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종로에 있는 서점에 들렀지만 헛걸음하게 만든 책은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문예출판사, 2010)이.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2010)와 함께 물류창고에는 들어와 있었지만 아직 매장에는 깔리지 않은 것. 매출에 좀 무심한 거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에서 구매하려다 좀더 빨리 손에 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종종 오프라인 서점을 찾지만 대개는 이런 식이다. 물론 눈에 띄는 몇 권의 다른 책을 구입했으니 아주 헛걸음은 아니었지만. 일단 리뷰기사만 먼저 챙겨놓도록 한다.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은 책의 부제다. 

 

경향신문(10. 10. 30) “도덕 찾다간 경제 망해” 천민자본주의 씨앗

‘사치는 가난뱅이 백만에 일자리를 주었고 얄미운 오만은 또 다른 백만을 먹여 살렸다. 시샘과 헛바람은 산업의 역군이니 그들이 즐기는 멍청한 짓거리인 먹고 쓰고 입는 것에 부리는 변덕은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악덕이지만 시장을 돌아가게 하는 바로 그 바퀴였다. … 이제 악덕은 교묘하게 재주 부려 시간과 일이 더해지면서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놓았다. 이것이 참된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넉넉함이어서 그 높이로 치자면 아주 못사는 놈조차도 예전에 잘살던 놈보다 더 잘살게 되었으니 여기에 더 보탤 것은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쓴 풍자시 ‘투덜대는 벌집: 또는, 정직해진 악당들’의 일부다. 맨더빌은 이 풍자시가 포함된 책 <꿀벌의 우화>를 1723년 출판했는데 ‘종교와 미덕을 깎아내리고 악덕을 부추긴다’며 큰 비난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맨더빌의 주장은 ‘악덕이 경제를 풍요하게 만든다’는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도덕 찾다가는 경제가 다 망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단순한 것도 고상하게 말하는 게 특기인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라고 부른다. 맨더빌이 이 가설의 최초 주창자라고 할 순 없겠으나 체계화된 글로 남긴 것은 사실이다. 맨더빌이 이 책을 쓴 지 300년쯤 지났지만 우리 일상에서 비슷한 주장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눈먼 돈, 검은 돈이 좀 돌아야 밥장사, 술장사도 먹고 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천박한가? 그렇다면 ‘경쟁력이 충분한 수도권의 규제를 풀어서 전체 대한민국의 성장을 견인토록 해야 한다’는 논리는?

맨더빌이 살던 시절의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려면 100년쯤 기다려야 했지만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하면서 큰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절제와 겸양, 정직과 근면 등 도덕을 강조하는 근엄한 목소리가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맨더빌은 이런 것들을 위선이자 경제에도 도움이 안되는 것이라고 정면에서 비판한 것이었다.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해방시킨 인물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양조장·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스미스의 유명한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꿀벌의 우화>를 번역한 최윤재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스미스에게 돌아가는 찬사 혹은 비난은 대부분 맨더빌에게 돌아가야 한다. 최 교수는 “맨더빌은 돈 벌 욕심을 아예 버리라는 낡은 도덕을 비판한 사람이다. 그런 맨더빌을 따라 돈 벌 욕심을 받아들이되 돈 벌자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게 하는 짓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스미스의 도덕감정이고, 그런 짓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칸트의 도덕원칙이다”라고 말했다.

‘Mandeville’이라는 이름 때문에 도덕론자들로부터 ‘인간 악마’(Man-Devil)라고 불렸다는 맨더빌.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을 정립시킨 하이예크는 맨더빌에 대해 “아무도 읽어서도 안되고 물들어서도 안되는 인물로 찍혔지만, 결국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읽고 그에 물들어갔다”고 말했다. 번역자 말마따나 현대의 천박한 자본주의의 근원을 살피려는 사람은 맨더빌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꿀벌의 우화>는 고전이지만 처음 번역됐다.(김재중 기자) 

10.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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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31 10:23   좋아요 0 | URL
예약판매도 하는 대형서점들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매장에 비치하지 않았다니,,,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 이라는 표현만큼, 묘하네요. 벌써 '불온서적'으로 찍힌 것 아닐까요? ^^

로쟈 2010-10-30 09:09   좋아요 0 | URL
네, 불황이라고 하면서도 좀 무신경해보였습니다...

