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어 글쓰기에 대한 김윤식 교수의 저작들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다음 학기 강의 아이템 중의 하나여서 겨울방학에 좀 읽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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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
김윤식 지음 / 문학사상사 / 2005년 4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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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광수의 일어 창작 및 산문
김윤식 지음 / 역락 / 2007년 11월
10,000원 → 9,500원(5%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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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김윤식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3년 8월
17,000원 → 17,000원(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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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김윤식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년 6월
15,000원 → 15,000원(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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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0 03:47   좋아요 0 | URL
이중어 글쓰기를 둘러싼 김윤식 선생의 최근 연구는, 로쟈님께서 올려주신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과 <해방공간 한국 작가의 민족문학 글쓰기론> 두 권을 정점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을 본 감이 있으나, 이와 관련해 몇 권의 책들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신론>(서울대학교출판부, 2001)이 가장 먼저 추가되어야 할 듯한데요, 이 책의 1부 1장(한국 근대문학사의 두 시각)과 2장(한일 이중어 글쓰기의 역사성), 2부 1장(조선 작가의 일어 창작에 대한 한 고찰) 등이 특히 '요주의 대상'이라는 생각입니다. 덧붙여, 김윤식 선생이 오래 품은 주제 중의 하나인ㅡ따라서 선생의 여러 책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ㅡ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와 임화(林和) 사이의 '주고받기' 형식에 대한 연구 또한 이중어 글쓰기라는 문제 지형 안에서 빠트려서는 안 될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영어, 독어로 씌어진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다루고 있는 <발견으로서의 한국 현대문학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의 4부 7장, 그리고 민족어와 인공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한국 근대문학 연구 방법 입문>(서울대학교출판부, 1999)의 6, 7장 또한 이와 관련하여 덧붙여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미 거의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을 통해 소화된 내용이지만, <김윤식 선집 7>(솔, 2005)도 이중어 글쓰기와 관련해서 갈무리해 두어야 할 책으로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중어 글쓰기의 문제에 있어서 김사량만큼 문제적이고 매력적인 작가를 만나보지 못한 듯합니다. 김사량의 작품에는 항상 한 번 더 시선을 주게 되고 왠지 짠한 '공감'의 감정들을 느끼게 되곤 합니다. 이중어 글쓰기와 관련된 강의를 하신다니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기회가 되면 '도강'을 하고 싶은 생각을 품게 됩니다.^^

로쟈 2007-12-10 08:23   좋아요 0 | URL
도강은 제가 해야겠습니다.^^ 사실은 '한국문학과 디아스포라'란 주제를 떠올리다가 우연히 '이중어 글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됐습니다. '글쓰기론'이란 타이틀의 책들을 우선적으로 올리다 보니 몇 권은 빠뜨리게 됐는데, 덕분에 챙겨둡니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알라디너들에게 (적어도 페이퍼상으로는) 가장 각광을 받은 책은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인 듯하다(국내에선 '무프'라고도 표기돼 왔다). 작년에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을 읽으면서 이 책의 원서 또한 복사해둔 것 같아 기억을 돌이켜보았지만 어느 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순서로 치자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후속작이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아무려나 (뒤늦게라도) 정치의 계절에 나온 주요한 이론서로서 꼽아둘 만하다. 한겨레의 리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35.html)가 가장 자세하므로 참조해볼 수 있겠고 여기서는 무페 읽기의 리스트를 추려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역시 한겨레의 기사를 참조하여 몇 마디 덧붙인다.

한겨례(07. 12. 08)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접점을 찾다

샹탈 무페는 1990년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한국어판 제목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정치철학자다. 그의 지적 동업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써 1985년에 출간한 이 책에서 무페는 자신의 새로운 민주주의 전략을 처음 제출했다. 그 전까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자신의 이론을 구상했던 무페는 이 책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사실상 결별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가라는 호칭은 이때 붙여졌다. 그의 새 민주주의 전략은 ‘급진적이고 다원주의적인 민주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무페와 라클라우는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받아들였다(*이 책에 대한 수요가 있음에도 다시 출간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언급은 '라클라우-라캉-지젝'(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4)을 참조). 두 사람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이 다양한 사회적 대립를 구성하는 하나의 층위일 뿐이며, 사회에는 다양한 투쟁들이 경합하고 있음을 포착했다. 이 경합하는 투쟁들을 일시적이고 불안정하지만 공동전선으로 모을 수 있는데, 그 공동전선을 구성하는 담론적 힘이 헤게모니다.

