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를 읽고 있다. 작년에 1부 1장까지 읽고 덮어두었던 책인데(주로 영화이론을 다루는 1부는 정색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봉합'이론 같은 건 다른 일들을 봉합하고 읽어야 한다. 한데, 그럴 만한 여유를 갖기가 힘들다), 이번에 키에슬롭스키(1941-1996) 서거 10주기를 맞이하여(내주에는 영화제도 개최된다) 한번쯤 그의 영화세계를 돌이켜보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건 지젝을 경유하는 것인데, 최선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국내 키에슬로프스키 관련서는 그밖에 <데칼로그> 정도가 유일하므로).

아마 이 책을 처음 접하고 어려움을 느낀 독자들이 더러 있을 법한데, 조금더 읽기 편한, 그리고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막바로 다루고 있는 제2부부터 읽는 게 나을 듯하다. 내가 그렇게 읽고 있는데, 훨씬 진도가 빨리 나간다. 우리말 번역본은 대충 무난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읽어나가면서 동의하지 않는 대목에 대해서는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이 글에서는 4장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소!"를 읽어보고 싶은데, 영화감독으로서 키에슬롭스키의 변신/이행 과정에 대해 지젝이 자신의 '논리'를  부여하고 있는 장이기에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개관'으로서 적절해 보인다.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키에슬롭스키가 다큐멘터리 리얼리즘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실재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었다 - 어느 지점에서인가 우리는 현실 자체보다 더 실재 같은 어떤 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125쪽) "It was precisely a fidelity to the Real that compelled Kieslowski to abandon documentary realism - at some point, one encounters something more Real than reality itself."(71쪽)

여기서 실재(the Real)와 현실(reality)은 모두 라캉-지젝의 용어이므로 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만 전제된다면 내용은 간명하다. 그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시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오래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키에슬롭스키에 대해 언급했던 대목을 참고삼아 일부 인용해본다. 우리에겐 다소 낯선 '다큐멘터리 감독' 키에슬롭스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이 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정성일: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릴 감독은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로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 중에서는 이만큼 독창적이고 그리고 깊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는 감독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선풍이 다가온 것은 그러나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실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은 폴란드의 영화 감독 중에 그저 낯설은 새로운 이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고 그에게 주목하고 있는 영화 평론가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꾸준히 그의 작품이 깐느에 출품되기는 했었지만은 그러나 번번이 공식 경쟁 부분에 끼여들거나 아니면 'Un Certain Regard' 그러니까 '주목할 만한 시선'에 그 그의 영화를 찾아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됐었습니다. 하지만 88년도에 10편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되면서 그야말로 사정은 모두 바뀌었습니다. 그 영화가 그 유명한 십계입니다. 그 88년 십계를 발표하면서 그 영화 평론가들은 이 감독이 어쩌면 우리의 세기말에 다가온 우리 시대를 다음 시대에로 이어줄 유일한 이름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만약에 여기 그 이 프로의 청취자 분들께서 만약 유럽에 영화를 공부하러 가신다면은 4개의 학교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이 4개의 학교를 보통 최고의 학교라고 부르는데요, 영국의 그 BF'라는 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런던 UNIVERSITY'와 같이 그 관계를 맺고 계속 세미나를 하는 학교이구요, 또 프랑스에는 이데끄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름을 페미스로 바꿨는데요 입학 시험 1주일을 봐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가 있습니다. 벤더스가 떨어진 바로 그 학교입니다. 마지막으로 폴란드의 로쯔 스쿨이 있습니다."

정성일: "어....이 4개의 학교 출신들....학생들이 1년에 한 번씩 뮌헨 학생 영화 페스티벌을 벌리는데요, 우연히 한 번 이 페스티벌에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4 학교 중에서 가장 영화를 새롭게 찍는 학교의 학생들은 프랑스 이데끄 출신이었습니다. 보면은 뭐 거의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테크닉이 뛰어난 영화를 찍고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입을 벌리게 합니다. 또 BFI의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테크닉이 거의 완벽합니다. 마치 이것이 학생 영화가 아니라 헐리우드에서 와서 온갖 일류의 스텝 진을 갖고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 작품들을 보면은 거의 정치적인 이슈, 아주 민감한 소재들을 다루어서 충격적으로 묘사하는데는 일가견들이 있습니다. 제일 따분한 것은 바로 로쯔 학교 출신들입니다. 이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스타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영화는 다 로쯔 학교 출신들 영화입니다.(...) 이들이 영화를 찍을 때는 스타일보다도 주제에 대해 아주 끈질긴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요, 바로 키에슬로브스키가 나온 학교가 이 학교입니다."(*요즘의 표기는 '키에슬로브스키'가 아니라 '키에슬롭스키'이지만, 수정하지는 않았다.)

정성일: "아, 크지쉬토프 키에슬로브스키는 1941년생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나이가 꽤 되는 셈인데요, 키에슬로브스키는 원래 영화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었었고 신부님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인생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5살이 되면서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고 이제 영화를 하기로 결심하고 로쯔 필름 스쿨에 들어갔는데요, 이 학교에서 원래 전공한 것은 그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영화 공부를 하면서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은 그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찍었었던 지가 베르토프 그리고 독일 영화 감독인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또 북극의 나누크라는 그 무성 영화 시대 때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낸 로버트 플레어티 그리고 프랑스의 장세니스트라고까지 불리우는 엄격한 촬영감독, 타르콥스키도 그렇도록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 로베르 브레송이였었습니다."

정성일: "어..이 키에슬로브스키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꾸준히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었는데요...사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키에슬로브스키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그 영화광을 자칭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졌었는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 그런데 문제는 게으른 영화광들의 아주 그럴듯한 변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그 영화 소년들이 또는 후배들이 영화를 이리저리 토론하고 분석하고 제단하고 해부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로 보고 있다 딱 한마디 근사한 표정을 지으며 던집니다. '영화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게으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영화는 제 생각에는 머리와 가슴 모두를 따듯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입니다."



정성일: "가슴만이 따듯해진다면 그거야말로 그것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것이지 그것이 영화의 본연의 자세라고 얘기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정신입니다. 키에슬롭스키는 자기의 인터뷰 책인 최근에 그 BFI 에서 발행한 <키에슬로브스키 & 키에슬로브스키>란 책을 보고 있으면(*잘못 필사돼 있는데, '&'가 아니라 'on'이다)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머리와 가슴 그 모두를 따뜻하게 만들어야할 것이다." 동구 다큐멘터리는 그 유럽 다큐나 미국 다큐 또는 라틴 아메리카나 소련, 일본 다큐멘터리들과는 다소 그 다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동구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인간을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놓는 사회주의가 왔는데 왜 자본으로부터의 해방된 사회주의에서 인간은 그 중심에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 사회주의 다큐멘터리, 그 중에서도 특히 동구권 다큐멘터리들이 자신들이 서 있는 조건에 대해서 던지는 아주 비판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정성일: "이러한 입장에서 키에슬로브스키는 약 10년간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는 지금도 영화를 찍으면서 이 시기에 찍었었던 그 자기의 작업 방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작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방법은...하얀 종이를 한 장 올려놓고 그리고 지금부터 찍어야될 영화의 스토리를 그 한 장에 요약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이제 5페이지 정도 늘립니다. 5페이지로 늘린 것을 다시 10페이지로 늘립니다. 그리고 10페이지로 늘린 것을 이제 시나리오 작가를 대동해서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로 늘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늘려 논 다음엔 촬영 감독을 데려와서 100페이지로 늘려 논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페이지가 되어진 다음에는 배우를 불러서 거기서 그것을 낭독하게 하면서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그 배우의 엑센트를 들어가며 대사를 써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그 대사를 만들어 놓고 배우보고 그것을 아무리 주문해봐야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키에슬로브스키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배우의 음색 그리고 그가 놓치고 있는 발음 같은 것들도 그가 필요 이상으로 격앙하는 대목들을 일일이 체크하여 그 배우에 맞는 대사를 만들어 줄 때, 그러니까 그의 작업 방법은 배우 그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합니다."(강조는 나의 것. 지젝도 비슷한 내용은 얘기를 한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키에슬롭스키는 폴란드 사회현실(=리얼리티)에 대한 재현을 의도했지만(그는 1966년부터 1988년까지 25편 가량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다), 어느 지점에서는 부득불 리얼리티 너머의 '실재'와 조우할 수밖에 없었고, 혹은 '실재'에로 침입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로서는 어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실재에 대한 충실성' 혹은 예의 때문에.

