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예고한 대로, 필름2.0에서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씨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최근간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에서 '셀프인터뷰'를 싣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장시간 인터뷰 대상이 된 건 처음이 아닐까도 싶다. 이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고 내가 자꾸 그의 책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라고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한국사회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고, 많은 걸 염려하게 된다. 혹 이미 많은 걸 알고 또 염려하고 계신 분들은 사서 그냥 꽂아두시든가 다른 분에게 선물하시라. 그래야 이런 책이 더 나올 수 있고, 이런 인터뷰어가 밥먹고 살 수 있다. 나는 어제 책에 실린 이상호 기자와의 인터뷰를 읽었다.

 

필름2.0(07. 01. 26) 인터뷰의 사나이, 지승호

국내 유일의 전문, 전업 인터뷰어로 불리는 지승호가 통산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를 선보였다. 정치인에서부터 사회 운동가, 언론인, 영화감독을 넘나드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취재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을 얻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인터뷰의 사나이 지승호를 만나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의 정체성과 고민에 대해 물었다.

지승호ㅣ<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라잉 넛, 그들이 대신 울부짖다>(공저) <사회를 바꾸는 아티스트> <다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우리가 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도 좋은가> <마주치다 눈뜨다> <유시민을 만나다> <7인 7색> <감독, 열정을 말하다> <금지를 금지하라>



2002년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단행본 인터뷰집 작업을 시작한 이후 4년 만에 열 번째 결과물 <금지를 금지하라>를 내놓았다. 부지런한 건가 욕심이 많은 건가?
욕심이 많으니까 부지런한 거 아니겠나. 나야 전업 인터뷰어인데 이것 안 하면 먹고 살 게 있어야지.(웃음) 권수를 세면서 인터뷰집을 낸 건 아니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열 번째 책을 내고 보니 이제야 유아기를 벗어나 소년기 정도에 이른 것 같다. 한 백 권 정도에 이르면 많이 깊어졌다, 성숙해졌다 말을 들어도 부끄럽지 않겠지.



백 번째 인터뷰집? 정말 욕심도 과하다.
그 정도는 써야 딸내미 대학교도 보내고 시집도 보내고…. 난 이거 아니면 먹고 살 수단이 없다니깐 자꾸 그런다.

과연 전문 인터뷰어라 그런지 질문에 응하는 태도가 도전적이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전문 인터뷰어라는 감투는 내 말이 아니다. 사실 매우 가치중립적인 용어라 문제가 될 건 없지만, 기자 분들이 듣기에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빤히 기자라는 직업이 있는 상황에서 네가 뭔데 도대체 전문 인터뷰어라는 거야, 라고 생각할 것 같고. 아닌 게 아니라 인쇄매체가 내 작업에 대해 무관심한 건 사실이다. 벌써 열 번째 책인데 자칭 진보 매체들조차 관심 있게 지켜보려 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전문 인터뷰어라는 말은 출판사에서 홍보를 목적으로 아예 책에 박아 넣기도 하는데, 괜히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스스로 ‘전업 인터뷰어’로 자칭하고 다닌다. 그럼 좀 겸손해 보이려나 싶어서.

결국 인터뷰라는 작업이 전문적인 영역일 수 있느냐는 고민인 것 같다.
전문적이라는 말에 좀 거부감이 드는 게,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업에 대한 접근성을 차단하고 장벽을 쌓는 것 같다. 헌법에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돼 있지 않나. 언론의 자유란 뉴스매체를 위해 보장된 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열려 있는 기본적 권리다. 누가 인터뷰를 하든 문제될 게 없다. 전문성을 해친다고 생각지 말고 좀 더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정직하게 보도하고 인터뷰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실상 그 언론의 자유라는 게 뉴스매체들에 한해 허용돼 있지 않았나. 얼마 전 한 독립영화 감독은 시위현장을 카메라에 담다 시위대로 몰려 연행되기도 했다. 당신은 일종의 언론 권력을 해체한 꼴이다. 주류언론의 미움 혹은 무관심을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건데, <감독, 열정을 말하다>를 내고 그나마 자부심을 가졌던 부분이 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취재원과 접촉할 때, 그 사람을 만나려면 자신이 속해 있는 매체의 권위가 있다든지 기자의 명성이 대단히 뛰어나다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전업 인터뷰어로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대중적인 명사가 아닌 이상 취재원을 섭외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런데 언론매체와도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김지운 감독이 내 진심을 이해하고 작업에 동참해 “좋은 만남이었다”는 평가를 해준 건 정말 고무적이었다. 김지운 감독에 대한 책이 얼마 전에 나왔는데, 책에 넣을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는 출판사의 말에 “내가 할 이야기는 지승호와 다 했으니 그 인터뷰를 책에 넣어 달라”고 했단다. 결국 <감독, 열정을 말하다>에 들어갔던 인터뷰를 50매 분량으로 줄여서 건네줬다. 주류언론의 기자가 아니더라도 좋은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건 역으로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꼭 주류언론의 기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인터뷰라는 작업 자체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누군가 이번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와 그간의 작업을 극찬하는 기사를 썼는데, 첫 번째 댓글을 보니 “전문 인터뷰어? 얘는 그냥 남이 하는 말 그대로 옮겨 적어서 책으로 만드는 것뿐 아닌가?”라고 썼더라. 인터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면 자기가 당해보기도 많이 당해보고, 해보기도 많이 해봐야 한다. 최종적으로 인터뷰가 정리돼 나올 때 조사 하나 잘못 붙이면 이야기의 뉘앙스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지 않나.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아, 이건 내가 한 말이다”라며 만족할 정도로 그 내용을 정리하는 일은 진정 어렵고 고된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내가 정말 여태껏 창조적인 면 없이 그저 남의 말을 기록하기만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워낙 주류언론의 시선이 내 작업에 대해 냉담하다보니, 그렇게라도 생각 안 하면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내가 부족하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일종의 피해의식 같이 들린다.
피해의식 많다. 운동선수를 보면 몸 전체의 밸런스가 좋다기보다 어느 특정부위를 훈련으로 혹사시켜 일종의 기형이 된 사람들이 많다. 발레리나 혹은 축구선수의 발을 보면 누구나 감탄하고 박수를 보내지 않나. 하지만 내가 하는 작업 같은 경우는 아무리 진심을 가지고 노력해도 그게 뭐냐고 폄하해버리면 그만이다. 증명할 수 있는 게 없다. 가치판단의 영역이니까.

