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과 그 일당의 히치콕 읽기, 즉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이하 <히치콕>)에 대한 예전의 읽기를 또 옮겨둔다. 가장 앞에 놓였어야 하는. 왜냐하면 지젝의 서문부터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나면 나는 원래의 영어본을 읽어가며 이 책을 다시 정리하거나 이 읽기를 보완할 생각이다.

라캉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얼마전에 <에크리>의 완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역자는 역시나 몇 년전에 <에크리> 선집을 낸바 있는 브루스 핑크. 아마도 영어권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라캉 연구자/주석자인 그는 이미 <세미나>의 번역과 주해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에크리> 해설서인 'Lacan to the letter: Reading Ecrits Closely'의 저자이기도 하다(한마디로 말해서, '에크리라면 핑크에게 물어봐!'이다).

국내에는 아직 <라캉과 정신의학> 정도만 소개돼 있는데, 저명한 라캉 이론 해설서 'The Lacanian Subject'의 국역본이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그간에 <에크리> 국역본 출간을 고대해 왔는데, 이번 영역본 출간으로 그 지루함을 덜 수 있게 돼 반갑다(영역본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좀더 정확한 국역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선집을 갖고 있었지만, 지젝의 신간 'The Parallax View'와 함께 단번에 책을 구입한 이유이다. 부피가 부피인 만큼 지젝의 책도 국역본이 나오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릴 듯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지젝의 히치콕 이야기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시도하는바 히치콕에 대한 진지한 이론적 접근 자체가 '포스트모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정의한 바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방식의 목적은 바로 처음의 익숙함을 오히려 낯설게 하려는 데 있다.”(12쪽) 그리고, 지젝 등은 그러한 접근방식에, 혹은 ‘광기’에 주저없이 참여하고자 한다. 그 광기란 무엇인가?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는데, 겉보기에는 극히 단순한 플롯이라 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철학적 정치(精緻)함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13쪽)고 간주하는 태도이며, “그 자신의 작품의 가장 미세한 세부까지도 관장한 신과 같은 조물주로 히치콕을 격상시키는”(26쪽) ‘열애가적’ 태도이다.

지젝은 이러한 광신적 태도 속에 히치콕의 오류와 비일관성을 트집잡는 ‘맨정신적’ 태도보다 더 많은 진실이 있으며 이론적으로도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진실은 ‘오버’하는 태도에 있다!). 이것이 책의 서론에서 지젝이 전제하는 것이며, 서론의 나머지 부분은 F. 제임슨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3단계론을 배경으로 삼아 히치콕 영화의 단계를 ‘변증법적으로’ 구획하는 데 바쳐져 있다.

 

 

 

 

지젝은 일단 다섯 시기로 구획하는데, 거기서 첫 시기인 ‘<39계단> 이전의 영화들’과 마지막 시기인 ‘<마니> 이후의 영화들’은 히치콕 ‘이전’과 ‘이후’의 영화들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으며 또 분석하고자 하는 ‘히치콕’에는 부수적인, 하지만 유익한 참조가 되어주기도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중간에 놓여 있는 히치콕의 세 시기이다.

 

 

 

 

(1)1930년대 후반의 영국 영화들: <39계단>에서 <숙녀 사라지다>(<사라진 여인>)까지. (2)’셀즈닉’ 시기: <레베카>에서 <염소좌 아래서>까지. (3)1950년대와 1960년대 초기의 위대한 영화들: <스트레인저>부터 <새>까지. 이러한 구획 이후에 지젝은 이 세 시기의 ‘사회적-역사적’ 매개를 ‘주체성의 지배적 유형’과 ‘욕망의 세 가지 양상’에 대응시키는바, 이때 중요한 준거가 되어 주는 것은 이른바 ‘히치콕적 대상’의 지배적 형식이다. 지젝은 이 대상을 세 가지(대상a로서의 맥거핀, 교환대상으로서의 상징적 대상, 그리고 Φ로서의 실재)로 분리해 내며, 이것이 각각 세 시기의 지배적인 대상임을 보이고, 이렇듯 특정 유형의 대상이 우세한 것이 욕망의 양상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이 그의 논의의 대략적인 윤곽이다.

