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프란츠 파농 읽기'란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오늘이 그의 기일이라고 한다.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에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를 다루게 된 연유이다. 우연찮게도 엊그제 책의 영역본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타이밍을 잘 맞춘 듯하다. 파농은 개인의 행방으로서의 '존재의 탈식민화'도 역설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탈식민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고 당위이다.    

한국일보(오07. 12. 06) [오늘의 책<12월 6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태생의 흑인 정신과 의사로 알제리 독립투쟁을 이끈 혁명가였던 프란츠 파농이 1961년 12월 6일 36세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 삶과 사상은 20세기 후반 세계의 민권 운동과 탈식민주의 운동, 흑인 운동의 길잡이였다.

파농, 하면 떠오르는 책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1961)이다. 한국에서는 당초 1979년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로, '사람'과 '자(者)'라는 단어 하나 차이지만 한층 선명한 제목으로, 번역됐었다. 서구 제국주의ㆍ식민주의가 제3세계에 가하는 야만적 폭력, 물리적 폭력은 물론 인간을 사물화시키는 경제적ㆍ문화적 폭력을 정신병리학자의 임상체험을 통해 고발하고 탈식민화를 위한 '정화'로서의 혁명적 폭력을 역설한 파농이즘이 담긴 이 책은 한국 젊은이들의 필독서가 됐다.

이 책에 장문의 서문을 쓴 사르트르는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파농을 통해서였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식민지나 제3세계,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말들이 낡아빠진 것으로 여겨지는 지금, 파농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2002년 프랑스어판 서문을 쓴 알리스 셰르키(파농과 함께 알제리 독립투쟁에 참여한 여성 정신분석학자)는 이렇게 묻고 답하고 있다. "이 책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책이 지금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파농의 삶과 사상은 여전한 현재적 가치를 갖는다.

이데올로기의 몰락이라 일컬어지는 시대를 넘어서, 지금처럼 경제의 세계화와 주체의 상실이 지배하는 시대에, 젊은 시절 파농이 외친 한 마디, 요컨대 그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끌어간 한 마디, '내 몸이여, 나를 언제나 의문을 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오!'라는 절규는 오늘날에도 많은 젊은이들의 정신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언어와 출신지의 경계를 넘어서!"(하종오기자)

07. 1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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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12-06 08:31   좋아요 0 | URL
전 올해 마음의 길잡이를 못 찾아 헤맬 때 파농을 다시 읽었어요. 난 알리스 셰르키의 서문은 오히려 사족이라고 봐요. 여전히 가슴 떨리는 건 파농, 그리고 사르트르죠.

로쟈 2007-12-06 12:32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이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 유감스럽습니다...
 

'박사 난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얘기다. 기사를 읽어보니 어쩌면 우리도 곧 그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소위 '대학원 육성'이니 '대학원 중심 대학'이니 하는 구호들의 공허한 귀결이 '박사 난민'들의 '박사 알바' 아닐까? 남의 일 같지 않은 노릇이다.

한겨레(07. 12. 04) 일본 ‘박사 난민’ 사회문제로 편의점·술집 ‘박사 알바’ 수두룩

일본에서 ‘박사 난민’이 넘쳐나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대학원에서 어렵게 공부해 박사학위를 따고도 일정한 직장을 잡지 못하고 시간강사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이른바 ‘프리터 박사’가 전국적으로 1만2천명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 10월20일 출판된 <고학력 워킹푸어-‘프리터 생산공장’으로서의 대학원>(저자 미즈키 쇼도)은 발매 두 달도 못돼 5만5천부의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박사 난민의 실태를 드러내는 기폭제가 됐다.

