twice as long), seems counter-intuitive, given how central novels and fiction are to our current understanding of literature. In any bookstore, the sum total of all printed matter is divided into two categories, fiction and everything else. The novel, you might say, is like pornography: It may be hard to define, but everyone knows it when they see it.

Yet it is exactly the cultural phenomena that are most obvious, that surround us as invisibly as an atmosphere, that most need questioning.Take a seemingly simple question that arises again and again in "The Novel": What was the first novel? Among English readers, there are a few standard answers: Samuel Richardson's "Pamela," the epistolary novel that appeared in 1740, or Daniel Defoe's "Robinson Crusoe," which was advertised as a true story when it was published in 1719. Widen the focus to Western Europe, however, and Defoe looks like a latecomer compared to the French women novelists of the 17th century, notably Madame de Lafayette (author of the courtly novel "La Princesse de Cleves") and Madame de Scudery. And even before the courtiers of the Sun King devoured those amorous tales, there was "Don Quixote," published in 1605 and often baptized as the first novel, though it reads very unlike the novels we know today.

Yet "Don Quixote" itself vanishes in an abyss of precursors. What about the prose romances of the Renaissance, or the novelle of Boccaccio and the tales of Chaucer, popular in the 14th century? Or the chivalric verse romances of the Middle Ages, which grew to encompass dozens of episodes? Or the Greek novels of the Hellenistic period, like Heliodorus's "Aethopika," with their tales of lovers reunited after fabulous ordeals? For that matter, isn't the "Odyssey" itself essentially novelistic, with its focus on domestic relationships and psychological predicaments?

When you open "The Novel," in other words, you may think you know what a novel is; by the time you close it (not to say finish it, since few nonprofessionals will read it from beginning to end), you are no longer sure. And if there is one goal that all the diverse contributors to "The Novel" share, it is this sort of estrangement. Under the editorship of Franco Moretti, an Italian who teaches at Stanford and is one of the most unorthodox and influential scholars of the novel today, dozens of academics from around the world have contributed studies in their areas of expertise.

Their essays are grouped under broad rubrics. The first volume, subtitled "History, Geography and Culture," has sections such as "Polygenesis," on the multiple origins of the novel, and "Toward World Literature," on the way the genre has been adapted in Africa and Asia. The second volume, devoted to "Forms and Themes," is more literary-critical (at times drearily so),organized around themes like "Writing Prose" and "Space and Story." The result is not an encyclopedia but a potpourri — a loosely structured work that does not define the novel so much as it illustrates the way today's scholars think about it.

The sheer diversity of topics here is exciting and opens up many new horizons. Henry Y.H. Zhao, writing on "Historiography and Fiction in Chinese Culture," shows how the term xiaoshuo, defined in the first century A.D. as mere "gossip and hearsay," the lowest form of writing, emerged as the modern Chinese term for literary fiction. Catherine Gallagher, in one of the collection's best essays, discusses "The Rise of Fictionality," showing how the 18th-century European novel helped to create the notion of stories that can freely explore reality because they do not claim to be real: "a nonreferentiality,"as she puts it, "which could be seen as a greater referentiality." Another excellent contribution is Bruce Robbins's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Social Climber," which explores the paradoxical, subtly hypocritical figure of the bohemian — the artist who turns his material deprivation into a badge of spiritual aristocracy.

Beyond these fairly conventional historical essays, "The Novel" also makes room for some more eccentric approaches.The French scholar Nathalie Ferrand writes about SATOR, the Society for the Analysis of Novelistic Topoi, which has worked over the last two decades to compile a computer database of every plot element used in 18th-century French fiction.This goal remains as elusive as Casaubon's "Key to All Mythologies"in "Middlemarch"— even Ms. Ferrand calls it "a rather mad idea" — but it stimulates some interesting debates about how to analyze fiction. Likewise, Espen Aarseth's essay on "Narrative Literature in the Turing Universe"explores the netherworld of Dungeons and Dragons and online role-playing games, reaching the sane conclusion that gamelike simulations have little in common with novelistic narrative.

But the most enticing parts of "The Novel" are the sections of "readings," focused on individual novels grouped around a theme: novels of the metropolis, political novels, novels of the Americas.When it comes to these brief sketches, the less familiar the subject, the better. An American reader will probably yawn at yet another summary of "Huckleberry Finn." But other readings will send him straight to the library, eager to find Recaizade Mahmut Ekrem's "A Carriage Affair," a Turkish novel of 1896, about a young man's incompetent pursuit of a courtesan; or Mao Dun's "Midnight," published in China in 1932, with its lurid portrait of pre-Communist Shanghai; or "Love in Excess," the 1719 novel of sex and sentiment by Eliza Haywood, who was once as famous as Defoe or Richardson. Such essays are a reminder that the canon of Western fiction, though large enough for a lifetime's reading, is still just one galaxy in the universe of the novel.

A universe, by definition, can't be summarized, and neither can "The Novel." Contributors are given their freedom, not just to range widely, but to disagree fervently on basic issues.Take that vexed question of the novel's origins. Different contributors trace its parentage to ancient Greek tales, Chinese historiography, Indian epic, and even rabbinical midrash. But the preponderance of the evidence suggests that the conventional wisdom is correct. I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why the novel has been the quintessential modern art form, and why it has appealed to writers and readers around the globe, without understanding the circumst ances of its rise in Western Europe in the 18th century.

