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바흐친, 산문학의 창조

이번주 씨네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 서재> 소개 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마도 일간지/주간지 기사로는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특이하게도 바흐친에 관한 페이퍼가 언급되고 있어서 나도 오랜만에 한번 클릭해보았다. 서재를 잘 아는 필자인 듯싶어서 반갑다.    

  

씨네21(09. 06. 04) 묵은 인문서의 먼지를 털어라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인문서를 구입하느라 서평이나 리스트, 페이퍼를 참고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로쟈라는 닉을 모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바흐친의 <말의 미학>을 검색하면 로쟈의 마이페이퍼가 총 6편이 뜬다. 그중 내가 바흐친의 책을 사려는 이유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페이퍼 제목 ‘미하일 바흐친, 산문학의 창조’를 클릭하면 <말의 미학>과 더불어 읽을 만한 바흐친의 저서에 대한 뉴스 자료와 로쟈 자신의 간략한 생각을 볼 수 있다. 그 생각의 깊이가 놀라워 이 글 저 글 클릭하고, 그의 페이퍼를 하나 읽을 때마다 보관함에 책 쌓여가는 소리가 들린다. 각종 이벤트니 행사 때문에 온라인 독자 리뷰가 광고 문구처럼 여겨지는 세상에, 꽤나 귀한 서평꾼인 셈이다.

알라딘의 페이퍼에 썼던 글을 손보고 혹은 새로 써 나온 책이 <로쟈의 인문학 서재>다. 인터넷에서 클릭을 반복하며 책으로 책으로 타고 넘어가는 재미는 느낄 수 없지만 종이책으로 묶이면서 좀더 꼼꼼히 읽고 관심분야를 파고들 여지는 커졌다. 읽다 포기했던 인문서의 먼지를 털어 로쟈의 책을 옆에 두고 가지고 있는 책이 인문학의 지형도에 어디 놓이는지 확인하고 다시 한번 읽기를 시도해도 좋겠다.  

저자가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특히 그에 관련된 글을 신뢰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의 글을 애독해온 입장에서는 특정 언어나 특정 언어권의 문학에 제한을 두지 않고 신뢰할 만하다. 대학생들, 혹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법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책은 “한권으로 끝내는” 어쩌고 하는 인문학 실용서가 아니다. 안 읽은 책을 읽은 척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인문서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하여’, ‘김기덕의 <사마리아>와 <빈집> 읽기’와 같은 글을 추천한다.(이다혜 기자)  

09. 06. 04. 

P.S.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18금'인 글들도 포함돼 있어서 어떨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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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송받은 책들 가운데 하나는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 2004)다. 로이의 이름은 여러 차례 거명한 적이 있는데, 사실 나는 그녀의 책을 한 권도 갖고 있지 않았다. 기억에 인도의 걸출한 이 작가-지식인의 이름을 인상적으로 접한 건 가라타니 고진의 글에서였던 듯하다. 로이는 문학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문학 바깥으로 나간 작가/비평가로 김종철과 함께 거명되었다. 그녀의 정치평론선인 <9월이여, 오라>는 제목 때문에(!) 해마다 9월이면 떠올리게 되는데, 어인 일인지 매번 보관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주장과 메시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가길에 읽으니 이미 알고 있어도 읽어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아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것처럼 말이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2004년에 나온 책은 2005년에 2쇄를 찍었을 뿐이다.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참에 '아룬다티 로이의 모든 책'이라고 적어둔다. 덧붙여둘 만한 관련기사를 찾으니 지난달에 고종석의 기획연재 '여자들'에서 다뤄진 적이 있다. 다소 길지만 옮겨놓는다. " 명민하고 열정적인 글쟁이에게 나는 질투와 연대감을 동시에 느낀다."란 마지막 멘트는 나의 느낌과 별로 다르지 않다. 거기에 부듯함과 고마움을 덧붙여도 좋겠다... 

 

한국일보(09. 05. 18)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6> 아룬다티 로이 

최근 10년 사이에 미국의 주먹(군사적 신보수주의)과 보자기(경제적 신자유주의)에 맞서 가장 열정적으로 펜을 휘두른 논객은 누구일까? 얼른 떠오르는 사람은 그 전부터 미국 정부의 정책에 비판의 펜촉을 들이댄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나 역사학자 하워드 진 같은 원로들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한두 세대 아랫사람으로서 근년에 이들 못지않게 눈길을 끈 이가 있으니,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48)가 그녀다.

