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의 또다른 꼭지이다(본론의 마지막 꼭지쯤 된다). 앙드레 지드와 윤동주에 관한 것인데, 나중에 지드론이나 윤동주론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언제?

우리에게 아직 남은 다른 얘기는 고리키의 문우였던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1869-1951)의 얘기이다. 그가 30세에 발표한 <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1899)가 우리가 다루게 될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이다(작품은 <앙드레 지드 전집>(전5권, 미문출판사, 1969)에 수록돼 있다). 제목에서부터 프로메테우스를 명시하고 있으니까, 고리키의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관점에서 볼 때 방계-이야기였다면, 지드의 그것은 직계-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아니라 우화적 소설인 이 작품은 1890년대 파리의 한 다방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제우스(=죄스)는 부유한 은행가(!)로 등장하고, 프로메테우스(=프로메떼)는 무면허 성냥 제조 혐의로 구속된다. 이야기의 발단은 대부호인 제우스가 아무런 이유없이 한 사람(꼬클레스)의 따귀를 때리고 다른 한 사람(다모클레스)에게는 500프랑의 돈을 익명으로 부친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무상의 행위, 즉 아무런 동기나 이유를 갖지 않는 행위는 지드 문학의 중요한 테마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행위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것이라 말해진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신과 인간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기준이다. 백만장자인 제우스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이, 즉 무한한 재산을 갖고 있는 자만이 절대로 이해관계 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오. 인간은 할 수 없어요. 거기에서부터 나의 장난에 대한 사랑이 생겨났오.”(109쪽) 그의 바로 그러한 장난에 꼬클레스와 다모클레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연관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독수리(=수리)를 데리고 다니는데, 이 독수리는 그의 양심의 상징이다. 감옥에서 밤낮으로 뜯기면서 독수리는 살찌는 대신에 그는 점점 말라간다. 이윽고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 대하여’란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게 되고, 저마다 자신의 독수리를 가져야 하며 독수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독수리(=양심)에 관한 강의를 들은 다모클레스는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500프랑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병이 들고 결국엔 죽고 만다. 다모클레스의 장례식에 뚱뚱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나타난 프로메테우스가 다모클레스의 죽음 덕분에 자신의 독수리를 죽였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함께 독수리 요리를 맛있게 먹는 걸로 이야기는 마감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징벌/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지드판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양심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독수리이다. 지드에 의하면, 우리가 받는 양심의 고통은 신들의 장난(무상적 행위)에 기인한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러한 양심을 살찌우는 것은 자학적인 나르시시즘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양심인 독수리를 죽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는 진정으로 해방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로메테우스는 애초부터 사슬에 결박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제우스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그저 양심의 가책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란 것은 혹 그런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드에게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더 이상 영웅신화가 아니며 개벽신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mal) 신화이며, 우리가 유쾌한 기분으로 먹어치워야 할 신화이다. 프로메테우스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둡시다.”(116쪽) 자신을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로 자처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자들을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라면 조용히 입다물고 우리와 함께 맛있는 독수리 요리나 먹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아래 사진은 독역본.

그런 의미에서 지드의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해방, 즉 소멸을 예비하고 있다. 그는 영웅신화나 개벽신화로서의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가지고 있는 해악을 19세기의 끄트머리에서 이미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20세기의 독일과 러시아의 프로메테우스들은 자신들이 결국엔 에피메테우스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까지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그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는 삶은 프로메테우스 없는 삶, 즉 역설적으로 아무런 가르침이 없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영웅적인 행위에 대한 강박관념과 양심의 가책에 의한 구속으로부터의 해방된 삶이다.

이걸 무신론적 프로메테우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고리키의 사회주의적 프로메테우스와 대비하여 무정부(주의)적 프로메테우스라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은 둘 다 동시대의 인류에게 자유와 진실을 전해주고자 한 것이지만, 서로의 방식은 너무나도 대비된다. 우리가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어디쯤에서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차면 넘친다는 지혜를 한 사람은 잠시 잊고 있는 듯하다(러시아는 프랑스에 비해 아직 젊은 나라였다!).

 

 

 


한편 이 무신론적 프로메테우스가 기독교 신학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우리는 한 젊은 시인의 ‘고백’과 만날 필요가 있다. 반갑게도 이 젊은 시인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는 바로 윤동주(1917-45)이다. 한국문학의 경우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직계-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매우 드문데, 그의 시 <간(肝)>(1941)은 예외적이면서도 아주 순도 높은 경우이다. 먼저 잘 알려진 시이지만, 시의 전문을 여기에 옮겨본다.

1.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2.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3.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4.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5.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6.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7. 너는 살찌고
8.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9. 거북이야!
10.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11.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12.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13.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먼저 이 시의 창작배경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윤동주는 자선시집에 실릴 19편 가운데 맨마지막인 <별 헤는 밤>을 1941년 11월 5일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에 썼다. 원래 그의 시집은 ‘병원’이란 제목이 붙여질 예정이었으나 <서시>를 쓴 이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뀐다. 그러나 그의 시고(詩稿)를 받아본 이양하 선생은 몇 편의 시가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더러 신변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충고하여 윤동주는 시집출판을 단념한다. 11월 29일자로 씌어진 그의 시 <간>은 “발표와 출판의 자유를 빼앗긴 지성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1942년 1월 24일 <참회록>을 쓴다(그의 시집은 그가 죽은 후인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윤동주의 시 가운데 “보기 드물게 대륙적인 기풍을 가지고 있[는]”(김흥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이 시는 전래의 토끼설화(귀토설화)와 서양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접합한 것으로서 이 두 의미체계가 ‘간’을 접점으로 하여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이에 대한 몇몇 연구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A) 비록 궁지에 몰린 약자지만 슬기롭게 자기(肝)를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되어 묵묵히 인고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속성은 바로 윤동주의 그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다 적극적/투쟁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인 저항방식에서 유발되는 자책감과 울분을 스스로 프로메테우스처럼 속죄양 의식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윤동주의 내면의식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토끼”와 “프로메테우스”는 윤동주의 저항 의식의 특징이 잘 반영된 자기-동일시의 표상인 것으로 해석된다.(김재홍)

