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출간된 알베르트 망구엘의 <독서일기> 때문에 생각된 글이 있다. 재작년 봄에 모스크바통신에 번역해서 올렸던 것인데, 애서가에 관한 움베르토 에코의 기명 칼럼. 이탈리아 잡지 <레스프레소(L’Espresso)>지에 실렸던 것이 당시 러시아 신문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우리말로는 ‘문학신문’이고 매주 수요일 발행)에 번역/소개되었었다. 그걸 중역한 것. 

에코의 <레스프레소> 칼럼들은 <미네르바 성냥갑>(열린책들, 2004)이란 제목으로 두 권 분량이 국내에 번역된 바 있다. ㅡ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나 <작은 일기> 등도 역시 이런 류의 칼럼들을 모은 것이다. '애서가'에 관한 그의 칼럼도 언젠가 이탈리아어에서 직역될 듯하지만, 여기서는 중역된 것을 창고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 이미지들을 좀 집어넣어서.  

  

최근에 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두 차례 ‘책 수집’이란 테마를 다룰 기회가 있었고, 두 번 다 청중 가운데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책 수집에의 열정’을 애서가 자신들에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읽기에의 애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르네상스 시기 회화나 중국의 도자기를 수집하는 사람의 집이 갔다고 해보자. 물론 당신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에게 다 바랜 17세기의 소책자를 보여주면서 그 주인이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읽었을 거라고 단정지을 때, 따분한 손님은 대개 헤어질 시간만을 겨우겨우 기다릴 것이다.


 

 

  

 

책 수집 – 이것은 책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 책의 내용에 대한 사랑까지 늘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당신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경우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애서가라면 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책을 갖고 싶어하며, 더 나아가 가급적이면 초판본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어떤 애서가들은(나는 찬성을 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한다) 손에 넣은 책을 심지어 열어보기조차 하지 않는다. 책을 망칠까봐서. 그들에게서 희귀본의 책장을 여는(열기 위해 자르는) 것은 시계 수집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계 뒤쪽을 열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서가는 단테의 <신곡>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곡>의 특정한 판본이나 특정한 책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책을 만져보고, 책의 페이지들을 쓰다듬어보며, 책의 장정을 손에 들고 다니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마치 자신을 매혹시키는 어떤 대상처럼 책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책은 그에게 자신의 내력과 삶에 대해서, 자신을 소지했던 많은 사람들의 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때로는, 엄지 손가락 자국, 난외의 메모들, 밑줄들, 속표지의 자필서명들, 심지어 책벌레의 흔적들 등등이 이런 이야기들을 해준다. 하지만, 더욱 황홀한 일은 500년 전에 발간된 책이 당신의 손이 새 책처럼 깨끗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짝 갈라지는 소리를 낼 때이다.

 

 



 

 

하지만, 50년이 안된 책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나에겐 50년대 초에 발간된 E. 질송의 <중세철학>이 있는데, 이 책은 내가 학위논문을 방어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오고 있다. 그 당시에는 종이의 질이 열악해서 지금은 종이가 다 부서져 심지어 책장을 넘기기도 힘들다. 만약에 이 책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만 쓰였다면, 나는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새 판본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밑줄과 여러 잉크로 씌어진 메모들이 있는 바로 이 낡은 책이며, 세월과 무관하게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성장해 가던 시절뿐만 아니라 최근의 기억들까지도 상기하게 된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보통 ‘책 수집에의 열정’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수억 리라씩 하는 희귀본들도 있다(몇 년 전에 <신곡>의 초판본이 15억 리라에 경매에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사랑은 고서(古書)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엔 현대시의 초판본 같이 단순히 좀 오래된 책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예컨대, <살라나>출판사에서 나온 <아동문학전집>을 구하는 애호가들도 있다.



3년 전에 나는 한 헌책방에서 지오반니 파피니(1881-1956)의 <곡>, 제본됐지만 진본 종이 표지를 가진 초판본(*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2만 리라에 구입했다. 하지만, 캄파노(?)의 <오르페우스의 노래> 초판본은 10년 전에 우연히 (경매)목록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천 3백만(리라)에 구한 것이다(물론, 이 가련한 사람이 이런 책을 뜯어볼 기회를 가진 것은 다해봐야 몇 권에 불과했다). 하지만, 20세기 책들에 대한 훌륭한 수집(컬렉션)도, 피자가게에서 저녁을 먹는 걸 제외하고 이따금 모든 걸 희생하면서라면, 가능하다.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나의 학생 하나는 특이하게도 다양한 시대의 여행 안내책자를 수집했다. 처음엔 그런 발상이 나에겐 좀 별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퇴색한 사진들로 채워진 이 책자들에 기초하여 이 학생은 나중에 아주 훌륭한 졸업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시각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별로 가진 거 없는 젊은이들도 ‘포르타 포르테제’나 ‘상트 암브로지오’ 시장에서 뜻하지 않게 16세기나 17세기 책들과 맞닥뜨릴 수 있다. 이 책들이 지금은 좋은 운동화 한 켤레 값 정도이고, 진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시대를 증언해 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책 수집은 우표 수집과 아주 유사하다. 물론, 진짜 수집가들에게는 언제나 엄청난 고가의 어떤 것이 있다. 하지만, 내가 회상하는 건, 아직 어린 꼬마였을 때 신문판매점에서에서 10장 혹은 20장으로 포장된 우표를 사서는 그날 저녁을 내내 이 다채로운 색깔의 직사각형(=우표)에서 본 마다가스카르나 피지 군도를 상상하면서 보내던 때이다. 이런 우표들은 물론 결코 드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것들에 대한 향수(노스텔지어)를 경험한다.

06. 0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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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99 2006-03-1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제본됐지만 진본 종이 표지를 가진 초판본(*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은 초판본인데 (표지도 초판본의 표지를 그대로 사용해서) 제본만 새로한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뜻 생각이 떠올라 주제 넘게 끄적여 봅니다.

로쟈 2006-03-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내에도 그렇게 만드는 책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대략 그런 식이지 않을까라고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south99 2006-03-1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끔 그런 식으로 제본합니다. 아끼는 책이 너덜거리면 다시 해체해서 제본합니다. 페이퍼백의 경우 2-3천원이면 되더라구요. 항상 로쟈님의 서재를 흥미롭게 드나들고 있습니다. 인사 겸 해서 다시 끄적입니다.

로드무비 2006-03-1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롭습니다. 퍼갈게요.^^

twoshot 2006-03-1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수집이 우표수집과 유사하다는 말씀에 슬쩍 찡한 느낌이 오네요. 제가 가지고 있는 박정희우표, 최규하우표, 전두환우표가 밉지만은 않은 것이...

로쟈 2006-03-21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귀님/ 정확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페이퍼는 그래도 읽어주시는군요.^^
 

작년에 내한한 바 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관한 몇 가지 자료들을 인용-정리하고자 한다. 나의 관심은 조금더 문학적인 차원에서 러시아 민족주의 혹은, '러시아에서의 네이션과 소설(Nation and Narration)의 문제'란 테마에 놓여 있지만, 사전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앤더슨의 민족주의 비판적 문제제기에 관한 국내외의 논란(민족주의 vs 탈민족주의)도 얼마간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 물론 그걸 일거에 정리할 만한 역량을 나는 갖고 있지 않으며 대신에 몇 가지 자료를 인용-정리해놓는다.

그러고 몇 시간... 집앞에 있는 PC방을 놔두고 볼일 때문에 나왔다가 5분쯤 거리에 있는 PC방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예상대로 초딩들이 진치고 있는지라 공기가 훨씬 낫다(집앞 PC방은 한 시간만 죽치고 있어도 옷에 담배 냄새가 밴다). 집에 인터넷을 깔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백수파보다는 초딩파에 붙어지내야겠다. 흡연/끽연 문제에 있어서 나는 백수들보다는 초딩들과 더 강한 연대의식, 공동체의식을 느낀다... 

 

 

 

 

갑작스레 베네딕트 앤더슨 얘기를 꺼내게 된 건(물론 작년봄 그가 강연차 내한했을 때도 몇 마디 거들려다가 그만두긴 했었다) 어젯밤에 문득 호미 바바가 편집한 'Nation and Narration'(Routledge, 1990)을 꺼내들고 서문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러시아 국민문학 발생의 문제에 관한 생각을 좀 진전시켜보자는 속내에서. 러시아에서도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을 한두 권 구해왔었다), 그런데 거기 제일 처음 인용되는 문장이 바로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가. 다행히 박스에 들어가 있지 않은 국역본을 바로 서가에서 꺼내들었다. 몇 년전에 개정판 원서(1991; 초판은 1983)를 구하려다가 못 구한 적이 있는데(대출중이었던가) 이 참에 구해서 읽어보기로 마음먹고(사실 앤더슨의 기본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제목 자체에 기입돼 있기도 하지만, 여러 소개/해설들을 통해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다).

