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날씨는 정말로 완벽했다”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 네 번째 이야기를 옮겨놓는다. '네 번째'라고는 하지만, 지난번에 다룬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에 대한 내용의 연장이다. 이야기는 이 글에서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중간다리' 정도라고 해야겠다. 작품에 흥미를 느끼다 보면 다시 읽게 되고, 다시 읽다 보면 또 다른 흥미가 생기기 때문에 오래 붙들고 있게 된다. 계획엔 '타자로서의 이웃'이란 테마까지 다루고 나서야 '파티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싶다. 역시나 글의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6606 를 참조하시길.  

 

다시 날씨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지난번에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첫 문장을 “어쨌거나 날씨는 정말로 완벽했다.”고 옮겼는데, 세계단편문학 영국편 <가든파티>(창비, 2010)에서는 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그리고 어쨌든 날씨는 이상적이었다.”(And after all the weather was ideal.)라고 옮겼다. ‘충실하다’고 한 건 ‘And’를 ‘그리고’로, ‘ideal’을 ‘이상적’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누구나 문맥과 관계없이 단어만 접한다면 일감으로 떠올릴 만한 번역이다. 그리고 그게 때로는 작품 분석에 더 유용하다. 이 경우에는 특히 좀 예외적인 서두인 ‘그리고’란 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상식적인 사실을 확인해두자면, ‘그리고’란 접속사는 앞에 무엇인가의 존재를 전제한다. 한데, ‘그리고’가 텍스트의 시작이므로 그 ‘앞’은 텍스트의 ‘바깥’이다. 텍스트의 바깥을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작품에서 ‘텍스트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사진에 비유하자면 이것은 사진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화면 바깥의 화면, 곧 외화면(外畵面)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상 “사진은 회화와는 달리 반드시 실제로 지각되는 풍경에서 일정 부분을 따온 것”인데, 그것을 사진의 ‘인용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의 인용성은 사진의 외화면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보이는 화면이 보이지 않는 화면을 끌고 들어와 한데 결합됨으로써 사진의 전체 화면이 형성된다. 이때 화면이 의식의 영역이라면, 외화면은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무의식적인 외화면이 없이는 사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회화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조광제, '철학으로 본 매체',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199쪽)

‘외화면=무의식의 영역’이라는 주장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진의 인용성이 어떤 것인지 이 인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가든파티>에서 ‘그리고’는 이 인용성의 지표라 할 만하다. 그리고 첫 문장에 이어서 바로 “설령 그들이 미리 주문을 했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가든파티에 어울리는 날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화자는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들’이라는 3인칭 대명사는 일반인칭(‘사람들’)이 아니라 곧 등장하는 셰리던 씨 가족을 가리킨다(둘 다 가능할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곧 가든파티 주최측이다. 1인칭 소설이 아닌 이야기의 서두에서, 고유명사보다 3인칭대명사가 먼저 등장하는 것 역시 일종의 파격이다. ‘그’ ‘그녀’ ‘그들’이란 3인칭 대명사는 1인칭과 2인칭(청자 혹은 독자)을 미리 전제해야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같은 대목을 다르게 옮긴 번역본들과 비교해보면 식별할 수 있다.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가든파티에 적당한 날씨를 미리 주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한 날씨를 구하진 못했을 거다.”(<가든파티>, 강)

“어쨌거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었다. 가든파티를 위해 특별히 날씨를 주문했다 해도 그보다 완벽한 날은 없었을 것이다.”(<가든파티>, 펭귄클래식)

이 번역들에서 원작의 ‘인용성’은 지워지거나 최소화됐다. 그래서 깔끔하다. 외화면을 거느린 원작의 ‘사진성’을 ‘회화적’으로 처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콘텍스트를 배제한 만큼 텍스트의 자기완결성이 더 높아지긴 했지만, 맨스필드의 원작은 좀 불안정하며 시작부터 ‘완벽’하지 못하다. 물론 이 ‘완벽하지 못함’은 작가적 의도의 소산이다. (...)

그렇다면, 작가가 단편소설의 미적 자질로서 ‘자기완결성’까지 훼손해가면서 ‘그리고’란 접속사로 작품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날씨는 이상적이었다.”(The weather was ideal.)란 평범하지만 순탄한 서두 대신에 파격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인용성’이 갖는 효과에 주목하고 싶다. 사진의 인용성은 외화면을 화면 안으로 끌고 들어옴과 동시에 화면을 외화면으로 끌고 나간다.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인용성은 콘텍스트를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텍스트를 콘텍스트로 데리고 나간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의 지시성이 강화된다. 텍스트의 경계, 곧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만큼 텍스트에서 제기된 문제는 텍스트 바깥으로 쉽게 번져나간다. 그에 따라 주인공의 물음은 독자의 물음으로 전이된다.  



