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11월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을 이미지 버전으로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러시아 TV에서 보고 적은 감상이 주된 내용이다. 해서, 지난번 정리해서 다시 올린 <사마리아> 읽기에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젯밤(21일)에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보았다. 지난주 <사마리아>에 이은 것으로, 같은 채널(REN TV)에서는 다음주에 <해안선>을 방영한다. 이 김기덕 시리즈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나는 한국에서도 안 보거나 못 본 영화들을 모스크바에서 보고 있다(*<봄여름가을겨울>은 2004년 러시아의 한 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3편의 후보작에는 그의 <빈집>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해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한(그러니까 김기덕은 더 이상 한국 영화계의 비주류가 아니다, 는 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최신작 <시간>을 국내 극장에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하니까 그는 '비주류'가 맞다, 아직은) <봄여름가을겨을 그리고 봄>은, 내가 보기에, 이 ‘잘나가는 김기덕’의 자기 점검용 영화, 혹은 ‘숨 고르기’용 영화이다. 하도 정신 없이 영화들을 찍어댔기 때문에, 감독 본인도 자신이 도대체 무얼 찍고 있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을 법하다(더불어, 내가 영화를 왜 찍는 거지?).

해서, 그가 내린 결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를 찍는 것인데, 그게 가장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가 된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일단, 사계(四季)를 담아야 했던 이 영화는 제작기간이 무려 1년이나 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평소 3개월이면 하나씩 해치우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잔혹한 장면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그는 살인장면을 삽입할 수도 있었다). ‘잔혹하지 않은 김기덕 영화’라는 게 모순형용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김기덕의 불교영화?(더 리얼하게는 ‘절간[절깐]영화’?) 설마?!

지난 봄에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러시아의 영화비평가 세르게이 아나슈킨에 따르면, “그런 영화를 김기덕에게서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상식적’인 판단인데, 거기에 진실이 있다. 즉, 이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A Film by Kim Ki Duk)’가 아니라, ‘김기덕에 대한 영화(A Film on Kim Ki Duk)’이다! 오죽하면, 이 영화가 자신의 영화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김기덕 자신이 직접 출연했을까!(물론 속사정은 안성기를 캐스팅하려던 일이 불발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니, 아무리 상을 받고,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김기덕의 필모그라피에서 ‘예외적’이며, (극단적으로 말해서) 제외되어도 무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이 영화를 빼더라도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구성’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은 김기덕의 영화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 태도, 자세, 결의 등을 아무리 나열해 봐야, 그건 