가령, "<첫사랑>(1974)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메라는 결혼전에 임신한 젊은 커플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새로 태어난 아기를 손에 안고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키에슬롭스키가 '진짜 눈물의 공포'를 언급하는 것은, 타인의 내밀한 부분에 그렇게 허락도 없이 파고 들어가는 외설성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넘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윤리적인 결심이었던 것이다."(126-7쪽, 강조는 나의 것)

키에슬롭스키가 육성으로 말하는 바는 이렇다: "모든 것을 기술할 수는 없다.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큰 문제이다. 다큐멘터리를 자기 덫에 걸린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치자. 만약 실제 인물들이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침실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한 개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수록 내 관심을 자아냈던 대상들은 스스로를 닫아버린다는 것이었다. 내가 극영화로 전환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극영화는 뭐가 다른가: "극영화는 아무 문제도 없다.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커플이 필요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기꺼이 브라를 벗을 여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이내 그런 사람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글리세린을 약간 살 수도 있다. 그것을 여배우의 눈에 몇 방울 떨어뜨리면 그녀는 울 것이다. 나는 몇 번이간 애써 진짜 눈물을 가까스로 찍은 적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다. 진짜 눈물은 두렵다. 사실 내게 그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그것이 내가 다큐멘터리로부터 도망친 주된 이유이다."(127-8쪽, 강조는 나의 것)

이렇듯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이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지제은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카메라광>(1979)라고 본다. "이 영화는 카메라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아내와 아이, 일자리를 잃어버린 남자를 그린, 다뷰멘터리 영화감독에 관한 극영화이다(a fiction film about a documentary film-maker). 따라서 그 영화에는 '침범하지 마시오' 표시가 붙어 있는, 그래서 포르노그라피적인 외설을 피하려 한다면 오직 허구를 통해서만 접근해야 하는 환상적인 내밀함의 영역이 존재한다."(128쪽)

이러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또다른 형상으로 지젝은 <베로니크의 두 개의 삶>(<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인형조종사와 <레드>의 판사를 든다: "어떤 점에서는 판사는 키에슬롭스키의 상당히 명백한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는 키에슬롭스키 자신의 유혹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유혹이란 외설적인 실재에의 유혹이다. 아래는 <레드>(1994)에서 이웃들의 사적인 전화통화를 은밀히 엿듣는 퇴직 판사역 장 루이  트랭티낭(1930- )의 모습(내게는 아누크 에미와 공연했던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 <남과 여>(1966)의 주연으로 각인된 배우이다).

'진짜 눈물'을 찍는 건 포르노그라피적 외설과 다름없다(그런 의미에서 '몰래카메라'는 포르노그라피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오직 허구(극영화)를 경유해야 한다. '진짜 눈물' 대신에 '글리세린 눈물'. 다시 반복하자면, "인간에 대한 모든 알량한 휴머니즘적 찬사는 그저 '침범하지 마시오'라는 표시에 대한 외설적 위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적절한 일은 내밀하고 특이한 환상 영역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성을 입증하는 이 깨지기 쉬운 요소들을 에둘러 넌지시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129쪽) 마지막 문장은 "one can only circumscribe, hint at, these fragile elements that bear witness to a human personality."(73쪽)의 번역이다. 여기서 'a human personality'는 '인간성 일반'이 아니라 어떤 한 인간의 고유한 '개인성'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지젝이 진짜 눈물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금지를 구약에서 '이미지들'에 대한 금지와 열결짓는다는 점이다. 시간상/분량상 그 얘기는 다른 자리에서 마저 다루기로 한다.

06. 03. 08 -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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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눈물의 공포>...잘 읽히지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이네파벨 2006-03-0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글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주에 영화제를 한다구요...? 어디에서 하는지...좀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들지만...
(그의 영화들이라기보다...사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라고 해야 옳겠죠.
삼색 시리즈나...또 다른 단편 하나는...그냥 키에슬롭스키 특유의 분위기만으로도 무척 좋았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제가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주저없이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감동을 다시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영화는 그대로이나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다 닳고 휘발해버려서...)
하는 두려움이 있네요.
위의 글에 나오는 진짜 눈물에 대한 두려움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

*딴소리*
혹시...<토토의 천국(Toto le Heros>이라는 영화 보신(그리고 기억하시는) 분 계신지요...
이 영화도 아...주....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훌륭하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하구요.
이 영화 좋아하시는 분 만나면 무척 반가울 거 같아요. ^^

로쟈 2006-03-09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롭스키 영화제는 다른 카페에서 안내한바 있는데(주최는 서울아트시네마입니다), 그냥 '키에슬롭스키 영화제'를 검색하시면 바로 뜰 겁니다. 자크 도마엘의 영화던가요? 저도 <토토의 천국>을 개봉관에서(뤼미에르에서 했던 듯) 잘 봤습니다. 두 번 본 거 같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데뷔작 <유로파>와 거의 같이 개봉됐던 영화였죠...
 

레프 도진은 러시아의 저명한 연극연출가이자 말르이(말리) 극장의 예술감독이다. 재작년에 그의 체호프 공연 한편을 보고 적어둔 감상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공연과 관련한 이미지들을 찾아넣으면 그때의 느낌이 조금은 되살아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해서, 연극은 시간예술이면서 공간예술이지만, 이 글-정리는 공간의 이미지를 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성격이 더 강하겠다. 아래 사진은 레프 도진.

 

 

한편 도진의 작품들은 <가우데아무스> 등이 이미 한두 번 내한 공연된 바 있는데, 소식에 따르면 올 5월 20-21일 양일간에 걸쳐서 그가 이끄는 말르이극단의 <형제자매들>이 LG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된다.  러시아에서는 1985년에 초연한 화제작이라는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 정권 아래 살고 있는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억압된 자유와 빈곤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강한 생명력을 예찬한다"고. "40여명의 배우들이 7시간 동안 뿜어내는 에너지와 감동은 영화의 시대이자 뮤지컬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연극이라는 장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하니까 한번 기대해봄 직하다. 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말르이극장.  

 

내가 지난주(2004년 6월) 수요일에 ‘타간카’극장에서 본 레프 도진의 <바냐 아저씨>가 바로 ‘마냐 아줌마와 바냐 아저씨’(마야코프스키) 류의 연극이다(<바냐 아저씨>를 간혹 <바냐 외숙>이라고 옮기는데, 촌수야 그렇지만 ‘정떨어지는’ 번역이다). 그러니까 <바냐 아저씨>는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대표작이면서(나는 ‘체홉’이라고 즐겨 쓰지만, 여기서는 번역 관례대로 ‘체호프’라고 표기하겠다), 러시아 정통극의 상징이다. 

