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351.html). 지면의 부분 개편에 따라 '로쟈의 인문학 서재'란 칼럼으로 나가는 글로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타이틀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창비, 2008)을 다룬 글이다. 본래 더 주목하고자 했던 대목은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해 진단/비판하고 있는 3장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아는가'였는데,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더 풀어놓을 지면이 없었다. 새삼 확인한 것인데, 월러스틴은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창비, 2003) 이후 지속적으로 (유럽식)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현재의 이행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왔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그걸 새롭게, '유럽적 보편주의'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압축해놓고 있는 책이어서 '월러스틴 입문서'로도 유용할 듯싶다.

  

한겨레21(08. 09. 22)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우리는 현존 세계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로부터 또다른 세계체제 혹은 체제들로의 이행기에 살고 있다.” 세계체제론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가능한 대안의 역사적 탐구’란 의미의 신조어 ‘유토피스틱스’를 제안하면서 진단했던 내용이다. <유토피스틱스>(창비, 1999)에서 그는 ‘역사적 사회주의’ 몰락의 교훈을 되새기며 우리가 앞으로 50년 동안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체제를 위해서 근본적인 역사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전망한 바 있다.

월러스틴의 신작 <유럽적 보편주의>(창비 펴냄)는 그 문제의식을 그대로 연장하고 있다. 이번에 그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현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의 ‘유럽적 보편주의’이다. 월러스틴의 기본입장은 변함이 없다. 지금은 이행의 시기라는 것. 16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하나의 긴 시기가 현재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어떤 시기가 될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으며 장담할 수도 없다. “앞으로 다가올 20년에서 50년 동안의 싸움”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싸움의 결과에 따라서 기존의 세계제체보다 더 사악한 불평등의 세계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아프리카 세네갈의 시인이자 정치가 생고르의 표현을 빌면 ‘서로 주고받는 만남의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이것이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적 보편주의란 강자들의 편파적이고 왜곡된 보편주의다. 그것은 인권과 민주주의, 서구문명의 우월성, 시장에 대한 복종의 불가피성처럼 얼핏 자명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자명하지 않은 관념들로 구성된다. 근대세계체제의 역사는 유럽의 국가와 민족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팽창해나간 역사였고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건설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팽창은 군사적 정복과 경제적 수탈, 그리고 엄청난 불법행위를 수반한 것이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익을 챙긴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여 보편주의로 포장했다. 어떤 논리들인가?

먼저, 개입할 권리를 주장하는 논리이다. 개입은 언제나 강자의 권리인바, 유럽인들은 타자의 야만성과 보편적 가치에 맞지 않는 관습의 근절, 무고한 양민의 보호, 그리고 보편적 가치의 전파 따위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개입의 권리를 정당화했다. 16세기에는 자연법과 기독교, 19세기에는 문명화의 사명, 그리고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그 구실이고 명분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개입과 제재 조치가 강자들에 정복당한 사람들만큼이나 강자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사담 후세인이 재판정에 서야 한다면, 키신저와 부시도 기소돼야만 한다. 자신들을 열외로 놓는다는 점에서 유럽적 보편주의는 진정한 보편주의에 미달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창적인 인식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지배세력의 원리를 구현하는 보편주의와 피지배세력의 속성으로 지칭되는 특수주의 사이의 이분법을 근거로 한다. 오리엔탈리즘이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유럽적 보편주의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는 과학적 보편주의는 상대적으로 비판에서 면제되어왔다. 하지만 월러스틴이 보기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현재의 대학제도, 그리고 지식의 구조는 서로 분리되지 않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중세의 유럽대학과는 다른 근대적 대학이 성립되는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며 세계전역에서 대학제도가 융성하게 되는 것은 1945년 이후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팽창에 따른 결과였다. 그리고 근대세계체제 운영에서 고급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자연과학은 인문학을 제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세계경제의 장기침체와 함께 대학제도의 사회경제적 토대는 약화되었고 과학적 보편주의의 권위 또한 도전받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확인되는 것은 과학적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성이다. 월러스틴은 지식인들이 거짓된 가치중립성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대안으로서의 보편적 보편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이행의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08. 09. 09.