The most important factor in that rise was that the novel began life as a defiantly low, critically stigmatized genre. It was the first literary form to be written and read largely by women; to seek a popular, democratic audience; and to consider realism a virtue instead of a low vice. In all these ways, it helped to incarnate the modern sensibility, and to teach its readers what it means to be modern. It is the novel, as opposed to earlier forms of narrative, that made the ordinary mind's encounter with the ordinary world a source of drama and significance. If the novel is indeed losing its central position in our imaginative life — and while "The Novel" seldom addresses this possibility, its very comprehensiveness can suggest an autopsy report — it can only be because modernity itself is slipping away, with all its distinctive promise and menace. The dispensation that replaces modernity may be better or worse, but if it does not see its own reflection in the novel, it cannot help appearing to us as somehow less human.

 

모레티가 직접 쓴 책들 가운데는 <유럽소설의 지도 1800-1900>(1999) 같은 책도 있는데(책의 일부는 국내에 번역/소개된 바 있다), 그가 얼마나 대범하며 독창적인 소설이론가인지를 웅변해주는 책이다. 그러한 그의 방법론을 집약해서 정리해주는 책이 <그래프, 지도, 수형도>(2005)이다. 모두 <소설>과 함께 소개될 만한 책들이다(물론 모레티의 초기작들도 곁들인다면 더 좋을 것이다). 사실 소설은 근대세계가 산출해낸 것이지만, 우리가 그 소설의 바깥에서 근대세계를 얼마나 직시/이해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이 근대소설의 위대성이며 우리가 여전히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06. 11. 16.

P.S. 모레티의 <소설>에는 문학평론가 황종연 교수의 <무정>론이 한국소설에 관해서는 (꼼꼼하게 찾아보지는 않았으나) 유일한 글로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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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7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08:34   좋아요 0 | URL
**님/ 모레티의 '문학의 도살장'이란 글이 매력적이었죠. 형식주의+진화론. 제가 그런 쪽의 생각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듣고 보니까, 모레티와 강유원은 (50번 읽거나) '안 읽어도 된다'주의로 묶일 수 있겠네요.^^
 

아이를 데리러 피아노학원에 가기 전에 잠시 포털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란 라디오 대담 녹취록을 읽어보았다. 김어준과 강유원의 30분짜리('배수의 진'이란 코너) '수다'를 녹취한 것인데 예전에 읽어본 '데리다를 안 읽어도 되는 이유'에 이어지는 것인 듯싶다(굳이 따지자면 '인생을 굳이 안 살아도 되는 이유' 같은 게 먼저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굳이 해야만 할일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더불어, 데리다 대신에 헤겔을 읽어야 한다면 독자의 부담이 덜어지는 것인가?).

그러니까 시기적으론 2004년 이맘때인 듯싶다. 방송의 성격상 '웃자고 하는 얘기'의 성격이 강하지만(대담의 타겟은 '세계문학'에 대한 부르주아적 규준과 그에 대한 조롱이다. 더불어, 속물적인 무지의 정당화에 대한 아이러니이다) 프랑코 모레티의 책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워밍업 삼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녹취록의 문단들은 조정했지만 오자들은 따로 수정하지 않았다).   

김어준/강유원 대담: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

김어준 : 코드 마음에 드십니까?

강유원 : 예, 마음에 듭니다.

김 : 예 지난주엔 저희가 삶의 모두스 비벤디(피식)에 대해 얘기하면서 철학을 삼십분에 쫙 정리해버렸는데,

강 : 아 그렇죠.

김 : 이번 주는 어떤 주제입니까?



강 : 혹시라도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요, 철학 책을 사서 읽는다거나 하지 마십시오. 불필요합니다. 이번 주에는 세계의 문학. 이거 스트레스 받습니다. 고전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두꺼운지. 재미도 없어요. 사람 이름도 외우기가 힘들어요. 가령 러시아 작가들은 작가 이름도 어렵고 안에 들어가 있는 주인공들 이름도 어려워요. 특히 그런 주인공들 이름얘기하면서 마치 당연히 알지 이런 식으로 말 걸 때 당혹스럽죠. 뭐냐 가령 너 라스콜리니코프적이야 이렇게 말하면, 주인공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데다가(김어준 폭소) 그녀석이 어쨌다는 건지 난감한데, 그러면 그게 뭔데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김 : 당연히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얘기를 해야 하잖아요.

강 : 일단 세계문학 주제가 되잖아요, 그럼 아무 소리도 말고 가만있어야 합니다.

김 : 가장 좋은 방법은 가만히 있는다.

강 : 가만히 살살 웃다가 가끔 한번씩 호탕하게 웃어줘야 돼요. 한번씩 호탕하게. 그러면 사람들이 뭐가 있는 줄 알거거든요.

김 : 그렇죠.

 

 

 



강 : 세계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들어가면, 일단 문학에 대해서는 아주 기본적으로 청취자 여러분께서 아시고 계셔야 되는 게, 문학 이전에 책, 책에 대해 편견을 버리셔야 돼요. 책을 많이 읽으면 유식해진다거나 책 많이 읽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거나(하하하) 혹은 책이 사람을 만든다거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런 표현 있죠? 이거 일단 버리셔야 돼요.

김 : 책을 많이 읽으면 유식해진다.

강 : 예.

김 : 책을 안 읽으면 무식해진다 이런 생각 버려야한다?

강 : 예. 안 버리면 영 괴롭습니다. 그게 어렸을 때부터 사실 그러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한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가 한 육십억 쯤 되죠. 그 인구 육십억 책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일억도 안 되죠.

김: 아, 그래요?

