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말에 나온 책 중에 정인돈의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연구>(동인, 2005)가 눈에 띄었다. 이때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1797-1851)가 아니라 저명한 낭만주의 시인인, 그녀의 남편 P. B.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이다. 메리 셸리가 평생 천재시인이었던 남편의 그늘에서 살아야했던 걸 생각해보면, '셸리'의 유명세가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렇듯 역전돼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이 셸리의 서사시 중에 'Prometheus unbound'(1820)가 있는데, 오래전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들은 과목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주제로 한 비교문학 강의이었고 그때 읽어본 기억이 있다. 의당 기말 페이퍼에서도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었고. 생각이 난 김에 그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란 글에서 한 대목 가져와 약간의 첨삭을 거쳐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뒷부분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대한 언급도 있다(각주는 모두 생략한다).
<셸리의 프로메테우스 연구>는 아직 실물도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구해서 한번 읽어보도록 할 작정이다. 아쉬운 것은 셸리의 이 작품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혹 연구서에 '부록'으로라도 실려 있을까?). '밑 빠진 연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모양은 좀 덜 난다. 그럼 점에서, 얼마전 최부의 <표해록> 연구서와 역주서를 함께 낸 박원호 교수의 작업이 더 빛이 나며 의미가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신화소는 물론 ‘프로메테우스’라는 그의 이름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의 반항적/박애적 행위(=불을 훔침)와 그에 따른 징벌/고통(=간을 쪼임)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이 신화의 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그는 불을 훔친 죄로 제우스의 벌을 발아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결박되어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한다). 이 가계의 이야기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프로메테우스’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은 ‘직계-이야기’로, 그밖에 몇몇 신화소나 모티브에 의해 ‘프로메테우스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은 ‘방계-이야기’로 우리는 부를 것이다. 생긴 구석들이 제각각인 이 방계-이야기들을 그래도 묶어주는 것은 일종의 가족유사성일 테다.
하여간에 발가락이라도 닮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들을 모두 긁어 모으자면 한이 없을 것이고, 얼굴이라도 제법 닮은 구석이 있는 이야기들만을 우리는 쫒아가게 될 것인데(*이 '이야기들'이 글의 다른 꼭지들이지만 여기서는 셸리 이야기만을 옮겨놓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건너뛰어서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혹은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를 만나보기로 한다. 예의상 먼저 잠시 괴테를 접견한 이후에 말이다.
괴테(1749-1832)의 <프로메테우스>(1774)는 그가 25세 때 쓴 시로서 찬가(Hymnen)로 분류된다(내가 참조한 건 조창섭 편역, <시인의 노래: 독일 고전주의 문호들의 시와 삶>(서울대출판부, 1994)이다). 물론 제우스에 대한 찬가는 아니고 당연히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찬가이다. 이것은 본래 드라마로 창작하려던 것이었으나 드라마로는 단편에 머물렀고 시로서는 완성을 본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제우스에 대항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다. 그는 제우스신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감사할 만한 어떤 은혜도 신으로부터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댈 숭배하라고? 뭣 때문에?/ 그대 언젠가 무거운 짐진 자의/ 고통을 덜어준 일이 있었던가?/ 그대 언젠가 불안에 떨고 있는 자의/ 눈물을 훔쳐준 일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그는 ‘가련한 자’로 신들을 몰아치면서 도전적으로 말한다(<시와 진실>에서 괴테는 이 시는 ‘폭발의 도화약’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신의 땅과 오두막과 부뚜막(화덕)을 건드리지 말라고(“부뚜막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그대는 그리워하겠지.”). 프로메테우스적인 반항과 도전의 정신으로 충만한 이 시는 그리하여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 여기에 앉아, 내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지니라/ 나와 꼭 같은 종족을/ 괴로워하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되/ 나처럼/ 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리라!”