 

 

 

 

책을 열자마자 '감사의 말씀'에 나오는 첫문장. "독자들도 알아보겠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나의 사고는 에릭 아우얼바흐, 발터 벤야민 그리고 빅터 터너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5쪽) 그러니까 <상상의 공동체>를 읽기 전에 예비적으로 좀 읽어줘야 하는 책이 아우얼바하(아우얼바흐;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벤야민의 <일루미네이션>(<조명>), 터너의 <제의에서 연극으로>(현대미학사, 1996) 등인 것. 전공상으론 가장 가까운(아마도 개인적인 면식도 있을 듯한데) 문화인류학자 터너의 책으로 앤더슨이 참조하고 있는 책은 'Dramas, fields, and metaphors : symbolic action in human society'(Cornell University Press, 1974)이지만, <제의에서 연극으로>에서도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문장.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의 형인 페리 앤더슨과 안토니 바네트, 스티븐 헤더의 논평과 조언으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았다." '뉴레프트지' 편집장으로도 유명한 맑스주의 이론가 페리 앤더슨은 사실 베네딕트 앤더슨보다 일찍 국내에 소개되었고 훨씬 잘 알려져 있다. 한데, 페리는 베네덱트의 형이 아니라 동생이다(베네딕트가 36년생이고, 페리는 38년생이다). 물론 영어 단어 brother는 형/동생을 가리지 않지만, 이 경우에 '나의 형'이라고 옮긴 것은 오역이다. 아주 사소하지만(앤더슨 집안 문제이니까), 번역본에 대한 신뢰에 약간 금이 간다(이런 건 그냥 사실 확인만 해보면 되는 것인데). 본문에서 이 금이 더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밖에(한데, 그런 사소한 오역은 12쪽에서도 나온다. 홉스봄의 책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가 <1788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로 잘못 옮겨졌다. *확인해보니까 원서 자체의 오타이다). 아래 사진은 앤더슨가의 형 베네딕트와 동생 페리. 

 

형 베네딕트가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것은 사진 자체가 비교적 최근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봄 방한시에 찍은 것이니까. 그때의 인터뷰 기사 두 건을 옮겨온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의 것이다. 내가 더 집어넣은 이미지들도 있다.  

동아일보(05. 04. 26) “20세기 민족주의는 19세기 민족주의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21세기 민족주의는 기존의 민족주의와 전혀 다른 ‘돌연변이 민족주의(mutant nationalism)’가 될 것입니다.” 민족주의가 근대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학설을 체계화한 베네딕트 앤더슨(69)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가 한국을 처음 찾았다. 그가 1984년 발표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는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과 함께 민족 또는 민족주의가 근대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구성됐음을 정교하게 이론화한 저서로 꼽힌다.  

-앤더슨 교수는 한국동남아연구소와 서강대 동아연구소의 공동 초청으로 24일 방한해 26일 서강대 김대건관에서 ‘동남아의 부르주아 과두제’를 주제로 특별강연한 뒤 출국했다. 25일 저녁 그를 만나 최근 동북아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민족주의의 파고(波高)와 관련해 앞으로 민족주의의 전개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민족주의는 21세기에도 번성할 겁니다. 민족주의는 이제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피부 같은 존재가 됐어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공동체를 유지해주니까요. 문제는 국내외 갈등상황만 발생하면 이 피부가 벌겋고 크게 부풀어 오른다는 데 있습니다.”  

-동북아에서는 민족주의의 파고가 높게 일고 있는 반면 유럽연합(EU)에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통합의 움직임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독일출신의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토 16세)교황이 됐을 때 영국신문에서는 ‘나칭거’(나치+라칭거의 합성어)라는 제목을 뽑을 정도로 민족주의는 모든 나라에 뿌리 깊게 잠복해 있습니다. 지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가장 두드러진 나라가 바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란 점도 이를 증명해요. 동북아의 민족주의 강화현상에도 자본주의화를 택함으로써 혁명의 정통성을 상실한 중국 정부의 국내 정치적 불안감이 깔려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베트남 유모에게서 자라고 아일랜드 국적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앤더슨 교수는 19세기와 20세기에 민족주의가 정복과 팽창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21세기 민족주의는 오히려 분열과 해체, 응축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국가의 확립이 국경선의 성역화로 나타나면서 1960, 70년대 이후 영토를 넓힌 민족국가는 없지만 구소련이나 유고연방처럼 오히려 영토가 나눠지는 경우는 늘고 있어요. 중국 인도와 같은 다민족국가도 이런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지구화의 흐름 속에 본토가 아니라 해외에 거주하는 민족구성원들에 의해 민족주의가 근본주의화하는 문제도 지적했다.

“아일랜드 본토에서는 아일랜드의 세계적 축제인 ‘성 패트릭 데이’에 동성애자들의 참가를 진작에 허용했지만 미국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아일랜드 인들은 전통에 어긋난다며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대만 공격을 가장 거세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 본토인이 아니라 미국의 화교들입니다. 힌두교 근본주의 본부가 있는 곳은 인도가 아니라 영국 런던이죠.”

-앤더슨 교수는 이러한 ‘원거리 민족주의’에는 과거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민족주의와의 행복한 동거를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겨레(05. 04. 27) “동남아시아에서 90년대 사회 개혁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동남아 사회의 중산층을 이루는 화인들이 개혁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민족주의 연구의 권위자 베네딕트 앤더슨(69) 미국 코넬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26일 오후 서강대에서 한국동남아연구소와 서강대 동아연구소 주최로 열린 ‘동남아의 부르주아 과두제’ 강연에서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말문을 열었다.

-앤더슨 교수는 70년대까지 군부나 우파의 독재정권이 집권해 온 동남아 나라들이 80년대 이후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했지만, 중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인(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한 화교)들이 공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개혁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민주화나 개혁이 성공하려면 고등교육을 받고 경제력이 중산층이 나서야 하는데, 동남아 화인들은 경제적 성공에만 치중할 뿐 정치나 공적 영역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주로 농사를 짓던 화인들은 자연재해나 아편전쟁 등의 정치적 변화를 계기로 동남아 각 지역에 정착했으나, 현지 문화에 동화하지 못해 현지의 사회·정치적 문제가 ‘내 일’로 다가오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칸 영화제에서 <열대병>(2004년)으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타이 영화감독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이 정작 타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이와 연관시켜 설명했다. 타이의 민족주의적 문화나 정신을 표현한 작품에 화인들이 동질감을 느끼지 못해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동남아 화인들이 각 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화인 인구는 3.5%에 불과하지만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73%에 이르는 지분을 갖고 있다. 말레이시아나 타이, 필리핀 등에서도 소수의 화인들이 전체 민간 자본의 50% 이상을 갖고 있다.

-화인들에게 부가 집중되면서 집권세력과 화인들의 관계는 자연스레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해 갔다. 화인들은 세금으로 집권층의 재정을 채워줬고, 집권층은 이들의 경제활동을 보장해 줬다. 화인들의 유교적 가부장 문화와 동남아 나라들의 압제적 권력구조가 비슷한 것도 이들이 정치 개혁에 나서지 않는 한 이유라고 앤더슨은 덧붙였다.

-앤더슨 교수는 대표적 저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1983년)에서 민족의 개념을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라고 규정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 동아일보 게재됐던 신용하 교수의 탈민족주의론 비판. 신교수는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이며, (당연하지만) 대표적인 민족주의 옹호론자이다. 그의 기본입장은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해방적 민족주의'를 구별하고 이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일제의 침략적 민족주의와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같지 않다는 것). 따라서 섣부른 민족주의 비판은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격이라는 게 신교수의 비판이다.    

동아일보(06. 03. 04) 민족은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배우고 믿어 왔듯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근원이자 완성일까. 민족주의의 권력 지향성과 배타성 등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며 탈(脫)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 학계에서 확산돼 왔다. 탈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은 상상에 의한 허구라고 주장한다. 반면 민족은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공동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신용하(愼鏞廈) 한양대 석좌교수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는 국내 학계의 탈민족주의 움직임에 대해 포문을 열고 나섰다. 일제하 독립운동사를 주로 연구해 온 신 교수는 한국사회학회 학회지 최근호에 실린 논문 ‘민족의 사회학적 설명과 상상의 공동체론 비판’에서 탈민족주의 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의 대표 저서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1984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신 교수가 최근 왕성하게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국내 탈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을 직접 거명하진 않았지만 이들을 겨냥한 것은 분명하다. 신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 논문을 계기로 탈민족주의 진영의 학자들과 일대 논쟁을 벌이고 싶다”고 밝혔다. 앤더슨 교수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민족’이란 개념이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 이주민의 후손(크리올료)들이 유럽 본토인과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발명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민족 개념이 유럽과 제3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신 교수는 민족은 공동의 언어·혈연·문화공동체라는 객관적 요소에 민족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더해져 공고해진 실체라고 반박했다. 객관적 요소들로만 형성된 민족을 ‘즉자(卽自)적 민족’이라고 한다면 주관적 요소인 민족의식이 더해진 민족을 ‘대자(對自)적 민족’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상상의 공동체론’은 주관적 요소인 민족의식에만 주목한 나머지 ‘즉자적 민족’을 부인하고 있다는 게 신 교수의 지적이다. 신 교수는 “앤더슨 교수가 ‘상상’이란 표현을 통해 민족을 허위의식, 허구,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몰고 갔다”며 “‘상상의 공동체론’을 약소민족의 해방 투쟁에 적용하면 실재하지도 않은 ‘상상물’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한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이어 “‘상상의 공동체론’은 오늘날 제3세계의 민족해방, 민족통일, 민족국가 건설과 발전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 도구를 제공할 수 있으나 사실에서 이론을 정립하는 경험적 사회과학으로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맹비판했다. 신 교수는 민족을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의 일환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비판했다. 에스닉 그룹은 다민족국가인 미국에 적용될 수 있는 ‘문화와 관습의 하위공동체’로서, 민족 형성 이후에 다른 지역에 이민한 탓에 민족의 특성이 많이 해체 소멸돼 가는 정태적 공동체라는 것. 반면 민족은 한 사회의 다수집단의 언어·지역·혈연·문화의 공동체로서 형성돼 발전되어 가는 동태적 문화공동체라는 게 신 교수의 설명이다.  