이 책에 이어 나온 것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인데, 여기서 무페는 민주주의의 갈등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그 불확정적인 긴장 속에서 경제적 평등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민주사회주의’ 혹은 ‘자유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새 기획은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일한 주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며, 또 자유주의 이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기존 좌파의 반자유주의적 기획과도 다르다. 무페는 자유를 절대화하는 전통의 자유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사적 소유를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도 절연한다는 전제 위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자율을 인정하면서 평등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목표로 제시한다. 이 책에 이어 무페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더욱 숙고해 <카를 슈미트의 도전>(1999) <민주주의의 역설>(2000)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2005) 같은 책으로 펴냈다.(고명섭 기자)

07. 12. 09.

P.S. <카를 슈미트의 도전>(1999)는 무페의 편저이고 국역본이 나와 있는 <민주주의의 역설>(2000)과 함께 모두 버소(Verso)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므로 국내에도 소개될 수 있을 듯하다(물론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 등과 같이 나와야겠다).

무페의 최신간인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2005)는 '행동하는 지성'(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한권이다(이 시리즈는 동문선에서 여러 권 출간된 바 있다). '입문서'격으로 가장 적합하지 않나 싶다.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책으로는 <정치와 열정>(2002)이 있다. 그녀의 홈피를 찾으니(http://www.wmin.ac.uk/sshl/page-2486) 이 책은 무료로 다운로드된다(http://www.wmin.ac.uk/sshl/PDF/Mouffe%20PDF%20.pdf). 아침부터 좋은 횡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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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2-09 15:11   좋아요 0 | URL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은 저도 재발간되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오늘날의 급진정치의 방향성과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더군요. 다만 원문의 난해함때문인지 기존의 번역본은 오역이 좀 보이던데 이런 점 수정해서 다시 나왔으면 하네요.

로쟈 2007-12-09 15:44   좋아요 0 | URL
네, 다시 나오면 좋겠고, 다시 나올 거라고 기대합니다...

람혼 2007-12-10 03:50   좋아요 0 | URL
저 역시나, 기대합니다.^^
 

오랜만에 교수신문에서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258). '영화비평 쇠퇴론'에 대한 현장 평론가의 비판을 담고 있다. 필자는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 유운성씨이다. 관심이 가는 주제여서 읽어보고 스크랩해둔다. 이 주제에 관해 씌어진 글들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게 아닌가 싶다(동업자들끼리는 상식일지 몰라도). 적어도 가장 깔끔하게 씌어졌다.

교수신문(07. 12. 03) "'침묵’은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다”

동시대 영화비평이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들 말한다. 영화비평이라는 것이 (예컨대 한때의 문학비평에 맞먹을 만큼의) 대단한 영향력을 지녀본 적도 없는 이곳에서, 벌써 그것의 쇠퇴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여기서 영화비평의 쇠퇴 운운하는 이들이 과연 어떤 이들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그들이 짐짓 취하는 애도의 제스처는 사실 그 이면의 음험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은폐하기 위한 假裝(가장)일 수도 있지 않을까.

1990년, 영화비평은 興했는가
정작 쇠퇴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쇠퇴를 애석해하는 것은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亡者(망자) 없는 장례식장에서 목 놓아 곡을 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곡이란 슬픔의 전염을 위한 감상적인 의식에 불과하며 슬픔의 최면술을 위해서라면 장시간 곡을 대신해 줄 이를 돈을 주고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 영화비평의 쇠퇴에 대해 말한다는 건 가짜 장례식장의 텅 빈 관에 눕힐 만한 시신을 찾아 헤매는 우스꽝스러운 작업이 돼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다시 물어보자. 장례식을 마련해 두고 시신을 찾아다니는 암살자들은 과연 누구인가를.

