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를 적다가 문득 서재가 너무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어서(방문자수는 적은 편이 아니지만 다들 뒤꿈치를 들고 다니는 듯하다) 떠올린 시를 옮겨놓는다. '물위의 암스테르담'이란 제목인데, 시구절을 인용하면 '물위의 도시를 사랑했던 어느 암담한 물고기' 얘기다(나대로의 말장난에 좀 익숙한 분이라면 '암담-암스테르담'의 유운 효과가 지겨울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눈을 뜨면 간장에 물 탄 듯이 아침은 온다" 같은 구절이 마음에 든다.   

물위의 암스테르담


태엽이 풀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눈이 감긴다 눈을
뜬다, 눈을 뜨면 간장에 물 탄 듯이 아침은 온다 

2  
나는 점점 더 나빠져 가는 그이들의 예절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런 얘기나 반나절 동안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제대로 듣고 있냐고?
나는 한 나무의 변두리에 주저앉아 눈에 익은 그림자들을 보고 있어
나는 이때쯤 살갗에 모이는 소금들을 부끄러워하지 
나는 이젠 더 참을 수 없는 그이들의 예절을 얘기하고 싶어
나는 등나무 꽃 그늘 아래로 옮겨갈 테야

눈물보다도 맑은 물위에 눈꽃들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가려무나, 날아가려무나, 공손한 비둘기들이여 앉은뱅이 비둘기들이여
날개의 페달을 밟으며 긴 아치를 그리며 이 물위의 도시를 떠나가려무나 
아침이면 그대 햇살 아래 예언처럼 떠오르는 도시를……  

4
나는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어느 물고기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물위의 도시를 사랑했던 어느 암담한 물고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그런 얘기나 태엽 풀린 소리로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그러니까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제대로 듣고 있는 거냐고? 

07.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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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11-23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 위의 암스테르담이라는 영화도 있는데...

로쟈 2007-11-23 08:49   좋아요 0 | URL
원제도 그런가요? <암스테르담>을 타이틀로 한 영화는 여러 편 되는군요. 얼마전 '물위의 암스테르담'이란 기타연주곡으로 유명한 끌로드 치아리도 내한공연을 가졌군요...

섬나무 2007-11-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는 아닌듯한데 누구의 신가요.

로쟈 2007-11-23 15:38   좋아요 0 | URL
흠, 제가 쓴 건데요.^^;

섬나무 2007-11-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위기는 로쟈님인데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싯구절 운운에서 그럼 다른 이 건가? 했습니다.
로쟈님 그거 아십니까? 로쟈님 시는 가을 볕 아래 좌판에 놓인 열매들 같습니다.

로쟈 2007-11-24 12:38   좋아요 0 | URL
게다가 공짜입니다.^^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에 대해서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과 함께 읽어볼 작정이란 얘기를 지난주에 적었다. 일간지 서평을 근거로 '와인 감식가로서의 지식인'(http://blog.aladin.co.kr/mramor/1703093)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막상 읽어보니 '와인 감식' 같은 풍미와는 거리가 먼 책이다. 기자에 따르면 '색다른 지식인론'이고 역자에 따르면 '지식인을 위한 기묘한 변명'에 해당하는 책은 학계와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조롱도 포함하고 있어서 와인보다는 도수를 많이 높여야 할 듯싶다('꼬냑'이라고 할까?).

기자의 서평에 따르면 "문장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문장이야 더 까다로운 책들이 많기에 이 책만의 흠이랄 수는 없겠지만 다소 산만하다는 점은 이 책의 새로운 독자라면 고려해야 할 듯싶다. 군데군데 재치있는 비판과 번뜩이는 발상전환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계속 읽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2장인 '지식인과 철학자의 대화'에서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저자의 독설과 비아냥은 일리가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하다는 인상을 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부피는 얇지만 아주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야심적인 저작"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점은 저자가 서문에서 주장하는 바와 다소 모순되기에 흥미롭다. "나는 생각할 가치가 있는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떤 청중에게든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코 엘리트 지식인들의 게으름이나 조급성을 사상의 깊이와 혼동하지 마라."(11쪽) 적어도 저자 스스로는 학자연하는 현학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은 내용상의 어려움이 아니라 문체상의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그 문체의 낯설음은 저자가 '독자'가 아닌 '청중'을 고려하고 있기에 빚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군데군데 역자의 실수도 가독성 떨어뜨리기에 동참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대체적으론 무난한 번역이지만).  