-신 교수는 민족주의를 크게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와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로 구별해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과거 서구 제국과 일본처럼 다른 약소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빼앗고 억압하는 민족주의이고,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는 피압박 민족들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해 민족의 자유와 해방,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를 말한다. 그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민족 해방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기초인 유형화를 소홀히 한 잘못된 비판”이라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제국주의 침략 아래 신음하는 자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행동이 민족주의 문필가들의 선동에 속아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물’에 생명을 바친 어리석은 행동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며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실재(實在)의 공동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하는 기자의 보충기사로 탈민족주의론자들의 견해를 정리하고 있다.  

■ 脫민족주의자 주장은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의 가혹한 시련을 견뎌내며 광복과 건국, 근대화와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을 이끌어 온 견인차였다. 최근에는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서 민족주의를 외치는 현상이 강화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더욱 번성하고 있다. 탈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족주의를 “현대의 신화”라고 지적하며 성역화된 민족주의의 이면에 감춰진 권력지향성, 배타성, 집단성, 가부장성 등을 폭로한다.

 

 

 

 

국내의 탈민족주의 담론을 주도하는 학자로는 임지현(林志弦·역사학) 한양대 교수가 첫손에 꼽힌다. 임 교수는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도발적 저서를 통해 이념으로 기능해 온 민족주의를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식민시대 민족이 국가의 공백을 채워 주는 절대적 신화였다면 광복 이후에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권력 유지를 위한 대중 동원 수단으로 쓰였다고 주장하며 민족주의와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영훈(李榮薰·경제사) 서울대 교수도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다. 이 교수는 ‘민족’이라는 말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고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으로 신격화한 것도 근대의 산물일 뿐이라며 ‘민족주의는 반(反)지성적 신화’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박지향(朴枝香·서양사) 서울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는 논자. 탈민족 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번역한 박 교수는 민족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내면화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철학가 탁석산(卓石山) 씨도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라는 저서에서 한국에서 ‘민족’은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처럼 국가 건설이 불가능했던 시기 국가의 대체물로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였던 만큼 국가 수립 이후에는 ‘시민’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시위 모습이다. 끝으로 마지막 자료는 교수신문에 기고된 김봉률 교수의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비판"(05. 12. 21). 강조는 나의 것이다.

-이안 와트가 18세기 중엽에 '소설의 발생'을 강조하는 것은 18세기 중엽에 소설이 발생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1958년에 <소설의 발생>(열린책들, 1988)이 출간될 때 소설 발생이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영국을 능가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종주국으로 짧은 역사와 전통의 부재라는 특유의 미국적 콤플렉스를 해소하고자 했는데 소설과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장르정치학 역시 그 작업의 일환이다. 더 나아가 콤플렉스 해소에 멈추지 않고 근대 민족주의가 미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과 함께 소설 역시 미국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근대성의 기원을 전유하려는 전도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와 낸시 암스트롱과 레오나드 텐넨하우스의 <상상의 청교도>(The Imaginary Puritan)에서의 민족주의와 소설의 미국적 전유에서 잘 나타난다.

-근대 영국 자본주의에서 소설이 발생했다는 와트의 명제가 일단 미국에서 제도화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첫째는 소설 기원의 문제가 일반 소설의 기원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서구 근대 소설의 기원이 과연 근대 영국에서 일어났는가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은폐, 배제되고 당연히 소설은 근대 영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제된다. 둘째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전도된다. 영국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 리얼리즘이고 미국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 로망스라는 전도된 관계는 언제든지 영국 기원설을 미국이 전유하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가 1992년 '상상의 청교도'에서 주장한 ‘소설의 미국 기원설’은 미국적 예외주의를 논리로 내세운다. 소설의 근대영국 기원설이 유럽문학의 전통에서 하나의 예외라는 영국적 예외주의에서 출발했다면 미국적 예외주의 역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영국문화가 식민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 반면 식민지의 글쓰기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으로 되흘러 갔을 때 일어났던 것을 탐색해보려고 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이 보기에 “소설은 무엇보다 최초로 유럽적 장르가 아니고 오히려 식민지 경험을 동시에 기록하고 기록했던 장르”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식민지에서 영어(English) 정체성의 새로운 토대를 창조했던 인쇄문화라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런 주장이 있기 위해서 그 전사로서 있어야 되는 것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이다. 앤더슨이 강조하는 것은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보다 미국이 근대 민족주의가 최초로 기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는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주목받지 못한 것에 분개하면서 “현 세계의 모든 중요한 것은 유럽에서 기원하였다는 기만에 익숙한 유럽 학자들에” 반기를 들고 “민족주의가 신세계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나의 원래 계획의 일부였다”(13-4)고 주장한다. 이처럼, 아메리카 대륙, 특히 미합중국에서 발원한 민족주의가 유럽으로 건너가 언어 민족주의를 유발시켰다는 것은 소설이 미합중국에서 발생해서, 기원의 소설로 주장되는 영국의 <파멜라>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같은 논리구조를 이루고 있다.

-앤더슨의 쇼비니즘은 근대 서구소설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요한 언문일치와 민족의 문제에 관한 고찰에서 잘 드러난다. 앤더슨에 의하면, 16세기에 서구사회에서 이윤을 위한 지방어 서적의 대량 출판은 다양한 방언들을 소수의 표준어로 활자화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일한 지방 활자어 서적을 읽는 독자들은 다른 지방 활자어를 읽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대를 상상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언문일치가 종교개혁, 자본주의, 절대주의 시대의 지방행정어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하더라도 수많은 방언들이 난립해 있었고 이를 차츰 해소하여 민족의 경계를 정할 정도의 독점적 언어의 지위를 차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활자어로 보고 있다. 이 활자어들은 신문과 소설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사회적 유기체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통해 달력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따라 앞으로(혹은 뒤로) 꾸준히 움직이는 견실한 공동체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비유가 된다”고 하면서 민족의 기원과 소설의 기원을 동일시하고 있다. 앤더슨의 인쇄에 대한 강조는 민족과 소설을 함께 묶어 상상의 실재로 만드는데 있다.

-그런데 그에게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만이 아니다. 중세 제국도 종교적 “상상의 공동체”이고 세계사적 조건에서 자본가도 “본질적으로 상상의 기반 위에서 결속력을 성취한 최초의 계급”이다. 자본가 계급을 결속시키는 것 역시 앤더슨에게는 활자어로 소설과 신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논리대로라면 근대적인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상상의 산물이 된다. 그런데 그가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을 형성하는데 활자어로 된 소설과 신문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놓은 것은 일종의 문화적 기술주의이다. 문화의 물질성을 밝힌다는 것이 문화가 물질성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전도된 분석방법을 쓰고 있다.

-앤더슨에 따르면, 초기 서적시장은 라틴어를 아는 소수 엘리트를 겨냥하였으나 인쇄술이 발달하여 16세기 초에 이미 ‘기계제 재생산’의 시대에 들어서서 인쇄자본가들은 대량출판에 눈을 돌렸다. 이미 16세기에 인쇄가 상상의 공동체를 매개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는데 왜 하필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인쇄만이 최초로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케 하여 민족됨(nationness)을 먼저 자각하게 했을까? 앤더슨은 인쇄된 자국어물들은 단지 “절대주의 전제정”을 중앙화의 도구로 제공했을 뿐이고 어떤 “원형적 민족적 충동”도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언어를 체계적으로 부과한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필자와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지만, 무엇보다도 민족됨이 공화국의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한 예비과정이다.

-그는 언어와 종교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전쟁을 했던 크리올과 본토인의 차별의 문제로 전환한다. 앤더슨은 근대 민족국가의 구체적 형성이 결코 특정 활자어가 결정적으로 도래한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민족이나 공화국이라 정의한 1776년에서 1838년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정치실체인 미국에서 최초의 민족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민족됨”의 주장은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nation을 혼용하여 반증 회피의 수단으로 삼는다. 사실상 이들이 자각한 것은 민족됨이 아니라 국가의 형성 필요성이었으며, 또한 북미 독립운동을 한 13개 식민주의의 많은 지도자들은 노예를 소유한 부자 농업가들로 사실상 인디언이나 흑인 노예 그리고 프랑스나 스페인계의 일반인들과는 다른, 거의 봉건시대 영주들과 비슷한 지위를 지닌 자들로 근대적 민족의 범주와는 다르다.

