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문학관련기사가 왠지 겹쳐지기에 나란히 옮겨놓는다. 채희윤의 신작 장편소설 <소설 쓰는 여자>(현대문학, 2008)에 대한 소개기사와 '문학상 인플레'에 대한 '최재봉의 문학풍경' 기사다. "자본주의 시대에 사양산업인 소설"이란 작가의 자조가 무색하게 문학상 '현상금'은 갈수록 치솟고 있다(문단의 주도권 다툼처럼도 보인다). 해서 작가들에겐 소설 쓰기 어렵다는 사회이지만 동시에 소설 쓰기를 권하는 사회가 현재의 한국사회다(중견 작가들은 창작스쿨 강사로 뛰게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장편소설에 걸린 상금만 일년에 몇 억이니까 앞으로 우리는 해마다 토탈 몇 억짜리의 소설들을 읽게 될 것이다!  

세계일보(08. 01. 12) 소설가 지망생 눈에 비친 가정, 그곳은 감옥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문학을 하기 위해선 “교도소 같은 곳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체제 순응자의 범상함에서 뜨거운 예술혼이 분출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 소설가 오 헨리도 감옥에서 소설가로 거듭났다. 예술의 영감을 얻기 위해 파출부를 자처한 여자는 어떨까. 확신범만큼 강렬하지 않지만, 적어도 평범하지는 않다.

소설가 채희윤(54)씨의 첫 장편 ‘소설 쓰는 여자’(현대문학)에는 신선한 글감을 찾기 위해 일부러 ‘부엌데기’ 노릇을 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32세 소설가 지망생 서주희는 부족한 상상력을 자책하며 일탈을 꾀한다. 심야 주차안내원, 생맥주집 아가씨,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거쳐 파출부로 변신한다. 월수금은 공인회계사의 저택으로, 화목토는 퇴역 장성의 집으로 출근한다. 파출부 주희에게 비친 가정은 감옥 같은 곳이다.

“존경이란 신비함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죠. 그 신비함을 조성하는 강력한 인자가 미지와 거리감인데 그것이 가장 쉽게 깨지는 장소가 바로 가정이죠. (…) 일종의 유형지가 아닐까 싶어요.”(92쪽)

공인회계사의 아내는 남편보다 애완견을 사랑하고, 퇴역 장군은 낡은 반공주의와 나르시시즘을 고수하며 노추(老醜)를 보인다. 주희는 이들 인간 군상의 위선, 피폐, 좌절된 꿈을 면밀히 관찰한다. 파출부를 빙자한 문학 수업은 공인회계사와의 불륜이 발각되던 날 종결된다. 결국 주희는 간통죄로 구치소에 갇히며 토마스 만이 설정한 예술가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소설의 뼈대는 주희가 두 가정에 ‘잠입’해 겪은 체험이다. 이야기의 다른 축은 주희가 감춰온 쓰린 개인사다. 주희는 기생 딸로 태어나 17살에 요정 지배인에게 성폭행당했다. 상처와 죄책감 때문에 첫사랑을 떠나보내야 했고, 이후의 사랑도 엉망진창이 된다. 소설에 생을 거는 주희의 집요함은 상처 치유의 의지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려는 것인가요, 아니면 소설 쓰기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61쪽)

수희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들었던 소설 강의가 중간중간 인용되며 이야기 전개를 돕는다. 이를 테면, 주희는 퇴역 장성과 진보 교수 며느리의 살벌한 다툼에서 소설적 요소를 포착하며 “요약과 장면, 묘사 이 모두가 다 들어 있어야 합니다”란 강사의 가르침을 상기한다. 예비 소설가 주희가 세상을 묘사할 때 쓰는 비유는 일상적이지 않다. 흉물스러운 퇴역 장성은 표도르 카라마조프, 장형보, 딤즈 데일 등 문학적 인물에 비견되며 더욱 사악하게 표현된다. 파출부의 시선으로 본 두 가정의 삐걱거림도 흥미롭지만, 상투적 문장을 결벽증 환자처럼 피하는 문체가 읽는 맛을 돋운다.