컨텍스트로서, 영화 ‘이전’이며 영화 ‘바깥’일 따름이다(그러니 일급의 비평가라면, 혹은 눈치 있는 비평가라면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일부 조심스런/성급한 비평가들의 진단처럼 김기덕의 ‘변화’를 예고하는 영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그는 <사마리아>와 <빈집> 등을 통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김기덕 자신도 이 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라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인바, <나쁜 남자>나 <해안선>에서 <봄여름가을겨울>도 ‘이행’하는 건 (영화)논리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런 게 가능한 경우는 돈 받고 영화를 찍어주는 ‘직업’ 감독들이다). 사실, <해안선>인가는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간에 겹쳐 찍었을 법한데, 그것이 암시해주는 바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역시나 그의 영화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거듭 말해서 (김기덕이 나오는) 이 영화를 (김기덕이 나오지 않는) 다른 영화들과 연관지어서 ‘진지하게’ 이해/해석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기대에 걸맞는 성과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무얼 찍은 것일까? 사계의 순환을 인생의 사계에 비유하는 것은 물론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일이다. 불교에서의 ‘업보’를 순환적인 삶의 근거논리로서 제시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다. 그러니, 등에 돌멩이를 맨 물고기나 개구리/뱀과 허리에 맷돌을 둘러매고 ‘업보’를 씻기 위해 고행에 나선 김기덕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관객이 감동을 받는 것도,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모든 건 (정신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후적/소급적으로만 의미를 갖는다. 봄여름가을 장면이란 겨울 장면을 찍기 위한 도구이고 핑계였을 따름이다(우리는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젊은 날의 방황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럼, 겨울장면은 무엇이었나? 여름날에 병을 고치기 위해 물위의 절간을 찾아온 한 여자에 빠져 욕정이 이끄는 대로 스승의 곁을 떠났던 20대의 ‘기덕’(네 명의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을 그냥 ‘기덕’이라고 하자. 이름이 있었던가?)은 10년이 지난 가을날 바람난 아내를 살해한 살인자가 돼 다시 물위의 절간을 찾는다(스승은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라고 반문한다). 스승은 그의 뒤를 쫓아온 형사들에게 말미를 얻어서 그가 참회의 문구들을 절간의 나무 바닥에 다 새기도록 하고, 그 일이 끝나자 그는 잡혀간다. 그리고, 겨울. 아마도 10여 년의 형기를 살고 난 40대의 기덕은 다시 절간을 찾고 스스로 소신(燒身) 봉양한 스승의 사리를 수습한다. 그리고는 교본을 발견해서는 무술을 연마한다(한국의 전통적인 ‘절간영화’에는 없는 내용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러던 차에 얼굴을 천으로 가린 한 아낙이 어린아이를 절간에 맡기러 왔다가 되돌아가던 길에 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서 죽는다. 자신의 ‘업보’를 확인한 기덕은 맷돌을 단 줄을 허리춤에 매고 불상을 손에 들고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고행을 감행한다(이 장면과 겹쳐지는 건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에서 장신구를 끌고서 폭포를 오르는 로버트 드니로인데, 한국 영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배경음악으로는 (엔리오 모리코네 대신에) 김영임의 '정선아리랑'이 깔리고.

