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정치론>의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 <정치론>(갈무리, 2008). 처음엔 <신학-정치론>의 일부가 번역된 것인가 했는데, 예전에 <국가론>(서문당, 2001)이라고 소개된 책이다. 동서문화사판의 <에티카/정치론>도 최근에 다시 출간되어 졸지에 3종의 번역본을 거느리게 되었다(내가 그런 경우다). 예기치 않은 리뷰도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예기치 않았다는 건,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걸 깜박 잊은 때문이다. 어느새 2008년의 마지막 주말이다. 이 마지막 주에 나오는 책들이 주로 정치론이고 혁명론이다. 전운이 감도는 2009년을 미리 예고해주는 듯싶다(말미에 붙인 사진은 '미디어오늘'의 기사에서 가져왔다)... 

      

한겨레(08. 12. 27) 스피노자 “대중 분노케 한다면 국가 아니다

네덜란드 철학자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1677)의 주저로는 <윤리학> <신학-정치론> <정치론> 세 종이 꼽힌다. 이 가운데 마지막 주저인 <정치론>이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 새 번역본에는 주요 구절마다 옮긴이의 상세한 해설이 달렸다. 옮긴이 김호경 교수(서울장신대·신학)는 질 들뢰즈, 안토니오 네그리, 에티엔 발리바르를 비롯해 스피노자 철학을 오늘의 사상으로 되살려내는 데 공헌을 한 현대 연구자들의 해석을 적극 참조해 해설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의 해석을 통해 스피노자는 ‘전복적·급진적’ 사상가의 모습을 좀더 뚜렷이 드러낸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17세기는 근대국가의 태동기였다. 얼핏 보면 스피노자는 매우 관념적인 사유에 골몰했던 비현실적인 사람 같지만, 실상 그의 관심사는 삶의 구체적 지반을 떠난 적이 없다. 그는 촘촘하게 짜인 논리의 그물로 삶의 문제를 전면적이고 총체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그런 만큼 삶의 현실을 규정하는 정치의 문제도 그의 사상 속에서 해명되어야 했다.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핀 것이 <정치론>이다. 동시에 <정치론>은 먼저 저술된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저작이다. <윤리학>이 자연이라는 총체적 세계 안에 인간을 배치하고 그 인간의 본성을 포착하는 저작이라면, <신학-정치론>에서는 신학과 함께 민주주의 문제가 탐구된다. <정치론>은 <윤리학>의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신학-정치론>의 문제의식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 이 사유들을 응집하고 확장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국가의 세 형태로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을 제시하고 이들을 차례로 고찰한다. 스피노자는 세 정체가 다 나름대로 합리적 존재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근본적으로 민주정에 맞춰져 있다. 민주정이야말로 사람들의 본성을 가장 넓게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정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스피노자는 민주정 부분을 상세히 서술하지 못하고 폐병의 침탈을 받아 44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미완성 유작이다. 그렇지만 앞선 저작들과 연결지어 살필 때 그의 민주주의 정치이론은 어렵지 않게 구성될 수 있으며, 특히 인간과 국가의 본성을 설명한 <정치론> 전반부를 통해 그의 정치사상은 비교적 충실하게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 사유의 출발점은 ‘코나투스’(conatus)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에게 ‘자기보존본능’이 내재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가리켜 코나투스라고 부른다. 코나투스에는 정념과 이성이 함께 섞여 있다. 모든 인간은 이 코나투스를 실현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욕망이다. 이 욕망에 휘둘려 정념의 노예가 될 때 인간은 부자유 상태에 빠진다. 반대로 이성이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조절하면 그때 인간은 자유롭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욕망을 근절할 수는 없고,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만이 가능하다. 욕망을 전환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이성이다.

인간이 욕망을 제거할 수 없다면 욕망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욕망을 날뛰게 하는, 사랑·미움·시기·분노 따위의 정념들 때문에 인간은 공동의 법이 없으면 갈등과 충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동의 법을 통해 공동의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가 필요하다. 국가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자유를 누리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가느냐 하는 데 있다. 스피노자는 국가도 인간과 같이 이성과 정념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본다. 국가가 이성의 명령을 따를 때 구성원의 보편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지만, 정념의 힘에 끌려가면 국가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패덕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때 이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 다중(대중)이다. 국가의 힘을 구성하는 것이 다중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목표도 다중의 평화와 자유다. 여기에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사상이 배어 있다.

이 다중의 삶을 배반하는 국가는 국가로서 자격이 없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대다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국가의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 국가는 자신의 권력으로 개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인 국가는 다중의 존경을 받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국가는 다중의 저항에 부닥친다. 그럴 때 국가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공포를 조장하는데, 공포는 결과적으로 국가 권력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다중이 소요를 일으키고 법을 경멸한다면 그 원인은 다중의 사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사악함에 있다. “신민(국민)들의 부도덕과 무질서와 불복종은 국가에 원인이 있다.” 이 모든 혼란은 국가가 덕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스피노자는 특히 다중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한다. “맹종하는 것만을 익힌 양떼처럼 신민들을 다루는 국가는, 국가라기보다는 황무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좋은 국가는 다중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8. 12. 26.    

P.S. "다중이 소요를 일으키고 법을 경멸한다면 그 원인은 다중의 사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사악함에 있다. “신민(국민)들의 부도덕과 무질서와 불복종은 국가에 원인이 있다.” 이 모든 혼란은 국가가 덕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같은 대목에서 세밑을 맞는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지금의 대한민국은 덕이 없다. 사악하고 포악하다. 이것은 국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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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7 0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7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7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8-12-27 05:42   좋아요 0 | URL
따뜻하게 보내고 싶은 연말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일들이 한 둘이 아니네요. -_ㅠ

로쟈 2008-12-27 07:22   좋아요 0 | URL
새해 전망이 이렇게 어두운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 거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7 18:07   좋아요 0 | URL
일본만 해도 우익인 산케이 요리우리 신문이 우리나라 조중동만큼의 구독률은 아닌데...한겨레나 경향 구독률은 아사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하기야 전라도에서도 조중동이 1위니까...그 정도 구독률이면 됐지,기어코 방송시장에까지 뛰어들려는 욕심은 참...거시기합니다.

로쟈 2008-12-27 23:37   좋아요 0 | URL
나름으로는 사활을 걸고 있는지도 모르죠. 지난달이간 분석기사로는 뛰어들어도 전망이 그다지 밝지는 않다던데요. 자금도 부족하고...

Mephistopheles 2008-12-27 18:31   좋아요 0 | URL
이건 뭐 정부는 마피아 같고...
경찰들은 마피아 밑에서 궂은 일 처리하는 행동대장 똘마니들 같고..에휴.

로쟈 2008-12-27 23:39   좋아요 0 | URL
국가기구의 정체가 원래 '마피아'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면은 있습니다. 잘만하면 '최악의 정권'으로 역사에 남을 것 같아요...
 