 

<바냐 아저씨>를 그의 ‘대표작’이라고 부르면, 약간 서운해 할 사람들도 있겠다. <갈매기>, <세자매>, <벚꽃동산>의 팬들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여전히 <바냐 아저씨>이고, 그걸 감추기는 어렵다. 내 생각에, 체호프의 이 네 작품에는 인생의 사계(四季)가 반영돼 있다. <갈매기>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좌절의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봄의 드라마이고, 청춘의 드라마이다. 니나는 물론이거니와 트례플료프도 젊디 젊다. 그의 권총자살은 그 젊음을 웅변한다. 그는 미숙하지만 구차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에는 구차하게라도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어나가야 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진짜 삶, 삶다운 삶을 준비하고 고대하는 데 다 소진된다. 이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 비슷한 족속들일 것이다. 그들은 삶을 항상 고대하지만, 삶은 언제나 그들을 그냥 통과해간다. 마치 가구처럼, 무슨 간이역처럼. 그런 꿈이 허깨비였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데 이들의 삶이 가진 비극성이 있고, 진실이 있다(진실은 잔인하다!). <바냐 아저씨>는 그 진실의 남성-버전이고, <세자매>는 여성-버전인바, 드라마에서 이들의 삶은 여름에서 가을로 간다. 어느덧 그들의 젊음은 사라졌거나 대책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한편, <벚꽃동산>은 조락(凋落)의 드라마이자, 장년의 드라마이며, 체호프식의 ‘엔드게임’이다(어떤 연구자들은 <벚꽃동산>에서 부조리극의 ‘원조’를 읽어내기도 한다). ‘벚꽃동산’ 대신에 곧 ‘별장’이 들어서는 것처럼, 한 세대(혹은 한 시대)는 가고 또 다른 세대(혹은 또 다른 시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벚꽃동산>에는 ‘가을’에서 ‘겨울’로의 그러한 이행의 과정이 쓸쓸하게, 그러나 의외로 코믹하게 그려져 있다. 

<갈매기>를 무척 좋아했던 한 친구와는 다르게(그 친구는 구차하게 살기를 거절했다), 나는 처음부터 <바냐 아저씨>였고, 아직도 <바냐 아저씨>이다. 그래서, 이대로라면, 마흔 일곱까지는 조숙한(조로한) 편이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나이가 마흔 일곱이므로. 하지만, 그 이후에라도 <벚꽃동산>을 좋아하게 되는 건 꺼려진다. 그건, 나의 분류에 따르면, ‘인생의 무대’에서 곧 퇴장할 사람들이나 ‘절절하게’ 즐길 만한 드라마이므로(‘잔혹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레프 도진이 체호프극 연출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이 달 1일부터 24일까지 타간까 극장(사진. 전철역 ‘타간까’에서 나오자 마자 있는데,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했고, 비소츠키가 활동했던 극장으로도 유명하다)에서 열리는 ‘레프 도진 연극제’의 레파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제목 없는 희곡>의 성공에 힘입은 걸로 보인다. 지난번에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체호프가 최초로 시도한 장막극이자 실패한 장막극, 그래서 미완성으로 남은 드라마이다. <애비 없는 자식>이란 제목은 체호프의 한 편지에서 언급되며, 공식적인 제목은 아니다. 그리고, 흔히 일컬어지는 <플라토노프>란 제목은 독일인들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도진은 이 작품을 새롭게 각색한 모양이다(원작은 공연 분량으론 너무 길다). 도진에 의하면, 우리의 삶 또한 ‘제목 없는 희곡’이다. 아래 사진은 <제목 없는 희곡>의 한 장면. 참고로,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도 같은 원작이다.

 



이번 연극제에 대한 정보를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비싸더라도) 표를 구해볼 수 있었을 텐데, 룸메이트가 <바냐 아저씨>를 예매하고, 다른 날 다른 작품들을 예매하러 갔을 때 이미 모든 공연의 표가 매진이었다. <체벤구르>도, <악령>도, <제목 없는 희곡>도. 그래서 결국, <바냐 아저씨>만 보게 된 것인데, 다음에 그의 작품들을 보려면, 아마도 페테르부르크에 가야 할 것이다. 레프 도진은 원래 페테르(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에서는 ‘삐쩨르’라고 약칭해서 부른다)의 ‘말르이 극장’에서 활동하는 연출가이다(페테르에는 현대식 건물의 ‘제2 말르이극장’도 곧 건축될 예정이다. 지난번 설계공모에서 프랑스 건축가의 출품작이 선정됐다).

 

그래서 이번 공연의 원제는 ‘모스크바에서의 레프 도진의 공연들’이며 지난 봄에 있었던 제10회 ‘황금가면’ 연극제에서 <바냐 아저씨>로 도진이 연출상을 받은 걸 기념하여 기획된 걸로 안다. 그러니까 도진의 모스크바로의 ‘화려한 외출’인 셈이다. 배우들은 물론 전부 말르이극장 소속 배우들이며, 무대장치도 페테르에서 공수해 왔다고 한다. 참고로, 모두 7편이 공연된 도진의 연출작(혹은 감독작) 가운데, 제일 첫작품은 류드밀라 페트루셰프스카야의 <모스크바 합창단>이었다. 페트루셰프스카야? 지난번에 번역해서 올린 단편 <복수>의 작가 말이다. 그녀는 극작가로서도 상당한 명망을 갖고 있다. 막심네에서 들춰본 그녀의 희곡선집에는 <모스크바 합창단>이 빠져 있어서, 자세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다(그녀의 작품이 일부 <러시아 현대희곡>에 번역/소개돼 있다).

 

 

 


 

 

 

 

 

도진이 연출한 체홉극 목록에서 <바냐 아저씨>는 <제목 없는 희곡>과 <갈매기>, <벚꽃동산>에 이어진 작품이다. 그러니까 <세자매>가 목록에 빠져 있는 셈인데, 한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현재 오페라 <엘렉트라>를 준비중인 도진은 기회가 되면 <세자매> 또한 연출해볼 의향을 갖고 있다(그는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한국에서 체호프의 공연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나는 연극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다), 도진의 <바냐 아저씨>가 어느 정도 뛰어난 작품인지는 잘 가늠할 수 없었지만, 객석이 꽉 들어찬 가운데 배우들이 가구들을 하나 둘씩 날라다 놓으면서 시작된 공연은 상당히 품위 있고 세련돼 보였다.


우리의 ‘바냐 아저씨’를 연기한 배우는 세르게이 쿠르이쇼프인데, 도진의 9시간짜리 <악령>에서는 키릴로프 역을 맡고 있고(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로는 차라리 ‘샤토프’ 역에 더 어울리는데), 이번 <바냐 아저씨>로 ‘황금가면’ 연극제에서 남자연기상을 받았다. 그런 걸로 미루어볼 때, 연기력을 인정 받는 배우이지만, 내가 상상해온 ‘바냐 아저씨’와는 조금 다른 면모의 배우였다. 일단 키가 좀 크고(그래서 어정거리며 걷는다), 갈색 머리는 웨이브의 장발이며, 양복을 아주 단정하게 입었고, 약간 술 취한 듯한, 질질 끄는 말소리에는 콧소리가 좀 들어가 있었다. 다른 배우가 연기한 ‘바냐 아저씨’를 보아야 감을 좀 잡을 거 같다.

