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프레시안books'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0715144535).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도서출판b, 2011)에 대한 것인데, 원고는 아침에 부랴부랴 2배속으로 작성해 보냈다. 일독해볼 만한 흥미로운 책이다.  

 

프레시안(11. 07. 15) 한국에 톨스토이 없는 이유는? '식민지' 없어서!? 

<세계 문학의 구조>(도서출판b 펴냄)는 평론가 조영일의 세 번째 책으로 나온 네 번째 책이다. 그의 해명에 따르면 네 번째로 기획된 책이지만 한권을 앞질러 출간된 것이어서 그렇다.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 문학>(2008년), <한국 문학과 그 적들>(2009년)이 '한국 문학 비판 3부작'으로 나온 두 권의 책이며 그 마지막 권보다 먼저 나온 게 <세계 문학의 구조>이다. 조영일은 앞서의 비평집들이 보여준 날선 비판으로 '한국 문학 비판의 대표 주자'란 평판까지 얻었는데, <세계 문학의 구조>는 적어도 제목만으로는 '비판'보다 본래의 '비평'에 더 다가간 느낌이다. 그는 '세계 문학의 구조 비판'이라고 쓰지 않고 그냥 '세계문학의 구조'라고 적었다. (보론으로 실린 글 역시 '세계 문학 전집의 구조'란 제목을 갖고 있다).

조영일의 비평적 입지는 독특하다.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책 다수를 번역한 '전담 번역자'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긴 했지만(한국 문단에 큰 파문을 던진 <근대 문학의 종언>이 그의 손을 거친 번역이다) 동시에 한국 문학(그의 표현으론 '한국 문단 문학')의 경계 가장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그에 대한 반응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이거나 (다수의) 매몰찬 기각인 경우가 많다. 양적으로 보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러니까 가장 많은 글을 써내는 비평가에 속하면서도 정당한 평가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불편한 물건'으로 간주되는 일이 많았다. 사뭇 논쟁적인 주장과 함께 여러 차례 실명 비판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논쟁이 벌어진 일은 거의 없다는 게 그 방증이다. 끊임없이 손수건을 내던지지만 아무도 그의 '결투 신청'에 응하지 않는다고 할까.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다. 그의 비평에 간혹 끼어 있는 논리적 비약이나 논거 부족 등이 상대할 여지를 축소시킨다는 의견도 나온다. <세계 문학의 구조>의 '책머리에'만 보아도 그렇다. 서두이다. 

"지금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백낙청)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못 분명한 사실 같다. 최근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5쪽)

 

백낙청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펴냄)을 염두에 둔 것인데, 그러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나르시시즘이다. 보통은 "최근 내 작업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정도로 진술하는 게 문맥상 온당하다. 그래서 그런 식의 문장 연결이 불편한 독자들도 있을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미리부터 책을 덮지만 않는다면 나름대로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나름 '슬로우 스타터'라서 그렇다.

스스로 '장편 비평'이라고 장르를 규정한 이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건 모종의 '자부심' 혹은 '기개'이다. 일단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제목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장이 일사불란하게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주제를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니고 "근대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가 오히려 핵심을 구성하지만 조영일은 당당하게 "세계 문학의 구조"라는 대담한 제목을 붙였다. 더불어 책의 표지에는 저자와 책 이름만을 박아놓았다(물론 출판사 이름도 하단에 들어 있지만). 



아무런 표지 장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내용'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조영일은 "나는 최근에야 스스로를 문학비평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까지 '책머리에'에 적었다. 이를테면 <세계 문학의 구조>에서 우리는 국민 문학과 국민 작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보여주는 그의 주장을 읽으며 비평가 조영일의 '탄생' 또한 목도하게 된다. '3부작'을 완결 짓기 전에 <세계 문학의 구조>를 미리 펴내야 했던 이유 혹은 비밀이 거기에 숨어 있을 듯싶다. 조영일은 이 책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한다.

