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난 김에 작년봄 '런던북리뷰'(LRB)에 게재됐던 지젝의 기고문 '두 개의 전체주의'를 옮겨온다. 우리말 번역은 '프로메테우스'(05. 03. 12)에 '지젝, 두 개의 전체주의'란 제목으로 게재된 김택님의 것이며, 그 아래에 원문을 이어붙였다. '전체주의'에 대해 사고하고자 할 때 유익한 참조가 되어주는 글이다.  

 

-(2005년) 2월 3일자 신문에 작은 기사 - 물론 헤드라인 기사는 아니었다 - 하나가 실렸다. 갈고리 십자를 비롯한 여타의 나치 상징물을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 대부분이 구사회주의 국가 출신인 일단의 보수적인 유럽의회 의원들은 공산주의적 상징물 역시 동일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낫과 망치는 물론 붉은 별도 금지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쉽게 기각되지 못했다. 이것은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에 생겨난 깊은 변화를 말해준다.

 

 

 


 
-지금까지도 스탈린주의는 나치즘이 배격당하듯이 간단히 거부되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는 스탈린주의의 끔찍한 면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Ostalgie)는 아직도 허용되고 있다.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는 만들 수 있지만 ‘굿바이 히틀러!’라는 영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왜일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 독일에서는 구동독의 혁명가와 당가를 담은 많은 CD가 팔린다. ‘친구이자 동지인 스탈린’이나 ‘당은 항상 옳다’같은 노래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치 노래 모음집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우화적 수준에서도 나치와 스탈린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스탈린주의적 인민재판에서 고발당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그의 죄를 고백하고 죄를 저지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나치는 유태인에게 독일 민족을 향한 유태인의 음모에 어떻게 연루되었는가를 고백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스탈린주의는 스스로를 계몽주의의 전통에 놓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전통에 따르면 진리는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타락했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나치에게 있어 유태인의 죄악은 유태인의 생물학적 구성의 한 요소였다. 따라서 그들의 죄를 증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진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허상을 살펴보면 보편적 이성은 역사적 진보라는 무정한 법칙의 외양을 통해 객관화된다. 지도자를 포함한 모두는 그러한 법칙의 노예이다. 나치의 지도자는 연설을 한 후에는 꼿꼿이 서서 조용히 박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경우 의무적으로 치는 박수는 지도자의 연설의 맨 마지막에 터져나온다. 그리고 지도자는 일어서서 같이 박수를 친다.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의 <사느냐 죽느냐(Be or Not to Be)>를 보면 히틀러는 나치식 경례에 대해 그의 손을 들고는 ‘나 자신 만세(Heil myself!)!’라고 외친다. 이것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순수한 유머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치며 ‘스스로에게 만세를! (Heil himself)’이라고 외쳤다.

-스탈린의 생일날 죄수들은 어두침침한 굴락에서 스탈린에게 축하전보를 전송했다. 하지만 유태인이 아우슈비츠에서 히틀러에게 그러한 전보를 보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밋밋한 차이는, 그러나 스탈린 치하에서는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인민이 역사적 이성에 종속된 자들로서 함께 만나는 공간을 지배이데올로기가 상정했음을 입증해준다. 스탈린 치하에서 모든 인민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평등했던 것이다.
 
-의견을 달리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목숨을 걸고 소련 사회주의의 ‘관료주의적인 변형’과 투쟁을 벌인 것과 같은 것을 나치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나치 독일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나치즘’같은 것을 주장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보수적인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 같은 사람들이 중립적인 위치를 취하며 공산주의에 적용된 동일한 기준을 왜 나치에게 적용해서는 안 되느냐고 질문하는 온갖 시도의 결점과 편향이 놓여있다. 그는  “만약 하이데거가 나치와 밀회한 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루카치와 브레히트 같은 자들은 그보다 훨씬 오랫동안 스탈린주의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용서를 받는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입장은 나치즘을 볼셰비즘이 먼저 저지른 실천에 대한 반응이자 반복으로 보는 것이다. ‘원초적 죄악’은 공산주의가 먼저 저질렀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놀테는 소위 수정주의논쟁에서 하버마스의 주요한 논적이었다. 그는 나치즘을 20세기의 전무후무한 죄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곧 나치즘만이 비난받을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나치즘은 공산주의 이후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나치즘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과도한 반응이다. 또한 나치즘의 공포는 소비에트 공산주의에서 이미 자행된 것을 단순히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놀테의 생각은 공산주의와 나치즘이 ‘동일한 전체주의적 형식’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양자 간의 차이는 다만 구조의 역할 하나하나를 채우고 있는 구체적 행위자들이 다르다(‘계급의 적’ 대신 ‘유태인’)는 데에 있다.

 

-보통 자유주의자들은 놀테가 나치즘을 상대화하여 공산주의라는 악의 이차적인 메아리로 축소시켰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극단적인 사악함 사이의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이러한 비교를 집어치운다고 해도 놀테가 말한 요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즉 나치즘은 실제로 공산주의적 위협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나치즘은 실제로 계급투쟁을 아리안 종족과 유태인 간의 투쟁으로 대체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프로이트적 의미로 페어시붕(Verschiebung, 보통 정신분석학에서 ‘전치’로 번역됨)을 뜻하는 ‘대체’라는 말이다. 나치즘은 계급투쟁을 인종적 투쟁으로 대체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진정한 성격을 흐리게 만들었다. 공산주의가 나치즘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엇이 변화했는가를 보는 것은 형식을 통해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나치의 이데올로기가 신비화된다. 즉 정치적 투쟁이 인종적 충돌로 화하며, 사회구조에 내재적인 계급적대는 아리안 공동체의 조화를 교란하는 이질적인 (유태인의) 육체들의 침입으로 환원된다. 놀테의 주장처럼 각각의 경우에 형식적으로 동일한 적대의 구조가 자리 잡는 것이 아니다. 대신 적의 장소가 상이한 요소(즉 계급이 인종으로)로 채워진다. 인종 간의 차이나 충돌과 달리 계급 적대는 완벽하게 사회적 영역에 귀속되어 버리며 그 구성부분이 되고 만다. 결국 파시즘은 계급간의 본질적 적대를 제거한다.

-그렇게 되면 10월 혁명이 어떤 비극을 낳았는가가 분명하게 부각된다. 그 고유한 해방적 잠재력의 측면은 물론 그것이 스탈린주의라는 결과를 산출한 역사적 필연성의 측면 모두에서 말이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숙청이 어떤 의미에서 파시스트의 폭력보다 더 ‘비합리적’이었다고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 숙청의 과도함은 스탈린주의가 파시즘과 달리 인증된 도착적 혁명의 예라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흔적이다. 파시즘 치하에서는 - 나치 독일에서조차 - 정치적 반대파로 활동하지만 않는다면 ‘평범한’ 일상의 삶의 외관을 유지하며 생존하는 것이 가능했다(물론 그가 유태인이 아닐 경우에).

-1930년대 후반의 스탈린 치하에서는 반대로 아무도 안전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돌연 고발당하고 체포되어 반역자로 총살당할 수 있었다. 나치즘의 비합리성은 반유태주의, 즉 유태인의 음모에 대한 믿음에 ‘농축’되어 있었다. 반면 스탈린주의의 비합리성은 사회전체에 퍼져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나치 경찰 조사관은 반국가 행위의 증거와 흔적을 밝히려 한 반면, 스탈린의 조사관은 기쁜 마음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음모를 발명해 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아직도 우리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만족할만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스탈린주의라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완벽한 분석을 생산하지 못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긴 하다. 프란츠 노이만 Franz Neumann의 <베헤모쓰 Behemoth>(1942)는 3개의 거대한 세계체계- 뉴딜 자본주의, 파시즘, 스탈린주의-가 관료주의적이고 범지구적으로 조직된 동일한 ‘관리’사회를 향해 치닫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책 중 가장 열정이 식어 있는 <소비에트 맑시즘(Soviet Marxism)>(1958)은 이상하게도 헌신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한 채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를 중립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80년대에 몇몇 하버마스주의자들이 의견을 달리하는 현상들의 출현을 반영하여 시민사회 개념을 공산주의 레짐에 대한 저항의 장소로 가공하려 시도했다. 흥미는 있지만 스탈린적 전체주의의 특수성에 대한 총체적인 이론은 아니었다. ‘현존사회주의’라는 악몽을 분석하는 것은 삼가면서 해방의 기획이 실패한 조건에 초점을 맞출 것을 요구하는 맑스주의적 사유의 학파들이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그들이 파시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진짜 외상(trauma)과 감히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침묵의 자백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좌파 ‘전체주의’와 우파 ‘전체주의’ 모두가 정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차이에 대한 불관용에 기초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와 인간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나쁜 것이라는 ‘순수’ 자유주의적 태도는 선험적으로 오류이다. 한쪽 편을 들어 파시즘이 근본적으로 공산주의보다 ‘나쁘다’는 주장을 해야 한다. 합리적으로 두 개의 전체주의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함축적이든 명시적이든 파시즘이 덜 사악한 것이었으며 공산주의적 위협에 대한 이해할만한 반응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2003년 9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히틀러나 스탈린 혹은 사담 후세인과 달리 누구도 죽이지 않았노라고 격렬히 외쳤다. 진정한 추문은 베를루스코니의 연설이 그의 특이한 성격에서 나온 표현이기는커녕 반파시스트 공동체에 기반하는 전후 유럽의 정체성에 대한 약정을 바꾸려는 진행형의 기획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공산주의의 상징물에 대한 금지 요청이 이해될 수 있는 정확한 맥락이다.

The Two Totalitarianisms

Slavoj Zizek

A small note – not the stuff of headlines, obviously – appeared in the newspapers on 3 February. In response to a call for the prohibition of the public display of the swastika and other Nazi symbols, a group of conservative members of the European Parliament, mostly from ex-Communist countries, demanded that the same apply to Communist symbols: not only the hammer and sickle, but even the red star. This proposal should not be dismissed lightly: it suggests a deep change in Europe’s ideological identity.