 

 

 

 

P.S.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 구성소로서의 지식구조와 그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이 개인적으로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인데, 국내에 이미 적잖은 책들이 소개돼 있다.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사회과학의 개방>,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지식의 불확실성>, <유럽적 보편주의>가 모두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문제의식과 주장들이 중첩돼 나타난다. 필요에 따라 한권의 책을 숙독하고 나머지 책들을 훑어보는 게 효과적인 독서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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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0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0 0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1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서점에서 며칠 전 강철구<역사와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봤는데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이더군요.저자는 제임스 브로트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썼네요.또 저자는 홉스봄의 1780년 이후의 역사를 읽고 이런 유럽중심사관이 퍼지는 데 우려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어요.서점이라 자세히는 못 읽었는데 이런 책을 우리도 냈다는 데 기분은 좋았습니다.

로쟈 2008-09-13 08:55   좋아요 0 | URL
네, 월러스틴도 '유럽중심주의' 비판을 계속해 왔는데, 이번엔 '유럽적 보편주의'라고 새롭게 명명했더군요. 강철구 교수의 논문은 저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읽은 문학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얼마전 창간호를 낸 계간 <자음과 모음>(이룸)에 관한 것이다. 비평특집으로 '내러티브의 미래'를 주제로 한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기사는 그에 관해서 간단히 스케치하고 있다.

경향신문(08. 09. 08) 2000년대 소설 주인공은 ‘상상력’

“(한국)소설의 새로운 화자는 모험의 항해를 떠났다 되돌아오는 오디세우스보다 옷감을 짰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페넬로페 쪽에 가까워지고 있다.” 문학평론가 손정수씨가 최근의 한국 소설에 대해 내린 진단이다. 가을호로 창간된 계간문예지 ‘자음과 모음’(이룸)의 특집기획 ‘내러티브의 미래’ 중 ‘변형되고 생성되는 최근 한국소설의 문법들’이라는 글에서 손씨는 한국현대문학을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로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요즘 작가들은 자신의 삶, 사회적 현실 등 존재하는 사실을 소설 속에 재현하지 않는다. ‘상징적 상상’ 혹은 ‘상상적 상징’ 등 전혀 다른 차원의 소설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근현대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렸다면, 최근의 소설들은 가볍지만 삶의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내포하고 있다. 자아의 경계는 옅어지고, 인간이 아니라 동물과 사물, 유령과 좀비, 사이보그와 합성인간 등이 소설의 주체로 등장한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 또한 변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아버지를 해석하는 방식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2030세대 소설가들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없다. 때로는 성가시고 무력한 존재로 표현되다 못해 사물화되는데 여기에 동화적인 환상이 개입된다. 박민규씨는 아버지를 기린(‘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으로, 황정은씨는 모자(‘모자’)로 변신시키고, 김애란씨는 자신이 아버지의 집에서 뛰쳐나가 방황하는 대신 아버지를 상상 속에서 달리게 만든다(‘달려라 아비’). 카프카의 ‘변신’에서 화자가 벌레로 변했던 것과 대비된다.

평론가 심진경씨는 특집기획의 ‘자기보다 낯선’이라는 글에서 소설가 권여선씨 작품을 분석하며 2000년대 한국문학의 특징을 ‘탈내면의 상상력’으로 규정한다. 속물화된 개인들이 현실세계와의 정면충돌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방어적이고 현실도피적인 행위를 보이며 또한 현실과는 무관한 자기 유희에 몰두하는 주인공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설명이다.

달라지는 것은 소설의 화자뿐 아니다. 독자들도 변하고 있다. 평론가 정여울씨는 특집기획 중 ‘원 소스 멀티 유스 시대의 소설 읽기’에서 인터넷 서점의 독자 리뷰를 분석했다. 정씨는 독자 리뷰가 ‘유희’ 차원에서 이뤄진다고 진단했다. 평론가들의 완곡어법 대신 직설화법으로 핵심을 찌르는 북로거들의 리뷰는 때로 소설을 매개로 한 별개의 에세이가 되기도 한다. 정씨는 “ ‘마이리뷰’를 논픽션 문학에 포함시키고 싶을 정도이다. 독자 리뷰를 통해 만날 수 없던 타인의 삶을 들어가는 열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소설과 영화, 드라마를 동일한 문화상품으로 취급하는 독자들을 지켜보며 더 이상 “문학이 단지 문학에만 갇혀 있을 수 없는 시대가 왔다”며 “문학이여, 다채로운 얼굴로 대중 앞에 서라”고 주문한다.(윤민용기자)