여기서, 아쉬운 것은 국역본/러시아어본뿐만 아니라 영어본에도 히치콕의 필모그라피가 소개돼 있지 않은 것이다. 최상의 경우라면, 연대별 필모그라피를 포함해서, 러닝타임과 주연배우들, 각 영화의 줄거리(시놉시스) 등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선, 서비스가 부족하다. ‘너무 많이 알았던 관객’이란 장도 이 책에는 있지만, 히치콕 영화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앎은 저자들 같은 매니아(광신도)가 아니라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 책에 나오는 영화들을 다 본 독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국내에는 물론 다 출시돼 있지도 않지만.) 비록 지젝은 로셀리니의 영화를 한 편도 안 보고도 태연하게 그의 영화들을 분석해낸다지만(물론 영화관람을 대체할 자료들을 다 읽었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 독자’로서 이 책의 논의들을 태연하게 다 따라가는 건 좀 무리이다.

더불어 번역에 대한 불만들. 11쪽의 첫문장부터 보자.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간의 단절을 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 속에서도 이러한 단절이 ‘해석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대개 간과되고 있다.” 이 첫문장부터 몇 번 반복해서 읽어야 했는데, 러시아어본을 참고하여 다시 번역하자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을 해석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절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의 지위’ 자체와도 관련되는지는 흔히 간과되어 왔다.”(‘관련되는지’의 러시아어 번역은 ‘(자체를) 건드리는지’이다) 원문은 양보구문이 아니지만,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양보구문으로 옮겼다. 어떤 논문에서 자기만의 테제를 제기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자신이 주장하려고 하는 바) 이제까지 간과되어 왔거나 오해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서두에서 지젝이 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사전 정지작업이다.

일단,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간의 단절’이란 표현은(영어본에는 정말로 그렇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차성을 고려할 때 자연스럽지 않다(‘포스트’는 뒤에 와야 하는 것 아닌가?). 바로 다음 문장에서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 경우에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간의 달절’이라고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할 당시에 나온 책들에는 대부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 즉 그 차이/차별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표들이 등장했었다. ‘다양한 시도’라는 건 그걸 말한다.

그런데, 지젝이 보기엔 거기에 하나 빠진 항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해석의 지위’라는 것이다(‘지위status’라는 말은 ‘역할’로 이해하면 더 쉽다). 그러니까 ‘해석의 지위’라는 기준으로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단절, 즉 차이를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문에서 내가 찜찜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단절이 해석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란 표현이다. ‘영향을 미치는’이란 말이 어느 동사를 옮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단절’이 먼저 일어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 아니라, ‘단절’과 ‘방식’은 등가적이고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런 ‘방식’이 곧 ‘단절’이다.

‘해석의 지위’라는 기준으로 볼 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각기 다른 것으로 판별되는가? 일단 모더니즘에서의 예술작품은 ‘이해불가능한’ 어떤 것, 즉 ‘트라우마’(충격이요, 외상)이다. 즉, 예술은 쇼킹한 어떤 것이다. 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은 이 ‘이해불가능한 것’ ‘쇼킹한 것’을 ‘이해가능한 것’ ‘고상한 것’으로 형질을 바꿔줌으로써 우리가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일 때 먼저 몇 번 씹어주는 행위, 이게 ‘해석’이다. 그래서 모더니즘에서는 아이-일반독자들을 위한 엄마-전문가들이 있다. “이게 바로 이런 뜻인 것이죠.” “아, 그런 거로군요! 호호호.” <황무지>의 시인 T. S. 엘리어트가 꽤나 영민했다는 얘기는(‘기민했다’고 번역돼 있는데), 그가 자기 시에 주석까지 붙임으로써 북치고 장구치고 다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방향이 정반대이다. 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이 대상(예술작품)의 불안한 ‘섬뜩함’(uncanniness의 번역인데, 이전에 밝힌 바대로, 나는 uncanny의 번역어로 ‘섬뜩함’을 지지한다, 여기에는 ‘낯섬’ ‘두려움’ ‘불편함’ 등의 뜻이 포함돼 있다)을 ‘순화시키는’(러시아어 번역은 ‘고상하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익숙해 보이는 것’을 거꾸로 ‘낯설고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지나가는 김에, “이제야 이 엉망진창인 것의 초점을 알겠구만!”이라고 모더니즘적 해석의 효과를 부연설명하는 대목에서 ‘엉망진창인 것’(러시아어 번역은 ‘혼돈’)은 무얼 번역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좀 어색하다. 모더니즘의 예술작품은 ‘엉망진창’이라고 하기엔 정교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 정도의 의미가 들어가야 한다. “(그런 걸) 아하, 이젠 이해할 수 있겠어!”란 내용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의 즐거움은 아주 쉽고 진부해 보이는 내용을 낯설고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여기에 징후니, 징환이니, 보로메오 매듭이니 하는 현학적인 수사들이 동원될 것이다(일반 독자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가령, “(애들도 보는) <대장금>의 이면에는 복잡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작동하고 있는바, 여기서 장금은 여성적 욕망의 집합적 투사인 듯이 보이며, 한편으론 페미니즘적 강령을 실천하는 듯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여전히 가부장적 국가장치 내에서 여성의 ‘개인적’ 성공이란 남근적 인정에 있다는 것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아주 교묘하게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훈육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떠든다고 해보자. 이런 종류의 담화가 일반 독자나 청중에게 겁을 주는 데 성공한다면(백남준의 말대로, ‘예술은 사기다!’), 그래서 ‘내가 바보같이 <대장금>을 좋아하다니!’하는 반응을 혹 불러일으킨다면, 이런 류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성공한 것이 된다.

