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의 또다른 꼭지이다(본론의 마지막 꼭지쯤 된다). 앙드레 지드와 윤동주에 관한 것인데, 나중에 지드론이나 윤동주론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언제?

우리에게 아직 남은 다른 얘기는 고리키의 문우였던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1869-1951)의 얘기이다. 그가 30세에 발표한 <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1899)가 우리가 다루게 될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이다(작품은 <앙드레 지드 전집>(전5권, 미문출판사, 1969)에 수록돼 있다). 제목에서부터 프로메테우스를 명시하고 있으니까, 고리키의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관점에서 볼 때 방계-이야기였다면, 지드의 그것은 직계-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아니라 우화적 소설인 이 작품은 1890년대 파리의 한 다방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제우스(=죄스)는 부유한 은행가(!)로 등장하고, 프로메테우스(=프로메떼)는 무면허 성냥 제조 혐의로 구속된다. 이야기의 발단은 대부호인 제우스가 아무런 이유없이 한 사람(꼬클레스)의 따귀를 때리고 다른 한 사람(다모클레스)에게는 500프랑의 돈을 익명으로 부친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무상의 행위, 즉 아무런 동기나 이유를 갖지 않는 행위는 지드 문학의 중요한 테마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행위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것이라 말해진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신과 인간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기준이다. 백만장자인 제우스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이, 즉 무한한 재산을 갖고 있는 자만이 절대로 이해관계 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오. 인간은 할 수 없어요. 거기에서부터 나의 장난에 대한 사랑이 생겨났오.”(109쪽) 그의 바로 그러한 장난에 꼬클레스와 다모클레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연관되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독수리(=수리)를 데리고 다니는데, 이 독수리는 그의 양심의 상징이다. 감옥에서 밤낮으로 뜯기면서 독수리는 살찌는 대신에 그는 점점 말라간다. 이윽고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 대하여’란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게 되고, 저마다 자신의 독수리를 가져야 하며 독수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독수리(=양심)에 관한 강의를 들은 다모클레스는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500프랑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병이 들고 결국엔 죽고 만다. 다모클레스의 장례식에 뚱뚱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나타난 프로메테우스가 다모클레스의 죽음 덕분에 자신의 독수리를 죽였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함께 독수리 요리를 맛있게 먹는 걸로 이야기는 마감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징벌/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지드판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양심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독수리이다. 지드에 의하면, 우리가 받는 양심의 고통은 신들의 장난(무상적 행위)에 기인한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러한 양심을 살찌우는 것은 자학적인 나르시시즘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양심인 독수리를 죽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그는 진정으로 해방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로메테우스는 애초부터 사슬에 결박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제우스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그저 양심의 가책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란 것은 혹 그런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드에게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더 이상 영웅신화가 아니며 개벽신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mal) 신화이며, 우리가 유쾌한 기분으로 먹어치워야 할 신화이다. 프로메테우스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둡시다.”(116쪽) 자신을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로 자처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자들을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라면 조용히 입다물고 우리와 함께 맛있는 독수리 요리나 먹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아래 사진은 독역본.

그런 의미에서 지드의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해방, 즉 소멸을 예비하고 있다. 그는 영웅신화나 개벽신화로서의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가지고 있는 해악을 19세기의 끄트머리에서 이미 경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20세기의 독일과 러시아의 프로메테우스들은 자신들이 결국엔 에피메테우스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까지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그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는 삶은 프로메테우스 없는 삶, 즉 역설적으로 아무런 가르침이 없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영웅적인 행위에 대한 강박관념과 양심의 가책에 의한 구속으로부터의 해방된 삶이다.

이걸 무신론적 프로메테우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고리키의 사회주의적 프로메테우스와 대비하여 무정부(주의)적 프로메테우스라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은 둘 다 동시대의 인류에게 자유와 진실을 전해주고자 한 것이지만, 서로의 방식은 너무나도 대비된다. 우리가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어디쯤에서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차면 넘친다는 지혜를 한 사람은 잠시 잊고 있는 듯하다(러시아는 프랑스에 비해 아직 젊은 나라였다!).

 

 

 


한편 이 무신론적 프로메테우스가 기독교 신학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우리는 한 젊은 시인의 ‘고백’과 만날 필요가 있다. 반갑게도 이 젊은 시인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는 바로 윤동주(1917-45)이다. 한국문학의 경우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직계-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매우 드문데, 그의 시 <간(肝)>(1941)은 예외적이면서도 아주 순도 높은 경우이다. 먼저 잘 알려진 시이지만, 시의 전문을 여기에 옮겨본다.

