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쓴 시를 한편 더 옮겨놓는다. 이 또한 '코믹시'로 분류해야 할 듯싶은데, 사실 출전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으나 스피노자의 경구로 잘 알려진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내겐 언제나 유머로 들렸다. 시는 왜 그것이 유머인지를 나대로 '증명'하고자 한 시도였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그런 농담으로!)
왜 사과나무뿐이겠니
감나무 배나무 살구나무
자작나무 미루나무 은행나무 은사시나무
왜 한 그루뿐이겠니
여기에 한 그루 저기에 두 그루
뒷집 마당에도 한 서너 그루
강 건너라고 가리겠니
한 열 그루 심자꾸나
너는 구덩이를 파고 또
너는 물주전자를 가져오려무나
내일이 종말이란다
어서들 심자꾸나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우리가 철인(哲人)이 되겠니
어차피 종말이란다
뭔들 못하겠니
나무나 심자꾸나
용되자꾸나
어서 어서들 모이거라

자, 사과나무에
이젠 목매달자꾸나
내일이 종말이라는데
아, 기분 한 번 내보자꾸나
자, 어서 어서들- 

07.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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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0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이래요. 그러면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우리가 기독인이 되겠니> 가 되나요?

로쟈 2007-11-08 12:29   좋아요 0 | URL
사실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경구이기도 합니다. 경건해뵈는 그럴 듯한 누군가라면.^^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1-0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쟈님도 20대가 있었던 거군요 ㅎㅎ
20대의 느낌이 팍팍 묻어나네요 ^^

로쟈 2007-11-08 12:30   좋아요 0 | URL
10대도 있었던 걸요!^^

마늘빵 2007-11-08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쟈님의 20대라니. 상상이 안갑니다. 시도 쓰시고.

로쟈 2007-11-08 21:15   좋아요 1 | URL
문학 전공자들이 본래 시나 소설 습작들을 합니다.^^;

심술 2007-11-0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 동화책 표진가요?

로쟈 2007-11-08 21:15   좋아요 0 | URL
그런 거 같습니다. 저는 그냥 적당한 이미지만 가져왔을 뿐입니다.^^
 

이번주 한겨레21(684호)에 게재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여느 때와 달리 며칠 앞당겨 옮겨놓는다. 그건 칼럼 자체가 러시아혁명 90주년을 돌이켜보기 위한 것이었고 오늘은 그 9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아무런 공식적인 기념행사도 갖지 않는다고 하며 아예 무관심하다고 전한다(현지 르포기사는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250081,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260147 참조).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푸틴 대통령은 2년 전 혁명기념일을 없애고 대신 11월 4일을 ‘국민통합의 날’이라는 새 국경일로 지정했다고(지난 2004년까지만 해도 11월 7일은 국경일이었다!). 이래저래 격세지감을 통감한다...

한겨레21(07. 11. 13)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11월 7일은 러시아혁명 90주년 기념일이다. 보통 ‘10월 혁명’이라 불리는 것은 구력(舊曆) 1917년 10월 25일에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이것을 현재 쓰고 있는 신력(新曆)으로 환산한 날짜가 11월 7일이다.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지만 이제는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조차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러시아혁명의 의의는 무엇일까? 러시아 혁명과 관련한 몇 권의 책을 들춰보게 된다.

소비에트 해체 이전인 1977년(즉 혁명 60주년이 되는 해)에 서문이 씌어진 <러시아혁명>(나남 펴냄)에서 E. H. 카는 “목표는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해도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은 종종 사회주의의 부정 바로 그 자체였다.”고 혁명 이후의 볼셰비키 독재체제를 비판했지만 혁명의 성과마저 부인하지는 않았다.