Till now, to put it straightforwardly, Stalinism hasn’t been rejected in the same way as Nazism. We are fully aware of its monstrous aspects, but still find Ostalgie acceptable: you can make Goodbye Lenin!, but Goodbye Hitler! is unthinkable. Why? To take another example: in Germany, many CDs featuring old East German Revolutionary and Party songs, from ‘Stalin, Freund, Genosse’ to ‘Die Partei hat immer Recht’, are easy to find. You would have to look rather harder for a collection of Nazi songs. Even at this anecdotal level, the difference between the Nazi and Stalinist universes is clear, just as it is when we recall that in the Stalinist show trials, the accused had publicly to confess his crimes and give an account of how he came to commit them, whereas the Nazis would never have required a Jew to confess that he was involved in a Jewish plot against the German nation. The reason is clear. Stalinism conceived itself as part of the Enlightenment tradition, according to which, truth being accessible to any rational man, no matter how depraved, everyone must be regarded as responsible for his crimes. But for the Nazis the guilt of the Jews was a fact of their biological constitution: there was no need to prove they were guilty, since they were guilty by virtue of being Jews.

In the Stalinist ideological imaginary, universal reason is objectivised in the guise of the inexorable laws of historical progress, and we are all its servants, the leader included. A Nazi leader, having delivered a speech, stood and silently accepted the applause, but under Stalinism, when the obligatory applause exploded at the end of the leader’s speech, he stood up and joined in. In Ernst Lubitsch’s To Be or Not to Be, Hitler responds to the Nazi salute by raising his hand and saying: ‘Heil myself!’ This is pure humour because it could never have happened in reality, while Stalin effectively did ‘hail himself’ when he joined others in the applause. Consider the fact that, on Stalin’s birthday, prisoners would send him congratulatory telegrams from the darkest gulags: it isn’t possible to imagine a Jew in Auschwitz sending Hitler such a telegram. It is a tasteless distinction, but it supports the contention that under Stalin, the ruling ideology presupposed a space in which the leader and his subjects could meet as servants of Historical Reason. Under Stalin, all people were, theoretically, equal.

We do not find in Nazism any equivalent to the dissident Communists who risked their lives fighting what they perceived as the ‘bureaucratic deformation’ of socialism in the USSR and its empire: there was no one in Nazi Germany who advocated ‘Nazism with a human face’. Herein lies the flaw (and the bias) of all attempts, such as that of the conservative historian Ernst Nolte, to adopt a neutral position – i.e. to ask why we don’t apply the same standards to the Communists as we apply to the Nazis. If Heidegger cannot be pardoned for his flirtation with Nazism, why can Lukács and Brecht and others be pardoned for their much longer engagement with Stalinism? This position reduces Nazism to a reaction to, and repetition of, practices already found in Bolshevism – terror, concentration camps, the struggle to the death against political enemies – so that the ‘original sin’ is that of Communism.

In the late 1980s, Nolte was Habermas’s principal opponent in the so-called Revisionismusstreit, arguing that Nazism should not be regarded as the incomparable evil of the 20th century. Not only did Nazism, reprehensible as it was, appear after Communism: it was an excessive reaction to the Communist threat, and all its horrors were merely copies of those already perpetrated under Soviet Communism. Nolte’s idea is that Communism and Nazism share the same totalitarian form, and the difference between them consists only in the difference between the empirical agents which fill their respective structural roles (‘Jews’ instead of ‘class enemy’). The usual liberal reaction to Nolte is that he relativises Nazism, reducing it to a secondary echo of the Communist evil. However, even if we leave aside the unhelpful comparison between Communism – a thwarted attempt at liberation – and the radical evil of Nazism, we should still concede Nolte’s central point. Nazism was effectively a reaction to the Communist threat; it did effectively replace class struggle with the struggle between Aryans and Jews. What we are dealing with here is displacement in the Freudian sense of the term (Verschiebung): Nazism displaces class struggle onto racial struggle and in doing so obfuscates its true nature. What changes in the passage from Communism to Nazism is a matter of form, and it is in this that the Nazi ideological mystification resides: the political struggle is naturalised as racial conflict, the class antagonism inherent in the social structure reduced to the invasion of a foreign (Jewish) body which disturbs the harmony of the Aryan community. It is not, as Nolte claims, that there is in both cases the same formal antagonistic structure, but that the place of the enemy is filled by a different element (class, race). Class antagonism, unlike racial difference and conflict, is absolutely inherent to and constitutive of the social field; Fascism displaces this essential antagonism.

It’s appropriate, then, to recognise the tragedy of the October Revolution: both its unique emancipatory potential and the historical necessity of its Stalinist outcome. We should have the honesty to acknowledge that the Stalinist purges were in a way more ‘irrational’ than the Fascist violence: its excess is an unmistakable sign that, in contrast to Fascism, Stalinism was a case of an authentic revolution perverted. Under Fascism, even in Nazi Germany, it was possible to survive, to maintain the appearance of a ‘normal’ everyday life, if one did not involve oneself in any oppositional political activity (and, of course, if one were not Jewish). Under Stalin in the late 1930s, on the other hand, nobody was safe: anyone could be unexpectedly denounced, arrested and shot as a traitor. The irrationality of Nazism was ‘condensed’ in anti-semitism – in its belief in the Jewish plot – while the irrationality of Stalinism pervaded the entire social body. For that reason, Nazi police investigators looked for proofs and traces of active opposition to the regime, whereas Stalin’s investigators were happy to fabricate evidence, invent plots etc.

We should also admit that we still lack a satisfactory theory of Stalinism. It is, in this respect, a scandal that the Frankfurt School failed to produce a systematic and thorough analysis of the phenomenon. The exceptions are telling: Franz Neumann’s Behemoth (1942), which suggested that the three great world-systems – New Deal capitalism, Fascism and Stalinism – tended towards the same bureaucratic, globally organised, ‘administered’ society; Herbert Marcuse’s Soviet Marxism (1958), his least passionate book, a strangely neutral analysis of Soviet ideology with no clear commitments; and, finally, in the 1980s, the attempts by some Habermasians who, reflecting on the emerging dissident phenomena, endeavoured to elaborate the notion of civil society as a site of resistance to the Communist regime – interesting, but not a global theory of the specificity of Stalinist totalitarianism. How could a school of Marxist thought that claimed to focus on the conditions of the failure of the emancipatory project abstain from analysing the nightmare of ‘actually existing socialism’? And was its focus on Fascism not a silent admission of the failure to confront the real trauma?

It is here that one has to make a choice. The ‘pure’ liberal attitude towards Leftist and Rightist ‘totalitarianism’ – that they are both bad, based on the intolerance of political and other differences, the rejection of democratic and humanist values etc – is a priori false. It is necessary to take sides and proclaim Fascism fundamentally ‘worse’ than Communism. The alternative, the notion that it is even possible to compare rationally the two totalitarianisms, tends to produce the conclusion – explicit or implicit – that Fascism was the lesser evil, an understandable reaction to the Communist threat. When, in September 2003, Silvio Berlusconi provoked a violent outcry with his observation that Mussolini, unlike Hitler, Stalin or Saddam Hussein, never killed anyone, the true scandal was that, far from being an expression of Berlusconi’s idiosyncrasy, his statement was part of an ongoing project to change the terms of a postwar European identity hitherto based on anti-Fascist unity. That is the proper context in which to understand the European conservatives’ call for the prohibition of Communist symbols.

06. 05. 27.

 

 

 

 

P.S. 현대 전체주의론의 모체가 되는 책이 12월에 출간됐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이 그것이다. 지젝의 '두 개의 전제주의'론과 대비해서 읽어봄 직하다.(*그리고 드디어 지젝의 전체주의론이 번역돼 나왔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고?>(새물결, 2008). 'Wat's up?'시리즈의 하나로 바디우의 <사도 바울>과 함께 나란히 출간됐다.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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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5-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요즘 일제 말기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있어서, 전체주의에 대해서 계속 고심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파시즘과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은 물론 같으면서도 다른 문제라서 이것저것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서, 한편으로는 즐겁기도 합니다.

로쟈 2006-05-2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좋은 참고문헌을 읽게 되시면 알려주시길.^^
 

얼마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지방선거 유세 도중에 피습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고, 알다시피 여론의 여론의 초관심사가 되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현재 수사가 진행중이지만, 이 '정치적 테러'의 여파로 가뜩이나 열세이던 집권 여당은 벌써부터 선거에서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듯하다(물론 한나라당의 사정은 정반대인 것이고). 테러의 배후에 대한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지만(케네디와 김구의 암살이 들먹여졌다) 여느 정치 보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기사가 '전달'하는 것은 의미론적인 것이 아니라 화용론적인 것이다. 즉, 거기서 '사실' 관계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정치적) '효과'이다.

거기에 끼어들어 그 효과를 확대 재생산하며 몇 마디 보탤 생각은 없고, 대신에 '테러'라는 말이 나에게 가장 실감있게 다가왔었던, 지난 2004년 9월초에 러시아 베슬란에서의 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을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하여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당연한 일이지만, 러시아 TV에서는 현지 생방송으로 인질로 잡혀있던 학생들의 억류 상황과 이후에 벌어진 진압작전에 대해서 자세히 보도했었다). 원래의 제목은 릴케의 시구절인 "그들, 일찍 떠난 자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였지만, 내용과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바꾼다.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은 이 글에서 자세히 검토하게 될 지젝의 <이라크>에 나오는 표현이다.  

러시아의 가을은 테러와 함께 시작됐다. 지난 9월 1일 개학식날에 체첸 분리주의자들에 의해서 북부 오세티야의 베슬란(Beslan)시의 한 학교(러시아에서는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가 점거되면서, 어린 학생들과 학부모 등 1,500명 가량이 인질로 억류되면서 시작된 이번 사건은 지난 금요일(9월 3일) 전격적인(그것이 전격적인 것이었는지 우발적인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테러 ‘진압작전’ 끝에 인질 중 다수가 희생된 채로 종결되었다.