2004년 규슈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리츠메이칸대학 연구원 겸 시간강사’인 저자 미즈키(40)도 1년 계약이 끝나는 내년 봄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신분이다. 그는 <도쿄신문>과 인터뷰에서 “독신이어서 겨우 먹고 살수 있는 정도이다”며 “그나마 시간강사라는 직업이 있으니까 상당히 나은 편이다”라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여성 박사(33)는 대학 시간강사 외에도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면 월 15만엔을 벌어 생활비로 충당하고 있다. 선술집 알바나 학원강사를 겹치기로 뛰면서 ‘파친코 프로’가 된 박사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박사과정 수료자는 과거 최다인 1만596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사망·소재불명자’가 9.2%인 1471명에 이른다는 놀라운 통계결과도 있다. 미즈키는 “우수했던 여성 친구는 어느날 갑자기 연구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 담당교수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을 몇 명이나 알고 있다. 심신에 어딘가 병이 든 사람이 많다. 집안에 틀어박힌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박사 1인당을 키우는 데 1억~1억5천만엔의 비싼 국비가 투입되는 점을 고려하면 본인이나 국가나 막대한 손실이다.

박사난민 양산에는 무계획적인 대학원 중점화 정책이 있다는 지적이다. 1991년 당시 문부성이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연구의 진척’으로서 대학원 강화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도쿄대를 비롯해 많은 대학이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지 않은 학생이나 미취업으로 고민하는 학생에게 앞다투어 적극적으로 대학원 진학을 권했다.

1985년 약 7만명이었던 대학원생이 단 20년여만에 두 배가 넘는 16만명으로 부풀어 올랐다. 일본 대학들은 저출산으로 인한 대학진학자 감소를 대학원 진학 증가로 만회한 셈이다. 문부과학성은 넘쳐나는 박사 대책으로 박사학위 취득 이후 대학 등 연구기관에 3~5년간 적을 두고 장려금 등을 받는 ‘포스트 닥터’를 실시하고 있으나 이도 올해 1만5천명이 넘을 정도로 포화상태이다.(도쿄/김도형 특파원)

07. 12. 04.

P.S. 이공계는 사정이 다른가? 대학원 육성/강화로 고급 두뇌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칼럼도 옮겨놓는다.

매일경제(07. 12. 04) 인재강국으로 가는 길

한국은 고급 두뇌 확보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18세 이상 인구 대비 이공계 박사 비중은 유럽연합(EU) 주요 국가가 0.6%인데, 한국은 0.4%에 불과하다. 바이오, 나노 등 미래 유망 산업을 주도할 이학박사 배출 수는 미국에 비해 7%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하다. 한국 대학에서 이공계 박사가 100명 나올 때 미국 대학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수가 27.3명이다. 일본 독일 등이 한두 명인 것에 비하면 너무 많은 수다. 그나마 이들 중 절반 가까이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아 고급 두뇌의 외국 유출은 엄청나다. 외국인 근로자 중 전문 인력 비중은 7.6%로 미국 영국 등 선진국 30~40%와 비교할 때 고급 두뇌의 국내 유치는 형편없다.

한국의 고급 두뇌 문제는 정부와 대학의 공급자 주도 정책에 주로 기인한다. 산업화 시대에 적합한 범용 인재 중심의 양산 정책에만 매달리면서 대학의 질적 경쟁력은 약화되었고, 이공계 인력의 시장 가치 저하, 고급 두뇌 이탈 등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 교육열이 높고 이공계 인력의 잠재적 풀(Pool)도 충분해 적절한 유인책과 대학의 질적 경쟁력만 확보되면 고급 두뇌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첫째, 세계적 수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연구중심대학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일찍부터 대학원을 고급 두뇌 산실로 인식한 선진국은 대학원 위주의 연구중심대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전체 대학 중 5%인 연구중심대학이 정부지원 연구비 90% 정도를 가져가고, 과학기술 분야 박사 90% 이상을 배출한다. 특히 최고 교수 확보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세계적 교수 한 명은 탁월한 연구 성과를 창출하는 것 외에도 고급 두뇌를 끌어 모으는 집적지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공계 교육 품질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현재 중ㆍ고교 과정 수학ㆍ과학 교육이 시원찮아 대학에서 애를 먹고 있다. 대학의 학부 전공 교육도 부실하여 대학원에서 하는 연구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미국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수학ㆍ과학 교육에 대한 로드맵을 새로 짜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도 서둘러야 한다.