화면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민요이지만, '정선아리랑'은 사실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가령 <서편제>에 쓰인 '진도아리랑'과 비교해 보아도 '정선아리랑'의 정서는 사뭇 다르다. 한데, 왜 안 어울리는가? '정선아리랑'은 (자식 못 낳는) 우리 여인네들의 한(限)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민요인데 반해서 화면은 여인네를 죽게 한 사내/스님의 업보 씻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거기에 더 어울리는 건 '남자는 강해야 한다' 같은 <황비홍>의 주제가이다. 어차피 안 맞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말이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 김기덕이 몸으로 때우는 영화이다. 맷돌을 끌고 산을 오르는 그의 ‘용맹정진’에 논리적인 해명/설명을 다는 건 부질없다. 그것이 이제까지 그가 영화를 찍어온 방식이고 앞으로 찍어갈 방식이다. 해서,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정신은 ‘불교 정신’이나 (변형된) ‘기독교 정신’ 따위가 아니라 ‘무대뽀 정신’이다. 그게 전부이다. 죽이든 밥이든 난 그런 식으로 영화를 찍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찍을 것입니다, 라는 결의가 거기에는 담겨 있다(그에게 영화는 ‘업보’, 혹은 ‘업보 씻기’인가?).

그건 ‘말’로 될 일이 아니어서 그는 ‘몸’으로 때운다(사실, 겨울 장면에 등장한 김기덕은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절간을 배경으로 가지고 온 이유의 하나는 대사가 필요하지 않아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고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지 않는가. 이 테마를 ‘현대적인’ 상황에 맞게 고안/각색해본다고 생각해보라. 적절한 대사를 쓰기도 힘들 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로서 이 영화가 김기덕에게 갖는 의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우화’, 즉 알레고리이며, 이 알레고리가 김기덕이 챙긴 몫이다. 그럼 관객은? 관객은 무슨 이유로, 혹은 무슨 업보로 김기덕의 자기점검용 체력단련과 정신수양에 동참해야 하는가? 의외로 ‘소심한’ 김기덕이 이런 걸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해서 (폭력 장면 대신에) 등장하는 것이 판타지적인 배경이다. (지난번에 <사마리아>를 말하면서 지적한바 있지만)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알레고리가 불가불 배제/희생할 수밖에 없는 디테일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는 ‘물위의 절’이라는 가상의 회화적인 공간을 가져온다(알려진 바이지만 한국에 그런 절은 있어본 적이 없으며, ‘주상지’란 연못에 세워진 이 절은 자연보호 차원에서 현재는 철거되었거나 철거될 예정인 걸로 안다, 그리고 벌써 철거되었다). 아마도 외국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어필하는 것도 이 배경공간이 갖는 수려한 이미지일 것이다(거기에 뭔가 심오한 듯한 불교철학과 뜻은 모르지만 애절한 듯한 주제가가 덧붙여지고, 등등).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감독 자신에 대한 우화적 알맹이(=속사정)가 ‘관광상품’으로 포장된 영화이며(실제로 세트장은 한동안 관광명소 역할을 했다고), 현학적으로 말하면, 알레고리적 이그조티시즘(Allegorical Exoticism)의 영화이다(이 영화는 ‘불교’와 무관하며 ‘한국’과 무관하다). 김기덕이 알레고리를 챙겼다면, 관객이 챙기는 건 이그조티시즘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볼 것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 한가지만 빼놓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 관심을 끈 장면이 있는바, 그건 겨울에 한 아이를 데리고 엄마인 듯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등장한 장면이다. 이 장면의 처리에 대해서 러시아의 비평가도 궁금해 하던데, (한국인이지만) 사실 내가 그보다 더 아는 것도 없다. 아니, 관음보살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있는 아나슈킨과 비교해 본다면, 내가 더 무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영화를 본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이 여자가 나병환자여서 당연히 얼굴을 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아이를 절간에 맡기려 한다고).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가 붙일 수 있는 논리적인 설명은 그것뿐이다. (아랍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며 예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아이를 맡기러 온 자신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렸다는 건 따라서 부족한 설명이다. 또 ‘기덕’과 무슨 관련이 있는 여인이어서 얼굴을 가렸을 거라는 한 관객의 설명도 근거가 없다. 여인은 아이를 놓고 불상 앞에서 한참을 울다가 떠나는데, 그 울음은 한스러움의 울음이다. 내 짐작에 그 한스러움은 자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갖는 한스러움이다(그는 ‘스님’에게 잘 부탁 드린다는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한국인의 억척스런 모정을 고려해본다면 그녀가 아이를 떼놓으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일 것이다. 해서, 그녀의 업젝션(abjection)은 자신을 비천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인바, 그건 그녀가 몹쓸 병에 걸린 경우를 고려할 때 이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무슨 업보 때문인지 아이를 두고 바쁜 걸음을 옮기다가 스님(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 이어지는 마지막 봄 장면에서 그녀의 아이는 동자승 시절의 기덕을 연기했던 배우가 다시 연기하는바(인연의 사슬?), 거꾸로 되짚으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죽은 것이 된다. 여기서 은근히 암시되는 것은 (부친살해가 아닌) ‘모친 살해’의 모티브이다(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수취인 불명>에서도 비천한 모성, 혹은 모친 살해의 모티브가 다루어졌을 법하다).