자금과 모음? 장편소설 부흥 위해 창간된 계간지

문예계간지 ‘자음과 모음’은 기존 문예지와 달리 장편소설에 비중을 둔다. 단편 중심인 한국 문단에서 장편소설의 부흥을 위해 소설 형식을 경장편과 픽스업(pix-up) 등으로 구분한다. 경장편은 단편보다 길고 일반 장편보다 짧은 300~700장 사이의 분량이다. 픽스업은 SF 등 해외 장르 소설에서 유래한 형식으로 개개의 단편소설이 묶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소설 형식이다.

첫호에는 경장편으로 이승우의 ‘한낮의 시선’을, 픽스업으로는 SF소설가 겸 영화평론가인 듀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실었다. 또 단편 위주의 기존 문예지와 달리 장편 연재에 비중을 두어 소설가 하성란·김태용씨의 연재소설을 선보인다. 잡지의 3분의 1이 장편연재 혹은 경장편으로 채워진다.

08. 09. 08.

P.S. 기사에 "평론가 정여울씨는 특집기획 중 ‘원 소스 멀티 유스 시대의 소설 읽기’에서 인터넷 서점의 독자 리뷰를 분석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때 '인터넷 서점'이 지칭하는 건 알라딘이다. 평론가가 직접 쓴 문장은 이렇다: "비평가에게도 네비게이션이 있었으면 할 정도로 읽을거리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시대, 비평의 방향타를 잃을 때마다 나는 인터넷서점 알라딘(www.aladin.co.kr)의 독자 리뷰를 탐독하곤 한다." 이하 글에서 인용되고 있는 리뷰들은 모두 알라딘의 리뷰이다. 덕분에 개인적으론 리뷰의 '성격'이 다양하고 '수준'도 높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됐다. 알게 모르게 자신의 리뷰가 인용된 알라디너분들도 글을 읽다보면 슬며시 미소를 지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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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9-0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로쟈님 리뷰 인용된거 아니에요?^^
근데 인용하려면 본인의 허락 받아야 하는거죠? 상업적 이용이니까요

로쟈 2008-09-08 23:58   좋아요 0 | URL
저는 리뷰를 쓴 게 없어서요.^^; 상업적 이용은 아니라 허용됩니다. 논문에서 인용하는 것처럼요...

마늘빵 2008-09-09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분의 글이 궁금해지는데요. ^^ 젤 아래 정여울 평론집을 들추면 볼 수 있으려나요?

로쟈 2008-09-09 09:42   좋아요 0 | URL
이미지가 첫 평론집입니다. 다른 책들도 이미 냈었지만...

Arch 2008-09-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로쟈님 소개글 듣고선 자음과 모음 창간호를 주문했어요. 김연수님과 듀나님의 글을 보고싶었거든요. 저 평론집도 읽어보고 싶은데요. 제 보기엔 바람구두님이랑 드팀전님, 파란여우님이 언급 됐을 것 같은데^^

로쟈 2008-09-09 09:41   좋아요 0 | URL
한국 소설 리뷰들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2008-09-1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9-12 11:13   좋아요 0 | URL
스무 고개 같네요.^^ 직접 확인해보시길.^^

메르헨 2008-09-0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의 리뷰는 참으로 탁월하죠...^^대단한 분들이라고 속으로 생각코 있었는데 비평가들에게도 먹히는(?)군요. 유후~~~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갑니다.^^

로쟈 2008-09-10 07:14   좋아요 0 | URL
남들이 알아주는 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니죠.^^
 

개역개정판 성경의 오역을 지적하는 책이 출간되어 기독교계에서는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강원주 목사가 <개역개정판에 대해 말한다>(도서출판 소망, 2008)에서 제기한 것이다. 책은 이달에 나왔을 듯한데, 둘러보니 아직 파는 곳도 없고 이미지도 전혀 뜨지 않는다. 관련기사만 번역관련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강원주 목사는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총회신학연구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세계선교회 대표를 맡고 있으며,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크리스천투데이(08. 09. 02) “개역개정판, 8백여곳 잘못 번역됐다”