-그는 인도를 동인도회사령으로 삼은 것을 예로 들면서 17세기 이후의 해외영토 정복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이전 시대의 것”으로 정리한다. 그런데 해외 식민지 정복은 선박의 건조나 군대, 엄청난 경비 등으로 인해 국가적 지원체계가 꾸려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따라서 절대주의 체제나 그 이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의 시원을 식민지 본국으로부터 차별을 당하는 크리올의 반항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또한 그것을 모방하여 유럽이 민족주의체제로 나아갔다는 전제 아래 입헌군주제나 절대주의 체제에서의 민족국가의 문제를 배제하였다.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가 제기하는 문제는 '파멜라' 이전에 글쓰기 능력만을 지닌 평범한 여성의 육체를 중요시하는 소설들이 영국 내에서 없다고 할 때 이런 󰡔파멜라󰡕의 전통은 어디서 왔는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귀족에 대한 담론과 보통 사람에 대한 담론이 소설에서 분기하는 지점은 영국적 미국인인 메리 롤란드슨(Mary Rowlandson)이 쓴 <되찾은 포로>(The Redeemed Captive)(영국판 1682)에 있다고 보고 영국 산문의 원천이 되는 것은 17세기 말과 18세기 동안 북 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씌어진 포로 서사라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17세기 인디언 포로서사에서 장르가 증식되고 분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롤란드슨은 납치된 몸으로 신세계에서 영국을 대표한다. 그는 인디언 즉 비영국적 문화 가운데서 문자해독의 힘을 보여준 영국여성으로서 영국적 미국의 경험이 되는 원천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영국적인 것을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이들 포로서사가 독자들에게 영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꾸길 요구하는 데 그것은 문자해독능력 곧 영어를 읽고 쓰는 능력의 문제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기 동안 프랑스 인들은 영국인 등장인물에 위협이 되었지만 후기의 포로서사에서 영국인 개인을 유럽 태생의 남녀와 구별해주는 것은 영어에 대한 문자해독능력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어”는 영국적인 것의 핵심이 되고 식민지에서 근대 국가의 탄생 문제와 결합한다.

-식민지 모국인 영국에서 독립할 때 민족의 문제에서는 언어를 배제했지만 독립한 이후 민족의 문제에서는 영어 활자어가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앤더슨과, 인쇄된 영어로 씌어진 포로서사가 최초의 소설이라는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는 소설과 신문을 통해 인쇄된 영어를 내세움으로써 유럽대륙과 아시아를 배제하고 급기야 영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민족주의와 소설의 기원을 전유하는 장르정치학의 놀라운 귀결을 보여준다.

김봉률 교수의 글은 '쇼비니스트' 앤더슨에 대한 흥미로운 비판을 담고 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은 <상상의 공동체>을 읽어본 후에 내리도록 하겠다(원서를 오늘 입수했다). 한데, '민족'이 비록 '상상의 공동체'라 하더라도 실감나는 공동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06. 3. 15 - 16.

P.S. 베네딕트 앤더슨 이전에 민족주의 연구에 있어서 최고 권위자는 한스 콘(1891-1971)이었다. 국내에는 그의 <민족주의>(삼성문화재단, 1974), <민족주의시대>(박영사, 1975), <근대 러시아, 그 갈등의 역사>(심설당, 1981), <19세기 유럽 민족주의>(탐구당, 1990) 등의 번역/소개돼 있고, 내가 학부시절에 읽은 것도 그런책들이었다. 앤더슨이 내세우는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 연구 접근법에 있어서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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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3-15 11:02   좋아요 0 | URL
아 이거 제가 관심있게 보는 주제입니다. 요번에 <상상의 공동체> 구입했는데.

로쟈 2006-03-15 11:04   좋아요 0 | URL
예, 저도 필요 때문에 관련서들을 읽고 있습니다(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6-03-15 12:11   좋아요 0 | URL
저두 민족주의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계속 자료가 올라오면 좋겠네요.

기인 2006-03-16 17:41   좋아요 0 | URL
항상 로쟈 선생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신용하 선생님의 비판도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이라는 개념이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용하 선생님도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드셨지만, 혈연, 문화, 언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애매하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까지는 '다른' 혈연, 문화, 언어로 볼 것이냐는 것이 '민족' 혹은 '국민국가'로 정해지는 면도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ㅎㅎ 읽기만 하다가 주절주절 써 봅니다.
로쟈 선생님 글들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로쟈 2006-03-16 18:42   좋아요 0 | URL
'로쟈 선생님'이라고 하시니까 멋쩍네요. 그냥 '로쟈님'으로 해주십시오(저에게 수업료 내시는 것도 아니니까^^). 제가 알기에 '상상된 공동체'라고 할 때, 앤더슨이 염두에 두는 것은 (신문과 함께) 근대소설입니다(이에 대한 자료들을 그는 자세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설(허구)들에 의해서 매개된 민족의식이나 공동체의식을 '객관적'인 것으로 봐야할지, '주관적'인 것으로 봐야할지는 저도 읽어보면서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요 며칠은 '야구공동체'라고 해야겠네요). 그리고, 말씀대로 '혈연, 문화, 언어' 모두 모호한 기준들이죠. 그것들이 우리를 '확실한' 민족-공동체로 만들어준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책은 원저가 독일에서 발간된 지 25년만에 완역, 출간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나남,  2006)이다. 숱한 고전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실정에서 '25년'이면 그다지 대단한 시간차는 아닌 듯도 하지만, 저자의 지명도와 국내에서의 명성을 고려해볼 때 이번 출간은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니 일단은 타박부터 터져나온다.

 

 

 

 

아마도 가장 적절했을 타이밍은 10년전, 그러니까 그가 방한했었던 지난 1996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도 국내에는 하버마스 전공자나 연구자들이 결코 적지 않았었다(현재의 역자를 포함하여). 그건 방한에 맞춰 출간됐었던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나남, 1996)이나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집 <하버마스: 이성적 사회의 기획, 그 논리와 윤리>(나남, 1997)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해서, 소위 하버마스 후기철학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책의 번역출간이 이렇듯 지체된 이유를 나로선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각한' 번역서이지만 출간을 환영한다. 이젠 전공자들이 독어나 영어로 진땀을 빼가면서 읽지 않아도 되니까. 내친 김에 일반 독자들도 읽어볼 수 있게 됐으니까(번역은 민주주의에 기여한다).  

 

 

 

 

소개를 옮기자면, 이 책은 "<공론장의 구조변동>(1962),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과 함께 합리성 옹호의 3대 주저로 평가받는 책"이다. 더불어 (있으나 마나한 번역서란 얘기를 듣는) <인식과 관심>(고려원 1996), <사실성과 타당성>(나남, 2000)과 함께 이론적인 '주저'로 평가된다. 사회철학과 법철학, 윤리학 등을 망라하고 있는 '종합적인' 하버마스에게 단 하나 빠진 게 있다면 '미학' 정도인데, 언젠가 한 대담에서 그는 미학쪽의 책은 쓸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나는 이 '공백'이 하버마스의 사유에서 필연적이면서 그 비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버마스의 미학'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연구서들은 나와 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이 세계가 '생활세계(Lebenswelt)'와 '체계(System)'의 이중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것"과 "이때 생활세계는 언어와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들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진리를 상호 검증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가능한 세계"이며 "반면 체계는 화폐와 권력이라는 비언어적 매체를 통해 행위 조정이 이뤄지는 영역으로 윤리를 배격하고 오로지 합목적적 합리성(도구적 합리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같은 구분을 바탕에 두고 체계의 논리가 생활세계에 침입해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생기는 현대 사회의 병리현상을 지적한다." 거기에 수반되고 있는 것이 사회학 이론사에 대한 하버마스식 정리이다. 그는 "맑스, 베버, 뒤르켐, 미드, 파슨스에 이르는 사회학의 이론사를 체계적으로 수용하고, 인지심리학으로부터 언어이론, 행위이론, 문학인류학에 이르는 현대 사회이론을 총망라"한다. 가히 사회학 이론의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하다.

 

 

 

 

그런데, 그러한 '종합선물세트'를 뜯어보기 전에 잠시 반성해볼 것은 고전적인 사회학 이론서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번역/소개돼 있느냐는 것. '맑스, 베버, 뒤르켐' 같은 3대 이론가는 아직 부족한 대로 입맛 정도는 다실 수 있지만, 미국의 사회학자 미드와 파슨스에 이르면 우리의 번역 살림이 매품이라도 팔아야 할 흥부네 처지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한때 이들의 책들을 뒤적거렸지만, 미드에 관한여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책은 <미드의 사회심리학>(일신사, 1994)이며, 파슨스도 <현대 사회들의 체계>(새물결, 1999) 와 오래전에 절판된 <지식과 사회>(탐구당, 1972) 정도가 고작이다(사회체계론자이자 하버마스의 이론적 맞수인 니클라스 루만의 국내 번역/소개도 빈곤하기 짝이 없다. 일단은 방대한 주저인 <사회체계론>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해서, 한국어로 사회학 고전들을 읽는다는 건 아직은 언감생심이다. 그저 코저의 <사회사상사>나 터커의 <현대 사회학 이론> 같은, 혹은 앤서니 기든스의 입문서들을 참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아마도 둘 중 하나인지 모르겠다.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에 사회학 이론은 불필요하든가, 아니면 사회학의 고전이론서나 번역하고 있을 만큼 우리 사회학자(혹은 사회철학자)들이 한가하지 않든가. 정말로?..