오늘(9월 6일)자 <이즈베스찌야>에 따르면, 사망 355명, 부상 435명, 실종 200여명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는데, 부상자 중에는 중상자가 다수 있기 때문에(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고, 이들은 모스크바의 아동병원으로 급송되었다) 최종 사망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아마도 최근 몇 년간 러시아에서 발생한 테러 중 최악의 참사로 기록될 듯한데(이곳 언론에서는 금요일까지 ‘베슬란의 드라마’란 표현을 쓰다가 이후엔 ‘베슬란의 비극’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미 지난 토요일 푸틴 러시아대통령이 공식담화를 통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시함과 함께 테러행위에 대한 강경대응을 다짐했고, 내일(9월 7일)은 모스크바 중심인 크레믈린 옆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대규모의 反테러 집회가 예정돼 있다(페테르부르크에서는 오늘 反테러 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번 참사로 희생된 자들(=어린이들)의 장례식이 오늘 엄수됐다. 지젝의 주장대로(<이라크>, 63쪽), 테러리즘을 ‘정치적 기획’의 일부로서 승인한다 하더라도(승인과 동의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이번과 같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저열하다. 비록 체젠 문제에 대한 전세계적 여론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번 테러(인질사건)가 목표한 바를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이 ‘성공’은 궁극적으로 자기-패배적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아이들이 살기 위해서, 네가 죽어줘야겠다는, 당신의 아이들이 좀 죽어줘야겠다는 논리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적대적’ 논리이며, 궁극적으로는 러시아가 전복되거나(현 상황에서 체첸의 독립이 뜻하는 바는 러시아 자체의 붕괴이다) 체첸 분리주의자들이 전부 ‘청소’되거나 간의 양자택일만을 강요하는 논리이다.

 

 

 



지젝은 자유주의적 논리를 “테러리즘의 거부를 일종의 초월적 선험성으로 고양시키는 논리”, 즉 테러리즘의 무조건적인 포기를 협상(=타협)의 전제조건으로 내거는 논리라고 비판하는데, 이번 테러리즘의 논리는 그 이면, 즉 “테러리즘 자체를 일종의 초월적 선험성으로 고양시키는 논리”라고 할 만하다. 즉, 그것은 어떠한 협상(=타협)도 거부하는 테러리즘이다. 그런 식의 ‘자기확인’에서 테러리즘이 얻는 것은 “마치 교착(상태)를 지속함으로써(=유지함으로써) 모종의 병리적인(=정념적인) 리비도적 이익”(<이라크>, 55쪽)일 따름이다(양자는 그렇게 공모한다. ‘맥지하드’처럼).

그것이 병리적인 것은 러시아정부의 강경대응이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더 나쁜 건, 그 대응이 서툴기도 하다는 것이다. 대테러작전에서 러시아는 미국이나 이스라엘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 뻔한 결과를 무릅쓰고, 그 결과를 ‘성공’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지젝이 이들의 논리에 동의할 리는 없어 보이는데, 체첸 문제의 역사적 기원은 지젝이 공언한바 “최선의 자본주의보다도 더 나은 최악의 공산주의 체제”, 즉 스탈린 치하에서의 反민족주의 정책에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정책 기조 때문에 체첸인들이 대거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극동에 거주하던 한인(韓人)들도 대거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로 전격 강제이주 당했던 것처럼. 이 한인들이 현재는 러시아에서 소위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우리 동포들이다).

 

 

 



정치적 기획의 일부로서의 테러리즘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젝이 <이라크>(이건 이라크에 대한 책이 아니다. 거꾸로 말하면, 러시아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 한국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에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하이데거와 정치적인 것’에 관한 영원한 논쟁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에른스트 놀테의 논변이다. 놀테는 자신의 저작(Martin Heidegger – Politik und Geschichte im Leben und Denken)에서(‘M. 하이데거 – 그의 삶과 사유에서의 정치와 운명’쯤이란 뜻인가?) “1933년의 하이데거의 악명높은 정치적 선택을 변명하기는커녕 정당화한다.”(참고로, 이 정치적 선택에 대한 우리말 참고문헌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와 나치즘>(문예출판사)이다). 즉, “경제적 혼돈과 공산주의적 위협이 있었던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의 상황 속에서 실행가능한 선택으로서 말이다.”(64쪽)

즉, 하이데거는 공산주의라는 ‘최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나치즘(국가사회주의)라는 ‘차악’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이 정치적 선택은 그의 ‘실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 “이에 따르면 파시즘 그리고 심지어 나치즘은 궁극적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반작용이었고 그것의 최악의 실천들(강제수용소, 정적의 대량 숙청)을 반복한 것이었다.” 해서,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히틀러가 단지 자신들을 (볼셰비키적인) ‘아시아적’ 행위의 잠재적인 혹은 실제적인 희생양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아시아적’ 행위(=홀로코스트)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번역을 일부 수정했다. 국역본은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을까?”(65쪽)라고 옮겼는데, 사실에 대한 ‘의혹’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모호한 번역이다.) 즉 “(스탈린의) 수용소군도가 (나치의) 아우슈비츠를 앞서지 않았던가?”

여기서 핵심은 공산주의와 파시즘(나치즘)이 모두 나쁜 것이라는 (아름다운 영혼의) ‘순수한’ 자유주의적 자세가 아니라,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선언하는 자세이다. 그럴 때에만 파시즘, 심지어 나치즘은 가능한 ‘정치적 기획’으로 사고될 수 있다. 해서,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좌파 전체주의(=反자본주의적 공산주의)와 우파 전체주의(=자본주의적 파시즘). 하이데거는 후자의 편에 섰지만, 지젝이 편드는 쪽은 전자이다. 그는 현 정세에서 ‘거대한 규모로 진행중인 이데올로기-정치적 기획’을 간취하는바, 가령 “무솔리니가 독재자이긴 했지만, 히틀러나 스탈린, 그리고 사담 같은 정치적 범죄자나 살인자는 아니었다”는, 이탈리아 수상 베를로스코니의 발언은 개인적인 돌출행동(스캔들)이 아니라, “反파시즘적 단결에 기초하고 있는 유럽적 정체성에 관한 전후(=2차 대전 이후) 상징적 협약의 조건들을 변화시키려는 기획”으로 보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지젝은 나치즘을 정치적 기획으로 사고하려는 것에 대한 거부의 이면을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일반의 이론적 추문(러시아어 번역은 ‘구멍’), 즉 스탈린주의에 대한 분석의 완전한 결여(‘부재’)에서 찾는다(<소비에트 이데올로기>를 쓴 마르쿠제는? *이에 대해서는 지젝의 '두 개의 전체주의' 참조). 해서, “아마도 아도르노와 한나 아렌트 사이의 긴장이라는 궁극적 수수께끼는 거기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들 양자는 거부를 공유했다. 그러나, 아렌트에게서 그것은 활동적 삶(vita activa), 참여하는 정치적 삶이라는 적극적인 규범적 관념에 기반해 있었던 반면에 아도르노는 이러한 단계를 거부했다.”(66쪽)

여기서 양자가 ‘거부’한 것은 ‘스탈린주의’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상세하고 방대한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활동적 삶’(=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규범적 관념에 근거하여, 스탈린주의를 거부한 반면에, 아도르노의 거부에는 이러한 단계, 즉 분석과 근거가 결여돼 있다는 것(각주에서 지젝은 이러한 ‘적극적 규범성’으로의 진입 거부를 아도르노의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기획’에 대한 ‘충실성’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나치즘을 정치적 기획으로 사고할 경우, 다시 문제는 나치즘(혹은 파시즘)이냐, 스탈린이즘이냐, 이다. ‘더 좋은’, 혹은 ‘더 선한’ 기획이란 선택지로 주어져 있지 않다(주어진 건 무엇이 덜 나쁜 것이냐이다). 해서, “선한 이슬람과 악한 이슬람적 테러리즘에 대한 구별이 사기인 것과 마찬가지로”(우리는 “이슬람은 그런(=테러리즘의) 종교가 아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는 순진한 진술에 유혹되지 말아야 한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정부) 혹은 시오니즘에 대한 전형적인 ‘급진-자유주의적’ 구별 또한 문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유대인 시민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와 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도 반유대주의로 비난받지 않고 더 나아가 그 비판을 유대성(Jewishness)에 대한 그들의 바로 그 열정적 애착에, 그들이 유대적 유산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 기반한 것으로서 공식화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으려는 노력 또한 문제삼아야 한다.”(67쪽) 여기서는 잠시 이 문장을 문제삼아 보기로 하자(이런 번역문은 불친절하다). 몇 번 읽어보면 내용은 짐작할 수 있겠는데, 그런 수고를 굳이 왜 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문장의 줄거리는 “(우리는) 유대인과 유대인 시민들이 (어떤) 공간을 열어놓으려는 노력 또한 문제삼아야 한다.”이다. 나머지는 전부 ‘공간’을 수식하는 형용사절이다(아마 원문은 관계형용사절일 듯하다). 다시 정리하면, “즉, (급진-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구별을 통해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유대인 시민들이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과 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고자 한다. 그러한 공간에서는 반유대주의란 비난을 피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유대적 유산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 즉 ‘유대적인 것’에 대한 열정적인 집착에 그 비판의 근거를 둘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가?