"<세계 문학의 구조>에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일단 '장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고, 내용적으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세계 문학의 일부로서만 '한국 문학'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7쪽)

 

'장편'이란 말이 '장편 소설'을 연상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연작'에 가깝다. 네 개의 장과 보론이 조금씩 소재와 초점을 달리하면서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런 형식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습니다' 체 문장이다. 마치 강연 원고처럼 읽히는데, 짐작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1장 '세계 문학으로'는 노골적으로 가라타니의 '세계공화국으로'란 구호를 패러디하고 있다(<세계 문학의 구조> 표지 또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표지와 유사하다. 실제로 조영일은 가라타니의 이 최신작을 번역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물론 스타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조영일은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근대 문학의 종언'론의 견지에서 다시금 백낙청을 비롯한 민족 문학론자들의 세계 문학론을 비판한다. 진즉부터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을 비평의 화두로 삼아온 백낙청은 괴테와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 세계 문학의 이념을 재정립한다. 요는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올바른 민족 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조영일의 비판은 흥미롭게도 세계 문학에 대한 괴테와 마르크스의 주장을 그 문맥에 맞게 다시 읽는 것이다.

가령 "민족적 편협성과 제한성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고, 많은 민족적, 지방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공산당 선언>)는 게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명한 주장이었다. 조영일은 이 주장에 앞서 마르크스가 "국산품에 의해 충족되었던 낡은 욕구들 대신에 새로운 욕구들이 등장하는데, 이 새로운 욕구들은 그 충족을 위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들 및 풍토들의 생산물을 요구한다"고 적은 대목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세계 문학을 세계 시장의 형성과정에서 생겨난 '민족적 자족성의 불가능'에서 나온 파생물로 보고 있는 것"으로 교정한다. 한편, 괴테의 경우는 세계 문학을 '촉진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조영일에 따르면 그 배경은 전쟁이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보편적 세계 문학이 화제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이 너무나도 두려운 전쟁에 의해 시달린 나머지, 재차 자기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외국의 많은 것들에 대해 깨닫고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이제까지 몰랐던 많은 정신적 욕구를 여기저기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괴테의 '정신적 욕구'는 마르크스의 '새로운 욕구'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며 그것은 참혹한 전쟁을 통해 획득하게 된 어떤 강제적 충동이 만들어낸 '초국가적 연대감'이라는 것이 조영일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괴테의 세계 문학 구상은 칸트의 세계공화국에 대한 구상과 나란하다. "자연의 계획이 뜻하는 것은 전 인류 안에 완전한 시민적 연합을 형성시키는 데 있다"는 칸트의 구상은 보편적 문학에 대한 구상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공화국이 국민 국가를 지양한 것이라면, 세계 문학 또한 국민 문학(혹은 민족 문학)을 지양한 것이다. '민족 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란 구호에 맞서 저자가 '민족 문학에서 세계 문학으로'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세계 문학, 혹은 세계 문학의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라면, 조영일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건 국민 문학의 기원이란 주제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일본 근대 문학은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감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소위 '국민 서사'라는 게 가능하자면 그것은 국가 간 전쟁과 같은 일대 사건을 요구한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일본 '국민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소세키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에 일어난 러일 전쟁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이제까지 일본 문학이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었지만 러시아란 대국도 무찌른 만큼 문학 쪽에서도 대단한 무엇이 나올 거라는 전망을 그는 피력한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 국민 문학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그렇듯 근대 전쟁과 근대 문학은 '상호 협력'했다는 것이 조영일의 시각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조영일은 "국민 전쟁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국가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나라는 근대 문학이 발달했으나 어떤 나라는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요?"란 물음의 답은 그대로 주어진다. 근대적 서사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으로서 식민지를 가져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 곧 해당 국가가 내셔널리즘을 거쳐 제국주의까지 경험해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판단의 잣대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문학사가 좀 부실해 보이는 것은 작가적 역량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이렇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한국 근대 문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제국주의적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것(그리고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3쪽)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이다. 같은 세대의 젊은 비평가들 가운데 가장 명민하거나 유려한 비평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조영일은 가장 흥미로운 비평가이다. "한국에는 근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한 적 없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는 비평가를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그가 각주로 처리한 대목을 보면 가라타니 고진도 "한국에는 애당초 근대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주장에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게 없다. 본문에 충분히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조영일은 미리 입막음해놓고 있지만,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해놓고 '충분히 썼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 마무리이다. 나폴레옹 전쟁과 러시아 근대 문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바 료타로와 이문열에 대한 이야기가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흥미로운 논거이지만 충분한 논거인지는 의문이다.