1990년대는 한국에서 영화문화가 급부상한 시기로 일컬어진다. 불완전하나마-특히 번역의 질이라는 측면에서-유용한 영화관련 서적들이 조금씩 출판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영화전문지들이 창간됐고, 비디오 대여점들은 호황을 누렸고, 예술영화관들이 문을 열었으며, 영화학교 및 대학 영화과엔 신입생들이 몰렸고, 학생영화 및 독립단편영화 제작의 붐이 일었으며, 지금은 아시아 제일의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했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바야흐로 영화적 교양이 문화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정작 그러한 교양의 범위와 역사성을 생각해보는 작업은 다소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겨진 시기이기도 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형식의 실험가로 추앙받은 반면 존 포드는 오직 서부극, 그것도 <수색자>의 존 포드로만 논의됐다. 이른바 현대영화라는 것이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고전영화에 대한 반발에서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고전영화를 다른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영화적으로 ‘번역’하려는 지난한 시도의 산물이었다는 인식 같은 건 전혀 들어설 여지조차 없었다.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이나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이 ‘전복적인’ 작업으로 오해되고,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이 예술영화로 선전되는가 하면,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구도자적 풍모와 망명의 삶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모델을 발견하는 등,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될 정도의 믿음이 가능했던 것도 1990년대가 영화적 교양의 범위와 역사성을 누구도 자문해보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교사·교도관의 비평과 왜곡된 교양주의
이런 상황에서 영화비평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으로 나뉘어졌다. 첫 번째는 敎師(교사)의 비평이라 칭할 만한 것이다. 영화를 ‘읽기’ 위한 고유한 독법이 있으며(시네마 리터러시), 한 편의 영화 이면에는 다양한 숨은 의미들이 있다는(징후와 해독) 주장은 이들 교사들이 즐겨 설파하는 강령이었다. 교사의 비평이 1990년대 영화문화에 적잖이 기여한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도나 문학청년으로 이전 시기를 보냈던 이들이 영화교사의 길을 택하면서 성립된 것이란 점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영화를 읽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들여다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 같다. 상황이 반대였더라면 우리는 영화적 서커스에 불과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엔 볼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교도관의 비평이다. 영화작품과 영화관련 서적의 수입 및 소개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며 그것들을 뛰어넘는 빼어난 작업들이 저기 바깥에 얼마든지 있음을 역설하는 전문가들의 존재는 쉬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마련이다. 물론 이는 한국 영화문화라는 특정한 울타리의 경계를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그것이 1990년대의 영화광들을 사로잡았던 왜곡된 교양주의-예컨대 “너, 이 영화 봤어? 그럼 이 영화는?”이라는 식의-와 조우함으로써 초래된 폐해도 적지 않다.

영화적 교양은 영화작품의 내면화와 수용의 과정을 통한 세계의 재인식이 아니라 상상적 라이브러리의 항목을 늘려가는 작업으로 그릇되게 정의됐다. 또한 영화비평의 교도관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깥의 존재를 역설하는 것이지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 문이 열린다면 그들은 서둘러 또 다른 울타리를 기어이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 왜곡된 시도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정당화한다. 한 편의 영화는 아직 그것이 소개되지 않았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라는. 예컨대 타르코프스키 영화예술의 위대함을 역설하던 많은 이들은 정작 <희생>이 극장에서 개봉되고 나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했다.

여하간 이건 다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이후 한국의 영화문화는 빠르게 변모해갔다. 영화관련 문헌들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우리는 영화비평계의 교사들의 한계를 깨닫게 됐고 예술영화관 및 시네마테크의 설립과 다운로드를 통한 영화감상이 보편화되면서 교도관들의 울타리 또한 점차 무력해졌다. 영화전문지들은 점점 독자를 잃어갔고, 동네마다 있던 비디오 대여점들은 차례로 문을 닫았으며, 예술영화를 본다는 건 더 이상 유별난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반면 영화학교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각종 영화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나는 리뷰어와 영화학자 사이에 위치한 영화비평가의 작업은 일차적으로는 통찰, 수사, 품격 그리고 나아가 취향과 윤리적 입장이 어우러질 때 가장 이상적인 결과물을 낳는다고 본다. 리뷰어가 정보를 전달하는 이라면 영화비평가는 취향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자이다. 영화학자가 분석과 논리에 기댈 때 영화비평가는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취향과 윤리적 입장이 모호했던 교사와 교도관의 비평은 그 변종들에 의해 삽시간에 대체됐다.

점점 암호해독자의 작업에 가까워지던 교사의 비평은 적절히 수사를 구사해가며 ‘제법 품격을 갖춘 보도자료’에 가까운 글을 써내는 영화기자들의 글쓰기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교도관들의 울타리는 영화제 카탈로그와 예술영화관의 팜플릿, 그리고 국내외 인터넷 사이트의 정보전달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단적으로 말해 영화비평은 광고들에 의해 대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비평적 자질을 갖춘 영화비평가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들의 비평적 글쓰기는 광고성 글쓰기로 가득한 영화전문지 편집자들에게 남은 한 줌의 부채감을 위무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었다. 

