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도 깜짝 놀란 만한 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이 글은 2004년 1월 중순에 씌어졌다), 제법 관심이 가는 책들이 여러 권 나왔다. 제일 먼저 손꼽고 싶은 것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후)이다. 이 책을 꼽은 것은 물론 시의성 때문이다. 소개글에 의하면, “<타인의 고통>은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을 비롯해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한 (저자의) '지적' 개입이다.” 원제는 'Regarding the Pain of Others'(2003)인데, 전체가 131쪽밖에 안되는 얇은 책이고(행간도 넓다), 일종의 포르노그라피로서의 전쟁사진론 정도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번역되면서 250쪽이 넘는 책으로 부풀려졌다(값은 15,000원).

 

 

 



처음엔 장삿속이겠거니 했는데, 인터넷서점의 책소개를 참조해보니까 영어판에 없는 도판 48장이 한국어판에는 들어가 있다고 한다(나는 아직 책의 실물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복사했다). 게다가 역시 원서에는 없는 4편의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책은 원서보다도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번역 또한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번역한 바 있는 경험자가 맡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간다. 손택은 촘스키만큼이나 현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지식인인데(그가 좌파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9.11 관련으로 뉴욕타임즈에 실린 칼럼을 나는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9.11 관련 필독서의 한권이 될 만하다고 본다.

 

 

 

 

두번째 책은 실천문학사에서 ‘실천인문총서’의 한권으로 나온 <문화의 숙명>이다. 부제는 ‘기어츠의 문화이론에 대한 발전적 논의’이고, 원제는 The Fate of "Culture" : Geertz and Beyond(1999). 기어츠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화유물론의 마빈 해리스가 과학 정향적인 인류학을 대표한다면, <문화의 해석>(까치, 1998) 등을 통해 ‘중충적 해석’(두꺼운 묘사)을 주창하는 기어츠는 인류학을 일종의 해석학으로 간주한다. 재미있는 것은 해리스와 기어츠 둘 다 인도네시아에서 현지조사 작업을 했다는 것.


 

 

 


덕분에 그의 저작은 문학적인 풍모마저 풍기는바, <슬픈 열대>의 레비-스트로스가 이에 견줄 만하다. 신간은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 7인이 기어츠의 문화이론의 의미와 그 영향에 대해 조명하고 있는”데, 이중 문학비평가이자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그린블래트 교수는 ‘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의 대표자로서 유명하며, <마르탱 게르의 귀향>(지식의풍경, 2000)으로 유명한 여성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도 필진에 참여하고 있다.



 

 

 

세번째 책은 조르주 귀스도르프의 <신화와 형이상학>(문학동네). 원제는 'Mythe et Methaphysique'(1984)이며, 이름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저자 귀스도르프는 1912년생으로 48년에 바슐라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책소개에 의하면, “이 책은 '철학개론'이라는 부제를 붙여 1953년에 출간한 것을 30년이 지난 1983년 개정판 서문을 더하여 재출간 것으로, 지은이는 양차 세계대전 직후 이성 중심적 사유에 큰 회의를 느끼고 인간 존재 규명으로서의 철학을 신화라는 비이성적 영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 요컨대, 반세기 전 사르트르가 주름잡던 시대의 책이다. 요즘 신화, 판타지 열풍에 대해 좀 숙고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만한 책처럼 보인다.

 

 

 



네번째 책은 험프리 카펜터가 쓴 <톨킨 전기>(해나무). 500쪽이 넘는 이 책은 "J.R.R.톨킨 저작권협회가 유일하게 공식 인증한 톨킨 전기"라고 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 덕분에(나는 아직 1편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일부 마니아들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지게 된 작가 톨킨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라면 빼놓을 수 없을 법하다. 이미 톨킨의 전기로는 <톨킨 - 판타지의 제왕>(작가정신, 2003)이라고 나온 것이 있는데, 분량은 신간보다 다소 얇지만, 표지가 유사하기 때문에 자칫 헷갈릴 수도 있겠다. 전문가들이 권장하는 건 단연 <톨킨 전기>라는 걸 유념해야겠다.

 

 

 

 

톨킨의 영화만 보는 게 다소 멋쩍은 독자라면, 얼마전에 나온 <철학으로 반지의 제왕 읽기>(이룸, 2003)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겠다. 제목에 ‘철학’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잘 팔려나가는 책이다(*그밖에도 여러 종의 관련서들이 나와 있다). 물론 이 분야의 히트작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한문화, 2003)이지만.

 

 

 



톨킨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환상적인’ 남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강연집도 소리없이 작년말에 출간됐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르네상스)가 그것인데, 원제는 'This Craft of Verse'(2000), 그러니까 ‘시의 기교’쯤으로 번역되는 책이고, 보르헤스가 1960년대말에 하버드대학에서 여섯 차례 특강한 내용이라고. 원제에서 알 수 있지만, 내용은 전적으로 시에 관한 것이다. 200쪽이 안되는 분량에 다소 부담스런 책값이지만, 보르헤스의 강연을 유료 청강한다는 기분으로 손에 들면 되겠다(*이후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볼 만한 보르헤스 입문서는 김홍근의 <보르헤스 문학전기>이다).

 

 

 



다섯번째 책은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 책이지만, 신간은 가장 원문에 가깝게, 충실하게 (시적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해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 나와 있는 번역서들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만은 틀림없으므로 아직 이 고전이 서가에 안 꽂혀 있는 이라면 이참에 구입해 두시기 바란다(지난번에 나온 <팡세>와 마찬가지로).

고전 중에 한권 더 소개하자면,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이반 부닌(1870-1953)의 대표작(1910년작) <마을>(삶과꿈)이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부닌 전공자로서 이미 <비밀의 나무>(원제는 <어두운 가로수길>)를 2000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바 있는데 이 책은 이미 절판됐다. 그러니 당장 안 읽을 책이라도 사두는 수밖에. 대학원 첫 학기에 부닌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좀 게을러서 이 중편소설을 읽어두지 못했다. 왠지 인도인의 인상을 풍기는 이 작가에게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었고.

개인적으로 나는 체호프와 부닌, 그리고 고리키가 톨스토이 문학의 유산을 3등분해 가지고 있는 걸로 본다. 톨스토이의 미학(체호프)과 종교성(부닌), 그리고 민중성(고리키)이 그것이다. 불교철학과도 깊은 친연성을 갖고 있는 부닌은 오히려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나는 그 낯설지 않다는 점이 불만이지만). 관심있는 분이라면, 그의 짤막한 단편 중에서 <사랑의 문법>(소담출판사, 1996)에 실려 있는 <일사병>을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비교해서 읽어보시길.