조금 넘겨짚어서 말하자면, 김기덕 영화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이 ‘모친 살해’(=비천한 모성)이며, 여성에 대한 그의 공격성은 그것과 연관되는 것이지 않나 싶다(이건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과 견주어볼 만하지만,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에 대해서만 내가 흥미를 느낀 이유이다(이 장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몇 마디 늘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인 장면은 이 영화에 대한 ‘읽기’를 자극하는 ‘대상 a’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절간의 세계는 여성/모성 부재의 세계가 되었는바, 그것은 스승-제자의 세계이면서 남성들만의 단성(單性)적인 세계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아이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아’로 버려지며, 그를 거두어 키우는 건 스승(=아버지)이고, 그는 스승의 대를 이어서 또 다른 고아를 제자(=아들)로 키워낸다. 그게 그들의 업(業)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작년에 나온 가장 남성중심적(혹은 남근주의적) 영화를 꼽으라면 <봄여름가을겨울>을 꼽아야 할 것이다(이 영화와 <안토니아스 라인> 같은 ‘여성중심적’ 영화를 비교해 보라). 이와 비교한다면, ‘최악의 남성영화’로 잔뜩 욕을 먹은 <나쁜 남자>는 차라리 ‘심약한’ 남성주의 영화라고 해야 옳다. 그 영화에서 한기(조재현)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대생을 윤락가에 넘기면서 ‘나쁜 남자’를 자임하지만, 정작 그는 자기 욕망의 대상(‘대상 a’로서의 여성)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분열적/히스테리적 주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형편이 돼서 이 여성을 숭배하며 모든 걸 갖다 바치는(백만 송이의 장미?) 행위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이 동일한 태도의 이면에서 ‘여성주의’를 발견한다면, 그건 넌센스이다. 한 여자를 숭배하거나 학대하는 남자는 ‘동일한 남자’이다. 그래서 같은 여자와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의 ‘패악’은 그러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이고 가면일 뿐이다. 결국 <나쁜 남자>에서 패배하는 건 여대생이 아니라 한기 자신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영화는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이기도 하다.

여자는남자의미래다

사실 올해 나온 또 다른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가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이 영화 또한 최악의 反여성주의적 영화로 꼽히는 모양인데, 왜 맨날 (담대한 남성들은 놔두고) ‘가련한 남성’들만 얻어맞는 것인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여성 관객 일반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아니면 ‘엘리트’ 여성주의 비평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그런데, 배용준의 근육질 몸매에 환호하고, 디카프리오의 미소에 숨 넘어간다는 관객들도 (일부 비평가를 포함한) 여성 관객 일반 아닌가? 아마도 내가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여자들도 남자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올해의 남성영화니 여성영화니 하는 걸 선정하는 건 그저 그들의 알리바이 정도라고 해두자(참고로, <낮은 목소리>의 여성감독 변영주가 만든 <밀애>는 전혀 ‘여성주의적’이지 않았다).

하여간에, 전혀 잔혹하지 않으면서 ‘담대한’ 남성주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에서는 두 여자가 소리 없이 죽어나간다. 하나는 30대의 기덕이 죽인 아내(여름 장면에 등장했던 그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그가 ‘간접적으로’ 죽이게 되는 한 여인이다. 아내의 죽음/살인은 스승이 보는 신문쪼가리의 기사를 통해서 전해질 뿐 영화 속에서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그래서, ‘얼굴 없는 죽음’이다). 스승은 자신이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하는 제자에게 “그런 줄 몰랐더냐?”(이건 그 자신도 젊은 날에 겪어보았다는 얘기다)라고 다그치고 죄업을 씻는 방도를 일러준다. 아내를 죽인 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겨울 장면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 또한 정말로 찍소리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이 또한 ‘얼굴 없는 죽음’이다). 그 죄업을 씻기 위해서 기덕은 맷돌을 끌고 산을 탄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러니까 자세하게 묘사되는 것은 이 두 남자(결국 같은 남자)의 글자 새기기와 산 타기이다. 거기에 비하면, 두 여자의 죽음은 일도 아니다! 이 어찌 담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번의 죄업을 씻은 기덕은 마지막 봄 장면에서 평정한 마음으로 동승(童僧)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이 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바, 스님 기덕은 화가, 즉 예술가이고 (알레고리적으로) 영화감독이다. 모든 죄업은 그가 그러한 평정과 예술가로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련)과정이었을 뿐이다. 여인네의 유혹/죽음은 그 한 코스에 불과했던 셈. 그리고, 이러한 자기 알레고리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은 단성생식(單性生殖)에의 판타지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그의 업보는 스승-제자, 곧 남성-남성의 관계를 반복하기 위한 핑계거리였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 스승-제자 관계가 이 영화적 세계의 본질이고 ‘진리’이다. 그것만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고정불변하는 진상(眞相)이며, (여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속세의 환상(幻相)일 따름이다. 만약에 당신이 이러한 결말에서 ‘평온함’을 느낀다면, 그거야말로 ‘섬뜩한(uncanny)’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이러한 절간의 세계보다는 나처럼 속세를 더 사랑한다면 말이다…