 

 

 

 

두번째 책은 줄리아 우드의 <젠더에 갇힌 삶>(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제목에서 팍 풍기는 바이지만, 여성학 교재로 쓰일 만한 책이다. 특이한 건 책을 낸 출판사와도 연관된 것이지만 젠더의 문제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와 연관지어 조명한다는 점. 요컨대, '젠더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책이다. 그러한 연구가 지향하는 바라면 (커뮤니케이션 연구가 으레 그렇듯이) '해방적 커뮤니케이션'일 텐데, 아마도 그런 지점쯤에서 줄리아 우드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 혹은 '커뮤니케이션적 합리성'과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여성학 관련서들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로는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05), 김현미, <글로벌시대의 문화번역>(또하나의문화, 2005),  권혁범,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또하나의문화, 2006) 등이 눈에 띈다. 주디스 로버의 교재용 이론서 <젠더 불평등 - 페미니즘 이론과 정책>(일신사, 2005)도 작년에 나온 책인데, 리뷰를 접해본 바 없어서 필독서인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세번째 책은 안드레아 가보의 <자본주의 철학자들>(황금가지, 2006). 얼핏,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이마고, 2005)를 떠올리게 하는데, 차이라면 후자가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반면에 전자는 '위대한 경영학자들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겠다. 거명되고 있는 경영학자들 가운데, 내게 좀 친숙한 이름은 테일러와 드러커 정도인데(사실 드러커의 책을 읽다가 테일러에 대해 알게 됐다. 워낙에 강조하길래) 자기 경영도 잘 못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이 '20세기 학문'에 대한 '무지'가 새삼스러울 건 아니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프레더릭 테일러에서 피터 드러커에 이르기까지 현대 경영학을 만들어낸 열 세명의 사상가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개인적인 면모에서부터 그들이 어떻게 경영학을 발전시켜 나갔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사상들이 어떻게 거대 기업들을 좌지우지했는지 등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보다 폭넓은 맥락에서 경영학은 시장과 정치라는 변수와 무관하지 않을 텐데, 그 시장과 정치를 묶어주는 키워드가 '자유주의'인 모양이다. 국내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출간한 <자유주의: 시장과 정치>(부키, 2006)를 보건대 그렇다. 책은 '정치적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그리고 '동양과 한국의 자유주의 사상'이라는 3단락을 통해서,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한국'이라는 화두를 풀어나간다. 이런 주제로 이만한 부피의 책이 나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므로 치하(?)할 만하다.

역사적 전후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선 (논리적으로나 권리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가 우선적이며,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것은 그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한 파생적 논리(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한때 논술학원에서. 자유에 대한 나의 생각은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에서도 밝힌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아이디어에 내가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는지 나중에라도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같이 읽어둘 만한 책으론 김영진, <시장자유주의를 넘어서>(한울, 2005), 김비환, <자유지상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민주주의자들>(성균관대출판부, 2005)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읽다가 지루하면 문학평론가 이동하 교수의 <한국문학속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새미, 2006)를 들춰보기도 하면서.

 

 

 

 

네번째 책은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김영사, 2006)이다. '시장' 얘기만 읽다가 가슴 한쪽이 답답해질 경우에 딱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언젠가 한번 쓴 적이 있는데, 나는 미치오 가쿠의 <초공간>(김영사, 1997)을 오래전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은 적이 있다. 이후엔 저자 미치오 가쿠는 나의 '무조건 호감' 대상이다(그는 "뉴욕시립대학의 헨리 세매트 석좌 교수로 이론물리학 분야와 환경 및 평화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권위자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신간은 원저 자체가 작년에 나온 것이니까 저자의 최신간인 듯싶다. 600쪽이 넘는 분량인데, 이론물리학 전공자들은 사회학이론 전공자들과는 처지가, 아니면 태도가 좀 다른가 보다(혹은 한가한 것일까?). 아무튼 반가운 출간소식이다. 사두고 아직 못읽고 있는 <엘리건트 유니버스>(승산, 2002)나 <우주의 구조>(승산, 2005)와 함께 언제 읽어볼 시간이 났으면 좋겠다. 모두가 박병철 교수의 번역인데, 그 열정에 새삼 경의를 표한다.   

 

 

 

 

<평행우주>와 겨룰 만한 책으로 동물행동학, 혹은 비교행동학, "즉 동물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학문적 방법을 정립한" 동물학자이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콘라트 로렌츠에 대한 세밀한 평전 <콘라트 로렌츠>(사이언스북스, 2006; 원저는 2003)가 있다.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스트리아에서 출간되었는데, 로렌츠 입문서이자 필독서이겠다. 더불어 로렌츠가 들려주는 '개의 세상살이' <인간, 개를 만나다>(사이언스북스, 2006)도 나란히 출간됐다. 작년에 나온 김훈의 소설 <개>(푸른숲, 2005)와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한데, 로렌츠에 대해서는 이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는 데다가 '개'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지도 않아서 나로선 미치오 가쿠를 선택했다.

 

 

 

 

이런 선택을 유감스러워 할 만한 책으로 박해철의 <딱정벌레>(다른세상, 2006)도 있다. 책은 '자연의 거대한 영웅 딱정벌레에 관한 모든 것'이란 부제를 달고 있으며 비슷한 책들 가운데에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한다. 저자는 곤충학자이면서 딱정벌레 전문가. 국내에는 아마추어 전문가들이 낸 <딱정벌레 왕국의 여행자>(사이언스북스, 2004)도 있고, 번역서로는 <딱정벌레의 세계>(까치글방, 2002)도 나와 있다. 말 그대로 '다른세상'이다. <딱정벌레>의 저자에 따르면, "현세를 딱정벌레의 시대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딱정벌레들의 다양성과 뛰어난 적응성 때문이다. 알려진 생물 종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엄청난 다양성을 지닌 딱정벌레는 지구상에서 깊은 바다를 제외하곤 어느 곳에 가든 만날 수 있다." 딱정벌레의 시대라,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비틀즈, 딱정벌레들! 

 

 

 

 

다섯번째는 좀 가벼운 책으로 골랐다. 데이비드 노리스의 <조이스>(김영사, 2006)이 그것이다. 역자는 시인 이수명씨인데(나는 데뷔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세계사, 1995)를 읽어본 기억이 있다), 같은 시리즈의 <라캉>, <낭만주의>, <데리다> 모두 좋은 번역이었다. 해서, <조이스>는 아일랜드 출신이 걸출한 작가 조이스의 세계에 대한 입문 가이드로서 요긴할 거란 생각이 든다. 소개에 따르면, "그의 대표작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 <율리시스>와 그 원전이 된 <오디세이아>의 구조를 비교하며 <율리시스>의 상징과 신화적 구조에 대한 풍부한 해설을 곁들여 조이스의 작품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더블린 사람들>이란 초기 단편집도 있지만, 이번 계절에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한번 도전해보시는 건 어떨지. 읽을 만한 국역본이 4종 정도 나와 있다. 번역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사,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조이스의 현란한 곡을 어떤 번역자-연주자가 솜씨있게 연주하고 있는지 비교도 해보면서. 젊음이 아직 다 지나가기 전에...

06. 03. 14.

 

 

 

 

P.S. 주문한 책 배송이 왜 늦어질까 생각해보다가 문득 소개에서 빠뜨린 책을 발견했다. 미레유 뷔뎅의 <사하라 - 들뢰즈의 미학>(산해, 2006)가 그것이다. 도서관에서 보던 불어본 책이 번역돼 나온 것인데, 저자는 생소하지만 '들뢰즈의 미학'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해부가 이루어질 듯도 해서 기대를 모은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불륜, 오리발 그리고 니체>(산해, 2006)도 신간인데, 뷔뎅과 마찬가지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 루이즈 디살보는 작가이자 영문학자로 "한때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함께 뉴저지 주 티넥과 뉴욕 주 새그 하버를 오가며 살고 있다"고. 그런 소개를 접하니 더더욱 종잡을 수 없는 책이다(그나마 '불륜'에 관한 책이란 건 분명해보인다). 그런데 '니체'는 왜? 하여간에 사하라-들뢰즈, 오리발-니체란 커플이 접속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사태는 더 두고봐야겠다. 이런 건 먼저 읽고 리뷰를 써줄 친구가 아쉽다...

P.S.2. '마감' 후에 눈에 띈 책으로 망구엘의 <독서일기>(생각의 나무, 2006)가 있다.

 

 

 

 

이미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 <나의 그림읽기>(세종서적, 2004) 등으로 은근한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알베르토 망구엘은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의 비서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내용인즉, "학창 시절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다. 시력을 잃어가던 세계적인 문호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그의 독특한 촌평에 문학적 영감을 받는다. 전에도 유별나게 책을 좋아했지만 이 만남을 계기로 더욱 독서에 탐닉하게 된다." 현재는 캐나다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최고의 작가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한다. 'A Reading Diary'는 2004년에 나온 그의 최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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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15 02:00   좋아요 0 | URL
'불륜과 오리'발까지는 대충 홍상수적으로 해석해 보겠지만 니체까지 따라 붙으면 대략 난감해지는군요...쿨럭...그나저나 이동하 교수의 근간은 반갑습니다.

로쟈 2006-03-15 09:4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원제는 'Adultery'니까 그냥 '불륜'(혹은 '간통')인데 말입니다...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부대끼며 읽은 한국일보에 두 화가 얘기가 실렸다. 현재 미국에서 투병중이라는 화가 천경자씨의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라는 전시회 소개 기사와 미국의 알츠하이머 화가 어터몰렌에 관한 기사였다. 이런 기사를 큰 비중으로 싣고 있는 게 반갑고 '대견'했다. 덕분어 출근길 짜증을 좀 줄여볼 수 있었다.

