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당일배송으로 주문해서 받은 책 가운데 하나는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 보일드 센티멘털리티>(뮤진트리, 2011)다. 부제는 '20세기 미국 범죄소설사'. 그러니까 하드보일드 소설이 아니라 '문학사' 책이다. 예기치 않은 분야의 책이어서 호기심과 반가움에 바로 주문을 넣었다. 비록 책이 다루고 있는 범죄소설(혹은 추리소설)의 애독자는 아니지만 '범죄소설의 사회사'라면 관심분야에서 빠지는 것도 아니다.

 

 

책은 저자의 두번째 책인데, 데뷔작은 <잔혹한 인종: 미국 문학과 문화 속의 인종적 엽기성>(1996)이다. 이 역시 흥미로운 타이틀이다. 저자는 대학에서 미국문학을 강의하는 범죄소설 평론가인데,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논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8년 로스엔젤레스 타임스가 선정한 '10대 추리소설'에 선정되기도 했다고.

 

 

특이한 건 저자의 최근작이 (편저이긴 하지만) 야구에 대한 책이라는 점. 범죄소설 애독자이면서 동시에 야구 애호가인 듯하다.

 

 

'범죄소설의 사회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책은 마르크스주의 경제사가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이후, 2001)인데, 아쉽게도 절판돼 구하기 어려운 책이 돼버렸다. 추리소설에 관한 이론적 저작에는 이브 레퇴르의 <추리소설>(문학과지성사, 2000)과 토마 나르스작의 <추리소설의 논리>(예림기획, 2003) 등이 검색된다. 열혈 독자층에 비하면 이론서의 소개는 좀 빈곤해 보인다.

 

참고로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는 범죄소설의 주요 작가와 작품 리스트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것만으로도 꽤 요긴한 정보이지 않을까 싶다...

 

1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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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관심도서의 하나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병철 교수의 <권력이란 무엇인가>(문학과지성사, 2011)이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독일어로 20여 권의 책을 출간한 철학자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학자로는 송두율 교수 이후로 처음(최소한 드물게) 소개되지 않나 싶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12. 28) “절대권력은 자발적 복종서 기인… 폭력 쓸 필요 없어”

 

“권력은 폭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반적으로 권력을 생각하면 군홧발과 폭력, 짓밟힘과 억눌림, 민중의 봉기와 저항 등을 떠올린다. 이런 통념에서 보면 독일 카를스루에대학 한병철 교수(사진)의 논의는 색다르다.

 



한 교수는 국내에 처음으로 내놓는 자신의 저서 <권력이란 무엇인가>(문학과지성사)에서 “결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이 권력이다”라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한다. 그에게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억압해 자신의 의지에 따라오게 만드는 강제적 수단만은 아니다. 권력자의 의지가 복종하는 자의 내면으로 스며드는 것이며, 곧 “타자 안에서 자아의 연속성을 창출해내려는 의지”다.

 

따라서 한 교수는 “절대적 권력은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복종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논의를 전개하면 ‘카다피의 42년 철권통치’라는 말도 다시 보게 된다. 42년간 통치가 가능했던 것은 폭력적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힘으로부터도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로 독재가 만들어진다는 ‘대중독재론’ 등과도 비슷해 보인다. 다만 한 교수는 “우리 시대에 권력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는 다수의 목소리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과거의 대중독재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즉 “권력을 통해 걸러지지 않는 모호한 영향력들과 복잡한 상호작용들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수많은 목소리들이 불협화음으로 이어져 행위와 결정을 마비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권력의 다양한 표현 양태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폭력적인 식민 지배와 그 뒤를 이어 지속된 독재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권력을 억압이자 부자유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했다”며 협소한 권력개념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독일에서 20권 이상의 책을 펴낸 한 교수는 한국보다 독일에서 더 유명한 학자다. 내년 초 번역 출간 예정인 <피로사회>는 2011년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철학서로 꼽혔다.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건너간 독특한 이력을 지닌 그는 철학과 미디어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황경상 기자)

 

11. 12. 28.