물론 충분하지 않다고 지젝은 말한다. 하지만, 내가 국역본 <이라크>와 나란히 읽은 러시아아본에서 이하의 한 페이지 남짓 분량이 빠져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에 이어지는 건 69쪽에서 “축출되어야 할 하나의 신화는…”이라고 시작되는 문장이다. 이런 대목은 몇 곳에 더 있는데, 국역본의 1장 ‘이라크와 그 너머’에서 87쪽 “좋아, 그러면 꺼져버리고 그만 날 괴롭혀!” 이하는 러시아어본에서 정말로 꺼져버리고 없다. 알려져 있다시피, 국역본은 지젝의 초고를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국역본보다 이후에 나온 영어본(Verso, 2004)과는 약간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물론 영어본의 편집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차이이다. 러시아어본이 그 영어본을 충실하게 옮긴 거라면, 국역본과 러시아어본의 차이는 국역본과 영어본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하지만, 영어본을 아직 확인해볼 수 없는 나로서는 이 점에 관하여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러시아아본이 일부 내용을 축약하고 있다).

어쨌든 지젝은 ‘선한’ 레비나스적 유대교를 ‘악한’ 여호와의 전통과 대립시키려는 급진-자유주의적 시도를 비판한다. 그건 한낱 환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유대교 그 자체는 참을 수 없는 절대적 모순의 계기이며, 최악(=일신교적 폭력)과 최선(=타자에 대한 책임)이 절대적 긴장 속에 있는 계기이며, 동일하고 일치하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양립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틈새, 그 긴장이 바로 유대교의 핵심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원리주의적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오용된 이슬람’과 ‘참된 이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결정불가능하다. 즉 이슬람은 “우리의 현대적 곤경에 대해 파시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최악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에 저항하는) ‘최선’을 위한 장소로 판명날 수도 있다.” 해서, “우리의 과업은 이러한 애매한 사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가이다.”(68쪽)

지젝이 ‘중동에서의 행위를 위한 온건한 제안’이란 절의 마지막 대목에서 덧붙이고 있는 것은 들뢰즈가 ‘이접적 종합’(disjunctive synthesis)이라고 부른 것의 한 역사적 사례인바(1937년 9월 26일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 베를린에서 기차에 탑승한 것), 그것은 나치와 급진 시오니스트들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한 이해관계 내에서 나치와 시오니스트는 서로 구별가능하지 않(았)다. 그것이 소위 변증법에서의 ‘대립물의 통일’이고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다.

지젝이 ‘온건한 제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59-60쪽에 집약돼 있다. 오늘날 중동에서(그리고 체첸에서, 더불어 한반도에서) 진정으로 근본적인 윤리-정치적 행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모두에게 그것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통제를 포기하는 제스처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구(舊)시가지를 (일시적으로) 어떤 중립적인 국제적 세력이 통제하는 국가-외적인 종교적 참배의 장소로 변형시키는 것을 승인하는 제스처에 말이다.”(59쪽)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을 결합시키는 두-민족 세속국가라는 ‘불가능한 꿈’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장기적으로 볼 때 진짜 유토피아는 이러한 두-민족 국가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두 공동체들을 명백히 분할하는 장벽의 유토피아이다.”(60쪽) 이 대목에서 ‘유토피아’란 말은 ‘불가능한 꿈’과 동의어이다(즉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장벽’은 1967년 이전의 이스라엘과 서안 지구의 점령된 영토를 분리시키는 장벽으로서 1989년까지 동/서독을 분할했던 장벽과 “섬뜩하게 닮아있다.”(우리의 휴전선은?) 그 다음 세 문장의 순서 A-B-C는 러시아어본의 경우 A-C-B로 돼 있는데, (역시나 영어본의 경우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논리상 후자가 더 적절한 듯하여, 여기서는 문장의 순서를 재배열해서 옮긴다.

(A) 이러한 새로운 장벽의 환영(=환상)은, 그것이 ‘정상적인’ 법치와 사회생활을 항구적인 긴급사태로부터 분리해주는 분할선으로 기능하리라는 것, 즉 그것이 긴급사태의 상황을 ‘저기 바깥’ 영역으로 국한시키리라는 것이다.
(C) 양 진영 각각은, 이러한 인종적으로 ‘깨끗한’ 국가의 포기가(=‘깨끗한’ 국가를 포기하는 것이) 단지 타자를 위해 행해지는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해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B) 그것은 중동에서의 또 다른 진정한 ‘사건’, “우리에게 유대인도 팔레스타인인도 없다”는 바울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정치적 보편성의 폭발이 되었을 것이다.

지젝이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보편성’이다(바울은 언제나 그러한 보편성의 이름으로 참조된다). 민족주의나 민족국가를 그가 문제삼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보편성이라는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32쪽) 사실 덩치값을 못하는 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덩치가 좀 줄긴 했어도) 러시아의 문제이기도 하며, (덩치가 작은) 체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한국의 덩치는 어떤가?).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내가 공감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체첸 민족주의 혹은 이슬람주의라는 상상적 명분이나, 러시아의 역사적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명분, 그리고 석유 송유관을 둘러싼 경제적 이권 다툼이라는 실재적 명분이 모두 우리가 기대할 만한 ‘보편성’에 미달하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러시아인도 체첸인도 없다”는 보편성 말이다). 즉 러시아와 체첸의 적대적 관계는 보편적 적대가 아닌 상대적 적대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에 바탕을 둔 분리주의적 테러리즘이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 줄 리는 만무하다. 때문에 거듭 애꿎은 것은 어린 목숨들이다.

반복하지만,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은 “테러리즘 자체를 일종의 초월적 선험성으로 고양시키는 논리”이다. 그것은 “테러리즘의 거부를 일종의 초월적 선험성으로 고양시키는 논리”가 위선적인 만큼이나 저열한 논리이다. 테러리즘은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테러를 위한 테러리즘은 결코 그러한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없다. 이 둘은 결정불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확실한 건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애매한 사실을 우리는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인지? 어린 목숨들의 희생을 우리는 어떻게 애도하고 보상할 수 있을 것인지?..

06. 0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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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화'를 읽어보기 위해 '씨네21'(06. 05. 10)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전영객잔' 코너에서 김소영 교수의 흥미로운 칼럼을 발견하게 되어 옮겨온다. 원제는 '계급 상승 욕구와 취향 맞추기'이며, '<매치포인트>와 <달콤, 살벌한 연인>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방식'이 부제이다. 부제에서 드러나지만 최근 개봉작 두 편에 대한 리뷰 성격의 글인데, 물론 나의 관심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방식'에 더 가 있다. (아직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은) 두 편의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탓에 내가 덧붙일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중1 때 학교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뭐, 그렇겠거니 했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이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곧잘 썼는데 조숙한 내용인데다 (도스토예프스키) 표절 의혹이 느껴져 일단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이후로도 대상이라고는 받은 적이 없다). 말하자면 조숙해서 장려해야 할 대상이던 나는 그 뒤에도 소설 습작에 몰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깊이 감명받아 누구에게나 해가 되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살해하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첫 번째 소설의 독자가 바로 어머니가 (몰래) 되는 통에 내 윤리적 성향을 의심받아 대단히 고생했다. 나의 도스토예프스키 모작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유난히 강력하게 상기시켜주는 두편의 영화가 있으니 <달콤, 살벌한 연인>과 <매치포인트>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교양의 척도이자 살인 지침서로 등장한다. 굳이 제목에서 생각하자면, 어떤 살벌함을 가리키는 인덱스다.

-<매치포인트>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교양의 척도이자,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인생의 살벌한 비극을 가리키고 있다. 두 영화에 모두 도스토예프스키가 등장한다고 지적하고 그래서 두편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은 반쯤 진담이지만, 둘 다 계급 상승이나 신분, 취향이라는 문제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그리고 두 영화에는- <매치포인트>엔 도스토예프스키만이 아니라 스트린드베리, 베르디 등이 그리고 <달콤, 살벌한 연인>엔 몬드리안, 고흐 등이 등장한다― 대단히 통속화된 고급예술과 아직은 약간 접근 불가능한 예술 작품을 계급성의 중요한 참조물로 활용한다.

욕망과 행운으로 대치된 <매치포인트>의 도덕적 판단

-<매치포인트>라는 제목의 의미는 승패를 좌우하는 마지막 1점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매치포인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주인공인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전직 프로 테니스 선수였으나,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와 테니스 교습을 시작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어려운 처지다. 그러나 그는 영국 상류층의 한량인 톰(매튜 구드)을 만나 오페라를 좋아하는 자신의 고상한 교양을 말한 덕에 톰의 가족이 사용하는 로열오페라하우스의 관람석에 앉게 된다. 그러다가 톰의 여동생인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의 눈에 든다.

-한편 톰의 연인이자 크리스가 한눈에 매혹되는 노라(스칼렛 요한슨) 역시 사실 매치포인트가 필요하다. 미국 콜로라도 볼더 출신으로 여배우가 되려 하지만 불행히도 오디션에는 실패하고 남자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한다. 그녀에겐 몇년 대학을 다닌 고전적 아름다움을 가진 언니가 있지만 마약에 빠져 있고, 아버지는 가족을 두고 떠났으며, 직업을 전전하던 어머니가 있다.

-크리스와 노라가 만난 계기는 영국 상류층 올드 머니의 ‘미덕’을 가진 휴잇 집안의 혼기가 닥친 톰과 클로에의 각각의 파트너로서다. 크리스와 노라는 둘 다 인생의 게임에서 1점이라도 더 필요한 사람들이라 서로를 금방 알아보지만, 크리스의 기회주의적 섹스 이후 둘은 헤어진다. 톰은 노라를 떠나 자신의 집안이 승인할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한다. 반면 휴잇 집안은 크리스에게 그에 걸맞은 직책을 구해준 뒤 딸과 결혼시킨다. 여기까지 스코어를 보자면 크리스는 계급 무한 상승 이동 가능한 점수를 얻었고, 노라는 잃었다. 그러나 문제는 크리스가 템스 강가의 호화 아파트의 삶 외의 무엇인가 다른 것, 말하자면 애욕이라고 알려진 것을 노라에게 투사하면서 일어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크리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노라에게 일어난다.