그건 변명 아닌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변명은 굉장히 중요하다. 변명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그만큼 고민이 없다는 의미다. 일단 변명을 시도한다는 건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거 아닌가. 변명을 하면서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거다. 그게 첫걸음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신이 하는 인터뷰 작업이 결국 ‘변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적인 장을 마련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 욕을 하더라도 최소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나서 평가를 하자는 거다. 주류언론을 통해 노출되는 인터뷰 기사들은 대부분 매체의 정치적 지향점이나 목적을 위해 의도를 가지고 악의적으로 편집되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백 마디를 하면 그중에 전체적인 맥락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엉뚱한 한 마디를 끄집어내 헤드라인으로 뽑는다. 그런 기사를 통해 어떻게 한 인간을 평가할 수 있겠나. 내 인터뷰 작업은 있는 그대로 한 인간의 생각과 모습을 드러내 세상과 정당한 소통을 하게 하는 데 그 가치를 두고 있다. 꼭 변명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언론이나 대중에 의해 정신적 상흔을 입은 사람들을 만나 “당신의 진심을 이해한다”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참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신해철 같은 예술인부터 김규항, 홍세화, 강준만, 진중권, 이상호, 손석희 같은 지식인과 언론계 인사들, 그리고 유시민, 김근태, 강금실 같은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당신만큼 폭넓은 스펙트럼의 취재원을 만난 인터뷰어도 드물 것이다. 신기한 점은 그들 모두 당신에게 각별한 신뢰를 가지고 두 번, 세 번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한다는 거다. 비결이 뭔가?
예전에는 농담처럼 내 인터뷰어로서의 장점이 비굴함이라고 했다. 내가 인터뷰를 하는 대상들이 주로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그들을 만나기 전에 굉장히 많은 노력과 고민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내 인터뷰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뺏는 것 아닌가. 보통 며칠에 걸쳐 질문지를 만드는데, 꼬박 두 달이 걸리기도 한다. 관련된 모든 인터뷰 기록과 보도 내용, 취재원이 만든 영화 혹은 책을 몇 차례에 걸쳐 읽고 분석한다. <감독, 열정을 말하다>의 두 번째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박찬욱 감독을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지금까지 만든 질문만 200개다. 이 전에 봉준호 감독을 만났을 때는 140개 정도의 질문을 준비했었다. 그렇게 노력을 들이면서 결국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왜곡 없는 그대로를 독자에게 전달하자는 것 하나뿐이다. 다행히 번번이 진심이 통해 ‘최소한 이 사람은 기사를 위해 취재원을 이용하지는 않겠구나’라고 생각해주시는 것 같다.

한정된 지면에 압축된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의 고충도 있다.
나도 기자생활을 해봤다. 하지만 그런 기사가 그 사람의 진의를 왜곡 없이 전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굳이 매체에 소속된 기자가 되려 하지 않는 거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취재원의 입을 통해 들은 다음 그게 마치 그 인간의 가치관인양 말하는 기자들이 많은데, 그건 정말 최악의 인터뷰다.

당신의 정치적 정체성이 궁금하다. 언뜻 진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김규항 선생이 나보러 “너는 거북이처럼 점점 왼쪽으로 나아간다”고 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 스스로를 딱히 좌파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거다. 아마 난 자유주의자에 가까울 것이다. 남에게 피해 안 주면 사회나 국가가 개인에게 간섭하는 걸 극렬하게 반대하는 편이니까. 그러고 보면 나야말로 건전한 보수 쪽에 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한홍구 선생을 만났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젠다가 모두 우파적인 것들이라고 하더라. 경찰이 사람 잡아다가 함부로 때리지 말라는 거, 남 속이지 말고 도덕적으로 살자는 게 좌파적인 마인드가 아니지 않나. 자본주의 사회가 건전하게 돌아가려면 가진 사람들이 더 모범을 보여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 그거야말로 ‘진짜’ 보수우파가 해야 할 주장의 정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진보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위해 애쓰며 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진보적인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을 주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며 기록하게 되는 것이겠지.

한 번 인터뷰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듣는 건 무엇 때문인가?
진중권, 강준만, 홍세화 같은 지식인들을 매년 만나 인터뷰하고 기록해도 꽤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거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담론 생산자들을 만나 그 내용을 성찰하고 고민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의미에서 말이다. 큰 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이란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부분과 불합리한 모순들, 착취와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그들의 기록이 꾸준히 모이면 세상을 바꾸는 데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열 번째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는 당신에게 단순히 수치상의 의미 이상으로 다가올 것 같다.
물론이다. 그래서 가증스럽게도 셀프 인터뷰까지 끝에 싣지 않았나.(웃음) 이번 책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회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오해받고 마녀사냥 당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송가다. 개인적으로 이상호 기자 인터뷰를 제일 잘 했다 싶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에게 바치는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삼성이라는 권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면서도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번 출판기념회 때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와 인터뷰하기로 약속해놓고 굉장히 많이 후회했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어려운 인터뷰였다. 워낙 이상호 기자가 예민했던 시기니까. 그런데 그때 자신이 했던 고민들이 기록으로 남은 걸 보니 정말 뜻 깊게 생각된다며 고맙다고 하더라. 개인이 어떤 한 시점의 생각과 고민을 300매 분량의 글로 정리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 난 그걸 공짜로 해준다. 얼마나 좋나.(웃음)

그런데 당신의 인터뷰 작업으로 세상을 바꾸기에는 버겁다고 생각지 않나? 누가 요즘 정치인 인터뷰를 읽고 싶겠는가.
‘아찔한 소개팅’같이 돈과 외모로 모든 걸 판단하는 얄팍한 상술의 프로그램을 봐도 이젠 예전처럼 흥분하거나 욕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모든 게 무기력해지고 의미 없어진 세상이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최근에는 좀 더 대중 친화적인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 한다. <감독, 열정을 말하다>도 그런 맥락의 작업이었다. 영화감독을 만나 단순히 영화뿐만 아니라 스크린쿼터, FTA 등 사회 전반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게 영 엉뚱한 작업이 아니라는 희망과 확신이 생겼다.

그럼 당신의 대중 친화적인 다음 인터뷰 상대는 누군가?
일단 <감독, 열정을 말하다>의 두 번째 시리즈를 작업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과는 이미 약속을 잡았고, 개인적으로는 홍상수 감독과 김기덕 감독을 만나보고 싶다. 다른 계획도 하나 있는데 대중가수와의 인터뷰를 구상 중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책 한 권을 통째로 신해철과의 인터뷰로 꾸며볼 생각이 있다. 그와는 전에도 한번 인터뷰를 했었다. 정말 재미있는 아이콘 아닌가? 마광수 교수는 자기 홈페이지에 독자가 올린 누드 사진 때문에 조사를 당했는데, 신해철은 공중파에 나와서 “나는 여고생 교복을 트렁크에 넣고 다니면서 심지어 사용한 적도 있다”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자연스레 웃어넘긴다. 게다가 그의 통찰력과 화려한 언변을 봐라. 어떤 상황에서 분야를 막론한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보통 내공이 아니다. 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다.