분위기 있는 곳에서 외식을 해야 한다고 조르는 아이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분위기 그저 그렇고 맛도 별로 없는 저녁식사를 하고 온 뒤라, 게다가 속까지 더부룩하여 글을 쓸 만한 기분도 아니지만(이것이 메리 크리스마스란 말인가!) 생각난 김에 메모 정도는 해놓는다. 예수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술가 게리 윌스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를 지난달에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와 함께 구입해서 조금 읽어본 적이 있다(두 책의 영어본도 같이 구했지만, 지금 찾다가 포기한 탓에 번역본만 갖고 이 메모를 작성한다). 기억엔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을 읽으면서 참고하려던 것이었고,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을 포함해서 몇 권의 책을 그렇게 뒤적인 듯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원제는 그냥 'What Jesus Meant'이고 이건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의미한 것' 내지는 '예수가 말한 것'이라고 직역될 수 있겠지만, 국역본의 제목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서문보다 먼저 등장하는 '번역에 대하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몇 쪽 분량의 '일러두기'만을 읽었고 그걸로도 책값을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대한 독자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나와는 계산방식이 다르거나 더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 읽지 않은 책이지만 성경과 예수에 대한 길잡이로 유익하지 않나 싶다.  

'번역에 대하여'에서 다루고 있는 건 예수가 사용한 언어와 그 번역 문제다. 성경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자세히 알려고 한 적도 없지만) 초기의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가 완전 저잣거리의 언어여서 전혀 우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고. 박식한 고전주의자 니체가 이렇게 말해놓았을 정도다. "만약 하나님이 신약성서를 작성했다면, (하나님은) 분명 깜짝 놀랄 만큼 그리스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신은 자신의 우아함에 굳이 시련을 부여하여 이처럼 타락한 언어 사용을 선택했다."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은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때문이다. 그가 방대한 영토를 정복했을 때 피정복 지역의 사람들이 정복자 및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공용 그리스어'였다. 일종의 혼합언어인 이것을 '코이네'라고 부르는데, 백과사전의 설명을 더 참조하면 이렇다.  

BC 4세기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AD 6세기 중엽)까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및 헬레니즘 문명에 동화된 일부 아프리카와 근동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주로 아테네 방언에 바탕을 둔 코이네는 2세기까지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 방언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구약성서>(70인역 그리스어 성서)와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판,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저서는 코이네를 사용하고 있다. 코이네는 근대 그리스어의 토대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나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 미국인은 잘 못 알아듣는 그 '영어'가 일종의 '코이네'이다. 대부분의 혼합언어처럼 이 코이네는 섬세함이 부족하여 기초적인 단어들만 접속사도 없이 길게 나열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빌라도 같은 로마인이나 예수와 같은 아람어 설교자들고 그의 제자들이 함께 사용했던 이 기초적인 언어로 씌어졌다."  

'아람어'란 말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역시나 백과사전을 인용한다.

BC 7~6세기에 차츰 아카드어를 대신하여 근동지방의 링구아 프랑카(국제혼성어)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 대신 유대인의의 언어가 되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과 <에즈라>는 아람어로 씌어 있으며, 바빌로니아 <탈무드>(유대 율법과 주해를 집대성한 책)와 예루살렘 <탈무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가 사용한 이 아람어가 히브리어와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못 들어본 말은 아니다.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그린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배우들이 사용한 말이 고대 아람어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고대 아람어'는 어떻게 재구해낸 것일까? 우리는 삼국시대의 한국어를 모르지 않는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은 그래서 아람어의 그리스어(코이네) 번역이다. 그리고 그 점이 바울의 언어와 예수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특이한 그리스어라고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그리스어로 기록한 반면에 예수는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니체주의자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는 이 바울의 언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바울의 그리스어는 학파 또는 그 어떤 모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없으며, 그의 내적인 마음 상태에서 어색하지만 직접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언어처럼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남겨진 시간>, 15쪽) 

강조한 대목은 오역이다. 어순을 약간 조정하여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예수의 언어처럼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야 맞다(원문은 "his Greek is not translated Aramaic (as are the sayings of Jesus)"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는 그 그리스어로 번역된 아람어로 어떻게 말했나?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What to me and to you, woman)?'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나오는 문장인데, 내가 갖고 있는 개역한글판으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나이까"이고 병기된 NIV판 영역으로는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이다. 우리말 번역보다는 영어 번역에서 차이가 더 도드라지는데,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와 비교하면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은 흡사 콩글리쉬 아닌가?  

게리 윌스는 여러 가지 예를 더 들고 있는데, 누가복음 2장 49절은 또 어떤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I must be at my father's)?"가 직역이고, 개역한글판과 영어판으로는 각각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와 "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로 옮겨졌다. 여기서도 "I must be at my father's?""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 간의 차이를 음미해보는 것이 좋겠다. 윌스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예수가 아버지의 무엇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주석자들이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문장들이 이런 식으로 투박하고 모호하여 성서 번역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그리스어(코이네) 문장들을 정확하게 옮기기보다는 우아하게 옮기는 데 더 주안점을 두었다고.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사실 이 대목의 우리말 번역은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의 투박함이 많이 제거돼 있다. 실상은 거의 이런 수준이 아니었을까? "야야, 그게 니랑 나랑한테 뭐시간디?").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영어 번역들은 신약성서의 '결점들'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문법을 보강하고, 시제를 보다 일정하게 맞추었으며 반복어구를 잘라냈다." 그리하여 공손한 고어체로 이루어진 품위 있는 성서를 만들어냈다(흠, <바이블 키워드>와 <아시모프의 바이블>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것이 '킹 제임스' 번역본이며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진짜' 성서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은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만약 새로운 번역이 원전의 효과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면 품위가 없어야 한다. 복음서의 언어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복음서 속의 언어는 언어학적 세속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거칠게 다듬어진 위엄이다."(10쪽) 그래야지만 "하층민 남자로서 노동자 출신인 자신의 제자들과 일상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윌스는 말한다.  

  

그런 성서를 사실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런 예수 또한 우리 곁에 있지 않다(대신 우리 곁에 있는 건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와 '추락하는 한국교회'다). 마치 '예수 메시아'란 뜻의 '예수 크리스토스'를 그냥 '예수 그리스도'라고 음역함으로써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의 '메시아'를 배제하고 유예시킨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아닌지('메시아' 대신에 우리가 갖게 된 것이 반항적 록정신을 상실한 '거세당한 슈퍼스타'이다. '한국형 슈퍼스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서문은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란 제목을 갖고 있다. 저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몇 가지 행적만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Jesus Do)?" 운동의 허상을 폭로한다(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리하면 이렇다. 과연 사람들은 예수처럼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말라고 한다거나(마태8:22) 부모를 미워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마태8:22, 누가14:26) 혹은 자신들이 일궈낸 성공에 대해 자부심을 품고 있는 교외의 부자 교회를 찾아가(혹은 소망교회를 찾아가) 헌금접시를 들고 있는 사람을 채찍으로 내리치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한 2:16)라고 하거나 "강도들의 소굴"(마가11:17)이라고 고함칠 수 있을까? 

또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태23:27)고 외치고,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 10:34)고 하거나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려고 왔다"(누가12:49)고 한다면, 그런 예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예수가 했던 바를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축복과 은총을 받아서) 기름이 번지르한 윤택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왜 나입니까?'라고 반문하며 고뇌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건 사실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는 장면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마리아의 성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조각들 중에서, 마리아를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표현해놓은 작품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고 한 게리 윌스의 말에, 나는 전폭적으로 공감한다(그가 사례로 제시한 건 로렌초 베네치아노의 그림이지만 눈에 띄지 않아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옮겨놓는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란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대경실색한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하고 궁금히 여겼다."(누가1:29) NIV판으로는 "Mary was greatly troubled at his words and wondered what kind of greeting this might be." 인류의 역사가 그 수태로 인하여 좀 바뀌었다면 그 기원적 정념이 놀람이고 공포였다는 점도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기쁨보다 먼저 우리에게 도래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나는, 성탄절을 보내며, 생각한다... 