(B) 화자(토끼로 형상화된 자신)는 “독수리”를 길렀으며, 자기 간을 뜯어먹도록 요구한다. 이때 “독수리”는 화자의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생명(간)을 쪼아내며 스스로에게 아픔을 주는 자아의 예리한 의식이다. 자신의 삶을 쪼아내는 자아의 의식활동이 치열한 아픔을 주지만, 그는 안식이 아니라 고통을 선택한다. 오히려 고통을 주는 반성적 의식이 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토끼설화의 맥락이 의미 깊게 되살아난다. 그는 어떤 초월적 희망도 인간을 구제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고, ‘지금-여기(갈등의 현실세계)’에서의 고통스런 자기응시와 긴장을 선택한다. 이러한 의지는 고유한 의미에서 비극적인 인간상이며, 마지막 연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하게 된다.(김흥규)

(C) 그러면 ‘목에 맷돌을 단 프로메테우스’는 누구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윤동주 자신이다. 윤동주는 자기 동일성으로 이 프로메테우스를 택했다. 자기 희생적 인간, 고통을 감내하며 제우스에 대항하는 저항적 인간, 그는 이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이 시에서) ‘간’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간을 말리고 그 간을 지켜 지배층 세계와 대응의 자세를 취하려는 토끼의 저항정신의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고통을 당하며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정신의 측면이다. 윤동주는 <토끼전>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란 두 고전을 차용하여 저항과 희생이란 이질적인 정신적 지향을 무리없이 해냈다.(박호영)

조금 무리해서 말하자면, (A)는 프로메테우스의 속죄양 의식을, (B)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스런 자기응시를, (C)는 저항과 희생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질적인 정신적 지향을 각각 지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연구들에서는 이 시 <간>의 3-4연(“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에서 제시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이 그리스 신화 속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형상이라는 것에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도 셸리의 프로메테우스도 아니며,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바로 지드의 프로메테우스이다.

단, 지드의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양심의 투사(投射)였던 독수리를 죽임으로써 일종의 카니발적 결말을 유도하는 것과는 달리, 프로메테우스-윤동주는 독수리의 부리처럼 ‘예리한’ 자아의식과의 긴장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음으로써 내면으로의 “끝없는 침잠”을 감내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윤동주다운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시 <간>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한다.

먼저 이 시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2-4연)를 감싸고 있는 1연과 4연은 토끼설화의 결말부분이다. 이 설화에서의 간은 생명을 뜻한다. 그것은 용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토끼의 간이 요구된 것에서 바로 알 수 있다. ‘용궁’이나 ‘용왕’이라는 것은 우리 전래의 상상력 속에서 어떤 이상적 공간이다. 즉 지상의 현실과 대비되는 꿈의 공간이다. ‘거북이’(혹은 자라)의 유혹에 이끌려 그만 죽을 뻔했다가 겨우 자신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 토끼는 이제 그러한 꿈의 허실을 깨닫게 된 토끼이다. 그것이 5연의 내용이다: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이러한 토끼의 결의는 당차 보이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씁쓸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은 고통스럽더라도 오직 지상의 삶만이 유일한 현실로서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그것은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의, 결국엔 그 고통을 길들인 프로메테우스의 현실이다. 자신의 유일한 삶, 유일한 생명(=간)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서는 우리가 타협하거나 희생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가령, 윤동주의 경우에 시집출간이 좌절된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양심, 즉 예민한 자기의식을 가진 시인에게서 그러한 타협/희생은 자신의 간을 쪼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이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에도 괴로워하지 않았던가!그런 시인의 의식을 대변하는 존재로서의 프로메테우스가 지드의 프로메테우스를 따르고 있는 것은 따라서 자연스럽다.

2연의 3행은 1연의 토끼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접합되는 지점이다.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은 본래 “코카서스 산정(山頂)에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처럼” 정도의 뜻이 토끼설화로 변형된 형태이다. 이 변형을 통해 ‘코카서스=용궁’, ‘프로메테우스=토끼’라는 두 가지 동일화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바톤은 이제 토끼에서 프로메테우스에게로 넘겨진다. 그리고 이 프로메테우스-시인은 4연에서, 자신이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에게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분명 저항적이면서 체념적/희생적이다. 가장 ‘남성적인 톤’의 시에서조차 “지극히 서정적[인] 인간”(이건청)으로서의 여린 모습을 다 가리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8행) 하여간에 시인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결코 도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으로도 “아픔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해내고 있는 이 시는 양심의 수난자로서의 윤동주의 정신의 궤적을 보여준다.”라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의 주제에 또 다른 차원을 부여해주고 있는 마지막 6연이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여기서 “목에 맷돌을 달고”라는 표현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태복음, 18:6) 마광수는 이러한 표현을 예수의 이 산상설교 부분과 관련지어 해석하는데, 순진한 어린아이를 꾀어 죄에 빠뜨리는 자는 아예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빠뜨리는 게 낫다”는 설교의 내용과 비교하여 보면, 불을 모르던 인류는 ‘어린이’처럼 순진했으며 그 어린이에게 불을 가르쳐 준 자가 프로메테우스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으로부터의 이러한 인용(인유)을 통해 윤동주는 “불[을] 도적한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목에 맷돌을 달고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라는 다소 부정적인 기독교 신학의 이미지로 대치-변형함으로써 셸리의 경우에서처럼 ‘프로메테우스=사탄’이라는 형상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 가치전도의 방향이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셸리의 프로메테우스(+)가 사탄(-)과 결합되면서 (-)적인 방향으로 점차 기울어간데 반해서, 즉 ‘프로메테우스-사탄’(-)적인 형상인데 반해서(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그런 관점에서 읽었다), 윤동주의 프로메테우스(+)는 사탄(-)을 자기쪽으로 끌어옴으로써 ‘프로메테우스-사탄’(+)적인 형상을 새롭게 조형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이때의 그리스도는 부활과 권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자/대속자로서의 그리스도, 고난과 희생의 그리스도이다. 이 새로운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 ‘목에 맷돌을 단 프로메테우스’는 셸리의 프로메테우스-사탄이 가졌던 어떠한 반항적/능동적 영웅주의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더 많이 비극적이다. 운동의 방향에 있어서도 상승/침잠이라는 상반된 성격을 보여준다. 이것을 그림으로 비교해본다.

                          셸리적 프로메테우스-사탄     윤동주적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
가치의 전도                 + → -                                          - → +
운동의 방향                        ↑                                                  ↓
정념의 태도               능동적 영웅주의                        수동적 비관주의

프로메테우스는 일반적으로 ‘승화’를 뜻하는 문학적 상징이지만, 윤동주의 <간>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전락’이다. 그리고 고통의 승화가 아니라 고통의 연속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지드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우리가 본 카니발적 결말과는 또 다른 결말이다.