 

 

 

기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동경대의 정교수가 된 강상중 교수의 신간 <내셔널리즘>과 <세계화의 원근법>(이산)이 동시에 출간됐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도 사놓고 안 읽었기 때문에, 이 신간들마저 소화할 만한 여력/자격이 안된다(*강상중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재일 강상중>(삶과꿈, 2004)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젠 원로급 문학비평가라고 해야 할 김병익씨의 ‘책으로 쓰는 자서전’ <글 뒤에 숨은 글>(문학동네)도 나왔다. 아마도 인생을 정리할 만한 나이에 도달한 듯싶다. 책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겸연쩍어서라고. 김병익의 제자를 자처하는 고종석이 추천사를 쓰고 있기도 한데, 김병익은 고종석이 그렇듯이 일급의 비평가/소설가라기보다는 일급의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온당하다(이건 폄하의 의미가 아니다).(*김병익의 책은 이후에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게으른 산책자의 변명> 등이 더 출간됐다.) 

 



또, 장서가라면 탐이 날 만한 책이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이다. 전질이 20권인데, 나는 당장에라도 몇 권은 살 용의가 있었지만, 전질을 세트로 판매하기 때문에(게다가 비닐포장돼 있다) 나는 책의 내용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사람이 수고했겠지만, 제일 공이 큰 사람은 아무래도 열린책들의 돈줄인 프랑스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형형색색의 이 초간본총서 20권이 그의 ‘나무’에 매달린 열매들처럼 보인다(서점에 나란히 배열돼 있기도 하고)...

 

 

 



끝으로, 내주가 설연휴이니만큼 선물용 도서 두어 권. 지난주 서평 1면을 장식하고 분야별 주간베스트 1위에 오른 얀 아르튀르-베르트랑의 <발견: 하늘에서 본 지구 366>(새물결). 아는 사람을 알겠지만, 이 책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지구를 찍은 366장의 사진과 그에 대한 간략한 논평을 싣고 있다. 사진의 사이즈가 생각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부피에 비해선 저렴해서(33,900원인데, 요즘 갈비짝을 생각해보라) 연초에 선물하기엔 딱 좋은 책이다(독서의 부담이 없기 때문에!).

책을 좀 읽는 분에게라면, 전설로 회자되던 <신영복의 엽서>(돌베개)가 어떨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육필 원고를 영인한 책이다. 책은 “신영복 선생이 사형 선고를 받은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시절부터 1988년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옥중생활 전 기간에 씌어진 기록과 엽서들”을 담고 있는데, “철필로 새기듯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와 여백을 이용해 그려넣은 작은 그림 등은, 영인본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세월의 깊이와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한다”고. 책값은 조금 더 비싼 38,000원. 이런 책들은 갖고 있기에 아깝기/비싸기 때문에 선물하기에 적당하다.

 

 



 

덧붙임: 손택의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엘 갔다가 벤자민 바버의 <지하드 대 맥월드>(문화디자인)가 눈에 띄길래, 같이 사들고 왔다. 작년 8월에 출간된 걸로 돼 있는데, 그때 내가 바쁘긴 바빴다 보다. 책이 나왔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서 신간인 줄 알았다. 바버는 <강한 민주주의>(인간사랑, 1992)가 번역/소개된 바 있는 저명한 정치학자이고, <지하드 대 맥월드>는 9.11을 미리 예견한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바버의 책으론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일신사, 2006)가 최신간이다). 지젝도 <실재의 사막...>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요지는 과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지젝은 사회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어쨌든 책도 두툼하고 반가운 책이다.

그리고 시몬 듀링의 <푸코와 문학>(동문선)이 번역돼 나왔다. 언제 또 판권은 구했는지, 동문선은 이것저것 안 거드리는 책이 없어 보인다. 원제는 'Foucault and literature : towards a genealogy of writing'(1992)이다. 이미 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인데, 읽어볼 기회가 생긴 거 같다. 단, 역시나 비인간적인 책값이 문제이다. 399쪽에 26,000원. 들뢰즈와 문학을 다룬 책들도 여러 권 있는데, 분위기를 맞추자면, 이들도 곧 번역돼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내 저자들의 책에 관심이 소홀했던 것 같아서 한권 더 추가하면, 임철규 교수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이 출간됐다. 440쪽에 22,000원. 연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의 가장 큰 공헌은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한길사)를 역간한 것이다. 개인 저작으로는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 1994)에 이어 오랜만에 나오는 책인 거 같다. 사실, 눈(eye)에 대해서라면, 역사나 미학 말고 철학과 정신분석학에서도 할말이 많은 주제이다. 오늘 책을 검색하다 보니까 장 스타로뱅스키(Starobinski)의 영역된 저작중에는 <살아있는 눈(The Living Eye)>(Harvard Univ Pr, 1989)도 들어 있었다. 관심을 가져볼 만하고, 관련문헌도 제법 많은 주제이다...

2004.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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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이 밝았다(*이 글은 2004년 1월초에 씌어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발행년도가 2004년이라고 찍힌 책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한두 주 가량은 시차적응을 못한 책들이 좀 나왔고, 또 나올 것이다. 작년년말에 나온(사실은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일부가 이미 2004년이라고 박혀서 나온 것처럼. 새해에도 새로운 저자들이 탄생하고, 새로운 책들이 육체를 얻을 것이다. 책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감동적인 것은 해돋이가 아니라, 그러한 책들의 풍경이다(불쌍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제일 먼저 손에 꼽을 만한 것은 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한겨레신문사)이다. 2001년 12월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정식으로 각인시킨바 있는 이 러시아계 한국인은 소비에트 교육체계의 탁월성을 입증하는 산증인인지, 한 인간의 지적 성취는 교육체계와 무관함을 입증하는 돌연변이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하여간에 내가 아는 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우리세대 외국인들(?)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 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그해의 책으로 꼽은바 있고, 아주 감격적인 독후감을 쓰기도 했는데(이 독후감의 일부는 신문광고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의 게으름과 타성적인 사고를 후려치는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그의 자전적 약력에 대해서는 공저인 <젊은 날의 깨달음>(인물과사상사, 2005)을 참조할 수 있다).

이번 신간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란 문제의식으로 채워져 있는데, 사실 나는 이 책을 인터넷서점에 주문하는 것보다 빨리 사보려고 네댓 군데의 서점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구할 수 없었다. 서점들의 아둔한 감각에 혀를 찰 수밖에. 해서, 순수하게 2003년의 책이지만, 2004년에도 아직 손에 들지 못한 책이다. 아마도 모레쯤 사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실, 박노자의 책을 추천한다는 것은 다반사(茶飯事; 먹고 마시는 일)이기에, 크게 떠들 만한 일도 아니다.

 

 

 



두번째 책은, 조광제의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강해록인 <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학사)이다. 이 책도 나오긴 작년에 나왔지만, 발행일자는 2004년 1월 10일로 돼 있는 ‘미래의 책’이다. 그러니 공식적으론 아직 읽으면 안되는 책이기도 하다. ‘강해’라는 건 강의와 해제를 말한다. 저자가 철학아카데미에서 국역본 <지각과 현상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 메를로-퐁티 ‘선생님’의 주저를 풀어서 강의한 내용이다.