08. 12. 25. 

 

P.S. 예전 같으면 눈길도 가지 않을 책들인데, 요즘은 나이 탓인지 관심분야가 더 넓어졌다. '성경과 기독교'란 주제와 관련하여 더 읽어볼 만한 책은 바트 에르만(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청림출판, 2006) 등의 책이다. 저자는 신약학의 권위자라고 하는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 가운데서도 관심이 가는 타이틀이 많다.  

 

<예수>를 비롯해서 <신약>, <신의 문제> 등이 그런 타이틀이고 내년봄 출간 예정인 그의 최신작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다(러셀도 같은 제목의 책을 쓴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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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2-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영화 개봉했을 당시 인터뷰에서 본 것 같아요. 예수님 역을 맡은 배우가 아람어로 된 성경을 몇 십번 읽고서 연기했다고 하던걸요. (대단해라!)

로쟈 2008-12-25 23:5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아람어 성경의 성립연대가 언제였는지 알면 되겠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아무래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성서해석학자들의 중평입니다.그래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가 성서엔 혼재해 있다고 하죠.

로쟈 2008-12-25 23:59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책상맡에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분도출판사)란 책이 놓여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제가 그 책을 말하려고 했어요.광주의 한 가톨릭 서점에서 몇년전 할인판매할 때 분도 출판사 책을 많이 샀지요.개신교 신학자들 책도 내고 일반 인문사회과학 책도 좋은 게 많이 나오죠.

로쟈 2008-12-26 12:52   좋아요 0 | URL
요즘은 다들 구하기 힘든 책이 돼버렸어요...--;

람혼 2008-12-26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의 '상상적 형상'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같은 제목을 패러디하여 "예수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로쟈 2008-12-26 12: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몇년 전에 당시 유대인인가 표준형 얼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지요(요즘 우락부락하고 입술 두툼한). '예수는 이날 태어나지 않았다'까지 포함해서 두루두루 시리즈가 될 법도 합니다.^^

비로그인 2008-12-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그간 눈으로만 읽고 가다가 처음 글 남깁니다.
아람어와 코이네에 대한 글을 읽고 정찬의 소설집 <아늑한 길>에 실린 '아늑한 길'
을 펴보았습니다. 그곳에 아람어에 대한 내용이 꽤나 자세히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람어는 문자 없이 구전되기만 한 민중의 언어인 빨리어와도 비교할 만하지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6 12:49   좋아요 0 | URL
아 정찬의 소설에도 나오는군요...

누런마음황구 2008-12-2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를 읽으려고 하다가, 좋은글 읽고 갑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

로쟈 2008-12-26 12:49   좋아요 0 | URL
그냥 일종의 책소개였습니다.^^;

neoscrum 2008-12-2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과 관련해서 <성경 왜곡의 역사>도 재미있습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6490 성경의 원본을 찾는 신학자들이 보기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는 초기 성경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현재 쓰는 성경의 여러 오류들까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6 12:48   좋아요 0 | URL
바로 제가 찾던 류의 책입니다.^^ 바트 어만(에르만)이 꽤나 저명한 학자군요. 바로 올려놓습니다...

canon 2008-12-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ratton Ladewig, "An Examination of the Orthodoxy of the Variants in Light of Bart Ehrman`s The Orthodox Corruption of Scripture" (Th.M. thesis, Dallas Theological Seminary, 2000).

로쟈 2008-12-27 23:41   좋아요 0 | URL
학위논문까지 뒤져볼 정도의 관심은 아니구요, <성서 왜곡의 역사> 정도로 충분합니다. 다만 더 소개가 되면 좋겠네요...

canon 2008-12-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논문은 바트 어만의 문제점을 지적한 논문입니다.^^ 바트 어만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바트 어만의 주장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지요. 다른 사본학자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로쟈 2008-12-28 12:22   좋아요 0 | URL
Th.M. thesis이면 석사논문인가요? 아직 '사본학자'라고 부를 순 없겠고, 그가 권위 있는 새 책을 낸다면 읽어봐야겠네요...
 

성탄절이라고 해서 따로 분주한 일은 없지만(그와 무관하게 써야 할 원고는 있다) 예의상 기독교(그리스도교) 관련서를 챙겨놓는다. 억지로 고른 건 아니고, 마침 흥미를 끄는 책들이 출간돼서다. 독일 성서학자들이 쓴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8)는 8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지금까지 저술된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에 관한 배경사적 연구 가운데 이만한 책은 없었다."(김진호 목사)란 평도 있는 만큼 구경이라도 해볼 만한 책이다. 그리고 프랑스 역사학자들이 쓴 <역사 속의 기독교>(길, 2008). 역시나 5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이고, '태초부터 21세기까지 기독교가 걸어온 길'이란 부제를 갖고 있다. 각각을 소개하는 단신기사를 옮겨놓는다. 요즘은 이런 기사보다는 상품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는 출판사의 책소개가 훨씬 더 자세하지만... 

 

초기 기독교 신앙의 형성 과정을 1~2세기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위기를 배경으로 출현한 소수자 탄압의 맥락에서 조명한 책이 나왔다. 볼프강 슈테게만 등이 쓴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다. 책에 따르면, 예수가 죽은 뒤 로마제국의 도시사회는 민족·계급 갈등으로 표출되는 지배구조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대중들이 분노를 투사할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반로마항쟁을 일으킨 유대교가 대표적인 표적이었는데, 유대교의 일탈자 집단인 기독교 공동체는 한층 가혹한 공격과 배제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일종의 ‘아웃사이더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됐고, 이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한 신앙 양식에 반영돼 있다는 게 글쓴이들의 분석이다. 볼프강 슈테게만은 <작은 자들의 하나님> 등의 저작을 통해 사회사적 성서해석의 전범을 확립한 신학자로 독일 아우구스타나 신학대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공동저자인 에케하르트 슈테게만은 그의 쌍둥이 형제다.(한겨레)  

프랑스혁명 속에서 한때나마 기독교를 버리는 운동이 일어났다. 혁명 전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저마다 종교인의 부패와 위선을 공격했다. 국민공회는 아예 주일을 알 수 없게 달력을 고쳐 10일을 한 주로 만들기도 했다. ‘역사 속의 기독교’는 19세기 프랑스 언어학자 리트레가 말했듯이 “종교 없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듯이, 역사의 일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종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역량 있는 역사가 55명이 참여해 저술한 책이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태동했지만 온갖 고난과 박해를 극복하고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후, 순식간에 서양을 점령해버렸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춰 기독교의 탄생부터 21세기 역사까지 다루고 있다. 특히 프랑스혁명 등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의 기독교 모습을 중점적으로 다룸으로써, 기독교사가 문화사 전체의 주제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또한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 영역은 물론, 테러 등의 정치영역에서도 기독교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기독교 역사를 단순히 종교사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지 않은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세계일보) 

08.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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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8-12-25 11:02 
    역사 속의 기독교 : 기독교 초기 신앙형성과정에 관한 서적