'장편 비평'이 '이론'의 무게까지 감당하는 건 아니라고 조영일은 말할지 모르겠지만, 근대 문학과 세계 문학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변경하고자 한다면 주장에 더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다음 '장편 비평'을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1.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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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1-07-1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영일씨 글들은 항상 너무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좀 더 많이 팔려도 될텐데...

로쟈 2011-07-16 08:4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2011-07-16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6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1-07-1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언젠가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해서 달았던 댓글의 논리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군요. "제국주의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에 선뜻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말입니다. 이 논리의 배면에 숨은 논거들은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요. 암튼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 문학'을 말할 때는 어떤 아우라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러한 아우라를 한국문학에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제가 고진의 논리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이유였고 제가 고진이 말하는 류의 '근대 문학'은 한국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된 동기였지요.
중국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루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루쉰에게 느끼는 아우라를 그 중국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그에게 루쉰은 이미 낡은 작가였습니다. 암튼 근대 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논의들은 좀더 많은 검토와 연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16 17:16   좋아요 0 | URL
주장을 더 확장하자면 중국도 자체의 근대문학을 만들어내지 못한 나라이고 우리처럼 수입(이식)했던 것이죠. '근대문학'을 갖고 있는 나라는 사실 많지 않고요...

파고세운닥나무 2011-07-18 17:44   좋아요 0 | URL
루쉰을 '낡았다' 여기는 건 중국인들이 루쉰을 국민문학으로만 학습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한국인이 국어교과서를 통해 학습한 현대의 작가들을 고루하다 느끼는 것처럼요. 하지만 국민문학이라지만 루쉰은 다르죠. 제가 함께 얘기 나눴던 중국인은 중국인을 혐오스럽게 그렸다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루쉰을 싫어하더군요. 국민작가로 불리는 작가 중에 자국민을 저리 혐오스럽게 그린 작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건 같은 항렬로 놓고 보는 이광수나 후타바테이 시메이, 나쓰메 소세키를 비교해봐도 알수 있을듯 하구요.
루쉰이 근대 너머를 바라봤다는 인식이 든다면 '낡았다'는 생각은 안 들것 같네요.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숲, 2007)에 대한 감상을 몇마디 적었다(워낙에 대작인지라 짧은 지면에 몇마디 적어봐야 별로 표도 안나겠지만). 원고는 지난주에 보냈는데, 특집기사들 때문에 한주 순연되어 실린다. 개인적으론 <일리아스>를 강의할 기회가 있어서 관련자료를 많이 참고했는데, 윌리엄 J. 프라이어의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서광사, 2010),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책과함께, 2011)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겨레(11. 07. 16) 아킬레우스 시대판 ‘정의란 무엇인가’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킬레우스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양 고전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첫머리이다. 그렇듯 작품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그 분노가 어떻게 해소되는가를 보여주며 끝난다. 1만5000행에 이르는 장대한 서사시를 가능하게 했으니 특별하면서도 대단한 분노다.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인류사적 의미를 갖는 분노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트로이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헬레네의 ‘파괴적인’ 아름다움이었다면, 그 전쟁을 더 잔혹하게 만든 건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였다. 사실 그가 직접 무얼 파괴한 것은 아니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한 데 격분하여 칼을 뽑지만 아킬레우스는 아테네 여신의 충고에 따라 그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니까. 다만 그는 자기 막사에 틀어박혀 참전을 거부하며 이것이 희랍군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진퇴를 거듭하긴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빠진 희랍군은 결국엔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아군에 밀리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전투의 살상 장면은 현대의 여느 전쟁영화에서보다 더 잔혹하게 묘사된다. “오뒷세우스가 전우 때문에 화가 나 창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맞히자 청동 창끝이 그의 다른 관자놀이를 뚫고 나왔다.” “페이로스가 그에게 달려들어 창끝으로 그의 배꼽 옆을 찌르자 창자가 모두 땅 위로 쏟아졌고,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었다.” 같은 식의 묘사가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불만도 터져 나온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교양강좌 수강 체험담을 담은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에서도 <일리아스>는 제일 처음 읽히는 작품인데, 저자 데이비드 덴비는 “여성을 억압하고 전쟁을 찬미하는 시이며, 주인공은 소아병적인 영웅”에 불과하다는 일부 교수들의 불평을 소개한다.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일을 ‘옳음과 그름’이 아닌 ‘좋음과 나쁨’, ‘강함과 약함’이라는 척도로 재단했던 세계의 이야기를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현재적 의의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없지 않다. 가령 트로이아군의 사르페돈이 동료 글라우코스에게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장면이 그렇다. 사람들이 평소 남다른 대접을 하며 자신들을 존경해온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묻고서 그는 이런 전장에서 선두에 서라는 뜻이라고 답한다. 인간으로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명예롭게 죽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다른가.