그녀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첫 소설이자 지금까지의 유일한 소설 <작은 것들의 하느님>이 1997년 명망 있는 부커상을 수상한 뒤다. 작가의 어린 시절 체험을 반영한 이 반(半)자전소설은 그 해 뉴욕타임스의 '주목할 만한 책'(Notable Books of the Year)으로 꼽혔고, 그 신문의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4위에 올랐다. 그해 5월 출간된 이 소설은 6월 말에 이미 18개국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오늘날 한국어를 포함한 40여 개 언어로 번역됐다. 평단의 반응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로이는 첫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과 부를 얻은 드문 소설가다. 

 

소설쓰기는 그녀의 첫 번째 소명이 아니었다. 뉴델리 도시계획건축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로이는 방송과 영화 쪽에서 이력을 시작했다. 시나리오와 극본에서 단련된 그녀의 손가락이 소설 <작은 것들의 하느님>에서 풀리면서 일을 낸 것이다. 로이는 이 첫 소설로 저명인사가 된 뒤 다시 시나리오와 방송극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것들보다 더 몰두한 것은 정치에세이들 쪽이었다.

로이 자신은 소설가로 불리기를 더 원할지 모르지만, 스무 권이 넘는 그의 책 가운데 소설은 단 한 편이고 나머지가 모두 (강연 원고를 포함한) 에세이이므로, 에세이이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의 시나리오와 방송극과 소설 속에 잠재해 있던 수사(修辭)와 논리의 힘은 그녀의 에세이에서 진면목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수많은 친구와 그만큼의 적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는 인도의 핵개발과 대규모 댐건설 공사를 비판한 에세이 <생존의 비용>이 2003년 번역된 이래, 그 이듬해에는 정치에세이와 강연문 일부가 <9월이여, 오라>라는 제목으로 편집 번역되었고, 역시 에세이와 강연문 모음 <보통사람을 위한 제국가이드>도 번역됐다. 출간 즉시(1997년) 번역된 <작은 것들의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로이는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첫 소설말고 로이의 국제적 명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은 2001년 9ㆍ11테러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본격화했다. 그녀는 영국 신문 가디언에 기고한 '왜 미국은 당장 전쟁을 중지해야 하는가?'에서 "아프가니스탄 공습은 뉴욕과 워싱턴 참사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 인민에 대한 테러"라고 썼다. 그녀가 보기엔 세계무역센터 공격이 테러리즘이듯 아프가니스탄 공격도 테러리즘이었다. 특히 그녀는 부시 주니어와 미국의 총애를 받는 '대사(大使)' 토니 블레어가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 식의 이중언어(더블싱크)를 사용하고 있다며, 외국에 공습을 가하는 그 순간에도 자기들은 평화국가라고 주장하는 이들 덕분에 '돼지'는 '말(馬)'을, '소녀'는 '소년'을, '전쟁'은 '평화'을 뜻하게 됐다고 비꼬았다.

이 글에서 그녀는 미국이 평화애호국이라는 부시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전쟁을 벌인 나라들을 열거했는데, 좀 길지만 여기 옮겨 놓아보자. 중국(1945~46, 1950~53), 북한(1950~53), 과테말라(1954, 1967~69), 인도네시아(1958), 쿠바(1959~60), 콩고(1964), 페루(1965), 라오스(1964~73), 베트남(1961~73), 캄보디아(1969~70), 그레나다(1983), 리비아(1986), 엘살바도르(1980년대), 니카라과(1980년대), 파나마(1989), 이라크(1991~99), 보스니아(1995), 수단(1998), 유고슬라비아(1999),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이들 나라를 열거한 뒤 로이는 "확실히 미국은 지치지 않는다"고 썼다. 맞다. 미국은 로이의 이 발언이 나온 지 두 달도 채 안 돼서, 9ㆍ11테러와 아무 상관도 없고 대량살상무기도 지니지 않은 이라크를 다시 침공해 지금까지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로이가 열거한 전쟁들은 미국 정보기관들이 일상적으로 벌인 파괴, 살상, 쿠데타 조종 같은 비밀공작들을 제외하고 셈한 것이다.