서점에 가면 책의 성격별로 여러 가지 코너가 나뉘어 있다. 당신의 책들은 그중 어디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역시 사회과학 코너가 가장 가깝지 않을까. 사람들에 관한 지난 기록이 인문학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지금 현재 생각하고 있는 문제의식들에 대해 기록하는 것보다 더 인문학적인 게 어디 있나(*그런데 왜 '사회과학 코너'에 가야 하나?). 옛날 글을 뒤져 현재의 담론을 생산할 게 아니라,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우선이다. 사람들이 그 중요성에 대해 좀 더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누구나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왔지만, 오히려 남의 이야기는 더 안 듣게 된 것 같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세상이다. 남의 이야기 좀 들어보자. 그의 온전한 의견과 생각을 읽고 듣자. 그리고 평가하자. 그리고 판단하자. 그게 옳다.(인터뷰: 허지웅 기자)

07.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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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7-01-28 00:12   좋아요 0 | URL
저도 필름 2.0에서 봤어요.감독 ,열정을 말하다도 아직 다 읽지 못하고 있네요.흑흑

로쟈 2007-01-28 17:14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감독>은 저도 아직 못읽어봤습니다. 책은 그냥 사서 표지만 읽어도 좋은 거죠.^^
 

'정보바다'를 돌아다니다 보면 의외의 문서들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알다시피 얼마전 한겨레에 '인터넷 서평꾼'에 관한 기사가 난 바 있는데, 돌아다니다 보니 그 '아류' 기사도 떠 있는 게 보인다. '로쟈'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자료'로 옮겨놓는다(국제신문은 부산의 지역신문 아닌가?). 그래도 로쟈가 올려놓은 글 몇 개 정도는 읽어본 듯하여 반갑다.

국제신문(07. 01. 23) 정보바다의 등대 인터넷 서평꾼

로쟈! 누구더라? 고개를 갸웃 하실테죠. 책 좀 읽은 분들은 열혈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떠올리거나, 러시아 출신 귀화인 박노자를 연상하겠죠. '도덕경'을 쓴 노자(老子)와도 이름이 비슷하군요. 하지만 로쟈는 혁명가나 철학자가 아닌 '살인자'의 이름입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 로쟈라네요.

이 로쟈가 요즘 책림(冊林) 고수들이 득실하는 인터넷 서평계를 평정하고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진상 확인을 위해 다음카페 '비평고원'에 들어가보니, 과연! 듣던대로더군요. '비평고원'에는 로쟈 외에도 폭주기관차, 소조(小鳥), 쌍수대인, 로카드 같은 고수들이 한 영역을 구축하고 일합들을 펼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로쟈는 단연 도드라집니다. 식견은 박사급이고(*박사에게 '박사급'은 뭔가?) 순발력은 전광석화급이며 필력은 기자들을 주눅들게 합니다.

로쟈가 다루는 책은 주로 인문 교양서로, 국내외 온·오프라인을 망라하고 신간 뿐만 아니라 관련서적까지 좍 펼쳐냅니다. 책 속의 오·탈자를 찍어내는 건 기본이고, 번역서의 촌스러움과 상스러움, 국내외 인문학계의 동향과 지평까지 훤히 꿰고 있어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죠.

지난 19일 로쟈가 올린 '지젝이 추천하는 라캉 필독서'란 글을 잠깐 엿볼까요. '… 오늘 아마존에서 온 소포를 뜯어 보니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2007)가 들어 있다. 별로 크지 않은 포켓북이다. …라캉에 대해서라면 '에크리'와 '세미나'를 읽어야 한다. 지젝의 권고는 반드시 둘다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둘을 겹쳐서, 잇대서 읽어야 하다. 사위인 밀레르가 편집한 라캉의 '세미나'는 국내에 단 한 권도 출간돼 있지 않지만, 영어로는 1~2년의 터울을 두고 계속 번역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장 최근에 나온 건 '세미나7: 정신분석의 윤리'(2006)이다. …국내엔 몇 편의 글이 '욕망이론'(문예출판사·1994)으로 번역돼 있으나 불어본 '에크리' 이상으로 읽기 어렵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얼마나 경쾌하며 이해하기 쉬운가!'

이런 식입니다. 식견과 정보 없이는 쓰기 어려운 글이죠. 신상 정보를 캐보니, 로쟈는 1999년부터 인터넷에 글을 썼고, 러시아 문학 전공자로서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있더군요. 누군가 그의 독서(도서)편력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더군요. "보수만 두둑이 준다면 앉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책 이름을 적어나갈 수 있다."



로쟈를 비롯한 인터넷 서평꾼들은 정보의 바다를 비춰주는 등대가 아닐까요. 전문가급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자신의 이름은 감춘 채, 지식 공유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으니까요. 이들 서평꾼은 책벌레겠지요. 책벌레라고 하니 실학자 이덕무가 떠오릅니다. 이덕무 역시 지독한 책벌레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 불렀는데, 그 말을 들은 이덕무는 '옳거니'하고 그걸 자호로 삼아버렸죠. 이덕무의 독서벽(癖)은 로쟈 같은 인터넷 서평꾼들보다 한수 위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추운 겨울날 이덕무는 얼어죽을까봐 '논어'를 병풍 삼아 외풍을 막고, '한서'를 잇대어 이불처럼 덮고 잤다고 하지요.



후대의 사가들은 '간서치'를 조롱하기는 커녕 진정 인간이 되는 길을 걸었다고 평합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책을 읽고 쓰서 전한 웅혼한 독서 전통이 곧 오늘날 지식문명의 바탕이 되고 있으니까요. 인터넷 서평꾼들이 자기 영역에서 등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전통의 소산이 아닐까요.(박창희 기자)

07. 01. 27.

P.S. 기자가 '간서치' 이덕무와 비교해준 것은 과분한 일이다.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은 나로선 아직 꿈꾸기 어려운 경지이다(나는 쿠션에서 이불 제대로 덮고 잔다). 그걸 이해해줄 만한 사람도 주변에 없고. 다만, 책에 파묻혀 죽을 거라는 애기는 곧잘 듣는바 그 정도의 운명이나 꿈꾸는 정도이다. 여하튼 정보바다 노예선의 벤허처럼 열심히 노젓는 로쟈 정도를 자임하고 있었는데, '정보바다의 등대'라고 평해주는 분도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외로운 밤배들'은 다들 안녕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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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7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2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예, 기억납니다. 맥베스 때문에 기억나는 것인데요, 시간이 너무 지체 되어 비공개 작업실로 옮겨두었습니다. 언제 또 강의를 할 기회가 있으면 해치울 수도 있을 텐데요--; 암튼 소리없이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물론 별일없구요(아니면 이렇게 떠들지 못하겠지요^^) 다만, 여유가 좀 없는 게 불만일 따름입니다.^^;

다크아이즈 2007-01-2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연 로쟈님이로세! 기자가 혹 알라딘 열혈분자?