한편으로 분노를 풀고서 다시 희랍군을 도와달라는 아가멤논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아킬레우스의 태도도 옹졸하기만 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푸짐한 포상에 대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심을 꺾지 않는 것은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불공정하며 정의롭지 못하다. 즉 여기서 아킬레우스가 요구하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규칙 자체의 변경이다.

그래서 고대 희랍 윤리학을 다룬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의 저자 윌리엄 프라이어는 그를 호메로스의 영웅들 가운데 관례적인 규칙의 한계를 깨달은 유일한 인물로 평가한다. 아킬레우스는 분노와 함께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통찰이 아킬레우스에게 명예를 대신할 다른 규칙까지 일러주지는 못한다.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다시 전장에 나서게 되니까. 무엇이 진정 좋은 삶인가.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11. 07. 15.  

P.S. <일리아스> 완독을 시도해본 것은 몇권의 가이드북을 참고할 수 있어서인데, 강대진의 <일리아스, 영웅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그린비, 2010)가 대표적이다(이 책에는 더 참고할 만한 책들의 목록도 포함돼 있다).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솔출판사, 2004)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며, <처음 읽는 일리아스>(웅진지식하우스, 2006)은 원작의 내용을 각권별로 간명하게 정리해주고 있어서 길잡이로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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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럴드 블룸의 '일리아스' 읽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7-17 11:52 
    <일리아스>을 읽으면서 참고한 자료 중의 하나는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인데, 서양문학 '작가사전'으로 아주 유익한 책이다.블룸 자신의 기준에 따라 100명의 천재들을 선정하고 그 천재성을 분류해놓았다.비록 서양문학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무함마드와 <겐지이야기>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가 예외적으로 포함돼 있다)이만한 규모의 작가론을 써낼 수 있는저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
 
 
빵가게재습격 2011-07-15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래도 명예롭지 못한 인간이가봐요.^^; <일리아스>보다 <오뒷세우스>가 훨씬 재미있었거든요. 글을 읽다보니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이 눈에 띄는데, 서점에서 구경하다가 분량 대비, 가격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랬습니다. 그 가격은 너무 너무 '명예'로운 것 같더군요. 책 값의 명예를 따져보는 심히 '명예롭지 못한' 댓글을 혜량하세요.^^;

로쟈 2011-07-16 08:43   좋아요 0 | URL
저도 욕하면서 산 책인데, 그나마 내용은 좋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월간 소식지 '책&'(396호)에 실은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도시로의 여행'이다. 도시를 주제로 한 책들은 아주 많기 때문에 여기서 소개하는 건 일각에 불과하다. 그래도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해냄, 2011) 같은 책은 공통적인 기본서가 될 만하다. 그에 대한 언급으로 '여행'을 시작한 이유이다.   