로이의 주장은 늘 상식적이다. 미국 스타일 자본주의가 이 사태의 주범이라는 것, 군수산업, 석유산업, 주요 미디어네트워크, 외교정책 따위가 동일한 자본복합체 아래 있기 때문에 미국은 전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 따위다. 그러나 이 평범한 상식을 끌어내는 그녀의 문장은 너무나 힘차고 아름다워서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녀의 정치적 목소리는 에세이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세계지식인들과의 연대서명운동과 강연을 통해서도 이뤄졌다. 그녀는 자신을 선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연설은 적절한 수사와 공격성이 아름답게 결합된 일급 선동문이다. 

 

라난재단 주최로 2002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에서 행한 유명한 강연 '9월이여, 오라'에서, 로이는 2001년 9월11일을 피노체트가 미국 CIA 지원으로 칠레의 합법 정부(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1973년 9월11일, 영국 정부가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언한 1922년 9월11일 등과 포개며, 앵글로-아메리카와 이스라엘이 제3세계에 저지른 범죄들을 추궁했다.

이 아름다운 연설문의 들머리에서 그녀는 소설가 로이와 에세이이스트 로이를 일치시키며 "논픽션과 픽션은 이야기를 전하는 기법의 차이일 뿐입니다.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픽션은 내게서 춤추듯 흘러나오고, 논픽션은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 맞이하는 이 고통스럽고 깨진 세계가 비틀어 짜듯이 내보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그녀는 미국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인스턴트-믹스 제국민주주의'라는 강연을 통해 자신을 '미 제국의 한 신민'이자 '왕을 비난하는 노예'로 비유하며, 미국을 "신으로부터 직접 정당성을 부여받아 아무 때나 그의 속국들을 폭격할 권리를 보유한 지구제국"으로 묘사했다. 2006년 부시가 인도를 방문하자 로이는 그를 '전범'이라 비난했고, 같은 해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자 그는 촘스키, 하워드 진 등과 성명서를 발표해, 그것을 '전쟁범죄'이자 '국가테러'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로이의 정치활동이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군사주의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공공의 더 큰 이익'과 '상상력의 종말' 두 편의 에세이로 이뤄진 <생존의 비용>에서 보여주었듯 그녀는 나르마다 강 댐 프로젝트로 상징되는 인도의 성장우선정책과 핵개발에 반대했고, 더 나아가 카시미르의 독립을 옹호했다. 그녀는 또 어떤 사회운동이 폭력을 수반했을 때, 그것을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의 맥락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반대하는 것은 이른바 세계화 자체다. 그녀 생각에 세계화란 원격조종되고 디지털 방식으로 작동되는 변종 식민주의이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녀 생각이다.

그러나 그녀의 '현실주의적' 정치 활동은 그녀의 적들로부터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동료들로부터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곤 했다. 특히 나르마다 강 댐 건설이 관개나 식수공급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수천만 주민들에게 고향만 빼앗을 것이라며 반대했을 때는, 생태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그녀에게 용기와 신념은 있지만, 그녀의 언사가 너무 과장됐고 단순하며 세계를 마니교적 2분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로이의 대답은 이랬다. "내 글의 열정적이고 히스테리컬한 톤은 의도적인 것이다. 나는 히스테리컬하다. 나는 유혈이 낭자한 지붕 위에서 소리 지르고 있다. 나는 점잔을 빼며 '쯧쯧쯧' 하고 싶진 않다. 나는 내 이웃들을 깨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목적의 전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뜨기를 바란다."

미국과 이스라엘, 탈레반 등의 근본주의와 목하 진행되는 세계화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 역시 또 한 사람의 근본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약한 자들을 위한 근본주의고, 때로 지나쳐 보일 때도 있지만 정의감각과 조율되는 근본주의다. 이 명민하고 열정적인 글쟁이에게 나는 질투와 연대감을 동시에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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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여, 오라-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2009년 06월 03일에 저장
구판절판
생존의 비용
아룬다티 로이 지음, 최인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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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
아룬다티 로이 지음, 정병선 옮김 / 이후 / 2005년 9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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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당대비평, 평화네트워크 공동 기획
노암 촘스키 외 지음 / 삼인 / 2001년 11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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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장대 같은 소나기가 내리는 탓에 학교 강사실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마침 건축 전문 월간지 <공간(SPACE)>(6월호)이 배송되었기에 막간에 잡지에 실은 서평이나 옮겨놓는다. 예술경제학서로 분류되는 한스 애빙의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21세기북스, 2009)에 대한 것이다. 글은 잡지에 게재된 버전으로 수정했다.