셋째, 잠재적 고급 두뇌들에게 다양한 진로 기회와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미래는 과학기술 기반 사회이기 때문에 이공계 직업 분야 전망이 밝다. 미국은 2014년까지 10대 직업군 중 7개에서 이공계 인력이 핵심을 담당한다고 한다. 이들 직업 성장률은 26%로 평균 15%보다 훨씬 높다. 전통적인 엔지니어링뿐만 아니라 금융공학, U-비즈니스, 디자인, 엔터테인먼트, 특허ㆍ표준 등 창조적 전문 직업 분야에서도 이공계 인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정부와 대학은 다양한 전문대학원 설립, 외국 우수대학과 프로그램 제휴 등을 통해 이공계 인력의 다양한 진로 선택을 활성화해야 한다.

넷째, 의학 인력의 적극적인 활용 가능성도 주목해야 한다. 미래 유망 산업은 의학과 관련된 것이 많다. 바이오, 의료기기, 신약 개발, 의료 서비스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 분야는 의학만으로 되지 않는다. 이학, 공학, 의학이 협업을 해야 한다. 인재가 의학계로 진출하는 것은 시장논리여서 어쩔 수 없다면 이제는 의학인력과 협업을 통해 미래 산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다섯째, 이미 육성된 국내외 고급 두뇌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 한국은 박사급 연구 인력 중 70% 정도가 대학에 편중돼 있다. 이들이 학교 바깥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지역과 산업에 실제적인 기여를 하도록 해야 한다. 대학은 지역과 산업에 적합한 실용적 연구를, 기업은 연구 결과에 대한 상업화를, 지역은 이들에 대해 체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국내 고급 두뇌 부족분은 세계적 연구소와 연합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네트워킹을 통해 보충하는 길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국외 R&D 거점 마련을 통해 현지 고급 두뇌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고급 두뇌 확보는 정부와 대학만의 일이 아니다. 고급 두뇌를 필요로 하는 기업도 힘을 보태야 한다. 기업은 고급 두뇌 요건을 대학에 구체적으로 주문하고 재정을 비롯한 실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 총 고용 인력 중 16.8%에 불과한 과학 기술 인력 고용 비중을 선진국 수준인 30%로 끌어올리는 등 과학기술 인력 활용(고용)을 책임져 주어야 한다.(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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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7-12-04 22:29   좋아요 0 | URL
저는 지난주에 대학원 합격하고서 세상 물정 모르고 좋아하고 있었네요... 어째 만만찮은 앞날을 예견하는 듯합니다.^^;

로쟈 2007-12-04 22:31   좋아요 0 | URL
ㅎㅎ 축하합니다. 축하할 일인가는 더 생각해봅시다.^^;

sweetmagic 2007-12-05 01:32   좋아요 0 | URL
박사난민 ㅋㅋㅋ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통감합니다.
심신의 어딘가에 병이 생긴다는 말에서는 ..........더 할말도 없습니다요.

로쟈 2007-12-05 08:37   좋아요 0 | URL
자살도 합니다.--;

순오기 2007-12-05 03:56   좋아요 0 | URL
우리도 곧 이렇게 될거라는 위기감이 확~ 느껴집니다.
박사난민보다 박사알바라는 말이 더 피부에 와 닿네요ㅠㅠ

로쟈 2007-12-05 08:37   좋아요 0 | URL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릴케 현상 2007-12-05 11:01   좋아요 0 | URL
석사는 괜찮은거죠^^ 전 2학기까지 마쳐야 '중퇴'로 쳐준대서 버티고 있어요 ㅋ

로쟈 2007-12-06 00:12   좋아요 0 | URL
석사는 사정이 좀 낫겠습니다. 돈이 덜 들어갔으니...

비연 2007-12-05 13:46   좋아요 0 | URL
남의 일이 아니네요..흑흑.