보다 단순하게 말해보자. 이상의 시가 모더니즘 텍스트라면, 김소월의 프리-모던한 시들은 “김소월의 시는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하다”고 규정하는 순간 포스트모던한 시 텍스트로 탈바꿈할 수 있다(그의 시 <왕십리>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근년의 논란을 보라). 그는 <삼수갑산>에서 왜 ‘아하’ 대신에 ‘아하하’라고 했을까? 라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이 민요조 시인은 졸지에 ‘숭고한’ 시인이 돼 버린다. ‘포스트모더니스트’ 히치콕이 놓이는 자리가 바로 그러한 ‘숭고한 대장금’의 자리이고 ‘숭고한 김소월’의 자리이다. 이제 문제는 그걸 얼마나 정교하게 말하는가이다. 지젝은 이렇게 놓인 히치콕을 ‘이론화’하기 위해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3단계론의 틀을 빌려온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제임슨/지젝의 규정: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오늘날 속해 있는 엉망진창인 것, 즉 사물(Thing)을 ‘순화’시키려는 특수한, 그러나 실패해버린 노력으로 모든 내러티브의 격자를 환원시키는 트라우마적 사물에 대한 강박을 대표한다.”(13쪽) 전형적인 제임슨 번역의 문체이긴 하지만, 그래도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이 문장에서 ‘엉망진창인 것’을 받는 것은 (1)사물(Thing) (2)트라우마적 사물 (3)강박 중 어느 것일까? 우리말 화자라면 대부분 (1)번을 고를 것이고, 그게 우리말 문장에서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러시아어본을 보니까 (3)번이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을 받는 술어가 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 ‘엉망진창인 것’이고, (2) ‘강박’이다. 역자는 왜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지 않았을까? 다시 번역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혼돈이며, 트라우마적 사물에 대한 강박관념인바, 이 트라우마적 사물은 그것을 ‘순화’시키려는 모든 내러티브적 시도를 매번 실패하게 만든다.” 요는 문장의 ‘단어들’을 번역하는 게 아니고, 그 문장에서 자신이 ‘이해한 바’를 번역하는 것이다.

이어서 지젝은 과연 히치콕은 리얼리스트인가, 모더니스트인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인가 라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결론으로 이끄는) 본질적인 규정보다는 히치콕의 필모그라피 자체가 그러한 3단계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14-18쪽까지의 다섯 시기는 그러한 전제에서 구획된 것이다. 이 중 중요한 세 단계를 다시 반복하면, (1)<39계단>에서 <숙녀 사라지다>까지: 시련을 통해서 성숙/재결합하는 커플에 관한 이야기, (2)<레베카>에서 <염소좌 아래서>까지: 부성적 인물에 의해 트라우마를 입은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대개 두 남자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가 멋없는/선한 남자를 선택). (3)<스트레인저>부터 <새>까지: 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는 모성적 초자아를 가진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

미심쩍은 번역 한 대목. 17쪽에서 (3)번 시기에 대한 설명: “‘포스트모더니즘’, 형식적으로는알레고리적 차원의 강조로 요약되고(음악과 함께 전개되는 영화의 다이제시스적 내용 속에서 언표행위와 소비 과정 자체를 표시하는 것. <이창>부터 <사이코>에 이르기까지의 ‘관음증’의 참조 등), 주제는 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는 모성적 초자아를 가진 남자 주인공의 관점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니까 지젝은 1950년대와 60년대 초기 히치콕의 걸작들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해하는데, 그 근거를 다른 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차별적인 ‘형식’과 ‘주제’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는 ‘형식’을 부연설명하는 괄호안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음악과 함께 전개되는 영화의 다이제시스적 내용 속에서 언표행위와 소비과정 자체를 표시하는 것.” 이게 무슨 뜻인지 누가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 ‘다이제시스적’ 내용이란 건 간단히 ‘스토리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역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붙였지만, ‘언표행위’와 ‘소비과정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건 역자가 간단한 수식어구 한두 개를 덧붙이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원문에 its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언표행위’라고 옮긴 enunciation의 기본적 의미는 ‘발음’인데, 어떤 전언이 표현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영화가 언표되는 방식을 뜻하고.