‘거의 독학하다시피 한 연구’라는 저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는 바이지만, 메를로-퐁티에 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더구나 지난번에 나온 국역본조차도 조광제에 의하면, 오역의 범벅이기 때문에(“<지각의 현상학> 번역문에 대한 분석", <아카필로> 제8호, 2003) 일반 독자가 메를로-퐁티를 읽어낸다는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신간의 의의는 원전 독해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세번째 책은 실천윤리학의 거장인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의 <세계화의 윤리>(아카넷)이다. 이 책도 발행일자가 2003년 12월 30일이니 벌써 한 해 묵은 책이다. 원제는 . 지젝은 여러 글들에서 현재의 세계화의 일면성과 불충분성(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열변들에는 정치적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 빠져있기 십상이다)을 비판하는데(즉 그는 현재의 ‘세계화’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싱어의 주장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책의 소개에는 그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전 지구 공동체적 윤리'를 내세운다고 하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일독해 보시길. 한편, 싱어의 생명윤리학 책으론 <동물해방>(인간사랑, 1999), <삶과 죽음>(철학과현실사, 2003) 등이 번역돼 있다(*이후에도 싱어의 책은 줄기차게 출간된 바 <윤리의 기원과 역사>, <응용윤리>, <생명윤리학1> 등이 모두 그의 책들이다.) 


 

 


 

네번째 책은 처음 소개되는 두 작가의 소설이다. 멕시코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후안 룰포의 대표작 <뻬드로 빠라모>(민음사)와 옛 유고의 현대작가 다닐로 키슈의 <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책세상)이 그것이다. 모두 처음 소개되는 작가/작품들인 만큼, 내가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없다. 룰포의 소설에 대해선 마르케스가 “스페인어로 씌어진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는 것과 키슈의 작품은 수용소 문학 범주에 들어간다는 점 정도를 덧붙인다(*키슈의 책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다루고자 한다).

 

 

 

 

영화감독으로의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작가 폴 오스터의 신작(시나리오) <다리 위의 룰루>(열린책들)도 번역돼 나왔는데, 그는 이 작품을 현재 영화화하고 있다고(*오스터의 책들도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다. 매년 두어 권 이상씩. 거의 '아메리카의 하루키'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웨인왕의 <스모크> 등의 시나리오를 쓴 바 있다. 사실, 오스터에 대해선 아직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에 군말은 삼가겠다.

 

 

 



다섯 번째 책은 하이네의 이야기시집 <로만체로>(문학과지성사, 2003)인데, 나는 아직 <노래의 책>(문학과지성사, 2001)도 사두고 읽지 않았으므로, 신간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 다만, 하이네의 경우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러시아낭만주의(1820-40)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시인이기 때문에 ‘직업적인’ 관심을 좀 갖게 된다(*하이네의 최신간은 <낭만파>(한길사, 2004)이다).

 

 

 

 

그런 관심에서 좀 벗어나면, 한달쯤 전에 나온 스티븐 킹 걸작선 정도를 읽어보면 어떨까도 궁리중이다(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미국의 현역 작가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비평계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작가가 스티븐 킹이지만, 나는 아직 그를 읽어본 적은 없다. 다만, 이번에 작품선집이 나왔으므로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그를 아메리칸 스타일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평하기도 하므로.

사실, 스티븐 킹에 대한 관심은 어젯밤에 읽은 대담집에서 지젝이 <샤이닝>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에 생겨난 것이다. 이 대담집은 작년에 학교 도서관에 주문해서 구한 책 가운데(하지만 발행년도는 2004년이다), (지젝이 편집한) 4권짜리 <라캉 연구선집>과 함께 가장 성공작이라고 할 만한 책이며, 지젝 입문서로 가장 좋은 책이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시간이 나는 대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다. 올해의 책읽기도 이제 첫걸음은 뗀 셈이다...

 

 

 

 


덧붙임: 폴 오스터의 책은 <다리 위의 룰루>와 함께, 소설 <환상의 책>과 에세이집 <타이프를 치켜세움>이 열린책들에서 동시에 출간됐다. 이쯤되면, 일종의 문화상품이다. <다리 위의 룰루>는 본문에서 영화화하고 있다고 했지만, 1998년에 이미 만든 영화이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걸로 봐서, 상업성이 없거나 예술성이 '지나치게' 뛰어난 영화인 듯. 소설 <환상의 책>도 사라진 미남 배우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가상의) 영화 한 편의 내용이 통째로 들어가 있다고 한다. 오스터는 아무래도 비주얼이 가장 강한 작가인 듯. 짐작엔 우리 작가 중에, 김영하나 김경욱 스타일이 아닌가 싶다. 아니 좀 경쾌한 윤대녕이라고 할까? 일본 작가론 하루키 스타일. 뉴요커의 '실존'을 가벼운 멜랑콜리로 터치하기(내가 상상하는 폴 오스터)...

2004.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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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5-20 10:08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김영하나 김경욱도 아니고 좀 경쾌한 윤대녕은 더더욱 아닌데요...훨씬 더 박진감이 넘칩니다. 산문집 [굶기의 예술]을 감탄하며 읽었는데 그거와는 또다른 진경이 소설에서 펼쳐집니다. 나른한 봄날에 [달의 궁전]이나 [거대한 괴물]을 읽어 보심이...

로쟈 2006-05-20 10:24   좋아요 0 | URL
<굶기의 예술>은 저도 읽었습니다. 그의 소설들에 조금 흥미를 느낄 때쯤 너무 떠버려서 한편으론 의혹을 갖게 됐습니다. 하루키 소설도, 언젠가 한 지인이 <상실의 시대>를 26번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코엘료의 <연금술사> 같은 소설도 마찬가지인데, 저는 진짜 소설은 '독서에의 저항' 같은 것을 유발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 다른 한가지는 아직 매력적인 서평/비평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고요...
 

어제가 크리스마스였으니까(*이 글은 2003년 12월말에 씌어졌다) 2003년을 마감하는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다. 출판쪽에서도 지난주부터 올해의 책 등을 선정하면서 한해를 정리하는 분위기이다. 나도 거기에 편승하여, 올해의 책 몇 권을 꼽아보려고 했지만, 바쁘게 지낸 몇 주(아니 몇 달) 동안 하도 정신이 없어서, 지난 상반기에는 무슨 책들이 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때문에, 최근에 나온 책들만이 정말 중요하고 의미있는 책들처럼 보인다. 곧 거품이 빠지겠지만...