암살과 자살
그리고 바로 이 때, 영화비평의 쇠퇴 운운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비평이 광고로 대체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비판조차도 광고로 활용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영화에 영화비평가가 가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은 비판이 아니라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침묵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조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화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는 시대엔, 침묵은 비평적 소임의 방기가 아니라 사실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위장된 비판의 게임에 뛰어드는 건 사이비 비평가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비평이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는 식의 물음에 답해야 할 것 같다. 발터 벤야민은 비평가에게 있어서 상급심은 대중이 아니라 동료들이라고 쓴 적이 있다. 한국 영화비평이 독자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대중이 비평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예술로서의 비평은 대중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이제는 영화비평가들조차 동료들의 비평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특정한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이 영화비평가들 스스로의 세계관과 윤리적 입장을 건 진검승부가 아니라 영화잡지 편집인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기획자의 머리에서 출발하는 이벤트로 전락하고 만 것도 그 때문이다. 이건 암살자들의 추적에 자살로 대응하는 것과 같다.(유운성_영화평론가)

97. 12. 09.

P.S. 필자의 다른 글들을 찾아보다가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에 대한 짧은 리뷰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씨네21(04. 06. 11) 박진감 넘치는 키에슬로프스키 읽기

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그의 영화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었고 이 영화는 1990년대 한국의 영화광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던 예술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뒤이은 삼색 연작은 잠깐 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패로 간주되었고 곧 잊혀졌다. 물론 마땅히 걸작으로 불려야 할 <십계> 연작이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폴란드 내에서는 한때 참여적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을- 예컨대 <야간경비원의 시선>이나 <카메라광> 같은 영화들- 만들던 키에슬로프스키가 후기에 가서 점점 심리적이고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영화들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만만찮은 비판들이 가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The Fright of Real Tears |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오영숙 외 옮김| 울력 펴냄)는 이러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무엇보다 그의 후기작들에 대한 정치한 구원비평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특히 3부), 지젝의 목표는 좀더 광범위하고 야심적이다. 바로 전반적인 인문학적 사유의 위기와 함께 난관에 봉착한 영화이론을 대안적인 라캉적 독해를 통해 구원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체주의/페미니즘/포스트-마르크스주의/정신분석/문화이론 등의 ‘이론’(Theory)과 데이비드 보드웰과 노엘 캐롤을 수장으로 하는 인지주의적 ‘포스트-이론’ 내지는 ‘탈-이론’(Post-Theory)의 ‘사이’에서 키에슬로프스키를 읽어내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의 키에슬로프스키’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확실히 지젝의 이 저서에 자극제가 되었던 것은 <소셜 텍스트>에 게재된 유명한 패러디논문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던 앨런 소칼의 저서 <지적 사기>와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보드웰과 캐롤의 편저 <포스트-이론> 같은 책들로 인해 빚어진 좌파이론가들 내부의 위기감과 반감이었을 것이다. 지젝은 특유의 정교하고도 유머 넘치는 문장, 그리고 재해석된 헤겔적 개념들을 통해 경험주의적 이론이 가정하는 보편성의 허구를 논박하는가 하면, 이제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정신분석학적 봉합(suture)이론을 새롭게 조명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언뜻 딱딱하기만 한 이론서일 것도 같지만 책에 언급된 (그리고 이제는 국내에서도 대부분 쉽게 구할 수 있는) 영화들을 함께 보면서 찬찬히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이만큼 박진감 넘치는 이론서도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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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북매거진 SKOOB 11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책은 아직 받아보지 못해서 어떻게 편집/교정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원고와 큰 차이는 없을 거 같고, 다만 목차를 보니 타이틀은 '왜냐고 물으신다면에 관한 합리성의 두 가지 잣대'로 붙여졌다(보통 원고의 제목은 편집자들이 붙인다). 지난달에 출간된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한겨레출판)와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 두 권에 대한 간략한 리뷰가 나의 몫이었는데, 후자는 관심을 갖고 있던 책이었기에 덥석 청탁에 응했다. 더불어 아주 짧은 분량이기도 했고. "주요 온라인 서점의 상위 5% VIP 고객 중 선착순 5만 명에게 격주로 배포되는 프레스티지 도서문화잡지"이기에 접하지 못할 분들이 많을 것이므로 공개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책이 와서 찾아보니 제목은 '세상은 아무 죄가 없나니'이고, '왜냐고 물으신다면...'이 부제이다).   