‘음악과 함께 전개되는’이란 내용은 러시아어본에는 없는데, 문맥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원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걸 배제하고 다시 옮기면: “영화적 내러티브의 세계 안에서 영화적 언표행위와 그 소비 과정 자체가 지시된다. <이창>부터 <사이코>에 이르기까지의 ‘관음증’을 보라.” 알다시피, 영화의 소비 형식 자체가 관음증의 형식이다. 관객은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마치 문구멍을 통해서 몰래 엿보듯이 영화속 내러티브의 세계를 엿보는 것이다. 그러한 관음증의 형식이 히치콕의 걸작들에서는 영화적 내러티브 세계(다이제시스적 공간) 안에서 재현/지시되고 있다는 게 이 문장의 내용이다. 요컨대, ‘영화적’이란 말만 삽입하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었던 부분이다.

 

 



 

지나가는 김에 영화제목에 대해서. 17쪽의 <밧줄>은 <로프(Rope)>로 출시됐거나 방영된 거 같은데, <밧줄>로 표기하는 게 ‘관례’인지 모르겠다(우리식의 외화 작명방식을 보건데, <로프>가 <밧줄>로 번역/표기됐을 거 같지 않아서 하는 얘기다). 그리고, 18쪽의 <패밀리 플롯>은 정반대의 경우인데, 그게 ‘관례’인지 모르겠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가족의 음모>라고 해야 낫겠다. 영어 plot에는 있고, 우리말 ‘플롯’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음모’란 뜻이기 때문에. 이런 사례들은 종종 등장하는데, 62쪽에서 “어머니에 대한 맨 처음의 스케치”라고 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여기서 스케치는 물론 sketch를 옮긴 것인데, 이건 ‘초고(draft)’나 ‘초안’이라고 옮겨야 한다(“어머니에 대한 맨 처음의 스케치에서처럼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존재이다”라는 게 말이 되는지?). ‘plot≠플롯’이듯이 ‘sketch≠스케치’이다. 음역한다고 해서 오역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18쪽에서는 세 시기에서 지배적인 주체성의 유형과 자본주의의 세 단계(자본주의-제국주의-후기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지적하고 있고, 19쪽부터는 (주체가 아닌) 대상(‘히치콕적 대상’)의 관점에서 이러한 양상을 재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그냥 쭉 읽어보면 된다. 좀 거리를 두고 읽으면 윤곽은 그려지니까. 단, 26쪽에서 괄호 안의 내용은 지젝의 것이 아니라 ‘히치콕 열애가들’을 비난하는 이들의 것이다. 그래서 사정을 정확하게 하려면, “전이적 관계의 징표에 불과하다”는 “전이적 관계의 징표에 불과하다고”라고 해줘야 한다. 그리고 각주 하나. 21쪽 각주9)에 크립키의 용어 ‘rigid designator’가 나오는데, 역자는 ‘엄격한 지명자’라고 옮겼다. 그거야 자유일 수 있지만, 내 기억엔 (확실하지 않지만) ‘고정 지시자’로 번역되었던 거 같다.

그리고 헷갈리는 디테일들. 19쪽에서 맥거핀의 사례로 ‘<39계단>에서의 군용 비행기 엔진의 공식’이 나오는데, 23쪽에서는 ‘<39계단>에서의 군용기 엔진 디자인’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그걸 73쪽에서는 ‘<39계단>에서의 비행기를 위한 계획들’이라고 옮기고 있고(설사 저자들이 실수로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이런 부분은 똑같게 옮겨줘야 한다). ‘공식’이기도 하고 ‘디자인’이기도 하며 ‘계획들’이기도 한 단어는 무엇일까? 내 짐작엔 design이고, 그건 아마도 ‘도면’으로 옮겨져야 할 거 같다. ‘엔진의 도면’.(<39계단>은 국내에 출시돼 있지만, 나는 미루어두다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해외특파원>의 경우. 역시 19쪽에서는 맥거핀의 예로 ‘<해외특파원>에서의 해군조약의 비밀조항’이라고 돼 있는 걸 73쪽에서는 ‘<해외공작원>에 나오는, 방위조약에서의 비밀 절(clause)’이라고 해 놓았다. ‘특파원’이 ‘공작원’으로 변신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덕분에 400쪽에 있는 색인에는 빠졌더라도), ‘조항’이란 뜻의 clause를 문법용어인 ‘절’로 옮겨놓은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그걸 병기까지 해놓다니!). 같은 단어(blot?)를 옮겼을 ‘오점들’과 ‘얼룩들’도 혼용되고 있고.