  

책&(11년 7월호) 우리들의 도시, 타인들의 도시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산다고 한다. 선진 산업국일수록 도시 인구의 비율은 더 높은데, 미국의 경우엔 국토 넓이의 3퍼센트에 해당하는 도시에 2억 4,300만 명이 모여 산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80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다. 한 시인의 말대로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 신은 망했다.”(이갑수, 「신은 망했다」)고 할 만하다. 물론 우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된 1960년대부터 도시 인구는 급증해왔으니 말이다. 이러한 도시 인구 집중은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어서 현재도 매달 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개발도상국의 도시들로 모여들고 있다 한다.  

‘지구도시화’란 말이 등장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지구촌’이란 말이 한물 간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렇듯 도시는 일상적 삶의 지배적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해서, 도시의 역사와 도시적 삶의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여전히 도시는 우리에게 낯설거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인가? 도시에 관한 책들에 잠시 눈길을 돌려본다.   

가장 먼저 펴볼 만한 책은 도시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해냄, 2011)다. 제목 그대로 저자의 도시예찬론이다. 그는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를 묻고 답한다. 어떤 ‘노하우’였던 것인가? 하버드대학에서 강의하는 뉴요커답게 저자의 모델은 뉴욕이다. 애초에 뉴욕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신대륙 전초기지로 세워졌다. 그러나 18세기에 와서 보스턴을 제치고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로 부상했다. 19세기 경제 호황을 타고 인구가 6만 명에서 80만 명으로 급증하면서 뉴욕은 거대도시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해상 운송이 핵심이었지만 제조업도 뉴욕 경제의 기반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뉴욕의 제조업은 더 이상 비교우위를 갖지 못하게 됐고 경제는 쇠퇴해갔다. 그렇다고 끝이 아니었다. 뉴욕은 아이디어 산업과 금융업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그 동력을 저자는 대도시가 갖는 인접성, 혼잡성, 친밀성에서 찾는다. 도시는 똑똑한 거주민들을 서로 연결시켜줌으로써 생산성과 혁신의 속도를 높여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협력이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면 그것은 도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도시는 그러한 협력을 가능하게 하고 또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승리>에서 도시 일반론을 학습한 다음이라면 도시사학회에서 펴낸 <도시는 역사다>(서해문집, 2011)를 통해서 좀더 구체적인 도시들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볼 수 있겠다. 세계 주요 도시들의 기원과 성장과정, 공간구조, 도시 문화와 도시 이미지 등을 소개하는 글모음인데, 서울을 포함해, 도쿄, 오사카, 베이징, 상하이 같은 동아시아 도시와 런던, 파리,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시카고 같은 서구 도시가 주요 도시의 목록이다. 이 도시들은 단순히 도시에 그치지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복합텍스트’로서 의미를 갖는다. “역사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진 문화적 겹지층”이란 의미에서 그렇다.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를 표방한 전우용의 <서울은 깊다>(돌베개, 2008)의 표제를 빌려 말하자면 ‘도시는 깊다’.   

도시는 깊고 넓으며 또한 살아있다. 12명의 기자들이 전 세계 16개국, 29개 도시를 직접 찾아가서 심층 취재한 결과를 묶어낸 <소프트시티>(생각의나무, 2011)가 생생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예컨대 <도시는 역사다>의 파리 편에서 “2007년에는 누구라도 신청만 하면 파리 전역에 설치된 공중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자유 자전거(벨리브)’를 도입했다”는 내용을 읽을 수 있는데, <소프트시티>에서는 그 현장을 더 자세히 소개해준다. 벨리브(Velib)는 자전거(Velo)와 자유(Liberte)의 합성어로 현재 파리 시 일대에는 벨리브 자전가 3만 5,000여대가 운행되고 있고, 이것이 파리의 풍경과 생활패턴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자동차 운행을 줄이고 보행자를 우선하는 파리 시의 지속적인 교통정책이 가져온 변화이다. 책에 실린 많은 도시의 사례는 도시가 역사적 산물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새롭게 가꾸고 변화시켜나가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걸 일깨워준다.  

