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 황혜선의 전시회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기간은 2006. 5. 11 - 6. 1). 전시회 도록 서문으로 씌어진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제목은 '황혜선의 정원 이야기: '고요한 삶'과 '최대한의 삶''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과 어법으로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황혜선의 이번 전시회는 한 ‘젊은 예술가’의 집요한 관심과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관심과 주제는 여느 예술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날로그적인) 조형적 오브제들로 구현돼 있기에 (디지털적인) 논리적 언어로 쉽게 포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에게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관심과 주제는 그 일련의 예술작품들을 들여다보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준다. 작가의 작업은 매번 “황혜선의 최근작은 다소 의외였다”라는 평가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의외성’은 반복됨으로써 그 자체의 문법을 구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즉, 작가는 매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지만 어떤 반복의 흔적들을 남기며, 관객은 거기서 고유한 언어(랑그)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언어는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 언어인가?


먼저, 이번에 전시되는 10점의 작품들은 전시회-텍스트, 혹은 집약된 황혜선-텍스트를 구성하는 통사적 기본단위이다. 즉, 매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어휘이고 문장이면서 스스로 말을 건네는 하위텍스트들이다. 전시회-텍스트는 공간적 동시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관객의 동선에 따라 의미론적으로 (재)구성되는 시간적 서술성을 갖기도 한다. 작품의 배치/배열 자체가 작가의 섬세한 고려를 수반하는 것일 때, 이러한 서술성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그렇다면, 이 전시회의 하위텍스트들이 제일 먼저 건네는 메시지(발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텍스트-세계가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5년에 처음 발표된 이 작품에서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은 지시적으로는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20장의 대형 유리‘벽면’을 가리킨다(이 작품은 ‘입체적인 벽화’의 컨셉을 갖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사적 공간의 기억들이다.


내용과 형식의 이분법을 고집하자면,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사소한’ 내용과 (입체 벽화라는) ‘거창한’ 형식 사이의 미묘한 충돌이다. 이 충돌의 언어적 상관물은 아마도 작가의 2000년 작품 제목이기도 한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일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모든 것을 기대한다? 그렇다, 어쩌면 그러한 언어적 진술 속에 황혜선-텍스트의 비밀이 슬쩍 암시되어 있는 건 아닐까?


작가가 창작활동의 초기부터 집요하게 관심을 가져온 주제가 ‘소통’의 문제였다는 걸 상기해본다면(귀/귀마개가 작가의 첫 주제였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 불신의 대상은 일상에서의 소통가능성 자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관객과의 소통가능성에 대한 불신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겠다. 그 소통가능성에 대한 불신은 으레 소통가능성에 대한 기대/요구와 그 경험적 좌절을 전제로 한다(소통에 대한 작가의 불신이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불신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하였던 것일까? 바로 소소한 일상들과 일상의 정물들에 대한 관심이다.


작가 황혜선의 ‘정물(Still Life)’ 연작은 그런 의미에서 창작에서의 한 분기점이라 할 만하다. 흰색 캔버스천을 이용해서 만든 흰색-받침대 위의 (다소 찌그러진) 흰색-정물들이 보여주었던 것도 받침대 위에 놓인 조각 작품이라는 ‘고상한 형식’과 찌그러진 일상적 정물이라는 ‘소소한 내용’ 간의 불일치, 혹은 미묘한 의미론적 충돌이었다.


그러한 의미론적 충돌에 작가 황혜선다운 반복이 놓여 있다. 이것을 다소 현학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작가 황혜선이 즐겨 다루는 오브제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서 사소한 ‘최소존재론적 대상들’이고, 반면에 그것들이 자리하는 공간/형식은 관례상 고상한 의미가 기대되는 ‘최대의미론적 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물론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충돌/파격의 원조라면 마르셀 뒤샹을 꼽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뒤샹의 작품에는 황혜선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사소한 개인성’에서 ‘개인성’이 빠져 있었다).      