철학자(라기보다는 저술가란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탁석산의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더러 칼럼들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그리고 한때는 TV에서도 곧잘 볼 수 있었지만) 그의 '베스트셀러'들은 관심을 끌지 않았다. 흄 전공자로 처음 이름을 알게 됐지만(아마도 흄의 <인성론>에 관심을 가졌을 때인 듯하다), 그가 널리 알려진 건 <한국의 정체성>이란 책이 뜨면서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책을 손에 들기 전에 부정적인 평을 먼저 접했던 듯하고, 이후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최신작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2008)가 지난달에 나왔을 때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창비'에서 출간됐다는 점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한 가지를 보태자면,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했기 때문입니다"란 주장이 눈길을 끄는 정도. 이걸 '조선 단절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근 조선사와 조선 유학에 좀 관심을 갖게 되면서(제임스 팔레와 한형조 교수 덕분이기도 하고 나이 탓이기도 하다. 나는 마흔 이후에는 한국학과 동양 고전에도 눈길을 주기로 10여 년 전에 작정한 바 있다) 문득 '조선 단절론'의 근거(evidence)가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손에 들게 됐고, 또 그런 김에 관련기사도 찾아 스크랩해놓는다(나의 부지런함이여!). 강성민 전 교수신문 기자의 '탁석산론'은 퍽 신랄한 평가를 포함하고 있는데, 어차피 '한국에서의 철학=문화'라는 것이 탁석산의 지론이기에 '철학'이란 (서구식) 기준에 미달한다는 비판에 대해 저자가 괘념할 성싶지는 않다. 어쨌든 참고할 만하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08. 11. 15) [저자 초대석]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철학자 탁석산(50ㆍ사진)씨의 답이다. 개항 후 한국의 100년을 지배해 온, 탁씨가 한국인의 '생활철학'으로 지목한 세 가지다. 이 질문을 제목으로 딴 그의 새 책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창비 발행)가 출간됐다. '한국적'이라는 타이틀의 권위를 허물어뜨렸던 전작 <한국인의 정체성>(2000)처럼 이 책도 단정적이고 도발적이다.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선비에 대한 향수가 이는데, 조선의 패러다임인 주자학과 현대 한국인 패러다임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서양의 철학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것 못지않게, 고유의 것에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 이미 서양과 조선을 뛰어넘고 새로운 시기를 100년 이상 살았다"며 "지식인 사회가 조선이라는 벽에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 종교, 철학이 일치된 조선 주자학과 결별한 뒤에 '개인'의 공간이 탄생했고, 그 공간에 깃든 한국인의 철학과 정신이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라는 것이다.

"종파를 초월한 기복신앙이 현세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또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즐기자'라는 태도는 인생주의를 보여주죠. 적극적으로 감각적인 즐거움을 원하는 것, 그것이 한국인 특유의 역동성과 야성성을 낳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허무주의를 한국인의 철학으로 내세운 것, 그리고 그것을 긍정하는 그의 논지다. "한국인의 허무주의는 서양의 니힐리즘과 다릅니다. '인생 뭐 있나. 다 그런 거지'하는 태도가 절망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시간을 견디는 방어수단 혹은 '보험'으로 작용합니다. '지치고 힘들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결국 '어쩌겠냐, 열심히 살아야지'로 이어져요. 이게 현대 한국인의 철학입니다. 건강한 허무주의죠."(유상호기자)    

 

담비(08. 06. 10) 상식은 어떻게 철학으로 포장되는가 : 철학자 탁석산  

탁석산(卓石山)은 그 특이한 이름 때문에 머리에 각인된 철학 전공의 저술가이다. 한자로 보면 더 특이하다. ‘탁월한 돌산’이니 완전히 울산바위 아닌가. 이름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는 걸 보면 본명인 것 같은데, 부친이 대단하신 분인 것 같다. 그는 지난 2000년 ‘책세상문고·우리시대’ 시리즈의 1번 타자로 나와 ‘한국의 정체성’(2000)과 ‘한국의 주체성’(2000)으로 연타석 홈런을 쳐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매우 실용적인 글들을 써서 철학자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지만, 데이비드 흄으로 박사를 받았고, 그 박사논문의 인용빈도가 높은 전공자임은 분명하다.   

그가 대학을 싫어했는지, 아니면 대학이 거부했는지 모르지만 교수의 길을 가지 않고 40대 중반 대중서 저자로 본격적으로 나선 탁석산은 책세상 문고판으로 어느 정도 유명해지자 똑같은 출판사에서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책세상, 2001)를 펴냈고, ‘철학 읽어주는 남자’(명진출판, 2003)를 내면서 이른바 ‘대기업’으로 파트너를 바꿨다. 그가 갈아치우는 출판사 이름을 한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탁석산의 고공행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웅진닷컴, 2004), ‘탁석산의 글짓기 도서관(1~3)’(2005), ‘토론은 기싸움이다’, ‘보고서는 권력관계다’(이상 김영사, 2006), ‘대한민국 50대의 힘’(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그의 최근까지의 행보다. 여기에 몇 가지 추가한다면 2004년 KBS ‘TV 책을 말한다’ 사회자를 지낸 것(얼마 못하고 장정일·김미화에게 바통을 넘기긴 했지만), 2002년 도올 김용옥의 논어강의를 신문에다가 대문짝만하게 비판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정도일 것이다. 



사실 나는 교수신문 기자시절 그와 대면한 적이 있다. 2003년 조긍호 서강대 교수가 쓴 ‘한국인 이해의 개념틀’(나남출판)이란 책이 나왔을 때였다. 대외의존도가 심한 한국의 여타 학문분야에 비해 그나마 토착성을 획득한 게 심리학 분야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심리학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인’ 연구의 계보를 조명하는 특집을 준비했고, 그 서브 메뉴로 신간을 낸 조긍호 교수의 책을 다루게 된 것이다. 좀 독특하게 할 수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서평이 아닌 ‘논쟁대담’의 방식을 취했는데, 대담자로 탁석산이 정해졌다. 교보문고 1층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조긍호 교수는 내내 겸허했고 탁석산은 내내 당당했다. 저자로서 자신의 책에 이렇게 독특한 관심을 가져준다는 점에 조 교수는 감격했던 것 같다. 탁석산은 당시 A4용지 에 질문할 거리를 몇가지 적어 왔는데, 대담의 내용은 이 자리에 그리 소개할 만할 게 못된다. 인상 깊었던 건 탁석산이 대담료가 적다고 불평했다는 점이다. 두꺼운 책을 한권 다 읽고 나오는데 10만원이 뭐냐고 말이다. 그 대신 대담이 끝난 후 식사대접은 신문사 측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돈 때문에 필자들에게 책망을 듣는 일은 교수신문을 다니는 내내 겪어야 했다.(90%의 필자들이 기꺼이 글을 써주고 때로는 원고료를 받지 않기도 했지만, 나머지 10%의 필자들이 던진 쓴소리가 가슴에 꽂혔다.)