SPACE(09년 6월호)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란 소설 제목도 있지만, ‘예술가’를 가장 빈번하게 수식하는 형용사는 ‘가난’이 아닐까 싶다.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이야말로 예술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구성한다. 비록 ‘부유한’ 예술가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발표되는 예술가들의 경제형편에 대한 설문결과는 그러한 고정관념과 배치되지 않는다. 대다수 예술가들의 평균소득이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며, 창작만으로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소득 제로’ 예술가도 적지 않다. 반면 생존 작가의 그림이 100억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나 반 고흐의 그림은 1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낙찰되기도 한다.  

상위 5%의 스타급 예술가들이 전체 소득의 95%를 가져간다니 예술사회 또한 전형적인 ‘승자독식사회’지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뭔가 특이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가들의 소득수준이 낮은 이유는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왜 예술분야에서는 각종 지원이나 기부 등의 후원영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일까? 네덜란드의 예술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은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21세기북스 펴냄)에서 바로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책의 부제는 ‘예술경제의 패러독스’로 간단히 말하자면 예술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 멋들어진 오페라하우스와 화려한 오프닝, 엄청나게 부유한 예술가와 부유한 후원자들의 세상이 하나의 얼굴이라면, 자기 돈을 써가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다른 부업과 여러 가지 지원금을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또 다른 얼굴이다. 한편에서는 예술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상업성을 외면하고 혐오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외면/혐오를 상업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대관절 예술이 무엇이기에?  

사회학적 관점에서 저자가 내리고 있는 예술의 정의는 이렇다. “예술이란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무엇이 예술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정의에서 ‘사람들’이 가리키는 건 대중이라기보다는 ‘예술계’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이다. 즉,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자면 “예술이란 일부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인 셈이다. 이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예술이 특정한 사회적 계층이 갖고 있는 예술적 취향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으며 예술을 정의하는 힘은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분포돼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회적 계층에 따라 각기 다른 예술적 취향을 갖고 있다. 우월한 예술과 열등한 예술,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의 구분은 그러한 취향의 차이가 낳는다. 그럼에도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다면 그건 한 그룹의 예술적 취향은 무시되는 반면에 다른 그룹의 예술적 취향은 존중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저자는 ‘문화적 비대칭성’이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는 일부 계층이 독점하며, 예술은 그들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처럼 되고자 ‘신분상승’을 꿈꾼다. 즉 ‘사회적 사다리’에 올라타고자 하는 것인데, 상징적인 차원에서 그 ‘사다리’에 해당하는 것이 상위계층의 예술적 태도와 취향이다. 곧 상위계층은 하위예술을 무시하지만, 하위계층은 상위계층을 동경한다. 예술에 대한 신화와 일반적 숭배는 그렇게 탄생한다.  

예술은 실용품이라기보다는 사치품이다. 어떤 실용적인 용도를 목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경험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비실용적이고 사치스러운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 정의되고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예술의 그러한 존재방식 자체가 귀족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비실용성은 실용성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매력이 된다. 자신의 지위와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시장은 문화적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장이 되며, 특정한 예술가에 대한 주목과 과잉경쟁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결과적으로 예술시장은 극소수의 예술가가 천문학적 수입을 올리는 승자독식시장이 되며, 마치 복권에서처럼 ‘당첨자’를 제외한 대다수 예술가들은 빈곤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렇다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후원을 얻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강한 예술창작의 동인이 되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을 대신한 ‘심리적 소득’, 혹은 ‘비금전적 내적 보상’이다. 바로 자신이 재능이 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예술가들의 가난과 예술세계의 구조적인 빈곤이 지속되는 이유이다.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게 되면 예술경제의 특수성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도 사회적 계층이 존재하는 한 예술경제의 특수성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09.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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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usDei 2009-06-0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책 출간 이벤트에 실력과 운이 없고 타이밍도 맞지않아 참여를 못했는데, 대신 '예술가는 왜 가난해야할까'라는 제목에 몇자 씁니다. 얼핏 쓰려니 거친말 같아서 네이버 사전을 찾으니 '사물의 모양새나 됨됨이'라는 뜻이 있군요. 꼴. 예술의 값어치는 꼴값에 표현하려는 내용이나 의미가 더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예술가도 돈을 벌수있어야한다, 돈을 벌 수있다 라는 생각자체를 폐기해야할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09-06-02 22:21   좋아요 0 | URL
저는 책을 예술사회가 왜 승자독식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진단과 분석으로 읽었습니다. 분명 일부 예술가들은 떼돈을 벌 수 있고, 또 벌고 있지요...