<가든파티>의 번역자 김영희 교수는 짤막한 해설에서 이 작품이 “어른들이 대변하는 중산층적인 계급적 가치와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심성 사이에서 동요하는 어린 소녀 로라의 시선을 통해 삶과 죽음, 계급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나는 로라의 시선을 통해 죽음과 노동자계급이라는 ‘타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정리하겠다. 크게 두 가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어째서 로라의 시선이 필요한가? 그리고 ‘죽음’과 ‘계급’이라는 타자와의 조우는 이 작품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로라의 시선’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히 답해질 수 있다. 로라가 제일 처음 호명되는 대목에서 암시되기 때문이다. 가든파티를 위한 천막을 치기 위해 인부들이 도착했을 때 인솔자로 한 명이 나서야 했는데, 이 셰리던 씨 집안의 네 남매 가운데 로라가 낙점된다(로라와 메그, 조스, 로리라는 이름은 루이자 메이 울컷의 <작은 아씨들>에서 차용한 것이다).

“네가 가봐야겠네, 로라. 예술가 타입은 너잖아.”(창비)
“네가 가야겠다, 로라. 네가 감각이 있잖아.”(강)
“로라, 네가 가봐야겠다. 네가 예술적이잖니.”(펭귄클래식)
“You'll have to go, Laura; you're the artistic one."

이것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예술적 감각을 갖춘, ‘심미적 주체’로서의 로라는 곧 ‘윤리적 주체’로서의 책임도 떠안게 될 것이다(그러니까 ‘심미적 주체=윤리적 주체’라는 것이 <가든파티>의 한 가지 메시지다). 이 윤리의 문제는 좀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 듯싶다...   

10. 07. 23.


댓글(6) 먼댓글(1)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로라의 공통감각과 윤리적 주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27 20:54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를 일단 마무리하는 내용이다(다음 회에 약간 더 부연될 수 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쾌적하지 않은 컨디션 상태에서 쓴 글인데, 블로그에는 깔끔하게 정리돼 올라와 있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6720 를 참고하시길.     잠시 철학사 상식을 들추자면,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2010-07-23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3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7-2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석이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요...^^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로쟈 2010-07-24 21:54   좋아요 0 | URL
주말까지 다음글을 써달라는 독촉을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던 책 가운데 마르트 로베르 여사의 책 두 권,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동문선, 2003)과 <정신분석 혁명>(문예출판사, 2000)을 어제 입수했다.    

 

<정신분석 혁명>은 나중에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문예출판사, 2007)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된 책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려다가 아무래도 자세히 읽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영역본도 모두 구했다. '여사'라고 붙인 건 마르트 로베르가 1914년생이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어에서 찾아보니 지난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하고 말았는데, 로베르는 프랑스의 문학이론가이자 독문학자로 특히 프로이트와 카프카 전문가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하며, 두 권의 카프카 평전을 쓰기까지 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은 1969년작이며, 3년 뒤에 그녀는 걸출한 소설론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문학과지성사, 1999)을 출간한다(알라딘에는 영어본 대신에, 짐작으론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과 <정신분석 혁명>의 스페인어본만 뜬다). 기원을 찾자면,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이란 책의 존재는 김현의 김원일론('이야기의 뿌리, 뿌리의 이야기')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다. 아마도 '마르트 로베르'란 이름도 같이(성별에 크게 주의하지 않아서 나는 저자가 막연히 남자인 걸로 알았었다).

   

두 주 전인가 갑자기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이 생각나서 좀 들춰보다가 그녀의 카프카론도 이 참에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좀더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 영역본들까지 수소문했다. 다행스럽게도 모두 구할 수 있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옛것과 새것>(1963)이란 문학론집을 구하지 못한 것.'돈키호테부터 카프카까지'가 부제이며 영역본은 1977년에 나왔다. 내년 가을쯤 강의를 위해 <돈키호테>를 읽어볼 계획인데, 그때까지는 구해봐야겠다(일부는 구글에서 읽을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의 원제는 '프란츠 카프카처럼 고독한' 정도인데, 구스타프 야노우흐와의 대화(<카프카와의 대화>) 한 장면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장면이다. 