그러한 변화의 모델로 브라질의 꾸리찌바는 어떤가. 박용남의 <꿈의 도시 꾸리찌바>(녹색평론사, 2009)와 <꾸리찌바 에필로그>(서해문집, 2011)는 도시의 새로운 모델로서 ‘창조도시’의 이론과 실제를 보여준다. 간단하게 창조도시란 “인간이 자유롭게 창조적 활동을 함으로써, 문화와 산업의 창조성이 풍부하며, 동시에 탈대량생산의 혁신적이고 유연한 도시경제 시스템을 갖춘 도시”를 일컫는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인식 변화와 시민의 의식 변화다. 새로운 문명은 건강한 지역공동체에서  출발한다는 공동의 신념과 합의가 ‘타인들의 도시’를 ‘우리의 도시’로 변화시켜줄 것이다. 도시가 우리 삶의 조건이라면 도시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11. 07. 11.  

P.S. 도시인문학 총서도 나오고 있을 만큼 도시 연구는 근래의 한 트렌드이다. 분량상 자세히 다룰 수 없었지만 생각으로는 도시의 이면, 혹은 이면의 도시에 대해서도 짚어보고 싶었다. 관계되는 책은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 2007), 임동우의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효형출판, 2011), 그리고 정진열/김형재의 <이면의 도시>(자음과모음, 2011)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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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구니코(向田邦子)는 1929년에 태어나 1981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여성 작가다. 1만 편이 넘는 라디오 드라마와 1000편 이상의 TV드라마를 썼으니 '일본 최고의 방송작가'란 말도 들을 만하다(우리로 치면 김수현?). 한 걸음 더 나아가 1980년에는 ‘수달’ ‘꽃이름’ ‘개집’이라는 단편소설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게다가 1978년에 쓴 에세이집 ‘아버지의 사과편지’로는 일본 최고의 에세이스트란 평판도 얻었다고 한다.   

실상은 나도 오늘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그의 신작 에세이집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강, 2011)이 눈에 띄길래 찾아본 결과다. 무코다 구니코와 버지니아 울프는 따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오히려 대조적일 듯싶다. 무코다가 서민적이라면 울프는 귀족적이다). 다만 울프의 에세이집도 이번에 새로 나왔기에 같이 묶었다. 조만간 구해서 같이 읽어보고 싶다.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에 대해선 소설가 윤성희 씨의 인용도 참고해볼 만하다.     

“인간은 그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게 마련”이라는 말이 있다.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를 읽다 발견한 구절이다. 어쩌면 이 구절은 서사를 다른 식으로 정의 내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에서 한 인물을 완성하는 것은 그 인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인물을 둘러싼 것들이다. 그런 의미로, 사실, 하재경과 금잔디의 관계는 그다지 신선하지도 않았고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게 신기하다고 했다. 드라마를 25년 이상 보아오신 분이 그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어떤 패턴을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장을 바꾸어 “나란 인간은 내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게 마련”이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나를 둘러싼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앞으로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될 것일까?(윤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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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나오키상 수상작가 무코다 구니코의 유쾌한 인간관찰기
무코다 구니코 지음, 곽미경 옮김 / 강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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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버지의 사과편지
무코다 구니코 지음, 곽미경 옮김 / 강 / 2008년 12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1년 07월 10일에 저장
품절
수달
무코다 구니코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6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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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독자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인용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4월
11,800원 → 10,620원(10%할인) / 마일리지 5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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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11-07-10 23:51   좋아요 0 | URL
수달이 너무 재미있어서 한동안 그녀의 책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나와주어서 반갑네요.
마음산책은 은근 제2의 요네하라 마리가 되어주길 기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니까요.

로쟈 2011-07-11 23:32   좋아요 0 | URL
에세이들은 강에서 나오는데요. 저도 한번 읽어볼 참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1-07-11 17:16   좋아요 0 | URL
버지니아 울프라면 <등대로>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정말 너무도 힘겨웠습니다. 강의때 꼭 찾아 뵈려고 했는데, 결국 일이 생겨서 못 갔습니다. --;; 날씨 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로쟈 2011-07-11 23:33   좋아요 0 | URL
지난주에 부산에도 다녀왔는데요.^^

페크pek0501 2011-07-12 14:22   좋아요 0 | URL
“인간은 그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게 마련”이라는 말이 있다. - 이 말 아주 멋집니다. 개성에 맞는 사건만 만날 수밖에 없는 게 자기 개성에 맞지 않는 일은 그냥 지나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가령 돈에 매수 당하여 비리를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에 맞지 않는 사람은 피할 겁니다. 이에 적합한 사람만 하겠죠. 하지만 모든 일엔 예외가 있는 법이니까, 10프로는 남겨 두고 90프로의 사람들만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군요.