 

 

 

 

투병중에도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두 화가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두 소개 기사를 부분적으로 옮겨온다.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해서.

-미국에서 투병 중인 화가 천경자(82)씨의 ‘내 생애 아름다운 82 페이지’ 전에 관객이 몰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와 두가헌 갤러리에서 8일 시작된 이 전시는 꽃과 여인의 화가로 알려진 그의 예술세계를 두루 보여주고 있다. 1998년 미국의 큰 딸 집으로 건너간 그는 2003년 봄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은 있지만 거동은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그의 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이 평일에도 줄을 잇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70~90년대 대표작 30여 점 뿐 아니라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50~60년대 미공개작 4점, 평생 작업한 수채화와 드로잉 180점, 미완성작 42점을 망라하고 있다. 미완성작 중에는 거의 완성해 놓고도 서명하지 않은 작품이 많아 그의 완벽주의를 짐작케 한다. 화가가 즐겨 입던 옷과 쓰던 물건, 여행지의 엽서와 사진, 인형과 장신구 등 각종 수집품도 전시장 군데군데 놓여 그의 체취를 전한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드로잉이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스케치한 이국의 풍물, 예리한 필치로 단숨에 포착한 동물과 인체, 치밀한 관찰의 흔적이 역력한 꽃과 나무 등 펜이나 연필로 그린 이 그림들은 그가 얼마나 기초 작업과 자기 훈련에 철저했는가를 보여준다. 꽃잎 하나하나, 나비와 새의 날개마다 각 부분의 색깔까지 꼼꼼히 적어놓았다. 그를 인기작가로 만든 강렬하고 환상적인 채색화들과 나란히 걸린 이 소박한 밑그림 혹은 습작들은 지독한 연마의 흔적이란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의 드로잉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선보인 적도 없다.

-사람들은 그를 ‘정한과 고독의 작가’라고 부른다. 곱고 화려해서 오히려 더 슬프고 쓸쓸한 그의 그림들은 매우 자전적이다. 언젠가 그는 “내 온몸 구석구석에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는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슬픈 전설의 내력에는 아끼던 여동생의 죽음, 유부남과의 사랑 등 개인사도 있지만, 스스로 예술의 황홀경을 찾아 고독의 끝까지 치달았던 모진 여정이 깔려 있다. 46세부터 74세까지 28년 간 열두 차례나 해외 스케치 여행을 떠나 지구를 한 바퀴 돌다시피 한 것도 예술가로서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내 그림은 분명 어딘가 이상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로 잡을 수가 없다. 내 작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10년 전부터 알츠하이머에 시달려 온 미국 화가 윌리엄 어터몰렌(73)은 자화상만 그린다. 뇌를 갉아 먹는 병마가 화필을 가로막으려 하지만 그의 창작 욕구까지 꺾지는 못했다. 어터몰렌이 2000년까지 그려 온 자화상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 뿐이다. 그러나 화가가 병마와 싸우면서 느꼈을 분노와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발병 초기 자화상은 공포와 고립감을 담고 있다. 이후 저항과 분노에서 부끄러움과 혼란, 고통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혼란스러운 붓 자국만 남아 있는 완전한 자아 상실로 끝을 맺고 있다. 어터몰렌의 자화상은 알츠하이머의 진행과 그에 따른 창작능력 손상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학적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필라델피아 의대 안얀 채터지 박사는 “단순한 좌뇌, 우뇌론이 아니라 사람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뇌의 매우 다른 부분들을 이용한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인간의 뇌가 손상돼 가는 과정이 그대로 표현돼 있는 그림을 보는 것은 그것 자체로 숨막히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면역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어떻게 사람이 창작 활동을 계속하는지를 그는 보여주고 있다”며 감탄했다.

-뉴욕과 유럽의 갤러리에서 호평 속에 판매됐던 어터몰렌의 자화상은 필라델피아 의과대학에서 다음달 30일까지 전시에 들어갔다. 주최측은 알츠하이머를 처음 발견한 독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 박사와 어터몰렌의 삶을 기념할 목적으로 기획했다. 론다 소리첼리 박사는 “알츠하이머를 두려워 하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환자와 가족, 의사, 대중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어터몰렌은 병을 앓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런던을 중심으로 신화와 일상 생활을 소재로 삼은 표현주의 작품을 그려 큰 명성을 얻었다(위의 그림 참조). 런던 북부 유대교 예배당과 병원 벽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현재는 의사소통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런던의 요양소에서 부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래 그림들은 알츠하이머 병의 진행과정을 보여주는 일련의 자화상들. 각각 1994년("머리 위의 강력한 빛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듯 탁자를 꽉 붙잡고 있다"), 1996년(알츠하이머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이며 "노랑과 주황색을 주로 사용했고 두 눈에는 공포감이 역력하다"), 1997년("공간감각을 잃고 있음을 알게 한다"), 2000년작(병세가 최악에 이른 해이며 "창작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작은 캔버스 위에 머리 흔적과 붓자국만 남아 있다).


06. 03. 14.

P.S. 한데, 이 마지막 그림은 왠지 베이컨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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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1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보고 글을 하나 급히 썼어요.
추천하고 퍼갑니다.^^

로쟈 2006-03-1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히 쓰신 글 읽어봤습니다. 책 한권 내시죠?^^

로드무비 2006-03-1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 주제는 못되고요.^^
 

지젝과 그 일당의 히치콕 읽기, 즉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이하 <히치콕>)에 대한 예전의 읽기를 또 옮겨둔다. 가장 앞에 놓였어야 하는. 왜냐하면 지젝의 서문부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나면 나는 원래의 영어본을 읽어가며 이 책을 다시 정리하거나 이 읽기를 보완할 생각이다.

라캉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얼마전에 <에크리>의 완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역자는 역시나 몇 년전에 <에크리> 선집을 낸바 있는 브루스 핑크. 아마도 영어권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라캉 연구자/주석자인 그는 이미 <세미나>의 번역과 주해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에크리> 해설서인 'Lacan to the letter: Reading Ecrits Closely'의 저자이기도 하다(한마디로 말해서, '에크리라면 핑크에게 물어봐!'이다).

국내에는 아직 <라캉과 정신의학> 정도만 소개돼 있는데, 저명한 라캉 이론 해설서 'The Lacanian Subject'의 국역본이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그간에 <에크리> 국역본 출간을 고대해 왔는데, 이번 영역본 출간으로 그 지루함을 덜 수 있게 돼 반갑다(영역본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좀더 정확한 국역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선집을 갖고 있었지만, 지젝의 신간 'The Parallax View'와 함께 단번에 책을 구입한 이유이다. 부피가 부피인 만큼 지젝의 책도 국역본이 나오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릴 듯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지젝의 히치콕 이야기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도하는바 히치콕에 대한 진지한 이론적 접근 자체가 '포스트모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정의한 바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방식의 목적은 바로 처음의 익숙함을 오히려 낯설게 하려는 데 있다.”(12쪽) 그리고, 지젝 등은 그러한 접근방식에, 혹은 ‘광기’에 주저없이 참여하고자 한다. 그 광기란 무엇인가?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는데, 겉보기에는 극히 단순한 플롯이라 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철학적 정치(精緻)함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13쪽)고 간주하는 태도이며, “그 자신의 작품의 가장 미세한 세부까지도 관장한 신과 같은 조물주로 히치콕을 격상시키는”(26쪽) ‘열애가적’ 태도이다.

지젝은 이러한 광신적 태도 속에 히치콕의 오류와 비일관성을 트집잡는 ‘맨정신적’ 태도보다 더 많은 진실이 있으며 이론적으로도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진실은 ‘오버’하는 태도에 있다!). 이것이 책의 서론에서 지젝이 전제하는 것이며, 서론의 나머지 부분은 F. 제임슨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3단계론을 배경으로 삼아 히치콕 영화의 단계를 ‘변증법적으로’ 구획하는 데 바쳐져 있다.

 

 

 

 

지젝은 일단 다섯 시기로 구획하는데, 거기서 첫 시기인 ‘<39계단> 이전의 영화들’과 마지막 시기인 ‘<마니> 이후의 영화들’은 히치콕 ‘이전’과 ‘이후’의 영화들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으며 또 분석하고자 하는 ‘히치콕’에는 부수적인, 하지만 유익한 참조가 되어주기도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중간에 놓여 있는 히치콕의 세 시기이다.

 

 

 

 

(1)1930년대 후반의 영국 영화들: <39계단>에서 <숙녀 사라지다>(<사라진 여인>)까지. (2)’셀즈닉’ 시기: <레베카>에서 <염소좌 아래서>까지. (3)1950년대와 1960년대 초기의 위대한 영화들: <스트레인저>부터 <새>까지. 이러한 구획 이후에 지젝은 이 세 시기의 ‘사회적-역사적’ 매개를 ‘주체성의 지배적 유형’과 ‘욕망의 세 가지 양상’에 대응시키는바, 이때 중요한 준거가 되어 주는 것은 이른바 ‘히치콕적 대상’의 지배적 형식이다. 지젝은 이 대상을 세 가지(대상a로서의 맥거핀, 교환대상으로서의 상징적 대상, 그리고 Φ로서의 실재)로 분리해 내며, 이것이 각각 세 시기의 지배적인 대상임을 보이고, 이렇듯 특정 유형의 대상이 우세한 것이 욕망의 양상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이 그의 논의의 대략적인 윤곽이다.