지드가 독수리를 죽이는 행위를 통해 무신론적(무양심적)인 프로메테우스의 가능성,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해소/해체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면, 윤동주는 이 한 편의 서정시 속에 다시금 기독교 신학을 끌어와서 프로메테우스의 반항정신을 최소화하고 희생정신(=양심)을 극대화함으로써 비영웅적인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를 창조하고 있다. 아니 프로메테우스의 소멸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의 프로메테우스는 끝없이 침전하는 까닭에 그가 구원해야 할 인간들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그를 구원해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앙드레 지드와 윤동주, 모두에게서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프로메테우스를 찾을 수 없다. 하나는 먹어 치워서 없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침전하는 까닭에 다시 건져올릴 수가 없다. 남아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프로메떼’(지드)의 뼈다귀와 ‘푸로메디어쓰’(윤동주)의 발바닥뿐이다...

06.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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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스킬로스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6 13:50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
 
 
 

'프로메테우스의 두 얼굴'과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생각'에서 또 다른 단락을 옮겨온다. 러시아문학에서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것이다.  

러시아문학에서도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를 읽을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미 앞에서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정치적 우화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지적되었지만, 세계사의 또 다른 혁명, 러시아 혁명의 경우에도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동원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럽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못하고, 18세기초 표트르 대제(왼쪽 초상화) 시대에 와서야 서구화되면서 유럽의 한 구성원이 되었기에, 러시아 민중은 상대적으로 강압적이고 전(前)근대적인 정치적 압제 속에서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1812년)을 통해 혁명의 이념이 유포되고 러시아에서도 일부 급진적인 지식인 청년들이 전제정치에 저항하는 ‘미숙한 혁명’(오른쪽 그림의 1825년의 12월 봉기)을 기도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이후 20세기초까지 더욱 강화된 전제 정치체제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던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변혁의 주도권을 잡고 성장해간 데 반해, 러시아에서는 그러한 부르주아의 성장이 상대적으로 미흡한 가운데 전제정부와 농민(혹은 농노)계급 사이에 제 3계급으로서 ‘인텔리겐챠’(=진보적 지식인) 계급이 성장하게 된다. 사실 19세기 러시아문학은 이 인텔리게챠의 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들 인텔리겐챠들이 1840-50년대에 목표로 했던 것은 봉건적 잔재였던 농노해방과 전제정치의 개혁이었는데, 러시아사에서 인간(=민중)을 위해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행위에 값할 만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목표의 실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제 폐지 결단으로 이 목표의 절반은 달성된다. 이 결단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지만, 인텔리겐챠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사상의 압력, 그리고 혁명에 대한 짜르(황제) 자신의 두려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농노해방에 대해서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농노제의 폐지는 커다란 진보적 의미를 지닌다. 농민들은 더 이상 지주들의 소유물이 아니었으며, 지주들 또한 그들을 가축처럼 내다 팔거나 놀음판의 판돈으로 이용하고, 개와 교환하는 등의 행위를 할 수는 없었다. 농민들은 지주의 허락 없이도 결혼을 하고, 취업 전선에 나가거나 고용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업과 각종 부업에도 종사하고 자신의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권리도 얻게 되었다.(...) 개혁의 결과 러시아에는 공업과 상업의 발달 및 농업 경영의 자본주의적 양식의 발달을 위해 보다 좋은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로 변모하는 노정에서 주요한 일보를 내디디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농노해방에 있어서 인텔리겐챠의 역할을 보다 강조한다면(많은 인텔리겐챠들이 전제정부에 항거하다가 시베리아 유배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곧바로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도식이 여기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텔리겐챠(=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짜르)로부터 ‘불’(=자유, 권리)을 훔쳐다 농노(=인간)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한 것이다. 이 ‘불’이 무려 약 5,000만 명의 농민과 농노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으니, 농노해방을 프로메테우스적인 행위/사건이라 불러 모자람이 없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이 1861년의 농노해방에는 긍정적인 프로메테우스 형상만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즉 여기에는 셸리의 프로메테우스부터 잠식하기 시작한 사탄적 형상이 아직 개입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나중에 보게 될 1917년의 혁명과 대조된다.



사탄/악마적 형상이 러시아에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1820-30년대를 대표하는 두 시인, 푸슈킨(1799-1837)과 레르몬토프(1814-41)에게서 ‘악마’(Demon)라는 시적 형상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악마’를 모티브로 한 많은 서정시와 장시(poema)를 남겨놓고 있다. 특히 레르몬토프의 장시 <악마>(1829-38)에서 ‘악마’는 신의 질서에 저항하는 반항자의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영시적 전통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여진다(그는 특히 바이런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밀턴이나 셸리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어느 정도 사탄적인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을 그의 ‘악마’에서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삽화는 <악마>의 두 주인공인 '악마'와 '타마라').

하지만 그것은 결코 명시적인 형태의 것은 아니다. 그의 ‘악마’가 어떤 명확한 이념적 동기를 가지고 신에게 대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830년대 이후 산문소설이 주된 장르로 부상하고, 러시아문학이 사실주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이 낭만주의적 ‘악마’의 형상은 문학적 형상으로서의 힘을 대부분 잃고 만다. 그것이 자신의 힘을 되찾는 것은 세기말의 상징주의에 가서이다(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고려할 수 있다). 요컨대, 1860년대 농노해방을 즈음한 시기에 러시아 인텔리겐챠들이 가졌던 프로메테우스적인 이념주의에는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같은 사탄/악마주의가 묻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1860년대부터는 차츰 사정이 달라지는 듯하다. 여기에는 러시아 니힐리즘이 한몫한다(한 연구자는 러시아 니힐리즘의 기원을 1858년 정도로 잡고 있다). 투르게네프(1818-83)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1862)에서 니힐리스트로 등장하는 주인공 바자로프에게서 우리는 그러한 징후를 읽을 수 있다. 급진적 유물론자인 바자로프는 ‘니힐리즘’이라는 새로운 이념의 횃불을 들고 친구 아르카지와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자신이 일할 수 있는 ‘작업장’을 제공받지 못한 채, 1840년대 자유주의자들인 아버지 세대와 마찰만 빚는다. 그가 구원해야 할 새로운 ‘인류’가 그의 시대에는 아직 마련되어 않았던 탓에, 개구리나 해부하던 바자로프는 장티푸스 환자의 치료를 거들다가 감염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투르게네프의 어법을 빌리자면, 그는 돈키호테적인 행동하는 인간으로 등장했다가 결국은 예의 그 햄릿적인 인간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는 일거리를 얻지 못한 불운한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이다. 이것은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또 다른 목표였던 전제정치의 개혁 혹은 전복이 더 많은 시간 흐른 뒤에야 현실화될 수 있었던 사정과 연관될 것이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그의 계급적 한계가 그를 프로메테우스-바자로프 대신에 햄릿-바자로프에 머물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바자로프와 대조되는 것이 고리키 문학의 주인공들이다.