"그렇게까지 고독하신가요?"하고 내가 물었다.
카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파르 하우저처럼 말입니까?"
카프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보다 더하지요. 난 프란츠 카프카처럼... 고독합니다." 

 

한때 카프카 관련서들을 상당량 모았었는데, 근년에는 좀 뜸했다. 카프카에 관한 글도 준비할 겸 다시 좀 챙겨야겠다. 갖고 있는 책들이나 제자리에 모아놓는 게 더 먼저여야겠지만... 

10. 07. 23.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7-23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3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4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7-23 09:10   좋아요 0 | URL
<정신분석 혁명>은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절판되어 구하지 못해서 섭섭한 상태였는데, 이 책이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과 같은 책이라니 반갑네요. 역시 로쟈님 서재에서 정보를 얻는군요.^^

로쟈 2010-07-24 00:35   좋아요 0 | URL
그냥 검색만 해봐도 바로 아실 수 있는 건데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서 "권리를 중시하는 법철학자"(242쪽)라고 소개된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의 신간이 출간됐다. <법과 권리>(한길사, 2010). 이미 여러 권의 책이 소개된 저자인데, 나도 구입만 해놓고 막상 손에 들지는 못했다. 이번에 출간된 번역서는 그의 대표작 <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Taking Rights Seriously)>(1977)를 옮긴 것이다. 하트의 저서 <법의 개념> 이후 영미 법철학계에서 출판된 가장 중요한 책이라 한다. 이 분야의 고전이란 얘기인데, 시민의 권리가 시도 때도 없이 훼손되는 나라에서는 진지하게 일독해 봄직하다. 겸사겸사 번역된 드워킨의 책들을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자유주의의 가치들- 드워킨과의 대화
김비환 외 지음 / 아카넷 / 2011년 6월
25,000원 → 23,750원(5%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11년 06월 22일에 저장
품절
Justice for Hedgehogs (Hardcover)
Dworkin, Ronald / Belknap Pr / 2011년 1월
64,750원 → 53,090원(18%할인) / 마일리지 2,660원(5% 적립)
2011년 06월 22일에 저장
품절
법과 권리
로널드 드워킨 지음, 염수균 옮김 / 한길사 / 2010년 7월
32,000원 → 30,400원(5%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7월 21일에 저장

Taking Rights Seriously: With a New Appendix, a Response to Critics (Paperback)
Dworkin, Ronald / Harvard Univ Pr / 1978년 11월
63,820원 → 47,860원(25%할인) / 마일리지 480원(1% 적립)
*지금 주문하면 "3월 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0년 07월 21일에 저장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yamoo 2010-07-22 14:34   좋아요 0 | URL
하트의 법의 개념..의미심장하게 읽었습니다. 근데, 번역이 약간 거친느낌. 드워킨도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좀 구체적으로 접했습니다. 근 전에는 정치철학 개론서에서 이런 학자가 있다는 것만 알았구요..<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다보니 드워킨의 저서도 거들떠보고 싶어졌는데..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로 출간됐군요~ 근데, 한길 그레이트북스는 책값이 터무니 없이 비싸서 사는 건 보류해야 겠습니다..ㅎㅎ

로쟈 2010-07-22 15:02   좋아요 0 | URL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책값이 제 예상보다 30% 정도 비싸더군요. 샌델의 책은 저렴해보일 정도인데, 그건 얼만큼 팔릴 걸 예상해서인 거죠. 빨리 선순환이 돼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김없이 4주에 한번씩 칼럼을 쓸 차례가 되는데, 오전까지 아무 생각이 없다가 불현듯 '파레토 법칙'이란 게 떠올라서(사실 어제 읽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힌트를 얻었다) 3시간 동안 꼼지락거리며 쓴 것이다. 파레토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들을 하지만 그의 저작은 거의 소개돼 있지 않다는 점도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 하긴 좀 '식상한' 놀라움이기도 하지만...   