롱맨 2010-10-30 09:56   좋아요 0 | URL
전 어제 광화문 교보매장에서 구입했습니다. 제가 방문한 그즘에 매장에 깔린 것 같더군요^.^

로쟈 2010-10-30 10:02   좋아요 0 | URL
반디와 영풍이 좀 게으른가 봅니다...
 

주중에 책을 구하고 아직 펼쳐보지 못한 책이긴 한데, 지젝의 신간 <나눌 수 없는 잔여>(도서출판b, 2010)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원저는 1996년에 나온 것으로 국내 소개된 책으로는 <향락의 전이>(1994)와 <환상의 돌림병>(1997) 사이에 나온 것이다.   

한겨레(10. 10. 30) 관념론자 셸링 안에 유물론 씨앗 있다 

<나눌 수 없는 잔여>는 좌파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61·사진)의 1996년 저작이다. 이 책이 번역됨으로써, 지젝을 세상에 알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 이래 그의 주요 저작이 거의 모두 우리말로 나온 셈이 됐다. 이 책의 번역이 늦어진 것은 내용의 낯섦과 까다로움도 한몫한 것 같다. 부제 ‘셸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가 가리키는 대로 이 책은 셸링의 철학을 논의의 재료로 삼고 있다. 언제나 상식과 통념의 허를 찌르는 지젝은 이 책에서 좌파 철학이 거의 다루지 않는 셸링이라는 ‘낡은 주제’를 아주 새롭게 독해한다. 



철학사의 일반적 서술을 따르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1775~1854)은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배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객관적 관념론으로 뒤집어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으로 넘겨준 사람이 셸링이다. 전통 좌파 철학 노선은 셸링을 비합리주의적 철학의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특히 후기 셸링 철학이 그런 평가를 받았는데, 이 시기의 셸링은 ‘신지학’(신의 본질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에 몰두한 사람, ‘객관적 관념론’을 창출한 젊은 시절의 합리성과 과학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통했다. 지젝은 이 책에서 바로 이런 ‘표준적 독해’를 뒤집는다. 그의 해석을 통해 셸링은 비합리적 신비주의에 빠진 관념론자가 아니라 일종의 유물론자로 재탄생하며, 탈관념론의 선구자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셸링을 유물론 계열의 철학자로 읽어낸 최초의 책이 됐다.

더 흥미로운 것은 지젝이 ‘유물론자’ 셸링의 모습을 청년기 저작이 아니라 후기 저작에서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세계로 빠져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후기 셸링이야말로 유물론자 셸링이라는 본질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셸링의 미완성 저작 <우주의 역사>를 탐색한다. 셸링은 <우주의 역사> 초고를 1811년부터 5년 동안 세번이나 쓰고도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지젝이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그 세 편의 초고다. 이 초고 상태의 글에서 셸링은 ‘신의 역사’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구성한다. <요한복음>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그 태초 이전의 상태에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태초 이전에 카오스적 상태의 우주가 있었으며 그때 우주는 맹목적 충동 그 자체였다. 태초 이전에 신은 이 카오스적·맹목적 충동이었다. 이 충동이 모든 것의 토대다. 이 토대에서 신이 스스로 독립해 나와 자기 자신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신이 곧 이성이고, 그 이성이 역사의 주체다.