괴테의 이 시 또한 신화 일반의 전용이 그러하듯이 일단 당대성의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그는 여기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가지고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질서와 몰락해 가는 기존 사회질서와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에게서 프로메테우스는 18세기의 시민적인 자의식의 상징이자 그때까지 종교적으로만 이해되어 온 창조의 개념을 세속화시키는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나 여기에 앉아, 내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지니라”).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신들을 쓰러뜨려 버리는 프로메테우스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압제 정치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는 자의식으로 무장된 천재, 즉 자조자(Selbsthelfer)가 되는 것이다.”
질풍노도기에 통용된 자조자의 개념은 기존의 상황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사회변혁을 실현할 수단이나 자신이 감행하는 투쟁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지 못한 채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항자를 뜻했다고 하는데, 괴테는 거기에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적 형상을 ‘자조자’에 투사함으로써이다. 이 시에서의 ‘오두막’은 시민(과 민중)의 삶의 터전이며 독립과 자립을 상징한다. 결국 이 시를 통해 “괴테는 왕권과 교권이 봉건 체제를 유지하는 보완적 관계에 있는 권력임을 폭로하고 낡은 상황을 변화시켜 새로운 질서를 관철시키는 것이 인간의 소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괴테의 프로메테우스 이해와 전용은 당대 진보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이 가졌던 세계관의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세계관은 프랑스 혁명(1789년)을 통해 곧 극적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바야흐로 장기 19세기 ‘부르주아의 시대’(홉스봄의 규정)가 열리게 되는 것이고, 이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현실에서의 그러한 급격한 사회변동과 가치의 전도를 정당화하는 고대 그리스의 예언(fore-thought)의 목소리로 새롭게 자리매김된다.
P. B.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1818-19) 또한 그러한 맥락의 연속선상에서 조명될 수 있다. 셸리의 이 극은 아이스킬로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메테우스가 악과 완고의 상징인 주피터(=제우스)에 의해 신에 대항한 죄로 바위에 묶이게 된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인 대지의 지지와 자연의 정령인 그의 애인 아시아의 사랑에 의해 버티고 있다. 주피터는 원초적인 힘인 데모고르곤(=운명,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 전복되고, 프로메테우스는 힘의 상징인 헤라클레스에 의해 구속에서 벗어난다. 이어서 사랑의 주제가 뒤따른다. 왕좌, 제단, 감옥, 재판관석은 지나간 유물이 되고 모든 인간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해방’이다. 즉 셸리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그리고 해방, 그리고 새로운 인간/세계 창조의 비전이다. 당대의 현실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4막으로 된 이 서정 시극은 이 시의 서론에서 논의된 사회개혁을 주도하는 시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사회 개혁자로서의 시인 셸리의 열망과 모순들이 모두 나타난 신화극이며 정치 우화이다.”(정정호)
우리가 보기에, 이 셸리의 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제우스/프로메테우스 간의 가치전도를 또 다르게 변형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와, 존 밀턴(1608-74)이 <실락원>(1667)에서 하나님을 압제자로 보고 사탄을 그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본 견해를 접목시킨다. 이럴 경우, 그리스의 신화(mythology)와 기독교의 신학(theology)이 접합되면서 보다 복잡하면서도 이중적인 성격의 프로메테우스 상이 조형된다. 아래의 표를 보라.
그리스신화(헬레니즘)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
최고신 제우스/주피터 하나님/그리스도
반항자 프로메테우스 사탄/악마
그리스 신화(헬레니즘)의 제우스/주피터는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에서 하나님/그리스도에 대응하고7) 프로메테우스는 사탄에 대응하지만 가치론적 위계에 있어서 이들은 결코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비록 <실락원>과 같은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가치전도가 있기는 하지만, 헤브라이즘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의 가치론적 위계는 헬레니즘의 그것과 비교할 때, 너무도 확고하며 견고한 것이다. 즉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 이행한 헬레니즘에서의 가치전도가 헤브라이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듯 상반된 가치론적 형상을 가진 두 존재를 반항자라는 성격에만 초점을 맞추어 동일시하게 되면[프로메테우스(+)=사탄(-)], 거기에 긴장과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헬레니즘에서는 반신(半神)적 존재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했지만(제우스신은 여자인 판도라를 창조), 헤브라이즘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이때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동일시하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이 창조한 것이 되며, 이것은 헤브라이즘에서 중대한 신성모독이 된다.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셸리의 경우는 자신을 시(=상상력)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는 창조자로 자임하였을 수 있다. 4막에서 정령들이 이렇게 합창하는 대목처럼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인간세상에서/ 우리의 계획을 실현시킬 거야./ 그리고 우리의 작품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라 불릴 거야.”("We will take our plan/ From the new world of man/ And our work shall be called the Promethean."; 156-8행) 여기서 의미 깊은 것은 셸리를 비롯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새로운 인간’(혹은 ‘새로운 삶’)에의 비전이다. 이것이 ‘과도함’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 시인 자신에게로 향하게 될 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사회정치적 현실이라는 권력투쟁의 장으로부터 한 개인의 내면이라는 축소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이제 한 개인의 내면의 드라마가 된 것이다.