 

 

 



지난주에 나온 가장 중요한 책은 <고양이 대학살>의 저자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길)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란 부제(이게 원제이던가)로 달고 있는 이 책은, 이 주제에 조금이라고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놓칠 수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책이다. 여기에 짝이 될 만한 책은 다니엘 모르네가 쓴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일월서각, 1995)이지만,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이다. 역자는 <바스티유의 금서>(문학과지성사, 1990)을 쓴 주명철 교수. 최적의 역자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서, 국내서로 얼마전에 나온 천정환의 <근대의 책읽기>(푸른역사)도 이러한 주제로 읽어볼 만하겠다. 이른바 책에 대한 책들, 메타-책들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 책을 구입할 만한 여력은 나는 현재 갖고 있지 못하며, 이 단턴의 책에 대해선 여러 매체의 리뷰들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자세한 언급을 삼가한다.

 

 



 

두번째로 황인숙의 시집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이 나왔다. 문학과지성사 말고 다른 데서 단행본 시집을 내지 않았다면, 그녀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내가 대학 2학년때 그녀의 첫시집이 나왔고, 마광수가 크게 호평한 시평을 읽어본 기억이 있는데(둘다 관능적인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간에 '어느 세월'이 흘러가 버렸고, 나보다 열살 많은 시인은 40대 중반의 나이가 돼 버렸다. 여러 지면에서 이 신간 시집에 대한 호평을 읽었기 때문에, 책을 사기 전 기대치로는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까지 꼽아보려고 했지만, 읽으면서는 좀 기운이 빠졌다. 시들의 편차가 좀 들쭉날쭉이다(아마도 내가 너무 큰 기대를 가진 게 분명하다. 이미 사놓은 네번째 시집을 또 사기까지 했으니까!). 뭐, 2% 부족하긴 하지만, 올해 나온 주요 시집의 한권으로 기억해 두기로 하자. 제목만은 올해의 시집으로 손색없기도 하고.

시 한편. 사실 이전에 다른 시선집에서 읽고서 맘에 들어 했던 시인데, 제목은 '삶은 감자'이다: "이건 확실히/ 잘못 선택한 밤참이다/ 한번이라도 감자를/ 삶아본 적이 있는가?/ 스무 번도 더 냄비 뚜꼉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렀다/ 열대야처럼 푹푹/ 김 속에서 감자들/ 생을 수그리지 않는다/ 쉭쉭거리며 가스불은 시퍼렇게 달려들고/ 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 감자는 버티고 있다/ 덥고 지루한 싸움이다/ 눈꺼푸링 뻣뻣하고 무겁다/ 이렇게까지 해서 감자를 먹어야 하나?/ 한번 더 찔러보고 아직 아니라면/ 그냥 자야겠다/ 우, 삶은 감자!"

나는 삶은 감자를 좋아하고, 많이 쪄먹기도 했는데, 이 시는 아주 유쾌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감자를 먹어야 하나?' 같은 시행은 압권이다. 그녀가 잘못 선택한 건, 밤참이지만, 그 밤참의 외연은 삶의 진로로 확장될 수 있다(나는 가끔 '이렇게까지 해서 공부를 해야 하나?'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또 아주 읽을 만한 시가 '가을밤2'이다. 겨울밤에 철지난 얘기이긴 하지만: "귀뚜라미는 만물이 쓸쓸해가는 가을밤 속을/ 씩씩하고 우렁찬 노랫소리로 가득 채운다/ 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뭐가?!뭐가?!/ 귀뚜라미 소리가/ 명랑한 소름처럼 돋는 밤." 이건 귀뚜라미를 소재로 한 한국시 중에서 가장 빼어난 한 편이다. 더불어 황인숙의 시세계를 집약해주고 있다. '명랑한 소름'의 세계. 표제시가 바로 그러한데, 보도블록에 자명하게 깔려 있는 금빛 낙엽들을 시인인 "나는 자명함을/ 퍽!퍽!걷어차며 걷는다" 우리도 이 세계의 자명함을 언제라도 퍽!퍽!걷어차고 싶다!

 

 

 



시집과 다소 서먹서먹한 관계에 있는 이라면, 황인숙의 <인숙만필>(마음산책)을 추천한다. 그녀의 친구 고종석이 시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발문을 쓰고 있는데, 고종석 같은 이를 발문을 쓰는 '머슴'으로 거느리고 있다면, 인숙 '아씨'의 '기품'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속표지에 시인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몇 개 읽어본 글은 그녀 자신을 꼭 빼어닮았다. 사실 황인숙은 무엇보다도 언어적 탄력 혹은 탄성의 시인인데(이건 여성시인으로선 드문 자질이다), 그에 짝이 될 만한 남성시인은 단연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의 시인 정현종이다. 그의 시집 <견딜 수 없네>(시와시학사)도 그냥 넘어가면 섭섭한 올해의 시집이다. 아울러 연초에 나온 그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백년글사랑)도 절판되기 전에들 구해놓으시기 바란다. 참고로,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시집으로 꼽고 있는 것은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이다.

 

 

 



세번째 책은 오랜만에 나온 바슐라르 연구서 겸 소개서로 이지훈의 <예술과 연금술>(창작과비평사)이다. 바슐라르의 특이한 이력과 문학비평에 대해서는 곽광수의 <가스통 바슐라르>(민음사, 1995) 등을 참조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에 기반한 물질적 상상력에 대한 보다 친절하고 풍부한 설명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의 시학에 관한 연구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인데(그는 쿤데라님이 소개하고 있는 코이레만큼 중요하다), 이에 대한 새로운 번역과 연구들도 나왔으면 한다. 예전에 나온 <새로운 과학정신>(인간사랑, 1990) 등의 번역서는 바슐라르 전공자(교육학 전공이었는데, 바슐라르가 거의 전공이다시피했다고 자화자찬을 했다)의 것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바슐라르의 과학적 인식론에 대해서는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참고할 만한데, 르쿠르는 이 책에서 바슐라르와 캉길렘, 푸코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르쿠르의 책 중에서 관심있는 것은 리센코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과학에 관한 것인데, 아직 영역되지 않은 듯하다(얼마전에 그가 쓴 1970년대 이후의 프랑스 지성사에 대한 책을 구했다). 프랑스 과학철학이 아닌 일반적인 과학철학(현대의 과학철학은 토마스 쿤 이후를 말한다)에 대해선 제임스 래디먼의 <과학철학의 이해>(이학사)도 최근에 나왔는데, 일독해볼 만한 책으로 보인다. 래디먼의 책이 부담스러운 이라면,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를 적극 추천한다. 얄팍한 분량 때문에, 이제이북스의 아이콘북스 시리즈의 경우 건더기가 별로 없지만, 사르다르의 책은 예외적이다.