강: 그렇죠, 1억도 안 되죠. 지금 우리 주변에 책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꼽아보면 몇 명도 안돼요. 제가 직접 책을 읽고 쓰고 하니까, 제 형제들이 있는데 남동생만 둘이 있거든요, 제 형제들이 다 열심히 책 읽는 것 같지만 아니에요. 제가 작년 가을에 무슨 책을 하나 냈는데 책 표지가 노랬습니다. 제 동생이 와서 하는 말이 ‘어 형 책 냈네? 책표지 노랗고 이쁜데?’ 그러고 가더라고요. (김어준 폭소)



김 : 하하하. 책 표지 노랗고 이쁜데.

강 : 네. 이 정도니까 제가 제 동생을 비난할 수 없어요. 훌륭함의 정도는 저보다 제 동생이 나을 수가 있거든요. 일단 책 얘기가 나오면 이 대사를 알려드리자면, 우선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이렇게.

김 : (아하하) 세계문학을 논하기 이전에 책의 본질에 대해 알아봐야 하지 않나. 세계문학에 대해서 얘기가 나온다면.

강 : 예.

김 : 여기서 우선 기선제압용 맨트를.

강 : 네. 세계문학 하면 사람들이 하아~. 이번에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노벨문학상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 누가 있는지 알게 뭐에요. (훗훗훗)모르죠. 모르죠. 모르니까 우리 오스트리아 하면 아는게 모차르트밖에 없어요. 모차르트는 알고 있을 만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만 우선 생각하시면 돼요.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김 : (배경음 깔리듯)기선제압용 맨트 나왔습니다,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강 :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 있죠?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중 책 읽는 사람 몇 안돼. 이러면 사람들 다 숙연해집니다(아하하). 50억 넘는 인간 중에 책 읽는 사람 1억인데 우리가 나머지 49억에 속한다고 해서 인생살이 괴로운 거 아니다. 거기다 덧붙이면, 인류가 생겨난 이래 책 읽은 사람이 몇 명이겠냐. (와하하) 숫자로 확 밀어붙이면요, 세계문학은 커녕 아무 책도 읽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런 판단이 딱 깔리고 들어갑니다. 일단 이렇게 최저의 경계선을 밑으로 낮추어야 돼요. 낮추면은 사람들이 어 하거든요. 이때 세계문학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조그맣게) 열 권도 안 될지라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하면 본 것 같아요.

김 : 리드가 들어갔으니까,

강 : 끄트머리에 만으로 끝나는 문장 있죠, 이게 상대방에게 기죽이기 아주 좋아요. 가령, 이거는 직장생활하는 약간의 팁으로 말씀드리자면, 직장 상사가 어이 강유원 씨 왜 이따위로밖에 못해 이러면, 열심히 했습니다만... 하고 계속 이렇게 만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말이 끝난 것 같기도 하면서 끝나지 않은 것도 같기도 하면서 계속 그러거든요. (하하하) 그럼 왜 이따위로밖에 못해 이러면, 계속 잘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만... 이렇게. 가령 메신저로 채팅을 할 때도, 되나 안 되나 테스트 한번 해보세요. 무슨 얘기하다가 알고 있습니다만, 만... 하면서 마침표 치지 않고 있으면, 상대방이 말을 안 해요. (아하하하) 그러니까 책에 대해서 말을 할 때도, 책을 좀 들여다봤습니다만, 이러면 사람들이 조용하거든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면 돼요. (대폭소) 그럼 저쪽에서 무슨 말로 상대해야 할지 굉장히 아리까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할 때 이제 세계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김 : 책의 본질에 대해선 아까 얘기했으니까, 나도 책 좀 읽어봤습니다만.

강 : 세계문학이라는 건 사실은, 이때 단어 중요한 거 나옵니다, 이데올로기 이거 외우세요. (웃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이거 외우셔야 됩니다. 스펠링 모르셔도 돼요. 굳이 말한다고 해도, 우리말로 다섯 글자 세 글자니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김 : (웃음) 키 문장 나왔습니다. 기선제압 문장 나왔고, 리드 문장, 책을 들여다봤지만, 핵심 문장, 세계문학이라는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강 : 네 그렇죠. 지금 우리가 이제 흔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그렇게 하면요, 약 1분 정도 분석을 해줘야 하거든요. 지금 세계문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죄다 잘산다는 나라의 문학 아니야, 이렇게 하면은 이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이라는 게 바로 서포팅 돼요.

김 : 혹시 간혹 가다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한테는.

강 : 또 이렇게 하죠. 세상을 사는 기본 단어가 안 들어있네. 이데올로기, 몰라? 허위의식. 딱 이렇게 하고, 헤게모니, 주도권. 단어 뜻 많이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외우는 사람도 힘드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이 많으면요, 상대방이 이 사람이 아는 게 적어서 변명이 많다 이런 식으로 알거든요. 딱 잘라서 단정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핵심단어들은.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이데올로기라는 게 뭡니까, 이러면 이 사람, 쯧쯧쯧 이렇게 나가면서, 헤게모니라는 단어 알고 있어? 이렇게. 그 두 개의 단어를 갔다가 상대를 누르면은, 그게 중요하거든요.

김 : 자, 핵심 문장 하나 나왔고요.

강 : 그렇게 해서 내가 보기에는 세계문학 그래도 읽어야 한다면 말이지.

김 : 아 그 다음은.

강 : 그래도 읽어야 한다면 말이지, 이렇게,

김 : 네.