스쿱(11호) 왜냐고 물으신다면에 관한 합리성의 두 가지 잣대

리처드 로빈슨의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한겨레출판)와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는 부피는 서로 달라도 유사한 제목으로 흥미를 끄는 책 두 권이다.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두 저자는 각각 ‘머피의 법칙’과 ‘사이비 과학’에 과학적 설명이라는 합리성의 잣대를 갖다 댄다. 그리고 ‘세상’은 실상 아무 죄가 없으며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

인간은 복잡하고, 변덕스럽고, 우연적인 세계에서 끊임없이 의미와 패턴을 찾으러 다니는 동물이다. 그러한 속성이 진화과정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기제로서 유전되었다. ‘얄미운 짓’을 하는 사물들에 대한 짜증과 이상한 것들에 대한 믿음은 그런 기제에 의해 양산된다. 하지만 이 기제는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수유를 하지 않는 남자에게도 젖꼭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명분보다는 진화론적 타산을 따른다. 물론 젖꼭지는 수유를 하는 여자들에게만 필요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유전적 구조가 다르게 재구성하기보다는 남자가 불필요한 젖꼭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비용’이 덜 든다.

자몽 즙이 튀면 왜 꼭 눈 속으로 들어가는가? 실제로 즙이 눈 속으로 들어갈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한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갖는다면 우리의 뇌는 언제나 그 기억을 환기시킨다. 불운이 언제나 세 가지씩 짝을 지어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운은 조금씩 꾸준히 찾아오지만 기억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기억들과 연계되면서 ‘세 가지’ 불운을 부지런히 찾아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대씩 몰려다니는 버스는 조금 다른 성격의 사례다. 이 경우는 잘못 계산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버스가 승객을 태우는 동안 두 번째 버스와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는 식이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세대씩 몰려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세 대의 버스’와 ‘세 가지 불운’에 대한 사고는 각각 인과적 사고와 마술적 사고로 대비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술적 사고가 남자의 젖꼭지처럼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와 패턴 찾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마술적 사고와 미신을 가진다.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말한다. 우리 뇌의 ‘믿음 엔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세기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미국인의 96퍼센트가 신의 존재를, 90퍼센트가 천국의 존재를, 그리고 79퍼센트가 기적을, 72퍼센트가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목록을 좀 달리하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싶다. 비록 중세 유럽에서보다는 훨씬 덜 미신적이지만 현대인들 또한 여전히 미신적인 것. 그런 미신의 폐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줄여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0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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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2007-12-0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게도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10호네요. 이번에 책을 사면 11호가 배달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칼 세이건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과학 저술가들은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믿음이 강력하다는 반증일까요?

로쟈 2007-12-09 07:30   좋아요 0 | URL
저도 10호를 갖고 있는데요.^^; 미국이 종교성이 강한 국가이긴 하지만 회의주의가 발달이 그와 인과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우리고 왼갖 것들을 많이 믿지만(성장신화를 비롯하여) 과학적 회의주의는 미진하지 않나 싶어서요...
 

한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폭력에 대한 사상들'을 청탁받고 예전에 몇 번 다룬 테마라고 덥석 응했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까 너무나 광범위한 주제여서(차라리 '죽음'은 얼마나 단순한 주제인가!) 고전을 면치 못했다(실상 내게 주어진 시간이 이틀밖에 없기도 했지만). 이 주제에 관한 '로드맵'으로 아주 유용하다고 적은 바 있는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에 대해 예전에 쓴 짧은 리뷰에서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이 참에 다뤄보려고 했으나 그 역시 절반 정도만 실현됐다. 그밖에 로제 다둔의 <폭력>(동문선, 2006)과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 등이 내가 길잡이로 삼은 책들이다(이글턴의 책은 다시 읽어볼 시간이 없었다). 마감이 지나서 송고한 글이라 퇴고할 시간조차 없었는데 결과적으론 그게 이 글의 운명이 되었다. 향후에 더 전진해야 할 '베이스캠프' 정도라고 해둔다(*이 글은 '폭력, 야누스의 두 얼굴'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사랑의 변주곡’)고 시인 김수영은 적었다. 어디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랑뿐이겠는가.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욕망의 입을 뒤지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이라면, 사랑의 밑자리에는 언제나 폭력이 가로놓여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건 보편적 폭력이다. 러시아 시인 푸슈킨은 시 ‘예언자’에서 예언자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마치 세라핌(천사)이 ‘외과적 수술’을 시행하는 것처럼 묘사한 바 있다(실상 ‘세라핌’이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높은 존재’ 혹은 ‘수호천사’를 의미하는 ‘셀’과 ‘치유하는 자’, 혹은 ‘외과의’를 의미하는 ‘라파’의 합성어이다).