 

 

 



아이콘북스 시리즈 얘기가 나온 김에, 신간 몇 권을 소개하기로 하자. 기호학자들 얘기인데, <토머스 시벅과 생명의 기호>,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 <바르트와 기호의 제국>이 그것이다. 내가 가장 기대를 가졌던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기호학자 토머스 시벅을 다룬 책이었는데(그래서 제일 먼저 사서 읽어보았는데), 분량 탓인지 좀 싱거웠다.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에코와 바르트의 경우는 주제가 특화돼 있기 때문에 좀 낫지 않을까 기대를 가져본다. 하여간에, 기호학의 세계에 입문하는 데 있어서 쉬운 길잡이가 되어줄 만한 책들이다. 이들 책들에 대한 소감은 나중에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끝으로, 독일이 해석학자 슐라이어마허의 평전이 살림에서 나왔다. 살림출판사에서 '현대 신학자 평전' 시리즈로 처음 출간한 네 권 중의 하나인데(이 시리즈는 30권으로 계획돼 있다고 한다), 이 출판사는 <천년의 사랑> 이후 한동안은 동아시아 담론 몰이에 나서더니 이젠 신학쪽으로 방향을 아주 잡은 모양이다. '우리시대의 신학총서'를 내더니 신학자 평전까지 손을 대고 있다. 어쨌거나, 신간의 저자는 국내에선 슐라이어마허 권위자로 꼽힐 만한 최신한 교수. 이미 <독백의 철학에서 대화의 철학으로>(문예출판사, 2001)란 연구서를 갖고 있고, 슐라이어마허의 책 가운데, <해석학과 비평>(철학과현실사, 2000), <성탄축제>(2000), <종교론>(기독교서회, 2002) 등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관련연구서로는 나도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강돈구의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이학사, 2000)이 정평있다.

 

 

 



현대해석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이 신학자에게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물론 신학이 아니라 해석학이고, 특히 그에게서의 언어적 전회의 경험/논리이다. 요즘 초심으로 되돌아가 12년전에 좀 읽던,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을 다시 손에 들었는데, 가다머에게서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는 하이데거만큼은 아니더라도 해석학의 전사로서 중요하다. 말이 나온 김에, <진리와 방법>은 20세기의 철학서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중요한 저작인데도 불구하고(이 책의 영역자는 두세 권 중의 한권으로 꼽고 있는데, 두 권이라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꼽힐 만하고, 세 권이라면, 거기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나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정도가 들어갈 듯싶다)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우리말로 완역되고 있지 않다(영역본은 1994년에 다른 역자에 의해서 개역판이 나왔는데, 비교해본 결과 훨씬 이해하기가 쉽게 되어 있다).

요는 (나로선) 가다머를 읽기 위해서 슐라이어마허를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그 슐라이허마허를 이해하는 길잡이로서 이번에 나온 평전은 읽어둘 만하다는 것이다. 가다머를 읽어야,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을 따라가볼 수 있다. 한편, 해석학내에서 가다머의 왼편에는 리쾨르가 놓이는데, 리쾨르의 왼편에는 다시 기호학자 그레마스가 놓이며, 그레마스는 엘름슬레우를 매개로 해서 들뢰즈/가타리와 마주하게 된다. 이 줄줄이 사탕들을 한번 꿰보는 것이 내년부터의 과제로 내가 계획하고 있는 바이다(나에게 이론의 네 가지 포지션은 해석학-해체론-기호학-정신분석학이다)...

덧붙임: 책 한권을 빼먹었는데, 스티븐 멀할의 <영화에 대하여>(동문선)가 그것이다. 웬만하면, 동문선 책은 빼고 싶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무슨 잘못이랴 싶어서 소개한다. 150쪽 정도 분량의 이 책은 책값이 18,000원이다. 하드카버도 아닌 책에다가 무슨 칼라도판을 싣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순수한 책값으로 치자면, 기록적이지 않나 싶다. 동문선에서 같이 나온 <우주론이란 무엇인가>가 179쪽에 8,000원인 걸 보면, 만원 정도는 깎아도 무방해 보이는데, 이 정신나간 출판사는 독자를 안중에 두지 않는 모양이다(아마도 500부쯤 찍어서 도서관에 납품하는 게 이들의 전략인 듯싶다). 하여간에 욕먹을 만한 짓은 골라서 하고 있다.

그렇다고 멀할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멀할'이라고 옮겨졌지만, 그의 이름은 S. Mulhall이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1)를 이전에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책의 저자 '뮬홀'이 바로 그이다. 표기가 통일되지 않아서 인터넷서점에서도 동일저자로 취급하고 있지 않다. 멀할이든 뮬홀이든 그는 상당한 공력의 젊은 학자이다. 루틀리지(Routledge)에서 나온 <존재와 시간> 해설서의 저자이면서 하버드의 미학교수의 스탠리 카벨 선집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의 신간의 원제는 (Routledge)인데, '행동하는 지성(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한권이다. 무참한 번역의,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동문선)가 바로 이 시리즈에 속하는데, 출간된 다른 책으론 카푸토의 <종교에 대하여>(동문선)과 드레퓌스의 <인터넷상에서>(동문선) 등이 있다(*가장 최신작은 브라이언 리들리의 <과학에 대하여>이다). 이 시리즈의 책들은 전부 '-에 대하여(On -)'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드레퓌스의 책도 제목은 <인터넷에 대하여(On the internet)>로 번역됐어야 했다. 아마 이 출판사의 기획자는 자신이 무슨 책을 내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이리라.

연말에 남욕이나 해서 미안하지만, 연초부터 욕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실컷 해둔다. <영화에 대하여>는 저자의 출신성분에서 짐작할 수 있는바, 영화철학책이다. 하지만 좀 특이하게도 다루고 있는 건 '에이리언' 시리즈 네 편이다. 언젠가 교보에서 원서를 보고 살까 말까 망설였는데, 왠걸 원서보다 비싼 번역서가 벌써 나와버렸다. 이걸 반가워해야 할 것인지?...

2003. 12. 26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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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9 10:56   좋아요 0 | URL
이 중에서는 근대의 책읽기 1권만 읽었네요.

로쟈 2006-05-19 12:56   좋아요 0 | URL
분야가 좀 편향적이긴 합니다...
 

낮에 일찌감치 나온 <창작과 비평>(2006 여름호)을 구내서점에서 사들었다. 읽을 만한 글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데, 물론 내게 결정타는 슬라보예 지젝의 '반인권론'이 번역/소개되어 있다는 것.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비판'이란 글도 목차에서 바로 눈에 띄었는데, 프레시안(06. 05. 17)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떠있길래 옮겨온다. 필자는 강양구 기자이며, 타이틀은 "<재인식>은 진보파 사관에 대한 전면적 보수 반격"이다.