이렇게 신비주의적으로 이야기하는 세계의 기초로서의 ‘토대’가 바로 셸링 유물론의 근거이다. 이성은 바로 이 비이성적 토대에서 탄생한다. 비이성이야말로 이성의 바탕이다. 문제는 그 토대를 아무리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젝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개념을 동원해 셸링의 철학을 설명한다. 셸링의 그 비이성적 토대를 ‘나눌 수 없는 잔여’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포착할 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는 토대, 그것을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실재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실재계가 현실(상징적 질서)의 세계로 들어올 때 바깥에 남게 되는 것이 ‘나눌 수 없는 잔여’다. 요컨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라 해도 그 토대에 비이성적인 불가해한 것을 깔고 있으며, 이성은 언제나 이 비이성과 얽혀 있어서, 칼로 무를 자르듯 깔끔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분석은 해독할 수 없는 잔여를 남긴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통해 셸링의 <우주의 역사>는 “메타심리학적 작품”이 된다. 

지젝은 이 책에서 셸링의 유물론이 철학사에서 ‘사라지는 매개’ 구실을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사라지는 매개’라는 개념은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한테서 빌려온 말인데, 제임슨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요약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사라지는 매개’였다는 것이다. 봉건제 시대에 종교는 경제와 분리돼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새로운 신앙이 등장하고서야 종교 안으로 경제가 들어왔다. 재산을 축적하고 노동에 매진하는 것이 구원의 표지라고 주장한 것인데, 이런 종교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가 발흥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결국 쇠퇴하고 말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와 자본주의를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였던 것이다. 셸링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셸링의 유물론적 철학은 독일 관념론의 세계 안에서 신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사유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유물론이 이후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진정한 유물론으로 이어졌다. 셸링이 관념론 안에서 유물론적 사유의 씨를 뿌렸고 이 씨가 발아해 관념론 형식을 벗어버리고 유물론으로 자라났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라지는 매개’로서 셸링 철학의 철학사적 기여인 셈이다.(고명섭 기자) 

10. 10. 29.  

P.S. 책의 부제는 '셸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인데, 1부의 두 장이 '셸링에 대한 에세이'라면, 2부의 3장 '양자물리학과 라캉'이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다. 개인적인 관심은 일단 셸링보다는 관련된 문제들 쪽에 쏠린다. 사실 셸링 철학이 양자물리학보다 더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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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0-10-3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제목만 보면 왜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네요 ㅋㅋㅋ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말을 처음 보고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너무 궁금해서 원제를 찾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ㅎ

로쟈 2010-10-30 08:36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환상이라는 돌림병' 그런 식으로 번역이 됐어야 할 거 같은데, 처지가 바뀌었어요...

sommer 2010-10-31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셸링을 유물론적으로 다룬 건 지젝도 참고했다고 말했듯이, 그가 처음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하버마스(인식과 관심에서 셸링과 맑스의 연관을 다루고 있는 논문)와 만프레드 프랑크의 '존재의 무한한 결핍'이 있다는 것도 덧붙여야 할 거 같군요.

로쟈 2010-11-01 14:39   좋아요 0 | URL
단행본 분량으론 처음이란 뜻인가 봅니다...
 

아침에 강연차 지방에 내려가는 길에 버스에서 읽은 칼럼은 최근 불거진 봉은사 법당 땅밟기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칼럼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땅밟기 동영상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개신교 신자 몇몇이 서울 삼성동 봉은사 법당에 들어가 “이곳은 하나님의 땅”이라며 ‘땅밟기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아이고, 아버지….” “땅밟기 한다고 봉은사가 교회됩니까.” “어리석은 몇 명이 100만 안티 부르네.” “땅밟기와 무속의 지신(地神)밟기는 뭐가 다르지요?” 이 모두가 기독교인들의 댓글이다. 그중에서도 어느 목사의 개탄이 눈을 찌른다. “얼빠진 이들이 기독교를 미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생각해 보라. 땅밟기 한다고 절이 무너지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성경 구절은 사유(思惟)할 줄 안다는 뜻 아닌가.”(<경향신문>, '땅밟기, 지신밟기') 