로쟈 2007-12-06 00:13   좋아요 0 | URL
난민공동체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사량 2007-12-05 23:01   좋아요 0 | URL
저런 책이 '5만 5천부'나 팔리는 나라라면 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정말 아무런 대책 없는 한국에 비하면...-_-;

로쟈 2007-12-06 00:14   좋아요 1 | URL
번역돼 나오면 박사들 호주머니깨나 털어먹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7-12-06 12:08   좋아요 0 | URL
어딜가도 이런 소리는 있는 듯 하네요. 의사 선배들도 요즘에 학교 와서 단골 메뉴로 하는 말이 앞으로 의사 수가 '폭증'해서 먹고 살기 힘들 거라고 하던데요.

로쟈 2007-12-06 12:30   좋아요 0 | URL
사실 의사, 변호사야 이전에 너무 많이 '먹었던' 것이죠...
 

폭력의 문제와 관련하여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뒤적이다가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폭력의 철학-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07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7년 12월 04일에 저장
품절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7년 12월 04일에 저장
구판절판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2007년 12월 04일에 저장
구판절판
나는 내가 아니다- 프란츠 파농 평전
패트릭 엘렌 지음, 곽명단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1년 9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07년 12월 04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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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http://weekly.changbi.com/blog_post_192.aspx). 내가 주문받은 것은 '인문서 번역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일이었고 마침 최근 출간된 <번역비평>을 읽고 있었기에 그걸 실마리 삼아 몇 자 적은 글이다. 새삼스럽지 않은 얘기를 '진지하게' 늘어놓아 멋쩍긴 하다. 그리고 최종원고를 보낸 지 한 시간만에 글이 올라와 놀랍기도 하고(!). 

창비주간논평(07. 12. 04) 한국의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최근에 나온 《번역비평》(고려대학교출판부) 창간호를 흥미롭게 읽었다. 작년에 발족한 한국번역비평학회의 연간 학술지이다. 지난 10월 영미문학연구회의 정기학술대회에서도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라는 주제가 다뤄진 걸 보면, 번역에 대한 한국 지식사회의 문제의식은 어느 때보다도 널리 공유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인터넷을 통해 활성화된 번역비평과 작년에 불거진 대리번역 파문 등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비평》과 학술대회 발표문들을 읽으며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우려할 만한 번역현실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박상익 교수가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통해서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한 바 있다. 그대로 옮겨보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번역에 적대적인 한국현실

이러한 현실이 끌어안고 있는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은 번역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팎의 문제들이다. 일부에서는 오역 집어내기에만 열중하는 번역비평의 비생산성을 꼬집기도 하지만, 사실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라고 할 때 '오역'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대부분 무지와 무성의에서 비롯된 단순오역들이다. 가령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를 서로 바꿔 옮긴다거나 라깡의 '대학담론'(discourse of University)을 '우주에 대한 강좌'로 옮기는 식이라면 독자의 '좌절과 환멸'은 불가피하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혹은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란 '고상한' 번역학적 논란이 우리의 현실에 잘 부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번역 텍스트의 문제라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러한 번역을 양산해내는 번역의 컨텍스트 문제이다. 그래서 《번역비평》에서도 특히 공감하며 읽은 글들은 '번역출판과 현장'의 목소리들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번역이 중요하다 말하지 말라"라고 일갈한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말을 빌리면,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며, 서평의 제도와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며,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 및 이용의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고, 번역의 지형도가 번역에 적대적이고, 학문 제도와 구조가 번역에 적대적"인 현실이 문제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번역과 번역자가 처한 상황이다. 이만하면 총체적으로 적대적인 상황 아닌가? 