독특한 글쓰기와 사례인용적 글쓰기의 효과
그런데 이것을 끝으로 탁석산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학술적이고 인문학적인 책을 펴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날 대담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탁석산은 책의 내용이나 수준에서 별로 주목을 요하는 저술가는 아니다. 대화체 글쓰기와 독특한 사례인용 등에 영감을 얻어 그걸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은 있다. 책을 보고나면 남는 것 없지만 한두마디 에피소드는 꼭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의 저술을 놓고 본격적으로 논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을 되새겨보자. 게다가 고종석은 탁석산의 책이 매우 위험하다며 “순진한 극우주의자”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진중권은 ‘폭력과 상스러움’(푸른숲, 2002)이란 책에서 아예 기겁을 한다.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탁석산이라는 철학자(?)가 쓴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란 책을 보았다. 몇 페이지 들쳐보고는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엽기적인 책으로, 이 책에 비하면 장기의 자유판매를 주장하는 공병호의 ‘갈등하는 본능’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제3제국의 나치 철학 이후로 전 세계에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유일한 철학자다. 심지어 이런 책이 ‘좋은 책’으로 추천까지 받는다”라고 말이다. 나 또한 여기에 동감한다. 센세이션을 일으켜 떠보겠다는 ‘야심’까지 읽혀져서, 나는 탁석산이 김용옥을 가리켜 ‘약장사’라고 독설을 퍼부을 때 ‘영역다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마 김용옥은 탁석산에 비하면 그 깊이가 1백미터는 더 깊은 사람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고작 ‘상식’을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사람 아닌가. 수능학원에 다 정리돼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사랑은 오류’(웅진지식하우스, 1995)라는 소설에서 유머러스하게 정리해놓은 오류의 방정식이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 아닌가. 그나마 마르케스는 이 소설에서 헛똑똑이를 참 잘 그렸다. 한 법대생이 여자친구에게 ‘일반화의 오류’니 ‘의도의 오류’니 하며 잘난 척 읊어대다가, 막상 프로포즈를 할 때는, 그 여자아이가 법대생의 말끝마다 그건 무슨무슨 오류라며 넉다운을 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탁석산이 그의 책들에 깔아놓은 내러티브는 이에 비하면 반전도 없는 밋밋한 상상력을 보여줄 뿐이다.

‘자생적 학문담론’과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행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석산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단행본 출판이 그려놓는 시대풍경의 측면에서다. 그가 2000년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책세상문고·우리시대’라는 문고판 시리즈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제1권의 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석산에겐 행운이다. 당시는 한국사회가 IMF의 지독한 펀치를 얻어맞고 겨우 일어서던 시기였다. 낙관적인 이들은 비싼 수업료를 냈다며 다신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외치던 때다. 경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경제학자들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이런 비판의식은 각 학문분야로 널리 퍼져 이른바 이 땅에 걸맞은 ‘자생학문’을 위한 담론화가 활발히 시작될 때였다. 우리사상연구소가 2001년부터 펴낸 ‘우리말 철학사전(1~3)’(지식산업사)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우리말 철학하기’ 모임이 결성돼 작업한 결과물이었고,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의 ‘탈식민적 글쓰기’ 담론이 호응을 얻어 내고 있었다. 



자생학문 담론이 무르익는 상황에서 나온 책세상문고는 ‘우리시대’라는 문제의식을 눈에 띄게 표방하며, 학문의 쓰임새를 고민했다.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전재호), ‘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는갗(박동진), ‘우리시대의 북한철학’(선우현),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김창수),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배식한), ‘지구화, 현실인가 또 하나의 신화인가(구춘권) 등의 문제작들을 계속 쏟아냈다. 책세상문고는 출발 당시 일본의 이와나미문고나 프랑스의 끄세주처럼 문고판 르네상스를 견인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책세상문고는 중반 이후로 가면서 필자발굴이 어려운데다 글을 대강대강 쓰는 학계의 풍토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문제의식과 글쓰기가 둔해지면서 그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탁석산은 속된 말로 하면 주가가 폭등한 책세상문고의 시세차익만 챙긴 후 발을 뺐다. 책세상에서도 그리고 동시대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에서도 말이다. 가령 그에게 강의를 들었던 어떤 이는 “일본에 관한 책을 쓴다더니 그건 언제 쓸 건지…”라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이후 그의 행보는 책장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탁석산의 글짓기교실’에서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의 글쓰기 요령을 조목조목 비판한 대목이 있는데, 이것을 읽고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이 비판이 그럴듯했다고 생각했던지 장(章)의 마지막에 표로도 정리해놓았다. ‘매일 적어도 몇 줄씩 자기 생각을 글로 써보자’는 것에 대해선 ‘메모에 불과하다’, ‘내가 잘못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을 떨치자’에 대해선 ‘글쓰는 방법을 알면 불안감은 사라진다’는 식으로 비꼬았다. 서울대의 글쓰기 매뉴얼이 평범한 충고에 그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어디에나 있는 매뉴얼일 뿐이다.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반박할 만한 매뉴얼이 얼마든지 있을텐데, 굳이 그는 ‘서울대’를 걸고 넘어진다. 서울대를 우습게 만들어야, 그래야 전략이 통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여러 번 비판받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뒤집는 것이 탁석산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서울대 매뉴얼 비판에서도 여지없이 관찰된다. ‘가장 쉬운 부분부터 쓰기 시작하자’는 것에 대해 ‘가장 쉬운 부분은 없다. 글은 유기체와 같은 구조이다’라고 비판해놓고선, ‘너무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써보자’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규범이 존재한다. 일단 규범을 익혀야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쉬운 부분부터 쓰자’는 말이 글이 유기체라는 관념을 거스르는 건가. 결코 아닐 것이다. 글이 유기체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쉬운 부분부터 쓰라는 서울대의 매뉴얼은 뭔가. 일종의 방법이자 요령이고 그것이 규범 아니겠는가. 그런데 탁석산은 서울대가 규범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듯이 비판한다. 비판에도 종류가 있다. 탁석산의 서울대 매뉴얼 비판은 한마디로 불필요한 비판이자, 비판의 장식효과를 노린 비판에 불과하다.

내면의 불신과 논증의 신뢰, 그 불협화음
사실 ‘한국의 주체성’ 등은 철학자가 가한 사회비판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공감을 얻은 부분은 딱 한가지로 보인다. 주체성을 ‘정신이나 마음의 문제’가 아닌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야 주체성이 생기고 강대국에 대해서 할말도 한다는 단순논리이다. 조선시대부터 한국의 지식인들은 주체성을 너무 내면적인 것으로 파악해 몸은 식민지에 구속돼 있어도, 정신만 온전하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윤치호 등이 여기서 거론되고 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 글에서 탁석산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높이 평가했다. 물론 여러모로 미숙하다는 단서는 달지만, 아무튼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 특히 권혁범 대전대 교수가 민족과 국가에 반대하는 ‘관념적’ 태도에 잘 들어맞는다고 했다. 아니 강 교수는 권혁범 교수와는 또 다른 강단 좌파, 머리는 진보이면서 생활은 보수인 이들에게 탁석산의 책을 선물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2000년 당시 탁석산의 이런 문제제기는 신선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내면성에 대한 불신이 탁석산의 본래적 특징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책으로 출판된 그의 박사학위논문 ‘흄의 인과론’(서광사, 199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흄은 그가 20대 초반에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고 싶어 책읽기에 몰두하던 시절에 읽던 책 중의 하나였다. 그 때 그는 흄이 매우 평이한 상식적인 문제를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논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흄을 주제로 논문을 쓰다보니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먹을 듯이 읽게 되고 그러다보니 흄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흄의 인과성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을 반박한다. 오히려 전통적 해석을 새로운 논리로 옹호한다. 흄에 대한 인과론적 해석의 대표적 사례인 ‘무지 논증’과 ‘브로턴 논증’을 반박하고, 이 반박에 대한 반론인 자연주의적 해석에 답변을 시도한다. 탁석산은 흄이 경험을 넘어서는 주장에 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브로턴이 대상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힘 얘기를 꺼내면, 탁석산은 “흄의 책을 찾아보니 어떠한 인과적 힘이 존재하여 그 힘이 결과를 야기한다는 주장은 순환정의에 빠진다고 써있네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라는 식이다.