칼럼을 읽으면서 최근에 나온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웅진지식하우스, 2010)을 떠올렸다. 부제는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된 의미를 찾아서'. 저자는 저명한 비교종교학자이자 종교비평가로, 다양한 저술,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세계종교의 평화와 조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한다. 국내에도 자서전을 포함해 그녀의 책이 여럿 소개돼 있다.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모멘토, 2010)과 함께, 그리고 종교 비판을 담은 도킨스, 히친스, 데닛 등의 책과 함께 일독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의 참된 의미를 찾아서...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신을 위한 변론-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준형 옮김, 오강남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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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se for God (Paper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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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역사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 배국원, 유지황 옮김 / 동연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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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역사 2
카렌 암스트롱 지음 | 배국원, 유지황 옮김 / 동연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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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9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30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아트앤스터디의 '인문숲'에서 플라토노프의 <코틀로반>에 대해 강의하면서, 단편 <암소>(1938)도 같이 읽어봤었다. 러시아 단편선 <무도회가 끝난 뒤>(창비, 2010)에 들어 있는 작품인데, 알렉산드르 페트로프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도 감상할 수 있기에 같이 옮겨놓는다.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은 주로 암소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작품에선 기관차와 관련한 이야기도 비중을 차지한다). 단편과 애니메이션 모두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 소년은 암소의 모든 것이 맘에 들었다. 항상 피곤한 듯 혹은 생각에 잠긴 듯 거무스레한 테두리가 둘린 온순한 눈도 마음에 들고, 뿔과 이마도, 커다랗고 여읜 몸집도 맘에 들었다. 암소가 여윈 것은 자신의 살과 지방을 위해 비축하지 않고 우유와 노동에 바치느라 그리된 것이다. 소년은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는 젖통을 바라보았다. 거기 달린 작고 쪼글쪼글한 젖꼭지에서 나온 우유를 먹고 소년이 자란 것이다. 소년은 단단한 뼈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짧고 듬직한 앞가슴도 만져보았다. 

-바샤는 헛간으로 들어가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암소를 살펴보았다. 암소는 이제 아무것도 먹고 있지 않았으며, 이따금 조용히 숨을 쉴 뿐이었다. 암소를 괴롭히는 무겁고 질긴 고통은 끝도 모르고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암소는 인간과 달리 자신의 고통을 언어나 의식, 친구나 오락 그 어느 것으로도 위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바샤는 오랫동안 암소를 쓰다듬으며 달래주었지만 암소는 무관심한 채 미동도 없었다. 지금 암소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아들, 송아지뿐이다. 인간도, 여물도, 태양도 이 세상 그 무엇도 자식을 대신할 수 없었다. 잊어버리고 다른 일을 찾는 것이, 그래서 더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다시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행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암소의 흐릿한 지성은 스스로를 기만할 능력이 없다. 한번 암소의 가슴속에 혹은 감정 속에 들어온 것은 억눌리거나 잊힐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에 바샤가 열차 움직이는 걸 도와준 적이 있는 바로 그 기관사가 바샤의 아버지와 함께 차량 밑에서 죽은 암소를 끌어내고 있었다. 생전처음 자기와 가까운 존재의 죽음을 본 바샤는 괴로움으로 넋이 나가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십분 정도 계속 기적을 울렸다니까요.” 기관사가 바샤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댁의 소는 귀가 먹은 겁니까, 아니면 멍청한 겁니까? 모든 차량들이 비상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귀가 먹은 것이 아니라 미친 거요.” 아버지가 말했다. “아마, 철로 위에서 졸고 있었겠지.” “그게 아니에요, 느리긴 했지만 어쨌든 소는 기관차에서 도망가긴 했어요. 그런데 옆으로 비켜날 생각은 안하더란 말이죠.” 기관사가 대답했다. “소가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학교에서는 1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생활 속에서 겪은 일을 주제로 글을 쓰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바샤는 공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집에는 암소가 있었다. 암소가 살아 있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와 나는 암소에서 나오는 우유를 먹었다. 나중에 암소가 새끼 송아지를 낳았다. 송아지도 암소의 우유를 먹었다. 우리 세 사람과 송아지까지 넷, 모두에게 충분한 양이었다. 암소는 게다가 땅도 갈고 짐도 옮겼다. 그러다가 집에서 암소의 아들을 고기로 팔았다. 괴로워하던 암소는 얼마 안 있어 기차에 치여 죽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암소도 먹어버렸다. 왜냐하면 암소도 소고기니까. 암소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우유, 아들, 고기, 가죽, 내장, 뼈를 우리에게 내주었다. 착한 암소였다. 나는 우리 암소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않을 것이다.” 