바냐 아저씨가 헤프게 어정거리다 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 두드러지는 건 의사인 아스트로프인데, 이 역을 맡은 배우 표트르 세마크는 단단한 체구에 똑 부러진 말투로 아스트로프의 열정과 냉소주의를 연기했다. 이 세마크란 배우가 도진의 <갈매기>에서는 역시 의사인 도른 역을, <악령>에서는 주역인 스타브로긴 역을 맡고 있다(이런 내용은 당일 70루블(2,800원)을 주고 산 전체공연 팜플릿에는 배우들의 사진과 약력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배우들의 이러한 면면으로 대략 도진 버전의 <악령>을 그려볼 수 있다. 아스트로프와 함께 도진의 <바냐 아저씨>를 끌고 가는 건 늙은 학자 세레브랴코프와 결혼한 ‘미의 화신’ 옐레나 안드레예브나인데, 크세니야 랍포포르트란 여배우가 연기했다. 이 배우는 <갈매기>에서 니나도 맡고 있었는데, ‘아름다우면서 콧대 높고 허영에 찬 젊은 여자’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다(실제로 눈이 크고 콧대가 높은 배우였다. 머리는 곱슬머리. 아니, 파마머리인가?). 사진은 아스트로프와 옐레나.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의 클라이막스는 예상과 다르게, 3막에서 영지를 매각하는 게 좋겠다는 세레브랴코프의 발언에 분노한 바냐 아저씨가 그에게 권총을 겨누지만 그마저 제대로 못 맞히는 장면이 아니라, 4막에서 아스트로프와 엘레나가 단둘이 작별의 포옹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둘은 포옹만 하는 게 아니라 열정적으로 상당히 긴 시간 또한 키스를 하는데, 그 바람에 남편 세레브랴코프를 비롯한 다른 식구들이 모두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객석에서는 탄성이 나왔다).

 

내가 읽은 <바냐 아저씨>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어서 기숙사에 돌아와 확인해보니까 원작은 그렇지 않았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는 둘이 잠깐 포옹했다가 서로가 화들짝 놀라서 떨어진다(사실 그런 게 ‘체호프적’이다). 즉, 원작에서는 아스트로프가 바냐 아저씨 못지 않은 ‘등신’으로 나오는데(그래서 둘이 친구로서 어울린다),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서는 아스트로프가 나름대로 박력있는 남자로 나옴으로써 ‘배신’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이러한 도진의 해석이 창의적인 것인지 오바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물론 보기엔 더 좋다. 이 ‘한심한 인물들’의 드라마에 그래도 열정적인 키스씬이라도 나오니까 말이다).

 



엘레나의 남편이자 바냐의 처남이자 소냐의 아버지, 세레브랴코프 역은 이고르 이바노프란 배우가 맡았는데(사진은 세레브랴코프와 옐레나), 그는 <벚꽃동산>에서는 로파힌 역을, <악령>에서는 레뱌드킨 역을 맡고 있었다. 로파힌 역을 맡기에는 너무 젊잖고 완고해 보이는 외모인데(김무생 타입이다), 콘찰로프스키의 영화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아주 얌체 같은 늙다리 세레브랴코프에 비하면, 나름대로 권위적이고, 젊은 아내 엘레나를 거느릴 만한 세레브랴코프를 연기했다.

 

그밖에 주요 배역으론 소냐를 연기한 엘레나 카릴니나와 첼레긴을 연기한 알렉산드르 자비얄로프가 있다. 미스터리한 것은 이 배 나온 ‘첼레긴’이 <갈매기>에서 트레플료프를 연기한다는 점(사진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남자). 자비얄로프란 배우는 이고르 이바노프와 마찬가지로 1954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는 51세이다. 나는 (첼레긴 역에나 딱 어울리는) 그가 연기하는 트레플료프를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기타 등등. 이제 마무리이다. 알다시피 <바냐 아저씨>는 “바나 아저씨, 우리, 일을 하는 거예요.”로 시작되는 소냐의 대사로 마무리되는데, 도진 버전에서는 이 마지막 대사가 비교적 절제된 톤으로 담담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룸메이트에 따르면, 한국의 <바냐 아저씨> 공연에서는 이 마지막 대사에 상당히 힘을 준다고(거의 울부짖는 수준으로).

 

하여간에, 우리들 ‘소냐’나 ‘바냐’들은 남은 여생을 그저 일이나 하는 수밖에 없겠다. 천국에 가서 그간의 노고를 위로 받고 쉬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것이 냉철한 연민의 작가 체호프가 <바냐 아저씨>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이건 위안일까, 냉소일까? 혹은 낙관주의일까, 비관주의일까? 둘 다이다. 그래서 체호프를 ‘Optimo-pessimist’라고 부르기도 한다. 되는 일도 없고, 굳이 안 되는 일도 없는, 그래서 슬프도록 즐거운, 혹은 눈물 나게 즐거운 삶을 우리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갑시다!(막) 짝짝짝…

 

06. 03. 07.

 

P.S. 체호프 원작의 영화들 얘기는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도진과 말르이극장에 관한 영어본 소개서로는 마리야 셰브쵸바의 'Dodin and the Maly Drama Theater'(Routledge, 2002)가 있다. 한번 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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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07 21:59 
    뜻밖의 책이면서 '오늘의 책'이라 할 만한 책은 마리아 셰프초바의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동인, 2010)이다. 이미 여러 차례 방한한 바 있는 러시아의 연출가 레프 도진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포스팅한 적이 있고, 셰프초바의 책도 관심도서로 분류했었지만 막상 번역까지 될 줄은 몰랐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주문을 넣었다. 도진의 <바냐아저씨>가 내달 서울에서 공연될 예정이기도 해서 더욱 의미가 깊다. 
 
 
 

재작년 6월 모스크바 통신에 올린 글에서 두 시인/작가 '마야코프스크와 파스테르나크'에 관련된 대목을 다시 옮겨놓고 이미지들을 덧붙여둔다. 직접적인 관련이 되는 책은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자서전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글방, 1977)인데, 지금은 품절된 듯. 책의 원제는 '안전통행증'이며, 안정효 역에서 제목의 '어느 시인의 죽음'이 가리키는 것은 후배였던 마야코프스키(1893-1930)의 죽음이다.

 

요즘 들어 드물게 비가 오지 않았지만, 5월 이후 러시아는 비가 오는 날이 잦다. 그래 봐야 대개는 한두 시간 오고 말지만(2분씩 내리기도 한다), 어제 오후에는 꽤 내렸다. 3일 연휴라는 게 기분상 갑갑해서 외출을 했다가 그 비를 쫄딱 맞았다. 하지만, 여름비라고는 해도 (장마비가 아닌) 보슬비 정도이기 때문에 맞아 봐야 옷이 흠뻑 젖거나 하는 건 아니다. 산책길에 좀 맞으면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지는 그런 비다. 물론 작정하고 비를 맞을 일은 없고, 날씨가 하도 변덕스럽기 때문에 준비 없이 나갔다가 비를 맞곤 하는 것이다. 토요일도 그랬다.

