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가 구내의 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은 노리나 허츠의 <소리 없는 정복>(푸른숲, 2003)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가의 죽음'은 그 부제이다. 책은 3년전 여름에 출간됐는데, 언론의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소리없이 사라진 책 중의 하나가 돼 버렸다(물론 흔한 일이다). 세계화(글로벌 자본주의)의 현황과 그 비판을 내용으로 한 책들이 이후에 다수 출간됐기 때문에 그다지 '화끈하지' 않은 책이 묻혀버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잠깐 손에 든 책을 집에까지 들고 오는 수밖에 없었는데, 첫째는 1장의 'TV에 방영되지 않는 혁명'이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이고, 둘째는 러시아의 자본주의화/민영화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던 저자가 러시아 경제 전문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저자인 노리나 허츠(1967- )은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여성운동가 리 허츠의 딸이기도 하다는데, 세계은행의 구성원으로 1990년대 초반 러시아로 건너가서 '자본주의 러시아'를 위한 증권시장의 설립과 민영화 프로그램 실행에 관여했다. 그러한 현장경험을 토대로 러시아의 시장경제화 과정에 신랄한 비판을 제기한 것이 1996년에 간행된 박사학위논문 <개혁기 러시아의 비즈니스 관계('Russian Business Relationships in the Wake of Reform)>이다. 이후에 그녀는 중동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현재는 케임브리지대학 저지 비즈니스스쿨의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론 2002년에 출간된 <소리 없는 정복> 외에도 <채무위협(The Debt Threat : How Debt Is Destroying the Developing World)>(2005) 등이 있다.

3년전이면 이런 블로그도 없었던 시절 같은데 뒤늦게 관련리뷰 두 편을 옮겨놓는다.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볼 심산으로.  

한겨레(03. 06. 20) 기업, 국가를 접수하다

“이제 정부는 시장의 복잡한 거미줄에 걸린 파리 신세에 지나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정부의 무능력을 감지하고 있다. 정치인의 손은 포박되어 있고, 그들이 내건 공약들이 점차 공허해지고 있음을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는 기업의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정치인들을 이미 목격하고 있다.”

<소리 없는 정복>은 모든 게임의 규칙을 기업에서 결정하고, 국가는 단지 이런 규칙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집행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실을 고발한다. 정부가 시민을 헐값에 팔아넘기면서 ‘시민’의 존재는 사라지고 소비자만 남게 된 현실을 폭로한다. 국가가 기업의 하수인·경비원이 되는 과정, 이것이 지은이가 말하는 ‘소리없는 정복’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1980년대 신자유주의 물결 이후 국가는 자본(기업)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게 아니라, 사실상 자본의 ‘계급지배 도구’가 돼버렸다는 얘기이다.

이 책의 3, 4, 5장은 이 정복의 실상을 보여준다. 한 국가 안은 물론 국가간 빈부 격차 확대, 너도나도 이웃나라를 빈곤하게 만드는 조세정책을 펴게 만드는 바닥을 향한 경쟁의 논리, 기업이 제공하는 천문학적인 선거자금을 둘러싼 ‘더러운 거래’와 부패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제3의 길’을 주장한 빌 클린턴이나 토니 블레어 등 정치인들이 상당부분 실패했음을 주장한다.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도 이런 정복 과정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유럽 사회모델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일말의 기대를 나타낸다.

기업이 국가를 조용히 접수하는 과정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국가의 견제와 감시를 벗어난 재벌체제의 무분별한 확장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사태는 이 소리없는 정복의 비극적 귀결이라 할 만하다. 한두 대기업의 이해를 위해 경유자동차 관련 세금이 인하되고 경제정책의 뼈대가 결정되는 현실도 그런 생생한 예이다.

크레디스위스, 브리티시피트롤리엄 등 대기업의 컨설턴트로 일하며 옛 소련 몰락 이후 러시아 증권거래소에서 “10년 동안 자본주의를 팔러 다니던” 지은이는 “이 소리없는 정복에 맞서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말로 자신이 이 책을 쓴 배경을 설명한다. 지구 도처의 시민단체들의 시위는 기업으로부터 ‘국가를 되찾기 위한’ 희망의 싹이다. 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환경회의, 94년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와 사이버 전쟁, 99년과 2000년 시애틀, 프라하의 반세계화 시위, 2000년 시작된 부채탕감운동인 ‘주빌리 2000’,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그런 시도들이다.

동시에, 정치인들 스스로의 각성에도 기대를 건다. “소리없는 정복의 마지막 단계는 정치 그 자체의 종말”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물론, 지은이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만일 정부가 기업에 쏟았던 관심을 우리 국민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투표 대신에 구매와 시위를 선택”하겠다는, “국가가 우리를 되찾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국가를 되찾지 않을 것”이라는 배수진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조준상 기자)

동아일보(03. 06. 20) '소리 없는 정복: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가의 죽음'

후세의 역사가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 홉스봄이 지난 19세기를 ‘자본의 시대’라 명명한 바 있듯이, 1970년대 이후 세계 사회는 아마도 ‘세계화의 시대’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서유럽은 물론 정통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노동자당 대통령 룰라의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변화와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세계화다.

지난 몇 년간 이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다룬 책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한편에서 세계화를 새로운 시대적 흐름으로 옹호하는 견해도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화의 덫’ 또는 ‘빈곤의 세계화’를 경고하는 저작들도 있었다. 찬사를 보내든 비난을 하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미 세계화라는 질주하는 호랑이의 등을 타고 있으며, 이 질주가 어디로 향하는지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노리나 허츠의 ‘소리 없는 정복’은 바로 이 세계화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흥미롭다는 것은 복잡다단한 세계화의 구조와 동학(動學)을 다양한 사례와 자료들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국내에서도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세계화의 덫’이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계보 속에 놓여 있다.

다른 책들과 비교해 이 책이 갖는 강점은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국가의 무력함을 예리하게 분석한다는 점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국가는 시민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자본주의라는 브랜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 권력을 거대 기업에 넘김으로써 이른바 정당성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국가의 복원과 시민사회의 강화다. 저자는 오늘날 그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하더라도 기업의 권력남용을 제재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마지막 거점은 역시 국가라고 본다. 더불어 비정부조직(NGO)은 최근 반세계화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외형은 자유롭지만 이면은 더없이 냉혹한 시장의 원리에 맞서는 또 하나의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리 없는 정복’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흥미로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보고서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아쉬움은 흥미를 넘어선 독창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책의 내용은 많은 부분 이미 다른 책들에서 다뤄진 바 있으며, 대안으로 제시하는 일종의 개혁 세계화론도 그리 새로운 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다.

문제의 핵심은 현실이 강제하는 힘을 규범적인 처방으로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제어할 수 있느냐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인간적인 세계화를 갈망하고 있음에도 그 길로 나아가는데 여전히 자본의 강제력이 압도적이라는 게 세계화 시대의 본질이다. 비인간적인 세계화를 넘어설 수 있는 실현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남긴 숙제다.(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06. 12. 25.

P.S. 여담을 덧붙이자면, 저자 노리나 허츠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패션 모델처럼 찍은 사진들이 여럿 눈에 띈다(겨울숲을 배경으로 롱코트에 부츠를 신고 커다란 등받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은, 국역본 책갈피의 사진도 그런 종류이다). '이건 또 무슨 컨셉인가' 싶었는데, 어머니가 패션 디자이너였다니까 이해가 된다. 그녀의 표현을 빌면, '판타스틱한 어머니'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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