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콜리니코프 '두 모녀'를 살해하다'의 자투리 글로 쓰다가 분량이 길어져서 따로 자리를 만든다. 외국어 표기에 관한 것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러시아어 '라스콜리니코프(Раскольников)'를 영어로 음역한 표기는 'Raskolnikov'이다. 여기서 [l(ль)]'이 연음이기 때문에(구개음화된 [l]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l']이라고 표기하지만 보통은 경음 과 구별없이 [l(л)]로 표기한다.

해서 우리말로 적을 때도 '라스콜코프'라고 적어야겠지만(나도 그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이 경우 우리말에서는 자음동화가 일어나서 '라스콜코프'로 발음하게 된다. 짐작에는 그렇게 되면 어차피 원음과는 차이기 있기 때문에 연음 [l]을 'ㄹ'이 아니라 '리'로 옮기던 관행이 이 경우에는 계속 남아서 '라스콜리니코프'로 굳어졌다(나도 동의하는 표기이다). 역시나 같은 연음 [l]이 쓰인 '고골리(Gogol)'의 경우 '고골'로 표기가 바뀐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고리키(Gorky)'의 경우는 계속 '고리키'라고 표기한다(언젠가 국문과 대학원생이 찾아와서 고리키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다고 문의를 해온 적이 있는데, 짐작에 그는 'Gorky'가 아니라 'Goriky'를 검색했다). 경음 표기를 선호하는 전공자들은 '라스꼴리니꼬프'라고 적는다. 이런 단편적인 사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외국어 표기 원칙이란 어느 정도 관행을 존중하고 임시변통을 허용하는 수밖에 없다. 즉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융통성있게 적용해야 된다는 말이다.  

개정된 표기안에 따라 '도스토예프스키' 혹은 '도스또예프스끼'로 표기돼 오던 'Достоевский(Dostoevsky)'는 '도스토옙스키'라고 표기되고 있다(알라딘에서도 표제어를 그렇게 잡고 있다). 이 경우 '도스또옙스끼'라는 이형까지 가능해지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네 가지 표기가 혼용되는 수밖에 없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아직 러시아어 표기에까지는 주의를 두지 않아서 그냥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표기한 경우이다(언론이나 출판물에서 아직 '도스토예프스키'와 '도스토옙스키'가 혼용되고 있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의 6장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다루고 있는데, 'Rushdie'는 예전에 '루시디'로 통용됐던 이름이다. 즉 국내에 번역돼 있는 <악마의 시>는 '루슈디'가 아니라 '루시디'의 작품이다('루슈디'란 표기는 내가 알기에 <분노>에서부터 등장했다). 'sh'를 [시]가 아니라 [슈]로 표기하는 걸 새로운 원칙으로 정한 탓이겠다(그리고 이를 관행과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적용한 것이고).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어 표기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 가령 '푸슈킨'으로 표기돼오던 'Пушкин(Pushkin)'의 경우 개정 표기법에 따르면 '푸시킨'으로 표기되어야 한다(물론 'Pushkin'은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다양하게 표기돼 왔었다). 'sh'를 [슈]가 아니라 [시]로 읽도록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해서 똑같은 'sh'가 나오더라도 이게 영어인지 러시아어인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읽어주어야 한다(원래 발음은 별 차이가 없다).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이 '에이젠시테인'으로, 문학이론가 '슈클로프스키'가 '시클롭스키'로 표기되는 건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바뀐 이름들로 검색되는 책은 아직 한권도 없다.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기에 '에이젠슈테인'과 슈클로프스키'를 고수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선집까지 나오고 있지만 일부 언론의 공식 표기는 '발터 베냐민'이다. 심지어는 '월터 베냐민'이라고 표기된 적도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쓴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429974 참조). '베냐민'으로 검색되는 책은 역시나 한권도 없다. 이 정도면 좀 우스운 원칙 아닌가? 한글로 외국어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원칙은 가능하지 않다. 그저 근접하게 표기해주면서 우리말에서의 혼동/혼선을 피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프랑스 작가 'Balzac'을 왜 '발작'이 아니라 '발자크'라고 표기하겠는가?). '원칙'을 자주 바꿔가면서(외국어 표기안은 여러 차례 개정돼 왔다) '원칙주의'를 고집하는 건 보기에 흉하다...  

08.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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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나. 월터 베냐민이 누군가요? ㅋㅋㅋㅋ

로쟈 2008-01-07 19:33   좋아요 0 | URL
실수라고 보야겠죠. 한데 '베냐민'이라고 교정돼 있어서 좀 코믹한 효과를 유발하지만...

와넬 2008-01-07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르스타인 베블렌이냐 소스타인 베블렌이냐 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군요.

로쟈 2008-01-07 23:22   좋아요 0 | URL
그 경우는 모로 가든 '베블렌'이니까요. 고유명사 표기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이면서 해법이 잘 보이지도 않는 난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