가령 "어느 분야든 지식인에게 이상적인 학문적 훈련을 제공하는 것은 연구와 교육이다."(9쪽)은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원문은 "Research and teaching across different disciplines provides ideal academic training for the intellectual."이고 'across different disciplines'은 '어느 분야든'이 아니라 '각기 다른 학문을 가로지르는', 즉 '학제적(interdisciplinary)'이란 뜻이어야 이어지는 내용과 호응이 된다. 단순히 '연구와 교육'이 지식인에게 이상적인 학문적 훈련이 된다고 하면 싱거운 노릇이다. 다방면에 걸친 '학제적 연구와 교육'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가 개척의 공로자 중 하나인 '사회인식론(sociial epistemology)'은 바로 그런 학제적 연구와 교육을 근간으로 한 프로그램이 아닌가.

'사회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사회인식론은 지금까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인식하고 그런 인식에 비추어서 앞으로는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실제로 그것은 일종의 추상적인 사회 정책론(social policy)'이다."(9-10쪽) 나름대로는 사회인식론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므로 원문을 따라 적으면 "Social epistemology is concerned with how knowledge should be produced, in light of what is known about how it has been produced. In effect, it is a kind of abstract science policy."

기이한 것은 원문의 'science policy(과학/학문 정책론)'이 번역문에서 '사회 정책론(social policy)'으로 엉뚱하게 탈바꿈한 것이다(아무래도 '사회인식론'에서의 '사회'란 말의 연상작용 때문에 빚어진 착오인 듯하다. 덕분에 이후에 잘 읽히지 않는 대목은 모두 원문을 확인하게 된다). 이 문장의 '추상적인(abstract)'을 나대로는 그냥 '이론적인'이란 뜻으로 이해하는데, 사회인식론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 왔는가(->지식의 고고학)를 검토해서 앞으로는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가(->학문 정책론) 하는 그림을 제시하는 학제적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왜 그냥 인식론이 아니라 사회인식론인가? 그것은 인식/지식이 그 사회적 발생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 때문이겠다. 저자가 마키아벨리의 '권력에의 진리(truth to power)'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조건'을 '권력관계'와 나란히 놓는다면 그런 조건/관계와 무관하게 생산되는 지식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풀러는 이 책의 모델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라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대단히 성공한 지식인이며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력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시대에 '권력에의 진리'를 설파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며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6쪽)

책은 다양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지만 내가 읽은 범위내에서 가장 유익한 대목은 지식인과 총제적 진리의 관계를 다룬 절이다(68-78쪽). 바쁘신 분들은 이 대목만 챙겨두어도 책값의 1/3은 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지식인을 표방하는 풀러이지만 그를 '포퍼리언'으로 이해할 때 사회인식론의 기본적인 관점과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 <쿤/포퍼 논쟁>이 이미 시사해주는 것이지만). 내가 그렇게 읽은 경우이다. 그 '읽기'는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다루기로 한다...