 

혁명 50주년인 1967년을 기준으로 소련의 인구는 반세기 동안 1억 4천 5백만에서 2억 5천만 이상으로 증가했고, 도시 거주민의 비율은 20%이하에서 50% 이상으로 상승했다. 서구에 비하면 생활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원시적이고 후진적이었지만, 생활수준은 향상되었고 의료 및 교육 서비스는 소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때문에 “1967년의 소련 노동자와 농민은 1917년의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다.”(하지만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2007년 현재 러시아 노동자의 파업 참여인원은 혁명 당시 100만 명 단위에서 1000명 단위로 줄었다. 40년 전과는 또 매우 다른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카는 가난하고 문맹인 대중이 아직 혁명적 의식의 단계에 도달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위로부터의 혁명’이 혁명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가혹한 전제주의와 전쟁의 궁핍에서 러시아 인민을 해방시킨 러시아혁명이 바로 그런 혁명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다. 스티브 스미스가 <러시아혁명>(박종철출판사 펴냄)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도 그것이다.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믿음이 그들의 요구에 잘 들어맞아서, 그들은 수단이 목적을 훼손하는 방식을 못 보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이 볼셰비키 혁명은 그것이 이루려고 시도한 변화에 맞먹는 규모의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소련의 역사적 정통성과 스탈린시대를 옹호했던 푸틴조차도 최근 모스크바 남부의 공동묘지를 방문하여 1937-8년에 자행된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대숙청을 가리켜 너무나 큰 비극이며 믿기 어려운 광기라고 토로한 것은 정치적 의도를 감안하더라도 상징적이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사가 다시 반복되어도 좋은 역사인가에 대한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러시아인들의 회의를 응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무엇이 문제였던가? 카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가장 높은 이상으로의 전진이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사회주의의 진보는 정체되고 일련의 역행과 참화에 의해 중단되었다. 물론 이러한 역행/참화는 피할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피할 수 없는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스미스의 보다 구체적인 지적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은 뒤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제대로 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엄청나게 많은 문제들과 부딪혔다. 따라서 그들의 정책은 이데올로기의 소산이었던 것만큼이나 임기응변과 실용주의의 소산이었다. 즉 그들은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결국 러시아혁명사는 “1917년에 열렸던 가능성이 자꾸만 닫혀 갔던” 역사로 기술된다. 오늘날 그 가능성은 다시 열릴 수 있을까? “러시아 혁명은 정의와 평등과 자유가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가에 관한 심오한 물음을 던졌고, 비록 볼셰비키가 이 물음에 준 답에 치명적인 흠이 있다고 해도 이 물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결론이다. 러시아혁명이 써낸 답안은 틀렸지만, 요는 그 오답과 함께 문제까지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오답을 적어내는 것보다 더 무책임한 일이기에.

 

07.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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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거 다음날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7-12-20 09:38 
    * 17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 * 진실이 거짓을 이깁니다. ; 정동영 대통령 후보 슬로건 * 첫째. 진실을 깨우치게 된다고 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과 안위를 떨치고 일어나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제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이 싸움은 내가 평생을 두고 도달하고자 노력해도
 
 
마립간 2007-11-08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를 발췌하여 저의 페이퍼로 옮깁니다.

로쟈 2007-11-08 21:19   좋아요 0 | URL
네, 오픈된 자료니까요.^^
 

어제 자작시와 함께 고흐의 밀밭 그림들을 옮겨놓았는데 아침신문에 '불멸의 화가-반 고흐'전에 관한 기사가 떴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1/h2007110518343084320.htm). 총 67점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회는 지난 90년 100주기전 이후 최대 규모라고 하니까(우리 미술전시시장이 그만큼 커졌다는 얘기겠다) 발걸음은 예약해둠 직하다. 전시의 하일라이트는 고흐의 5대 걸작에 속한다는 '자화상'과 '아이리스'라고(다섯 작품 중에 두 작품이 전시된다면 산술적으론 40% 전시회가 되는 것인가?)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1. 06) 반 고흐가 온다, 가을이 설렌다