P.S. 지난 11월 12일자 <이즈베스찌야>지에 실린 김기덕 인터뷰를 여기에 정리해서 옮긴다. 인터뷰한 통신원(기자)는 키릴 알료힌이다. 사전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독학-영화감독 김기덕은 분기마다 영화를 찍어서 개인적으로 국제시장에 영화를 공급하는데, 이번 가을에 두 차례 모스크바에 올 예정이었다(한국영화제 개막식과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빈집> 시사회 때). 하지만, 그의 빡빡한 작업 스케줄 때문에 그의 방문은 취소되었다.(*표시를 한 건 나의 군말이다.)

빈집

이즈베스찌야: <빈집>은 2004년에 러시아에서 개봉된 당신의 네 번째 영화이다(*짐작에,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집>과 <해안선> 혹은 <나쁜 남자>인 듯하다). 당신은 영화를 무척 많이 찍는다.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김기덕: 특별한 비밀은 없다. 나는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작업할 따름이다. 한 영화를 끝내면 나는 곧장 다음 영화로 들어간다. 이건 샐러리맨들이 매일같이 출근해서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구상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프로젝트에 달려든다. 그게 ‘영화감독이 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즈베스찌야: <빈집>의 주인공은 파리의 아가씨 아멜리를 닮았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어서 그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김기덕: 아직 <아멜리>를 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영화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진 않는다. 영화의 거리[꺼리]들은 생활에서 얻은 것들이다.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빈집>을 관객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될까(*따라하게 될까) 두렵지는 않는가? 영화는 타인의 일상을 한번 맛보기 위해서 여러 집들에 잠입하는 걸로 시작한다(*나는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만 아는바, 거기에 준해서 옮겼다).

김기덕: 나는 아직 나의 주인공들을 닮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한 미국 여자가 빈집에 들어가서는 편안하게 살더라는 얘기는 들어봤다. 하지만, 그녀는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가 <빈집>을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2년간 파리에 체류한 적이 있다. 유럽 영화, 혹은 프랑스 영화가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는가?

김기덕: 카메라를 잡기 전에 내가 본 프랑스 영화는 다해서 세 편이다. 때문에, 내가 유럽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가진 생각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즈베스찌야: 비평가들은 해마다 당신이 최고작을 찍었다고 말하곤 한다. 처음엔 <나쁜 남자>에 대해서 그런 평을 쓰더니, 그 다음엔 <봄여름…>에 대해서, 지금은 <빈집>에 대해서 그렇다고들 한다. 당신 생각에는 어느 작품이 최고작인가?

영화-악어 (1996)의 장면들

김기덕: 나의 영화들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서로 닮았다. 그들은 전부 내적으로는 서로 통한다. 나에게 특별한 선호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악어>를 지목하겠다(김기덕의 데뷔작으로 익사자들의 시신을 찾아주고서 유족들에게 돈을 받아 챙기는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 이즈베스찌야).(*이런 주석으로 봐서 <악어>는 아직 러시아에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특이하게도.)

이즈베스찌야: 당신의 성공에 대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떤가?

김기덕: 나는 물론 해외에서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 영화를 보지 않는다. 설사 본다고들 하더라도 너무도 이해들을 못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의 영화들은 한국사회의 추한 면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러시아언론과의 인터뷰 사진.



이즈베스찌야: 러시아에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블록버스터들이다(*얼마 전에 <쉬리>가 또 TV에서 방영됐다. 1년에 최소한 네댓 번은 나오는 모양이다).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를 모방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몇몇 감독들이 실제로 서양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한국 관객은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하다. 그래서 흥행작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몇몇 감독들은) 미국 영화를 모방한다(*사실 강우석이나 강제규 감독의 영화보다는 김기덕의 영화가 흥미롭다).