 

 

 

 

막심 고리키(1868-1936)는 20세기 새로운 러시아문학을 연 작가이다. 룸펜-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작가로서 그는 19세기 작가들이 가졌던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었는데, 자기 자신이 바로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민중이었다(고리키는 자신을 ‘작가’라는 말 대신에 ‘숙련공’이라고 불렀다). 1890년대 문단에 데뷔하여 여러 단편을 발표하였던 그는 1900년대 들어서 몇 편의 희곡을 쓰게 되는데, <밑바닥에서>(1902)는 그의 일련의 희곡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문제성은 예술적 완성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제의 당당함에서 온다.

빈민굴 여인숙을 무대로 하여 착취하는 주인과 거기에 세들어 사는 여러 밑바닥 인생들을 그리고 있는 이 희곡의 주제는 4막에서 주인공 사친을 입을 통해 대놓고 말해지는 휴머니즘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진실인가, 위로의 동정(=거짓말)인가에 대한 극중인물들 간의 논쟁을 정리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제 몸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나 남의 이마에 흐르는 땀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거짓말이란 전혀 소용없는 거야, 그러니까 거짓말이란 노예와 군주의 종교야, 진실은 자유로운 인간의 신이거든.” 그가 말하는 자유로운 인간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위안의 거짓말도 필요하지 않다. 어떠한 종교나 권위도 필요하지 않다. 그에겐 오직 진실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 그에게서 신이고, 그 자신이 그에게서 곧 신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낳기 위해서” 살고 있는 거라고 주장하는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인간은 진리야. 그러나 대체 인간이란 뭐야. 그건 너라든지 나라든지 또는 저것들이라든지, 이런 손톱만한 게 아냐. 그건 너두, 저것들두, 루카 영감두, 나폴레옹두, 마호메트두, 모두들 함께 모은 거야. (공중에 사람 형체의 윤곽을 그리며) 알겠나? 인간이란 이렇게 큰 거야. 모든 것의 시초와 모든 것의 종말이 이 속에 포함돼 있거든. 모든 것이 다 인간 속에 있는 거야, 모든 것이 다 인간을 위해서 있는 거야,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인간이 있을 뿐이고... 그밖의 것들은 모두 인간의 손이나 머리로 만들어진 거야. <인간!>, 제법 거만하게 들리지 않느냐 말이야, <인-간!>. 인간이란 본래부터가 동정할 것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성질의 것이야..."

사친의 이런 대사는 휴머니즘의 최대치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휴머니즘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이념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고리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리하여, 인간은 결코 동정의 대상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라고 “거만하게” 말하는 사친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프로메테우스-고리키의 형상을 보게 된다. 프로메테우스-고리키가 인간에게 가져온 ‘횃불’은 진실이고 자유이다. 어떠한 구속이나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인간에의 이념이다. 이때 그가 말하는 인간은 개인이 아니라 집합적인 인간, 즉 보다 ‘큰 인간’이다(고리키에게 인간은 언제나 '대문자'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 집합적 인간이 사회적 실천과 변혁의 힘으로 묘사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조로 평가되는 그의 <어머니>(1907)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인간의 시대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레닌을 포함하여 고리키와 같은 이들이 지녔던 이같은 프로메테우스적 기획이 현실화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푸도프킨의 영화 <어머니>(1926)의 한 장면.

하지만 이미 1989년의 소련과 동구권 대변혁을 목격한 우리로서는 이 기획에 처음부터 부정적인 프로메테우스(=사탄) 상이 드리워져 있었다는 걸 놓칠 수 없다. 이미 <어머니>에서부터 자본가(=지배계급)와 노동자 계급(=피지배계급) 사이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에는 어떠한 화해의 가능성도 가로놓여 있지 않았다. 그것은 1934년 소비예트의 창작원칙이자 방법론으로 선포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긍정적 인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무모순 사회에서 아무런 내적 갈등도 경험하지 않는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서의 긍정적 인물에는 어느덧 프랑켄슈타인적인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지 않은가. 현실정치에서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스탈린(1879-1953)일 것이다(스탈린 흔히 '아버지 스탈린'이라 불린다. 고리키는 생전에 권력의 수뇌부로부터 <아버지>란 소설의 집필을 제안받은 바 있다).

1936년에 고리키는 사망하는데, 확인할 수는 없지만, 스탈린에 의한 암살설도 나돌았다. 나는 그의 죽음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애초에 고리키이 의도했던 프로메테우스적 기획이 결국엔 프로메테우스-사탄적 기획으로 전락하고 만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이해하고 싶다. 러시아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우리의 얘기는 이제 그러한 사실을 암시하는 데에서 그치기로 한다. 아래 사진은 레닌의 장례식(1924)에서의 고리키. 

06.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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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스킬로스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6 13:50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
 
 
2006-02-22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8-03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8-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자주 찾아주시네요.^^ 종종 깨진 이미지들이 있어서 보수공사를 해야 하는데, 이 페이퍼도 그렇군요...
 

 

 

 

 

작년말에 나온 책 중에 정인돈의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연구>(동인, 2005)가 눈에 띄었다. 이때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1797-1851)가 아니라 저명한 낭만주의 시인인, 그녀의 남편 P. B.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이다. 메리 셸리가 평생 천재시인이었던 남편의 그늘에서 살아야했던 걸 생각해보면, '셸리'의 유명세가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렇듯 역전돼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이 셸리의 서사시 중에 'Prometheus unbound'(1820)가 있는데, 오래전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들은 과목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주제로 한 비교문학 강의이었고 그때 읽어본 기억이 있다. 의당 기말 페이퍼에서도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었고. 생각이 난 김에 그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란 글에서 한 대목 가져와 약간의 첨삭을 거쳐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뒷부분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대한 언급도 있다(각주는 모두 생략한다).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연구>는 아직 실물도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구해서 한번 읽어보도록 할 작정이다. 아쉬운 것은 셸리의 이 작품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혹 연구서에 '부록'으로라도 실려 있을까?). '밑 빠진 연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모양은 좀 덜 난다. 그럼 점에서, 얼마전 최부의 <표해록> 연구서와 역주서를 함께 낸 박원호 교수의 작업이 더 빛이 나며 의미가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신화소는 물론 ‘프로메테우스’라는 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의 반항적/박애적 행위(=불을 훔침)와 그에 따른 징벌/고통(=간을 쪼임)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이 신화의 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그는 불을 훔친 죄로 제우스의 벌을 발아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결박되어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한다). 이 가계의 이야기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프로메테우스’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은 ‘직계-이야기’로, 그밖에 몇몇 신화소나 모티브에 의해 ‘프로메테우스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은 ‘방계-이야기’로 우리는 부를 것이다. 생긴 구석들이 제각각인 이 방계-이야기들을 그래도 묶어주는 것은 일종의 가족유사성일 테다.