마음껏 설레도 좋다. 보는 이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의 화인(火印)을 새긴 모든 미술 애호가들의 첫사랑,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가 서울에 온다. 섬광처럼 짧은 삶을 살고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비운의 천재화가 반 고흐의 시기별 대표작을 한데 모은 ‘불멸의 화가-반 고흐’전이 24일부터 내년 3월16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한국일보사와 서울시립미술관, KBS가 공동주최하는 이 전시는 반 고흐의 유화 대표작 45점과 드로잉 및 판화 22점 등 총 67점을 선보이는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회고전으로, 전시 보험가액만 총 1조 4,000억원에 이르는 전무후무한 전시다.

그동안 반 고흐의 전시는 늘 부분으로만 존재해왔다.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렸던 반 고흐전은 고흐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1886-1888)의 작품들로만 구성됐고, 2000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 열린 고흐 특별전도 자화상만을 모은 것이었다. 200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반 고흐전도 드로잉만으로 구성됐다.

반 고흐가 남긴 879점의 작품 중 절반이 세계 각지에 수 점씩 흩어져 있는 탓에 시기별 작품을 망라해 한데 모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고흐 회고전의 개최는 월드컵 유치에 버금가는 국가적 경사로 평가받는다. 반 고흐의 시기별 유화 대표작을 45점이나 모은 대규모 전시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것은 한국의 국가적ㆍ문화적 위상이 그만큼 제고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대규모 전시는 반 고흐의 고국 네덜란드에서 사망 100주기를 기념해 1990년 열린 회고전 이후 처음이다. 작품들은 반 고흐가 남긴 작품의 절반가량을 소장하고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과 오텔로의 크롤러뮐러 미술관에서 빌려왔다.

이번 전시의 질적 수준은 반 고흐의 5대 걸작에 속하는 파리 시절의 ‘자화상’과 생레미 요양소에서 그린 ‘아이리스’가 선보인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두 작품은 보험가액만 각각 1,000억원에 달하는 걸작 중의 걸작들이다. 이중 ‘아이리스’는 반 고흐 미술관의 ‘보배’로 한번도 해외에 반출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이밖에도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씨 뿌리는 사람’, ‘노란 집’, ‘우체부 조셉 룰랭’ 등 한국 관람객의 가슴을 울렁이게 할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모든 그림에는 원작의 아우라가 있지만, 반 고흐의 유화만큼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는 그림은 없다. 그는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세계를 보고, 붓이 아니라 감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겹겹이 쌓아 올린 물감과 휘몰아치는 격정의 붓터치, 밝은 보색 속에 꿈틀대는 색채의 힘으로 반 고흐는 인간을 위로한다. 절망과 광기 앞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반 고흐의 작품을 직접 본다는 것은 그의 숨결과 손길을 함께 호흡한다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는 반 고흐를 일러 “태양을 훔쳐 화폭에 옮긴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태양의 화가 반 고흐는 신화 속에서 부활해 지지 않는 태양이 되었다. 그 태양이 이제 서울에서 떠오른다.(박선영기자)

07.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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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11-0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설레긴 하는데 가서 사람들이랑 애기들한테 치이고 밀려서 제대로 그림 볼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비연 2007-11-06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사람 좀 뜸한 시각에 고즈넉하게 보고 싶네요..^^

로쟈 2007-11-0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엔 미어터질 것 같습니다.^^;
 

빤스에 관한 시에 이어서 20대에 쓴 시 한 편을 더 옮겨놓는다. 실상은 이 서재의 문턱을 조금 낮춰보자는 '계산'을 담고 있지만 달리 페이퍼를 쓸 만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밀린 일들을 다 제쳐두고 무얼 할 만한 여건이 아니기에 떠올려본 시이다...