물론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부터도 이런 내면의 드라마로 읽을 수 있다. 즉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에 인간이 갖는 동물성과 영혼의 갈등, 폭력과 설득력의 갈등, 그리고 힘과 지성의 대립 등이 내포되어 있는 걸로 보면서,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정반대되는 양면,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정신의 세계와 야수적 힘의 세계를 그린 상징극으로 그의 비극을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아주 많이 ‘현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알베르 카뮈는 희랍인들이 아무것도 극단화시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반항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희랍인들은 확실히, 과도함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과도함을 묘사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제자리를 부여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에 하나의 한계를 부여한다.” 이때 ‘과도함’이란 것은 내면의 드라마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면, 그 조건은 18세기 후반 이후 낭만주의에 와서야 비로소 제값의 규모를 가지게 된다고 우리는 본다.
요컨대,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문제되는 것은 첫째, 그가 프로메테우스를 사탄과 동일시함으로써 또 한번의 가치전도를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가져왔다는 것이고, 둘째,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을 한 개인(=시인)의 내적 드라마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 내적 드라마는 ‘정치 우화’적 성격을 겸하고 있다. 즉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정치적 희원이 적극적으로 시화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주피터를 전복시킨 데모고르곤이 새로운 세계의 구성원칙, 제시하는 “부드러움, 미덕, 지혜와 인내”(4막 562행)는 ‘힘’과 ‘폭력’에 기반한 제우스의 구시대적 지배원칙과 대비되는 정치적 이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인간에의 희원과 맞물린다.
거듭 말하자면, 시인은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빚어내는 창조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셸리의 창조자로서의 시인의 형상이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결합한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문득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는가?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프로메테우적 인간(=시인)의 창조라는 것은 분명 헤브라이즘적 전통에서 보자면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고, 요망하기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불길한 예감을 셸리와 같은 방을 썼던 그의 두 번째 아내 M. 셸리(1797-1851)는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쓴 <프랑켄슈타인>(1818) 속에서 그려보이고 있다(이 책의 초판 서문은 남편 셸리가 썼다).
‘현대판 프로메테우스’(The Modern Prometheus)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최초의 과학소설’의 주된 테마는 한 과학자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생명을 불어넣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자기 자신이 파멸당한다는 것이다. 젊고 야심 많은 과학자인 프랑켄슈타인은 인류에게 숭앙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집착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연구에 몰두하여 결국에는 조각난 신체부분들에 전기불꽃을 주입하여 생명체를 만들어내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해 아내마저 희생되고야 만다.
이 프랑켄슈타인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끌어오고 있는 것은 한 영웅의 인간 창조와 그로 인한 주변의 평범한 인간들의 피해라는 신화소이다. 어쩌면 작가인 메리 셸리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견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 이 작품은 그녀의 아버지 고드윈이나 남편 셸리가 추구했던 당시의 급진적 이상주의에 대한 비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흔히 상상을 통한 인간정신의 고양이라든가, 상상을 통하여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소위 낭만주의 신화의 허구성을 그녀는 과감히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적으로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고드윈이나 셸리와의 가족관계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경험했던 여성의 관점으로 얻어낸 것이다.”