하여간에 발가락이라도 닮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들을 모두 긁어 모으자면 한이 없을 것이고, 얼굴이라도 제법 닮은 구석이 있는 이야기들만을 우리는 쫒아가게 될 것인데(*이 '이야기들'이 글의 다른 꼭지들이지만 여기서는 셸리 이야기만을 옮겨놓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건너뛰어서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혹은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를 만나보기로 한다. 예의상 먼저 잠시 괴테를 접견한 이후에 말이다.

 

 

 

 

괴테(1749-1832)의 <프로메테우스>(1774)는 그가 25세 때 쓴 시로서 찬가(Hymnen)로 분류된다(내가 참조한 건 조창섭 편역, <시인의 노래: 독일 고전주의 문호들의 시와 삶>(서울대출판부, 1994)이다). 물론 제우스에 대한 찬가는 아니고 당연히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찬가이다. 이것은 본래 드라마로 창작하려던 것이었으나 드라마로는 단편에 머물렀고 시로서는 완성을 본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제우스에 대항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다. 그는 제우스신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감사할 만한 어떤 은혜도 신으로부터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댈 숭배하라고? 뭣 때문에?/ 그대 언젠가 무거운 짐진 자의/ 고통을 덜어준 일이 있었던가?/ 그대 언젠가 불안에 떨고 있는 자의/ 눈물을 훔쳐준 일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그는 ‘가련한 자’로 신들을 몰아치면서 도전적으로 말한다(<시와 진실>에서 괴테는 이 시는 ‘폭발의 도화약’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신의 땅과 오두막과 부뚜막(화덕)을 건드리지 말라고(“부뚜막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그대는 그리워하겠지.”). 프로메테우스적인 반항과 도전의 정신으로 충만한 이 시는 그리하여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 여기에 앉아, 내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지니라/ 나와 꼭 같은 종족을/ 괴로워하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되/ 나처럼/ 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리라!”

괴테의 이 시 또한 신화 일반의 전용이 그러하듯이 일단 당대성의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그는 여기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가지고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질서와 몰락해 가는 기존 사회질서와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에게서 프로메테우스는 18세기의 시민적인 자의식의 상징이자 그때까지 종교적으로만 이해되어 온 창조의 개념을 세속화시키는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나 여기에 앉아, 내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지니라”).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신들을 쓰러뜨려 버리는 프로메테우스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압제 정치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는 자의식으로 무장된 천재, 즉 자조자(Selbsthelfer)가 되는 것이다.”

질풍노도기에 통용된 자조자의 개념은 기존의 상황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사회변혁을 실현할 수단이나 자신이 감행하는 투쟁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지 못한 채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항자를 뜻했다고 하는데, 괴테는 거기에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적 형상을 ‘자조자’에 투사함으로써이다. 이 시에서의 ‘오두막’은 시민(과 민중)의 삶의 터전이며 독립과 자립을 상징한다. 결국 이 시를 통해 “괴테는 왕권과 교권이 봉건 체제를 유지하는 보완적 관계에 있는 권력임을 폭로하고 낡은 상황을 변화시켜 새로운 질서를 관철시키는 것이 인간의 소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괴테의 프로메테우스 이해와 전용은 당대 진보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이 가졌던 세계관의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세계관은 프랑스 혁명(1789년)을 통해 곧 극적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바야흐로 장기 19세기 ‘부르주아의 시대’(홉스봄의 규정)가 열리게 되는 것이고, 이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현실에서의 그러한 급격한 사회변동과 가치의 전도를 정당화하는 고대 그리스의 예언(fore-thought)의 목소리로 새롭게 자리매김된다.



P. B.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1818-19) 또한 그러한 맥락의 연속선상에서 조명될 수 있다. 셸리의 이 극은 아이스킬로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가 악과 완고의 상징인 주피터(=제우스)에 의해 신에 대항한 죄로 바위에 묶이게 된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인 대지의 지지와 자연의 정령인 그의 애인 아시아의 사랑에 의해 버티고 있다. 주피터는 원초적인 힘인 데모고르곤(=운명,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 전복되고, 프로메테우스는 힘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에 의해 구속에서 벗어난다. 이어서 사랑의 주제가 뒤따른다. 왕좌, 제단, 감옥, 재판관석은 지나간 유물이 되고 모든 인간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해방’이다. 즉 셸리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그리고 해방, 그리고 새로운 인간/세계 창조의 비전이다. 당대의 현실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4막으로 된 이 서정 시극은 이 시의 서론에서 논의된 사회개혁을 주도하는 시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사회 개혁자로서의 시인 셸리의 열망과 모순들이 모두 나타난 신화극이며 정치 우화이다.”(정정호)

 

 


 

우리가 보기에, 이 셸리의 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제우스/프로메테우스 간의 가치전도를 또 다르게 변형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와, 존 밀턴(1608-74)이 <실락원>(1667)에서 하나님을 압제자로 보고 사탄을 그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본 견해를 접목시킨다. 이럴 경우, 그리스의 신화(mythology)와 기독교의 신학(theology)이 접합되면서 보다 복잡하면서도 이중적인 성격의 프로메테우스 상이 조형된다. 아래의 표를 보라.