최소존재론과 최대의미론의 대비와 충돌, 어쩌면 그것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라는 작가의 언명에 상응하는 황혜선 고유의 미학적 양식이 아닐까? 일상의 사소한 세목들과 자잘한 이야기들에 주목하게 될 때, 세상이라는 정원은 ‘큰 이야기들’ 몇 개로 가름될 수 없는,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의 무한-정원이다. 그러한 세계상을 가지고 작가는 우리의 일상적 세목의 크기를 벽화적 크기로까지 확대/격상시킴으로써, 소통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뛰어넘는 ‘크나큰 관심’을 관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작가는 모든 것을 기대한다!). ‘나’의 속삭임과 사소한 이야기에 좀더 귀기울여달라고.


작품 ‘흘리지 못한 눈물’ 또한 그런 맥락하에 놓인다. 눈물이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함축하고 있지만,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므로 이 눈물은 눈물로서의 존재성도 갖지 않는, 최소존재론적 눈물이다. 그 눈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다독였던 것은 크리스탈에 아주 미세하게 씌어 있는 ‘그래’ ‘괜찮아’ 같은 자기위안적 문구들일 것이다(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 문구들을 관객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믿지/기대하지 않기에?!).


그런데,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흘리지 못한 눈물’의 존재론적 위상에 걸맞지 않는 ‘대형’ 크리스탈들이다. 이 크리스탈들이 ‘흘리지 못한 눈물’의 최대의미론적 상관물인바, 이제는 ‘흘린 눈물들’보다도 훨씬 큰 크기와 광채를 갖고서 자신에 대한 관심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고요한 삶’(still life)이 오히려 ‘최대한의 삶’(maximum life)을 위한 방책인 것처럼.

 

따라서 황혜선의 작품세계에서 작고 사소한 것에 대한 작가적 관심을 액면 그대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해 보인다. 거기에는 작가의 작지 않은, 사소하지 않은 기대와 열망이 내기로 걸려 있기 때문이다. ‘상처’와 ‘Scars’ 같은 작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상처’에서 작가는 강화유리판에 아주 작은 흠에 다이아몬드를 붙여놓았다. 흔히 ‘영원한 가치’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이 작품에서 갖는 지시적 의미는 아주 작고 사소한 ‘상처’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보석의 질감을 획득하면서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상처가 된다. 만약에 그것이 ‘영원한 상처’라면, 그 상처는 결코 사소한 상처라고 말할 수 없다.

 

‘흉터들의 책’이라고도 부름직한 ‘Scar’ 역시 유사한 의미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지인들의 신체에 난 사소한 흉터들을 사진에 담아놓음으로써 그것들의 일상적인 존재론적 지위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의학용 자료집에서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사진은 대상의 ‘아름다운’ 면을 찍어서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이 사진이란 형식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낳는다.


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적어도 타인들에게는 가리고 싶거나 숨기고 싶어 하는 흉터 사진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흉터들은 모두에게 보여지는 ‘아름다움’은 결코 갖지 못하는 지극한 ‘개인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최소한으로 존재하도록 요구받지만,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최대한의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마치 고흐의 ‘낡은 구두’처럼). 작가 황혜선이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왜? 그녀는 모든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의외라 할 만한 것은 ‘약속’이란 제목이 붙은 스테인레스 작품일 텐데, 표제와 모양에 비추어 결혼반지 등에 해당하는 ‘내용’과 그 중요성을 전달하는 크기라는 ‘형식’이 일치하고 있는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며 어떤 징후일까? 보다 친절하게 작품의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너무나 믿기 때문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양동이)을 참조함으로써 답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일부러 고른 양동이 형상은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허름한 양동이의 그것이다. 우리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라는 작가의 언명을 실마리로 삼아 이 전시회-텍스트를 읽고자 했지만, 이 스테인레스 양동이 오브제가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최수주의적) 불신과 (최대주의적) 기대 사이의 균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즉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균형점. 어쩌면 작가 황혜선이 약속하는바, 혹은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그것이 아닐까?     