nanousee 2009-06-03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설치미술을 하는 작가입니다. 예술창작의 동인이 되는 것은 비금전적 내적 보상, 자신이 재능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여전히 예술가라고 정의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작가신화 계급적 사고를 동의할 때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작가는 자만심보다는 좌절때문에 자기기만보다는 해야 하기 때문에 움직입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결론은 같다고 인정하나 일종의 개별의견을 내는 과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고호의 그림값, 5프로의 스타급 예술가 승자독식사회는 바로 지금 우리 여기에서도 같은 잣대를 쓰고 있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할까라는 질문에 이미 신화적 읽기가 반복되있다는 생각에 좀 긴 댓글남깁니다...

로쟈 2009-06-03 23:29   좋아요 0 | URL
예술가의 가난은 '신화'가 아니라 '사회학적 사실'이 아닐까요? 그리고 저자의 주안점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예술사회'입니다. 사회학자의 관점은 예술가내부의 시각과는 좀 다르겠지요...

nanousee 2009-06-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그런데요, 이 정부 들어와서는 미술쪽 탄압도 심해졌고 기금들은 줄줄이 삭감되었죠. 그러면서 늘 이런 식의 얘기를 하죠. 예술가는 배가 고파야 작품이 나온다..빨리 죽인 다음에 값을 올리는게 남는 장사라는건 알겠는데 일반인들도 그렇게 굶어죽어간 고독한 화가여야 신화에 의존해 작품을 보려든다는 문제를 말씀드린겁니다. 사회학적 사실이 어쨋건 상위계층이 만드는 취향에 부단하게 전복하려는 노력을 작업에서 읽어낼 수 있는가를 덧붙여 주문해봅니다..

로쟈 2009-06-05 08:41   좋아요 0 | URL
서경식 선생의 <고뇌의 원근법>이 새로 나와서 보고 있는데, "상위계층이 만드는 취향에 부단하게 전복하려는 노력" 같은 걸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예술경제학은 그냥 예술'시장'을 대상으로 하지 예술가의 고뇌를 다루지는 않고,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신화는 또 별도의 문제라고 봅니다...

nanousee 2009-06-0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뇌의 원근법도 로쟈님이 리뷰해주시리라^^믿으며..그리고 이 기회에 항상 보물창고같은 로쟈님 블로그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예술시장을 대상으로 하면서 예술가의 고뇌가 어떻게 가격으로 매겨지고 사회적 신화는 또 별도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면 이 책 이상할 것 같아요-_-;; 신화를 만들고 팔기 위해 그리는 작가들의 전략이 얼마나 또 복합적으로 결탁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취향의 계급을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해지네요. 아 제가 읽어보지도 않고 로쟈님 리뷰 마지막 단락에서 마음이 걸려서 처음으로 댓글을 쓰기 시작했었습니다. 이 김에 한가지 딴 질문 더 물어봐도 될가요^^*왜 지젝사진? 지젝이 설마 잘 생겨서는 아니시죠?^^

로쟈 2009-06-05 16:13   좋아요 0 | URL
그의 열정과 광기에 대한 경의 표시입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후마니타스, 2009)를 다루고 있다. 두툼한 책이어서 정독할 수는 없었지만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한겨레21(09. 06. 08) 유러피언 드림은 어디에 있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읽던 책은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민음사, 2005)이었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란 부제가 말해주듯이 몰락한 ‘아메리칸 드림’의 대안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 의식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요체이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비전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비전은 유럽이 참혹한 현대사의 기억에서 길어낸 것이란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20세기 유럽 현대사’를 다룬 마크 마조워의 신간 <암흑의 대륙>(후마니타스 펴냄)은 유럽의 ‘꿈’을 빚어낸 그 ‘암흑’에 대한 철저한 탐사이고 성찰이다.  