경향신문(10. 07. 20) [문화와 세상] ‘20:80의 사회’

‘파레토 법칙’이라는 게 있다. 경제학 상식이긴 한데, 20%의 원인이 80%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발견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이 법칙을 개미 관찰을 통해서 착안했다. 경제학자가 어쩌다 개미 관찰까지 하게 됐을까 의문스럽지만,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을 착상했다는 뉴턴의 ‘전설’도 있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여하튼 이야기인즉, 파레토가 개미들을 관찰해보니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건 아니더란다. 20%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80%는 빈둥대며 놀더라는 것이다. 그 일하는 개미 20%만 따로 분리하여 통 속에 넣고 관찰하니까 신기하게도 다시 20%만 일하고 80%는 놀았다. 그럼 빈둥대던 80%를 분리시켜 놓으면? 그중 20%는 ‘정신 차리고’ 또 열심히 일했다. 결과적으론 아주 오묘하게도 항상 20 대 80이 유지됐다. 그래서 ‘법칙’이다. 



이 ‘20 대 80 법칙’은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다. 마케팅 쪽에서 “백화점 매출액의 80%는 20%의 단골손님에서 나온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 법칙에는 정치적 색깔도 보태질 수 있는데, ‘파레토 우파’라고 부를 만한 진영에선 “20명의 엘리트가 평범한 80명을 살린다”고 주장한다. 개미사회에서도 ‘엘리트 개미’와 ‘평범한 개미’가 나뉘는지 모르겠지만, 20 대 80이란 비율의 의미를 그렇게 엘리트주의로 해석하고 정당화한다.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천재론’은 아예 ‘파레토 극우파’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반면에 ‘파레토 좌파’가 관심을 갖는 건 차등적 소유와 분배 문제다. ‘어떤 사회든 전체 부의 80%는 20%가 소유한다’는 파레토의 통찰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더욱 심화되어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가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과연 개미사회에서도 그러한 불평등한 분배와 소유의 독점이 이뤄지는지 의문스러우면서, 동시에 이런 현실이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우려와 무관하게 바야흐로 ‘20 대 80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 한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단지 20%의 노동력만으로 모든 일이 가능해지고,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80%가 노는 사회가 아니라 80%를 놀게 만드는, ‘쓰레기’로 만드는 사회의 도래다. 이미 징후가 없지 않다. 청년실업이 낳은 자조적인 용어 ‘잉여’는 80%의 실존적 위기감을 표현해주고 있지 않은가.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20% 안에 들기 위한 경쟁에서 악착같이 승리하는 일? 하지만 개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20 대 80’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인격과 무관한 ‘구조적인’ 것이다. 어떤 사회가 80%의 탈락자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면, 사실 그런 사회체제 자체가 ‘쓰레기’ 아닌가? 자학이야말로 ‘삶의 기쁨’이라고 고집하지 않는 한, 80%가 유의미한 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유토피아’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20 대 80 사회’가 비관적인 전망만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20%의 노동력만으로도 경제가 유지된다면, 우리는 적절한 로테이션을 통해서 80%가 놀고 먹을 수 있는 ‘개미들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럴 용의와 의지가 있는지가 문제다. 

10. 07. 19. 

P.S. 파레토란 이름을 처음 본 건 루이스 코저의 <사회사상사>(일지사, 1978; 시그마프레스, 2003)에서였던 듯싶다. 둘다 절판된 거 같지만, 내가 읽은 건 일지사본이었다. 2003년에 원서의 2판이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번역본도 개정판이 출간되면 좋겠다. 아니, 어쩌면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홍성사, 1980, 기린원, 1988)이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수준급의 개설서들일 텐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세월의 힘인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동 2010-07-20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었는데, 20:80에 대해 확실이 알았습니다. 손부족한 날에 안전한 이사 바랍니다.

로쟈 2010-07-20 13:39   좋아요 0 | URL
맛보기일 뿐이죠. 개미 얘기의 출처가 궁금해서 좀 찾아봤지만, 모두 '일설'에서 그치더군요...

2010-07-20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0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이스 멈퍼드-허먼 멜빌-알베르 카뮈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와 박홍규 교수의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 출간 기념으로 박홍규 교수와의 대담 자리를 갖게 됐다. 도서출판 텍스트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일시는 8월 24일(화) 저녁 7시 30분이고, 장소는 청어람아카데미 지하소강당이다. 알라딘 이벤트는 http://blog.aladin.co.kr/culture/3896091 참조.



10. 07. 19. 

 

P.S. 대담일 바로 전 주에 이사가 예정돼 있어서 아마도 정신이 없을 것 같다. 준비를 잘할 자신은 없고, 다만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유토피아 이야기>, <아나키즘 이야기> 세 권은 읽고 갈 계획이다. 혹 대담 행사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7-19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