  

10.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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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길을 걸어가는 암소를 보고 '엄마'를 외치는 소년, 그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는 암소의 눈빛. 암소는 소년의 마음을 알았을까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는 에니메이션이네요.

로쟈 2010-10-27 16:47   좋아요 0 | URL
노르슈테인(Norstein)과 함께 러시아 애니메이션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2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와 같은 암소 이야기군요.그림도 인상적입니다.배경을 우리나라로 바꾸어도 될 듯한 이야기.가난한 농가의 소 이야기는 어느 나라나 짠한 느낌을 주나 봅니다.

로쟈 2010-10-27 16:46   좋아요 0 | URL
이 암소는 '사회주의 암소'이기도 해요.^^

노이에자이트 2010-10-27 17:49   좋아요 0 | URL
사회주의 암소라...아무래도 직접 읽고 싶군요.

로쟈 2010-10-27 18:18   좋아요 0 | URL
"암소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우유, 아들, 고기, 가죽, 내장, 뼈를 우리에게 내주었다."의 암소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긍정적 주인공' 형상이죠.^^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매번 차례가 닥칠 때마다 무얼 쓸 것인가 고민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정말 고민스러웠고 궁여지책으로 최근에 강의준비차 다시 읽은 플라토노프의 단편 <포투단 강>에 대해서 썼다. 그나마 '가을은 독서의 계절' 같은 주제를 피한 걸 위안으로 삼는다. 플라토노프에 대해선 오늘도 강의가 있었는데, 연이어 칼럼까지 할애했으므로 나름대로는 작가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 것이라 생각한다. <포투단강>은 단편집 <귀향 외>(책세상)에 실려있다. 

  

경향신문(10. 10. 26) [문화와 세상]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러시아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작품이 있다. 20세기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포투단 강>이란 단편이다. 1937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배경은 내전 직후인 1920년대 초반이다. 1917년에 10월혁명이 일어났지만, 레닌의 혁명정부는 곧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을 4년간이나 치르게 된다. 이야기는 내전에 참전했던 적군(赤軍) 병사 니키타 피르소프가 귀향하는 걸로 시작한다. 집에는 아내와 두 아들을 먼저 잃고 홀로 막내아들의 생환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버지가 있다. 3년 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제 부르주아들을 다 쳐부순 거냐고 묻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 했다. 니키타는 어릴 적 아버지가 재혼할 뻔한 여교사의 딸 류바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에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류바는 그 사이에 가엾은 처지가 됐다. 그녀는 어머니를 잃고 남동생은 전선으로 보내고 혼자서 어렵게 의료과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니키타는 아버지가 다니는 목공소에서 목수 일을 시작하고 류바가 먹을 저녁을 나르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등유는커녕 장작도 부족한 형편이라 류바는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의학 책을 읽어야 했고, 니키타가 그 옆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말없이 기다리며 앉아 있는 것이 두 사람의 ‘데이트’였다.

니키타는 거의 매일 그녀를 찾아갔지만,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날에는 류바에 대한 그리움을 참기 위해 도시를 몇 바퀴씩 걸어다녔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행복 이상의 더 큰 행복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는 제대군인이 과연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회의하다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는 류바를 더 이상 찾아가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티푸스에 걸려 앓아누운 그를 극진히 보살펴준 사람은 류바였다. 류바가 졸업을 하자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한다.