 

이미 ‘유럽 공동의 교과서’가 우리에겐 소개된 적이 있다. 1997년에 개정판이 나온 <새 유럽의 역사>(까치, 2002)가 그것이다. 14명의 유럽 역사학자들이 공동집필한 이 책에서 20세기 유럽의 역사를 다룬 마지막 세 장은 각각 ‘자기파괴를 향하여(1900-1945)’ ‘분열에서 상호 이해로(1945-1985)’ ‘통합 유럽을 향하여(1986-1996)’라고 제목이 붙여졌다. 1998년에 출간된 <암흑의 대륙>도 역시 1940년대를 20세기의 분수령으로 본다.  

단순한 통계만으로도 그 앞뒤의 두 시기는 확연히 구분된다. 195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 시기에 전쟁이나 국가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6천만 명이 넘는데 반해, 그 이후엔 유고내전을 포함하더라도 1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갈등과 분쟁은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지만, 20세기 전반기 유럽에서 일어난 희생은 적어도 규모에서만큼은 달리 유례가 없다. 현대적 관료체제에 기술이 동원되었기 때문인데, 1870년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사망자가 18만4천 명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800만 명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4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졌다. 이 정도면 ‘암흑의 대륙’이라는 비유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한 유혈과 야만의 역사야말로 ‘유러피언 드림’의 밑자리가 아닌가.   

계몽주의의 유산을 자랑하는 유럽에서 이러한 참상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20세기의 역사에서 정치가 경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교훈을 끌어내는 저자는 가치나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유럽은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이었다. 혹은 서로 경쟁하는 세 이데올로기의 교전장. 20세기 초에 자유주의자 윌슨은 자유민주주의의 이상향을 꿈꾸었고, 레닌은 해방된 공산주의 사회를 약속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순수 혈통의 종족들이 숭고한 목적을 지향하는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저마다 인류를 위한 새로운 질서, 곧 유토피아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실험은 모두 엄청난 희생만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다.  

1945년 나치즘의 몰락과 1989년 공산주의의 붕괴는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뜻한다는 시각도 있지만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유럽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정착이 한편으론 자본주의의 승리를 동반한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이데올로기에 지친 유럽인들이 정치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결과라고 본다. 민주주의에 대한 높은 지지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상관적이며 서로 비례관계에 놓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분명 유럽은 변화했다. 많은 교훈을 얻어서라기보다는 시대가 바뀌어서다. 과거 전쟁의 빌미가 되었던 전쟁이나 제국, 영토 같은 것이 국가적 안녕에 덜 중요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탓이다. 유럽이 갈등과 경쟁 대신에 협력과 합작을 선택했다면 그것이 자신들의 번영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라는 체제는 정치적 기획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순응’이라는 것이 저자의 냉정한 판단이다. 그렇다면 유러피언 드림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유럽이 갖고 자랑할 만한 유산이 아니라 이제라도 창안해내야 할 어떤 가치이고 이념이 아닐까? 유럽의 ‘빛’은 그 ‘암흑’이 거꾸로 드러내는 반면교사로서의 빛이다

09. 06. 02.  