로쟈 2007-01-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 아니라 '비평고원'에 들러본 것 같습니다...

yoonta 2007-01-28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으로 로쟈님이 매체에 계속 노출되는거 저는 그다지 달갑지 않네요. 생각지 않은 역풍이나 맞지 않으실까 은근히 걱정됩니다. 유명세를 타게 되면 좋은 일도 생기지만 안좋은 일도 동시에 생기기 마련이니..

paviana 2007-01-2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yoonta 님 말씀처럼 안 되었으면 좋겠는데...걱정많은 나그네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게 하시면 안됩니다.

로쟈 2007-01-2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걱정을 끼쳐드리고 있군요.^^; 한데, 비공개 활동을 하지 않는 한, '노출'은 불가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바람은 저 같이 '뻘짓'하는 분들이 더 많아져서 제가 지워지는 건데요, 알라딘에서 간혹 제가 '배신감'을 느끼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저 혼자 '책에 미친 바보' 혹은 '두더지' 노릇 하고 있으니까요.--;

2007-01-2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28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빨리 작가 되십시오! 제가 '해설' 써드리겠습니다(저렴하게!).^^

마늘빵 2007-01-2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여기저기 많이 뜨는데요? ^^ 이 기사는 좋군요! 맘에 듭니다.

클리오 2007-01-2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더욱 알려지는건 좋지만, 로쟈님은 숨겨놓고 싶어요. ㅋㅋㅋ 모쪼록 강건하시길, 가능한만큼 님의 길에 동참하게 될 수 있기를... ^^

Runa 2007-01-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지역의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군요. 괜히 흐뭇^^
만고불변의 진리, <좋은 건 누구나 안다>는 것.
1000명 중 한명으로서 응원해요.

로쟈 2007-01-28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제가 쓴 걸 직접 인용까지 해놓아서 놀랐습니다.^^
클리오님/ 숨어있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다 들통나버렸어요.^^;
horsain님/ 부산에 게시는군요. 며칠새 즐찾이 1명 늘었는데, 혹 부산분이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놔키스트 2007-01-2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을 등대 삼아 밤바다 안 헤매고 있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응원을 보냅니다..(앞으로도 열심히 노 저어주십사고 부담도 아울러...^^)

다락방 2007-01-2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프락사스님 말씀처럼 이 기사는 퍽 맘에들어요 :)

깽돌이 2007-01-2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커가 쓴 글인줄 알았습니다.조심하세요,크크.

로쟈 2007-01-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필라님/ 감사. 이왕이면 같이 저으시죠.^^
다락방님/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깽돌이님/ 그래도 드러내놓고 쓰는 '스토커'라면 무서울 건 없지요.^^

글샘 2007-01-30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라스콜리니코프가 로쟈였군요. 그놈이 나쁜짓하고 노예선을 타고 있단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노 열심히 저으시길...

로쟈 2007-01-3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그만 저으란 말씀들은 안 하시는군요.--;

딸기 2007-01-30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하하하
'박사에게 박사급' 넘 웃겨요 >.<

그런데 등대가 어떻게 노를 저어요
그냥 계속 비추고 계셔요

로쟈 2007-01-30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10년쯤 전에 '박사급'이란 얘기를 들었으면 나았을 텐데요.--;
글구 등대는 페달 동력이랍니다.^^;
 

지난주 문학 신간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이다. 나는 지난주에 구내서점에 들어와 아직 서고에 있던 책을 사들고 왔다. 윤대녕의 작품들을 찬찬히 따라 읽어온 건 아니지만 짐작에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집이 될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윤대녕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라고 적었지만, 알라딘의 착오인 듯하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제비를 기르다>는 다섯번째 소설집이다. 지난 94년 <은어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이 나온 후 12년이 지났으니까 적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작이랄 수도 없겠다. 중간에 장편소설들과 산문집 등이 끼여 있어서 많게 여겨졌었나 보다.

두번째 소설집 <남쪽 계단을 보라>(세계사, 1995/2003)에 이은 세번째 작품집은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생각의나무, 1999; 양장본 2001/2005)이며, 네번째가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 2004)이다. 나는 둘러보니 두번째, 네번째 작품집을 안 갖고 있는데, 언제 한번 모아놓고 통독해볼 생각은 있다. 그의 장편소설들을 나는 읽은 바 없지만(<은어낚시통신>에서도 강한 인상은 받지 못했었다) 견문에 그가 작가로서 더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건 중단편들에서가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나온 소설집을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이고.

알라딘의 표준적인 소개에 따르면, "이번 소설집은 태어나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인간사에 대한 포용 혹은 긍정의 시선으로 충만하다. 수록된 여러 작품에 죽음을 앞둔 인물이 등장하지만('탱자', '제비를 기르다', '편백나무숲 쪽으로') 그들을 감싸고 있는 소설의 정조는, 슬픔은 슬픔이되 어둡지 않고 환하다. 초기 윤대녕 소설을 설명해주던 '감각'과 '내면'의 세계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틋한 시선으로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런 면에서도 그의 작품세계가 보다 성숙한 단계로 접어든 게 아닌가 싶다.

이번주 언론리뷰들에서 다들 크게 다루고 있지만 특히 동아일보에는 작가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기에 잠시 옮겨온다(아무래도 작가의 육성이 어필하는 바가 있으므로). 인터뷰어는 김지영 기자이다.

-‘윤대녕 소설’ 하면 비현실적이면서 묘하게 연애감정 생기는 여성이 떠오르는데, 이번에는 별로 없네요.

지난해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요. 어머니 곁에 있다 보니 여자의 일생이 뭘까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을 돌보고, 나이 들어가고…. 막연했던 여성의 이미지가 피부로 느껴졌달까.” (‘제비를 기르다’의 어머니는 철마다 가출해 길에서 몸으로 구르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나이를 먹고, ‘탱자’의 고모는 첫사랑의 상처를 안은 채로 굴곡진 삶을 살아간다).

-예전 작품엔 구차한 생활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하늘하늘한 여성들이 대부분인데 이번엔 여자들이 그악스럽게 집안을 꾸려갑니다.

몇 년 전부턴 인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렇게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고. 앞서 나온 책들은 여성 독자들한테서 종종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길 들었는데, 최근작들은 여성 독자의 호응이 많아요. 여성에 대해 알기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나 봐요. 나뿐 아니고 모든 남성이….”(웃음)

-한편으로 고단한 삶이면서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성찰을 발견합니다.

“‘탱자’의 병든 고모는 실제 고모님의 부음을 듣고 쓴 작품이에요. 큰 충격이었지요. 죽음에 대한 어렴풋한 관념이 육화했다고 할까요. 인생과 인간에 대해 좀 더 넓게 생각해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등단 17년에 많은 작품을 냈지만, 윤대녕 하면 첫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손해 볼 때가 많다는 느낌도 들어요. ‘은어낚시통신’을 보면 저 스스로도 신통하다 싶긴 한데,(웃음) 문장이 거칠고 구조도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눈에 띄고…. 작품집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지금껏 그 인상이 이어지네요.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해요. 그때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평이 나왔는데, 내가 그동안 많이 걸어왔지만 결국 그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 그건 결국 내가 추구해 온 철학적 구현이라는 생각.