개역개정판 성경의 오역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예장합동과 통합, 고신 등 주요 교단에서 이미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있는 가운데 장신대 출신 강원주 목사가 1일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언론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개정개역판은 개정(改正)이 아닌 개악(改惡)”이라고 주장했다. 강원주 목사는 이날 자신이 쓴 ‘개역개정판에 대해 말한다(도서출판 소망)’을 들고 나왔다. 이 책에는 개역성경의 바른 번역을 개역개정판에서 왜곡한 8백여곳의 사례를 분석하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과 대조해 해설했다.

기자회견에서 강 목사는 “‘7만3천여곳이 수정됐으므로 그래도 개역판보다는 개역개정판이 낫지 않겠느냐’고 개정위원들은 말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라며 “수정된 부분의 대다수는 현행 맞춤법에 따라 고친 것이지만, 문제는 원문과의 비교 검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강 목사는 구체적인 오역 사례로 창세기 27장 34절의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의 ‘방성 대곡’을 개역개정판에서는 ‘소리내어 울며’로 바꾼 것을 들었다. 그는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에서가 우는 모양을 ‘매우 크게, 격동적으로 심히 울부짖는’이라는 뜻의 6개나 되는 단어를 사용해 수식하고 있다”며 “개역개정판의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약화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수기 11장 6절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를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개정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개역판은 만나 외에는 먹지 못해 기운이 다 빠졌는데도 먹을 것이라고는 만나밖에 없다는 뜻인데, 개역개정판은 기력이 다 빠져서 다른 음식이 있음에도 만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현대어로 바꾸려면 차라리 ‘우리의 기력이 다하되’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기자들이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 있는 오역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신약 고린도전서 1장 30절과 로마서 4장 17절을 들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개역판에는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돼 있으나, 개역개정판에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돼 있다. 강 목사는 이에 대해 “구속과 구원은 엄연히 원문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이것(구속과 구원의 차이)은 신학교에 가면 가장 기초적으로 배우는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는 로마서 4장 17절 말씀도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분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로 번역한 것이 잘못됐다고 밝혔다. 개역개정판의 번역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표현이며, 신학적으로 중요한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강 목사는 개역개정판을 만들 당시 개정감수위원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개정감수위원회 서기였던 김중은 총장(장신대)은 강 목사와 지난 2004년에 만난 자리에서 “감수작업을 위해 최소한 3개월의 시간을 더 달라고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고 강 목사가 밝혔다. 당시 김 총장이 그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까지 하면서 개정감수위 측에 강력히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정감수위원회의 또다른 서기였던 도한호 총장(침신대)의 논문 ‘개역개정의 의의와 방법’에 나와있는 진술도 언급됐다. 도 총장은 논문에서 “시간에 너무 쫓겨 처음 계획대로 할 수 없었고, 작업을 서두르다 원문 확인없이 개정될 우려가 있었다”고 했다고 강 목사는 덧붙였다. 강 목사는 “개정개역판을 사용하는 교회들은 곧바로 이를 중단해야 하며, 성경공회(*성서공회) 측은 한국교회 앞에 사과하고 개역개정판 보급을 당장 중지하며, 이를 회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대웅기자)

08. 09. 07.

P.S. 기사를 읽다 보니 생각나는 책은 앙드레 라콕과 폴 리쾨르(리꾀르)가 쓴 <성서의 새로운 이해>(살림, 2006)이다. 부분적으로 읽다가 말긴 했는데, 모름지기 기독교인이라면 성서 무오류주의를 신봉하며 전문쓰기 같은 것에 정성을 들이기보다는 이런 책이라도 음미해가며 읽어봄 직하다. 책의 요점은 이렇다.