             그리스신화(헬레니즘)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
최고신    제우스/주피터                 하나님/그리스도
반항자    프로메테우스                  사탄/악마

그리스 신화(헬레니즘)의 제우스/주피터는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에서 하나님/그리스도에 대응하고7) 프로메테우스는 사탄에 대응하지만 가치론적 위계에 있어서 이들은 결코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비록 <실락원>과 같은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가치전도가 있기는 하지만, 헤브라이즘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의 가치론적 위계는 헬레니즘의 그것과 비교할 때, 너무도 확고하며 견고한 것이다. 즉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 이행한 헬레니즘에서의 가치전도가 헤브라이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듯 상반된 가치론적 형상을 가진 두 존재를 반항자라는 성격에만 초점을 맞추어 동일시하게 되면[프로메테우스(+)=사탄(-)], 거기에 긴장과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헬레니즘에서는 반신(半神)적 존재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했지만(제우스신은 여자인 판도라를 창조), 헤브라이즘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이때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동일시하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창조한 것이 되며, 이것은 헤브라이즘에서 중대한 신성모독이 된다.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셸리의 경우는 자신을 시(=상상력)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는 창조자로 자임하였을 수 있다. 4막에서 정령들이 이렇게 합창하는 대목처럼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인간세상에서/ 우리의 계획을 실현시킬 거야./ 그리고 우리의 작품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라 불릴 거야.”("We will take our plan/ From the new world of man/ And our work shall be called the Promethean."; 156-8행) 여기서 의미 깊은 것은 셸리를 비롯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새로운 인간’(혹은 ‘새로운 삶’)에의 비전이다. 이것이 ‘과도함’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 시인 자신에게로 향하게 될 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사회정치적 현실이라는 권력투쟁의 장으로부터 한 개인의 내면이라는 축소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이제 한 개인의 내면의 드라마가 된 것이다.

물론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부터도 이런 내면의 드라마로 읽을 수 있다. 즉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에 인간이 갖는 동물성과 영혼의 갈등, 폭력과 설득력의 갈등, 그리고 힘과 지성의 대립 등이 내포되어 있는 걸로 보면서,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정반대되는 양면,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정신의 세계와 야수적 힘의 세계를 그린 상징극으로 그의 비극을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아주 많이 ‘현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 카뮈는 희랍인들이 아무것도 극단화시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반항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희랍인들은 확실히, 과도함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과도함을 묘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제자리를 부여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에 하나의 한계를 부여한다.” 이때 ‘과도함’이란 것은 내면의 드라마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면, 그 조건은 18세기 후반 이후 낭만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제값의 규모를 가지게 된다고 우리는 본다.

요컨대,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문제되는 것은 첫째, 그가 프로메테우스를 사탄과 동일시함으로써 또 한번의 가치전도를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가져왔다는 것이고, 둘째,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을 한 개인(=시인)의 내적 드라마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 내적 드라마는 ‘정치 우화’적 성격을 겸하고 있다. 즉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정치적 희원이 적극적으로 시화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주피터를 전복시킨 데모고르곤이 새로운 세계의 구성원칙, 제시하는 “부드러움, 미덕, 지혜와 인내”(4막 562행)는 ‘힘’과 ‘폭력’에 기반한 제우스의 구시대적 지배원칙과 대비되는 정치적 이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인간에의 희원과 맞물린다.


 

 

 

 

거듭 말하자면, 시인은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빚어내는 창조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셸리의 창조자로서의 시인의 형상이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결합한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문득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는가?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프로메테우적 인간(=시인)의 창조라는 것은 분명 헤브라이즘적 전통에서 보자면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고, 요망하기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불길한 예감을 셸리와 같은 방을 썼던 그의 두 번째 아내 M. 셸리(1797-1851)는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쓴 <프랑켄슈타인>(1818) 속에서 그려보이고 있다(이 책의 초판 서문은 남편 셸리가 썼다).



‘현대판 프로메테우스’(The Modern Prometheus)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최초의 과학소설’의 주된 테마는 한 과학자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생명을 불어넣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자기 자신이 파멸당한다는 것이다. 젊고 야심 많은 과학자인 프랑켄슈타인은 인류에게 숭앙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집착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연구에 몰두하여 결국에는 조각난 신체부분들에 전기불꽃을 주입하여 생명체를 만들어내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아내마저 희생되고야 만다.

이 프랑켄슈타인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끌어오고 있는 것은 한 영웅의 인간 창조와 그로 인한 주변의 평범한 인간들의 피해라는 신화소이다. 어쩌면 작가인 메리 셸리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견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 이 작품은 그녀의 아버지 고드윈이나 남편 셸리가 추구했던 당시의 급진적 이상주의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흔히 상상을 통한 인간정신의 고양이라든가, 상상을 통하여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소위 낭만주의 신화의 허구성을 그녀는 과감히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적으로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고드윈이나 셸리와의 가족관계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경험했던 여성의 관점으로 얻어낸 것이다.”

실제로 10대에 유부남 젊은 시인을 따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며,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아이를 두고 그 중 셋을 잃었던 메리 셸리는 천재 시인이었지만 오만한 남편에게서 지식인의 이면을 목격하고 이념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직접 체험했다. 그런 그녀의 <프랑켄슈타인>은 프로메테우스라는 헬레니즘 ‘영웅신화’의 이면을 밝혀내면서(프로메테우스=사탄), 그것의 폐해를 헤브라이즘적인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인간을 창조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생명의 불이 아니라 재앙의 불이 된다.

 

 

 

 

그리고 이 재앙의 불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세계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아넣었던 진짜 현대의 ‘프랑켄슈타인’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프로메테우스주의, 즉 그의 나치즘이고 그의 아리안주의이다. 그는 <나의 투쟁>(1925-27)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까지 인간이 이룩한 문화, 즉 예술과 과학과 기술의 성과는 거의 예외없이 아리안족의 창조적 산물이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아리안족이야말로 고등 인류의 창시자이며,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라는 단어로 이해하는 원형이라는 추론은 지극히 정당하다. 아리안족은 인류의 프로메테우스이다. 그의 빛나는 이마에서 신성한 불꽃이 튀어 온 시대로 두루 퍼져 나갔으며, 침묵하는 비밀로 가득한 밤을 인식으로 환하게 밝히고, 그리하여 인간이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하는 불을 거듭 새롭게 점화시켰다. 따라서 아리안족이 사라지게 된다면, 불과 몇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칠흑 같은 어둠이 지상을 뒤덮을 것이며, 인간의 문명은 소실되고 세계는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아리안족은 “빛을 가져오는 자”이며 그밖의 무의미한 종족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자이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마니교와 그노시스파의 우주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싸움에서 밝음과 어둠의 이분법을 빌려와, 아리안족이라는 빛의 형상과 루시퍼라는 어둠의 형상을 대립시킨다. 히틀러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한 영웅(=아리안족)의 인간 창조라는 신화소를 가져오지만, 그러한 행위가 치러야 하는 고통스런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의 프로메테우스는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신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유해한 박테리아”(=유태인)들과 대적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새로운 인간 창조에 있다: “국가 사회주의를 단지 정치적 운동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는 종교 이상의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는 새로운 인간 창조의 의지이다.”