-노라는 그녀의 말처럼 남자들이 그녀와 잠을 자면 뭔가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유혹하기 때문에 상대가 톰이건 크리스건 사실 별 관계가 없다. 톰이 잘생기고 그녀에게 선물 공세를 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크리스에게 말했지만, 초반의 호기심 말고는 사실 노라가 왜 크리스와 관계를 하는지는 그녀의 말대로 모호하다. 처음 만났을 때 노라는 크리스가 대단히 공격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격한 장면은 둘이 호텔에서 나와 다시 노라의 아파트로 가 정사를 벌이는 부분이다. 노라는 크리스의 넥타이를 풀어 그의 눈을 가리는데, 크리스는 여기서 처음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인다. 이제까지 그는 냉정하고 계산된 발언을 했었다. 상류층의 별장이나 런던의 팝, 음식점 그리고 테이트 모던 등을 우아하게 보여주던 카메라가 이 부분을 정면에서 잡기 때문에 관객은 거의 날것처럼 이 장면을 불현듯 응시하게 된다. 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적 에너지는 상당히 높다. 또 노라가 뒤에 있기 때문에 관객은 흥분하고 만족해가는 남자의 몸을 직접 마주한다.

-<매치포인트>는 계급 상승 욕구의 실현이라는 것 말고도 크리스의 육체적 흥분과 쾌락의 충족을 보여준다. 관객이 그의 성적 흥분을 날것처럼 느끼게 구조화되어 있는 셈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종결부 크리스가 노라에게 가하는 모종의 끔찍한 무엇과 기묘한 대구를 이룬다(스포일러를 피하고 있음). 이 영화에서 질리는 부분은 노라의 일기장의 진술마저도 크리스의 그저 행운으로 충만한 사회적 건재를 훼손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령의 저주도 크리스의 비윤리적 행운을 앗아가진 못한다. 굳이 그 의미를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층 계급, 건재의 비밀이 자본가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운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화는 도덕적 망설임없이 그 부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또 도스토예프스키와 소포클레스의 사유를 씌운다. 하지만 사실 영화는 크리스의 살갗 벗겨진 욕망과 상류층의 옷으로 덧씌운 욕구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또 그것은 노라의 삶의 포인트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영화가 유사한 이야기를 다룬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이나 영화 버전인 <젊은이의 양지>(1951)와 다른 점은 남자주인공이 사형과 같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위 작품들에선 먼저 가난한 여자와의 관계 중에 부자인 여자를 만나는 설정이지만 <매치포인트>는 계급 상승을 가능하게 해줄 대상과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을 거의 동시에 등장시킨다. 바로 그러한 동시성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와 성적 충동에 대한 욕망은 서로 경합하면서 영화에 응축된 긴장과 에너지를 더한다.

-우디 앨런은 예술·상류 계층의 문화와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정교하게 혼합해 살인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는 텍스트의 내재적 논리를 만들어내고, 영국사회의 세습적 부의 완고함과 자비로움을 우아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아메리카의 비극>의 1920년대 미국이나 <젊은이의 양지>의 1950년대와는 달리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매치포인트>가 위의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텍스트가 관객에게 주입하려는 이런 충동, 유혹과 달리 이 영화의 여성과 일하는 계층, 그리고 노인에 대한 혐오는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의 흔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제스처이지 텍스트를 가볍게 태울 정도는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통속적 인용 <달콤, 살벌한 연인>

-이 영화의 두 장면에서 나는 사실 포복절도했다. 그 하나가 영화의 마지막 즈음, 헤어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다른 사람들은 연인이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느낀다거나 하는데, 황대우(박용우)는 암매장된 시체가 발견되면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 나는 사실 토요일 저녁, 달콤한 무드를 가장하고 있는 연인들 틈에 끼어 멀티플렉스 복도 끝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처음에 들어섰을 때 둘씩 앉은 연인들이 매우 동정어린 눈길을 던졌다. 시사회에서 볼걸…). 그래서 원한 것만큼의 박장대소를 연출하지는 못했으나 모처럼만에 보는 엉뚱하고 웃기는 코미디다.

-이 영화는 거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것에 버금가는 몬드리안 그림을 놓고도 누군지 모르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생판 초면인 한 여자 미나(최강희)가 대학 영문과 강사인 남자를 만나 취향 갖추기를 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 영화는 취향을 통한 계층간, 성별간 구별짓기의 풍속도이면서 또한 그러한 고급 취향의 통속화 과정이다. 대학 영문과 강사와 혈액형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유치’한 여자간의 취향의 조정 과정 말이다. 동시에 순애보적 사랑이나 그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청순명랑 타입의 여성에 대한 가벼운 해체적 시각이 있다. 이웃집 청순 명랑 처녀가 블랙 위도로 밝혀지는 과정이 흥미롭다.

-두 번째로 웃긴 장면은 미나/미자의 도스토예프스키 인용과 해석이다. 예의 그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구절 말이다. <매치포인트>의 도스토예프스키 인용보다 통속적이고 웃기는 코드로 사용되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참조가 덜 느끼하다. 이렇게 가볍게 날이 선 영화, 또 농담이 상당히 마이너한 감성인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어 주류영화의 배급망 속으로 올려놓은 것은 앞으로도 흥미로운 벤치마킹의 사례가 될 것 같다.

06.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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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6-05-2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연말에 봤던 연극 <육분의 륙>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구절이 주인공(유지태)의 대사로 인용되더군요. 생각해 보면 니체적인 발언이기도 했지만.

승주나무 2006-05-2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치포인트는 곳곳에서 죄와벌을 원용합니다.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로쟈 2006-05-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디 애런의 초기 영화에서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코믹하게 패러디한 적이 있습니다. <우디가 말하는 앨런>을 한번 들춰봐야겠네요...
 

아침 출근길에 읽은 조간신문이 다소 '심심'했는데, 그나마 흥미를 끈 건 원로비평가 유종호 선생의 무라카미 하루키 비판 기사였다(유종호 선생에 대한 페이퍼는 이전에 한번 쓴 바 있다). 한국일보에서 읽었지만, 동아일보도 관련기사를 다루고 있어서 같이 옮겨놓도록 한다. 새로운 문제제기라기보다는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은 '뒷북'처럼 읽히지만(물론 그의 발언은 하루키에 탐닉하는 세대에 대한 문학 교육자로서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평론가 유종호 씨 '무라카미 ‘노르웨이의 숲’은 음담패설집'”이란 호들갑스런 제목을 달았다

나는 '음담패설'이란 말을 쓰지 않겠지만(나는 나이브한 감상적 허무주의를 그냥 '포르노'라고 부른다), 그의 문학이 '데카당스'의 문학이라는 건 새로운 사실도, 지적도 아니다. 나는 좀 눅여서 '감상적 허무주의와 무라카미 현상'이라고 제목을 바꿔단다. 이 제목이라면 한가할 때 비평문을 써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 초점은 '무라카미 문학'이 아니라 '무라카미 현상'이며, 나의 관심은 사회학적 관심이다.  

동아일보(06. 05. 25) 원로평론가 유종호(71·사진) 씨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유 씨는 문예지 ‘현대문학’ 6월호에 기고한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무라카미 바람’을 일으킨 책. 유 씨는 대학 초년생 중 가장 감명 깊게 혹은 흥미 있게 읽은 문학책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드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면서, 자신이 본 바로는 “성적으로 격리된 수용소 재소자들이 일상적으로 나눔직한 성의 얘기로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유 씨는 이 작품 속에 “성적인 문제로 좌절이나 일탈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고 성적 호기심을 부추기는 성적인 얘기가 전경화되어 있고, 고교 3년 여학생의 자살을 위시해서 수수께끼 같은 자살이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유 씨는 또 “소설의 화자가 대학생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는 등 등장인물들이 다소간 학교교육의 피해자 내지는 희생자란 함의를 풍기고 있다”며 “요컨대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고 주장했다. 유 씨는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이 책은 마약과 같이 단기간의 안이한 위로를 제공해 줄 것”이라면서 “약삭빠른 글장수의 책이지 결코 예술가의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 씨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 없는 시대의 언어 상품”이라며 작품을 낳은 시대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무라카미가 거둔 상업적 성공을 비하하거나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면서 “다만 그의 문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학의 이상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하급문학일 뿐”이라고 말했다.(*물론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요즘의 학생들이 '고급문학'을 읽어낼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인지, 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유 씨는 2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상당수의 대학생이 문학적 위엄을 보여 주는 고전을 제쳐놓고 <노르웨이의 숲>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서, 곤혹스럽고 우려가 되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나는 유종호 교수의 평가에는 동의하지만, 우려에는 동감하지 않는다. '문학적 위엄'을 먼저 내팽개친 건 독자보다 문학계/출판계가 먼저라고 보기 때문이다. 팔아먹을 만큼 팔아먹은 책에 대해서 '음담패설'이라고 깎아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비록 음담패설이라고는 해도, 가라타니 고진의 지적대로, 하루키의 음담패설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다. 문학이 아닌 상품의 자리에 서면, 하루키 문학은 타기의 대상이 아니라 벤치마킹의 대상이다(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를 부러워하는 것인지!)

 

 

 

 

한국일보(06. 05. 25)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가 우리 문학의 저급화와 교양 퇴조 풍조에 대한 고언(苦言)을 25일 예술원 세미나에서 발표한다.