시에서 세라핌은 ‘나’의 죄 많은 혀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지혜로운 뱀의 혀를 다시 심는다. 그리고 또 가슴을 칼로 가르고 심장을 뽑아낸 다음에 불타오르는 숯 덩어리를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내’가 황야에서 시체처럼 누워있을 때 신의 음성을 듣는다. “일어나라, 예언자여, 보라, 들으라,/ 나의 의지로 가득 차서,/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며/ 말로써 사람들의 가슴을 불태우라.” 세라핌에 의해 ‘나’는 강제적으로 시체가 되고 그런 이후에야 ‘예언자’로서 부름을 받으며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의 ‘성스러운’ 폭력은 모든 (재)탄생이 수반하거나 요구하는 폭력이기에 보편적이다.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의 탄생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 아닌가. 다만 그는 ‘말’이 아닌 ‘폭탄’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불태울 것이다.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동문선)에서 지적한 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폭력이 사라지는 유일한 순간은 다만 일곱째 날인 ‘안식일’뿐이다(비폭력의 윤리는 이러한 신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가 낳은 형제 중에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카인이다(인류는 모두 ‘카인의 후예’이다!). 카인은 자신의 행위로 인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신(여호와)은 그를 보호한다. 카인에게 표를 주며 그를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복수를 당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서에 따를 때,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신)가 공모한 역사이고, 곧 ‘폭력의 역사’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폭력의 역사>(2005)는 이러한 인류사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톰 스톨은 평범한 중년 가장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식당에 그냥 살인을 일삼고 다니는 두 남자가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그는 여종업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두 악당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이 사건으로 매스컴의 ‘영웅’이 된 톰에게 마피아 일당이 찾아와 그가 20년 전 조직의 일원이자 유명한 킬러 조이였음을 상기시키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한다. 톰은 자신이 조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결국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일당과 맞선다. 그리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그를 제거하려는 형 리치 일당을 또한 모두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은 두 가지다. 먼저 톰이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 철저하게 숨겨야만 했던 조이의 폭력,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가정과 아버지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저지르게 되는 폭력. 그 폭력은 톰의 것인가 조이의 것인가. 과거의 조이는 현재의 톰이 부인하지만 제거할 수 없는 그의 또 다른 자아이자 그림자이다. 역설적인 것은 조이의 킬러 본능이 위험의 순간에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는 영웅적인 능력이 된다는 점. 때문에 이 가장의 폭력은 가정을 위협하면서도 동시에 보호하는 양면적인 것이다. 

 

 

 

 

문학비평가이자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말하자면 이러한 초석적 폭력, 정초적 폭력이다(톰/조이의 경우에는 ‘가정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이라고 말해야겠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폭력이 제어․제한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을 속이는 수밖에 없다(톰은 학교에서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들을 크게 야단치고 훈계한다). 그렇게 ‘폭력을 속이는 폭력’이 제의적 희생에서의 폭력이며, 이때 요구되는 믿음이 ‘좋은 폭력’(정당한 폭력)과 ‘나쁜 폭력’(부당한 폭력), ‘순수한 폭력’과 ‘불순한 폭력’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믿음이다.

 

 

 



가령,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이후)에서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이미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그가 ‘정초적 폭력’이라고 부른 것은 자기 이전에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물론 벤야민의 ‘폭력비판’에서 ‘폭력’이란 말의 원어는 ‘게발트(Gewalt)’이고 이것은 ‘지배/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강제’란 뜻을 갖기 때문에 권력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의회/대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폭력의 두 계기를 분리하고 신적 폭력으로서의 정초적 폭력을 옹호한다.  

데리다가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에서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때문에 법은 그 정초의 순간에 불법적이지도 비합법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표상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이러한 정초적 폭력이 보존적 폭력에 의해 언제나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다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데리다가 보기에 법의 구조는 언제나 해체가능하며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은 서로 의존적이다.  