-여전히 사람들은 길을 떠나네요. 그 여정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고….

로드 로망! 난 이게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길을 떠난다는 게 결국 살아가는 것이고, 죽음을 준비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하면, 익숙했던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모색을 하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죠.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

짧은 인터뷰이긴 하지만 '윤대녕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요약해주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가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지나가는 자'들이다. "길을 떠난다는 게 결국 살아가는 것", 거꾸로 말하면 살아간다는 게 결국은 길을 떠난다는 것이라는 게 그의 '작가적 세계관'이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길(떠남)은 삶의 비유일 뿐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이 비유가 갖는 시적/서정적 울림이 내가 생각하기에 '대녕본색'에 해당한다. <제비를 기르다>에 실린 중단편들은 그 '대녕본색'을 유장하고도 아득하게 그려보이기에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내가 동의하는 세계는 아니지만 충분히 현혹될 만한 '아름다움'이 거기엔 펼쳐져 있다.

07. 01. 27.

P.S. 소설가란 직함을 갖고는 있지만, 내 식으로 분류하자면 윤대녕은 '시인'에 속한다.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시적인 것'을 쓰는 시인 말이다. 작품집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그는 그 '시적인 것'의 일단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삼년 만에 다시 소설집을 낸다. 각별히 고독을 챙기며 살았던 지난해에 여러 편의 중단편을 쓸 수 있었다. 자정에 작업실에서 퇴근할 때 막사발에 냉수를 받아놓고 아침에 출근하면 그것을 마셨다. 하루하루 그 일을 되풀이하면서 내가 과연 삶의 한가운데로 가고 있나를 산짐승처럼 틈틈이 살폈다. 길을 잃으면 안되겠기에 보다 숨을 낮추고 되도록 말을 꺼렸다. 그렇게 생의 한가운데를 어두운 숲처럼 더듬더듬 관통하면서 나는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을 자주 체험했다. 삶의 정체는 결국 그리움이었을까?(...) 그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들을 밖으로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또한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삶이라는 '어두운 숲'을 관통해나가는 '산짐승'이다. 그리고, 그에게 소설쓰기란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그리움을 밖으로 떨쳐내는 일이다. 그것이 소설적인 것이 아닌 시적인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그가 장편소설보다 중단편소설에서 그만의 세계를 더 잘 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해서, 어지간한 시집들 대신에 <제비를 기르다>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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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1-27 16:07   좋아요 0 | URL
저는 노골적으로 '윤대녕빠'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독자군에 속합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속절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병을 앓으면서도 쉽사리 그의 책을 덮지 못하겠더라구요. 시적 문체로 먼 곳의 것들을 기억하고 호명하는 소설가들 중 단연 백미는 윤대녕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편백나무숲 쪽으로>와 <탱자>는 계간지를 통해 읽었는데 서둘러 소설집도 사 둘 생각입니다.

로쟈 2007-01-27 16:04   좋아요 0 | URL
줄여서 '윤빠'라고 하더군요.^^ 어느 기자의 서평대로 서너 번은 물리지 않고 읽으시겟습니다..

읽는기계 2007-01-27 16:29   좋아요 0 | URL
기자가 깜빡한 모양인데 <제비를 기르다>는 다섯번째 소설집입니다. 제가 알기론 <남쪽 계단을 보라>가 두번째 소설집입니다. 윤대녕이 시인으로 분류된다는 데 동감입니다. 소설에 취한다는 것이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드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윤대녕의 소설을 읽을 때 작가와 사적인 만남을 갖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소개하신 작가의 말을 보니 <제비를 기르다>는 수도생활을 한 산짐승의 자취를 담아낸 소설인 듯 하군요. 얼른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언젠가 저 산짐승의 성차와 '로드 로망'의 미학 사이 함수관계를 푸는 것이 저 혼자만의 과제입니다.^^

로쟈 2007-01-27 16:33   좋아요 0 | URL
알라딘의 착오구요, 저도 왠지 작품집 수가 좀 적다 싶었습니다.^^

수유 2007-01-27 18:08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의 소설집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옛 팬으로서 좋은 평을 받는 소설집이기에 더 반갑군요^^ 작가의 말도 그럴듯 합니다. 제 손이 움직이기에 말이죠.

드팀전 2007-01-28 12:02   좋아요 0 | URL
저도 옛날에는 윤대녕을 좋았했었지요.지금은 좋고 말고 할것도 없이 .... 90년대 그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지금은 잊혀진듯 또 기억되고 그런 상태인가 봅니다.책장을 바라보면 윤대녕 소설집을 살펴봤는데..^^ 꽤나 많네요.<은어낚시><지나가는자의 초상><누가걸어간다>..거기에 98년 현대문학상,2003년 이효석문학상.윤대녕이 상을 받아서 마치 윤대녕 책 같군요.에 서있군요.그러나 역시 제가 윤대녕에게 꼽힌 건 96년 이상문학상의 <천지간>이었습니다.TV문학관에서도 했었는데..심은하가 주인공했다니까요.^^

sommer 2007-01-28 15:52   좋아요 0 | URL
그의 로망의 '에로스'를 더불어 좋아했었는데요, 여행하는 자는 에로스적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백 석의 어느 시구절과 더불어서 말이죠...

로쟈 2007-01-28 17:12   좋아요 0 | URL
'지나가는 자', '지나가고 싶은 자'들은 매혹될 만한 작가죠. 저는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기로 했습니다...

다락방 2007-01-28 22:3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제 신문에서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고 살까 말까를 망설였는데, 로쟈님의 페이퍼를 보니 구입해도 무리가 없겠네요 :)

비로그인 2007-01-31 13:49   좋아요 0 | URL
저는 윤대녕작가가 세상에 발표한 작품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매번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한권 읽고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하다가 다시 작품집이 나오면 사고 말았죠. 그 문체의 매력을 쉽게 잊을 수가 없어서요.
작품들과 작가의 사진이 영 매치가 안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제겐 윤대녕과 은희경이 그렇더군요. 그 섬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 인지... 이 책도 결국은 사게 되겠네요.

로쟈 2007-02-01 00:0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로님을 보시길!
아로님/ 윤빠시군요!^^
 

'쿤데라와 소설의 지혜'란 주제로 읽을 대목은 쿤데라가 지난 85년 봄(그러니까 22년 전이군) 예루살렘상을 수상하면서 한 연설 '예루살렘 연설: 소설과 유럽'의 한 대목이다. 이 연설은 그의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책세상, 1990/2004)에 제 7부로 들어가 있다(나는 국역본을 여러 권 소장하고 있는데, 지금 곁에 있는 건 1994년판이다). 그 중에서도 주로 맨 마지막 문단에 초점을 맞출 예정인데, 그건 이 대목이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민음사, 1996)의 에피그라프(제사)로도 쓰였기 때문이다(이하 <우연성>으로 약칭).