1.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2.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3.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4.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5.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6.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7. 너는 살찌고
8.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9. 거북이야!
10.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11.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12.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13.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먼저 이 시의 창작배경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윤동주는 자선시집에 실릴 19편 가운데 맨마지막인 <별 헤는 밤>을 1941년 11월 5일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에 썼다. 원래 그의 시집은 ‘병원’이란 제목이 붙여질 예정이었으나 <서시>를 쓴 이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뀐다. 그러나 그의 시고(詩稿)를 받아본 이양하 선생은 몇 편의 시가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더러 신변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충고하여 윤동주는 시집출판을 단념한다. 11월 29일자로 씌어진 그의 시 <간>은 “발표와 출판의 자유를 빼앗긴 지성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1942년 1월 24일 <참회록>을 쓴다(그의 시집은 그가 죽은 후인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윤동주의 시 가운데 “보기 드물게 대륙적인 기풍을 가지고 있[는]”(김흥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이 시는 전래의 토끼설화(귀토설화)와 서양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접합한 것으로서 이 두 의미체계가 ‘간’을 접점으로 하여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이에 대한 몇몇 연구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A) 비록 궁지에 몰린 약자지만 슬기롭게 자기(肝)를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되어 묵묵히 인고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속성은 바로 윤동주의 그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다 적극적/투쟁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인 저항방식에서 유발되는 자책감과 울분을 스스로 프로메테우스처럼 속죄양 의식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윤동주의 내면의식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토끼”와 “프로메테우스”는 윤동주의 저항 의식의 특징이 잘 반영된 자기-동일시의 표상인 것으로 해석된다.(김재홍)

(B) 화자(토끼로 형상화된 자신)는 “독수리”를 길렀으며, 자기 간을 뜯어먹도록 요구한다. 이때 “독수리”는 화자의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생명(간)을 쪼아내며 스스로에게 아픔을 주는 자아의 예리한 의식이다. 자신의 삶을 쪼아내는 자아의 의식활동이 치열한 아픔을 주지만, 그는 안식이 아니라 고통을 선택한다. 오히려 고통을 주는 반성적 의식이 살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토끼설화의 맥락이 의미 깊게 되살아난다. 그는 어떤 초월적 희망도 인간을 구제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고, ‘지금-여기(갈등의 현실세계)’에서의 고통스런 자기응시와 긴장을 선택한다. 이러한 의지는 고유한 의미에서 비극적인 인간상이며, 마지막 연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하게 된다.(김흥규)

(C) 그러면 ‘목에 맷돌을 단 프로메테우스’는 누구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윤동주 자신이다. 윤동주는 자기 동일성으로 이 프로메테우스를 택했다. 자기 희생적 인간, 고통을 감내하며 제우스에 대항하는 저항적 인간, 그는 이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이 시에서) ‘간’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간을 말리고 그 간을 지켜 지배층 세계와 대응의 자세를 취하려는 토끼의 저항정신의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고통을 당하며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정신의 측면이다. 윤동주는 <토끼전>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란 두 고전을 차용하여 저항과 희생이란 이질적인 정신적 지향을 무리없이 해냈다.(박호영)

조금 무리해서 말하자면, (A)는 프로메테우스의 속죄양 의식을, (B)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스런 자기응시를, (C)는 저항과 희생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질적인 정신적 지향을 각각 지목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연구들에서는 이 시 <간>의 3-4연(“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에서 제시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이 그리스 신화 속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형상이라는 것에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도 셸리의 프로메테우스도 아니며,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바로 지드의 프로메테우스이다.

단, 지드의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양심의 투사(投射)였던 독수리를 죽임으로써 일종의 카니발적 결말을 유도하는 것과는 달리, 프로메테우스-윤동주는 독수리의 부리처럼 ‘예리한’ 자아의식과의 긴장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음으로써 내면으로의 “끝없는 침잠”을 감내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윤동주다운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시 <간>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한다.

먼저 이 시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2-4연)를 감싸고 있는 1연과 4연은 토끼설화의 결말부분이다. 이 설화에서의 간은 생명을 뜻한다. 그것은 용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토끼의 간이 요구된 것에서 바로 알 수 있다. ‘용궁’이나 ‘용왕’이라는 것은 우리 전래의 상상력 속에서 어떤 이상적 공간이다. 즉 지상의 현실과 대비되는 꿈의 공간이다. ‘거북이’(혹은 자라)의 유혹에 이끌려 그만 죽을 뻔했다가 겨우 자신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 토끼는 이제 그러한 꿈의 허실을 깨닫게 된 토끼이다. 그것이 5연의 내용이다: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이러한 토끼의 결의는 당차 보이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씁쓸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은 고통스럽더라도 오직 지상의 삶만이 유일한 현실로서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그것은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의, 결국엔 그 고통을 길들인 프로메테우스의 현실이다. 자신의 유일한 삶, 유일한 생명(=간)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서는 우리가 타협하거나 희생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가령, 윤동주의 경우에 시집출간이 좌절된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양심, 즉 예민한 자기의식을 가진 시인에게서 그러한 타협/희생은 자신의 간을 쪼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이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에도 괴로워하지 않았던가!그런 시인의 의식을 대변하는 존재로서의 프로메테우스가 지드의 프로메테우스를 따르고 있는 것은 따라서 자연스럽다.