 

아렌트나 벤야민의 경우에서 알 수 있지만 폭력에 대한 사유나 성찰은 폭력을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혹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규정된다. 아렌트에 의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좌파 사회주의자로 비판을 받기도 했던 조르주 소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 아렌트와 달리 그가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분법은 무력(force)과 폭력(violence)이다. 전자가 지배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 등의 억압적 폭력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에 대한 탈법적 항거나 저항 같은 해방적 폭력을 뜻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무력이 소수 지배자의 통치 질서를 강제하는 힘이라면, 폭력은 기존 질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힘이다.” 소렐은 그런 의미에서의 폭력, 보다 구체적으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무기로서의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리고 이때의 폭력은 그 라틴어 어원인 ‘비스(vis)’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비스’는 ‘힘의 발휘’ ‘폭력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이기도 한 것이다. 호모 비오랑스, 곧 ‘폭력적 인간’이란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그리고 이 ‘폭력적 인간’은 니체적인 명명에 따르자면 ‘디오니소스적 인간’이 될 것이다. 이때의 디오니소스는 테리 이글턴이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에서 다시 읽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에서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이다. 즉 “포도주와 가무, 환희와 연극, 풍요와 과잉, 영감의 신”이면서 동시에 “탐욕적이고 폭력적이며 차이를 적대하는 획일성의 지지자”로서의 디오니소스. 디오니스소의 이러한 양면성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폭력성은 인간의 부정적이거나 부수적인 자질이 아니라 그 본성이다.

 

 

 

<바쿠스>에 등장하는 테바이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 숭배에 적개심을 품고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고 아예 신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물론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지진을 일으켜 감옥을 나온 뒤에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디오니소스성이 우리가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그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존중이다. 그것은  디오니소스가 펜테우스의 타자가 아니라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이다. <폭력의 역사>에서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마치 톰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조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폭력’과 ‘비폭력’이란 개념쌍의 상투적인 이해도 이러한 맥락에서 교정될 필요가 있다. 사카이 다카시가 <폭력의 철학>(산눈)에서 정리해주는 바에 따르면, ‘비폭력’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말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의 목적은 대화를 끊임없이 거부해온 사회에 어떻게든 우리가 제시한 쟁점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위기감과 긴장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폭력적 긴장에는 진실로 반대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건설적인 비폭력적 긴장은 사태의 진전에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1960년대 정치운동으로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잠재적으로 숨어 있는 사회의 적대성을 폭로하거나 구축하는 수단이었다. 때문에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무저항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에 있어서는 킹과 다른 노선을 걸었던 맬컴 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은폐되고 억압된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에게서도 일차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맬컴이 주장한 것은 흑인들이 자기 혹은 타자에게 갖고 있는 증오를 분노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 근본 원인이 아닌 결과를 특정한 인간이나 집단에 투사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하는 데 반해서 분노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태도를 함축한다.     

 

맬컴 엑스의 동시대인이었던 알제리의 정신과의사 프란츠 파농 역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을 통해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대항적 폭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그 자체 속에 이미 폭력이 편재해 있으며, 이러한 폭력은 굴절적인 형태(정신병)로 피식민 주체들에게 들러붙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폭력은 이러한 내향성을 중단시키고 식민주의 자체로 방향을 돌리게끔 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된다: “폭력은 취기를 깨우는 해독작용이다. 원주민의 열등 콤플렉스나 방관 내지 절망적인 태도를 없애준다. 폭력은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사카이 다카시는 이렇듯 폭력의 다양한 양상과 양태, 그리고 의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며 거기에 ‘반폭력(anti-violence)’이란 범주를 추가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반폭력은 테러에도 반대하고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police)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politics)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이고,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폴리스의 논리와 평등주의의 논리가 만나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랑시에르가 들고 있는 사례로는 “너의 직업은?”이라는 폴리스적 논리의 질문에 “프롤레타리아”라고 폴리틱스적 논리로 대답하는 대목이 정치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해방적 주체, 혁명적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슬라보예 지젝이 <혁명이 다가온다>(길)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클럽>(1999)을 예로 들면서 말해주는바 자기 구타(폭력)를 통해서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내놓아야 한다면 상사를 협박하기 위해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때린다.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급진적인 자기 비하를 통해서만 ‘순수한 주체’는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직접 구타한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 더 이상 주인이 불필요하다는 자기주장이며 “이러한 구타의 진정한 목표는 주인에게 집착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들뢰즈는 <매저키즘>(인간사랑)에서 가학주의가 지배의 관계를 포괄하는 반면에 피학주의는 해방을 위해 필요한 첫 과정이라고 적었다.  