플라토노프는 청년시절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건설되리라고 믿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부르주아 단계를 넘어선 프롤레타리아 단계에선 의식이 성을 누르고 자연과의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성과 사랑에 대한 그런 유토피아적 관념이 니키타에게도 투영돼 있는데, 그는 류바와 결혼하지만 성생활은 회피한다. 게다가 이 특별하고도 사랑스러운 존재를 다치게 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는 아내를 너무 많이 사랑했다. 하지만 잘 참아주던 류바가 어느날 밤 고통을 억누르며 몰래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서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가출한다. 괴로움을 떨치기 위해 말하는 것도 잊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시장거리에서 일을 하며 지낸다. 우연히 만난 아버지에게서 류바가 포투단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나와 사는 게 힘들지 않겠어요?”라고 류바는 묻고, “난 이제 당신과 함께 행복해지는 데 익숙해졌어”라고 니키타는 답한다. 류바의 야윈 몸이 늦은 밤 싸늘한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는 것이 이 단편의 마지막 문장이다.

교훈은 무엇인가? 니키타의 아버지처럼 아내가 없다면 집안에는 하다못해 고슴도치나 집토끼라도 있어야 인간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인가. 니키타도 결국 인간적 자연 혹은 본성과 화해하게 되지만, 중요한 건 그의 ‘우회’다. 플라토노프가 꿈꾼 ‘플라토닉한’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비록 유토피아적이긴 하지만, 부르주아적 성 관념과 접대문화가 ‘대세’인 시대에는 오히려 ‘아름답게’ 여겨진다. 사랑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야기를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부른 이유다. 

10. 10. 25.  

P.S. <포투단 강>은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다. 소쿠로프의 초기작 <인간의 외로운 목소리>(1978)인데, 개봉은 1987년에야 이루어졌다. 원작을 그대로 옮긴 건 아니지만, '정서'는 느끼게 해준다. 소쿠로프는 니키타와 류바가 거리에서 만나는 장면을 숲에서 만나는 걸로 재설정했는데,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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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 문학작품의 또 다른 맛
    from 창조를 위한 검은 잉크의 망치 2010-10-26 13:0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20세기 후반에서야 발견되어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글은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느낌이 정확하게 명명이 안되지만 그 원인의 상당부분이 그의 이력과 관련있는 것 같아 책날개에 있는 작가의 소개글을 옮겨 놓는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러시아의 남부 도시 보로네쥐에서 철도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2010-10-25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6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돈케빈 2010-10-26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니.. 저에겐 달밤에 하품이 나올만한 주제입니다.^^

로쟈 2010-10-26 21:40   좋아요 0 | URL
집토끼라도 키워보시길...

반딧불이 2010-10-26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정적으로 오래전인 기억을 떠올려 주셔서 나중에라도 다시찾아보려고 먼댓글로 연결했습니다.

로쟈 2010-10-26 21:39   좋아요 0 | URL
이미 읽어보신 책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10-10-26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에서 만나는 남녀...분위기가 참...뭐랄까요,쓸쓸하네요.배경음악도...

로쟈 2010-10-26 21:38   좋아요 0 | URL
소쿠로프의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잔잔한호수 2010-10-2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경향신문에서 칼럼 읽고 댓글 남겨봅니다. 블로그에서, 지면에서, 선생님 글을 통해 항상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있어) '플라토닉'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말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제 의문은, '프롤레타리아'란 개념 자체가 이미 (反육체적인) '플라토닉함'과 불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인데요….
타락한 부르주아적 접대문화는, 플라토닉하고 유토피아적인 성 관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적인 성(性)의 건강성과 육체적 솔직함이 비틀리고 억눌려서 나타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 의문을 간략하게나마라도 풀어줄 수 있으신지요.^_^ 부탁드려봅니다! )

로쟈 2010-10-28 07:27   좋아요 0 | URL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소비에트의 사회주의자들은 금욕적 성애관을 갖고 있었어요. 플라토노프는 젊은시절에 성 자체를 부르주아적이라고 생각했구요. 그 당시엔 아예 죽음도 부르주아적이라고 생각해서, 오직 부르주아들만 죽는다라고도 했지요. 성적 욕망도 극복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했으니 '유토피아적'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