P.S. <암흑의 대륙>의 번역은 유려한 편인데, 한 군데 오역이 눈에 띄어 지적해둔다. 러시아 혁명에 관한 대목인데, "레닌을 포함한 좌파들도 제헌의회를 도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를 경우에도 불필요한 단계였던 '부르주아의 지배'를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다."(29쪽)는 구절. 번역으로만 읽어도 오역이어서(마르크스는 단계론적인 혁명을 주장했다) 원문을 확인해봤다. "The Left, including Lenin, was pressing for a Constituent Assembly in order to usher in the period of 'bourgeois rule' which according to Marxist theory was now needed."(10쪽) 짐작엔 'was now needed'를 'was not needed'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다. 사소한 착오이지만 정반대로 옮긴 것이어서 결과는 사소하지 않다. 교정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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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6-0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책에 나오는 데리다-하버마스의 성명인가요 ^^ <암흑의 대륙>은 한겨레에서 봤을때부터 보고 싶어지더군요.
로쟈님의 책을 보면서 그동안 별로 생각해 보지않았던 로쟈님에 대한 구성-그래봐야 부질없는 조각맞춤이겠지만-을 해본다는... 어쨋거나 별 무리없이 잘 읽고 있다는 중간보고를 말씀드립니다. 리뷰를 써야할까에 대해 고민중인데..아직 알라딘에 리뷰다운 리뷰가 올라오고 있지 않은 것은 로쟈님과의 근접성때문이 아닐까 싶기도하고...^^

로쟈 2009-06-02 13:15   좋아요 0 | URL
사실 글모음, 내지는 글보따리여서 서평을 쓰기도 애매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눈치들도 보시겠지만.^^;
 

달이 바뀌었다. 아니 계절도 바뀌었군. 게다가 바쁘게 또 한주들을 시작하는 월요일이지만, 이번 학기에는 시간표상 딱 월요일 오전이 자유시간이다. 하지만 대개 이 자유는 무기력에 바쳐지곤 한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저명한 중국사학자 레이황(황런위)의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새물결, 2004)에 대한 기사를 읽으니 '이 책이다!' 싶다. 아무일도 하지 않을 때, 혹은 하고 싶지 않을 때 읽어볼 만한 책! 나는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 1997)로 읽었는데, 어느새 12년 전이다(이런 역사서도 가능하구나, 라고 경탄했던 책이다). 그 사이에 두 판본은 모두 절판된 상태다. 책이 다시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6. 01) [책읽는 경향]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결국 나라가 망하다

1587년은 명(明)의 운명이 걸린 해였다.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레이 황·새물결)는 위기상황에서 혁신이냐 쇠락이냐의 갈림길을 가늠하지 못하면 한 국가가 어떻게 망해가는지를 보여준다. 중국계 미국사학자인 저자는 명 말기 만력제·장거정·신시행·해서·척계광·이탁오의 평전과 정사 등을 꼼꼼하게 분석, 실타래처럼 얽힌 역사적 사실을 소설처럼 풀어낸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패배한 역사적 전환점이던 1년 전, 중국은 사소한 일이 다소 있을 뿐이었다.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장거정이 5년 전 죽고 만력제는 지루한 일과에 지쳐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무위이치(無爲而治)하고 있었다. 대학사 신시행이 감독하는 경연(經筵)은 황제에겐 고된 과외였다. 관료들은 경연을 통해 황제를 제어하려 했다. 황제에게 충성하기보다는 도덕적 통치기풍(陽)과 숨겨진 욕망(陰)을 황제를 통해 조절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을 고안해낸 것이다. 



군사제도의 혁신을 꾀한 척계광은 모함으로 문관들에게 탄핵되고 1588년 1월 병사했다. 척계광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30년 후 청(淸)에 패하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해 이탁오는 머리카락을 깎고 중과 유학자의 경계를 넘나들다, 문관들의 고발로 체포돼 결국 옥중에서 자신의 목을 베었다. ‘왜 자해했는가’ 묻는 옥사장에게 그는 “늙은이가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었겠소” 하고 숨을 거두었다. 자유로운 사상과 과감한 언설을 거리낌없이 설파하던 그에게 조정이 선물한 것은 죽음이었다. 1587년 그 해, 뭔가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명은 망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무일도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 그들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민철기 임원경제연구소 번역팀장) 

09. 06. 01. 

P.S. 물론 '혁신적인 변화'와 그러한 변화를 차단하는 '변화의 제스처'는 구별되어야 한다. 공권력을 남용하고 상상 이하의 일들을 벌이느라 바쁜 정권도 실상은 '아무일도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이다. "그들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런 교훈과 함께 또 월요일 아침을 짜증스럽게 하는 소식 한 토막(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46180).   