 

 

 

P.S. 기사에서 언급된 아렌트의 폭력론은 <폭력의 세기>(이후, 1999)에 나오며, <공화국의 위기>(한길사, 2011)에도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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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데뷔작 <죽은 군대의 장군>(문학동네, 2011)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작가가 27살에 발표한 작품이다). 지난 1994년 카다레의 작품으론 제일 처음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데, 그간에 절판돼 아쉽던 차이다(문학세계판도 갖고는 있지만 역시나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알지 못한다). 찾아보니 카다레는 지난 2000년 한국을 찾았고, 아마 그 사이에도 한두 번 더 다녀간 듯싶다. 그의 작품들을 리스트로 묶어놓으면서 참고삼아 옛날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 사진은 최근 모습이다.

 

Ismail-Kadare

 

한겨레(00.09. 26) 한국온 알바니아 망명작가 카다레

 

“알바니아는 30년 전에 북한과 먼저 수교를 했습니다. 남한과 수교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죠. 따라서 남한에 온 알바니아 작가는 제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바니아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64)가 26~28일 대산재단이 주최하는 국제 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지난 90년 프랑스로 망명한 카다레는 우리에게는 처녀작 <죽은 군대의 장군>과 <부서진 사월>로 잘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H서류>.

 

“노벨상은 모든 작가에게 큰 영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알바니아나 한국과 같은 이른바 문화적 소국의 국민들이 느끼는 기쁨은 더 클 것입니다. 그러나 노벨상을 받지 않은 작가 가운데도 좋은 작가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제 말은 노벨상의 명성과 권위가 너무 과장돼 있다는 것입니다.”

 

카다레는 같은 분단 국가로서 알바니아와 한국은 공통점이 많다면서 “그렇지만 최근의 코소보 사태에서 보듯 알바니아의 분단은 유럽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통일을 단순하게 추구할 수는 없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처음 망명할 때는 그 기간이 이토록 길어질 줄은 몰랐다”는 그는 곧 알바니아로 돌아가 장기 체류할 것 같다고 밝혔다. “현실의 나는 알바니아와 프랑스 사이에 끼여 있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알바니아의 작가입니다.” (최재봉기자)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죽은 군대의 장군 (무선)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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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풍토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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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7일에 저장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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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의 딸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우종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1년 12월 27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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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KTX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기사(하단 참조)를 읽고 떠올린 책은 폴 버카일의 <정부를 팝니다>(시대의창, 2011)이다. 지난달에 구입해놓고는 잊고 있었는데, 다시금 책상맡에 갖다놓아야겠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에게 정말 많은 책을 읽게 한다...

 

 

아시아투데이(11. 11. 15) “무책임한 정부는 모든 것을 민영화한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수도, 전기, 철도 등 공공시설의 민영화에 이어 국방, 교도소, 치안 등 그야말로 정부 고유의 기능까지 민간 기업에 넘겨지고 있다. 정부가 서비스하는 영역을 민간에 넘기는 것, 민영화란 정부가 전체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주권을 일부 시민(이윤을 추구하는 민간 기업)에게 넘기는 것이다.


<정부를 팝니다>(폴버카일 지음·김영배 옮김·시대의창)의 원제는 '주권 아웃소싱(Outsourcing Soverignty)'으로 미국의 공법학자인 저자가 정부 기능의 민영화를 냉철하게 파헤친 책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유행한 지난 30여년 동안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국가의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는 조치들이 단행됐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에서 불거진 이란-콘트라 사건, 민간인 전쟁용병 블랙워터, 유럽의 공항안보 민영화 등 미국 안팎의 다양한 민영화 사례를 제시한다.

 

 

한 예로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이 이라크에 최고 행정관으로 파견한 폴 브레머를 호위한 것은 미국군대가 아니라 ‘블랙워터’라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동부를 강타했을 때 뉴올리언스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다.

저자는 “정부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민간에 넘겨줬을 때 이들은 정부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 정부는 주권을 아웃소싱할 권한이 있느냐”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민영화는 주권을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민영화의 실체는 헌법과 시민주권을 시장에 넘기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저자는 "효율성이라는 가치보다 헌법과 시민 주권의 가치가 더 우위에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기본 관점이 반(反)민영화는 아니다”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아웃소싱을 결함투성이 방안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이를 공법의 체계 내에서만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경계를 정확히 설정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 체제가 올바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 책은 이미 정부 민영화가 시작되고 있는 위험한 우리 현실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막는 방벽 구축의 지혜를 주고 있다”고 밝혔다.(주진기자)

 

11. 12. 27.