조금 더 문제가 되는 사례들. 21쪽에서 세번째 종류의 대상, 실재적 대상에 대한 설명: “그것은 교환의 대상도 아니고 그저 불가능한 희열(주이상스)의 무언의 체현일 뿐이다.” 그런데 이게 바로 다음 쪽(22쪽)에서는 “즉 실재적인 것의 무감감하고 상상적인 대상화로서, 가능한 희열을 육체에 제공하는 하나의 이미지이다”라고 정반대로 옮겨지고 있다. “가능한 희열을 육체에 제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불가능한 희열(주이상스)을 체현/육화하고 있는 이미지”의 오역이다.

<의혹의 그림자>와 <스트레인저> 두 편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히치콕의 대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돌라르의 글로 넘어가보자. 54쪽에서 “그것은 <흥겨운 과부> 왈츠인데, 춤추는 커플을 배경으로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그 음악이 처음 나오는 순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고 제쳐두자.”는 57쪽에 이 왈츠가 나오는 순간에 대한 내용이 나오므로 “잠시 제쳐두자”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결정타는 55쪽. ‘보편적 이중화’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적인 논평으로서의 핵심장면에 대한 묘사가 빠졌다. 그러니까 시계가 2시 2분 전을 가리키고 있는 ‘실외 네온사인’(그냥 ‘실외 사인’이 아닐 것이다)과 함께 ‘틸투(Till Two)’라는 바(술집)에서 일어난다는 이 핵심장면은 어디 갔는가? “이 바에서 찰리 삼촌은 브렌디 더블을 두 잔 주문한다.”라는 한 문장이 앙꼬 없는 찐빵처럼 누락됐다(어느 번역서에서건 누락도 흔한 것이지만, 이런 누락은 그냥 읽어도 ‘눈에 띄는’ 누락이다).

두 편의 영화에 대한 분석은 그런 대로 따라갈 수 있다. 영화를 보았다면, 더 재미있게 분석에 동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라르의 결론은 72-75쪽이다. 우선 맥거핀. “맥거핀들은 오직 그것이 의미화하는 것만을 의미화한다. 맥거핀들은 의미화작용을 자체로서 의미화한다. 실제 내용은 전적으로 비의미적이다.”(73쪽) 두번째 문장은 “맥거핀들은 의미작용 자체를 의미화한다.”로 옮기고 싶고, 마지막 문장은 (나라면) “그 실제 내용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라고 옮기겠다(‘비의미적이다(insignificant)’ 같은 걸 왜 ‘무의미하다’라고 번역하지 않는 걸까?).

74쪽에서 “그 열쇠는 남편이 자기 아내의 살인자에게 준 것인데 그로써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그의 잉여 지식에 의해 이해된다.”는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그로써 ‘너무 많이 알았던 남자’는 자신의 잉여적인 앎 때문에 체포된다(혹은 감금된다).”이다. 후자가 좀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75쪽. “라캉이 (프로이트와 하이데거를 따라) 물 자체das Ding라고 불렀던 것의 환기이다.”라는 것. 굵은 글씨로 강조까지 돼 있는데, 내 상식으론 프로이트적 사물(Freudian Thing)이라고 할 때의 그 the Thing(=das Ding) 아닌가? 그게 (칸트의) ‘물 자체’라고 번역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라캉은 또 어느 구석에서 ‘물 자체’를 말했단 말인가?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 187쪽. “앞 장면인 사격대회에서 어머니는 진흙 비둘기를 놓치고 그럼으로써 그 매혹적인 이방인이 남긴 강한 인상에 그녀가 동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퀴즈. ‘진흙 비둘기’가 뭔지 아시나요? 이건 사격용어로 clay pigeon을 옮긴 것이다. 그런데, 사격에서 정말 ‘진흙 비둘기’라고 부르는지? ‘클레이 사격’을 ‘진흙 사격’이라고 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건 그냥 ‘클레이 피젼’인데, 짐작엔 ‘flying target’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정작 이 문맥에선 ‘클레이 피젼’이라고 옮기는 것도 부적절하다. 그냥 ‘표적’이라고 옮기면 된다. “사격대회에서 어머니는 표적을 놓치고…” 우리는 원저의 의미를 놓치고...

06.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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