인색한 번역료, 척박한 서평문화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란 사실은 인문서 번역의 경우 더욱 실제적이다. 표정훈은 매절번역료 원고지 1매당 4,000원 혹은 인세율 5%를 기준으로 번역료 수입을 계산했지만, 요즘 인문서 번역의 대세인 인세계약을 기준으로 하면 저작권이 있는 도서의 경우 보통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치는 6~8%이다. 정가 20,000원인 책 2,000부를 초판으로 찍는다고 할 때, 역자의 손에 떨어질 수 있는 최대 수입은 240~320만원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인문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고급인력'이 최소한 두세 달을 꼬박 투자하여 얻을 수 있는 수익으로서는 결코 내세울 만한 수준이 못된다. 게다가 고급 인문서의 독자층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는 현실은 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생계를 박차고 '불만의 번역자'를 자처하고 나설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물론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동서양명저 번역사업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이 사업에 배정되는 1년 예산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채 값에 불과하다. '언 발에 오줌 누기'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번역서 서평문화도 척박하긴 마찬가지다. 표정훈의 비교에 따르면, 북리뷰의 프론트면의 서평 양에서 《뉴욕타임즈》가 국내 신문보다 3배 많다. 이런 서평란이 《뉴욕타임즈》에서는 30~40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반해서, 국내 주요 신문은 5~8면이다. 게다가 씨스템상으로 책을 꼼꼼히 읽고 평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양산되는 국내의 서평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한국출판인회의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같은 유관기관에서 문제가 많은 오역서를 '이달의 책'으로 선정하는 코미디가 간혹 벌어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문과 달리 서평은 학술업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학술·교양서적이 번역되어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이 관련 학술지에서조차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다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적인' 인간관계가 고려되는 탓에 실질적인 '번역비평'이 이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돈독한 인간관계 속에서 번역문화만 낙후돼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번역문화'라면 과연 어떻게 개선해가야 할 것인가?



한권의 번역서를 책임진다는 자세로

'가난한' 번역자들이 자주 겪는 것이지만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 이용의 편익을 최대한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해봄직하다. 하지만 고전 번역서들의 번역이 아직 미흡하여 '지식의 지형도'를 제대로 그려볼 수 없다는 불만은 인과응보이기에, 현재로선 감수하는 수밖에 없겠다. 단, 지금 세대가 여전히 필요한 번역에 손을 놓는다면 그러한 불만을 다음 세대에까지 또 물려주는 도리밖에 없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하지만 인문학자나 인문학도 들이 저마다 한권의 번역서는 책임진다는 각오로 발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바닥에 땀을 좀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발족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우리의 고전과 각종 관찬사료 들의 번역을 체계적으로 추진한다고 하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고전문헌 가운데 우선적으로 6,400여 책을 번역자를 양성해가며 다 번역하려면 4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한다. 2003년에 창립된 한국키케로학회에서 30권으로 기획하고 있는 키케로전집 번역에는 50년이 소요될 예정이라고 한다. 각 학회나 전공분야에서 그 정도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향후 반세기 정도 혼신의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일찍이 '번역대국'의 길에 들어선 일본과의 격차를 좀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번역의 컨텍스트를 바꿔나가야

물론 열정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다. "번역이 힘든 건데, 그럼 일본어·영어로 읽으면 쉽지 않은가?" 혹은 "앞으로 100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라는 인식과 판단이 한국어 번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태도가 된다면, 인문고전 번역의 미래는 없다. 이미 자연과학에서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인문학에서도 한국어는 변방의 언어, 기지촌의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과연 인문학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국적을 갖지 않는 것일까?).

대학강단에서도 영어가 공용어로 '강요'되고 있는 징후적인 현실은 분명 번역에 그리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미래상이 아니라면, 번역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며 번역업적의 평가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학계의 제도와 관행을 이제부터라도 바꾸어야 한다. 대학원생들에게 과제로 제출받은 원고를 짜깁기하여 교수 이름으로 내던 관행부터 타파되어야 하는 것이다(이런 관행에 익숙한 이들이 번역을 학술업적으로 인정할 리는 없지 않은가?).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도 독자들의 좌절과 환멸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는 시험에 계속 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현실이어야 할까.

07.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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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05 21:27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황해문화(09년 여름호)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번역현실에 대한 고민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
 
 
소경 2007-12-0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원에 읽다 흥미가 달아 올랐는데, 막상 댓글 적으려 하니 사그라져 버리는 군요 ^^:;

로쟈 2007-12-04 21:40   좋아요 0 | URL
그냥 '상식'을 확인하면서 행동을 촉구하는 글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사량 2007-12-0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비평>이 알라딘 책 소개에는 계간지라고 나오는데, 로쟈님은 연간지라고 말씀하시네요. 어느 쪽이 정확한가요?