 

P.S. 관련기사를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노컷뉴스(11. 12. 26) "KTX 민영화"…정부, 또 대기업 퍼주기 

 

4대강 사업과 인천공항 민영화에 이어 정부가 이번에는 철도 부분에서 '알짜'로 통하는 KTX 민영화를 강하게 밀어부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26일 복수의 정치권 인사에 따르면 국토해양부는 27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KTX 경쟁체제 도입'을 골자로 업무보고를 할 예정이다.

정부는 사실상 국가 독점체제인 철도 운영에서 경쟁체제를 도입할 경우 경영효율화, 서비스 향상, 안전 강화 등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일부 노선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국토해양부는 우선 오는 2015년 수도권 고속철도(수서~평택)가 개통되면 수서발(發) 경부, 호남선 400km를 민간사업자에 맡길 예정이다. 이를 위해 내년 상반기 중에 사업자를 선정하고 2015년부터 시행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KTX가 민영화할 경우 철도 운영의 다원화로 인한 안전 시스템의 인터페이스 붕괴, 공유노선에 대한 소통 및 조정의 난항, 선로나 열차고장 등 비상 상황 시 대응의 어려움 등 철도 안전이 위협 받을 것이라고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민주통합당 김진애 의원과 통합진보당 강기갑 의원은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민간자본의 수익성 추구 경영으로 철도의 기반인 차량 및 시설유지보수를 소홀히 함으로써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며 "이는 영국 등 철도선진국의 민영화 이후 사고발생, 요금인상 등의 경험과 재공공화 추진으로 이미 확인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경영효율화라는 명목 하에 구조조정이 이뤄진 이후 KTX와 관련해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또 일부 민간에서 운영하는 고속도로 요금이 일반 고속도로보다 훨씬 높게 책정된 사례가 민영 KTX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걱정도 많다. 국토부도 철도 민영화로 요금이 내려갈 것이라고는 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토부 고위 관계자는 “외국에서도 대부분 철도를 경쟁체제로 운영하고 있으며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 않다”며 “그렇다고 요금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철도부분에서 KTX는 영업이익률이 30%에 달해 적지 않은 대기업들이 탐을 내고 있지만 민영화 이후 수익성 추구에 매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의원은 "임기가 1년도 안 남은 상황에서 민간 대기업에 새로운 돈벌이의 장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며 "우리는 국민의 세금과 호주머니를 털어 민간대기업의 배만 불리는 특혜"라고 지적했다. 특히 국토부가 이런 정책 수립과정에서 임명된 지 10개월 밖에 안 된 철도정책관에 대해 인사를 내면서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지난 20일 인사에서 A정책관이 새로 전보됐고 기존에 철도정책을 총괄했던 B 전 정책관은 대기 중이다. 당시 인사에서는 A 정책관 외에 과장급 1명이 전보됐을 뿐이었다. 민영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기 위해 B 전 정책관을 앉혔다는 얘기가 도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토부측은 "최 전 정책관은 내년에 인사낼 때 한꺼번에 내려고 해서 대기 근무 중"이라며 "KTX민영화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정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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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을 내고 대학내일과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그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로 시작해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로 마무리지었기에 나름으로는 2011년 결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대학내일(589호) 로쟈를 거쳐 지젝을 지나 실재의 사막으로

 

인문학자 이현우  혹은  로쟈

구 동독 시절 농담 하나. 동독의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 일자리를 얻었다. 생활환경이 좋다고 홍보하는데 당연히 미심쩍다. 노동자가 친구와 약속하길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우리 암호를 정하자. 내가 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그 내용은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는다. 편지엔 모든 게 훌륭하다고 적혀 있다. 음식은 풍부하고, 아파트는 넓고, 영화관에선 서구권 영화를 마음껏 틀어주고. 그런데 친구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문장, “딱 하나 빨간 잉크만은 구할 수가 없더라고.”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현장에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인간 확성기’를 이용해 미국인들에게 이 우화를 전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에 과연 자유와 민주가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동물과 섹스할 자유마저 있지만, 부자들의 세금 10% 높일 자유는 없는 곳, 생명연장기술이 찬란하게 발전 중이지만, 가난한 사람은 병원조차 갈 수 없는 곳. 지배 권력의 프레임 탓에 자유롭지 못함을 자각조차 못 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우리 생각의 한계를 꼬집는 지젝은 현대판 소크라테스다.