오후에 바람도 쐴 겸 <루뱐까>역에 있는 서점 <비블리오-글로부스>에 오랜만에 갔지만(교통이 제일 편한 서점이기도 해서), 뜻밖에도 연휴 3일 동안 휴점이었다. 한국의 대형서점이라면 턱도 없는 일이겠지만, 아직 자본주의에 ‘미숙한’ 러시아에서 아쉬운 건 손님이지 가게 주인들이 아니다(왼쪽이 서점 입구이고, 오른쪽 이미지는 서점의 로고).



다행인 건, 이전에 두 번 그냥 지나쳤던 <마야코프스키 박물관>을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는 것. 휴일이라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데, 내가 들른 시간이 4시 15분쯤이었다. 이 박물관은 전철역에서 <비블리오-글로부스>서점쪽으로 가다가 박물관 표지가 있는 곳에서 골목 방향으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건물로 들어서면, 복도에는 미술과 문학 등의 관련서적들이 판매용으로 비치돼 있고, 책상 앞에 앉은 한 아줌마가 입장료를 받는다.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6루블(25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혁명의 목청’이자 미래파의 기수였던, 러시아 최대의 아방가르드 시인의 박물관답게 전시장 또한 아방가르드적이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의 공간 전체가 마치 미술대학의 창고처럼 각종 철골 구조물로 가득 차 있었고, 시인과 관련된 원고나 포스터 등의 각종 자료들이 사이사이에 배치돼 있었는바, 전시장 자체가 일종의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물론 시인이 남긴 퇴색한 원고들처럼 이 아방가르드 ‘설치미술’ 또한 세월의 두께만큼 쌓이는 시간의 먼지마저 털어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지만. 전시장을 층마다 지키고 있는 점잖은 할머니들도 주름살은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아래는 마야코프스키가 그린 수많은 선전 포스터들 중 하나.



30분 정도 둘러본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유언장과 시인의 죽음을 특집으로 다룬 1930년 4월 17일자 <리쩨라뚜르나야 가졔따>(‘문학신문’)이었다. ‘모두에게’라고 제목을 단 이 ‘공식적인’ 유언장은 1930년 4월 12일에 작성된 것인데, 일반노트보다 좀 큰 갱지에 연필로 큼직하게, 그리고 급하게 써 내려간 것이다. 나는 ‘모두에게’라는 제목 때문에 금방 그의 유언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다소 놀란 것은 이 유언장이 아무런 구별이나 표식 없이 다른 자료들과 섞여서 전시돼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우로서는 좀 소홀한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이 유언은 내 기억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3권짜리 선집에 번역돼 있다(절판된 책이지만). 그리고, 아마도 각각 ‘역사비평사’와 ‘까치’에서 번역 출간된, <나의 혁명, 나의 노래>와 <마야코프스키>, 두 권의 전기에도 내용이 소개돼 있을 것이다. 그 유언의 시작은 이렇다: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나 자신 외에) 아무도 책망하지 마시길, 그리고 바라건대, 크게 떠들어대지도 마시길. 고인은 그런 걸 무척이나 싫어한답니다. 어머니, 누이들, 그리고 동지들, 용서하시길 - 이게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다른 사람들에겐 권하지 않겠소), 나에겐 다른 출구가 없다오. 릴랴 - 나를 사랑해주오.”(릴랴는 그의 연인이자 오십 브릭의 아내였던 릴랴 브릭을 말한다. 아래 사진.)



그리고 다른 페이지에 씌어진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책상 위에 있는 2,000루블은 국고로 환수해주시오. 나머지는 기즈에서 받으시길. V. M.”(‘기즈’는 ‘국립출판사’의 약칭이고, V.M.은 그의 서명이다.) 이 유언을 쓴 이틀 후인 1930년 4월 14일에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권총자살하며, 그의 유언장은 다음날인 15일 <프라우다>지에 최초로 공개된다. 그리고, 17일(목)자 <문학신문>은 거의 전 지면을 갑작스런 자살로 전 러시아를 경악하게 한 마야코프스키 특집으로 꾸미고 있다. 아래는 자살한 시인의 유해.

사실,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은 한 시인의 죽음 이상의 시대적 상징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1920년대 말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행기로서, 정치적으론 레닌의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체제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경제적으론 레닌이 ‘자본주의로의 전략적 후퇴’라고 부른 신경제정책(NEP) 시기(1921-1928)가 마감됨과 함께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준비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NEP 시기에 허용되었던 문학/예술 분야에서의 창작과 비판의 자유가 차츰 위축되고 검열은 강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스탈린주의라는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의해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대체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보리스 그로이스의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참조). 그러한 과정이 명시적으로 일단락되는 것은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 선포됨으로써이지만, 그 기점은 1920년대 말(1927-1930)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거리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는 1929년은 이러한 정치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1929년은 스탈린이 ‘대전환의 해’라 부른 년도이자,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침묵이 시작되는 해이다. 그리고, 침묵이냐, 자살이냐는 선택에서 우리의 ‘목청’ 마야코프스키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그보다 먼저 1925년에는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자살이 있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은 바로 이 시인 마야코프스키와 그의 죽음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어느 시인의 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자서전의 원제목은 ‘안전통행증’이다. 영어로는 ‘Safe Conduct’). 아래는 국역본에 들어 있는 사진으로 서 있는 사람이 파스테르나크이고, 나비 넥타이를 맨 '빡빡이'가 마야코프스키이다.

<닥터 지바고>로 195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지만(예기치 않은 수상 스캔들로 마음 고생을 하다가 그는 1960년에 ‘일찍’ 죽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무엇보다도 ‘시인’이다(그의 초기시는 ‘미래파’로 분류된다). 유리 지바고가 남긴 시편들은(간혹 이걸 ‘부록’이라고 빼먹는 엉터리 번역서들도 있는데), <닥터 지바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지만, 파스테르나크의 대표작들이기도 하다. 지바고는 소설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서정적 분신이다. 그래서, 언젠가 <닥터 지바고>의 서평에서도 쓴 바 있지만,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시로 쓴 소설’이라면,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이다(그러니 이걸 ‘소설미학’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금서이던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에서 공식 출판되는 것은 1988년쯤이다. 그래서 1985년에 저명한 러시아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쵸프의 편집하에 출간된 (내 생각엔)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2권짜리)에는 <닥터 지바고>가 빠져 있다(한편, 지난달에는 TV에서도 데이비드 린의 <닥터 지바고>가 방송되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영화속 ‘라라의 테마’는 한국의 애청자가 꼽는 영화음악 베스트에 항상 들어가곤 했는데,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와서 구한 책인데, 파스테르나크의 전기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료는 그의 아들 예브게니 파스테르나크가 펴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전기를 위한 자료들>(1989>이다. 68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고, 50,000부가 발행되었다. 아래 왼쪽 사진이 아버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이고, 오른쪽은 아들이자 유산 관리인인 예브게니 파스테르나크이다.

특이한 것은 1957년에 파스테르나크가 올가 이빈스카야와 찍은 사진도 책에 들어 있다는 것. 내 기억엔 그녀가 ‘라라’의 모델이고, 아들 예브게니는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그녀를 무척 싫어했다(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국내에는 이빈스카야가 쓴 책도 번역 출간됐었다). 이 ‘무뚝뚝한’ 예브게니와의 인터뷰는 한국일보 김성우 기자의 러시아명작기행(매주 한 차례 한 면 전체에 연재됐던 이 기행문을 나는 모두 스크랩했었다), <백화나무 숲에서>에 실려 있다(기억에 의존한 거라서 제목이 확실치는 않다. 제3문학사에서 나왔던가?). 아래 사진은 라라의 모델 올가 이빈스카야. 국내엔 자서전 <올가 이빈스카야>(동흥문화사, 1992)가 출간됐었다. 아래는 만년의 두 사람.