지금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는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서로 융합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이 점에 힌트를 얻어 헤브라이즘의 편에 서 있는 구약학자(앙드레 라콕)와 헬레니즘의 정신을 이어받은 철학자(폴 리꾀르)가 성서를 두 가지 관점에서 새로이 이야기한다. 선악과, 십계명, 하나님의 이름 등 구약성서의 주요한 주제들을 주석학과 해석학의 방법론을 통해 다룬다. 이 책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철학과 신학은 서로의 빈 공간을 채우는 방식으로 생산적인 담론을 구성한다. 성서학자인 라콕의 연구결과에 대해 철학자인 리꾀르가 응답을 하면 두 저자는 서로의 글을 읽고 각각의 글을 보완하는 식이다. 십계명이 원래는 금기가 아닌 '한계'를 의미했다거나, 선악의 인식이 결국엔 인간에게 필요한 도전이었다는 성찰 등 흥미로운 해석과 견해를 담았다. 더 나아가 성서 번역의 역사 자체가 해석의 역사임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마지막 멘트처럼 "성서 번역의 역사 자체가 해석의 역사"라는 것 정도는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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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0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신도가 성서해석학이나 교회사 공부하면 성직자들이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그러고 보니 성경해석 공부한지도 꽤 되었네요.폴 리꾀르가 이런 책도 냈군요.

로쟈 2008-09-07 22:48   좋아요 0 | URL
사해문서와 관련해서도 음모론이 있더군요. 권력은 무지를 선호하는 듯해요...
 

김우창 교수의 대담집 <세 개의 동그라미>(한길사, 2008)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으면서 하버마스가 연상된다고 했는데, 최근에 관심도서 중 하나가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이다. 오래전 강영계 교수의 번역본 <인식과 관심>(고려원, 1983)이 출간됐지만(나도 나중에 중고본으로 구입했다) 이미 절판됐고(알라딘에는 1996년판까지 나온 걸로 돼 있다) 번역에 대해서도 시비가 많았다.

내 견문으론 이 책의 번역 문제를 공개적으로 처음 지적한 이가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였다(철학전공자이다). 30대 중반의 젊은 기자가 쓴 <우리의 학맥과 학풍>(문예출판사, 1995)에 보면 '번역, 제대로 합시다'란 부록이 실려 있었고 내 기억에 거기에서 <인식과 관심> 국역본은 일차적인 비판의 대상이었다(우리 언론계에 대해서도 그런 책을 써주면 좋겠다). 이후로 새 번역본을 기대했지만 감감 무소식이다(그 사이에 나는 20대에서 40대가 되었다!). 해서, 흔히 <의사소통행위이론>과 함께 하버마스의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한국어로는 읽을 수 없다. 나는 이런 게 한국 학계의 풍토인 듯싶어서 씁쓸하다. 가끔 영역본이나 뒤적여보는 수밖에. 쓸 만한 기사가 있나 찾아보다가 그래도 핵심을 요약해주고 있는 것이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우리의 학맥과 학풍>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이한우기자의 <의사소통행위이론>(나남, 2006)에 대한 리뷰기사도 함께 모아놓는다.

한국일보(03. 10. 10)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

「살아있는 고전」 「20세기 현대사상의 거두」 라고 불리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70). 그는 현대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대상을 사회로 보고 이 사회를 변형시키고 발전시키는 것만이 인간의 소외와 병리 현상을 극복, 자유와 해방을 보장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인식과 관심의 올바른 이해와 결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하버마스의 사상적 진수가 농축된 저서가 바로 「인식과 관심(Erkenntnis und Interesse)」. 69년 초판이 나온데 이어 후기가 첨가된 증보판이 73년 출간됐다.

하버마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의 뒤를 이어 사회비판이론을 정립한 푸랑크프르트학파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철학을 총정리해내는 역할을 했다. 『오늘의 철학은 존재론적 체계의 철학이기를 그치고 과학과 사회, 전통문화, 종교를 비판하는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하버마스의 철학적 방법론은 「인식과 관심」에도 잘 드러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 대한 토대가 된 「인식과 관심」에서 하버마스는 인식이 현실적 욕구나 주관적 이해관계와 초연한 순수 이론적인 측면에서 탐구되어오던 기존의 서구사상을 전면 부정한다. 인식이 인간의 것인 한, 인간의 본래적인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며 관심은 오히려 인식을 바른 인식이 되게 하는 조건과 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객관적이며 순수하다는 자연과학·경험적 인식에 있어서도 하버마스는 합목적적인 관심, 기술적 유용성의 관심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역사적·해석학적인 학문이나 인식에서도 역시 실천적 관심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밖에 비판이론적인 학문에서는 인간 해방적 관심이 인식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