이번 인터뷰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유명한 인문학자 이현우 교수와 슬라보예 지젝에 대해 나눈 내용이다. 이 교수는 최근 책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출간했다. 지젝의 저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풀어 전달하는 내용이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지젝을 읽고 지적으로 무장하길 바랬다.(이정섭기자) 

 

 

9 .11은 미국의 과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자주 들어왔던 사람이라면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관심을 익히 알 테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도 있으니 왜 지젝을 이야기하는지 다시 한 번 설명해달라.
금융위기 이후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그리고 다음 올 세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부분이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지젝은 가장 좌측에 있는 사람이다. 깃발만 거기에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논리와 설득력이 있다. 1대 99의 사회에서 99%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실재에 대해 필독할 필요가 있다. 그냥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기득권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고의 프레임 자체를 신랄하게 드러낸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1%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왔다. 속고 이용당해 온 사람들이 지젝을 통해 자신을 지적으로 무장했으면 좋겠다.  

 

책 서문에 ‘지젝거리다’ 할 정도로 자주 거론되는 철학자라고 소개했는데, 견문이 짧아서인지 나는 그렇게 많이 들어본 것 같진 않다.
식자층, 특히 문화비평, 영화비평 쪽에서 정말 자주 거론되는 철학자인데, 그 밖과는 좀 갭이 있다.  책도 그렇게 많이 팔리는 편이 아니다. 이름이 자주 거론되니까 기자들도 책이 꽤 읽히는 것으로 착각하더라. 시장성은 적지만 네임 밸류가 있으니까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데 그만큼 읽히진 않는 게 현실이다.

 


보통 9. 11사태를 문명 간 충돌의 시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데, 지젝은 9. 11사태 미국의 과잉이라고 해석한다.
문명의 충돌로 프레임을 짜는 것 자체가 미국식 시각이다. 자기들 주류적인 세계관을 주입하고 싶어서 만들어내는 것이고, 여기서 문제는 이 체제에서 고통 받는 제3세계 사람들마저 그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이슬람의 이미지, 폭력적이고 우리와는 뭔가 다른 이슬람의 이미지를 걷어내야 한다. 우리가 보는 현상 너머의 사막과 같은 실재를 보고 경험할 필요가 있다. 영화 ‘매트릭스’로 치면 빨간 약을 먹고 실재 세상을 보는 것처럼.

 

미국의 과잉이란 표현이 어렵다. 설명해달라.
경제학의 경기론을 보면 호황과 불황 곡선이 있잖은가. 미국의 과잉이란 말도 그것과 같다. 미국의 힘이 모자랄 때도 있고 과하게 넘칠 때도 있다. 미소 냉전 시절 미국은 이슬람원리주의를 지원해 소련과 맞섰다. (영화 ‘람보 3’를 보면 람보가 이슬람 무장 세력과 함께 소련군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성장한 이슬람원리주의 단체들이 미국의 중동 정책과 부딪치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슬람원리주의는 타자적인 게 아니다. 미국 바깥에 있던 게 아니라 미국 패권을 위한 수단이 과잉이 돼서 돌아온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외부에서 온 문제냐, 미국 자체의 과잉이냐에 따라 해결 방향이 상당히 달라진다. 외부, 즉 이슬람 문명에서 온 문제라면 오히려 쉽다. 이슬람원리주의자만 모두 없애면 문제가 사라진다. 근데 과연 그럴 것이냐. 그럴 것 같지 않다. 한때 파시즘이 그렇고, 공산주의가 그랬듯, ‘진짜 이번 적만 없애면 끝이다’ 싶지만 어느 순간 또 다른 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책에서 또 하나 재밌는 건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미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미화하는 것 역시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다. 동양적인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든 경멸의 대상으로 삼든 그 기저는 같다. 보편성의 논리로 보지 않는 것. 상대를 우리랑 다른 존재, 우리랑 소통되지 않는 존재로 보는 것이 문제다.