-‘문학의 전락 - 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그는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감상적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음담패설집”이며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폄하했다. 그는 “청춘은 성(性)적인 계절이지만 동시에 성숙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며 “이 책은 성숙을 위한 모색이 없다는 점에서 (작중 화자가 거론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대척점에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대학 교육과 교육을 통해 축적한 인문적 교양이 신분의 표지였던 과거와 달리, 대학교육이 보편화하고 생활스타일이 다원화하면서 ‘교양’ 역시 ‘구제도의 하나’가 돼버렸다고 개탄했다. 그는 문학의 길이 ‘기쁨으로 출발하나 / 종당에는 낙망과 광기가 온다’고 했던, 낭만주의 시인 워드워스의 시 ‘결의와 독립’의 시행을 인용하며, ‘(이미) 낙망과 권태를 체험하고 있는 연구자나 교사의 비문학적 관심과 정열’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문학의 매혹에 눈뜨게 하는 기회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 근거로 범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문학계의 ‘이론’ 탐닉 현상을 들고 있다. “작품 읽기보다 이론 읽기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정전 개념의 해체를 통해 나태한 젊은이들에게 고전기피 현상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또 교수들의 연구업적 경쟁체제도 “교수들로 하여금 ‘이론’ 도입을 통한 논문 엮어내기를 강요하여 작품을 한갓 논문의 자료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했다.

(*)문학계의 이론 탐닉을 독자들의 하루키 탐닉에 견주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요컨대, 작품 읽기/읽어내기를 기피하면서 논문 엮어내기에나 탐닉하는 문학 연구자들 또한 데카당스들이다...  

06.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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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25 11:55   좋아요 0 | URL
노르웨이 숲에 대한 유종호 씨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루키는 그 전에 단편집 읽어봤는데 꽤 좋았어요. 그래서 노르웨이에 도전했는데 좀 실망스럽더라구요. 그래도 먼 북소리를 비롯해서 한 두권은 더 읽어줄 마음도 있었는데, 지금도 마음 뿐이네요.

로쟈 2006-05-25 12:30   좋아요 0 | URL
하루키가 처음 붐을 탈 당시에 소개된 비평문들을 몇 개 읽었더랬는데(거기에 포함된 인용문들까지), 소위 괜히 폼잡는 '감상적 허무주의' 스타일이어서 이후론 눈길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 시절이었다면 혹 다르게 읽혔을지 모르겠지만...

보르헤스 2006-05-25 13:34   좋아요 0 | URL
독서는 일종의 오락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로써는 유씨의 '허드레 문학'이라는 정의에 동의하기 힘들군요. 평론가들의 문제는 언제든지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그들이 만든, 그들만의 잣대로 너무나도 쉽게 뭉뜨끄려 보인다는 점이지요. 그것이 철학이든 예술이든, 문학이든 말입니다. 평론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링 위에 올라가 보라고 말입니다. 비록 실컷 주어 터지더라도 말이죠...

로쟈 2006-05-25 14:28   좋아요 0 | URL
'독서는 일종의 오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죠. '오락'은 '허드레'보다는 나은 것인가요?..

보르헤스 2006-05-25 19:50   좋아요 0 | URL
감각적 쾌락만이 오락의 본질은 분명 아닐테지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글은 분명 읽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글을 읽는 독자의 개인적 체험과 결합하여 어떤 의미로든 표현되어 집니다. 비록 허드레 문학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비틀즈의 Yesterday가 구스타브 말러의 교향곡에 비해 작곡기법상으로 분명 '허드레' 할지는 모르나, 그것만으로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비록 폼만 잡는 감상적 허무주의인지는 모르나, 그것이 특별한 개인적 체험과 결합하여 어떤 의미로 한 개인의 내면에 자리잡는다면 그래도 그것이 아무 "가치"없는 일일까요? 언제나 도프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만을 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언제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만을 들을 수도 없는 법이죠.

로쟈 2006-05-25 20:48   좋아요 0 | URL
"언제나 도프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만을 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언제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만을 들을 수도 없는 법이죠." 맞습니다. 가끔씩 하루키를 읽거나 비틀즈를 들으면 되는 것이죠...

고영 2006-05-25 23:37   좋아요 0 | URL
근데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티코는 저급이고 벤츠는 고급이다. 아니면 많이 팔리면 저급 적게 팔리면 고급? 뭐 그런 건가요? 그리고 왜 많이 팔린다는 이유로 어느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비판 혹은 폄하 대상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을 읽어야 하지만 전 고전이 고전이기 때문에 읽지는 않습니다. 동시대의 작품들보다 소위 고전이라 불리 우는 작품들이 오히려 신선하고 느낄것이 많기 때문에 읽죠. 고전을 따로 구분하는 것이 고전을 멀게만 하는 일이라 느껴집니다.

로쟈 2006-05-26 00:08   좋아요 0 | URL
고전을 '정전화'의 문제와 연계시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가령, 무엇이 정전이며, 누가 정전을 말하는가, 라는 반문이 가능하니까요. 한데, 기준은 잠정적으로라도 필요하고, 제가 갖고 있는 기준은 문제를 얼마나 복잡하게 사고하도록 해주는가, 삶의 근원적인 어려움과 대면하도록 해주는가 등입니다. '감상적 허무주의'나 '냉소주의' 등에 별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태를 단순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유행 같은 자살은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눈팅 2006-05-26 00:37   좋아요 0 | URL
유종호 선생이 현실참여적인 비평을 하셨군요. 문학사상사에서 보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더 일찍 나왔어야 했을 비평입니다. 수많은 알라딘 리뷰가 별 네개를 주는 것이 너무 싫었는데 비평가의 정당한 권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큰 잘못입니다. <창작과 비평> 봄호엔가 폴 오스터를 분석한 글도 주목할만 합니다. 폴 오스터의 소설도 결국 포스트모던 우파 계열에 속한다는 우려를 하더군요. 필자는 포스트모던이 잘못이 아니라 포스트모던 좌파 소설가를 발굴하고 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알라딘의 독자리뷰는 양이나 질에서 상당한 수준이지만, 소설 분야의 독자평점은 좀 헤프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pax 2006-05-27 09:31   좋아요 0 | URL
음... 아마 책 자체를 통해 독자들의 성격마저도 간단하게 추리를 하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라고나 할까요? 또한 그 추리 자체의 맞고 틀림을 넘어서 윤리적으로도 그런 평가는 올바르다고도 보기 힘들 거 같습니다. 가령 그는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자기 성숙을 준비하라는 도덕적 훈계와 함께 온갖 고전들을 처방하겠죠.

로쟈 2006-05-27 12:05   좋아요 0 | URL
현 비평계의 문제는 오히려 아무도 그러한 '처방'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작가나 독자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베스트셀러 추수적인 수사학만 남발하는 것이 비평의 책무는 아닙니다. 독자도 그러한 쓴소리에 맞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되는 것이구요...
 

재작년 11월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을 이미지 버전으로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러시아 TV에서 보고 적은 감상이 주된 내용이다. 해서, 지난번 정리해서 다시 올린 <사마리아> 읽기에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젯밤(21일)에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보았다. 지난주 <사마리아>에 이은 것으로, 같은 채널(REN TV)에서는 다음주에 <해안선>을 방영한다. 이 김기덕 시리즈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나는 한국에서도 안 보거나 못 본 영화들을 모스크바에서 보고 있다(*<봄여름가을겨울>은 2004년 러시아의 한 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3편의 후보작에는 그의 <빈집>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해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한(그러니까 김기덕은 더 이상 한국 영화계의 비주류가 아니다, 는 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최신작 <시간>을 국내 극장에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하니까 그는 '비주류'가 맞다, 아직은) <봄여름가을겨을 그리고 봄>은, 내가 보기에, 이 ‘잘나가는 김기덕’의 자기 점검용 영화, 혹은 ‘숨 고르기’용 영화이다. 하도 정신 없이 영화들을 찍어댔기 때문에, 감독 본인도 자신이 도대체 무얼 찍고 있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을 법하다(더불어, 내가 영화를 왜 찍는 거지?).

해서, 그가 내린 결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를 찍는 것인데, 그게 가장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가 된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일단, 사계(四季)를 담아야 했던 이 영화는 제작기간이 무려 1년이나 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평소 3개월이면 하나씩 해치우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잔혹한 장면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그는 살인장면을 삽입할 수도 있었다). ‘잔혹하지 않은 김기덕 영화’라는 게 모순형용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김기덕의 불교영화?(더 리얼하게는 ‘절간[절깐]영화’?) 설마?!

지난 봄에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러시아의 영화비평가 세르게이 아나슈킨에 따르면, “그런 영화를 김기덕에게서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상식적’인 판단인데, 거기에 진실이 있다. 즉, 이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A Film by Kim Ki Duk)’가 아니라, ‘김기덕에 대한 영화(A Film on Kim Ki Duk)’이다! 오죽하면, 이 영화가 자신의 영화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김기덕 자신이 직접 출연했을까!(물론 속사정은 안성기를 캐스팅하려던 일이 불발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니, 아무리 상을 받고,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김기덕의 필모그라피에서 ‘예외적’이며, (극단적으로 말해서) 제외되어도 무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이 영화를 빼더라도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구성’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은 김기덕의 영화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 태도, 자세, 결의 등을 아무리 나열해 봐야, 그건 컨텍스트로서, 영화 ‘이전’이며 영화 ‘바깥’일 따름이다(그러니 일급의 비평가라면, 혹은 눈치 있는 비평가라면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일부 조심스런/성급한 비평가들의 진단처럼 김기덕의 ‘변화’를 예고하는 영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그는 <사마리아>와 <빈집> 등을 통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김기덕 자신도 이 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라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인바, <나쁜 남자>나 <해안선>에서 <봄여름가을겨울>도 ‘이행’하는 건 (영화)논리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런 게 가능한 경우는 돈 받고 영화를 찍어주는 ‘직업’ 감독들이다). 사실, <해안선>인가는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간에 겹쳐 찍었을 법한데, 그것이 암시해주는 바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역시나 그의 영화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거듭 말해서 (김기덕이 나오는) 이 영화를 (김기덕이 나오지 않는) 다른 영화들과 연관지어서 ‘진지하게’ 이해/해석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기대에 걸맞는 성과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무얼 찍은 것일까? 사계의 순환을 인생의 사계에 비유하는 것은 물론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일이다. 불교에서의 ‘업보’를 순환적인 삶의 근거논리로서 제시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다. 그러니, 등에 돌멩이를 맨 물고기나 개구리/뱀과 허리에 맷돌을 둘러매고 ‘업보’를 씻기 위해 고행에 나선 김기덕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관객이 감동을 받는 것도,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모든 건 (정신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후적/소급적으로만 의미를 갖는다. 봄여름가을 장면이란 겨울 장면을 찍기 위한 도구이고 핑계였을 따름이다(우리는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젊은 날의 방황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럼, 겨울장면은 무엇이었나? 여름날에 병을 고치기 위해 물위의 절간을 찾아온 한 여자에 빠져 욕정이 이끄는 대로 스승의 곁을 떠났던 20대의 ‘기덕’(네 명의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을 그냥 ‘기덕’이라고 하자. 이름이 있었던가?)은 10년이 지난 가을날 바람난 아내를 살해한 살인자가 돼 다시 물위의 절간을 찾는다(스승은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라고 반문한다). 스승은 그의 뒤를 쫓아온 형사들에게 말미를 얻어서 그가 참회의 문구들을 절간의 나무 바닥에 다 새기도록 하고, 그 일이 끝나자 그는 잡혀간다. 그리고, 겨울. 아마도 10여 년의 형기를 살고 난 40대의 기덕은 다시 절간을 찾고 스스로 소신(燒身) 봉양한 스승의 사리를 수습한다. 그리고는 교본을 발견해서는 무술을 연마한다(한국의 전통적인 ‘절간영화’에는 없는 내용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러던 차에 얼굴을 천으로 가린 한 아낙이 어린아이를 절간에 맡기러 왔다가 되돌아가던 길에 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서 죽는다. 자신의 ‘업보’를 확인한 기덕은 맷돌을 단 줄을 허리춤에 매고 불상을 손에 들고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고행을 감행한다(이 장면과 겹쳐지는 건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에서 장신구를 끌고서 폭포를 오르는 로버트 드니로인데, 한국 영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배경음악으로는 (엔리오 모리코네 대신에) 김영임의 '정선아리랑'이 깔리고.