확인해보니 <소설의 기술>은 현재 품절상태이고 로티의 <우연성>은 아예 목록에서도 빠져 있다. 불과 10년전에 나온 책이(1996년 12월에 초판이 나왔다) 그렇듯 완벽하게 '망각'된다는 사실은 유감스럽다(게다가 로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철학자였는데 말이다. 비록 그에 대한 관심은 지젝에 대한 관심으로 대체됐지만). 재판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당분간은 간간이 로티의 책들을 페이퍼에서 자주 언급할 예정이다. 

내가 읽고자 하는 대목은 <소설의 기술>의 176-7쪽에 나오며 <우연성>의 5쪽에서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우연성>에서는 출처를 <소설의 예술>로 적어놓았는데, 영역본의 원제 'The Art of the Novel'를 그렇게 옮긴 것이다. 이것이 부가적으로는 알려주는 바는 역자들이 이 책의 국역본을 참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루어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두 번역문이 좀 다르다.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지난 90년에 나온 'faber and faber'판인데 재작년에 새로 판이 나오면서 표지가 아래 이미지처럼 바뀌었다(나는 이전판이 더 맘에 든다). 그 영역본의 페이지로는 164-5쪽이다.

Cover of Kundera, Milan: The Art of the Novel

오랜만에 쿤데라의 소설론을 다시 읽으며 되새기게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우아하게 소설을 변호하며 또 얼마나 곡진하게 소설의 지혜를 설파하고 있는가이다. 그의 소설들이 '에세이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런 갈래는 그는 최강의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흔히 쿤데라와 자주 비교되는 하루키를 내가 안 읽는 것은 어쩌면 그의 소설론을 접해보지 못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설가의 재즈론이 아니라 소설론을 읽고 싶다)...

각설하고, 진도를 나가도록 한다. <우연성>에는 약간 발췌돼 있는 이 문단을 <소설의 기술>을 중심으로 인용하도록 하겠다.

아젤라스트들,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 키취, 이 셋은 신의 웃음의 메아리로 탄생되었고 어느 누구도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면서도 모두가 이해될 수 있는 매력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 줄 알았던 예술에 대한, 한 몸에 머리가 셋 달린 단 하나의 적인 것입니다.(176쪽)

이 첫 대목에서 쿤데라가 말하는 예술은 물론 소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는 그 예술(=소설)의 적을 지목하고 있는데, 이 적은 하나이다. 단 하나의 몸통에 머리가 셋이다. 그리고 그 머리들이 '아젤라스트들'과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과 '키치(키취)'이다. '아젤라스트'에 대한 설명은 조금 앞부분에 나오는데, 프랑수아 라블레의 신조어로서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웃지 않는 사람,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쿤데라의 설명이 재미있다.

소설가와 아젤라스트 사이에 평화란 불가능합니다. 한번도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아젤라스트들은 진리란 명확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확신하며, 자신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개인이 되는 것은 바로 진리의 명증성을 상실함으로써이고 타인들의 일치된 동의를 잃게 됨으로써인 것입니다. 소설이란 개인들의 상상적인 낙원입니다."(171쪽)

여기서 중요한 건 (남과 같지 않은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쿤데라의 정의이며, 소설이란 그러한 개인들의 낙원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맨앞의 인용문에서 '꾸어온 생각의 공허함'이란 건 자기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떠들어대는 걸 가리키겠다. 그리고 '키치' 역시 개성의 상실에 대한 증좌이겠고(키치를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라고 변호하는 건 쿤데라라면 기겁할 일이겠다). 이 모두가 '웃지 않는 자' 아젤라스트와 가족적인 관계에 놓인다. 그들은 한 통속인 것. 이 첫대목에 대한 <우연성>의 번역은 이렇다:

아젤라스트들과, 받아들인 아이디어들에 대해 생각이 없는 자들과, 천박한 자들은 한결같고도 똑같이 신의 웃음의 메아리로 태어난 예술의 적이다. 바꿔 말해서 어느 누구도 진리를 소유하지 않으며, 누구든지 이해되어야 할 권리를 가진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였던 예술에 대한, 머리가 셋이나 달린 적이다.

'받아들인 아이디어들에 대한 생각이 없는 자들'과 '천박한 자들'은 각각 'the unthought of received ideas'와 'kitsch'를 인격화한 번역이다. 그리고 다시 반복하자면, 여기서 예술은 소설(예술)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어떤 '상상적 공간'이다.

이 상상적 공간은 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한, 유럽의 이미지, 혹은 최소한 유럽에 대한 우리가 품고 있는 꿈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이 꿈은 숱하게 배반당해 왔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를 연대감으로 묵어 우리의 조그만 대륙을 멀리 넘어설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이기도 합니다.(<소설의 기술>)

관용으로 이루어진 그 상상의 세계는 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하였으며, 그것은 바로 유럽의 이미지이다. 혹은, 그것은 적어도 유럽의 꿈이다. 몇 번이고 우리를 배반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유럽 대륙보다 훨씬더 멀리 뻗치는 우애 속에 우리를 통합시키기에 충분히 강한, 하나의 꿈이다.(<우연성>) 

 

 

 

 

정리하자면, 소설은 (1)근대 유럽과 함께 탄생하였으며 (2)유럽의 이미지 자체이거나 최소한 유럽의 꿈, 유럽에 대한 우리의 꿈이다. 그리고 그것은 (3)유럽을 하나로 묶어준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용어를 빌자면, 쿤데라는 유럽을 소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라고도 보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 유럽'이란 표상은 '근대 소설'의 발생과 불가분적이다. 그리고 하나 더 보태자면 (4)소설은 개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소설이라는 상상적 세계와 유럽이라는 현실적 세계)가 허약하며 소멸할 수도 있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평선 너머로는 우리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아젤라스트들의 군대가 보입니다. 선전포고 되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인 전쟁의 바로 이 시기에, 그리고 그토록 극적이고 잔혹한 운명의 이 도시에서 저는 소설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다시 확인되는 바이지만, 이 연설의 제목 '소설과 유럽'이 가리키는 것은 '소설=유럽'이라는 것이다(그러니까 그에게서 '동아시아 소설'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의 대전제는 소설이 근대 유럽의 발명품이라는 점이니까). 그리고 이 둘이면서 하나인 세계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로 특징지어진다(쿤데라가 로티와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고). 더불어, 이 세계의 적은 '웃지 않는 자들'의 세계이다. 이것이 쿤데라가 예루살렘이란 문제적 공간/도시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그리하여 결론.