 

 

상상조차 못하는 부자유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 도중 지젝이 중국 이야기를 했다. 중국이 대안적인 세상을 그리는 영화, 소설 등이 금지됐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미국은 상상할 능력마저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적절하게 표현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막연히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현실’에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재’적으론 자유롭지 못한 것.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를 찾아야 한다. ‘매트릭스’에서 그렇듯 안락하게 몽상의 세계에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속고 있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익숙한 사고에서의 탈주가 있어야 한다.

 

지젝이 건네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평소 듣지 못한 내용이고, 낯선 생각의 단초가 된다. 예를 들어 중국 올림픽 때 매스게임 보면서 뭔가 전체주의적 느낌을 받았는데, 책에서 지젝은 매스게임을 그렇게 보는 고정관념 자체가 잘못돼 있다고 지적했다.
흔히 매스게임을 원조 파시즘으로 해석하는데, 그것과는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집단 퍼포먼스는 본래 노동자 운동의 한 요소다, 그것을 파시즘이 갖다 쓴 것이다. 공산주의 매스게임을 보며 파시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건 지배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바꿔놓은 순서로 인식하는 것이지.
 
비폭력 시위가 옳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젝은 ‘카페인 없는 커피’ 같은 것이라며 비판한다.
운동에 폭력을 쓰느냐 마느냐는 따로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상황은 반복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최선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무조건 비폭력이 옳다’ ‘폭력은 항상 정당하다’ 그런 건 없다. 정세를 판단해 가장 강력한 수단을 택해야 한다. 간디의 인도 해방 때는 비폭력이 강력했고, 레닌의 러시아 혁명 땐 폭력이 강력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일반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닌을 반복하라
공산주의(코뮈니즘)이란 말 자체도 요즘엔 지식인들이 웬만하면 피하려는 단어다. 지젝처럼 자신을 공산주의라고 내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공산주의라는 단어와 함께 거대한 수용소, 강제적인 의식화, 활력 없는 사회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은 우리나라 교육체제의 승리고. 프로파간다의 승리다. 지젝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이야기한다. 보통 현실은 어떤 선택지를 강요한다. 예를 들어 취업해서 잘 먹고살든가, 취업하지 않고 굶든가. 레닌은 현실이 강요하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행동을 통해 불가능을 돌파했다. 여기서 레닌을 반복하라는 건 레닌이 했던 것을 똑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레닌이 시도했지만 실패한 자리가 있다. 전체 인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의 문턱. 실패하되 더 낫게 실패하라.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역사의 폐기장에 던지지 말고 그 원래 자리로 가서 다시 한 번 시도하라. 전철이 있으니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또 실패할 수도 있고.

 

지젝은 현재의 의회 민주주의는 반대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말이 대의제이지 별로 대의가 되지 않지 않는가. 가진 사람 의견만 대의하니까. 지금 보면 거의 과두제화돼 있지 않은가. 해결책을 고민하는 한쪽은 최장집 교수처럼 기존 대의제 시스템은 유지하되 어떻게 대표성을 강화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이 제도 자체가 한계가 있으니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까?
흔히 누군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그 대안이 뭐냐며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만한 사이즈의 뭔가를 가져오라고 이야기하는데, 지젝은 지금이 파국적 마지막 상황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런 것을 절박하게 발명해야 될 시기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여러 방식이 가능하지만 미리 예단할 수 없다. 나꼼수의 돌풍을 보라.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무도 알 수가 없던 일이다. 변화된 정황, 매체의 변화, 사회적 분위기가 결합해 나온 게 나꼼수다. 미리 계획을 다 짜놓고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해서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젝이 제안한 건 소비에트식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이다. 직접민주주의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인구수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반대하는데 그렇게 불가능하지도 않다. 기술적으로 그런 게 가능해진 시대이지 않은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자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가능한 방법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찾아가는 것, 길을 찾아가는 게 오늘날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 게 있다면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부자 세금도 마찬가지. 10%? 30%? 그중 어떤 것도 정해져 있는 거 아니다. 모두 사람이 만든 규칙이다. 원래 있던 규칙을 자연법칙처럼 인식하는 것. 현 상태를 ‘자연화’하려는 게 보수다.