"인간은 그 개성에 맞는 사건을 만나게 마련" -이 구절로 칼럼을 쓰고 싶어지네요. 괜찮겠지요?

물론, 쓰게 된다면 출처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윤성희님도 로쟈님도...

로쟈 2011-07-16 22:10   좋아요 0 | URL
작가 나름의 인간관이 확실했던 듯합니다...
 

지난주 번역서 가운데 관심도서는 로널드 애런슨의 <사르트르와 카뮈>(연암서가, 2011),  <찰스 다윈 서간집 기원>(살림, 2011), 그리고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까치, 2011) 등이었다(부케티츠의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이가서, 2011)도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다). 다윈의 서간집은 2권 <진화>가 마저 출간돼야 한다는데, 작년에 나온 다윈 평전들에 이어서 본격적인 다윈 읽기를 자극한다. 아무래도 <사르트르와 카뮈>를 먼저 손에 들 듯하고, <암>은 장서용으로 꽂아둘 참이다.

 

국내서로 눈길을 돌리면 김용옥의 <중용 한글역주>(통나무, 2011), 박홍규의 <이반 일리히>(텍스트, 2011), 그리고 주강현의 <제주기행>(웅진지식하우스, 2011) 등이 손꼽을 만한 책이다. 모두 상당한 필력을 자랑하는 인문학자들의 신작이란 공통점이 있다.   

 

거기에 한 권 보태자면 원로 문화인류학자 한상복 교수의 <평창 두메산골 50년>(눈빛, 2011)이 있다. 2018년 동계올림픽 예정지이기도 한 평창 두메산골의 지난 50년을 글과 사진으로 복원한 책으로 '한국의 마을 총서'의 첫 권이다. 이제는 책으로만 만나볼 수 있는 삶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한겨레(11. 07. 09) 올림픽 품기 전의 평창 ‘50년간의 인류학적 탐사기’

강원도 평창이 2018년 겨울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대회 개막식과 폐회식, 그리고 스키점프와 봅슬레이, 크로스컨트리 경기가 평창군 대관령면 용산리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열릴 예정이다. 알파인 종목들도 같은 용산리에 있는 용평리조트에서 열린다. 



겨울올림픽이 펼쳐질 두 리조트가 자리잡은 평창군 대관령면 용산리의 50년 전 모습은 어떠했을까? 알펜시아 리조트는 1949년 12월1일 도암초등학교 용산분교로 시작해 2000년 폐교가 된 용산초등학교를 허물고 지었다. 1960년 학교 건물이 완성되기 전에는 귀틀집과 움막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서 6㎞가량 떨어져 있던 용산2리와 14㎞ 떨어져 있던 봉산리 아이들은 학교가 너무 멀어 서당을 다녔다. 아이들은 댕기를 땋고 한복 차림이었다. 학생들은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1년 동안 배우고 중급 과정으로 명심보감, 통감, 소학을 6년 동안 배웠다. 1960년 당시 봉산리 주민의 98%가, 용산2리 주민의 77%가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주민들마저 잊어버렸을 오지마을의 50년 전 모습을 한상복 서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가 생생하게 복원했다. 한 교수가 최근 내놓은 <평창 두메산골 50년>은 당시나 지금이나 오지로 꼽히는 용산2리와 봉산리의 50년 전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정밀하게 대조한 다큐멘터리 같은 책이다. 연구 보고서지만 진귀한 사진과 사람 중심으로 풀어가는 이야기여서 흡입력이 대단하다.