위에서 보듯 이 책의 전체적인 인상은 논증적이라는 것이다. 뭐랄까. 영미 분석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논술선생 같은 탁석산의 면모를 눈여겨본다. 가지를 쳐내고 논리의 핵심을 뽑아내 연관관계를 검토하는 모습 말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한국의 주체성’의 충격적인 주장도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주체성이 정신과 마음의 문제라면 외부 환경과 상관없이 우리가 자신을 주체적이라고 여기는 한 주체적일 수 있다. 이것은 일면 옳은 지적이지만, 약소국의 지식인이 이 점을 강조하면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사유라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결국 강대국이 원하는 약소국, 말로만 주체적이고 실제로는 식민지인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장에서 우리가 약소국이되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과 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약소국이라도 핵을 보유한다면 강대국도 결코 만만히 보지 못한다. 북한과 파키스탄이 좋은 예이다. 왜 우리는 핵무장을 하면 안 되는가? 나는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중장기적 계획을 세워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한국의 주체성’, 79~80쪽).

문제를 넘지 못하는 문제제기의 황당함
정말 놀랍다(!) 철학자가 이런 주장을 펼쳐도 되는가. “우리가 핵에 대해서 세계 인류 차원의 평화만을 공허하게 외친다면 우리의 주권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단다. 소설가 김진명하고 친구 사이인가. 그 많은 지식인들이 평화를 위해 핵을 반대하는가. 궁극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평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핵이라는 것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 남을 몰살시킬 수 있는 대형무기를 합법적으로 보유하며, 그것을 통해 타인에 대한 상시적 위협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의 못견딤, 미국중심의 핵질서에 대한 제3세계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스탠스는 아랑곳없다. 너무 단순한 주체성의 물신화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된다. 강준만 교수는 탁석산에게 핵무장을 주장하기 전에 리영희를 읽었어야 했다고 충고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특히 이 책의 71쪽에 나오는 “조금이라도 눈치를 덜 보고 살려면”이라는 조건절에 눈길이 간다. 탁석산에게 주체성이란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것이다.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 그것이 주체성의 내면성이며 내면성은 자신의 독립을 지킬 수 있는 힘의 확보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모순된 연결인가.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주체성의 원초적 본능 아닌가. 원초적 본능과 내면성은 다르지 않은가. 내면성은 어떤 성찰적 이성이 개입된 각성된 마음이 아닌가. 주체성의 내면성이란 자아-타자 관계를 복잡하게 내면화한 심리상태란 말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내가 아는 한 학자는 겨울에도 집에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어떤 사람과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장(長)과 죽어도 함께 밥을 먹지 않고 그 직장을 그만두기도 했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관계를 잘라내고 복원하는 결단의 연속을 생활의 호흡으로 삼는 것이다. 웬 핵무기를 끌어들여 민감한데다가 사람마다 다른 문제를 왜소화시키고 희화화시키는지 모르겠다.

그는 “외세는 약소민족의 역사를 종식시킬 수는 있을 것이나 그의 역사를 결정할 수는 없으며”라는 남경희 교수의 말에 대해 “이해할 수는 있으나 무리가 있다”며 “역사를 종식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역사적 결정이 있나”라고 반론을 편다. 그러면서 주체성을 내면화하는 것으로는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면화와 동시에 힘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누구의 말마따나 참으로 괴로운 철학과 경제의 결합이다. 철학의 힘만으로는 주체적 삶이 불가능하다는 그 아포리아에 경제의 논리를 잇대어 기워나가는 것은 뭐랄까 범주의 착오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경제와의 타협을 포기하고 차라리 주체성을 포기해버리는 이들은 그런 손쉬운 타협을 몰라서 안하는 것일까. 우습고 유치하고 더러워서 못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결론에서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破邪現正(파사현정)이란 말이 있다. 잘못된 것을 없애면 올바른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강대국 논리의 논파를 이런 맥락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정파사’의 전략을 택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강대국의 논리와 의도를 논파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정의를 내리고 그에 따른 행동 지침을 마련하여 잘못된 논리와 상식을 논파하려는 것이다. 올바른 논리가 서면 잘못된 논리는 봄 햇살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탁석산의 말인즉 본인은 로드맵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대로 따라오라는 말인데,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잘 그리는 로드맵을 보라. 그대로 따라갔다가 낭패 보길 한두 번인가. 게다가 탁석산은 언어문제, 핵문제에서 전문가도 아니지 않은가.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픽 웃고 말 허술한 논리, 살펴봐야 할 현실의 장애물들과 프로세스도 제대로 모르는 그런 비전문가가 사회쟁점을 열거하면서 따라오라고 하면 누가 따라가겠는가. 현정이 안 되기 때문에 파사도 안 된다.

“교과서에 적힌 것만 역사인가요?”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를 살펴보자. 민족주의를 사다리라고 말하며 그는 그것이 ‘실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實體란 말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 현실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란 의미로 탁석산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민족주의는 이념이거나 정서이거나 하기 때문에 만지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그의 논리에 의하면 실체가 아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물론 현실에서 민족의 중량감은 크다. 만질 수 없지만 없다고 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물건을 탁석산은 실체(thing)가 아닌 실재(entity)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어를 바꿔 단다고 해서 민족에 대한 그의 ‘반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탁석산의 이런 논리를 ‘실체의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여러 가지 무리한 주장을 한다.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인가. 과연 남한과 북한이 동일한, 아니면 유사한 문화를 갖고 있는가? 문화가 같으려면 정치체제, 경제구조 등의 바탕구조가 어느 정도 유사해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은 매우 상이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과연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유재산과 이자에 대해 남한 사람만큼 이해할 수 있겠는가? (…) 그래도 남북한을 같은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핏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핏줄이란 가족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민족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핏줄로 민족을 정의하려면 사돈의 팔촌의 사돈의 팔촌으로 한없이 확장해야 할 것이다.”

실체를 신봉하는 그는 정치, 경제, 문화를 보니 남북한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기억’을 보지 못한다. 생활이나 습성에 스민 전통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게 남북한 사람들을 얼마나 끈질기게 묶고 있는 것인지, 황석영의 ‘손님’(창비, 2001) 정도만 읽었다면 그렇게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탁석산도 역사를 염두에 둔다.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민족을 정의하는 것은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라며 이순신의 예를 든다. 북한 역사교과서에 이순신이 “양반 지주계급으로 봉권왕조에 충성해 싸웠을 뿐”이라고 해석돼 있기 때문에 “동일한 역사를 공유한다는 건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겨레문학의 상징이라고 떠받드는 박지원이나 김시습 같은 이는 어떤가. 그들은 남북한 사람들에게 공히 영광스러운 유산 아닌가.

심지어 실체주의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는 언어마저도 같은 민족을 삼는 보편적 기준이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와 호주는 같은 영어를 쓰지만 같은 민족은 아니라고 근거를 댄다. 역사를 돌이켜보자. 청교도와 영국이민자들이 1607년 미국에 건너와 식민지를 건설한 후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1776년까지 1백7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 후 미국과 영국은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과 북한은 어떤가. 한국전쟁 이후 고작 60년이 지났을 뿐이다. 전쟁에 참전한 이들이 많이 살아있다. 고향이 북한인 사람도 많다. 기억이 완전히 분리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남북한 문화의 이질성이 강조되는 것은 당장 남북한의 경제, 정치체제를 합쳐서 단일국가로 만들자는 급진론에 대한 반론이지, 남북한을 하나의 민족으로 정의하고 느끼는데 사용될 필요는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핏줄이 민족의 조건으로는 약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철학자 김용옥이 프랑스인 사위를 봤는데, 손자가 태어나면, 그리고 손자가 다시 외국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는다면 핏줄이 흐려지지 않느냐고 한다. 그는 확실히 역사적 사고에 약하다. 그는 논리의 좌우를 따지는 데 익숙할 뿐이지 거기에 통시적 시각을 부여하는 데는 서투른 것이다. 그 손자가 태어나고 다시 결혼해 애를 낳으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리지 않을까. 요즘 같은 담론의 민주화 시대에 30년이라는 시간은 바뀐 현실을 따라가며 민족의 배타적 테두리의 어느 한 부분을 헐어버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지 않을까.