실제로 10대에 유부남 젊은 시인을 따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며,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아이를 두고 그 중 셋을 잃었던 메리 셸리는 천재 시인이었지만 오만한 남편에게서 지식인의 이면을 목격하고 이념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직접 체험했다. 그런 그녀의 <프랑켄슈타인>은 프로메테우스라는 헬레니즘 ‘영웅신화’의 이면을 밝혀내면서(프로메테우스=사탄), 그것의 폐해를 헤브라이즘적인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인간을 창조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생명의 불이 아니라 재앙의 불이 된다.
그리고 이 재앙의 불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세계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아넣었던 진짜 현대의 ‘프랑켄슈타인’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프로메테우스주의, 즉 그의 나치즘이고 그의 아리안주의이다. 그는 <나의 투쟁>(1925-27)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까지 인간이 이룩한 문화, 즉 예술과 과학과 기술의 성과는 거의 예외없이 아리안족의 창조적 산물이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아리안족이야말로 고등 인류의 창시자이며,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라는 단어로 이해하는 원형이라는 추론은 지극히 정당하다. 아리안족은 인류의 프로메테우스이다. 그의 빛나는 이마에서 신성한 불꽃이 튀어 온 시대로 두루 퍼져 나갔으며, 침묵하는 비밀로 가득한 밤을 인식으로 환하게 밝히고, 그리하여 인간이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하는 불을 거듭 새롭게 점화시켰다. 따라서 아리안족이 사라지게 된다면, 불과 몇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칠흑 같은 어둠이 지상을 뒤덮을 것이며, 인간의 문명은 소실되고 세계는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아리안족은 “빛을 가져오는 자”이며 그밖의 무의미한 종족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자이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마니교와 그노시스파의 우주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싸움에서 밝음과 어둠의 이분법을 빌려와, 아리안족이라는 빛의 형상과 루시퍼라는 어둠의 형상을 대립시킨다. 히틀러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한 영웅(=아리안족)의 인간 창조라는 신화소를 가져오지만, 그러한 행위가 치러야 하는 고통스런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의 프로메테우스는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신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유해한 박테리아”(=유태인)들과 대적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새로운 인간 창조에 있다: “국가 사회주의를 단지 정치적 운동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는 종교 이상의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는 새로운 인간 창조의 의지이다.”
“순수한 양심”과 “보다 높은 명령”(한나 아렌트)에 따라 인종 청소와 살육을 주저없이 감행한 히틀러와 그의 나치즘(국가 사회주의)에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이런 식으로 악의 형이상학으로 전용/남용되며, ‘프로메테우스=사탄’적 형상의 극한을 보여주게 된다. 프로메테우스 시인 셸리가 자신의 가족과 주변 몇 사람을 고생시킨 데 반해, 프로메테우스 정치가 히틀러는 수백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의 프로메테우스는 반(反)영웅, 반(反)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종결되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전체의 이익, 인류의 이익을 표면에 내세울 때, 우리는 언제나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러한 ‘전체(주의)’의 이념이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또 다른 폭력과 재앙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폭력과 재앙은 프로-메테우스(fore-thought)란 이름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적인 영웅은 모든 미래에 대해서 마치 자신의 손금처럼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만이 예견하고 있는 운명에 따라 미리 앞당겨 판단하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불확실성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대화나 타협은 그에게서 불필요하다. 그런 대화나 타협은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의 가치 배당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몫이 얼마나 떨어질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이것저것 견주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언제라도 자신의 생각이 모자랄 수 있음을 승인할 때에만, 우리는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서로의 이익을 조금씩 양보하는 가운데 제 3의 길을 찾는 것이다.
‘과도함’이 없었던 그리스인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는 아직 그러한 화해의 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셸리의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화해는 오직 제우스의 몰락 이후에야 가능하다. 이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영웅에 의한 일종의 ‘개벽신화’로 탈바꿈한다(*작년말에 재출간된, 마르크스와 그의 시대에 관한 벽화적 전기소설 <프로메테우스>(들녘, 2005)를 쓴 러시아 작가 갈리나 세레브랴코바가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개벽'일까?).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바로 히틀러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해서,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두 얼굴의 불이다).
06. 0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