강 : 주요 강대국들의 작품이 빤하긴 하지만, (아하하) 그 동안 거론됐던 세계문학 많거든요. 보봐리 부인이니 그런 것들 많은데, 그런 건 사람들 다 알아요. 그런데 우리 읽을 필요 없거든요. 읽어봐야 되게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읽다보면 짜증이나요. 우리가 그 분야에 불어불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다니는 사람 아니니까, 세익스피어의 햄릿같은게 세계문학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오델로 멕베스 이런거, 그런데 읽어보면 오바된 문장이 많아요. 그 시대하고 우리하고 다르기 때문에. 읽다보면 짜증이 나는데 이런 문장 읽을 필요가 없거든요. 도움도 안 되는데, 그런 걸 거론하면요 대화 상대방중에 분명히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상세하게 분석 들어가면 우리, 우리 수준에서는, 그렇죠 우리 수준에서는 안 되는거지. 이럴 필요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택도 없다고 생각할 만하지만 누구나 다 읽었을법하지만 나도 한번 읽었을 것들. 미국의 세계문학 작품, 톰 소여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네 이거 훌륭한 작품입니다. 이거 애들 동화책 아니에요. 동화책이 이게 원래 동화책이 아냐. 이게 사실 따지고 보면 등장하는 톰 소여라던가 허클베리 핀이라던가. 그 다음에 페인트칠하는 장면들 흑인들 이런게 나오니까, 이게 미국사회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준 작품이기 때문에, 톰 소여의 모험, 이 정도만 읽어도 세계문학입니다. 톰 소여의 모험. 네. 이거 하나면 됩니다. 마크 트웨인.

김 : 마크 트웨인.

강 : 톰 소여의 모험.

김 : 톰 소여의 모험.

강 : 이거 하나만 기억하시면 돼요. 그리고 미국이란 나라가 역사가 짧기 때문에요, 문학이라는 게 없어요,
짜잘한 나라거든요 사실. (아하하) 인류의 역사에서 세계적으로 볼 때 미국이 세계사에 편입되기 시작한 게 몇 년 안 되거든요.

김 : 그렇죠.



강 : 2,300년밖에 안된 나라에 무슨 문학이야?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어라는 게 네이티브 언어가 아니거든요. 고유 언어가 아니잖습니까. 미국,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이거 하나 딱 기억해주시고요. 영국, 그럼 찰스 디킨스 아닙니까, 올리버 트위스트 다 읽었죠! 이거 세계문학입니다. (조용히 김어준이 ‘나는 안 읽었다’고 언급한 듯한 분위기에서)이게 세계문학인가 하면서 올리버 트위스트 안 읽어본 사람 있으면, 안 읽어도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 외우시면 돼요. 영국, 영국 하면 우리가 먼저 떠올리는 게 산업혁명이죠. 산업혁명기에 사회 계급적 문제를 드러낸 작품이거든요, 올리버 트위스트가. 이렇게 외우시면 돼요. 산업혁명 계급문제 올리버 트위스트. 그렇죠. 이건 중학교 때 배우거든요. 영국 산업혁명 계급문제 올리버 트위스트. 이제 됐습니다. 그런데 3대 강국에 또 프랑스가 있잖아요. 프랑스 이거 까탈스럽습니다.

김 : 까탈스럽다(궁시렁)...

강 : 프랑스 이것저것 많이 건드리거든요. 이게 또 나름대로 문학의 나라라. 딱 그러면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프랑스 문학 작품 하면 알베르 까뮈 뭐 이방인 이러잖아요. 이방인 까뮈의 상표를 딴 꼬냑 있죠.

김 : 그렇습니까?

강 : 있습니다. 그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됩니다.

김 : 아, 까뮈 꼬냑.

강 : 네. 까뮈라는 이름의 꼬냑이 있어요. 프랑스 문학은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좋은 건지 저게 좋은 건지 어렵습니다. 프랑스 문학은 좀 따분하고 하니까, 글쎄 프랑스 문학은 워낙 변화가 심해서, 이렇게 하고 둘러대고 넘어가면 됩니다. (아하하) 같은 세계문학에 넣어주기가 어렵습니다. (아하하하 계속) 정체성 찾기가 어렵단 말야, 이러면서 넘어가면 됩니다. 거기까지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정도야 저도, 누구나 기억할 수 있죠, 마크 트웨인 톰 소여,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미국 실상 그대로 영국 산업혁명, 다 외웠습니다. 흑인 나오거든요, 톰 소여 보면.

독일, 프랑스, 워낙 까탈스러워서, 아직도 정체성이 확실치 않아, 변화가 심해. 독일 그러면 헤르만 헷세 그런 게 나오거든요. 헤르만 헷세 그러면 이제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인지 뭐 그런 거 나오는데, 헤르만 헷세 하면 유리알 유희라고 머리에 쥐나게 생긴 소설 있어요. 고거 읽었다는 사람 있거든요. 그거 읽었다는 사람 나오면은, 과감하게, 독일도 외울 필요 없어요, 헷세가 있긴 하지만, 독일 작품은 워낙 형이상학적이라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쫙 찔립니다.(와하하하) 독일 문학이라는 게 워낙 관념적이거든요. 칸트 헤겔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다섯 명 중에 두 명인데, 대단히 철학적이거든요. 독일사람 두 명, 그리스 사람 두 명. 독일 문학이 워낙 철학적이라.

김 : (끼어들며)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디 사람인가요?

강 : 아, 그 당시 중세는 어느 나라에 속했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이태리 사람이라고 보면 되죠. 네 그런데, 독일 문학은 워낙 철학적이라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김 : (중얼거리듯 따라하며)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강 : 이렇게 하면은 이제 외워야 하는 작품 두개밖에 안되죠. (아하하하) 톰 소여의 모험과 올리버 트위스트. 그리고 프랑스는, 하긴 이 나라들이 지금까지 세계문학을 주도해 왔으니까, 지금까지 걔들이 세계라고 했잖아요. 그 다음에 이제 러시아 문학이 많이, 러시아가 남았는데 아 이거 괴롭거든요. 프랑스 워낙 변화가 심해서 독일 워낙 철학적이어서.
그런데 러시아 문학 남았거든요.