이러한 관점을 견지한 하버마스는 실증주의자 칼 포퍼의 사회과학이 자연과학화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자연과학이 사회과학화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했다. 인식과 관심이 바르게 결합할 때 마르크스의 사회비판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과 같은 실천적이고 치료적인 이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회에 초연하고 무관한 인식이 아니라 성숙과 해방에 관심을 가진 인식은 사회와 역사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병리를 치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배국남기자)

1. 한국 현대지성사의 복원을 위하여
2. 전통학문의 존재방식
3. 동양철학
4. 서양철학
5. 역사학
6. 정치학
7. 법학
8. 부록 : 번역, 제대로 합시다
9. 베끼기에서 시각도용까지, 한국 학계의 표절 백태

"우리의 정신사 형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인문학의 동양철학 . 서양철학 .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사회학 . 정치학 . 법학 등 6개 분야를 중심으로 우리의 주요 현대 학문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성장해 왔고, 주요학자들 중에는 어떤 이들이 있으며 현재의 실상은 대략 어떠한가에 관한 것을 다룬 책."(한국 학계의 부정적인 실상을 고발한 책으로는 강성민의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살림, 2004)도 꼽아볼 수 있다. 저자는 교수신문의 기자였다.) 

조선일보(06. 03. 11) 돈과 권력의 문화지배를 막아라

흔히 ‘인식과 관심’과 함께 하버마스의 양대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 ‘의사사통행위이론’이 번역됐다. 실은 10여년전에 번역된 적이 있지만 비전공자들의 공동번역으로 인해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제대로 된 첫 번역서가 나온 셈이다. ‘인식과 관심’도 20여년전에 번역됐지만 오역의 창고라는 비판을 받아 재번역을 기다리고 있다. 번역에 관한 한 하버마스는 한국에서 그리 운이 좋았던 편이 아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이 저술된 맥락은 1970년대 구미(歐美)의 철학계와 사회학계였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려면 당시 철학계와 사회학계의 이론적 쟁점들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이 있어야 한다.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사회사상가’를 지향했던 하버마스의 원대한 꿈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책은 베버를 통해 마르크스를 해독(解讀)함으로써, 혹은 해독(解毒)함으로써 하버마스 자신의 사회이론 구축을 위한 토대를 다지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와 베버의 뒷 자리를 차지하려는 학문적 야심에서 저술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먼저 의식(意識)철학으로부터의 탈피다. 의식철학이란 칸트에서 시작해 마르크스나 베버에게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다. 의식은 곧 이성이었다. 20세기 들면서 의식철학은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을 받았다. 특히 언어철학의 등장은 의식철학을 낡은 철학으로 만들어버렸다.

언어적 전환은 유럽이나 미국 모두에서 일어났다. 하버마스는 이같은 성과들을 무비판적일 정도로 고스란히 수용한다. 한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의 의사소통 행위에서 이성의 토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버마스는 이론사(理論史)의 재구성에 나선다. 그는 베버가 고민했던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 철학과 사회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 베버를 다시 읽는 것이다. 때로는 베버의 선택을 승인하고 때로는 베버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하버마스는 2단계로 된 사회이론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언어적 의사소통만으로는 인간행위를 조정하는게 어려워지고, 따라서 언어적 의사소통에 주어지는 과도한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권력이나 화폐와 같은 비언어적 매체를 통해 행위조정이 이루어지는 영역들이 독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적 의사소통에 의한 행위의 조정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생활세계(Lebenswelt)’였다면 권력이나 화폐같은 비언어적 매체에 의해 조정이 이뤄지는 영역은 ‘체계(System)’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하버마스가 진단하는 현대사회가 핵심문제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다. 간단히 말하면 문화영역에 돈과 권력의 논리가 침입해 드는 것이 바로 이 식민화다. 결국 대안은 체계가 월권을 행사해 생활세계로 침투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아내는데서 찾아야 한다는게 하버마스의 전략이다. 비판이론의 재생을 염두에 둔 저작치고는 대안이 너무 허약하다. 하버마스가 더 이상 비판이론의 전통에 서 있지 않은 것같다는 의심의 눈초리가 나온 것도 이 책에서다. 그러나 그의 지적 방대함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글읽기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역작이라는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이한우기자)

08. 09. 07.