여기서, 아쉬운 것은 국역본/러시아어본뿐만 아니라 영어본에도 히치콕의 필모그라피가 소개돼 있지 않은 것이다. 최상의 경우라면, 연대별 필모그라피를 포함해서, 러닝타임과 주연배우들, 각 영화의 줄거리(시놉시스) 등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선, 서비스가 부족하다. ‘너무 많이 알았던 관객’이란 장도 이 책에는 있지만, 히치콕 영화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앎은 저자들 같은 매니아(광신도)가 아니라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을 다 본 독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국내에는 물론 다 출시돼 있지도 않지만.) 비록 지젝은 로셀리니의 영화를 한 편도 안 보고도 태연하게 그의 영화들을 분석해낸다지만(물론 영화관람을 대체할 자료들을 다 읽었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 독자’로서 이 책의 논의들을 태연하게 다 따라가는 건 좀 무리이다.

더불어 번역에 대한 불만들. 11쪽의 첫문장부터 보자.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간의 단절을 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 속에서도 이러한 단절이 ‘해석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대개 간과되고 있다.” 이 첫문장부터 몇 번 반복해서 읽어야 했는데, 러시아어본을 참고하여 다시 번역하자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을 해석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절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의 지위’ 자체와도 관련되는지는 흔히 간과되어 왔다.”(‘관련되는지’의 러시아어 번역은 ‘(자체를) 건드리는지’이다) 원문은 양보구문이 아니지만,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양보구문으로 옮겼다. 어떤 논문에서 자기만의 테제를 제기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자신이 주장하려고 하는 바) 이제까지 간과되어 왔거나 오해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서두에서 지젝이 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사전 정지작업이다.

일단,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간의 단절’이란 표현은(영어본에는 정말로 그렇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차성을 고려할 때 자연스럽지 않다(‘포스트’는 뒤에 와야 하는 것 아닌가?). 바로 다음 문장에서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 경우에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간의 달절’이라고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할 당시에 나온 책들에는 대부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 즉 그 차이/차별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표들이 등장했었다. ‘다양한 시도’라는 건 그걸 말한다.

그런데, 지젝이 보기엔 거기에 하나 빠진 항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해석의 지위’라는 것이다(‘지위status’라는 말은 ‘역할’로 이해하면 더 쉽다). 그러니까 ‘해석의 지위’라는 기준으로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 즉 차이를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문에서 내가 찜찜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단절이 해석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란 표현이다. ‘영향을 미치는’이란 말이 어느 동사를 옮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단절’이 먼저 일어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 아니라, ‘단절’과 ‘방식’은 등가적이고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런 ‘방식’이 곧 ‘단절’이다.

‘해석의 지위’라는 기준으로 볼 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각기 다른 것으로 판별되는가? 일단 모더니즘에서의 예술작품은 ‘이해불가능한’ 어떤 것, 즉 ‘트라우마’(충격이요, 외상)이다. 즉, 예술은 쇼킹한 어떤 것이다. 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은 이 ‘이해불가능한 것’ ‘쇼킹한 것’을 ‘이해가능한 것’ ‘고상한 것’으로 형질을 바꿔줌으로써 우리가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일 때 먼저 몇 번 씹어주는 행위, 이게 ‘해석’이다. 그래서 모더니즘에서는 아이-일반독자들을 위한 엄마-전문가들이 있다. “이게 바로 이런 뜻인 것이죠.” “아, 그런 거로군요! 호호호.” <황무지>의 시인 T. S. 엘리어트가 꽤나 영민했다는 얘기는(‘기민했다’고 번역돼 있는데), 그가 자기 시에 주석까지 붙임으로써 북치고 장구치고 다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방향이 정반대이다. 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이 대상(예술작품)의 불안한 ‘섬뜩함’(uncanniness의 번역인데, 이전에 밝힌 바대로, 나는 uncanny의 번역어로 ‘섬뜩함’을 지지한다, 여기에는 ‘낯섬’ ‘두려움’ ‘불편함’ 등의 뜻이 포함돼 있다)을 ‘순화시키는’(러시아어 번역은 ‘고상하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익숙해 보이는 것’을 거꾸로 ‘낯설고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지나가는 김에, “이제야 이 엉망진창인 것의 초점을 알겠구만!”이라고 모더니즘적 해석의 효과를 부연설명하는 대목에서 ‘엉망진창인 것’(러시아어 번역은 ‘혼돈’)은 무얼 번역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좀 어색하다. 모더니즘의 예술작품은 ‘엉망진창’이라고 하기엔 정교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 정도의 의미가 들어가야 한다. “(그런 걸) 아하, 이젠 이해할 수 있겠어!”란 내용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의 즐거움은 아주 쉽고 진부해 보이는 내용을 낯설고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여기에 징후니, 징환이니, 보로메오 매듭이니 하는 현학적인 수사들이 동원될 것이다(일반 독자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가령, “(애들도 보는) <대장금>의 이면에는 복잡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작동하고 있는바, 여기서 장금은 여성적 욕망의 집합적 투사인 듯이 보이며, 한편으론 페미니즘적 강령을 실천하는 듯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여전히 가부장적 국가장치 내에서 여성의 ‘개인적’ 성공이란 남근적 인정에 있다는 것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아주 교묘하게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훈육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떠든다고 해보자. 이런 종류의 담화가 일반 독자나 청중에게 겁을 주는 데 성공한다면(백남준의 말대로, ‘예술은 사기다!’), 그래서 ‘내가 바보같이 <대장금>을 좋아하다니!’하는 반응을 혹 불러일으킨다면, 이런 류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성공한 것이 된다.

보다 단순하게 말해보자. 이상의 시가 모더니즘 텍스트라면, 김소월의 프리-모던한 시들은 “김소월의 시는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하다”고 규정하는 순간 포스트모던한 시 텍스트로 탈바꿈할 수 있다(그의 시 <왕십리>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근년의 논란을 보라). 그는 <삼수갑산>에서 왜 ‘아하’ 대신에 ‘아하하’라고 했을까? 라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이 민요조 시인은 졸지에 ‘숭고한’ 시인이 돼 버린다. ‘포스트모더니스트’ 히치콕이 놓이는 자리가 바로 그러한 ‘숭고한 대장금’의 자리이고 ‘숭고한 김소월’의 자리이다. 이제 문제는 그걸 얼마나 정교하게 말하는가이다. 지젝은 이렇게 놓인 히치콕을 ‘이론화’하기 위해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3단계론의 틀을 빌려온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제임슨/지젝의 규정: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오늘날 속해 있는 엉망진창인 것, 즉 사물(Thing)을 ‘순화’시키려는 특수한, 그러나 실패해버린 노력으로 모든 내러티브의 격자를 환원시키는 트라우마적 사물에 대한 강박을 대표한다.”(13쪽) 전형적인 제임슨 번역의 문체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이 문장에서 ‘엉망진창인 것’을 받는 것은 (1)사물(Thing) (2)트라우마적 사물 (3)강박 중 어느 것일까? 우리말 화자라면 대부분 (1)번을 고를 것이고, 그게 우리말 문장에서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러시아어본을 보니까 (3)번이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을 받는 술어가 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 ‘엉망진창인 것’이고, (2) ‘강박’이다. 역자는 왜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지 않았을까? 다시 번역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혼돈이며, 트라우마적 사물에 대한 강박관념인바, 이 트라우마적 사물은 그것을 ‘순화’시키려는 모든 내러티브적 시도를 매번 실패하게 만든다.” 요는 문장의 ‘단어들’을 번역하는 게 아니고, 그 문장에서 자신이 ‘이해한 바’를 번역하는 것이다.

이어서 지젝은 과연 히치콕은 리얼리스트인가, 모더니스트인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인가 라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결론으로 이끄는) 본질적인 규정보다는 히치콕의 필모그라피 자체가 그러한 3단계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14-18쪽까지의 다섯 시기는 그러한 전제에서 구획된 것이다. 이 중 중요한 세 단계를 다시 반복하면, (1)<39계단>에서 <숙녀 사라지다>까지: 시련을 통해서 성숙/재결합하는 커플에 관한 이야기, (2)<레베카>에서 <염소좌 아래서>까지: 부성적 인물에 의해 트라우마를 입은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대개 두 남자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가 멋없는/선한 남자를 선택). (3)<스트레인저>부터 <새>까지: 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는 모성적 초자아를 가진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

미심쩍은 번역 한 대목. 17쪽에서 (3)번 시기에 대한 설명: “‘포스트모더니즘’, 형식적으로는알레고리적 차원의 강조로 요약되고(음악과 함께 전개되는 영화의 다이제시스적 내용 속에서 언표행위와 소비 과정 자체를 표시하는 것. <이창>부터 <사이코>에 이르기까지의 ‘관음증’의 참조 등), 주제는 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는 모성적 초자아를 가진 남자 주인공의 관점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니까 지젝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기 히치콕의 걸작들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해하는데, 그 근거를 다른 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차별적인 ‘형식’과 ‘주제’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는 ‘형식’을 부연설명하는 괄호안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음악과 함께 전개되는 영화의 다이제시스적 내용 속에서 언표행위와 소비과정 자체를 표시하는 것.” 이게 무슨 뜻인지 누가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 ‘다이제시스적’ 내용이란 건 간단히 ‘스토리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역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붙였지만, ‘언표행위’와 ‘소비과정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건 역자가 간단한 수식어구 한두 개를 덧붙이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원문에 its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언표행위’라고 옮긴 enunciation의 기본적 의미는 ‘발음’인데, 어떤 전언이 표현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영화가 언표되는 방식을 뜻하고.

