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출판사 블로그에서 <애도와 우울증>(그린비, 2011) 저자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greenbee.co.kr/blog/1536). 추석 연휴 전주에 동영상 인터뷰를 가졌는데, 내용이 정리돼 올라왔다. 책소개를 겸하고 있으므로 러시아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 러시아 문학을 읽고 즐기는 입장에서 본다면,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레르몬토프에게 '고독의 시인'이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그는 뭔가 좀 순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레르몬토프에게는 어떤 본질적인 고독, 외로움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사회적인 배경도 이유가 있겠지만 레르몬토프의 불행한 가족사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있겠지요. 제가 강의시간에 간혹 우스갯소리로 레르몬토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레르몬토프는 1814년에 태어나서 1841년에 죽는데, 러시아에서는 작가들의 100주년, 200주년에는 성대한 기념을 합니다. 그런데 레르몬토프 탄생 100주년인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지요. 서거 100주년인 1941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요. 저는 그래서 레르몬토프의 탄생 200주년인 2014년은 조금 주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러시아에 또 무슨 변고가 있지 않을까.(웃음) 레르몬토프는 유언도 「나 홀로 길을 나선다」이런 제목의 시였죠. 이렇게 생전에 고독한 작가였고, 사후에도 고독한 작가에요.
푸슈킨은 굉장히 간명하고 간결합니다. 그래서 푸슈킨에게는 '간결성의 미학'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푸슈킨은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복잡해요. 뭔가 많은 것을 말하고 숨겨놓은 작가이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이 있습니다. 연구거리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연구서나 연구논문이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그런데 국내 독자들이 번역으로 그의 작품을 읽을 때에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에 비해 조금 심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푸슈킨은 주 장르가 시, 운문, 서정시 이런 종류였고, 드라마도 조금 있지만 독자들이 접근하기에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국내독자들에게는 푸슈킨의 문학이 원래 가지고 있는 크기만큼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요.
2.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에 관심을 갖고 연구대상으로 삼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국내에는 덜 알려진 편이지만, 푸슈킨은 러시아문학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지명도가 떨어지는 편이 아닙니다. 레르몬토프 역시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을 다루는 것은 특이한 편은 아니지요. 다만,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조금 드문 편입니다. 서구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비교 연구가 조금 있지만, 국내에서는 많지 않습니다. 제가 석사논문으로 두 시인이 쓴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 오네긴과 『우리 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을 비교하는 논문을 썼어요. 그래서 박사논문은 자연스럽게 그 연장선이 되었던 것도 있습니다. 했던 주제를 다시 하는 것이 편하기도 했고, 책 머리에도 썼지만 이 논문을 쓸 때 개인적인 특수한 사정도 있었죠.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3. 책 제목이기도 한 '애도와 우울증'은 프로이트가 제시한 정신분석학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도'와 '우울증'이 어떻게 다르고, 문학작품에서 어떤 차이를 불러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프로이트 전집 번역본에는 '슬픔과 우울증'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슬픔'이 너무 광범위하고 막연하기 때문에, '애도'라고 한정해서 이야기하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애도'는 죽은 자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좀더 일반화시켜서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의 정서적 반응을 애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상실에 대한 두가지 태도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이 애도적인 반응과 우울증적인 반응이에요. 애도적인 반응은 어떤 대상이 상실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이 '슬픔'인거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눈물이 마르듯 슬픔도 영원하지는 않지요. 슬픔이 추슬러지는 과정을 '애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울증은 그런 현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태도에요. 그리고 상실의 원인을 자기 자신한테 귀속시키지요. 이런 과정이 우울증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우울증에는 개인차가 있는지 아니면 케이스 각각에 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프로이트는 이러한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얘기했지요.