아, 러시아 문학, 이거 괴롭거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라스콜리니코프.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러시아 문학. 일단 이름이 외우기 어렵습니다. 러시아 문학에 보면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와 벌의 주인공인데, 그 이름 외우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적 인간 그러면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알게 뭡니까.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대폭소) 딱 이래버리면은 작품 두개 외우고, 그 다음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다섯 개 국가, 딱 잡힙니다.

김 :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강 : 아, 좀 더 지켜보자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작가 이름을 외우기도 어렵거니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이 워낙 꼬여있어요. 악령이라던가 그런 작품들 읽고 감동받았다는 그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런 감동스러울 정도로 어려우니까 읽지 마시고, 그 다음에 주변부 국가들이 있는데 아르헨티나라던가 보르헤스라던가 이런 요즘 작품들이 있거든요. 이런 작품들이 거론되면 지난시간에 제가 알려드린거 있죠? 문학의 역사가 워낙 기니까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신생아들이라고 하는겁니다, 역시. 아, 그런다음 우리가 국내에서 얘기할 때는 이렇게.

김 : 국제적 대처방안도?

강 : 국제적 대처방안도 있죠. 국제적 대처 이거 굉장히 중요한데요, 외국인들이 혹시 외국인하고 얘기를 하게 됐다, 아, 외국인과 얘기하는 경우라면 확실하게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령 프랑스에 갔다, 그럼 프랑스 사람들이 영어를 잘 못하니까 영어로 합니다.(푸훗) 서로가 외국어기 때문에 기죽을 필요 없거든요, 프랑스 사람들이 프랑스 문학에 대해서 막 얘기를 하면서 자기네 문학의 성취라던가 플로베르라던가 알렉상드로 뒤마라던가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그럼 아 그런 작품들이 있었군요, 하면서 일단 띄워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언제적 사람들이냐, 1800년대 사람들이거든요. 1800년대 사람들이면 아 그러냐 해요. 한국에서 세계문학이라고 내놓을만한 게 있느냐, 그러면 사실 문학이라는 게 어떤 게 우월하고 어떤게 우월하지 않느냐 하고 평가할만한 기준이, 객관적 기준이 없어요. 그죠? 그럴땐 우리가 딱 객관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있다 한국에도. 한국에도 박경리의 토지가 변억되었다 그런 거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폭소) 읽지도 않아요. 그 두꺼운 책을, 아이고, 할 일이 없어요? 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한국에 아주 오래된 문학이 있다. 서기 700년 무렵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향가가 있다. 그럼 서기 700년에 너네 뭐했냐, 그럼 한 일이 없거든요. 걔들. 아스테릭스 시대에요 그때가.(둘 다 큭큭거림) 그럴 때 이제 제망매가 같은 거 외우기 쉽거든요. 토지 같은 거 읽기도 어렵고 스토리 요약도 어려운데, 열 줄밖에 안 되니까 외우기 쉬워요. 딱 한 마디 읊어줍니다. 우리나라 한국에는 서기 700년경 이런 문학이 나왔다. 니네 서기 700년에 뭐했냐.

김 : 영어공부부터 먼저 해야겠네요, 저같은 경우는. 영어로 얘기를 하는 상황이니까.

강 : 다 그럴 필요 없죠. 제망매가 안 외웠으니까 모르거든요. 제망매가 딱 한 구절만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이른 가을에 (김어준 한 마디씩 따라함, 이른 가을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흩어지는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서도 (한 가지에 나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구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구나) 누이동생을 갖다가 안타까워하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안타까워하면서 부른 노래거든요. 그런 구절은 어디서나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핵심은 뭐냐, 서기700년에 이미 한국에는 문학이 있었다. 요거만 딱 하시면 됩니다.

김 : 저희가 벌써 시간이 다 됐는데, 미국은 마크 트웨인 톰소여의 모험, 영국은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프랑스는 워낙 변화가 심해서, 독일은 워낙 형이상학적이라서,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세계문학은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닐까, 키 문장 나왔고요, 마지막으로 이런 거 어떻습니까. 노벨문학상을 거론하는 사람들, 노벨문학상 수상작 제목들 거론하면서,

강 : 아, 그거 중요하죠. 노벨은 화학 공학자인데 웬 문학. 이러면 딱 얘기 끝납니다. (웃음) 화학 공학자거든요, 노벨이 엄밀한 의미에선. 노벨 문학상은 노벨의 참뜻에 어긋나는 상이야. 간단하시죠?

김 :
알겠습니다. 기선 제압용으로는 책의 본질, 그때 허허허 한번 웃어주시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기선제압용으로 책의 본질에 대해서 아나, 하고, 가만히 있다가 얘기를 시작할 때 나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하고 뜸 1분 가량 들인 다음에, 사람들이 쳐다보면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하고 또 뜸 좀 들이겠죠? 그리고 미국은 마크 트웨인 톰 소여 대모험, 실상.

강 : 흑인이 나옵니다,

김 : 네 흑인, 그리고 올리버 트위트스, 산업혁명, 계급,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각각 변화가 심해서 철학적이라서 좀 더 지켜보자, 이렇게 해서 저희가 세계문학의 주제가 등장했을 경우 어떻게 그 상황에서 얼굴을 세울 수 있나, 당황하지 않고, 외워주시기 바랍니다.

강 : 감사합니다.

김 : 고맙습니다.

06. 11. 16.