P.S. 비판이론과 관련해서 최근에 나온 묵직한 연구서는 세일라 벤하비브의 <비판, 규범, 유토피아>(울력, 2008)다. 요즘 같아선 시장성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종류의 책이기에 출간 자체가 놀랍다. 저자는 예일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비판이론 연구의 권위자다. 간략한 책 소개는 이렇다.

헤겔의 작품들에 나타난 비판 개념을 분석하고, 마르크스가 헤겔적인 유산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해,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해 발견된 비판의 차원들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작품, 특히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작품에서 어떻게 급진적으로 변화되는지를 보여 준다. 그런 다음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능주의적 이성을 비판하는 하버마스의 프로그램을 토론하고 비판한다. 자연법과 칸트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 의사소통적 윤리학과 자율성의 프로그램을 진작시킴에 있어 얼마나 생산적으로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역사적으로, 체계적으로 탐구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연구했던 지성사가 마틴 제이는 이 책에 대해서 "미국에서 비판 이론의 창조적인 발전을 뛰어나게 입증해 주고 있는 사회 철학의 주요 저작"이라고 평했다. 그러고 보면 마틴 제이의 <변증법적 상상력>(돌베개, 1979/1981)도 절판된 지 오래다. 해방적 관심도 재테크적 관심에 완패한 지 이미 오래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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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07 10:56   좋아요 0 | URL
하버마스의 강연 모습은 1996년 다산 강좌 때 사진이 아닌가요? 저도 저 자리 어느 구석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그리 오래 전 일 같지 않은데, 벌써 10년도 더 전이라니 새삼 감회가 새롭습니다... <비판, 규범, 유토피아>의 번역 출간 소식은 전혀 챙겨두지 못하고 있던 것인데, 또 역시나 로쟈님 덕분에 잘 갈무리해갑니다. 매번 감사드리기도 이젠 죄송할 지경입니다.^^;

로쟈 2008-09-07 11: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강당 뒤쪽에 있었습니다.^^ 벤하비브의 책은 8월말에 교보에 들렀다가 발견한 책입니다. <타자의 권리>도 덕분에 챙기게 됐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9-07 17:01   좋아요 0 | URL
이한우 씨가 독일 현대철학을 연구했죠.가다머 책을 번역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요즘은 조선의 왕 평전을 쓰더라구요.이승만 전기 개정판을 보니 더 두툼해졌더군요.인식과 관심 오역은 많이 알려졌죠.

로쟈 2008-09-07 17:00   좋아요 0 | URL
하이데거 전공이고 가다머 연구서를 번역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07 17:01   좋아요 0 | URL
오...하이데거를 전공했군요.
 

김우창, 문광훈 교수의 대담집 <세 개의 동그라미>(한길사, 2008)가 출간됐다. 784쪽짜리 책이다. '마음, 이데아, 지각'은 그 부제인데, 아주 두툼하고 그만큼 값도 세다. 그래도 주문을 넣었다. 장회익, 최종덕 교수의 대담집 <이분법을 넘어서>(한길사, 2008)를 유익하게 읽은 기억 때문이다. 예전에 나온 '김우창과의 대화' <행동과 사유>(생각의나무, 2004)에서도 엿본 바 있지만, '우리시대 인문학의 한 모델'의 전모를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내주에 책을 읽게 되겠지만 미리 리뷰를 챙겨놓는다. 한국일보의 것이다(같이 읽은 건 경향신문의 리뷰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9051659465&code=900308 이며 사진은 거기서 가져왔다).  

한국일보(08. 09. 06) 일상에서 우주까지… 두 교수 '대화의 향연'

인문학의 대가와 후학이 일궈내는 대화의 향연은 이 시대, 삶과 세계에 대한 성찰이 왜 더욱 절실한가를 명징하게 밝혀준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71)와 문광훈 고려대 아시아 문제 연구소 연구교수는 '향연'을 가졌고, 일상에서 우주까지를 대화라는 담론의 그물로 건져 올렸다.

