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평론가이자 책 수집가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르네상스, 2007)는 지난 연말에 소개하기도 했고(http://blog.aladin.co.kr/mramor/1753545) 또 구입해서 처음 몇 장을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20개 장 중에서 6장까지를 읽었다). 한동안 제쳐두어다가 우연히 펼쳐든 책에서 또 '특이한' 대목이 눈에 띄기에 교정해둔다(사실 이런 핑계로 페이퍼를 쓰다간 교정으로만 공치는 날들이 부지기수일 듯하다).
책의 7장은 존 케네디 툴(John Kennedy Toole; 1937-1969)이란 작가의 소설 <바보들의 연합(A Confederacy of Dunces)>을 다루고 있는데, 작가와 작품 모두 생소하기 짝이 없다. 한데 게코스키에 따르면 작가는 이 소설 한 권으로 "미국 남부 출신의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이다." 그 '켄 툴'(그의 애칭)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거릿 미첼이나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 등이라고 하니 그의 지명도를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아래 표지를 보니 소설은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다만, 차이라면 미첼이나 리와는 달리 "툴은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는 것. "대작이라 자신하는 원고를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하자, 낙담에 끝에 1969년에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124쪽) 그래서 그는 흔히 "위대한 유작 하나만을 내놓은 작가"로 기억되곤 한다고(실제로는 놀랄 만한 양의 미출간 원고들을 쌓아놓고 있었다고 한다).
전혀 뜻밖인 건 그의 책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는 점. '존 케네디 툴르'의 <조롱>(사람과책, 1995)이 그 문제의 책이다. 한술 더 떠서 <별을 좇아가는 길>(말과뜻, 1997)이란 책도 출간돼 있고(<조롱>은 도서관에서 대출해볼 수 있겠다). 짐작엔 '퓰리처상'이란 타이틀에 기대를 걸었던 듯한데, 독자들의 반응은 썰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충분히 다시 소개됨 직한 작품으로 보인다. 표지에서도 이미 짐작해볼 수 있지만 퓰리처상 수상 이후에 쏟아진 한 서평은 "가격 대비 웃음량으로 판단한다면 최대 할인을 감행한 올해의 작품은 <바보들의 연합>이다."라고 써놓았을 정도. 18개 언어로 소개되어 15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하니까 세계적인 밀리언셀러이기도 하고(한데, 어째서 한국 독자들에겐 외면 받았던 것일까?).
켄 툴에 대해서는 책이나 읽게 되면 더 늘어놓기로 하고,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구절을 옮겨본다: "일반적으로 어떤 인물을 깊숙이 알게 되면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동정심에 이르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알료나 이바노프바 노파의 아파트에서 두 모녀를 살해하고는 문 뒤에서 공포에 전율한다. 이 장면에서 독자 역시 수치를 느끼면서도 동정을 머금게 된다."(125쪽)
두 가지 오류가 있다. 먼저, 전당포 노파의 이름은 '알료나 이바노프바'가 아니라 '알료나 이바노브나'이다. 이게 저자인 게코스키의 오기인지 역자의 오타인지 모르겠지만(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정도면 타이핑상의 문제로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한데, 두번째 오류는 좀 심각한다. '두 모녀'를 살해했다니? 알다시피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로 살해한 사람은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그녀의 이복 여동생 리자베타이다. 그러니까 '모녀'가 아니라 '자매'이다(저자가 엉뚱하게 적어놓았을 리는 없겠고, 역자가 어떤 단어를 옮긴 것인지 궁금해진다).
<죄와 벌>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의 경우에도 이런 오기/오역이 가능하다는 게 아무튼 좀 의외다. 덕분에 관련자료를 뒤적이다가 알게 된 것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새로운 버전의 <죄와 벌>이 방송을 탔다. 보아하니 국영인 '제1채널'에서 제작한 것인 듯하다(아마도 TV 시리즈물일 것이다). 아래는 1969년작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새로운 라스콜리니코프의 얼굴이다.
이 영화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두 자매를 살해하는 장면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데(http://www.youtube.com/watch?v=BC682qfVvB4), 원작에 아주 충실하게, 그러니까 아주 잔혹하게 묘사돼 있다(임산부나 노약자는 보지 마시길). 짤막한 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TAtwZ033Rtw 참조. 마르멜라도프와 소냐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
한데, 이번 <죄와 벌>의 배역들 가운데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배우는 라스콜리니코프도 아니고 소냐도 아니다. 좀 뜻밖이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 풀헤리야 라스콜리니코바이다. 러시아의 국민배우 엘레나 야코블레바가 맡은 배역이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오래전 <인터걸>(1989)의 주연으로 알려진 배우이다). 한 인터뷰 기사를 보니 안제이 바이다가 연출했던 연극 <악령>에서도 레뱌드키나 역으로 출연한 인연이 있다고(이 연극은 2004년에 초연됐을 때 나도 봤는데!). 오랜만에 낯익은 얼굴을 보니 반갑다...
08. 01.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