 

 

 

 

P.S. 해서 결론적으로 읽어야 할 세계문학은 <톰 소여의 모험>과 <올리버 트위스트> 두 권으로 압축된다. 나머지는 너무 까탈스럽거나 너무 철학적이고, 또 좀 기다려봐야 한다로 정리된다는 것.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소개하면서 한번 인용한 적이 있는데, 영국시인 오든오든(W. H. Auden)의 흥미로운 평문 '허크와 올리버'에는 이런 내용이 지적돼 있다. 한번 더 간추린다.

오든은 두 작품, 즉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현대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명하면서 두 주인공 허크와 올리버를 비교한다. 그는 자연에 대한 태도, 현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시간과 돈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들을 대조하는데, 가령 유럽(영국)인에게서 자연이 어머니의 품 같다면, 미국에서의 자연은 야성적이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이 읽기에 <헉핀>은 매우 슬픈 소설이라고 말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끝장면에서 올리버가 사랑이 있는 가정에 입양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하는데 반해서 유사한 모험들을 겪게 되지만 허크는 그의 친구 짐과 결국엔 헤어질 것이며 다시는 못나게 되리라는 걸 독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사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요소를 보지 못하는 반면에(사건들은 '반복'으로 의미화된다) 미국인들은 반복의 요소를 보지 못한다(사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지각된다. 이런 경우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돈의 경우도 대비되는데, "올리버의 경우, 그것은 법적 상속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허크의 경우에는 그것이 순전히 행운일 뿐이다." 오든은 거기서 조금 더 나간다: "미국에서 돈은, 자연이라는 용(龍)과의 전투를 통해 빼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곧 성인의 표증을 상징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다... 유럽의 단점은 탐욕과 인색이며, 미국의 단점은 이 양적인 돈이 성인의 표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중단해야 될는지 알기 어려운 데서 기인하는 근심이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질에 대해서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것은 미국의 소비일 뿐이다. 마치 유럽의 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 유럽의 탐욕이듯이." 음미해볼 만한 견해이다.(프랑코 모레티의 책 얘기는 분량상을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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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16 18:22   좋아요 0 | URL
하하하;;; 넘어가네요 ^^ ㅎ 퍼갑니다 :)

2006-11-17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11-16 19:50   좋아요 0 | URL
700년 아스테릭스 시대의 압박 ㅋㅋ

산손 2006-11-18 00:16   좋아요 0 | URL
ㅋㅋ 스페인은 아예 쌩이네요

릴케 현상 2006-12-29 18:39   좋아요 0 | URL
아스테릭스 시대는 기원 전후 아닌감요? 700년이면 그래도 왕조들이 있었을 텐데^^ 롤랑의 노래는 우짜죠?

로쟈 2006-12-30 00:36   좋아요 0 | URL
뭐, 이야기의 주조는 웃고 즐기자이니까 디테일에 신경을 안 쓰셔도 되지 않을까요...
 

만두라면을 끓여먹으며 윤시내의 '공부합시다'를 듣고 있다. 거의 20년도 더 전의 노래 같다. 지금은 '추억의 가수'이지만 이 열정적인 '여자 조용필'은 가끔 뜬금없는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는데('공연히'란 데뷔곡이 그랬듯이), '공부합시다'도 그런 종류이긴 하다. "안돼안돼 그러면 안돼안돼 그러면/ 낼모레면 시험기간이야 그러면 안돼!"란 노래를 들으며 학창시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도 더 후에 이 노래를 찾아서 들어볼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을 법하다. 다른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을 뿐이다. 게다가 (낼모레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 수능시험일이 아닌가?(덕분에 나는 집에 남아서 밀린 원고들을 쓰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란 핑계를 대고 잠시 공부에 관한 책들을 검색해봤는데, (악명높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부터 (수준높은) <몸으로 하는 공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과 비결, 그리고 즐거움이 소개돼 있다(참고로, 나의 '공부론'은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를 참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 혹은 '공부에 지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싶은 책이 일단은 <장정일의 공부>이다(나는 그의 <독서일기>의 애독자였다). 이열치열이라고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공부'만한 것이 없다(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세!'). 더구나 장정일은 중졸 학력이 전부이다. 장정일식 공부가 (예비)고졸 수험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06. 11. 16) 모범생 변신 장정일 “이념대립 우리사회 알고싶어 공부”

“젊었을 때는 아웃사이더로 떠돌면서 ‘싫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사회의 구조와 배면(背面)을 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장정일씨(44)가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란 인문서를 냈다. 1995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쓴 ‘장정일의 독서일기’(전6권)를 통해 독서이력을 자랑하고, 지난해 KBS의 ‘TV, 책을 말하다’ 진행을 맡으면서 지성적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다. 이번 ‘장정일의 공부’는 그동안의 독서를 바탕으로 2002년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탐구한 지점을 23가지 주제로 나눠 정리했다.

“정치나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2002년 대선 이후부터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걸 보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구에 살던 그는 10권으로 된 ‘장정일 삼국지’를 쓰기 위해 한 건물에 작업실을 얻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건물주인 노인과 그의 친구들이 모여 두런두런 정치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한국 현실에 대한 각자의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됐고, 그것이 ‘공부’로 이어졌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 거부, 대학의 교양교육 저하, 민족주의 논쟁, 이념이 없는 정당정치, 레드콤플렉스, 미국 극우파에 대한 생각 등 다양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정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바둑에 비유하자면 흰돌과 검은돌이 아닌, 파란돌을 놓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중심적인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책에서 공부의 내용뿐 아니라 공부의 필요성도 함께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 없는 존경을 받지요.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구 성서중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라는 이름에 씌워진 과대평가를 피하기 위해, 무엇보다 양비론이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알고 확실히 편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90년대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일련의 문제작으로 기성사회와 문학에 대해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소설가 장정일은 사라졌다.