로쟈 2007-12-04 21:39   좋아요 0 | URL
책에 연간지라고 돼 있습니다. 학술지가 계간지로 나오긴 힘들 것 같고, 그래도 영향력이 있으려면 반년간지도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7-12-04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4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lapphappy 2007-12-05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번역하신 인문서를 알려주세요.

로쟈 2007-12-05 08:36   좋아요 0 | URL
저도 몇 권을 하고는 있습니다.^^;

누에 2007-12-2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괜찮은 번역어 사전은 없으려나요.

로쟈 2007-12-28 21:58   좋아요 0 | URL
'번역어사전'이란 건 어떤 걸 말씀하시나요? 번역학 용어사전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안 나와 있는 거 같습니다(통역사전 같은 건 있고요)...

누에 2007-12-29 17:54   좋아요 0 | URL
철학이나 정신분석 등의 번역서에서 역자들이 택한 번역어들에 대해서 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서 말이죠...

로쟈 2007-12-29 18:23   좋아요 0 | URL
그건 책마다, 철학자마다 다를 거 같은데요. 요즘은 그런 책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말미에 번역용어 해제와 대조표들이 덧붙여진다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가명 2019-12-0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상황이 변화했나요 문외한이 여쭙습니다

로쟈 2019-12-0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황파악이 정확히 안되지만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쓴 시 한 편을 또 옮겨놓는다. 아마 20대 중반이나 끄트머리쯤에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사실 시라는 건 핑계이고 순전히 마지막 구절 때문에 쓴 것이다. 한때 '탱자 가라사대' 같은 개그 코너도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곁다리로 떠올려본다. 

  

탱자나무 옆에서

탱자나무는 말이죠, 운향과에 딸린 갈잎 넓은 잎의 작은큰키나무라는군요. 작은큰키라는 것이 탱자나무가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탱자나무가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탱자나무의 줄기는 높이 2m쯤이고 녹색이며 모가 지고 5cm가량 푸른 가시가 나있다는군요. 그러고도 사전에는 몇 줄이 더 씌어 있는데요, 탱자나무는 5월에 잎보다 먼저 흰 다섯잎꽃이 잎사귀에서 하나씩 피고요, 가을에 직경 3-5cm의 둥근 장과가 노랗게 익는데, 향기가 난다는군요(아마 탱자향일 테지요). 그리고 또 탱자나무는 말이죠, 울타리 대용으로 흔히 심고요, 탱자나무의 열매는 약재로도 쓰고요, 또 탱자나무는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에서 가꾼다고 하는군요(그리고 옆에 탱자나무가 그려져 있어요). 이것이 말하자면 탱자나무 일반에 관한 사전적인 지식인데요, 사실 이런 거야 아실 만한 분은 두루 아실 얘기가 아닐까요. 또 어지간한 국어사전이나 식물사전에서 ‘탱자-나무’를 찾으면 무척이나 자세하게도 설명되어 있을 텐데요, 그래, 왜 이런 자리에서 탱탱거리느냐고 불만이 많으시다면, 그저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왜 하필, “탱자나무 옆에서 울었단다”는 말이, 그렇게도, 제 마음을, 울리는 것인지요?

07. 12. 04.

P.S. 옮겨놓고 보니 초겨울에 어인 탱자 타령인가 싶다. '탱자'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또다른 시제(詩題)는 '탱자탱자'이다. 그게 어원적으로 '탱자'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차라리 이 계절과는 맞는 듯도 싶다. 더불어 탱자나무 옆에서 우는 팔자와 탱자탱자하는 팔자가 사뭇 대조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말하건대, '맨손'과 '맨션'이 있는 것처럼 세상엔 '탱자'와 '탱자탱자'가 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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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4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4 08:2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수유 2007-12-0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서 탱자탱자 해야 할텐데...언제나 오려나..요.

로쟈 2007-12-04 13:33   좋아요 0 | URL
금방일 텐데요.^^

2007-12-04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4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