 

그러한 모순적 형용에 의해서 지시되는 균형점은 ‘우연히 일어나지만 미리 정해져 있는’에서도 반복된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건 ‘속치마’이다. 오브제로서의 ‘속치마’는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자극하는데,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숨겨진 욕망’의 상관물 아닌가? ‘겉치마’라는 일상적인 외피에 가려진,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을 드러내곤 하는 ‘속치마’에 대해서, 작가는 ‘우연히 일어나지만 미리 정해져 있는’이란 제목을 붙인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속치마’의 드러남이란 사건의 우연성과 필연성이다. 우연과 필연이라는 모순적인 양태가 조우하는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지점이 작가 황혜선의 영점이 아닐까?(마치 고흐의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낡은 구두’의 끈 같은.)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만남의 지점, 균형점에 대한 믿음/기대가 ‘너무나’에 의해서 수식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믿음/기대의 과잉이며, 이 과잉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을 이끌고 가는 동력이다. ‘발이 닿지 않는’과 ‘두려운 낯설음’이라는 작가 자신의 프로필적 자아상이 암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그것이다. ‘발이 닿지 않는’에서 작가-형상은 지상으로부터 (정서적으로) 10cm 가량 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초월이되, 최소초월이고 최소주의적 초월이다(때문에 낯익은 것이면서 낯선, ‘두려운 낯설음’을 낳는다).

 

이 초월을 낳는 간극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와 “그러나 모든 것을 기대한다” 사이의 단락적 거리이며 ‘인간 황혜선’과 ‘작가 황혜선’ 사이의 거리이다(우리는 때로 스스로에게 ‘두려운 낯설음’의 존재이다. 하물며, 작가들임에랴!). 그리고 이 거리를 낳는 것이 “너무나 믿기 때문에”이다. 작가는 너무나 믿기 때문에, 삶이라는 양동이의 물이 균형점에서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다 찼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름 붙인다. 그리고 거기에서 삶에 대한 감정과 예술창작의 자기운동은 시작된다.


이 전시회에서 의미론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놓이는 작품이 물잔에 출렁이는 물을 보여주는 영상물 ‘바람과 같은 무게’인 것은 그런 맥락에서 필연적이다. 얼핏 이 작품에서도 보여지는 것은 삶 혹은 감정의 은유로서 제시된 물잔 속의 ‘폭풍’이다. 그것은 출렁이다가 잠잠해지고 잠잠해지다가 다시 출렁이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한 출렁임의 운동을 낳은 것은 제목에 따르면 ‘바람과 같은 무게’이다. 물론 이때의 바람은 사소한 공기의 운동을 지칭한다. 하지만, 물잔 속의 물은 그 미세한 공기의 결을 따라 심하게 출렁이고 다시 잠잠해진다.


물잔 속에서 (넘치지 않게) 요동하는 물은 그것이 아무리 격렬하고 히스테리컬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고요하면서 사소한 율동체이다. 극히 최소한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투명한 물은 작가 황혜선의 최소주의적 오브제의 계보를 잇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최소주의적 율동이 그것 나름으로는 정지된 균형점 상태와 구별된다는 점이다. “채워낼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이라는 정념의 운동처럼.


작가 황혜선의 세계는 정지된(Still) 세계이지만 동시에 삶(Life)의 세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 세계는 엔트로피의 세계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계속 유입되는 反엔트로피(=네겐트로피)의 세계이다. 이 ‘외부’의 물질적 표상은 ‘바람과 같은 무게’이지만, 그 심리적 근원은 “너무나 믿기 때문에”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지극한 의미를 갖는 ‘최대한의 삶’에 대한 갈망이다.


작가 황혜선이 지난 10년간 정물적인 오브제들의 ‘바람과 같은 무게’로써 (물론 특별히 배려하는 건 아니지만) 관객들에게 시사해온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여기서 뒤늦게 드는 생각은, 어쩌면 ‘고요한 삶’(최소존재론)이라는 것 자체가 ‘최대한의 삶’(최대의미론)의 알리바이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황혜선의 예술세계, 혹은 그녀의 정원에서는 일상적인 사물들과 사소한 기억들마저도 벽화적인 크기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지 않은가? 혹은 스노볼처럼 영원한 의미공간에 보존되고 있지 않은가? 흘리지 않은 눈물조차도 대형 크리스탈로 표상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녀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우리의 범상한 정원들보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 것인지!     

 

06. 05. 18.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5-26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