작가 채씨는 첫 장편에 대해 “매우 자기고백적인 소설”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989년 등단해 소설집 ‘한 평 구 홉의 안식’ ‘곰보 아재’ 등을 펴냈다. 장편은 등단 20년 만에 처음으로 썼다. “처음으로 내가 자신을 한번 풀어봤습니다. 이 자본주의 시대에 사양산업인 소설에서 제가 무슨 영화를 구하겠습니까. 주희가 소설로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 첫사랑에 다시 다가가듯,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할 뿐이지요.”(심재천 기자)

한겨레(08. 01. 12) 문학상, 현상금 인플레 시대

문학 월간지 <문학사상> 신년호를 보니 ‘문학사상 장편소설상’이라는 새로운 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안내문이 있다. 국내 출간과 동시에 해외에서 영어로 출간한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1억5천만원의 상금 규모가 놀랍다. 안내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국내 최고 상금’에 해당한다. 세계일보사가 주관하는 세계문학상, 그리고 조선일보사가 지난해 새로 만든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의 1억원 상금에서 50% 인상된 것이다. 10여 년 전 국민일보사에서도 1억원 상금을 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적이 있으니, 1억5천만원 상금은 한국 장편소설 현상공모의 기록을 깬 셈이다. 국문 및 영문 번역 출판저작권을 출판사가 영구 확보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어도, 기록은 기록이다.

비록 억대에는 못 미치지만 상금 액수가 수천만원대에 이르는 고액 장편소설 현상공모는 여럿 있다. 문학동네소설상이 5천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있으며, 한겨레문학상 역시 올해부터 상금을 5천만원으로 늘렸고, 지난 가을호로 창간된 <문학의 문학>도 5천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를 시작했다. 이밖에도 창비의 창비장편소설상과 민음사의 오늘의작가상이 각각 3천만원, 문학수첩의 문학수첩작가상과 문학동네의 문학동네작가상이 각각 2천만원의 상금을 걸고 작품을 모집하고 있다.

이 상들이 대체로 신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별다른 문단 경력이 없어도 장편소설 하나만 잘 쓰면 순식간에 수천만원 내지는 억대의 상금을 거머쥘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한다. 실제로 신인 작가 서유미씨는 지난해 문학수첩작가상과 창비장편소설상을 연달아 수상하면서 5천만원을 ‘벌었다.’ 소설책 한 권 값을 1만원이라 쳐도 5만 권을 팔아야 얻을 수 있는 인세 수입에 해당한다. 몇몇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제하고는 웬만한 기성작가들조차 1만 권은 물론 초판 3천 부도 소화하기 어려운 시장 상황에서 이런 고액 상금은 상당한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고액 상금을 내건 문학상이 느는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다. 문학의 위상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는 상황에서 높은 액수의 상금을 통해서나마 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고, 재능 있는 잠재 작가들의 참여와 문학적 투신을 유도하는 효과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상금 액수의 고저가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상금 액수를 경쟁적으로 늘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나은 작품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해되지만, 장기적으로 보아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볼 일이다. 가령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과도한 몸값이 경기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먹튀’가 문학에서라고 없으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고액 문학상을 문학에 대한 사회적 투자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혹시라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성장 이데올로기의 문학적 반영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문학적 논리와 맥락에 따른 자연스러운 문학 부흥은 물론 바람직스럽되, 인위적인 경기 부양 식의 ‘쏟아붓기’는 곤란하다. 거품 경기가 경제의 건전한 기반을 갉아먹는 것처럼 과도한 ‘투자’는 작가와 문학을 타락시킬 수도 있다. 문학과 돈, 적당한 거리와 긴장이 필요하다.(최재봉기자)

08.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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