‘음악과 함께 전개되는’이란 내용은 러시아어본에는 없는데, 문맥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원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걸 배제하고 다시 옮기면: “영화적 내러티브의 세계 안에서 영화적 언표행위와 그 소비 과정 자체가 지시된다. <이창>부터 <사이코>에 이르기까지의 ‘관음증’을 보라.” 알다시피, 영화의 소비 형식 자체가 관음증의 형식이다. 관객은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마치 문구멍을 통해서 몰래 엿보듯이 영화속 내러티브의 세계를 엿보는 것이다. 그러한 관음증의 형식이 히치콕의 걸작들에서는 영화적 내러티브 세계(다이제시스적 공간) 안에서 재현/지시되고 있다는 게 이 문장의 내용이다. 요컨대, ‘영화적’이란 말만 삽입하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었던 부분이다.

 

 



 

지나가는 김에 영화제목에 대해서. 17쪽의 <밧줄>은 <로프(Rope)>로 출시됐거나 방영된 거 같은데, <밧줄>로 표기하는 게 ‘관례’인지 모르겠다(우리식의 외화 작명방식을 보건데, <로프>가 <밧줄>로 번역/표기됐을 거 같지 않아서 하는 얘기다). 그리고, 18쪽의 <패밀리 플롯>은 정반대의 경우인데, 그게 ‘관례’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가족의 음모>라고 해야 낫겠다. 영어 plot에는 있고, 우리말 ‘플롯’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음모’란 뜻이기 때문에. 이런 사례들은 종종 등장하는데, 62쪽에서 “어머니에 대한 맨 처음의 스케치”라고 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여기서 스케치는 물론 sketch를 옮긴 것인데, 이건 ‘초고(draft)’나 ‘초안’이라고 옮겨야 한다(“어머니에 대한 맨 처음의 스케치에서처럼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존재이다”라는 게 말이 되는지?). ‘plot≠플롯’이듯이 ‘sketch≠스케치’이다. 음역한다고 해서 오역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18쪽에서는 세 시기에서 지배적인 주체성의 유형과 자본주의의 세 단계(자본주의-제국주의-후기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지적하고 있고, 19쪽부터는 (주체가 아닌) 대상(‘히치콕적 대상’)의 관점에서 이러한 양상을 재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그냥 쭉 읽어보면 된다. 좀 거리를 두고 읽으면 윤곽은 그려지니까. 단, 26쪽에서 괄호 안의 내용은 지젝의 것이 아니라 ‘히치콕 열애가들’을 비난하는 이들의 것이다. 그래서 사정을 정확하게 하려면, “전이적 관계의 징표에 불과하다”는 “전이적 관계의 징표에 불과하다고”라고 해줘야 한다. 그리고 각주 하나. 21쪽 각주9)에 크립키의 용어 ‘rigid designator’가 나오는데, 역자는 ‘엄격한 지명자’라고 옮겼다. 그거야 자유일 수 있지만, 내 기억엔 (확실하지 않지만) ‘고정 지시자’로 번역되었던 거 같다.

그리고 헷갈리는 디테일들. 19쪽에서 맥거핀의 사례로 ‘<39계단>에서의 군용 비행기 엔진의 공식’이 나오는데, 23쪽에서는 ‘<39계단>에서의 군용기 엔진 디자인’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그걸 73쪽에서는 ‘<39계단>에서의 비행기를 위한 계획들’이라고 옮기고 있고(설사 저자들이 실수로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이런 부분은 똑같게 옮겨줘야 한다). ‘공식’이기도 하고 ‘디자인’이기도 하며 ‘계획들’이기도 한 단어는 무엇일까? 내 짐작엔 design이고, 그건 아마도 ‘도면’으로 옮겨져야 할 거 같다. ‘엔진의 도면’.(<39계단>은 국내에 출시돼 있지만, 나는 미루어두다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해외특파원>의 경우. 역시 19쪽에서는 맥거핀의 예로 ‘<해외특파원>에서의 해군조약의 비밀조항’이라고 돼 있는 걸 73쪽에서는 ‘<해외공작원>에 나오는, 방위조약에서의 비밀 절(clause)’이라고 해 놓았다. ‘특파원’이 ‘공작원’으로 변신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덕분에 400쪽에 있는 색인에는 빠졌더라도), ‘조항’이란 뜻의 clause를 문법용어인 ‘절’로 옮겨놓은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그걸 병기까지 해놓다니!). 같은 단어(blot?)를 옮겼을 ‘오점들’과 ‘얼룩들’도 혼용되고 있고.

조금 더 문제가 되는 사례들. 21쪽에서 세번째 종류의 대상, 실재적 대상에 대한 설명: “그것은 교환의 대상도 아니고 그저 불가능한 희열(주이상스)의 무언의 체현일 뿐이다.” 그런데 이게 바로 다음 쪽(22쪽)에서는 “즉 실재적인 것의 무감감하고 상상적인 대상화로서, 가능한 희열을 육체에 제공하는 하나의 이미지이다”라고 정반대로 옮겨지고 있다. “가능한 희열을 육체에 제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불가능한 희열(주이상스)을 체현/육화하고 있는 이미지”의 오역이다.

<의혹의 그림자>와 <스트레인저> 두 편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히치콕의 대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돌라르의 글로 넘어가보자. 54쪽에서 “그것은 <흥겨운 과부> 왈츠인데, 춤추는 커플을 배경으로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그 음악이 처음 나오는 순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고 제쳐두자.”는 57쪽에 이 왈츠가 나오는 순간에 대한 내용이 나오므로 “잠시 제쳐두자”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결정타는 55쪽. ‘보편적 이중화’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적인 논평으로서의 핵심장면에 대한 묘사가 빠졌다. 그러니까 시계가 2시 2분 전을 가리키고 있는 ‘실외 네온사인’(그냥 ‘실외 사인’이 아닐 것이다)과 함께 ‘틸투(Till Two)’라는 바(술집)에서 일어난다는 이 핵심장면은 어디 갔는가? “이 바에서 찰리 삼촌은 브렌디 더블을 두 잔 주문한다.”라는 한 문장이 앙꼬 없는 찐빵처럼 누락됐다(어느 번역서에서건 누락도 흔한 것이지만, 이런 누락은 그냥 읽어도 ‘눈에 띄는’ 누락이다).

두 편의 영화에 대한 분석은 그런 대로 따라갈 수 있다. 영화를 보았다면, 더 재미있게 분석에 동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라르의 결론은 72-75쪽이다. 우선 맥거핀. “맥거핀들은 오직 그것이 의미화하는 것만을 의미화한다. 맥거핀들은 의미화작용을 자체로서 의미화한다. 실제 내용은 전적으로 비의미적이다.”(73쪽) 두번째 문장은 “맥거핀들은 의미작용 자체를 의미화한다.”로 옮기고 싶고, 마지막 문장은 (나라면) “그 실제 내용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라고 옮기겠다(‘비의미적이다(insignificant)’ 같은 걸 왜 ‘무의미하다’라고 번역하지 않는 걸까?).

74쪽에서 “그 열쇠는 남편이 자기 아내의 살인자에게 준 것인데 그로써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그의 잉여 지식에 의해 이해된다.”는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그로써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자신의 잉여적인 앎 때문에 체포된다(혹은 감금된다).”이다. 후자가 좀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75쪽. “라캉이 (프로이트와 하이데거를 따라) 물 자체das Ding라고 불렀던 것의 환기이다.”라는 것. 굵은 글씨로 강조까지 돼 있는데, 내 상식으론 프로이트적 사물(Freudian Thing)이라고 할 때의 그 the Thing(=das Ding) 아닌가? 그게 (칸트의) ‘물 자체’라고 번역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라캉은 또 어느 구석에서 ‘물 자체’를 말했단 말인가?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 187쪽. “앞 장면인 사격대회에서 어머니는 진흙 비둘기를 놓치고 그럼으로써 그 매혹적인 이방인이 남긴 강한 인상에 그녀가 동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퀴즈. ‘진흙 비둘기’가 뭔지 아시나요? 이건 사격용어로 clay pigeon을 옮긴 것이다. 그런데, 사격에서 정말 ‘진흙 비둘기’라고 부르는지? ‘클레이 사격’을 ‘진흙 사격’이라고 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건 그냥 ‘클레이 피젼’인데, 짐작엔 ‘flying target’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정작 이 문맥에선 ‘클레이 피젼’이라고 옮기는 것도 부적절하다. 그냥 ‘표적’이라고 옮기면 된다. “사격대회에서 어머니는 표적을 놓치고…” 우리는 원저의 의미를 놓치고...

06.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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