낭만주의 시인들에게는 보통 어떤 이상, 현실 너머 세계에 대한 동경이 기본 정조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부재하는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정념이 중요하게 다뤄지지요. 때문에 낭만주의 시인들에게는 이러한 '상실'에 대처하는 두 가지 태도가 지배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에게는 과연 어떻게 나타날까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논문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대략 구도가 맞춰질 것 같다는 감은 조금 있었어요. 실제로 논문을 쓰는 과정은 작품 속에서 제 생각을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는데 의외로 잘 맞아떨어졌지요. 원래는 두 시인의 작품 전반에까지 애도적 반응과 우울증적 반응을 적용하려고 했는데 기한과 분량의 제약 때문에 나중을 기약하며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두 시인의 작품 일반까지 확장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4.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각각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러시아 근대문학의 정념론적 기원으로 평가하셨는데, 두 시인이 어떻게 다른 '두 기원'이 될 수 있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러시아에서는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모두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지만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으로 평가를 해요. (소비에트 문학비평의 영향으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리얼리즘)에는 우열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주의 이전 단계로서의 미숙한 단계를 낭만주의로 보는 것이죠. 낭만주의자가 성숙하면 다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죠. 두 작가의 작품에 그런 면이 없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리얼리스트가 되는 방향으로 이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레르몬토프가 대표하는 낭만주의 사조의 독자성을 조금 더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푸슈킨은 문학정신적으로는 낭만주의를 넘어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푸슈킨은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고, 당시에는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러시아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라는 말을 써요. 반면 레르몬토프는 자신의 낭만주의를 '진정한 낭만주의'라고 생각하죠. 레르몬토프가 푸슈킨의 낭만주의를 '성숙'이라고 포장되지만 '변절'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푸슈킨 식의 낭만주의와 레르몬토프 식의 낭만주의는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레르몬토프의 주제인 '영원한 사랑'을 예로 들면, 푸슈킨은 영원한 사랑은 믿지 않아요. 푸슈킨은 사랑이 변하고 성숙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레르몬토프와 푸슈킨은 같은 낭만주의 시인으로 묶이지만, 각기 다른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이 낭만주의에 대한 이해나 두 시인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도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5. 러시아 문학 작품을 정신분석학으로 읽어 내는 시도가 많은지 궁금합니다.
낭만주의 3대 작가 중에 니콜라이 고골이 있는데, 고골은 일찍부터 정신분석적 접근대상이었어요.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작가를 카우치(안락의자)에 좀 눕혀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그러한 정신분석학적 접근법 자체를 좀 싫어하는 편이에요. 정신분석학적 작가 심리학 등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접근법으로는 연구를 잘 하지 않고, 권장하지도 않아요.
대신 영어권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연구가 조금 있어요. 푸슈킨의 창작심리에 대한 연구가 약간 있고, (참고문헌에도 소개했지만) 몇 명의 연구자들은 정신분석학적 접근으로 러시아문학을 연구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러시아에 있을 때, 정신분석학적으로 러시아 문학을 연구한 라페리에르(Rancour-Laferriere)라는 사람의 작품이 번역되어 출판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 신문에서 그 책에 대한 조롱기 어린 서평이 실린 것을 봤지요. "우리의 푸슈킨, 우리의 톨스토이가 정신병자란 말이야?" 이런 식의 반응이랄까요, 러시아에서는 이런 반응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6.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텍스트의 무의식'은 무엇인가요?
책에서 '텍스트적 무의식'이나 '텍스트의 무의식'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국내에서 통용되는 표현 같지는 않아요. 저도 이론적인 뒷받침을 갖고 썼던 개념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작가적 무의식'이라는 말은 쓰지요. 그런데 저는 작가의 텍스트에서 작가가 의도하고 전달하려고 했던 것 이면에서 말해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무의식이 텍스트로 전이되었다고 할까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메시지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나 코드가 있다는 것이죠. 이 숨겨진 코드(메시지)는 의도적으로 작가가 숨긴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조차도 속이는 것을 뜻합니다.
꿈의 경우를 예로 들면, 자신의 꿈이라고 자신이 다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꿈을 해석해 줄 수 있는 타자가 필요한 것처럼, 저는 작품에서도 그러한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연구자가 밝힐 수 있다고 봅니다. 작가의 텍스트에 대해 작가가 어떤 억압된 무의식을 갖고 있는지 드러내는 것, 이러한 역할은 텍스트 읽기와는 조금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텍스트의 무의식 읽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7. 무의식으로 작품을 읽어 내는 작업을 또 하게 된다면, 시도해보고 싶은 작가가 있으신지요? 앞으로 선생님의 활동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다 관심이 있어요. (웃음) 작가론이나 작품론, 특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비교론도 써보고 싶어요. 조지 스타이너(Geroge Steiner) 이후에는 그러한 시도가 별로 없는데,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요즘은 『러시아 문학 강의』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는 독자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는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갖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러시아 문학의 유산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세계문학의 유산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러시아 문학을 같이 공유하고 음미하는 그런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드라마 까페나 드라마 폐인까페 같은 것도 있잖아요. 그러한 까페들처럼 러시아 문학 공동체, 러시아 문학 애호가 공동체 같은 것도 가능할 텐데, 저는 그 공동체에 일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11. 0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