 

1.5km 정도 거리를 가볍게 걸어서 봉하마을에 들어섰더니, 눈에 띄는 '알림판'이 두 군데나 붙어 있었습니다. 아마 국민장이 끝났음에도 전국 각지에서 봉하마을을 찾아오는 조문객들에게 밥 한 그릇은 고사하고, 물 한 그릇도 대접할 수 없는 자원봉사자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써 붙인 안내문인 듯하였습니다. 

"행안부와 김해시의 식사 및 식수지원이 중단되어 부득이 조문객 여러분께 지급해드리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 자원봉사자 일동"

김해시와 행자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틀이 지나고서 여론의 질타를 당한 후에야 부랴부랴 식수와 식사를 지원하더니, 국민장이 끝나자마자 모든 지원을 완전히 중단하였다는 것입니다. '뻑' 하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 이놈의 나라, 참 인심 한 번 야박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국민장 기간이 끝났다고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국민들이 끊이지 않고 봉하마을을 찾고 있는데, 밥 한 그릇은 고사하고, 물 한 그릇도 대접해주지 못하는 것이 김해시 인심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들' 또한 아무일도 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과 성을 다해 모든 집회를 봉쇄하고 모든 비판을 틀어막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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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6-01 11:42   좋아요 0 | URL
하하핫, '그들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군요.

로쟈 2009-06-01 23:18   좋아요 0 | URL
애들 크는 걸 보면 시간도 아니죠...

비연 2009-06-01 12:29   좋아요 0 | URL
정말,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동네 개가 다 웃을 짓을 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빨리 가급적 빨리 소멸되기를...

로쟈 2009-06-01 23:18   좋아요 0 | URL
시계에 밥을 더 많이 줘야겠습니다...

푸른바다 2009-06-01 13:10   좋아요 0 | URL
이 사람들은 임기중 가능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국가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로쟈 2009-06-01 23:17   좋아요 0 | URL
그 전에 물러나면 더 좋긴 한데요.^^

베토벤 2009-06-01 18:54   좋아요 0 | URL
어떻게 타이밍이 맞았는지 출판사 측에서 한달 정도 있으면 재발간된다는군요.

로쟈 2009-06-01 23:17   좋아요 0 | URL
오, 굿뉴스네요.^^

치타 2009-06-01 19:26   좋아요 0 | URL
맨 아래 차단된 '광장'사진,
이보다 더 완벽하게 우리의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있을까요.

로쟈 2009-06-01 23:17   좋아요 0 | URL
명박산성이 있었죠.^^;

테레사 2009-06-03 12:39   좋아요 0 | URL
로쟈라니, 박노자의 서재라고 생각한 적은 있는데, 역시 러시아와 관련이 있긴 있었구나..혹시 알런지 모르겠지만, 아무일도 없었던 해를 펴낸 가지않은 길은, 나를 포함한 몇 명이 만든 출판사였지요. 모호한 꿈만큼이나 그냥, 모호하게 끝나버린 어떤 시도였던 셈인데, 그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하는 사실에 놀랍네요. 어제 처음 로쟈씨의 정체를 신문광고란에서 우연히 보고, 블로그란 곳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는데, 그리고 댓글 한줄 남겼는데 지워졌나보네요...시집을 낸게 아니라 에세이(?)를 내다니..암튼...

로쟈 2009-06-03 23:30   좋아요 0 | URL
ㅎㅎ 아는 분 같군요...

rei 2009-06-04 19:55   좋아요 0 | URL
와,,,이책 저도 예전에 도서관에서 보고 재발간 소식 기다렸는데..근데 위에 이책 만드신 분이 오셨네요..레이황의 이 책과 더불어 같은 년도의 서양에서 있었던 큰이라고 하시면서 아르마다 다룬 한권도 같이 내셨던거 같은데 억시 그책도 굉장히 재밌었구요.....그쪽은 재발간 소식 없나요..^^

로쟈 2009-06-05 08:48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책도 있었죠. 재간 소식은 못 들었는데, 다시 나오면 좋겠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6-04 22:3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선 만력제가 임진왜란 때 군대 파병해 줬다고 만동묘를 만들어 기념하고 대단했는데...사대주의의 상징이지요.사실 중국사에서 만력제도 무능군주에 속합니다.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혈맹이라면서 떠받들었지만요.

로쟈 2009-06-05 08:49   좋아요 0 | URL
유능군주가 예외적인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