07.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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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책들이 없나 뒤적거려보다가 '어렵게' 발견한 책이 토머스 크로의 <60년대 미술>(현실문화연구, 2007)이다(국역본의 부제가 '순수미술에서 문화정치학으로'이다).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이론 세미나를 하다가 좀 읽어본 책이 그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 2005)이어서 저자와는 구면이다. 특히 '시각예술의 모더니즘과 대중문화'란 그의 글은 내가 찾은 것만 국내에 3종의 번역본이 소개돼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다(아트북스판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60년대 미술>은 크로의 1996년작이니까 원서로는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과 나란히 출간되었던 책이겠다(그러니 같이 읽어보아야 할까?).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1960년대 미술은, 오늘날의 보수적인 비평가들에 의해서는 모든 동시대적 스캔들의 분수령이라고 언급되고, 좌파의 비평가들에 의해서는 미학적 급진주의가 성공을 거둔 드문 사례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미국의 비평가 토머스 크로는 1960년대 미술이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형성했다고 본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소개는 이렇다: "1960년대의 새로운 정치학 안에서 빚어진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양면적이다. 미술가들은 새롭고 공격적인 세계 시장 속에서 그들의 활동에 대한 지지가 점차 증가하자 이러한 시장의 지지와 시장을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은 1955년부터 1969년까지의 시기가 낳은 하나의 산물이자 이 시기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올 이 책의 중심 주제이다."

해서 관심은 '60년대'로 다시 회귀한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얼른 떠오르는 것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를 다룬 로도윅의 <현대 영화이론의 궤적>(한나래, 1999)과 1960년대초 김승옥의 시사만화를 다룬 <혁명과 웃음>(앨피, 2005)이다. 영화와 만화라는 각기 다른 장르와 유럽과 한국이라는 각기 다른 지리적 공간에서의 '1960년대'를 일별해볼 수 있겠다. 문화정치학의 관점에서. 흠, 내년의 한 가지 연구테마로 잡아도 좋을 듯하다...

07.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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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레프 톨스토이의 서거일이라 한다. 구력으로는 1910년 10얼 28일에 가출해서 11월 7일 6시 5분에 간이역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에서 숨을 거두었고 11월 9일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혔다(http://www.youtube.com/watch?v=E8_Th7UdsBw). 요즘 쓰는 달력으로 환산하여 오늘이 이 대문호의 기일이 되는 것이다.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고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을 보니 그렇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전공자인 나도 읽어보지 않은 책이지만(하긴 전집 90권을 어찌 읽는단 말인가? 그의 소설들만 읽기에도 인생은 짧다), 이번 학기가 가기 전에 조금은 들춰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1. 20) [오늘의 책<11월 20일>] 인생이란 무엇인가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82세로 사망했다. 구소련에서 1958년 완간된 톨스토이 저작전집은 모두 90권. <전쟁과 평화>나 <부활>을 ‘오늘의 책’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톨스토이의 마지막 저작이다. 1884년 ‘1년 365일을 위한 세계 모든 민족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빛나는 지혜’를 한 권의 책에 담을 구상을 한 그는 사망하던 해에도 이 책의 개정3판을 내는 등 만년의 열정을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쏟았다.

매일 일기 쓰듯 한 가지 주제에 관한 자신의 단상을 적고, 노자 부처 파스칼 칸트 등 동서고금의 사상가와, 성서에서 당대 무명 저널리스트의 글까지 인용한 다음, 자신의 생각으로 마무리한 형식이다. 톨스토이가 고른 인류의 지혜라 할 만한데, 솔제니친은 “세상에서 단 한 권의 책만 가지라 하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월 1일, 톨스토이는 무엇을 주제로 인생론을 시작했을까? ‘책’이다. “그리 중요치 않은 평범한 것을 많이 알기보다는 참으로 좋고 필요한 것을 조금 아는 것이 더 낫다”고 쓴 그는 책에 대한 에머슨, 로크, 세네카, 소로의 글을 소개한 뒤 쇼펜하우어를 마지막으로 인용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자가 언제나 가장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는 법이다. 악서는 아무리 적게 읽어도 지나치지 않고, 양서는 아무리 많이 읽어도 과하다고 할 수 없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은? 톨스토이는 ‘시간’을 묵상했다. “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무한한 접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 그 시간이 없는 한 점에서, 인간의 진정한 생활이 영위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신력을 그 현재에 집중시켜야 한다.”(하종오기자)

07. 11. 20.