파스테르나크의 저작권은 아마도 예브게니가 갖고 있는 모양으로 최근에 출간되는 <닥터 지바고>에는 그의 ‘소감’이 실려 있다. 어쨌든 러시아문학은 그렇게, ‘최초의 망명작가’ 푸슈킨에서부터 ‘내적 망명작가’ 파스테르나크까지이다(거기에 물론 ‘진짜로’ 망명한 소설가 나보코프와 망명당한 시인 브로드스키가 동급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 참고로, 소비에트 문학(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학)은 고리키에서부터 솔제니친까지이다(<밑바닥에서> 시작한 소비에트 문학은 <수용소군도>에서 끝(장)난다)…

하여간에, 파스테르나크가 시인으로서 후배인 마야코프스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옆길로 갔다.  그래서 제목은 '마야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로 해둔다. 두 시인에게 건배를!..

06. 03. 07.

P.S. 내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군. 오늘도 수고하시는 세계 여성들께도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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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시인의 죽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21 09:30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자서전과 단편소설을 묶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글방, 2010)이 재출간됐다.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선생의 번역으로 오래전에 나왔지만 절판됐던 책이다(안정효판 <의사 지바고>도 나는 갖고 있다). 예전에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기도 한데, 반가운 마음에 파스테르나크에 관한 강의록의 일부를 붙여놓는다. 세계문학전집판의 새로운 <닥터 지바고>도 곧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야코프스키의 자살
 
 
2006-03-07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0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두꺼운 듯해서요.^^
 

계속 '러시아문화의 이해' 시리즈이다. 예전에 한국인이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갖고 있는 상투형, 상투적인 이미 지 혹은 고정관념 세 가지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걸 좀 보완하겠다. 일단 모스크바 통신의 한 대목을 옮겨놓겠다.

 

 

 

 

한국인이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상투적인 이미지 혹은 관념 세 가지는 크레믈린, 보드카, 그리고 러시아 미인들이다. 그래서 보통 한국인들의 모스크바 관광코스는 크레믈린의 붉은 광장에 가서 사진 한 장 찍고, 바로 앞 볼쇼이극장에서 발레공연을 보고, 한국 가라오케에서 러시아 여성들의 접대를 받으며 보드카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한편으로 관광객들이 선물로 가장 많이 사 가는 것도 보드카와 러시아 민속인형인 마트루슈카이다. 이미지들을 나열해 보면, 먼저 크레믈린.  

그리고, 볼쇼이극장에서의 공연 관람. 레퍼토리는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이면 금상첨화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보드카. 한국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보드카인 '스탄다르트', 그리고 한국인이 상상할 법한 러시아 여성(만지지는 마시길).

 

지난 학기(2004년 1학기) 수업시간에 그런 얘기를 했더니, 세 번째에 대해서는 담당 교수나 동료 학생들(독일 학생들이었는데) 아무도 동의를 하지 않았다(그걸로 봐서, 러시아 여성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념은 일종의 판타지이다. 이스라엘에도 그런 판타지가 있는 모양인데, 며칠 전에는 러시아여성들은 이스라엘 접객업소에 팔아넘긴 업자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들이 ‘미인들’의 나라로 꼽은 건 프랑스나 스페인 등이었다(한편으로 러시아 남자들은 동양에서 온 ‘평범한’ 여학생들을 예쁘다며 추근거리기도 한다). 물론 최근에는 늘씬한 테니스 스타 마리야 샤라포바가 한국인이 상상하는 러시아 여성의 '표준치'일는지도 모르겠다.

Мария ШараповаМария Шарапова

물론 러시아 여자들이 평균적으로 (같은 서양이라도) 미국 여자들보다는 아름다운 편이다. 그건 키가 크고, 눈이 크고(속눈썹이 유난히 길다), 콧대가 높으니까(거기에다 더 최악인 건 지성미마저 풍길 때이다), 그런 걸 미의 기준으로 갖고 있는 한국인의 안목에서는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여성들 대부분이 미인축에 드는 것은 아니며(어느 나라, 어느 인종이건 상위 5% 정도는 다 아름답다), 그나마 요즘은 미인들의 대부분이 (1)해외에 나가 있거나 (2)벤츠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두 가지 유력한 설이다) 길거리에서 ‘아찔한’ 미인들과 마주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전혀 없지만 않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그런 미인들과 마주치면 또 어쩔 텐가? 당신은 ‘아름다움’을 견뎌낼 수 있는가?!(추(醜)만이 우리를 고문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더 견딜 만한 건 ‘넓게 보아’ 아름다운 쪽 정도이다(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 정도에 만족할 일이며, 혹 당신이 러시아에 온다면 엉뚱한 기대는 하지 말 일이다. 뭐라, 결혼을 하겠다고? 영화 <버스데이 걸>(2001)을 따라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보시길. 당신을 수갑 채워줄 러시아 여인이 배달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판타지 속에서...

06. 03. 07.

P.S. 본문에서 제시한 상투형은 아무래도 '남성 버전'인 듯하다. 여성 버전을 잠시 상상해보면, 시베리아의 자작나무숲은 어떤가(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참조할 수 있겠다). 혹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실제로 타본 사람은 절대로 아무도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날의 백야. 사진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거기에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

끝으로 '삶에 혹독함에 굳어버린 얼굴들'.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의 배끄는 사람들'(1873).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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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고정관념에 덧붙여 "그토록 아름답던 여인"이 결혼하면 "푹 퍼진다"가 있었드랬습니다..-.-;;

로쟈 2006-03-0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토록 아름답던 여인'이 러시아 여성인가요?

비로그인 2006-03-0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호기심에 열어봤는데, 제가 상상하는 러시아는 없네요. 전 모래황무지에 칼바람만 살고 있는 벌판, 그 위를 지나고 있는 기차칸 안에 있는 추위나 기타 삶의 혹독함에 굳어버린 사람의 얼굴, 그리고 피아노가 딱 떠오르는데.. 제가 여자라서 그런가요?.. 보드카도, 러시아 미녀도 떠오르지 않을 걸 보니...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러시아 너무 가보고 싶어요~

로쟈 2006-03-0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버전도 더 '상상'해보았습니다. 한데, '삶의 혹독함에 굳어버린 사람의 얼굴'은 러시아만의 것은 아닌 듯한데요.^^

twoshot 2006-03-08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토록 아름답던 여인'이 러시아 여성만은 아니겠으나 저의 댓글은 러시아여성을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중국동포인 제 친구의 말도 그렇고 결혼 전과 후과 많이 다르다는 얘기였읍니다...쿨럭...