이에 대해 그는 “‘장정일 삼국지’를 쓰면서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역사·이론서로 방향을 틀었다”면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자신의 공부는 60세에 ‘장정일의 독서일기’ 20권을 완간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이 독서일기의 목록이 많이 달라지겠다).

그렇다고 창작을 접은 건 아니다. 올 3월부터 소설가 하일지씨의 추천으로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희곡론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60세 이후 쓰려던 희곡집필을 앞당겨볼 생각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으로 등단했고, 95년 ‘긴여행’이란 희곡집도 냈다. 또 ‘장정일의 공부’를 쓰면서 파악한 우리 사회의 구조와 배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익청년의 일대기를 쓴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한윤정 기자)

06. 11. 16.


 

 

 

P.S.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범우사에서 새로운 장정으로 지난 2003년부터 재출간됐는데, 나는 그 이전에 나온 판본으로 4권인가 5권까지 읽은 듯하다(기억에는 이후에 책값이 너무 뛰었다). 나머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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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1-16 15:31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얼마 전에 헌책방에 들렀다가
[옛사람 59인의 공부 산책]이란 책을 구입했서 보았죠.
물론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뭐랄까, 공부하는 것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잡아준다고나 할까.

로쟈 2006-11-16 15:38   좋아요 0 | URL

이 책이군요. 사실, 공부가 '속'은 제일 편합니다.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가 어려울 따름이지요...


기인 2006-11-16 18:2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부러워하는 인물 장정일. 그는 역시 또 변신 중이었군요. ㅎ
하일지라는 반가운 이름도 보이네요. 요즘은 뭐 하시는지.. 장정일과 하일지. :)

파란여우 2006-11-16 21:22   좋아요 0 | URL
장정일 독서일기중 1권의 표지가 가장 재밌죠. 오리가 뒤뚱뒤뚱 꽥꽥!
그러고 보니 칸트와 오리 너구리가 생각납니다만.
장정일의 열혈팬으로써 공부 당연히 사야죠!

로쟈 2006-11-16 21:30   좋아요 0 | URL

이 책이죠. 휴학하고 지방에 내려가 있던 시절에 처음 나온 듯합니다. 절반 이상은 제가 안 읽을 책들을 대신 읽어줘서 고맙기도 했죠.^^

 

'글쓰기 분량'에 대해 몇 자 적으려다가 제목을 '글쓰기 분량과 글쓰기 장애'로 바꾼다. '글쓰기 장애' 때문이다. 책에 관해서라면 남못지 않게 수다스러운 내가 '글쓰기 장애'를 갖고 있다면 의외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좀 특이한 '장애'를 갖고 있다. '특이'하다는 것은 내가 가진 장애가 '첫문장 쓰기' 장애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페이퍼라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공식적인' 종류의 글쓰기에 있어서 내가 가장 애를 먹는 것은 마땅한 제목을 붙이고 첫문장을 쓰는 것이다. 두 가지만 해결되면 글의 절반 이상은 씌어진 셈이 되지만, 반대로 그게 잘 안되면 소위 '먹통'이 된다. '글쓰기 블록'과 '하이퍼그라피아'가 특이하게 결합돼 있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아직 치료를 요할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여하튼 최근에 이 장애 때문에 계속 애를 먹고 있다. '만만한' 페이퍼들만 애꿎게도 계속 만들어지는 한 가지 이유이다.

교수신문(06. 11. 14) 지식인들의 글쓰기 분량 적당한가

한 교수에게 원고청탁 때문에 전화를 돌렸다가 바로 내렸다. “이번 달에 고정칼럼 합쳐서 20편 썼다”란 말에 “건강 잘 챙기시고요” 하고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공장장급’ 칼럼니스트들이 우리 사회에 늘어나고 있다.

생태론자이자 경제학 박사인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요즘 거의 3일에 한편 꼴로 글을 생산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FTA, 부동산·재개발 같은 ‘사건’을 자꾸 터뜨리기 때문인데, 어떻게 저런 노동이 가능할까 싶을 만큼 글을 통해 복잡한 사안들을 분석, 처방하고 있다. 사회과학 분야의 홍성태·이해영·서동만, 문화계열의 고병권, 과학의 정재승·이덕환 같은 이름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메이커’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독자와 얼굴 맞추는 빈도가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나중엔 풍경이 돼버린다.

물론 물량공세가 질적 전화를 이루기도 한다. 요즘 고명철 광운대 교수의 글이 “좋아졌다”는 평들이 오간다. 한 때 막노동 하듯이 평론을 쓴 결과라는 게 나름의 원인분석. 평론처럼 호흡이 긴 글을 한 달에 2~3편씩 쓰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글 속에 유야무야한 부분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감각과 성찰성이 개발되는 것일까. 잠깐 쉬었다가 다시 발표한 고 교수의 글은 좋은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문 편.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한 달에 학술대회 발제문만 2편을 쓰고, 신문칼럼을 매주 4회 쓴다. 홍 교수 같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글쓰기는 운동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구호와도 같아 반복적으로, 그리고 충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효과를 거두지만 글은 퍼석거릴 수밖에 없다. 학자나 전문가의 내공이 실리기보다 특유의 관점과 스타일 속에 담궜다가 꺼내는 정도의 글이다. 과연 이런 글이 반복됨으로써 어떤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사실 요즘 지면이 대폭 늘어난 문학평론이나 소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형식, 어떻게 말을 할까에 대한 고민은 없이 점조직처럼 부지런히 거점만 이동한다. 마치 간첩처럼 정체성도 불투명하고, 그저 말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장식들이 뒤죽박죽 돼 있는 평론들은 글쓰기를 힘겨운 노동으로, 프로필과 원고료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제도화시킨다.