제가 보기에 오늘날 유럽 문화가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 즉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독창적 사고와 침해할 수 없는 사생활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 안팎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유럽 정신의 이 소중한 진수는 소설의 역사 속에, 소설의 지혜 속에 마치 금고처럼 보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여기지기 때문입니다.(<소설의 기술>, 강조는 나의 것)

유럽의 문화가 오늘날 위협을 받고 있으며,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유럽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에 대한 존중 그리고 불가침의 사적인 삶에 대한 개인의 권리 존중 - 에 대한 위협이라고 볼 때, 유럽적 정신의 소중한 본질은 소설의 역사 속에 있는 보석 상자, 즉 소설의 지혜 속에 안전하게 보관중이라고 나는 믿는다.(<우연성>)

 

 

 

 

이 연설에서 오늘날의 시점은 물론 1985년이다. 바로 그 전해인 1984년에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했으며(예루살렘상 수상 이후 쿤데라는 한동안 노벨문학상의 단골 후보였다), 이어서 소설로만 치자면 <불멸>(1990), <느림>(1993), <정체성>(1998), <향수>(2005)를 차례로 발표한다. 알다시피 이 작품들은 곧바로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었다.

그리고 소설론/에세이집으로는 <소설의 기술>(1985),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엉뚱한 제목으로 번역된) <배반당한 유언>(1992), <커튼>(2005) 등이 있다. 이전에 한번 언급한 대로 이 <커튼>이 국내에는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고 있다(독어본은 바로 나왔으며 영역본은 올해 나오는 걸로 예정돼 있다). 비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넘어서는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커튼>의 소개가 지체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럽다.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소개/번역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서이다. 

07. 01. 27 - 30.

P.S. 쿤데라는 서문에서 이 연설의 자초지종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1985년 봄, 나는 예루살렘 상을 받았다. 도미니카 인이며 예루살렘 대학의 교수인 마르셀 뒤부아 신부는 영어로 씌어진 치사를 심한 프랑스어 악센트로 읽었다. 나의 수상연설이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즉 소설과 유럽에 대한 내 성찰의 마침표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프랑스어로 된 연설문을 심한 체코어 악센트로 읽었다. 보다 유럽적이고 보다 따뜻하고 보다 정감어린 분위기에서라면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11쪽)

맨마지막 문장이 좀 튀지 않나? 분명 시상식장에서 쿤데라는 그 연설문을 읽었던 것이니 마지막 문장의 함축은 번역 대로라면 "덜 유럽적이고 덜 따뜻하고 덜 정감어린 분위기"였다는 것이 되겠다. 설사 사실이 그랬더라도 그렇게 적어놓는 건 예의가 아닐 뿐더러 서문에 그렇게 적혀 있는 책도 나는 보지 못했다. 영역본에서 이 문장은 "I could have done it in no setting more throughly European, more cordial or dear to me."라고 돼 있다. 내가 읽기에는 "나는 그보다 더 유럽적이고 더 따뜻하고 더 정감어린 분위기에서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이다. 적어도 그게 '분위기'에도 더 맞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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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의 최신 화제작 <아포칼립토>(2006)를 봤다. 기독교의 기원이자 '유대문명 잔혹사'라 할 만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 이어서 '마야문명 잔혹사'를 다룬 <아포칼립토>는 살육의 피로 흥건하다. 마야의 희생제의에서 살아있는 제물의 심장을 꺼내고 목을 치는 장면 등은 심약한 관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하다(바타이유라면 흥분했을 듯하지만). 특이한 건 고대 히브리어, 아람어 등이 사용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마찬가지로 <아포칼립토> 또한 대사는 마야어로 처리되고 있다는 점(비록 아카데미상 후보에 들지 못했지만 두 영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쪽으로 분류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멜 깁슨의 고집과 야심이 읽힌다(그는 각본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모든 비극의 원인을 문명(과 종족) 내부에서 찾고 있다는 점. 멜 깁슨의 철학, 혹은 인류학인가?

영화 자체는 호오가 갈리고 있는데,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들이 이 영화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불만스러워한다는 기사들도 눈에 띈다. 야생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화면이 그런 약점을 카바해줄 수 있을까. 알라디너라면 마야문명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어볼 생각을 하는 것으로 영화감상을 대신해도 무방하겠다. 아래는 이 영화의 스펙터클에 담겨있는 은근한 '백인우월주의'를 의심하는 리뷰기사이다(영화잡지들의 리뷰기사는 내주판들에 실릴 듯하다). 

경향신문(07. 01. 25)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 백인우월주의 의심하다

미국의 생리학자이자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문명의 붕괴’(2004)에서 마야문명의 붕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문화적으로 발달한 창의적인 사회도 붕괴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마야에서 얻을 수 있다는 그는 문명이 붕괴되는 요인을 크게 5가지로 정리하고 마야문명은 이 중 4가지를 충족시킨다고 지적했다. 삼림을 해친 데 따른 ‘환경파괴’, 장기간 지속된 가뭄이라는 ‘기후변화’, 부족간 분쟁이 이어진 ‘적대적 이웃’, 지배세력이 경쟁적으로 전쟁에 매달리고 기념물 건립에만 몰두한 데 따른 ‘사회 구성원의 반응’이 그것이다. ‘우호적인 교역상대의 지원이 줄거나 중단된 경우’만 제외하고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겐 낭만적인 관광지로만 인식돼온 수백년 전 마야문명에 대한 분석이지만, 4가지 모두 옛날이야기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자원의 부족-삼림(환경) 파괴-이로 인한 가뭄(기상이변)-이에 대한 일시적 해결책인 전쟁(분쟁) 빈발의 악순환으로 마야문명의 붕괴 과정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걱정은 21세기 인류문명의 미래를 향하고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로 논란의 칼끝에 섰던 배우출신 감독 멜 깁슨은 마야문명의 붕괴 직전을 배경으로 한 신작 ‘아포칼립토’로 다시 한번 첨예한 논쟁을 촉발시킨다. 인류 역사상 야생과 문명이 가장 강렬하게 충돌했던 곳 중 한군데로 관객을 이끈 영화는 지나칠 만큼 사실적으로 당대의 야만을 재현한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벽화와 문헌 등을 통해 재구성한 마야문명의 잔혹사는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저서 ‘살육의 문명’(2002)에 따르면(*<살육과 문명>이다) 당시 이 지역 지배세력들은 “포로들을 제단 위 돌에 눕히고 돌칼로 가슴을 갈라 고동치는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친 다음 시신을 계단 아래로 걷어찼다.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살자들은 포로들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얼굴 가죽을 벗겼다.” ‘아포칼립토’는 마야문명 지배세력의 이같은 제사 장면을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이어 사지에서 겨우 빠져나온 주인공이 목이 잘려나간 시체들의 밭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에 이르면, 아무리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하더라도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가 이래도 되는지 싶을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이와 비슷한 ‘시체들의 밭’을 현대의 내전 소재 영화들에서 종종 본 적이 있다. 냉전시대 캄보디아 내전을 그린 ‘킬링 필드’(1984)부터 보스니아 내전이 배경인 오락영화 ‘에너미 라인스’(2001), 최근 르완다 내전을 다룬 ‘호텔 르완다’(2006) 등 인종(사상)을 청소하며 자행된 무차별 학살이 이런 참혹한 광경을 낳았고 또 영화에 재현됐다. 가장 야만적인 사태는 한 사회 내의 ‘적대적 이웃’에서 비롯되며, 이를 고발 혹은 상품화하려는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이전에 내부로부터 붕괴된다”는 미국 역사학자 윌 듀런트의 말로 운을 떼는 영화 ‘아포칼립토’는 그런 점에서 화면상 잔혹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듯 보인다(*듀란트의 <역사의 교훈>(범우사, 1989)은 품절됐다). 논쟁은 여기서부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스페인의 아스텍·마야 문명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서구·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미국 언론과 평자들 사이에서 뜨겁게 일고 있는 것이다.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데이는 저서 ‘정복의 법칙’(2006)을 통해 피지배인들의 이질적인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지배를 합리화하는 서구 침략의 역사를 비판한다. 중남미를 지배한 스페인 역시 현지인들의 제사 문화를 들먹이며 ‘야만을 문명화한다’고 주장했지만 데이비드 데이는 서구인들의 야만성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백인들이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수순을 밟아가는지를 살폈다.