로쟈 2006-03-0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 전과 후과 많이 다르다"도 러시아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겠네요.^^

로즈마리 2006-03-1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하면...왠지...도스토예프스키만 생각나는데...ㅠㅠ 그리고 처절한 가난의 냄새...그게 제가 가진 선입견? 인듯
 

'러시아 문화의 이해'란 과목의 강의 첫날이었다. 이번에 처음 가보는 캠퍼스인지라 조금 일찍 나섰어야 했지만 예의 늑장을 좀 부리다가 5분 지각하면서 강의실에 들어섰다. 생각보다는 많은 학생들이 앉아 있었는데 아마도 연휴에 지각으로 수강신청한 학생들이 좀 되었던 모양이다. 처음 맡은 과목은 아니어서 수업준비에 많은 공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하자면 한 주에 책 한권 분량은 읽어야 한다. 하지만, 딜레마스러운 건 그렇게 나 자신을 업데이트하는 게 수강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가령 러시아 사학자인 리처드 파이프스 교수의 'Russian under the Old Regime'(1974) 같은 고전적인 역사서도 읽고는 싶지만(나는 책상에 놓여 있는 이 책의 머리말만 읽는다. 한편 이 책은 재작년에 러시아어본도 나왔다. 한국어본은?),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한다(방학때 뭐했느냐고? 방학때 강사료가 나오나? 나는 '무임금 무노동'의 원칙을 지킨다). 교양 교재로 추천하기에는 이래저래 너무 방대한, 하지만 경탄할 만한 저작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에서 저자 파이지스가 주제별로 추천하고 있는 도서들을 일람하면서 또 10여 권 이상의 책들을 메모해 두었지만, 그걸 다 챙기다가는 한 달 강사료가 날아갈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건강에 좋은 건 그냥 참아두는 것이다. 적당히 안 읽고 강의하기.

한데, 그런 건 과목 자체의 요구이기도 하다. 교양과목은 '인포테인먼트' 성격이 강해서 좀 '진지한' 10% 정도의 학생을 제외하면 적당한 지식과 적당한 재미를 적당히 (얼)버무려야 '효과'를 볼 수 있다(실상 강의명이 '러시아 문학의 이해'가 아니라 '러시아 문화의 이해'라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러한 '에누리'를 전제한다. 전공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내가 강의하는, 강의해야 하는 내용을 내가 학생일 때는 들어본 적이 없다!). '강사가 아는 게 많다'는 게 이른바 '좋은 강의'의 한 필요조건일 수는 있겠지만, 충분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게다가 '재미'는 애드립으로만 다 충당되는 것도 아니어서(직업이 개그맨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준비'도 해야 한다. 그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첫 대면 강의의 목적 중 하나이다. 이것이 그간의 강사 '짬밥'으로 터득한 바이지만, 이러한 노하우로도 수위의 강의평가를 얻어내지 못하는 걸 보면 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분들이 계신 것(이 분들은 언제 은퇴하시는가?).    

강의 자료로 쓸 만한 자투리들을 가끔 정리해놓으려고 하는데, '서비스' 문제에 대한 건 작년 연초에 쓴 모스크바 통신에서 따온 것이다. '현장감'은 좀 있으나 이미 '지나간 얘기'이기도 해서 멋쩍긴 하지만, 멋쩍은 일이라고 가려온 처지도 아니므로 그냥 밀어붙이기로 한다.   

2005년 새해가 밝았다. 어제의 일이다. 러시아는 어제부터 1월 9일까지가 공식 휴일이다. 연말에 개정된 법에 따라 그렇게 됐는데, 덕분에 다음 한 주 내내 생활이 불편할 듯하다. 일단 휴일이면 기숙사가 있는 본관 건물의 중앙통로가를 막아놓는 탓에 전철역이건 인터넷카페건 밖에 좀 나가자면 400미터쯤을 돌아나가야 한다. 게다가 인문대학 구내의 PC방이 놀기 때문에 디스켓을 사용하려면 카페막스(인터넷카페)에 가서 매번 10루블(400원)을 더 내야 한다(*사진은 내가 주로 이용했던 대학구내 카페막스의 카운터. 오른쪽은 카페막스의 로고이다).

10시간짜리 인터넷 이용료는 이미 지난달에 400루블에서 550루블로 대폭 올랐다(러시아는 인터넷 이용료가 더 비싸지는 드문 나라일 것이다). 그렇다고 1시간 단위로 끊자니 최고 90루블까지 하므로 (왜 이렇게 비싸냐고 따지는 대신에) 결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550루블을 주고 끊는 수밖에 없다(10시간을 한달 이내에 써야 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이라는 카페막스도 12월 31일에는 문을 닫았고, 듣기에 어제도 단축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연초인바, 다시금 새겨둘 것은 “착취가 없으면 서비스도 없다”는 문구이다(이건 거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서비스가 없으면 착취도 없다.” 이걸 운동주의적인 문구로 바꾸면, “서비스를 없애야만 착취도 없어진다”).

자본주의화(민영화) 이후에 러시아 또한 ‘서비스(=착취) 없는 사회’에서 ‘서비스(=착취)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바, 아직은 초보적인 구석이 많아서 어느 상점이나 식당에서건 불친절은 예사로 경험하는 일이다(그러니까 아직도 ‘서비스’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러시아와는 반대로 ‘서비스 사회’에서 ‘서비스 없는 사회’로 얼마간 거꾸로 이행해간 나라들도 있으니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의 ‘선진국’들이다(서로 비슷하게 ‘불편한’ 나라인 영국과 러시아는 둘다 석유 수출로 먹고 산다는 점에서도 처지가 닮았다).

지난달에, (인구가 고작 100만명임에도) 영국의 제2도시라는 버밍엄(버밍검?)에 유학중인 후배가 모스크바에 잠깐 들러서 전해준 얘기에 따르면, 멀쩡한 지하철이 예고도 없이 안 다니고, 버스 기사가 운전중에 손님들에게 그냥 다 내리라고 요구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일반 시민들은 거기에 익숙해서인지 곧바로 다른 교통수단을 찾는다고 한다(후배의 말이 프랑스는 이런 영국보다도 한술 더 뜬다고). 일반 교통요금이 모스크바보다 10배는 더 비싼 도시에서(전철요금이 모스크바가 400원인 데 반해, 버밍엄은 4,000원이다, 그것도 한 구간이) 그런 불편을 겪으면서도 불평없이 살아간다는 건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그런 식으로 서비스가 없는/부족한 만큼 착취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만큼 ‘인간적’일 거라는 것. 적어도 ‘인간적인 사회’를 ‘착취없는 사회’로 우리가 정의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서비스’란 무엇인가? 외래어로서 이미 국어사전에도 올라가 있는 이 말의 사전적 정의는 먼저, “생산된 재화를 운반/배급하거나 생산/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함”이란 뜻이다. 서비스 없는 사회, 즉 (보다) ‘인간적인 사회’는 그런 재화나 노무를 제때에(혹은 아예) 배급/제공하지 않는 사회이다(생산자/노동자에겐 쉴 권리가 있다!). 당연히 ‘인간적인 사회’는 ‘없는 게 많은 사회’이며 ‘줄이 긴 사회’이다(‘인간적인 사회’가 고려하는 것은 인간의 필요(need)이지 욕망(desire)이 아니다). 부족한 재화나 노무를 배급/제공받기 위해서 ‘평등한’ 인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줄을 서는 것밖에 없다. 이 ‘줄 문화’를 전면적으로 다룬 문학작품이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소로킨의 <줄>이다(우리말로는 <세계의 문학>에 번역된바 있는데, 단행본으로는 출간되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아직도 러시아에는 (상점에서의) 줄서기 문화가 남아있으며(불과 10년전만 하더라도 모스크바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는 1시간 이상씩 줄을 서야 했다. 그때 유학왔던 친구는 그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한번에 3-4인분씩 폭식을 하곤 했었다. 하긴 지금도 맥도널드에 가면 10-15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2004년판 회화교재에조차도 ‘상점회화’의 핵심으로 ‘줄서기’가 다루어진다. 가령, “당신이 (이 줄의) 마지막 사람입니까?”라거나 “제 자리 좀 맡아주세요” 같은 표현들이 그런 것들이다. 당신 생각에 이 (인간적인) ‘줄 서기’가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왜냐하면, 자기 자리를 맡아달라고 해놓고 한번에 여러 군데에 줄을 서기 때문이다(물건을 한 종류만 사는 게 아니므로).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줄을 짧게 서기 위해서는 절묘한 시간 계산과 순발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오랜 줄 문화의 경험 때문인지 러시아 사람들은 웬만한 줄서기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는 듯하지만, 이런 걸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욕이 나온다. 가령, 공항 입국장에서부터 짐을 들고 2시간씩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모스크바 국제공항에서의 그런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하는데(거기에 익숙한 사람은 1시간내로 입국장을 빠져나올 경우 ‘만세!’를 부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국제공항이야말로 가장 ‘사회주의적’이며, 가장 ‘인간적’이라고 할 만하다. 일반적으론, 그걸 뭉뚱그려서 ‘러시아적’이라고도 하지만, 그건 불충분한 일반화이다. 요는 그러한 ‘인간적인’ 태도의 전제인바, 그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내가 왜 굳이 당신한테 애써 봉사해야 하는가?”이다(“당신이 그렇게 잘났나?”). 인간은 평등하지 않은가?!