“민족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개인의 삶을 너무 억압하고 있다”는 말도 문제의 소지가 많다. 가령 명확한 사례를 보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억압받는 건 있다. 민족이 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탁석산이 좋아하는 국민 혹은 시민의 여건을 갖추지 못해서일까. 나는 국가장치가 그들을 억압한다고 생각한다. 인종적 편견은 홀리건들이 득세하는 유럽이나 러시아보다 그리 심하지 않고, 소수 민족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정서는 대체적으로 호혜적으로 바뀌고 있다. 인터넷과 온갖 미디어들이 이 세상 곳곳을 대명천지처럼 비추는 시대에, 그것도 그 나라의 3D 업종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생활필수품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밀어내서야 그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쯤은 상식차원에서 동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민족이 대한민국 국민을 억압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스포츠민족주의(월드컵), 영토민족주의(독도·간도) 등이 시끄럽고 귀찮으면 귀찮았지 억압은 확실히 ‘오버’다.  

고정관념 깨는 맛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엘리트주의
탁석산에게는 사회적 고정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오래된 습성이 있다. 이는 그의 글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다가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구절에서 “태어나니 역사적 사명이 기다린 것이지,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은 아닌데”라고 의문이 들었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타고난 자질 같다. 탁석산을 읽으며 불편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형 글쓰기다. 물론 문제제기형 글쓰기는 중요하지만, 결과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탁석산의 문제제기는 문제를 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민족이 내용 없는 형식적 구호일 뿐이라는 식의 극단적 비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그는 “무엇을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거짓말을 하거나 별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하거나 아니면 본심을 숨기려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본인에게 정확하게 대응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엔 철학을 생각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퍼져있다. “내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철학”이라는 단순화는 보통 철학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고자 하는 책들에 퍼져있다. 탁석산의 ‘철학 읽어주는 남자’도 그렇게 시작한다. 왜 지식인은 대중에 대응하는가. ‘대중의 발견’. ‘철학이 대중과 멀다는 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하다. 멀 수밖에 없는데, 철학은 성찰적이고 더딘 것이고 괴로운 사유의 길인데, 거기 대중이 다 참여할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조선시대에 철학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 시대엔 양반이면 누구나 철학자연 하는 게 상식이었지만, 계급이 없어진 요즘은 철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 철학을 하면 된다. 사실 철학과가 너무 많고, 철학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우리 사회가 그 공급을 다 수요하지 못하는 것이지, 철학의 위기라는 말은 냉정히 보면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질 때”를 모르는 미련한 소리인 것 같다.  

아무튼 누구나 철학적 감수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철학하는 이들은 철학적 감수성이 없는 이들의 질시와 투정을 받아줘야 한다. 본인이 설 곳을 모르고 대중사회로 내려와 영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중이란 얼마나 영악한가. 나는 이 철학의 대중화를 앞에서 어려운 척 자기들끼리의 언어놀음에 빠져있는 학자들을 향해 교양주의라고 비판하는 탁석산이야말로 일종의 교양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철학자가 자신의 내공을 공개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은 누구나 관심있는 문제를, 누구나 아는 용어를 사용하여,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롭고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라는 교양의 신봉자다. 나는 진정한 철학자라면 누구도 관심 없는 문제를 그래도 한번쯤 관심을 가질 수 있게 사유해서 그 과정을 보여주는 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탁석산은 핵문제 같은 누구나 아는 문제에 대해 쉽게 풀어내지도, 탁견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극우적이고 순진한” 발상을 했을 뿐이다. 탁석산은 또 말한다.

“철학은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사유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특징인데 사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고이지 옛날 철학자들의 사유가 아니다. 물론 같은 문제를 사유하다보면 앞선 사람들의 사고를 배우고 익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 사유를 튼튼하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따라서 과거 철학자들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참조일 뿐이고 훈련과정일 뿐이다.”

요즘 누구나 입만 열면 하는 교과서적인 소리이고 개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행어에 대한 주석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철학사에 파묻혀 제대로 훈련하려면 10년은 투자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다. 10년이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인생이다.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고 현장이고 사유가 꽃피는 순간이다. 탁석산 같은 이들은 사유의 과정을 분절화하고 세밀하게 흐름화하여 그 속의 소리와 이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감수성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내 힘으로 생각한다”는 것. 이게 말처럼 그리 쉬운 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막막하게 가부좌만 틀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다는 돈오(頓悟)라는 말이 있는 것이고, 유교에서는 계속 자세를 바르게 하여 읽고 또 읽고 그대로 따라서 생활하다보면 언젠가 깨닫는바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읽기와 쓰기의 무수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교환, 피곤과 절망의 뒤범벅 속에서 피어나는 한줄기 아이디어, 대책 없는 분노와 용기에서 내질러진 비명과도 같은 말들, 이 말들이 몇번씩 부딪혀 곤죽이 되어야 그 곤죽이 길에 비로소 길을 낸다. 제대로 된 말은 자기 생각의 시체들을 깔고 흘러가기 시작한다.

열정만 있다면 재미있고도 어려운 철학책은 많다
탁석산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는지는 조금만 신경 쓰면 잘 알 수 있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옛 경전을 버려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가령 경전처럼 숭상되는 하이데거, 플라톤, 니체,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보자. 그들 중에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게 무시한다고 무시당해진다면 애초에 고전이란 이름을 달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전을 버리라는 말을 경전을 상대화해야 한다는 말로 고쳐 읽으면 그나마 말은 된다. 그것도 겨우 된다. 하나마나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 초심자들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읽기 전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보라고 한다. 그는 글쓰기 책에서 “어느 정도 규범을 알아야 그 때부터 글이 써진다”고 하더니 생각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생각이 글쓰기보다 더 쉬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생각과 글을 따로 따로 보는 것일까. 그의 말은 이렇듯 종잡을 수가 없다.

철학 깨나 했다는 이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철학을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타자화하는 것이다. “철학책이 수면제 외에는 쓸 데가 없으므로 철학 소비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적 현실이라고 제시해놓은 게, 오히려 현실을 크게 왜곡하는 경우이다. 요즘의 독자들은 약간만 지루해도 잠들어버린다. 문학이라고 과학이라고 안 그러겠는가. 심지어 책은 재미있어도 읽다 보면 잠이 온다. 그게 책이다. 책은 잠과 서로 침투하는 공생관계다. 책의 수면제 역할은 책이 책 고유의 역할 너머의 역할을 통해 자신의 매체적 수명을 연장해온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데 탁석산은 현행 ‘철학=수면제’라는 인식을 폭력적으로 일반화하고 있다.

