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책을 구하고 아직 펼쳐보지 못한 책이긴 한데, 지젝의 신간 <나눌 수 없는 잔여>(도서출판b, 2010)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원저는 1996년에 나온 것으로 국내 소개된 책으로는 <향락의 전이>(1994)와 <환상의 돌림병>(1997) 사이에 나온 것이다.   

한겨레(10. 10. 30) 관념론자 셸링 안에 유물론 씨앗 있다 

<나눌 수 없는 잔여>는 좌파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61·사진)의 1996년 저작이다. 이 책이 번역됨으로써, 지젝을 세상에 알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 이래 그의 주요 저작이 거의 모두 우리말로 나온 셈이 됐다. 이 책의 번역이 늦어진 것은 내용의 낯섦과 까다로움도 한몫한 것 같다. 부제 ‘셸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가 가리키는 대로 이 책은 셸링의 철학을 논의의 재료로 삼고 있다. 언제나 상식과 통념의 허를 찌르는 지젝은 이 책에서 좌파 철학이 거의 다루지 않는 셸링이라는 ‘낡은 주제’를 아주 새롭게 독해한다. 



철학사의 일반적 서술을 따르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1775~1854)은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배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객관적 관념론으로 뒤집어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으로 넘겨준 사람이 셸링이다. 전통 좌파 철학 노선은 셸링을 비합리주의적 철학의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특히 후기 셸링 철학이 그런 평가를 받았는데, 이 시기의 셸링은 ‘신지학’(신의 본질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에 몰두한 사람, ‘객관적 관념론’을 창출한 젊은 시절의 합리성과 과학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통했다. 지젝은 이 책에서 바로 이런 ‘표준적 독해’를 뒤집는다. 그의 해석을 통해 셸링은 비합리적 신비주의에 빠진 관념론자가 아니라 일종의 유물론자로 재탄생하며, 탈관념론의 선구자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셸링을 유물론 계열의 철학자로 읽어낸 최초의 책이 됐다.

더 흥미로운 것은 지젝이 ‘유물론자’ 셸링의 모습을 청년기 저작이 아니라 후기 저작에서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세계로 빠져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후기 셸링이야말로 유물론자 셸링이라는 본질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셸링의 미완성 저작 <우주의 역사>를 탐색한다. 셸링은 <우주의 역사> 초고를 1811년부터 5년 동안 세번이나 쓰고도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지젝이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그 세 편의 초고다. 이 초고 상태의 글에서 셸링은 ‘신의 역사’를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구성한다. <요한복음>의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그 태초 이전의 상태에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태초 이전에 카오스적 상태의 우주가 있었으며 그때 우주는 맹목적 충동 그 자체였다. 태초 이전에 신은 이 카오스적·맹목적 충동이었다. 이 충동이 모든 것의 토대다. 이 토대에서 신이 스스로 독립해 나와 자기 자신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신이 곧 이성이고, 그 이성이 역사의 주체다.

이렇게 신비주의적으로 이야기하는 세계의 기초로서의 ‘토대’가 바로 셸링 유물론의 근거이다. 이성은 바로 이 비이성적 토대에서 탄생한다. 비이성이야말로 이성의 바탕이다. 문제는 그 토대를 아무리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젝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개념을 동원해 셸링의 철학을 설명한다. 셸링의 그 비이성적 토대를 ‘나눌 수 없는 잔여’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포착할 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는 토대, 그것을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실재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실재계가 현실(상징적 질서)의 세계로 들어올 때 바깥에 남게 되는 것이 ‘나눌 수 없는 잔여’다. 요컨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라 해도 그 토대에 비이성적인 불가해한 것을 깔고 있으며, 이성은 언제나 이 비이성과 얽혀 있어서, 칼로 무를 자르듯 깔끔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분석은 해독할 수 없는 잔여를 남긴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통해 셸링의 <우주의 역사>는 “메타심리학적 작품”이 된다. 

지젝은 이 책에서 셸링의 유물론이 철학사에서 ‘사라지는 매개’ 구실을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사라지는 매개’라는 개념은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한테서 빌려온 말인데, 제임슨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요약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사라지는 매개’였다는 것이다. 봉건제 시대에 종교는 경제와 분리돼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새로운 신앙이 등장하고서야 종교 안으로 경제가 들어왔다. 재산을 축적하고 노동에 매진하는 것이 구원의 표지라고 주장한 것인데, 이런 종교 윤리를 통해 자본주의가 발흥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결국 쇠퇴하고 말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봉건제와 자본주의를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였던 것이다. 셸링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셸링의 유물론적 철학은 독일 관념론의 세계 안에서 신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사유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유물론이 이후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진정한 유물론으로 이어졌다. 셸링이 관념론 안에서 유물론적 사유의 씨를 뿌렸고 이 씨가 발아해 관념론 형식을 벗어버리고 유물론으로 자라났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라지는 매개’로서 셸링 철학의 철학사적 기여인 셈이다.(고명섭 기자) 

10. 10. 29.  

P.S. 책의 부제는 '셸링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인데, 1부의 두 장이 '셸링에 대한 에세이'라면, 2부의 3장 '양자물리학과 라캉'이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다. 개인적인 관심은 일단 셸링보다는 관련된 문제들 쪽에 쏠린다. 사실 셸링 철학이 양자물리학보다 더 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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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0-10-3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제목만 보면 왜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네요 ㅋㅋㅋ 환상의 돌림병이라는 말을 처음 보고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너무 궁금해서 원제를 찾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ㅎ

로쟈 2010-10-30 08:36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환상이라는 돌림병' 그런 식으로 번역이 됐어야 할 거 같은데, 처지가 바뀌었어요...

sommer 2010-10-31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셸링을 유물론적으로 다룬 건 지젝도 참고했다고 말했듯이, 그가 처음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하버마스(인식과 관심에서 셸링과 맑스의 연관을 다루고 있는 논문)와 만프레드 프랑크의 '존재의 무한한 결핍'이 있다는 것도 덧붙여야 할 거 같군요.

로쟈 2010-11-01 14:39   좋아요 0 | URL
단행본 분량으론 처음이란 뜻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