이즈베스찌야: 예전에 당신은 세계화 반대론자였다. 지금 당신은 세계시민이 되어 각종 영화제들을 날아다니면서 자신의 영화를 판다. (세계화 반대론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은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그렇다. 나는 예전부터 세계화에 반대해왔다. 모든 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세계문화는 발전할 수 있고 다양해질 수 있다(*참고로, <복수는 나의 힘>에서 보듯이 당신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냐는 다른 인터뷰에서의 질문에 박찬욱은 어떤 면들에 대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두 감독의 견해는 ‘상식적’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이 러시아에서 뭔가를 찍을 거라고들 말한다. 소문일 뿐인가?

김기덕: 나는 자주 유럽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장애물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저예산으로 작업한다.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러시아에서도 한번 찍어보고 싶다. 하지만, 당장의 구체적인 계획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현재의 지명도라면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영화 <활>(2005)의 러시아판 포스터.



P.S.2. 거기까지이다. 기사로는 3단짜리 인터뷰이지만,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에 분량은 소략하다. 오늘 산 책의 하나는 <‘자신들’ 속의 ‘타자들’: 세계화와 현대 영화에서의 문화간 융합>이란 제목의 신간 영화비평서인데(허름한 모양새에 비해서는 비싼 책이다. 116쪽에 6,000원쯤이니까), 6편의 평론 중에서 제일 첫머리에 실린 것은 세르게이 아나슈킨의 김기덕론이다. 제목은 '김기덕: 추방자들의 복수'.

‘추방자’(=추방된 자)란 뜻의 러시아어 ‘이즈고이’는 ‘추방자’ 혹은 ‘천민’을 뜻하는 영어 ‘파리아(pariah)’의 번역어로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이즈고이’란 말은 ‘호모 사체르’(아감벤)에 대응하는 말이면서 ‘서얼’(고종석)이라 옮겨질 수도 있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낙오자란 의미에서) ‘떨거지’라고 옮겨질 수도 있다. 그러한 ‘계급적인’ 배경을 암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견지할 때, 김기덕의 영화는 <악어>나 <수취인 불명>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작’이 된다(<나쁜 남자>도 부분적으론 그런 함의를 갖는다).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완전히 제거/거세돼 있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계급적 배경이다(해서, 남근주의적인 이 영화에서의 ‘남근’은 말 그대로 ‘결여의 기표’이자 순수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허울뿐인 ‘문간’처럼). 그런 의미에서도 이 영화는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이며, ‘문제작’이 되기엔 많이 모자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주류적 코드를 상징하는 ‘대종상’이 주어진 것은 역설적이지만 순전히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대종상은 김기덕의 ‘뛰어난’ 영화나 ‘문제적인’ 영화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더불어, 대종상은 ‘관광/홍보 영화’를 편애한다).

하지만, 그런 ‘추방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최신작인 <빈집>은 그가 자신의 ‘본령’으로 되돌아온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사가 좀 부자연스럽다는 평(김기덕 영화를 좋아하며 모두 본 룸메이트의 평이다)에도 불구하고 반갑다(*이 영화를 나중에 본 감상은 따로 올려놓은 바 있다) . 그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미학이 아닌 사회학/정치학의 자리에 좀더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죄다 반면교사(反面敎師)거리들이지만, 한국 영화계에는 미학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추락한 감독들이 여럿 된다. 화엄경을 들먹이다가 고꾸라진 감독을 비롯해서. 거꾸로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이나 돈 되는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걸 오래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홍상수처럼 속물적인 걸 내내 붙들고 있거나. 한편으로, 똑같이 판타지를 다루지만, 김기덕을 한참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감독으로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이 있지만(그는 김기덕과 달리 디테일에 강하다), 그는 김기덕만큼 다작(多作)이 아니기에 그의 영화를 기다리다가는 목이 빠지겠다. 그러니 김기덕식의 다작에도 장점은 있는 것이다.

06.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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