내게 밀밭을 그려줘

밀밭을 그려줘, 나의 밀들이 자라게
주말에 나는 밀린 일들을 다 제쳐두고 저
밀밭으로 달려갈 거야
가서 볼 거야
밀밭이야, 물결치는 밀밭이야
내 손에 쥐어진 한줌의 밀들이 자라게
나는 가슴으로 너를 끌어안을 거야
이 향긋한 흙속에 코를 묻을 거야
밀밭이야
밀밭을 그려줘, 나의 밀들이 어서 자라게
나는 맨발로 너를 끌어안을 거야
나는 밀밭을 일굴 거야
밀밭이야, 물결치는 밀밭이야
거기 황혼이 내리면
나는 종소리를 구하러 읍내에 나가야지
때앵
때앵
때앵
나는 밀들을 거둬들여야지
나의 사랑하는 밀들을 빻고 또 빻아서
남김없이 빻아서

전부 밀가루 반죽을 만들 거야
두고볼 거야

밀밭을 어서 그려줘, 나의 밀들이 자라게
이 말라가는 한줌의 밀들이……

 

07. 1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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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7-11-06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빤스' 만큼은 아니지만, 아 웃겨 ㅋㅋㅋ

로쟈 2007-11-06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제가 쓴 시의 팔할은 코믹시였나 봅니다. 웃기다고들 하시니.^^;

섬나무 2007-11-06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밭만 그려줘도 밀을 키우시겠다니 놀랍네요. 그런데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서 두고 보면 안되잖아요. 수제비라도 만들던가 해야잖아요.^^ 음...너무 귀한 밀이라 차마 먹어치우진 못하는 건가요 아님 애초에 먹을 수 없는 밀인가요?

로쟈 2007-11-06 12:35   좋아요 0 | URL
'전부 밀가루 반죽을 만들 거야/ 두고볼 거야'는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것으로 읽어주시면 제 의도에 더 잘 맞겠습니다.^^

마노아 2007-11-0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종소리를 구하러 읍내에 나가야지
//요 구절이 좋아요. 그림과 꼭 함께 보아야 더 맛있는 시가 되는 것 같아요^^

로쟈 2007-11-06 12:36   좋아요 0 | URL
'시화전 시'가 돼버렸네요.^^;

호민관 2007-11-07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시의 모티브는 다른 이들의 글이나 영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전혀 다른 시들도 많겠지만)
관계와 교류를 중시하는 님은 경제학을 전공하셔도 좋을뻔했을까요?^^

로쟈 2007-11-07 21:28   좋아요 0 | URL
잘 보셨습니다. 고전적인 시나 상투어들에 대해 쓴 시들이 좀 되구요, 영화의 제목을 차용한 시들도 있습니다(직접 관련되는 건 없지만). 저대로의 유희이면서 윤리입니다. 경제학과는 전혀 무관한(제가 계산엔 소질이 없어서요).^^

 

어쩌다 보니 옛날에 쓴 시가 생각났다. 97년 대선보다도 더 전이니까 아주 오랜 '옛날'이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란 제목은 박완서 선생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으니까(물론 원출처를 따지자면 김현승의 시 '눈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겠지만) 최소한 94년 이후에 씌어진 것이다. 이런저런 할일들에도 불구하고 의욕이 저하된 상태에서 물끄러미 주말과 휴일을 보내다보니 생각난 시인 듯도 하다. 무엇이 너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냐, 라고 묻는 뜻에서. 생각난 김에 창고에 넣어둔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

