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사랑 강좌의 리스트를 만든 계기가 된 리뷰를 옮겨놓는다. 소설가 김연수의 번역으로 얼마전에 출간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에 대한 리뷰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7). 리뷰에서도 언급되는 문학상식이지만, 참고로 덧붙이자면 카버의 일어판 전집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옮겼다. 해서 '체호프-레이먼드 카버-하루키'(http://blog.aladin.co.kr/mramor/1054184)에다 우리는 김연수를 덧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사인(07. 12. 24) '가장 완벽한 단편’ 빈말이 아니네

비평가란 본래 과장하기 좋아하는 족속이다. ‘경천동지할 걸작’ 혹은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표현을 만지작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그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최상급 형용사들과 싸워야 한다. 카드를 다 써버리면 나중에 어쩔 것인가. 그런데 못 참겠다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비평가 아무개 씨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일러 ‘가장 완벽한 단편’ 운운하는 걸 보고, 또 한 비평가가 백기를 들었구나, 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제야 ‘대성당’을 찾아 읽었다. 뭐랄까, 완벽한 단편이었다. 

10년 전에 소개된 바 있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이 최근에 새 번역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카버는 1938년생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치코 캠퍼스에서 존 가드너에게 소설을 배웠고 22세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38세에 첫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1976)를 출간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1981)으로 자리를 굳혔다. 세 번째 단편집 <대성당>(1983)이 대표작이다. 이 책으로 그는 ‘아메리칸 체호프’라는 칭호를 얻었다. 체호프의 아류라는 뜻이 아니라 체호프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마따나 “놀랍게도 레이먼드 카버는 처음부터 진짜 오리지널 레이먼드 카버였다”.

<대성당>에는 표제작 ‘대성당’을 포함해 단편이 총 12편 수록되어 있다.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작품이지만, 그 중 한 편만 읽어야 한다면 역시 ‘대성당’일 수밖에 없다. 작품 속 ‘나’의 아내에게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맹인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아내는 이름이 로버트인 그 맹인 친구가 곧 그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맹인이라니, 내가 아는 맹인이라고는 영화에서 본 사람들뿐이다. 아내는 오래된 친구를 따뜻하게 맞이하지만 나는 모든 게 그저 귀찮고 불편하기만 하다. 저녁 식사를 마쳤고, 아내는 잠이 들고, 마침내 로버트와 단둘이 남았다. 어찌해야 하나.



‘아메리칸 체호프’ 칭호 안겨준 대표작

나는 하릴없이 텔레비전 채널만 이리저리 돌린다. 어떤 채널에서 세계 각지의 성당을 소개하고 있다. 대성당이라.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로버트에게 묻는다. 맹인은 잘 알지 못하니 설명해달라고 청한다.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성당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려나, 비로소 나와 로버트의 진지한 대화가 시작된다. 로버트는 한술 더 떠서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자고 말한다. 둘은 손을 포개어 잡고 펜을 든다. 그리고 이제 소설은 당신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아름다운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이 소설은 편견과 소통에 대해 말한다. 부정적인 견해만 편견인 것은 아니다. 내가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앎, 한 번도 반성해보지 않은 앎은 모두 편견일 수 있다. 이를테면 맹인이 아닌 자가 맹인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란 것은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편견의 테두리 밖에 있기 어렵다. 그 편견은 어떻게 깨어지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은 많다. 그러나 편견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힘 있게 그려낸 소설은 많지 않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가끔 주제넘은 충고를 한다. 저 자신은 소설을 단 한 줄도 써본 바 없으면서 말이다. “인물의 내면을 말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어라.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라.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가장 좋은 것은 쓰지 않는 것이다.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러고는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

일본에서 카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한국어판 <대성당>을 번역한 사람은 소설가 김연수다. 김연수는 누구인가. 이를테면, 1~2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데, 그러고 나면, 당신이 책 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주어지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그런 부류의 작가다. 하루키와 김연수라니, 어쩐지 공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의 국가 경쟁력이랄까, 뭐 그런 차원에서 말이다. 이제는 하루키의 문장으로 카버를 읽는 일본 독자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7. 12. 27.

P.S. 지난 학기에 카버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원서도 한권 구했는데, 내가 소장본으로 고른 단편선집은 <대성당>이 아니라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다. 말 그대로 '선집'이기 때문에 <대성당>에 실린 작품들도 다수가 포함돼 있고, 이전에 묶이지 않은 신작들까지 해서 모두 37편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 <대성당>보다도 더 좋아하게 된 작품이 표제작인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어서 특히나 이 선집에 애착을 갖게 된다(김연수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대성당>은 1982년판 <전미 최우수 단편소설>에 수록된 바 있고,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1983년판 같은 모음집에 실렸다).

작품집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은 체호프의 임종 장면을 다룬 단편 <심부름(Errand)>이다. 나는 이 작품이 카버의 '문학적 유언'이라고까지 생각하며, 체호프의 마지막 단편들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더랬다(가령, 내가 체호프의 '문학적 유언'이라고 생각하는 <주교> 같은 작품). 물론 그런 욕심을 버리더라도 카버의 단편들을 음미하는 일에 지장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음악을 듣듯이 새로운 번역본의 문장들을 원서와 대조해가며 중얼거리는 일은 이 겨울의 한 가지 즐거움이다. 가끔 이렇게 읊조리면서 말이다. "It's really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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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7 20:59   좋아요 0 | URL
저는 집사재에서 나온 전집으로 세 권 갖고 있는데 김연수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지네요.

로쟈 2007-12-27 23:01   좋아요 0 | URL
말하자면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의 판으로 듣는 것이죠. 애서가들은.^^

2007-12-27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7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oni 2007-12-28 22:48   좋아요 0 | URL
아, 전 카버는 이상할 정도로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 글을 보고 결국 장바구니를 열고 맙니다.

로쟈 2007-12-28 22:59   좋아요 0 | URL
물론 '아메리칸' 작가라는 건 고려해야겠지만(그러니까 문화적 차이/거리는 있는 것이죠), 군더더기 없는 문체의 몇몇 단편들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시골사람 2007-12-29 01:50   좋아요 0 | URL
그 몇몇의 단편이 그 누군가의 소설쓰기에 강도 7 정도의 지진파 역할을 했지요. 레이먼드 카버...어느 날 그 누군가의 삶에 화락 뛰어든 먼 나라 사람 중 한 명. 음음...고맙습니다. 이 늦은 밤 그를 죄다 책장에서 뽑아 제 책상 위에서 되살렸습니다.

로쟈 2007-12-29 10:13   좋아요 0 | URL
알게모르게 애독자들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