평자들이 지친 기색이 가득하다. 문학평론가 고봉준 씨는 계간지 마감이 있는 달은 6~7편까지 편수가 올라간다. 이 중 절반은 인간관계 때문에 쓰고 원고료는 80매에 8만원. 고 씨는 “노동이라 하면 슬퍼지죠. 노동은 팔려고 하는 건데요, 판다고 생각하진 않구요. 저는 그냥 일(業)이 많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노동이든 일이든 글쓰기란 행위 자체에서 힘겹다는 이미지를 벗겨낼 순 없을까. 롤랑 바르트는 일본에 다녀와서 ‘기호의 제국’을 펴냈다. 그는 일본에 매우 고마워했는데, 그에게 글쓰는 재미를 줬기 때문이다. 1960년대 구조주의를 통해 당시 범람하던 역사주의를 패퇴시킨 바르트는 후기로 갈수록 글쓰기의 목적을 어떻게 그것의 즐거움을 확대시키고 고양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선회시켰다. 그가 실험한 독특한 자서전,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는 감이 선명한 에세이들을 보면 오늘날 문필가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만족의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 한 문학평론가는 “늘 머리 속에는 그럴듯한 책 한권을 꿈꾸고 설계하지만 공부하다가 볼 일 다보고 정작 쓰지는 못한다”라고 털어놓는다. 꿈꾸는 동시에 쓸 수 있는 환경이란 아마 ‘연재’의 형식일 것인데, 잡지 편집위원 급이 아니면 좀처럼 이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정말 ‘연재스러운’ 낡은 에세이식 주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말 연재가 필요한 글은 통상적인 연재 포맷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문연구나 장편 주제론·작가론 같은 것이 아닐까. 가까운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마치 존재의 끈처럼 기능을 하는 그런 연재글 말이다.(강성민 기자)

06. 11. 15-16.

 

 

 

 

P.S. 청탁받은 원고들을 계속 펑크내면서 '글쓰기의 분량'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됐다. 교수신문의 기사에 눈길이 간 것은 그 때문이다. '개인차'라는 게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더 많이 쓰거나 더 많이 써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능력을 배가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분량을 축소시켜야 하는가. 욕심은 많지만 인생만큼 욕심대로 잘 안되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글쓰기의 즐거움은 글쓰기의 고통과 나란하다). 문득 두어 달 전에 읽고 스크랩해놓은 칼럼이 생각난다.

문화일보(06. 09. 12) 글쓰기 장애

연세대에서 11, 12일 열리고 있는 노벨포럼 참석차 한국에 온 196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머리 겔만(77). 15세에 예일대에 입 학하고 21세에 박사가 된 천재다. 유명한 ‘쿼크’이론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본업인 물리학뿐 아니라 언어학·역사학·고고학·생태학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9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분명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知性)이다.

한때 언어학자를 지망했을 만큼 언어감각이 탁월한 겔만에게 ‘글쓰기 장애’가 있다는 건 역설에 가깝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 들이 ‘영예의 의무’로 여기는 수상논문집에 글을 올리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쓰더라도 자신의 지식창고에서 최적의 표현을 찾아내는 데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의도와 달리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을 ‘블록현상(writer’s block)’이라고 한다. 마감이 코 앞에 닥쳤는데도 글은 한 줄의 진척 도 없는 그런 상황이다. 밥을 먹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지만 다가가면 글은 천리 밖으로 달아나고 만다. 머리를 쥐어뜯고, 방을 들락거리고, 그나마 몇 자 쓴 종이를 찢어버리고…. 글쓰기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찰스 디킨스도 “가족에게는 괴물이요, 나 자신에게는 공포”라고 토로했을 정도다.
 


글을 못쓰는 고통만이 글쓰기 장애는 아니다. 블록현상과는 거꾸로 식음을 거르면서까지 닥치는 대로 써대는 유형도 있다.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는 이런 글쓰기 중독증을 표현하는 의학용어다. “컴퓨터 자판이나 빈 종이를 보면 마약을 본 마약 중독자 같은 쾌감을 느꼈다”고 할 정도면 하이퍼그라피아다. 평생 9만 8721통의 편지를 썼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가 루이스 캐럴, 수많은 글을 언론에 발표했던 ‘유나바머’(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개인 홈피·블로그가 확산되면서 우리 주변에서도 글쓰기 마니아들이 넘쳐나고 있다. 요즘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봐도 그걸 느낀다. 비서진이 “일은 언제 하느냐”는 걱정까지 들어가며 열정적인 글을 쏟아내고 있다. 표현도 거침이 없다. 정책을 널리 알리겠다는 충정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정은 블록상태인데 참모진은 하이퍼그라피아에 빠진 듯한 부조화가 마음에 걸린다.(김회평 논설위원)

 
 
 
 
 
 
 
 
P.S.2. 하이퍼그라피아, 곧 '글쓰기 중독증' 환자로 분류된 루이스 캐롤과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책들이 최근에 또 출간됐다. <신기한 나라의 앨리스>와 <산업사회외 그 미래>로 제목이 바뀐 게 특이하다고나 할까. 아무려나 너무 안 써져도 너무 잘 써져도 문제가 되는 '글쓰기 나라' 또한 '신기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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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7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동병상련'이란 말을 이런 때 쓰는 것이죠? 서로의 위로와 치유도 각각 따로 노는 것인지 걱정됩니다.^^;

2006-11-17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런! 이거 무슨 헤어진 가족상봉 장면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