“순수한 양심”과 “보다 높은 명령”(한나 아렌트)에 따라 인종 청소와 살육을 주저없이 감행한 히틀러와 그의 나치즘(국가 사회주의)에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이런 식으로 악의 형이상학으로 전용/남용되며, ‘프로메테우스=사탄’적 형상의 극한을 보여주게 된다. 프로메테우스 시인 셸리가 자신의 가족과 주변 몇 사람을 고생시킨 데 반해, 프로메테우스 정치가 히틀러는 수백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프로메테우스는 반(反)영웅, 반(反)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종결되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전체의 이익, 인류의 이익을 표면에 내세울 때, 우리는 언제나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러한 ‘전체(주의)’의 이념이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또 다른 폭력과 재앙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폭력과 재앙은 프로-메테우스(fore-thought)란 이름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적인 영웅은 모든 미래에 대해서 마치 자신의 손금처럼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이 예견하고 있는 운명에 따라 미리 앞당겨 판단하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불확실성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대화나 타협은 그에게서 불필요하다. 그런 대화나 타협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의 가치 배당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몫이 얼마나 떨어질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이것저것 견주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언제라도 자신의 생각이 모자랄 수 있음을 승인할 때에만, 우리는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서로의 이익을 조금씩 양보하는 가운데 제 3의 길을 찾는 것이다.


 

 

 


‘과도함’이 없었던 그리스인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는 아직 그러한 화해의 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화해는 오직 제우스의 몰락 이후에야 가능하다. 이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영웅에 의한 일종의 ‘개벽신화’로 탈바꿈한다(*작년말에 재출간된, 마르크스와 그의 시대에 관한 벽화적 전기소설 <프로메테우스>(들녘, 2005)를 쓴 러시아 작가 갈리나 세레브랴코바가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개벽'일까?).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바로 히틀러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해서,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두 얼굴의 불이다).

06.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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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스킬로스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6 13:50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
 
 
비로그인 2009-02-11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 뒤늦게 발견하고 담아갑니다.

로쟈 2009-02-12 09:31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랜만에 보는 글이네요.^^

42zone 2019-01-1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샘. 구로쪽에서도 강의 좀 개설해주세요.ㅠ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를 향한 욕망>(다산글방, 2001)은 최적의 레비나스 입문서이자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책은 Colin Davis의 원저 'Levinas: An Introduction'(Polity Press, 1996)이다. 레비나스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을 나는 20여 권 이상 갖고 있는 듯한데, 데이비스의 책은 드물게도 내가 완독한 거의 유일한 책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레비나스에 대한 나의 이해의 절반 이상은 이 책의 완독에 힘입은 것이다(나머지는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와 여러 한국어 논문들이 채워주고 있다).

그때가 1999년 1월이었고 나는 160쪽 정도의 이 원서를 일주일 정도 걸려서 아주 '맛있게' 읽었던 듯하다. 하니, 이 책의 국역본 출간은 나로선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책은 바로 사지 않았었는데, 그건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서야 국역본을 구입한 건 순전히 '레비나스 컬렉션'을 위해서였다. 이번에 다시금 이 책을 읽고 있는데(나는 '현상학'에 관한 1장을 읽었다) 여전히 만족스러우며 (과문한 탓이긴 하지만) 이만한 분량에 이보다 더 좋은 입문서는 없어 보인다. 단, 국역본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드문드문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다소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다른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유익한 입문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가 오역이라고 보는 부분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견해를 보태고자 한다. 그러니까 약간의 때를 벗겨냄으로써 충분히 '재활용' 혹은 '인용' 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인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번역서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이다. 국역본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읽을 만한 책이지만 인용시에는 주의가 요구되는 책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책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레비나스에 관심있는 독자들이 보다 많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데이비스의 책은  폴리티출판사의 '우리시대의 핵심 사상가들(Key Contemporary Thinkers)' 시리즈의 한 권으로 나온 것인데, 같은 시리즈의 책들로 국역본이 나와 있는 것으로는 조지아 원키의 <가다머>(민음사, 1999)와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 그리고 숀 호머의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 2002) 등이 있다(분량과 내용 면에서 권장할 만한 시리즈이기에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싶다). 이 중 번역이 가장 좋은 것은 <가다머>이다.

일단 서론으로 들어가보자. "단순하지만 광범위한 생각, 곧 서구 철학은 지속적으로 타자(the Other)를 억압해 왔다는 생각이 레비나스의 사상을 지배한다."(9쪽) 단순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바로 이 타자에 관한 철학이며, 이를 통해서 서양철학의 패러다임을 '동일자의 존재론'에서 '타자의 윤리학'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거시적인 프로그램이다. 이 "레비나스 윤리가 현대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타자성이라는 문제에 던지는 중대한 역할 때문이다."(12쪽) 한편으로 레비나스의 동일자/타자 구도는 벵상 데콩브의 프랑스 현대철학사 <동일자와 타자>(인간사랑, 1990)의 표제가 말해주듯이, 현대철학의 핵심구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적 의미에서의 윤리(학)란 무엇인가? 교과서적인 윤리학 책들을 몇 권 이미지로 나열했지만, 짐작에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다루어지고 있는 윤리학 개론서는 없다. 특히나 영미적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콜린 데이비스의 설명을 따라가자면, "레비나스는 도덕 행위를 위한 규범이나 잣대를 세우는 데 관심이 없으며 윤리적 언어의 본질이나 잘 살 수 있는 조건들을 연구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13쪽) 한데, 영미적 전통에서는 바로 그러한 것이 윤리학의 영역 아닌가.

해서 "거의 모든 맥락에서 레비나스가 쓰는 프랑스어 l'ethique를 '윤리(ethics)'보다는 '윤리적인 것(the ethical)'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윤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더욱 제한된 의미에서 정치와 구별되는)과 같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소외시킬 수 없는 영역을 뜻한다."

원문은 "In most contexts, the French word used by Levinas, l'ehique, might just as well be translated by 'the ethical' as by 'ethics'; and the ethical, like the political (as distinct from politics in the more restricted sense), refer to a domain from which nothing human may be excluded."(3쪽)

뒷문장을 다시 옮기면, "윤리적인 것은,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정치'와는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것은 어떠한 것도 배제되지 않는 영역을 가리킨다."