2연의 3행은 1연의 토끼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접합되는 지점이다.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은 본래 “코카서스 산정(山頂)에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처럼” 정도의 뜻이 토끼설화로 변형된 형태이다. 이 변형을 통해 ‘코카서스=용궁’, ‘프로메테우스=토끼’라는 두 가지 동일화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바톤은 이제 토끼에서 프로메테우스에게로 넘겨진다. 그리고 이 프로메테우스-시인은 4연에서, 자신이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에게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분명 저항적이면서 체념적/희생적이다. 가장 ‘남성적인 톤’의 시에서조차 “지극히 서정적[인] 인간”(이건청)으로서의 여린 모습을 다 가리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8행) 하여간에 시인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결코 도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으로도 “아픔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해내고 있는 이 시는 양심의 수난자로서의 윤동주의 정신의 궤적을 보여준다.”라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의 주제에 또 다른 차원을 부여해주고 있는 마지막 6연이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여기서 “목에 맷돌을 달고”라는 표현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태복음, 18:6) 마광수는 이러한 표현을 예수의 이 산상설교 부분과 관련지어 해석하는데, 순진한 어린아이를 꾀어 죄에 빠뜨리는 자는 아예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빠뜨리는 게 낫다”는 설교의 내용과 비교하여 보면, 불을 모르던 인류는 ‘어린이’처럼 순진했으며 그 어린이에게 불을 가르쳐 준 자가 프로메테우스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으로부터의 이러한 인용(인유)을 통해 윤동주는 “불[을] 도적한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목에 맷돌을 달고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라는 다소 부정적인 기독교 신학의 이미지로 대치-변형함으로써 셸리의 경우에서처럼 ‘프로메테우스=사탄’이라는 형상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 가치전도의 방향이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셸리의 프로메테우스(+)가 사탄(-)과 결합되면서 (-)적인 방향으로 점차 기울어간데 반해서, 즉 ‘프로메테우스-사탄’(-)적인 형상인데 반해서(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그런 관점에서 읽었다), 윤동주의 프로메테우스(+)는 사탄(-)을 자기쪽으로 끌어옴으로써 ‘프로메테우스-사탄’(+)적인 형상을 새롭게 조형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는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이때의 그리스도는 부활과 권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자/대속자로서의 그리스도, 고난과 희생의 그리스도이다. 이 새로운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 ‘목에 맷돌을 단 프로메테우스’는 셸리의 프로메테우스-사탄이 가졌던 어떠한 반항적/능동적 영웅주의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더 많이 비극적이다. 운동의 방향에 있어서도 상승/침잠이라는 상반된 성격을 보여준다. 이것을 그림으로 비교해본다.

                          셸리적 프로메테우스-사탄     윤동주적 프로메테우스-그리스도
가치의 전도                 + → -                                          - → +
운동의 방향                        ↑                                                  ↓
정념의 태도               능동적 영웅주의                        수동적 비관주의

프로메테우스는 일반적으로 ‘승화’를 뜻하는 문학적 상징이지만, 윤동주의 <간>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전락’이다. 그리고 고통의 승화가 아니라 고통의 연속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지드의 프로메테우스에서 우리가 본 카니발적 결말과는 또 다른 결말이다.

지드가 독수리를 죽이는 행위를 통해 무신론적(무양심적)인 프로메테우스의 가능성,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해소/해체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면, 윤동주는 이 한 편의 서정시 속에 다시금 기독교 신학을 끌어와서 프로메테우스의 반항정신을 최소화하고 희생정신(=양심)을 극대화함으로써 비영웅적인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를 창조하고 있다. 아니 프로메테우스의 소멸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의 프로메테우스는 끝없이 침전하는 까닭에 그가 구원해야 할 인간들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그를 구원해야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앙드레 지드와 윤동주, 모두에게서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프로메테우스를 찾을 수 없다. 하나는 먹어 치워서 없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침전하는 까닭에 다시 건져올릴 수가 없다. 남아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프로메떼’(지드)의 뼈다귀와 ‘푸로메디어쓰’(윤동주)의 발바닥뿐이다...

06.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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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스킬로스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6 13:50 
    원고 때문에 자료를 찾다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오래 전에 적을 글을 발견했다. 이미 글의 몇 부분을 따로 정리해놓으면서도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은 빼놓았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PC보다는 이 서재가 검색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 참고가 될 만한 분도 계실 듯해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서두의 요약은 폴 디엘의 <그리스 신화의 상징성>(현대미학사, 1997)을 참조한 것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