 

 

요컨대 “폭력은 일차적으로 자기 폭력으로 또 주체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폭력적인 재형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파이트클럽>의 교훈이다.” 여기서 ‘순수한 폭력’은 곧 ‘순수한 사랑’과도 만난다. 사랑은 모든 맥락에서 사랑의 대상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고양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김수영의 시구를 빌자면,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이렇듯 미쳐 날뛰는 것이 사랑의 광기이고 폭력의 광기일 테다. 모든 현상을 ‘좋은’ 면과 ‘나쁜’ 면으로 구별하고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웰빙적 태도!)는 마르크스가 지적한바 전형적인 쁘띠부르주아적 태도이다. 이것은 사랑과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07. 12. 08.

 

 

 

 

 

 

 

 

 

P.S. 이 글을 쓰면서 고전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조금 다른 방향의 글을 원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안은 <폭력의 역사>, <배틀 로얄>, <파이트 클럽> 세 영화에 대한 읽기를 폭력에 대한 사유와 같이 엮는 것이었는데 그건 이 글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됐다. 하지만 두번째 안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문학과지성사)을 현재적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폭력과 테러(테러리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그건 전적으로 무산되었다(자료들을 모았지만 막판에 읽을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논쟁에 관한 생각은 다른 기회에 정리하는 수밖에 없겠다(언젠가 두 사람의 서신교환 일부가 국내 잡지에 번역돼 소개된 바 있다). 참고로 이 주제에 관해서는 정명환 편,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민음사, 2004), 김홍우, <현상학과 정치철학>(문학과지성사, 1999), 정화열,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아카넷, 2005) 등의 국내서도 참조할 수 있다.

 

 

거기에 더 보태져야 하는 것은 스탈린시대 공개재판을 다룬 아서 쾨슬러(케슬러)의 소설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이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다시 나왔으면 싶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에 논쟁에 대해서는 영어권의 경우 존 스튜어트의 자세한 연구서가 출간돼 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논쟁>(노스웨스턴대출판부, 1998). 두 사람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결별하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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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2-09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두 세배정도만 더 길었으면 하는 내용의 글이네요. 로쟈님의 예전 모스크바통신처럼 그런 분량의 글들처럼 말이지요. 그래야 마저 쓰고 싶으셨다는 부분을 충분히 쓰실 여유가 있으셨을텐데..적은 지면제약때문에 많은 내용을 말씀하시려다보니 너무 압축적으로 서술하신 느낌이 듭니다.기회가 되신다면 이 내용을 "베이스캠프'로 한 후속편을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12-09 07:27   좋아요 0 | URL
35매면 거의 신문에 실릴 수 있는 최대 분량입니다.^^; 그 두 배면 보통 계간지 분량이고요. 100매면 소논문 분량이 됩니다. 폭력에 관해서 더 좁게 주제를 잡으면 더 길게 쓸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런 종류의 개관은 사실 너무도 다양한 폭력의 종류만큼이나 네버엔딩이지요.--;

yoonta 2007-12-0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로쟈님에게 기대하는게 이젠 아마도 아티클수준이 아니라 논문이나 책인가 봅니다..^^;;

로쟈 2007-12-09 15:45   좋아요 0 | URL
읽을 책들이 차고 넘치는 데 저까지 보태서야.^^;

소음공명 2008-02-0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가지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류는 카인의 후예'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려 글을 적습니다. 로쟈님이 상징적인 의미에서 쓰신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되는데, 성서의 계보에 따르면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창세기4:25)이고, 셋은 에녹을 낳고, 노아가족이 에녹의 후손입니다. 홍수로 이 가족 이외에 다 멸망했으니 굳이 성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인류는 셋의 후손입니다.

로쟈 2008-02-04 22:27   좋아요 0 | URL
지적 감사합니다. 제 기억에 '카인의 후손'이란 표현은 로제 다둔의 것 같습니다. 성경의 구절을 축어적으로 읽으면 셋의 후손들이 되지만 여러 이설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카인이 에덴 동편에 살며 자손을 퍼뜨렸다고 하니까 허용될 수 있는 표현이 아닌가 싶네요. 인간이 가진 폭력성의 기원을 성서적으로는 달리 거슬러올라갈 수도 없는 게 아닌가 싶고요...

소음공명 2008-02-05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쟈님 말씀처럼 '카인의 후예'는 일반적으로 충분히 받아드릴만한 표현이구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폭력성의 기원은 카인보다 더 이전 타락 기사에서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은 생명"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에덴에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있었다고 봅니다.

2008-12-11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