 

 

 

 

지난 2월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놓고 양 진영의 논란과 설전이 얼마간 오고간 바 있는데, 본격적인 건 이제부터라는 예감을 갖게끔 한다(<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이를 계기로 지난 3월에 재출간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일독해 볼 만하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인식>)을 비판하고 나서 보수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에 대해 진보학계의 본격적인 반론이 제기돼 주목된다.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을 지낸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는 최근 발행된 이 잡지 2006년 여름호(132호)에 '다시 찾아온 토론의 시대'라는 글을 기고해 <재인식>의 편집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최 교수는 "보수언론의 격고(擊鼓) 소리가 요란하기도 하거니와 언론에 노출된 편자들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지 않은가 해 내심 혹 빈 수레가 아닐까 하는 저픔(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완독하고 난 첫 느낌은 꽤 충실한 선집이라는 안도감이었다"고 책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최 교수는 "논문들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편자들의 주장을 상기하자 의심이 떠오른다"며 "논문을 가려 뽑은 편자들의 실제적 안목이 훌륭한 데 비해 그것을 총괄하는 편자들의 시각은 매우 단석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편자들과 필자들 사이에 균열을 염두에 두면 이 책의 편자들은 과도한 대표성을 행사한 것은 아니냐"고 반문했다.
  
-최 교수는 "<재인식>의 편자들은 개혁정권들의 연속 속에서 훼손된 한국근현대사의 '적통', 즉 식민지 시대와 이승만 시대와 박정희 시대의 일관성을 총체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며 "민족해방운동과 반독재민주화운동과 분단극복의 통일운동을 축으로 삼는 진보파의 사관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반격"이라고 지적했다. 

 

 

 

 

-최원식 교수는 특히 <재인식> '머리말'에 대해 "박지향의 글은 논리의 분열로 논술이 가지런하지 못해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며 "치밀한 분석이 돋보이는 논문을 책에 게재한 그가 어떻게 이 머리말에서는 이리 변신할 수 있느냐"고 꼬집은 뒤 본격적으로 편자들의 '단선적인 시각'을 비판했다. 최 교수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그의 의식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정치적"이라며 "그가 이 책의 기획이 우리 현대사를 부정하는 참여정부 집권층의 역사의식을 교정하기 위한 역사학자의 책임감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그의 동지들은 현 집권층에 '못된' 역사의식을 주입한 배후주범으로 <인식>을 고발하기에 이르는데 왕년 공안검찰의 논고를 어쩌면 그리 닮았느냐"며 "'머리말'에는 사학의 바탕 중의 바탕인 실증적 접근이 부재한다"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엄중한 시기에 나온 1권과 상대적 해빙기에 출현한 나머지 권들 사이를 분간해야 마땅하고 무엇보다 누구의 어떤 글이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작업방식으로서 마땅하다"며 "<인식>이 정말 문제라면 총서 6권을 풍문에 의거하여 단매에 뭉뚱그릴 것이 아니라 정밀히 검토해서 '문제의 역사'를 새로이 구성하는 엄격한 선행 작업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최원식 교수는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학)에게는 좀 더 매서운 비판을 던졌다. 최 교수는 "나는 평소 그의 주장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실증적 작업에 기초한 그의 견해들에 대해서 관련 학계가 성실히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곤 했다"며 "그런데 이번 글은 달랐다"고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최 교수는 "이영훈이 강만길의 '해방전후사 인식의 방향'에서 단 두 대목을 따 이 글을 '민족지상주의'로 단정하고 최장집 등의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을 친북혁명론으로 간단히 요약하는 것에 이르면 당혹스럽기조차 하다"며 "특히 최장집 등의 글을 '젊은 시절 한때 그 혁명에 영혼이 팔려본 사람이면 누구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는 식의 독심술까지 동원해 매도하는 것은 학술적 엄밀성을 누구보다 주창하는 이영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최 교수는 또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한국에서 좌파 민족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이 결코 쇠퇴하지 않'게 된 연유를 탄식 속에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민간 공안을 뺨친다"며 "그는 급기야 <인식> 전체를 사회주의혁명론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하고 있는데 1980년대에 이런 경향이 대두한 것이 중반경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1979년부터 89년까지 출간된 이 총서 전체를 이렇게 과감히 단순화하다니 (이런 식이야말로) 그가 통탄해 마지않은 '역사와 정치가 구분되지 않'은 글쓰기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최근 발행된 <녹색평론> 5~6월호(제88호)에 <재인식>에 대한 비판을 기고한 이승렬 영남대 교수(영문학)는 <재인식>의 근저에 깔려 있는 '근대주의'를 톺아볼 것을 제안했다. 이 교수는 "개발과 근대화만 이루어진다면 식민지든, 독재든,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든지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길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며 "민족주의 역사관에 대한 대안으로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문명사로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재인식>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재인식>의 편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탈민족주의적 인식론의 근저에는 한국의 현대사가 근대 문명의 이식이라는 문명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며 "이렇게 근대 문명 우월주의라고 불러볼 만한 인식은 근대 문명이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오기 이전에 존재해 오던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은 (근대 문명을 실현할) 국가의 틀 속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국가주의의 인식으로 연결되는 양상을 아울러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이승렬 교수 역시 '근대주의'를 강하게 보여주는 예로 이영훈 교수를 들어 비판했다. 이 교수는 "<재인식> 프로젝트의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영훈의 글에서 일제 식민통치가 좀 더 길었다면 해방 이후 한국 역사가 더 쉽게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등장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식민지의 역사는 억압과 침탈의 역사가 아니다"며 "식민지는 보편적인 문명사와 야만적인 우리의 전통 역사가 융합할 수 있는 계기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영훈에게 식민지는 강자의 문화, 즉 보편의 문화를 이식시키는 것이자 또 야만적인 약자의 문화가 더 보편적인 강자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며 "이것은 이영훈이 근대 이전의 소농사회를 가리켜 마녀, 이교도, 저주의 세계라고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본성이 마음껏 꽃피는, '경제인간'들이 만드는 근대의 도시 공간을 문명의 이상향으로 보는 이영훈의 입장에서는 소농사회는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경제인간들이 만든 근대사회에서 황폐화된 도시의 빈민촌이나 농촌을 바라보면 근대의 풍요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이영훈은 (독일의 철학자) 루돌프 바로의 말을 인용해 '기존의 사회주의는 낡은 생산양식 위에 건립된 전제정치'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바로 바로야말로 자유와 이기심을 한껏 고양시켜 이룩한 시장경제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정의롭지 못한 야만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결론적으로 "<재인식>은 '강한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국익 우선주의와 사회 전반적으로 '개인'의 가치가 확산되는, 즉 자유로운 개인과 강한 국가를 동시에 염원하는 대중들의 모순적인 욕망에 호소하고 있다"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대성의 폭력과 탐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사적 비전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강조했다. 즉 '재인식'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06. 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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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5-19 00:49   좋아요 0 | URL
정리가 안되지만 몇글자 적겠습니다. 이영훈의 비판이 어이없어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찝찝한것이 드러난것만으로 토론이 되는것인지 비판속에 사적인 관계 혹은 이해같은것이 전제된것은 아닌지 그런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신용하교수의 독도에 대한 글이 며칠전 신문에서 보았는데 지난주인가 출처가 기억이 안나는데 안병직교수 대담글에서 신용하가 지금 독도를 가지고 국제재판소 가면 일본측 역사적 자료가 잘되어 불리하다 뭐 이런 식의 애기를 덧붙이면서 한것을 읽다보니 독도에 대해 열정적으로 애기하는 신용하교수의 칼럼을 보다보니 뭔가 사기당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을 읽다가 보니 인혁당에 대해 인권위가 내린결정에 대해 고마워할까 하는 의문을 던지는 구절도 있고. 또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주사파인 애기도 나오던데.
지식인들에 대한 찝찝함이랄까. 뭔가 네바다이 당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로쟈 2006-05-19 08:27   좋아요 0 | URL
저도 정리가 안되네요. 다만, 역사와 정치가 구분되지 않는 글쓰기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 정도입니다...