P.S.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할 얘기들이 쌓여가고 있지만 털어낼 짬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주에는 최소한 페이퍼 하나라도 적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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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1-05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톨스토이 생애에 관한 유투브 영상 따라간 주소에 없어요 ㅠ.ㅠ

로쟈 2008-01-05 09:48   좋아요 0 | URL
유용한 자료였는데, 삭제된 모양입니다...
 

지난주 '시사인'에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에 아무래도 그 여파 때문인지 방문자수와 즐찾수가 많이 늘었다. 그래서 예상보다 조금 일찍, 그러니까 오늘 방문자수가 30만을 넘어설 것 같다. 지난 6월 1일에 20만명을 돌파했으니까 6개월이 좀 못 되는 사이에 10만명이 더 다녀간 셈이다. 그 정도면 '대박'은 아니어도 '인기' 블로그는 되는 모양이다(특히나 책 블로그로서는). 가끔은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서재의 '콘텐츠'(페이퍼)들을 둘러보며 의아하다는 생각도 한다. 적어도 500여명 정도는 매일같이 이 서재를 찾기 때문이다. 그게 의아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분발을 채찍질하기도 한다(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계속 해야만 한다는!). 30만 돌파 기념이벤트 같은 거라도 벌여야 예의에 맞을 듯하지만 떠들썩한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그냥 나대로 조용히 기념/기억해두기로 한다.

오래전에 좋아했던 노래에 이상은의 '더딘 하루'(1991)가 있었고(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5003968), 그 제목을 따서 (노래와는 무관한)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걸 옮겨놓는다. 며칠간 강의준비에 덧붙여서 원고/논문들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인지라 '더딘 하루'란 건 사치스럽게, 그런 만큼 부럽게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여하튼 그런 '더딘 하루'들을 버티던 시간들도 있었다. 내 생의 안쪽이었지만 이젠 바깥으로 비져나가는 시간들이다. <대부3>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http://www.youtube.com/watch?v=5XeqQc5S8Gw) 나도 언젠가는 다시 '더딘 시간'을 더듬다가 고꾸라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뭔가를, 계속 해나갈 것이다. 삶을 계속 달구어갈 것이다... 

더딘 하루

세상 어디에나 가볍게 날아오르는 삶이 있고 거꾸로 처박히는 삶이 있다. 세상 어디에나 삶이 있고 삶의 주변이 있고 거짓된 삶이 있다. 삶은 달걀이 있고 장작불 통닭이 있다. 통닭은 제 몸을 온통 장작불로 달구면서, 이젠 고민할 닭대가리도 없기에, 자유롭다. 삶은 달걀은, 이젠 부화할 여하한 꿈도 품고 있지 않기에, 안달하지 않는다. 무덤덤하다(그래서 소금에 찍어먹어야 한다). 이들은 우리네 내장과 적당히 타협하여, 바야흐로, 승천(昇天)할 것이다(자진하여 소멸하게 될 그들의 흔적을 승천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꼬르륵거리며.

삶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오늘도 나는 더 더딘 하루에 대한 인내의 미덕을 곱씹는다. 으아, 기지개라도 켜고, 못 다한 삶의 온갖 풍경들을 곱씹는다. 닭똥집만 곱씹어서 맛이 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밑바닥은, 모든 밑구녁은 나름의 인내로 고소하다. 아니 고상하다. 나는 언젠가 아주 고상한 자태로 승천하는 날을 꿈꾼다. 으아, 이런 생각만 하면 어깨가 근질거린다. 이 거대한 내장 속에서, 반드시, 적당히 타협할 날이 오지 않을까. 바야흐로 마구 썩어가는 이 일신(一身)의 종창 끄트머리에서. 방향(芳香)조차 은근할 때. 나풀나풀. 어쩌자고. 정말?

 

 

07.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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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2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하며 행여 댓글과 관심에 부담가지실까봐 황망히 사라지는 1人입니다.^^

로쟈 2007-11-20 13:0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무게를 잡았는지(통닭으로?) 썰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