쩌다 그런 생각, 좀처럼 그런 생각을 벗지 못한다.
무엇이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냐에 대해
나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남겨두면, 바로 그 목숨
이전의 마지막 보루, 나의 빤스. 마치 목숨의 경계인 듯
빤스는 나와 함께 반생(半生)을 뛰고 또 뛰었다, 어떤 날은
빤스만 입고 뛰었다(호루라기에 맞춰). 억울할 그 무엇도
없는 날들이 나의 빤스를 젖게 했고 닳게 했고
닳아빠지게 했다. 닳아빠지도록 한 사람 곁에 머문다는 것은
보기 드문 미덕이며, 미덕의 승리이어야 한다. 보라,
온몸의 때를 씻고 씻어내고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새 빤스를 입는 일! 금방 빤 듯한 빨아서 말린 듯한
새 빤스, 의 노곤한 감촉이여 갱생의 의지여
(요즘 빤스는 잘 찢어지지도 않는다.)
오, 삶의 이유 있는 살 만함이여
몸에 꼭 맞는 빤스를 여러 장 가진 내게 부러워할 그 무엇이
있을 것인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들의 순종과
더불어 나는 늙어가리라, 는 생각.
(이건 점차 확신이 되어가는 것인데.)
좀처럼 그런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다 그런
흐뭇한 생각이 나를 거울 앞에 서게 한다.
빤스만 입고-

무엇이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냐에 대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빤스! 라고, 아직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2

무엇이 정말, 당신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냐고
자꾸자꾸 물어보는 녀석은 한 대 패주고 싶다!
나는 거듭,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빤스! 라고, 
덧붙여 말하거니와 세상은 빤스 이전과 빤스 이후로 나뉘는데
빤스 이후의 삶이란, 다름아닌 빤스의 로테이션일 뿐!



07. 11. 05.

P.S. 왜 이 시가 뜬금없이 생각났는지 알겠다. <이론-이후-삶>(민음사, 2007)에서 데리다와의 패널토론을 읽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후(after)'란 말의 뜻에 대해 깊이 따져묻는 내용이다. '이론 이후의 삶'에서 '빤스 이후의 삶'을 떠올렸던 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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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1-05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대 맞지 않으려면 조용히 추천만 하고 가야겠네요. 시 잘봤습니다.^^

로쟈 2007-11-05 17:19   좋아요 0 | URL
팬서비스 차원으로 읽어주시길.^^

소경 2007-11-0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흡~ 이런 저도..조용히 추천만. 지옥을 바라볼 용기가 없네요

로쟈 2007-11-05 17:19   좋아요 0 | URL
'빤스 지옥'이요?^^

와넬 2007-11-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시를 읽다가 생각났는데, 군대에 가면 종종 빤스의 로테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다지요.

로쟈 2007-11-05 17:20   좋아요 0 | URL
삶이 헐벗은 게지요...

이리스 2007-11-05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에 꼭 맞는 빤스.. 라는 대목에서 부러워졌다는.. (이유는 묻지 마세요.. 후다닥~)
-.-

로쟈 2007-11-05 22:31   좋아요 0 | URL
'꼭 맞는'이란 표현도 우스개인데, 빤스야 '대충' 다 맞는 거지요(고무줄이나 스판이니까). 그래도 안 맞으신다면 이유야 뻔해보이지만 묻지는 않겠습니다.^^

섬나무 2007-11-05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하된 의욕이 보충되기에 적절한 시어로 보입니다.^^

로쟈 2007-11-06 00:37   좋아요 0 | URL
적절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네요.^^;

Joule 2007-11-0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빤스 이후의 삶이란, 다름아닌 빤스의 로테이션일 뿐!

마지막에 느낌표는 마음에 좀 안들긴 하지만. 위와 같은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저의 이상형입니다. 이제 겨우 절반쯤 산 것 같은데 이상형을 두 명이나 찾았으니 죽기 전에 셋은 채우겠지요. 역시 운수 좋은 삶이에요.

로쟈 2007-11-07 21:19   좋아요 0 | URL
느낌표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한데, 앞에서 이미 남발했기 때문에 쿨하게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메 2007-11-06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빤스'라는 시어를 보니까, 장석남 시인의 '목돈'도 생각나네요. ^^
시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11-07 21:21   좋아요 0 | URL
목돈으로 빤스를 사는 시던가요?^^

우와한맘 2019-11-07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엄하신 선생님 얼굴을 떠올리며...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