비로그인 2006-05-19 11:53   좋아요 0 | URL
독도문제가 우리가 불리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일본은 일본학을 하는 외국학자들이 많은데, 우리는 한국학 학자가 드물고, 다수의 외국인 한국학자들이 중국, 일본하다가 한국으로 방향을 돌린거라 파워가 약합니다.
물론 우리가 자료가 적다는 것도 불리하기도 하지요.

사마천 2006-05-19 23:43   좋아요 0 | URL
한국사람은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죠. 그러다보니 협상에 가면 많이들 지고 옵니다. 차분한 고이즈미가 펼친 정책이 일본내와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에 비해 말많고 한일 없는 노무현은 다른 나라 지도자들 사이에서 왕따입니다. 정당에 있는 분 하는 말씀이 정부의 꽤 고위직에 있던 사람에게 직접 들었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6-05-20 00:23   좋아요 0 | URL
우리가 불리한 데다가 왕따라... 음, 엎친 데 덮친 격이군요...
 

 

 

 

 

 

 

젊은 작가 황혜선의 전시회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기간은 2006. 5. 11 - 6. 1). 전시회 도록 서문으로 씌어진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제목은 '황혜선의 정원 이야기: '고요한 삶'과 '최대한의 삶''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과 어법으로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황혜선의 이번 전시회는 한 ‘젊은 예술가’의 집요한 관심과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관심과 주제는 여느 예술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날로그적인) 조형적 오브제들로 구현돼 있기에 (디지털적인) 논리적 언어로 쉽게 포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에게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관심과 주제는 그 일련의 예술작품들을 들여다보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작가의 작업은 매번 “황혜선의 최근작은 다소 의외였다”라는 평가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의외성’은 반복됨으로써 그 자체의 문법을 구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즉, 작가는 매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지만 어떤 반복의 흔적들을 남기며, 관객은 거기서 고유한 언어(랑그)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언어는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 언어인가?


먼저, 이번에 전시되는 10점의 작품들은 전시회-텍스트, 혹은 집약된 황혜선-텍스트를 구성하는 통사적 기본단위이다. 즉, 매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어휘이고 문장이면서 스스로 말을 건네는 하위텍스트들이다. 전시회-텍스트는 공간적 동시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관객의 동선에 따라 의미론적으로 (재)구성되는 시간적 서술성을 갖기도 한다. 작품의 배치/배열 자체가 작가의 섬세한 고려를 수반하는 것일 때, 이러한 서술성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렇다면, 이 전시회의 하위텍스트들이 제일 먼저 건네는 메시지(발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텍스트-세계가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5년에 처음 발표된 이 작품에서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은 지시적으로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20장의 대형 유리‘벽면’을 가리킨다(이 작품은 ‘입체적인 벽화’의 컨셉을 갖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사적 공간의 기억들이다.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을 고집하자면,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사소한’ 내용과 (입체 벽화라는) ‘거창한’ 형식 사이의 미묘한 충돌이다. 이 충돌의 언어적 상관물은 아마도 작가의 2000년 작품 제목이기도 한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일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모든 것을 기대한다? 그렇다, 어쩌면 그러한 언어적 진술 속에 황혜선-텍스트의 비밀이 슬쩍 암시되어 있는 건 아닐까?


작가가 창작활동의 초기부터 집요하게 관심을 가져온 주제가 ‘소통’의 문제였다는 걸 상기해본다면(귀/귀마개가 작가의 첫 주제였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 불신의 대상은 일상에서의 소통가능성 자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관객과의 소통가능성에 대한 불신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겠다. 그 소통가능성에 대한 불신은 으레 소통가능성에 대한 기대/요구와 그 경험적 좌절을 전제로 한다(소통에 대한 작가의 불신이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불신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하였던 것일까? 바로 소소한 일상들과 일상의 정물들에 대한 관심이다.


작가 황혜선의 ‘정물(Still Life)’ 연작은 그런 의미에서 창작에서의 한 분기점이라 할 만하다. 흰색 캔버스천을 이용해서 만든 흰색-받침대 위의 (다소 찌그러진) 흰색-정물들이 보여주었던 것도 받침대 위에 놓인 조각 작품이라는 ‘고상한 형식’과 찌그러진 일상적 정물이라는 ‘소소한 내용’ 간의 불일치, 혹은 미묘한 의미론적 충돌이었다.


그러한 의미론적 충돌에 작가 황혜선다운 반복이 놓여 있다. 이것을 다소 현학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작가 황혜선이 즐겨 다루는 오브제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서 사소한 ‘최소존재론적 대상들’이고, 반면에 그것들이 자리하는 공간/형식은 관례상 고상한 의미가 기대되는 ‘최대의미론적 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물론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충돌/파격의 원조라면 마르셀 뒤샹을 꼽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뒤샹의 작품에는 황혜선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사소한 개인성’에서 ‘개인성’이 빠져 있었다).      


최소존재론과 최대의미론의 대비와 충돌, 어쩌면 그것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라는 작가의 언명에 상응하는 황혜선 고유의 미학적 양식이 아닐까? 일상의 사소한 세목들과 자잘한 이야기들에 주목하게 될 때, 세상이라는 정원은 ‘큰 이야기들’ 몇 개로 가름될 수 없는,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의 무한-정원이다. 그러한 세계상을 가지고 작가는 우리의 일상적 세목의 크기를 벽화적 크기로까지 확대/격상시킴으로써, 소통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뛰어넘는 ‘크나큰 관심’을 관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작가는 모든 것을 기대한다!). ‘나’의 속삭임과 사소한 이야기에 좀더 귀기울여달라고.


작품 ‘흘리지 못한 눈물’ 또한 그런 맥락하에 놓인다. 눈물이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함축하고 있지만,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므로 이 눈물은 눈물로서의 존재성도 갖지 않는, 최소존재론적 눈물이다. 그 눈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다독였던 것은 크리스탈에 아주 미세하게 씌어 있는 ‘그래’ ‘괜찮아’ 같은 자기위안적 문구들일 것이다(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 문구들을 관객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믿지/기대하지 않기에?!).


