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를 향한 욕망>(다산글방, 2001)은 최적의 레비나스 입문서이자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책은 Colin Davis의 원저 'Levinas: An Introduction'(Polity Press, 1996)이다. 레비나스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을 나는 20여 권 이상 갖고 있는 듯한데, 데이비스의 책은 드물게도 내가 완독한 거의 유일한 책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레비나스에 대한 나의 이해의 절반 이상은 이 책의 완독에 힘입은 것이다(나머지는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와 여러 한국어 논문들이 채워주고 있다).
그때가 1999년 1월이었고 나는 160쪽 정도의 이 원서를 일주일 정도 걸려서 아주 '맛있게' 읽었던 듯하다. 하니, 이 책의 국역본 출간은 나로선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책은 바로 사지 않았었는데, 그건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서야 국역본을 구입한 건 순전히 '레비나스 컬렉션'을 위해서였다. 이번에 다시금 이 책을 읽고 있는데(나는 '현상학'에 관한 1장을 읽었다) 여전히 만족스러우며 (과문한 탓이긴 하지만) 이만한 분량에 이보다 더 좋은 입문서는 없어 보인다. 단, 국역본은 가독성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드문드문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다소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다른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유익한 입문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가 오역이라고 보는 부분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견해를 보태고자 한다. 그러니까 약간의 때를 벗겨냄으로써 충분히 '재활용' 혹은 '인용' 할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인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번역서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이다. 국역본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읽을 만한 책이지만 인용시에는 주의가 요구되는 책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책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레비나스에 관심있는 독자들이 보다 많이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데이비스의 책은 폴리티출판사의 '우리시대의 핵심 사상가들(Key Contemporary Thinkers)' 시리즈의 한 권으로 나온 것인데, 같은 시리즈의 책들로 국역본이 나와 있는 것으로는 조지아 원키의 <가다머>(민음사, 1999)와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 그리고 숀 호머의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 2002) 등이 있다(분량과 내용 면에서 권장할 만한 시리즈이기에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싶다). 이 중 번역이 가장 좋은 것은 <가다머>이다.
일단 서론으로 들어가보자. "단순하지만 광범위한 생각, 곧 서구 철학은 지속적으로 타자(the Other)를 억압해 왔다는 생각이 레비나스의 사상을 지배한다."(9쪽) 단순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바로 이 타자에 관한 철학이며, 이를 통해서 서양철학의 패러다임을 '동일자의 존재론'에서 '타자의 윤리학'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거시적인 프로그램이다. 이 "레비나스 윤리가 현대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타자성이라는 문제에 던지는 중대한 역할 때문이다."(12쪽) 한편으로 레비나스의 동일자/타자 구도는 벵상 데콩브의 프랑스 현대철학사 <동일자와 타자>(인간사랑, 1990)의 표제가 말해주듯이, 현대철학의 핵심구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적 의미에서의 윤리(학)란 무엇인가? 교과서적인 윤리학 책들을 몇 권 이미지로 나열했지만, 짐작에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다루어지고 있는 윤리학 개론서는 없다. 특히나 영미적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콜린 데이비스의 설명을 따라가자면, "레비나스는 도덕 행위를 위한 규범이나 잣대를 세우는 데 관심이 없으며 윤리적 언어의 본질이나 잘 살 수 있는 조건들을 연구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13쪽) 한데, 영미적 전통에서는 바로 그러한 것이 윤리학의 영역 아닌가.
해서 "거의 모든 맥락에서 레비나스가 쓰는 프랑스어 l'ethique를 '윤리(ethics)'보다는 '윤리적인 것(the ethical)'으로 옮기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윤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더욱 제한된 의미에서 정치와 구별되는)과 같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소외시킬 수 없는 영역을 뜻한다."
원문은 "In most contexts, the French word used by Levinas, l'ehique, might just as well be translated by 'the ethical' as by 'ethics'; and the ethical, like the political (as distinct from politics in the more restricted sense), refer to a domain from which nothing human may be excluded."(3쪽)
뒷문장을 다시 옮기면, "윤리적인 것은,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정치'와는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것은 어떠한 것도 배제되지 않는 영역을 가리킨다."
요컨대, '제1철학'으로서의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모든 인간의 근간이며,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포섭한다. 분량상, 이 '입문'은 몇 차례로 나누어야 할 듯하다. 다음번에는 '현상학을 넘어서'란 주제가 될 것이다.
06. 02. 20-22.
P.S. 'Emmanuel Levinas'는 '에마뉘엘 레비나스'라고 읽어주는 게 현지음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건 강영안, 서동욱 교수 등의 최근 표기를 보아 짐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강영안 교수조차도 <시간과 타자> 등을 번역/소개할 당시에 '엠마누엘 레비나스'로 표기했다(그 책에서 '베르그송'은 '베르크손'으로 표기됐다가 이번에 나온 <타자의 얼굴>에서는 '베르그손'으로 수정됐다). 번번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현지음'이란 건 표기의 고려사항이지 절대적인 표기원칙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에마뉘엘'이란 이름에는 우리에게 보단 친숙한 '엠마누엘'이 갖는 성서적/문화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지 않다. 나는 그런 의미의 '두께'를 얄팍한 '현지음'에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학술논문에서나 써주면 될 것이다).

더구나 '엠마누엘'은 우리의 '마담 엘마누엘'도 환기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불경스럽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레비나스에 대해서 별로 읽어본 바가 없다는 뜻이다. '애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절절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 또한 <시간과 타자>이기 때문이다. 국역본에만 있는 것이지만,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부제는 '타자를 향한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