지은이는 1959년 겨울 대학 2학년 복학생 시절 두 마을을 처음 찾아 첫 문화인류학 조사를 했다. 당시 이 두 마을을 선정한 것은 이곳이 오대산, 박지산(두타산), 계방산 등 1000m가 넘는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였기 때문이다. 봉산리는 지금도 비포장도로로 20㎞를 달려야 닿을 수 있는 두메로 강원도가 선정한 대표적 오지 관광지의 하나다. 그는 이듬해인 1960년에는 40여일을 머물며 두 마을의 생활양식을 들여다봤고, 이후 몇 차례 다시 방문해 두 마을의 의식주, 가족의 구성, 신앙과 의례, 교육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이 결과를 졸업 논문과 석사 논문으로 썼다.

스물다섯살 대학생에서 일흔다섯살 노학자가 된 한 교수는 학문 인생의 출발지였던 이곳으로 지난해 다시 들어갔다.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이 우리 이웃들의 생활사를 들여다보자는 의미로 기획한 ‘한국의 마을 총서’ 시리즈 작업에 참여하면서 두 마을을 여러 차례 찾아가 지금의 현실을 정리했다. 한국의 마을 총서 시리즈는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이 2002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과거와 자취를 말살하는 반달리즘에 맞서 이를 지키고 증언하겠다는 취지로 준비한 프로젝트로, 첫 권으로 나온 이 책 <평창 두메산골 50년>에 이어 앞으로 경상도의 농촌 마을, 전라도의 평야 마을, 청계천 판자촌 등을 다룬 책들이 계속 출간될 예정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마을 인구와 학교 학생 등의 통계를 비교하는 것은 물론 마을을 떠난 이들까지 찾아가 수십명을 인터뷰했다. 50년간 마을의 변화에 대한 정량적 접근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의 달라진 생활과 문화를 최대한 담았다. 지역 주민들의 편지와 시 등도 수록돼 산골 마을 주민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특히 50년 전과 지금을 나란히 비교한 사진들이 압권이다. 50년 전 사진은 한 교수가 직접 찍었고 최근의 사진은 엄상빈 상명대 교수가 찍었다



용산2리와 봉산리, 두 마을은 50년 동안 어떻게 바뀌었을까. 두메산골에 올림픽 경기장이 들어서는 것처럼 두 지역은 상전벽해가 됐다. 역시 드라마틱한 것은 인구수다. 봉산리는 1960년 221명에서 2010년 29명으로, 용산2리는 427명에서 63명으로 줄었다. 50년 전 주민들은 감자와 옥수수를 생계형 농업으로 키웠고 부족한 식재료를 (산나물처럼) 산에서 구했다. 하지만 지금 주민들은 대부분 가구별로 몇만㎡ 규모의 농지에서 고랭지 채소를 재배한다. 그리고 도시 사람들처럼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서 먹는다.

그러나 여전한 것들도 있다. 특히 전통문화는 그대로다. 공동체 신앙과 의례의 상징인 서낭당은 50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지금도 두 마을에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서낭제를 매년 치른다. 지은이는 책에서 “월정사를 통해 용산리로 들어갈 때 마치 어린 연어가 민물을 떠나 바다를 돌아보다 나이를 먹어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회고했다.(권은중 기자) 

11.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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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1-07-10 20:38   좋아요 0 | URL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카뮈 전집에는 아쉽게도 카뮈가 장송의 <반항적 인간> 서평에 분개하여 <현대>지에 투고한 편집장에게 보내는 글이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재반박문은 근래에 번역된 <시대의 초상>에서 읽을 수 있지만 정작 논쟁을 촉발한 장송의 글과 카뮈의 글은 방곤 교수가 번역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부록에서만 볼 수 있는 상황이지요. 이 번역은 좀 아쉬움이 있기에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읽었으면 했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김화영 교수가 장송과 카뮈의 글을 번역해서 잡지에 실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찾아보기도 쉽지 않구요. <사르트르와 카뮈>에 이 글들의 번역이 실렸는지 궁금하네요.

로쟈 2011-07-11 23:37   좋아요 0 | URL
김화영 교수 편 <사르트르>(고려대출판부)에 혹 번역돼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사르트르와 카뮈>에는 물론 개별 글들의 번역이 들어있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