화면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민요이지만, '정선아리랑'은 사실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가령 <서편제>에 쓰인 '진도아리랑'과 비교해 보아도 '정선아리랑'의 정서는 사뭇 다르다. 한데, 왜 안 어울리는가? '정선아리랑'은 (자식 못 낳는) 우리 여인네들의 한(限)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민요인데 반해서 화면은 여인네를 죽게 한 사내/스님의 업보 씻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거기에 더 어울리는 건 '남자는 강해야 한다' 같은 <황비홍>의 주제가이다. 어차피 안 맞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말이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 김기덕이 몸으로 때우는 영화이다. 맷돌을 끌고 산을 오르는 그의 ‘용맹정진’에 논리적인 해명/설명을 다는 건 부질없다. 그것이 이제까지 그가 영화를 찍어온 방식이고 앞으로 찍어갈 방식이다. 해서,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정신은 ‘불교 정신’이나 (변형된) ‘기독교 정신’ 따위가 아니라 ‘무대뽀 정신’이다. 그게 전부이다. 죽이든 밥이든 난 그런 식으로 영화를 찍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찍을 것입니다, 라는 결의가 거기에는 담겨 있다(그에게 영화는 ‘업보’, 혹은 ‘업보 씻기’인가?).

그건 ‘말’로 될 일이 아니어서 그는 ‘몸’으로 때운다(사실, 겨울 장면에 등장한 김기덕은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절간을 배경으로 가지고 온 이유의 하나는 대사가 필요하지 않아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고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지 않는가. 이 테마를 ‘현대적인’ 상황에 맞게 고안/각색해본다고 생각해보라. 적절한 대사를 쓰기도 힘들 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로서 이 영화가 김기덕에게 갖는 의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우화’, 즉 알레고리이며, 이 알레고리가 김기덕이 챙긴 몫이다. 그럼 관객은? 관객은 무슨 이유로, 혹은 무슨 업보로 김기덕의 자기점검용 체력단련과 정신수양에 동참해야 하는가? 의외로 ‘소심한’ 김기덕이 이런 걸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해서 (폭력 장면 대신에) 등장하는 것이 판타지적인 배경이다. (지난번에 <사마리아>를 말하면서 지적한바 있지만)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알레고리가 불가불 배제/희생할 수밖에 없는 디테일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는 ‘물위의 절’이라는 가상의 회화적인 공간을 가져온다(알려진 바이지만 한국에 그런 절은 있어본 적이 없으며, ‘주상지’란 연못에 세워진 이 절은 자연보호 차원에서 현재는 철거되었거나 철거될 예정인 걸로 안다, 그리고 벌써 철거되었다). 아마도 외국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어필하는 것도 이 배경공간이 갖는 수려한 이미지일 것이다(거기에 뭔가 심오한 듯한 불교철학과 뜻은 모르지만 애절한 듯한 주제가가 덧붙여지고, 등등).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감독 자신에 대한 우화적 알맹이(=속사정)가 ‘관광상품’으로 포장된 영화이며(실제로 세트장은 한동안 관광명소 역할을 했다고), 현학적으로 말하면, 알레고리적 이그조티시즘(Allegorical Exoticism)의 영화이다(이 영화는 ‘불교’와 무관하며 ‘한국’과 무관하다). 김기덕이 알레고리를 챙겼다면, 관객이 챙기는 건 이그조티시즘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볼 것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 한가지만 빼놓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 관심을 끈 장면이 있는바, 그건 겨울에 한 아이를 데리고 엄마인 듯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등장한 장면이다. 이 장면의 처리에 대해서 러시아의 비평가도 궁금해 하던데, (한국인이지만) 사실 내가 그보다 더 아는 것도 없다. 아니, 관음보살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있는 아나슈킨과 비교해 본다면, 내가 더 무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영화를 본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이 여자가 나병환자여서 당연히 얼굴을 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아이를 절간에 맡기려 한다고).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가 붙일 수 있는 논리적인 설명은 그것뿐이다. (아랍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며 예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아이를 맡기러 온 자신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렸다는 건 따라서 부족한 설명이다. 또 ‘기덕’과 무슨 관련이 있는 여인이어서 얼굴을 가렸을 거라는 한 관객의 설명도 근거가 없다. 여인은 아이를 놓고 불상 앞에서 한참을 울다가 떠나는데, 그 울음은 한스러움의 울음이다. 내 짐작에 그 한스러움은 자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갖는 한스러움이다(그는 ‘스님’에게 잘 부탁 드린다는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한국인의 억척스런 모정을 고려해본다면 그녀가 아이를 떼놓으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일 것이다. 해서, 그녀의 업젝션(abjection)은 자신을 비천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인바, 그건 그녀가 몹쓸 병에 걸린 경우를 고려할 때 이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무슨 업보 때문인지 아이를 두고 바쁜 걸음을 옮기다가 스님(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 이어지는 마지막 봄 장면에서 그녀의 아이는 동자승 시절의 기덕을 연기했던 배우가 다시 연기하는바(인연의 사슬?), 거꾸로 되짚으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죽은 것이 된다. 여기서 은근히 암시되는 것은 (부친살해가 아닌) ‘모친 살해’의 모티브이다(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수취인 불명>에서도 비천한 모성, 혹은 모친 살해의 모티브가 다루어졌을 법하다).

조금 넘겨짚어서 말하자면, 김기덕 영화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이 ‘모친 살해’(=비천한 모성)이며, 여성에 대한 그의 공격성은 그것과 연관되는 것이지 않나 싶다(이건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과 견주어볼 만하지만,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에 대해서만 내가 흥미를 느낀 이유이다(이 장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몇 마디 늘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인 장면은 이 영화에 대한 ‘읽기’를 자극하는 ‘대상 a’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절간의 세계는 여성/모성 부재의 세계가 되었는바, 그것은 스승-제자의 세계이면서 남성들만의 단성(單性)적인 세계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아이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아’로 버려지며, 그를 거두어 키우는 건 스승(=아버지)이고, 그는 스승의 대를 이어서 또 다른 고아를 제자(=아들)로 키워낸다. 그게 그들의 업(業)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작년에 나온 가장 남성중심적(혹은 남근주의적) 영화를 꼽으라면 <봄여름가을겨울>을 꼽아야 할 것이다(이 영화와 <안토니아스 라인> 같은 ‘여성중심적’ 영화를 비교해 보라). 이와 비교한다면, ‘최악의 남성영화’로 잔뜩 욕을 먹은 <나쁜 남자>는 차라리 ‘심약한’ 남성주의 영화라고 해야 옳다. 그 영화에서 한기(조재현)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대생을 윤락가에 넘기면서 ‘나쁜 남자’를 자임하지만, 정작 그는 자기 욕망의 대상(‘대상 a’로서의 여성)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분열적/히스테리적 주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형편이 돼서 이 여성을 숭배하며 모든 걸 갖다 바치는(백만 송이의 장미?) 행위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이 동일한 태도의 이면에서 ‘여성주의’를 발견한다면, 그건 넌센스이다. 한 여자를 숭배하거나 학대하는 남자는 ‘동일한 남자’이다. 그래서 같은 여자와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의 ‘패악’은 그러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이고 가면일 뿐이다. 결국 <나쁜 남자>에서 패배하는 건 여대생이 아니라 한기 자신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영화는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이기도 하다.

여자는남자의미래다

사실 올해 나온 또 다른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가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이 영화 또한 최악의 反여성주의적 영화로 꼽히는 모양인데, 왜 맨날 (담대한 남성들은 놔두고) ‘가련한 남성’들만 얻어맞는 것인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여성 관객 일반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아니면 ‘엘리트’ 여성주의 비평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그런데, 배용준의 근육질 몸매에 환호하고, 디카프리오의 미소에 숨 넘어간다는 관객들도 (일부 비평가를 포함한) 여성 관객 일반 아닌가? 아마도 내가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여자들도 남자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올해의 남성영화니 여성영화니 하는 걸 선정하는 건 그저 그들의 알리바이 정도라고 해두자(참고로, <낮은 목소리>의 여성감독 변영주가 만든 <밀애>는 전혀 ‘여성주의적’이지 않았다).