그런데,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흘리지 못한 눈물’의 존재론적 위상에 걸맞지 않는 ‘대형’ 크리스탈들이다. 이 크리스탈들이 ‘흘리지 못한 눈물’의 최대의미론적 상관물인바, 이제는 ‘흘린 눈물들’보다도 훨씬 큰 크기와 광채를 갖고서 자신에 대한 관심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고요한 삶’(still life)이 오히려 ‘최대한의 삶’(maximum life)을 위한 방책인 것처럼.

 

따라서 황혜선의 작품세계에서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작가적 관심을 액면 그대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해 보인다. 거기에는 작가의 작지 않은, 사소하지 않은 기대와 열망이 내기로 걸려 있기 때문이다. ‘상처’와 ‘Scars’ 같은 작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상처’에서 작가는 강화유리판에 아주 작은 흠에 다이아몬드를 붙여놓았다. 흔히 ‘영원한 가치’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이 작품에서 갖는 지시적 의미는 아주 작고 사소한 ‘상처’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보석의 질감을 획득하면서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상처가 된다. 만약에 그것이 ‘영원한 상처’라면, 그 상처는 결코 사소한 상처라고 말할 수 없다.

 

‘흉터들의 책’이라고도 부름직한 ‘Scar’ 역시 유사한 의미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지인들의 신체에 난 사소한 흉터들을 사진에 담아놓음으로써 그것들의 일상적인 존재론적 지위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의학용 자료집에서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사진은 대상의 ‘아름다운’ 면을 찍어서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이 사진이란 형식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낳는다.


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적어도 타인들에게는 가리고 싶거나 숨기고 싶어 하는 흉터 사진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흉터들은 모두에게 보여지는 ‘아름다움’은 결코 갖지 못하는 지극한 ‘개인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최소한으로 존재하도록 요구받지만,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최대한의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마치 고흐의 ‘낡은 구두’처럼). 작가 황혜선이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왜? 그녀는 모든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의외라 할 만한 것은 ‘약속’이란 제목이 붙은 스테인레스 작품일 텐데, 표제와 모양에 비추어 결혼반지 등에 해당하는 ‘내용’과 그 중요성을 전달하는 크기라는 ‘형식’이 일치하고 있는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며 어떤 징후일까? 보다 친절하게 작품의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너무나 믿기 때문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양동이)을 참조함으로써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일부러 고른 양동이 형상은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허름한 양동이의 그것이다. 우리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라는 작가의 언명을 실마리로 삼아 이 전시회-텍스트를 읽고자 했지만, 이 스테인레스 양동이 오브제가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최수주의적) 불신과 (최대주의적) 기대 사이의 균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즉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점. 어쩌면 작가 황혜선이 약속하는바, 혹은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그것이 아닐까?     

 

그러한 모순적 형용에 의해서 지시되는 균형점은 ‘우연히 일어나지만 미리 정해져 있는’에서도 반복된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건 ‘속치마’이다. 오브제로서의 ‘속치마’는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자극하는데,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숨겨진 욕망’의 상관물 아닌가? ‘겉치마’라는 일상적인 외피에 가려진,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을 드러내곤 하는 ‘속치마’에 대해서, 작가는 ‘우연히 일어나지만 미리 정해져 있는’이란 제목을 붙인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속치마’의 드러남이란 사건의 우연성과 필연성이다. 우연과 필연이라는 모순적인 양태가 조우하는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지점이 작가 황혜선의 영점이 아닐까?(마치 고흐의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낡은 구두’의 끈 같은.)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만남의 지점, 균형점에 대한 믿음/기대가 ‘너무나’에 의해서 수식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믿음/기대의 과잉이며, 이 과잉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이끌고 가는 동력이다. ‘발이 닿지 않는’과 ‘두려운 낯설음’이라는 작가 자신의 프로필적 자아상이 암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그것이다. ‘발이 닿지 않는’에서 작가-형상은 지상으로부터 (정서적으로) 10cm 가량 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초월이되, 최소초월이고 최소주의적 초월이다(때문에 낯익은 것이면서 낯선, ‘두려운 낯설음’을 낳는다).

 

이 초월을 낳는 간극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와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 사이의 단락적 거리이며 ‘인간 황혜선’과 ‘작가 황혜선’ 사이의 거리이다(우리는 때로 스스로에게 ‘두려운 낯설음’의 존재이다. 하물며, 작가들임에랴!). 그리고 이 거리를 낳는 것이 “너무나 믿기 때문에”이다. 작가는 너무나 믿기 때문에, 삶이라는 양동이의 물이 균형점에서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다 찼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름 붙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삶에 대한 감정과 예술창작의 자기운동은 시작된다.


이 전시회에서 의미론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놓이는 작품이 물잔에 출렁이는 물을 보여주는 영상물 ‘바람과 같은 무게’인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필연적이다. 얼핏 이 작품에서도 보여지는 것은 삶 혹은 감정의 은유로서 제시된 물잔 속의 ‘폭풍’이다. 그것은 출렁이다가 잠잠해지고 잠잠해지다가 다시 출렁이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한 출렁임의 운동을 낳은 것은 제목에 따르면 ‘바람과 같은 무게’이다. 물론 이때의 바람은 사소한 공기의 운동을 지칭한다. 하지만, 물잔 속의 물은 그 미세한 공기의 결을 따라 심하게 출렁이고 다시 잠잠해진다.


물잔 속에서 (넘치지 않게) 요동하는 물은 그것이 아무리 격렬하고 히스테리컬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고요하면서 사소한 율동체이다. 극히 최소한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투명한 물은 작가 황혜선의 최소주의적 오브제의 계보를 잇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최소주의적 율동이 그것 나름으로는 정지된 균형점 상태와 구별된다는 점이다. “채워낼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이라는 정념의 운동처럼.


작가 황혜선의 세계는 정지된(Still) 세계이지만 동시에 삶(Life)의 세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 세계는 엔트로피의 세계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계속 유입되는 反엔트로피(=네겐트로피)의 세계이다. 이 ‘외부’의 물질적 표상은 ‘바람과 같은 무게’이지만, 그 심리적 근원은 “너무나 믿기 때문에”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지극한 의미를 갖는 ‘최대한의 삶’에 대한 갈망이다.


작가 황혜선이 지난 10년간 정물적인 오브제들의 ‘바람과 같은 무게’로써 (물론 특별히 배려하는 건 아니지만) 관객들에게 시사해온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여기서 뒤늦게 드는 생각은, 어쩌면 ‘고요한 삶’(최소존재론)이라는 것 자체가 ‘최대한의 삶’(최대의미론)의 알리바이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황혜선의 예술세계, 혹은 그녀의 정원에서는 일상적인 사물들과 사소한 기억들마저도 벽화적인 크기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지 않은가? 혹은 스노볼처럼 영원한 의미공간에 보존되고 있지 않은가? 흘리지 않은 눈물조차도 대형 크리스탈로 표상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녀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우리의 범상한 정원들보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 것인지!     

 

06. 0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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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6 1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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