요컨대, '제1철학'으로서의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모든 인간의 근간이며,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포섭한다. 분량상, 이 '입문'은 몇 차례로 나누어야 할 듯하다. 다음번에는 '현상학을 넘어서'란 주제가 될 것이다.

06. 02. 20-22. 

P.S. 'Emmanuel Levinas'는 '에마뉘엘 레비나스'라고 읽어주는 게 현지음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건 강영안, 서동욱 교수 등의 최근 표기를 보아 짐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강영안 교수조차도 <시간과 타자> 등을 번역/소개할 당시에 '엠마누엘 레비나스'로 표기했다(그 책에서 '베르그송'은 '베르크손'으로 표기됐다가 이번에 나온 <타자의 얼굴>에서는 '베르그손'으로 수정됐다). 번번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현지음'이란 건 표기의 고려사항이지 절대적인 표기원칙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에마뉘엘'이란 이름에는 우리에게 보단 친숙한 '엠마누엘'이 갖는 성서적/문화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지 않다. 나는 그런 의미의 '두께'를 얄팍한 '현지음'에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학술논문에서나 써주면 될 것이다).

더구나 '엠마누엘'은 우리의 '마담 엘마누엘'도 환기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불경스럽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레비나스에 대해서 별로 읽어본 바가 없다는 뜻이다. '애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절절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 또한 <시간과 타자>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에만 있는 것이지만,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부제는 '타자를 향한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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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 2006-04-1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알게된 공간입니다. 너무 재밌어서 몇시간째 님이 쓰신 글들을 읽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음...엠마누엘레비나스의 부제인 '타자를 향한 욕망'에서의 욕망은 그 욕망이 아닌것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비로그인 2008-06-1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은 사려고 하지 않았는데, 결국은 사게 되버린 책입니다. 지난주에 주문해서 오늘 받았는데, <사랑의 지혜>를 오늘 다 읽었고 이제는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읽으려고 합니다. 로쟈님 페이퍼에 실린 이 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데요. 바쁘신 와중이란 것 얼핏 간추려 짐작은 하지만서도.. 시간 짬이 나고 기억이 나실 때, 관련 페이퍼를 더 올려주실 수 없나요?^^ 꼼꼼히 대조해보거나 깊이 한권을 파고 드는 독서를 잘 못하지만, 사소한 것에서 의외의 큰 도움을 얻는다고.. 로쟈님의 페이퍼를 통해 좀 더 비판적인 독서가가 됩니다.
 

 

원저가 1984년에 나온 <예술사회(The Art Circle)>(문학과지성사, 1998)는 <미학입문>(1971)과 <예술과 미적인 것>(1974)에 이어서 번역된 미국의 예술철학자 조지 디키의 최근작이다. 뒤엣책들은 각각 <미학입문: 분석철학과 미학>(서광사, 1981), <현대미학: 예술과 미적 대상의 분석>(서광사, 1985)로 번역돼 있는데, <예술사회>는 특히 <예술과 미적인 것>(<현대미학>)에서 그가 제기한 '제도론적 예술'론을 수정/보완한 것이다(제도론적 예술론에 대한 개관과 비판은 박이문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1984)을 참조할 수 있다).  

제1장의 서론에서 디키는 자신이 <예술과 미적인 것>에서 개진한 바 있는 제도론적 예술론을 어떻게 수정/보완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제2장에서는 실질적으로 그가 그러한 예술론에 대한 발상을 얻은, 하지만 다소간 의견차이를 노출하게 되는, 아서 단토의 '예술계'론과 자신의 입론을 비교검토한다. 참고로, 19쪽에서 언급되는 '톰 월프의 <그림언어(The Painted Word)>(1975)'는 '톰 울프'의 <현대미술의 상실>(열화당, 1976; 아트북스, 2003)로 번역돼 있는 책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제2장에서 디키가 검토하고 있는 단토의 논문은 '예술계'(1964), '예술작품과 실재적 사물들'(1973), '일상적인 것들의 변용'(1974) 세 편이다. 그는 이 논문들을 차례대로 검토해나가는데, 그가 지적하는바, '예술계'에서 단토는 예술에 대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견해를 최근의 '반예술 이론가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단토는 우리가 '예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고 예술을 제대로 식별한다는 견해를 모리스 와이츠 같은 최근의 반예술 이론가들이 나눠 갖고 있다고 본다."(30쪽)

국역본에는 이 문장의 바로 앞 문장이 누락돼 있는데, 그 내용은 "I shall not concern myself with the question of whether these views are actually attributable to Socrates or Plato."이다. 그러니까 단토가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예술론이라고 제시하는 견해가 실제로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에게 귀속될 수 있는 견해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는 것(그래서 역자도 빼놓은 것일까?). 더불어 '반예술 이론가들'이란  'anti-theorists of art'의 역어인데, '예술이론의 반대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명료하지 않을까 한다('반예술'에 대한 이론가들이란 뜻이 아니므로).

디키가 요약하는바, 단토는 그렇듯 우리가 예술작품들을 식별해낼 수 있다는 견해("예술인지 아닌지는 보면 안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단토의 주장은 이렇다: (1)예술이론들이 우리로 하여금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을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인식론적 주장. (2)예술이론들이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는 존재론적 주장. 이하의 내용에서 역자는 'identify artworks' 란 표현을 모두 '예술작품을 동일시하다'는 식으로 옮겼는데, '예술작품을 식별하다'라고 해야 한다.

"단토는 과거에 모방론이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어쩌면 모방론은 예술이 곧 모방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방이 아닌 어떤 것을 대면했을 경우, 그들은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그리고 만일 그들이 모방인 어떤 것을 대면했다면 그들은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30-1쪽) 병렬적인 구문인데, 곰곰히 읽어보면, 강조한 대목이 오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예술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모방론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척 보고서 모방이면 예술이고, 모방이 아니면 예술이 아니라고 식별/판정했을 거라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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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도서관 2006-04-03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역자 분이 톰 월프의 (1975)를 <그림언어>로 옮기셨다는데, 제 생각에, <그려진 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합할 것 같네요.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사용하는 이론을 의미하는 바- Word라는 단어는 신학적 메타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은유적 단어를 차용함으로써, 월프는 그 이론들의 정전화 현상을 꼬집고 있는 것일 테지요.

2006-04-03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4-0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가 없는 탓에 미뤄지고 있는 글인데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월프의 책은 저도 완독한 게 아니고 그린버그에 관한 내용만 봤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신학적 메타포'라는 건 일리가 있는 의견이십니다. '기독교적 맥락'인지는 불확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