그는 근대경험론(흄)을 전공하고 거기에서 양식을 구하는 사람이다. 경험한 것 이외의 것들은 아예 취급도 안하는 곳이 근대경험론이다. 그가 사회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찬반의견을 많이 표출하는 것도 바로 경험 가능한 사실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탁석산의 현실주의와 솔직함은 모두 경험과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것의 이치가 안보이는 모든 것보다 앞선다는 독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흄이 그랬다고 탁석산이 말하지 않았는가. 가라타니 고진은 타자(他者)를 보지 못하는 걸 가리켜 독아론(獨我論)이라고 불렀다. 탁석산은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의 폭을 넓히고 있지만, 철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유하고 말 걸고 현실을 분석하는 데에서는 경험론의 자리에 멈추어 있다. 그의 계속되는 독서와 현실관찰이 철학적 태도의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강성민 학술평론가) 

08. 12. 24.  

P.S. 한국인의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를 (부연)설명하고 있는 본론보다 내가 흥미를 갖는 대목은 부록격의 '특강'이다(한국문화론이라면 이어령, 강준만, 정수복 등의 책과 비교해봄 직하다). '불교와 주자학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이 사실은 내가 이 책에서 읽고 싶었던 부분이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더불어 불교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한다. 왜 그런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리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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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2-24 18:06   좋아요 0 | URL
^^ 재밌는 글입니다. 그의 견해에 언제나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하는 철학자죠. 그래서 좋아합니다.

로쟈 2008-12-25 00:19   좋아요 0 | URL
제가 조금 읽은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한데, 충분한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 않은 주장들도 자주 나오네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정도면 약한데요...

쉽싸리 2008-12-25 00:18   좋아요 0 | URL
크라이스트의 이브가 지났네요.
로쟈님의 종교는? 궁금^^


탁선생이 전에 "TV 책을 말하다" 진행할때, 어? 어색, 참신, 경직?? 이정도 느낌이 들었드랬습니다.
저의 단편적인 사고로는 (사정은 누구나 있겠지만/그러므로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하겠지만)박사를 따면 강의를(교수건 강사건)해야하지 않나요? 안할 수도 있겠지요, 못 할수도 있겠지요,박봉이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학문의 기본?이 그렇지않느냐는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와우!!(주님 영접하느라 UP 되어있습니다)66

로쟈 2008-12-25 00:21   좋아요 0 | URL
성탄절이라고 특별한 감회를 갖지는 않고요, 다만 아이의 선물 '궁리'나 하는 편입니다. 물론 겸사겸사 예수나 기독교에 관한 책들을 괜히 들춰보긴 하지요.^^;

2008-12-25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5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rori 2008-12-25 11:39   좋아요 0 | URL
탁석산의 탁상(산)공론인지 탁석산 까기의 탁상공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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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옛 경전을 버려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가령 경전처럼 숭상되는 하이데거, 플라톤, 니체,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을 보자. 그들 중에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이들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렇게 무시한다고 무시당해진다면 애초에 고전이란 이름을 달지도 못했을 것이다.
--------
이 부분에서 필자가 매우 화가 난 상태로 글 썼다는 걸 알았어요.
철학이 실용적인 학문은 아닌데.. (필자가)독단적 철학 숭상주의 같아요. 고전= '진리' 라고 말하는 거 같고요. 필자가 좀 편파적이네요.
그래서 제 결론은 둘 다 탁상(산) 공론. 둘 다 비생산적인 글을 배설하는 듯.

로쟈 2008-12-27 07:24   좋아요 0 | URL
사감도 좀 들어가 있다고 봐야죠..

porori 2008-12-25 11:42   좋아요 0 | URL
만약 영화감독 Jean Luc Godard가 이글을 봤다면 그나마 탁석산을 옹호할 듯.

yoonakim 2008-12-26 00:48   좋아요 0 | URL
전 속이 다 시원한대요..수년전에 대학원 총학에서 '한국의 주체성','한국의 정체성' 책이 바로 나왔을때 초청강연을 하는것을 본적이 있어요. 그 이후 그분의 책을 관심있게 본적이 없네요..ㅎㅎ..근데 참 많이 나왔네요..그런데 학술평론가...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8-12-27 07:24   좋아요 0 | URL
원래 학술담당 기자였습니다. '학술평론'이라고만 돼 있는데, 제가 '가'를 더 붙였어요...
 

강의를 위해서 연말연초에 카잔차키스의 책을 몇 권 읽는다(연말연초에는 조선사와 조선 유학, 그리고 한국학 관련서도 몇 권 읽어볼 계획이다. 연말연초가 몇 달이라도 되는 건지?). <그리스인 조르바>와 <영혼의 자서전>, 그리고 <러시아 기행>이 내가 필요에 따라 이번에 읽을 책들이다. 이미 전집까지 나와 있기에 카잔차키스의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 것이 큰 의미는 없지만, 이 세 작품 위주로 골라본다. 관련 연구서와 영역본도 지난주에 대출해놓았는데, 얼마나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니체와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와 러시아'란 주제의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는 읽었으면 싶다(참고로, 카잔차키스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니체와 베르그송이다. 젊은 시절 카잔차키스는 파리에 유학하며 베르그송의 강의를 들었고 니체에 관한 학위논문을 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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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2-24 00:32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1년간 방문자 수는 거의 압도적이군요. 단위가 다릅니다...

로쟈 2008-12-24 00:36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아담한 우물 같습니다.^^ 다른 데는 일일 방문자가 수십 만까지 가는 블로그들도 더러 있잖아요?..^^;

yoonakim 2008-12-24 09:21   좋아요 0 | URL
아..카잔차카스 전집..전 고려원판으로 다 있습니다요..반갑네, 로쟈님이 카잔차키스 얘기해서요^^ 메리크리스마스, 해피뉴이어 입니다!

로쟈 2008-12-24 09:24   좋아요 0 | URL
'카잔초프스키'라고도 하잖아요.^^ 남들 언해피할 때 해피이어하긴 어렵겠고, 그래도 건강하시길!..

무해한모리군 2008-12-24 09:52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제가 읽은 책을 언급하면 너무 기뻐요.. 그래서 지금 기쁘다는 ^^a
즐거운 성탄되세요~~

로쟈 2008-12-24 11:29   좋아요 0 | URL
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아무래도 휴일이니까요.^^

쉽싸리 2008-12-24 17:39   좋아요 0 | URL
그리스인 조르바는 같은 출판사,역자인데 가격은 다르네요.
맨위에 있는 책으로 읽은것 같습니다. 이윤기 선생이 후기에서 그리스어 원본의 영역본을 번역하는거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던것 같은데..
하여간 조르바가 자유인 같기는 하더군요."카잔차키스" 참 제 입에는 달라붙질 못해요.
yoonakim 님도 그래서 앞에는 카잔차카스 라고 하셨나 봐요. ^^

로쟈 2008-12-25 00:22   좋아요 0 | URL
전집본과 문고본의 차이입니다. 그러고 보니, 카잔차'카스'네요.^^

2008-12-25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5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1:31   좋아요 0 | URL
저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고,<전쟁과 신부>가 좋았어요.동생은 빨치산,형은 성직자...어딘지 모르게 우리나라와 비슷한 내전이라서요.

로쟈 2008-12-25 21:33   좋아요 0 | URL
전에 한번 댓글을 다셨더랬죠.^^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3:35   좋아요 0 | URL
기억하시는군요.정말 좋았어요.제가 웬만하면 무엇이 감동적이란 얘길 안하는데 그 소설은 예외였어요.통속적인 재미도 있구요.

yoonakim 2008-12-26 00:43   좋아요 0 | URL
허걱...그냥 오타인데...^^ 카잔차키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