‘아포칼립토’는 극중 제사를 관장하는 지배세력이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내세우며 다른 부족민을 권력 유지의 희생양으로 삼는 실상을 고발한다. 이것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침략자·독재자의 정복 논리이기도 하다는 풍자인지, 아니면 마야문명만을 대상으로 ‘미개인들의 말세’를 그린 것인지에 대해 영화는 똑부러진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극 종반부 스페인 에르난 코르테스의 무적함대로 보이는 백인들이 부자연스러우리만치 멋진 자세로 상륙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멜 깁슨 감독에 대한 의심은 짙어진다.

아름답고 양심 어린 영화로 국내에서 과대평가된 롤랑 조페의 영화들-‘킬링 필드’(1984), ‘미션’(1986), ‘시티오브조이’(1992)-처럼, 야생과 문명의 충돌을 다룬 영화들을 보는 관객은 소수의 백인이 의로운 일을 이끌고 다수 현지 유색인종들은 계몽과 개화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인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꼼꼼히 뜯어보며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다. 마야문명 속 선량한 부족의 한 청년이 호전적인 종족의 살육에 맞서 쫓고 쫓기며 가족을 지키는 이야기인 ‘아포칼립토’는 2월1일 개봉한다.(송형국 기자) 

07. 01. 27.

 

 

 

 

P.S. 찾아보니 국내 출간돼 있는 마야문명 관련서들이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개 품절된 책들이다. 가장 두꺼운 책은 존 핸더슨의 <마야문명>(기린원, 1999)이지만 이 또한 품절 상태다. 나로선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나 참조해봐야 할 듯하다.

P.S.2. 젊은 세대들에게 '잔혹사'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해줄 영화는 유하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이겠다. 잔혹사라고 해봐야 몇 대 때리고 맞는 정도이지만 젊은 치기에는 '잔혹사'라 불러봄 직하다(물론 영화의 배경은 70년대 말이니까 요즘의 젊은 관객들에겐 <친구>와 마찬가지로 '사극'이라 할 만하다).

점잖은 세대인 내게 '잔혹사'를 각인시켜준 영화는 기억에 '이조 여인 잔혹사'란 부제를 달았던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1983)이다. "양가의 규수이나 집안이 가난한 길례는 세도가인 김진사댁의 망자와 혼례하여 청상과부 노릇을 하는데, 한생에게 겁간을 당하고 그것이 발각되나 시아버지의 관용으로 접포 표식을 달고 도망하게 된다. 길례는 채진사댁 머슴 윤보를 처음 만나 종이 된다. 하지만 이후 윤보는 자신의 가문이 복권된 것을 알고 길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고, 길례는 윤부자의 며느리가 된다. 그러나 아이가 없어 윤보는 첩을 들이는데 결국 윤보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길례에게 씨내림을 강요한다. 길례는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 은장도를 받은 길례는 목을 매고 자살을 한다."는 게 줄거리이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느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던 이 영화는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였던 원미경의 청순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곧 그녀는 <변강쇠>(1986)에서 농염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여인들의 잔혹사'로 관통하기는 군부정권 치하였던 지난 80년대 한국영화의 책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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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7-01-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3번쯤 죽었다 깨도 못 볼 영화입니다. ^^;;
극장에서 예고편만 봐도 절래절래 고개가 돌아가더군요.

로쟈 2007-01-2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고편에 아마 다 들어가 있었을 듯한데요.^^

프레이야 2007-01-2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칼립토, 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1-27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형스크린으로 보신다면 심장은 집에 두고 가시길...

로쟈 2007-01-2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모호하지만 '면죄부'까지는 아닌 듯합니다.^^ 9.11 문제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이기 때문에요. 이라크나 빈 라덴은 그냥 미국 자체이 내적 분열을 외부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양날의 칼이란 생각이 듭니다...

sommer 2007-01-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의 구절을 빌려서 표현한 것처럼, 문명과 문명의 위상학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 속의 야만 사이의 관계로 더 나아가 문명의 붕괴 혹은 파국을 '지구제국'으로 확장시켜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역사 이후'의 관점에서 멜 깁슨의 영화는 역사 자체에 대한 우화로 읽히는 게 아닐까요?

sommer 2007-01-2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멜 깁슨이 분했던 '매드 맥스'까지 소급/퇴행해 갈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7-01-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멜 깁슨이 상상 이상의 야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고요. 뭔가 메시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 영화를 기대해봐야죠...

소경 2007-02-03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일보와 비슷한 기사가 수록 되었군요. 참모님 방 청소하나 그부분 슬쩍 보았기는 했는데 고고학을 계속 전공하려는 입장에서 그러한 '우월주의'가 왠지 그렇게 낯설게만은 느껴지지 않더군요. 허나 분명한건 요새 읽고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이 소개하는 벤야민의 견해가 오히려 '진리'처럼 느껴지더군요. 자세한 내용을 아직 이해 못하였지만 피지배 계급 입장으로의 역사의 복원이.
(잘 읽고 갑니다. 요새 몰래 제 작업장에서 몰래 간부 컴퓨텅에서 옮겨 잘 읽고 있습니다. 다만 사진은 여건상 보질 못하지.)

로쟈 2007-02-0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군대 문서작성도 다 컴퓨터로 하겠지요? 오래전에 4벌식 타자치던 기억이 새롭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