 

 

곁다리의 가치
지젝의 나머지 내용에 대해선 독자의 독서를 위해 남겨두고 인문학 자체에 대해 묻겠다. 한동안 유용성이 없다고 취급받던 인문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문학 서적 중엔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처럼 인문학을 통해 개인을 치유하려는 책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당신은 한 방송에서 인문학은 희망이나 행복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인문학자마다 관점의 차이는 있다. 나는 인문학이 공동체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거라면 그런 면에선 희망을 품기 조금 어렵다고 생각한다. 개인이라면 직장을 갖고 수입을 늘려가면서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보면 쉽게 희망을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한 이야기다.

 

행복이란 값어치가 없는 말이라고도 했다.
행복이란 게 상당히 오용되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행위의 목적으로 행복을 이야기할 때는 그 행복은 에우다이노미아(eudaimonia)다. 지속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우리가 쓰는 행복(happiness)하고는 다르다. 복권 당첨, 승진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남과 비교했을 때 차별적인 행복이다. 전쟁에 나갔는데 옆에 있는 병사가 화살에 맞는 게 행복이란 말이다. 자신은 안 맞았으니 속으로 기쁜 거야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게 대놓고 만세 부를 일은 아니지 않은가. 가령 몇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취업을 하면 행복해하는데, 99명이 1명을 위해 들러리 서는 시스템을 문제라고 생각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당신은 자신을 전체주의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지젝이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쓴 책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도 번역돼 나와 있는데. 나는 나 자신을 지식 전체주의자, 혹은 공유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지식의 많고 적음이 어떤 차등적 대우의 근거가 되는 것에 반대한다. 블로그 활동도 그런 것의 일환이다. 영어로 된 콘텐츠는 인터넷상에 이미 상당히 많다. 대학마다 공개강의도 영상으로 올라와 있고. 무료로 접할 수 있는 지식 정보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똑똑해질 수도 있다. 나는 그게 중요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격차가 큰 사회보다 중간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마지막 질문이다. 스스로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하는데 이유는 뭔가?
내가 곁다리 인문학자라고도 쓰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곁에 두는(beside)의 뜻이 있다. 인문학에 발을 담그고 있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항하다(against)의 의미다. 어깃장을 놓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서구 중심이다. 한 일본 학자가 말했듯 서구인이 하면 ‘인문학’, 제3세계인이 하면 ‘인류학’인 꼴이다. 서구의 시각으로 돼 있기에 제3세계의 본 생각이 반영되긴 쉽지 않다. 그리고 인문학엔 보수주의도 있다. 소위 교양주의라고 불리는 ‘나는 이만큼 알고 있는데 쟤는 잘 모르지. 그러니 내가 우월해’식의 사고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에 beside와 against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본다. 인문학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하고 교정해가면서 동시에 인문학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 이용가치를 선용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언젠가 당신이 인문학을 등쳐 먹고 인문학이 또 당신을 등쳐먹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웃음)내가 인문학 때문에 세월을 보냈으니 제 인생을 등쳐 먹은 게 맞지. 곁다리란 말엔 사실 친근감을 느낀다. 한 문학평론가가 머리말이라든가 책 표지에 있는 글 같은 걸 뭉뚱그려 곁다리 텍스트라고 한 적이 있다. 메인이 아닌 그런 텍스트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나 역시 메인 텍스트를 이용해 곁다리 텍스트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제 몫이 있다고 본다. 지금 세상은 연구를 열심히 해서 좋은 인문서가 나와도 그 텍스트가 전파가 안 된다. 사회적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다리 역할이 필요한데 내 책도 그런 역할이다. 지젝하고 독자하고 사이에 거리감이 있으니 좀 좁히고 싶다. 가령 징검다리로 개천을 건너는데 돌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가운데 하나를 놓고 싶은 거고. 그래도 넘기 힘들면 하나 더 놓고. 그런 작업이 필요한 것 아닐까. 독자가 성장해서 컴퍼스가 길어지면 중간 돌 필요 없이 그냥 건너가면 되고.


지금 이 인터뷰도 지젝과 로쟈에 가까워지는 돌이 됐으면 좋겠다.

 

11.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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