거기서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 ‘서비스’의 두번째 사전적 의미인바, 그것은 “개인적으로 남을 위하여 돕거나 시중을 듦”을 뜻한다. 이걸 달리 ‘봉사’ 혹은 ‘접대’라고 말한다. ‘봉사’란 ‘접대’를 순화시킨 말인바,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서비스가 없는 사회’로서의 ‘인간적인 사회’란 ‘접대가 없는 사회’이다. 그리고 그와는 대척점에 놓여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돈만 있으면 ‘서비스 만땅’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다. 예컨대, ‘돈있는’ VIP는 모스크바 공항도 귀빈실을 통해서 바로 빠져 나간다.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2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건 ‘돈없는 사람들’이지 자본가들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기본 원료는 봉사료/접대료이다(그래서 ‘봉사비/접대비’가 된다). “난 네가 돈을 주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자본주의의 캐치프레이즈이다. 이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이현세 만화의 구호이자(‘까치’의 대사) 이장호의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가를 패러프레이즈한 것인데, 그러한 패러프레이즈가 암시하는 바는 이 둘이 동형적이라는 것이다. 둘 모두에 걸려 있는 것은 ‘욕망(desire)’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욕망의 무한성에 대응하는 지표이다(때문에 “돈을 그 정도 벌었으면 됐지”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동형성을 간과하는 태도가 ‘순진한 태도’이며, ‘소녀적 태도’이다(즉,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에 감동하는 태도가 ‘소녀적 태도’인바, 물론 이것은 곧 ‘아줌마적 태도’로 전화하게 된다. “돈이나 벌어오면서 그런 소리를 해!”).

자본주의의 기본 원료가 봉사/접대인 한에서, ‘접대 없는 자본주의’란 말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만큼이나 모순형용이다(‘앙꼬 없는 찐빵’이란 얘기다). 혹은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아편 없는 아편’ 정도쯤 될까? 그렇다면, 접대의 한 유형이자 대표종(種)으로서의 성접대의 경우는 어떤가? 몇 달 전부터 한국에서는 (새로운) 성매매 방지법이 발효/적용 중인 듯한데, 좌파라면, (개량주의적/타협적 좌파가 아니라) 적어도 자본주의의 타파만이 인간적인 사회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근본주의적/비타협적 좌파라면 그러한 법안에 대해 반대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존권’을 주장하는 접대여성들(성노동자들)이나 포주들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 말이다.


 

 


지젝이 주장하는바, “우리가 레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즉 진심으로 빈민의 곤경을 동정하는 어떤 선한 신부를 동료 볼셰비키가 칭찬하는 것을 들었을 때의 레닌처럼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술에 취해 농민들에게서 부족한 자원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도 강탈하고 그들의 아내들을 강간하는 신부들이라고 논파했다. 그들은 신부가 객관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농민들로 하여금 분명히 자각하도록 한 반면, ‘선한’ 신부들을 그들의 통찰을 어지럽혔다는 것이다.”(<이라크>, 198쪽)

조금 번안해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타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연말 보너스를 챙겨주는) ‘선한’ 자본가들이 아니라 (보너스는커녕 월급까지도 떼먹는) ‘악독한/악랄한’ 자본가들이다(다행히도/불행히도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자본가들이야말로 노동자들로 하여금 정말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자각하도록”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사정은 성접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의 표본으로서의, 성의 무한 상품화이고 성노동자에 대한 악독한/악랄한 착취이다(군산에서인가 이리에서인가 시범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그러한 착취만이 전선(戰線)을 교란시키지 않고 분명하게 해줄 것이기에.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지젝은 금융 투기와 인도주의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소로스 같은 인물들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시장 폭리자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더 위험하다”(같은 쪽)고 말하는 것이다(아이러니컬한 것은 헝가리 출신이자 칼 포퍼의 제자임을 자임하는 그 소로스가 하는 ‘인도주의적 활동’에 구 공산권 국가들의 “문화적이고 민주적인 활동을 위한” 재정지원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고, 러시아에서 출간된 지젝의 책들도, 전부는 아니지만, 이 소로스 펀드의 지원하에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지젝이 지난 미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된 사실에 전혀 유감스러워하지 않은 것은 아주 당연하다(오히려 내심으론 아주 반가워했을 법하다).

그러한 레닌주의적 정신에 충실할 때, 이라크 파병(연장)에 반대하는 것은 개량주의적 좌파들, 혹은 얼치기 좌파들의 행태이다(물론 ‘반대하는 척’ 할 수는 있다). 오히려 적극 찬성해야 마땅하다(그래야지 ‘자본주의와의 전쟁’도 빨리 끝장을 볼 게 아닌가?). 즉, 친미 수구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그건 성매매 방지법안을 놓고서도 마찬가지이다. 포주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비록 전혀 다른 이유/계산에서이긴 하지만.(해방공간에서 제출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도 ‘반탁’에서 돌연 ‘친탁’으로 돌아선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적과의 동침’은 레닌주의이건 마오주의이건 간에 A급 좌파의 기본 ‘전술’이다(수단으로서의 모든 ‘전술’을 정당화하는 건 목적으로서의 ‘전략’이다).



반면에, 성매매/성접대에 반대함으로써 ‘접대 없는 자본주의’를 희구하는 태도는 ‘인간적인 자본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용인하는 태도이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만큼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딱 불가능하다). 그것이 소위 개량주의적/타협적 태도이며,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무해한 자본주의’(적어도 ‘덜 유해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량주의적 좌파(가령,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와 자유주의자(가령, 고종석) 간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가령, 고종석은 ‘마약 없는 마약’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지지하며, ‘섹스 없는 섹스’ 사이버-섹스를 지지할 법하다. 민노당도 마리화나와 사이버-섹스를 지지하나?). 적어도, 근본주의적 좌파나 우파(=수구반동)와 비교해본다면 말이다(고종석은 칼럼 ‘세속사회를 위하여’에서 세속사회에 덜 간섭하는 ‘덜 유해한 종교’를 지지한다. 나는 그걸 데리다식의 ‘종교 없는 종교’의 고종석 버전으로 이해하고 싶다.)

06.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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