하여간에, 전혀 잔혹하지 않으면서 ‘담대한’ 남성주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에서는 두 여자가 소리 없이 죽어나간다. 하나는 30대의 기덕이 죽인 아내(여름 장면에 등장했던 그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그가 ‘간접적으로’ 죽이게 되는 한 여인이다. 아내의 죽음/살인은 스승이 보는 신문쪼가리의 기사를 통해서 전해질 뿐 영화 속에서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그래서, ‘얼굴 없는 죽음’이다). 스승은 자신이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하는 제자에게 “그런 줄 몰랐더냐?”(이건 그 자신도 젊은 날에 겪어보았다는 얘기다)라고 다그치고 죄업을 씻는 방도를 일러준다. 아내를 죽인 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겨울 장면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 또한 정말로 찍소리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이 또한 ‘얼굴 없는 죽음’이다). 그 죄업을 씻기 위해서 기덕은 맷돌을 끌고 산을 탄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러니까 자세하게 묘사되는 것은 이 두 남자(결국 같은 남자)의 글자 새기기와 산 타기이다. 거기에 비하면, 두 여자의 죽음은 일도 아니다! 이 어찌 담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번의 죄업을 씻은 기덕은 마지막 봄 장면에서 평정한 마음으로 동승(童僧)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이 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바, 스님 기덕은 화가, 즉 예술가이고 (알레고리적으로) 영화감독이다. 모든 죄업은 그가 그러한 평정과 예술가로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련)과정이었을 뿐이다. 여인네의 유혹/죽음은 그 한 코스에 불과했던 셈. 그리고, 이러한 자기 알레고리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은 단성생식(單性生殖)에의 판타지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그의 업보는 스승-제자, 곧 남성-남성의 관계를 반복하기 위한 핑계거리였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 스승-제자 관계가 이 영화적 세계의 본질이고 ‘진리’이다. 그것만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고정불변하는 진상(眞相)이며, (여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속세의 환상(幻相)일 따름이다. 만약에 당신이 이러한 결말에서 ‘평온함’을 느낀다면, 그거야말로 ‘섬뜩한(uncanny)’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이러한 절간의 세계보다는 나처럼 속세를 더 사랑한다면 말이다…



P.S. 지난 11월 12일자 <이즈베스찌야>지에 실린 김기덕 인터뷰를 여기에 정리해서 옮긴다. 인터뷰한 통신원(기자)는 키릴 알료힌이다. 사전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독학-영화감독 김기덕은 분기마다 영화를 찍어서 개인적으로 국제시장에 영화를 공급하는데, 이번 가을에 두 차례 모스크바에 올 예정이었다(한국영화제 개막식과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빈집> 시사회 때). 하지만, 그의 빡빡한 작업 스케줄 때문에 그의 방문은 취소되었다.(*표시를 한 건 나의 군말이다.)

빈집

이즈베스찌야: <빈집>은 2004년에 러시아에서 개봉된 당신의 네 번째 영화이다(*짐작에,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집>과 <해안선> 혹은 <나쁜 남자>인 듯하다). 당신은 영화를 무척 많이 찍는다.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김기덕: 특별한 비밀은 없다. 나는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작업할 따름이다. 한 영화를 끝내면 나는 곧장 다음 영화로 들어간다. 이건 샐러리맨들이 매일같이 출근해서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구상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프로젝트에 달려든다. 그게 ‘영화감독이 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즈베스찌야: <빈집>의 주인공은 파리의 아가씨 아멜리를 닮았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어서 그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김기덕: 아직 <아멜리>를 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영화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진 않는다. 영화의 거리[꺼리]들은 생활에서 얻은 것들이다.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빈집>을 관객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될까(*따라하게 될까) 두렵지는 않는가? 영화는 타인의 일상을 한번 맛보기 위해서 여러 집들에 잠입하는 걸로 시작한다(*나는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만 아는바, 거기에 준해서 옮겼다).

김기덕: 나는 아직 나의 주인공들을 닮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한 미국 여자가 빈집에 들어가서는 편안하게 살더라는 얘기는 들어봤다. 하지만, 그녀는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가 <빈집>을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2년간 파리에 체류한 적이 있다. 유럽 영화, 혹은 프랑스 영화가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는가?

김기덕: 카메라를 잡기 전에 내가 본 프랑스 영화는 다해서 세 편이다. 때문에, 내가 유럽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가진 생각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즈베스찌야: 비평가들은 해마다 당신이 최고작을 찍었다고 말하곤 한다. 처음엔 <나쁜 남자>에 대해서 그런 평을 쓰더니, 그 다음엔 <봄여름…>에 대해서, 지금은 <빈집>에 대해서 그렇다고들 한다. 당신 생각에는 어느 작품이 최고작인가?

영화-악어 (1996)의 장면들

김기덕: 나의 영화들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서로 닮았다. 그들은 전부 내적으로는 서로 통한다. 나에게 특별한 선호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악어>를 지목하겠다(김기덕의 데뷔작으로 익사자들의 시신을 찾아주고서 유족들에게 돈을 받아 챙기는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 이즈베스찌야).(*이런 주석으로 봐서 <악어>는 아직 러시아에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특이하게도.)

이즈베스찌야: 당신의 성공에 대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떤가?

김기덕: 나는 물론 해외에서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 영화를 보지 않는다. 설사 본다고들 하더라도 너무도 이해들을 못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의 영화들은 한국사회의 추한 면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러시아언론과의 인터뷰 사진.



이즈베스찌야: 러시아에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블록버스터들이다(*얼마 전에 <쉬리>가 또 TV에서 방영됐다. 1년에 최소한 네댓 번은 나오는 모양이다).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를 모방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몇몇 감독들이 실제로 서양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한국 관객은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하다. 그래서 흥행작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몇몇 감독들은) 미국 영화를 모방한다(*사실 강우석이나 강제규 감독의 영화보다는 김기덕의 영화가 흥미롭다).

이즈베스찌야: 예전에 당신은 세계화 반대론자였다. 지금 당신은 세계시민이 되어 각종 영화제들을 날아다니면서 자신의 영화를 판다. (세계화 반대론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은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그렇다. 나는 예전부터 세계화에 반대해왔다. 모든 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세계문화는 발전할 수 있고 다양해질 수 있다(*참고로, <복수는 나의 힘>에서 보듯이 당신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냐는 다른 인터뷰에서의 질문에 박찬욱은 어떤 면들에 대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두 감독의 견해는 ‘상식적’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이 러시아에서 뭔가를 찍을 거라고들 말한다. 소문일 뿐인가?

김기덕: 나는 자주 유럽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장애물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저예산으로 작업한다.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러시아에서도 한번 찍어보고 싶다. 하지만, 당장의 구체적인 계획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현재의 지명도라면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영화 <활>(2005)의 러시아판 포스터.



P.S.2. 거기까지이다. 기사로는 3단짜리 인터뷰이지만,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에 분량은 소략하다. 오늘 산 책의 하나는 <‘자신들’ 속의 ‘타자들’: 세계화와 현대 영화에서의 문화간 융합>이란 제목의 신간 영화비평서인데(허름한 모양새에 비해서는 비싼 책이다. 116쪽에 6,000원쯤이니까), 6편의 평론 중에서 제일 첫머리에 실린 것은 세르게이 아나슈킨의 김기덕론이다. 제목은 '김기덕: 추방자들의 복수'.

‘추방자’(=추방된 자)란 뜻의 러시아어 ‘이즈고이’는 ‘추방자’ 혹은 ‘천민’을 뜻하는 영어 ‘파리아(pariah)’의 번역어로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이즈고이’란 말은 ‘호모 사체르’(아감벤)에 대응하는 말이면서 ‘서얼’(고종석)이라 옮겨질 수도 있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낙오자란 의미에서) ‘떨거지’라고 옮겨질 수도 있다. 그러한 ‘계급적인’ 배경을 암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견지할 때, 김기덕의 영화는 <악어>나 <수취인 불명>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작’이 된다(<나쁜 남자>도 부분적으론 그런 함의를 갖는다).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완전히 제거/거세돼 있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계급적 배경이다(해서, 남근주의적인 이 영화에서의 ‘남근’은 말 그대로 ‘결여의 기표’이자 순수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허울뿐인 ‘문간’처럼). 그런 의미에서도 이 영화는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이며, ‘문제작’이 되기엔 많이 모자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주류적 코드를 상징하는 ‘대종상’이 주어진 것은 역설적이지만 순전히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대종상은 김기덕의 ‘뛰어난’ 영화나 ‘문제적인’ 영화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더불어, 대종상은 ‘관광/홍보 영화’를 편애한다).

하지만, 그런 ‘추방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최신작인 <빈집>은 그가 자신의 ‘본령’으로 되돌아온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사가 좀 부자연스럽다는 평(김기덕 영화를 좋아하며 모두 본 룸메이트의 평이다)에도 불구하고 반갑다(*이 영화를 나중에 본 감상은 따로 올려놓은 바 있다) . 그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미학이 아닌 사회학/정치학의 자리에 좀더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죄다 반면교사(反面敎師)거리들이지만, 한국 영화계에는 미학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추락한 감독들이 여럿 된다. 화엄경을 들먹이다가 고꾸라진 감독을 비롯해서. 거꾸로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이나 돈 되는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걸 오래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홍상수처럼 속물적인 걸 내내 붙들고 있거나. 한편으로, 똑같이 판타지를 다루지만, 김기덕을 한참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감독으로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이 있지만(그는 김기덕과 달리 디테일에 강하다), 그는 김기덕만큼 다작(多作)이 아니기에 그의 영화를 기다리다가는 목이 빠지겠다. 그러니 김기덕식의 다작에도 장점은 있는 것이다.

06.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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