김 교수는 끊임없이 답하고, 문 교수는 쉴새 없이 묻는다. 인문학이라는 그물코로 건져 올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주제다. 이들은 "없는 대량 학살 무기를 있다고 거짓 정보를 만들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와 블레어"(58쪽) 등 해외의 정세를 논하다, "통일은 자유ㆍ민주주의ㆍ풍요한 삶 등 여러 가지 개념과의 연쇄 속에서 얘기돼야"(689쪽)한다며 한국의 미래를 바라본다.

이들의 이야기는 마음이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크게 혹은 작게 변주돼 간다. 김 교수는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않은, 텅 빈 마음"을 출발점으로 잡는다. 특유의 '정제된 엄밀성'을 향해 나아가기 위함이다. 책에는 어떻게 감정이 성찰의 과정을 거쳐 특유의 '표백된 언어'로 나타나는지가 두 사람의 구체적 언어를 통해 기록돼 있다. 그는 "인문학을 너무 추상적인 개념에 의지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인간 존재의 근본을 상실하게 된다"며 경계를 요청했다.

아주 가끔씩 나오는 현 정부 평가는 인문주의의 현유한 숲에서 독특한 광채를 발한다. 김 교수는 "(현 정부는)부동산이라는 관점에서 자기 집을 평가해야 한다는 불안감을 늘 만들어 낸다"며 "삶의 안정을 약속하는 아무 대안도 없이 마구 흔들어 놓기만 하는 정책들에 경고를 준 것이 이번에 나온 현 정부의 지지도 조사 결과가 아닌가 하는 느낌"(27쪽)이라며 속내를 비추기도 했다.



대담은 2006년 6~10월 모두 11차례에 걸쳐 김씨의 평창동 자택에서 이뤄졌다. 회당 4~5시간 걸렸던 마라톤 대담이었다. 김 교수는 "문 교수는 대담 전 수십여쪽의 질문지를 작성, 논리와 일관성을 세웠다"며 "퇴고 과정에서도 수정과 보충 등 성의를 다했다"고 밝혔다. 세 개의 동그라미란 인식의 기본 도구인 지각, 이데아, 마음을 뜻한다.(장병욱 기자) 

08. 09. 07.

P.S. 이번에 두 권의 책이 같이 나왔다. 마치 가을로 넘어서자 마자 추수를 보는 듯하다. <전환의 모색>(생각의나무, 2008)은 장회익, 최장집, 도정일, 김우창 4인의 대담을 싣고 있으며,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한 패러다임'이란 주제의 김우창 교수 대담은 박명림 교수가 진행했다. 그리고 곧 출간될 '問 라이브러리'의 첫권 <정의와 정의의 조건>(생각의나무, 2008)도 눈길이 가게 만든다. 136쪽이니까 시집 정도의 분량이고 값 또한 그러하다. 이 시리즈가 장수해서 '포켓 인문학' 시대를 열 수 있을지 궁금하다.

기사에서 "김 교수는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않은, 텅 빈 마음"을 출발점으로 잡는다"는 대목을 읽을 수 있는데, 김우창 용어로 '자유'가 그 '텅 빈 마음'에 대응하지 않을까 싶다(하지만 그 '자유'와 '텅 빈 마음'은 디폴트값으로 '조건화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우창과 나란히 떠올리게 되는 이름은 하버마스와 롤스이다(<정의와 정의의 조건>은 롤스의 주제이기도 하다). 차이라면 아마도 김우창식 '심미적 이성'의 자리에서 두 이론가들을 수용한 것에 있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다(미학의 결여는 하버마스 이론의 구성적 결여이다). 그걸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세 개의 동그라미>에 가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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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07 11:02   좋아요 0 | URL
작년에 출간되었던가요, 김우창 전집 5권도 아직 완독을 못한 저로서는 완전 과부하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이 '가을의 추수'를 음미해봐야겠습니다. 김우창 선생의 자택이 참 아늑하고 여유롭게 보이는군요('default value'라는 말씀에 슬쩍 미소 짓습니다^^).

로쟈 2008-09-07 11:06   좋아요 0 | URL
재작년에 재출간되었지요.^^ 입문서로는 대담집이 적격이라 많이들 읽어볼 만하지만, 분량은 좀 부담스러울 듯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