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 출간된 알베르트 망구엘의 <독서일기> 때문에 생각된 글이 있다. 재작년 봄에 모스크바통신에 번역해서 올렸던 것인데, 애서가에 관한 움베르토 에코의 기명 칼럼. 이탈리아 잡지 <레스프레소(L’Espresso)>지에 실렸던 것이 당시 러시아 신문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우리말로는 ‘문학신문’이고 매주 수요일 발행)에 번역/소개되었었다. 그걸 중역한 것.
에코의 <레스프레소> 칼럼들은 <미네르바 성냥갑>(열린책들, 2004)이란 제목으로 두 권 분량이 국내에 번역된 바 있다. ㅡ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나 <작은 일기> 등도 역시 이런 류의 칼럼들을 모은 것이다. '애서가'에 관한 그의 칼럼도 언젠가 이탈리아어에서 직역될 듯하지만, 여기서는 중역된 것을 창고정리 차원에서 옮겨놓는다. 이미지들을 좀 집어넣어서.
최근에 나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두 차례 ‘책 수집’이란 테마를 다룰 기회가 있었고, 두 번 다 청중 가운데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책 수집에의 열정’을 애서가 자신들에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읽기에의 애호’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르네상스 시기 회화나 중국의 도자기를 수집하는 사람의 집이 갔다고 해보자. 물론 당신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에게 다 바랜 17세기의 소책자를 보여주면서 그 주인이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읽었을 거라고 단정지을 때, 따분한 손님은 대개 헤어질 시간만을 겨우겨우 기다릴 것이다.





책 수집 – 이것은 책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 책의 내용에 대한 사랑까지 늘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당신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고 싶을 경우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애서가라면 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책을 갖고 싶어하며, 더 나아가 가급적이면 초판본을 구하고자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어떤 애서가들은(나는 찬성을 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한다) 손에 넣은 책을 심지어 열어보기조차 하지 않는다. 책을 망칠까봐서. 그들에게서 희귀본의 책장을 여는(열기 위해 자르는) 것은 시계 수집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계 뒤쪽을 열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애서가는 단테의 <신곡>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곡>의 특정한 판본이나 특정한 책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책을 만져보고, 책의 페이지들을 쓰다듬어보며, 책의 장정을 손에 들고 다니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마치 자신을 매혹시키는 어떤 대상처럼 책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책은 그에게 자신의 내력과 삶에 대해서, 자신을 소지했던 많은 사람들의 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때로는, 엄지 손가락 자국, 난외의 메모들, 밑줄들, 속표지의 자필서명들, 심지어 책벌레의 흔적들 등등이 이런 이야기들을 해준다. 하지만, 더욱 황홀한 일은 500년 전에 발간된 책이 당신의 손이 새 책처럼 깨끗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짝 갈라지는 소리를 낼 때이다.

하지만, 50년이 안된 책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나에겐 50년대 초에 발간된 E. 질송의 <중세철학>이 있는데, 이 책은 내가 학위논문을 방어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오고 있다. 그 당시에는 종이의 질이 열악해서 지금은 종이가 다 부서져 심지어 책장을 넘기기도 힘들다. 만약에 이 책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만 쓰였다면, 나는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새 판본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밑줄과 여러 잉크로 씌어진 메모들이 있는 바로 이 낡은 책이며, 세월과 무관하게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성장해 가던 시절뿐만 아니라 최근의 기억들까지도 상기하게 된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보통 ‘책 수집에의 열정’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수억 리라씩 하는 희귀본들도 있다(몇 년 전에 <신곡>의 초판본이 15억 리라에 경매에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사랑은 고서(古書)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거기엔 현대시의 초판본 같이 단순히 좀 오래된 책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예컨대, <살라나>출판사에서 나온 <아동문학전집>을 구하는 애호가들도 있다.

3년 전에 나는 한 헌책방에서 지오반니 파피니(1881-1956)의 <곡>, 제본됐지만 진본 종이 표지를 가진 초판본(*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2만 리라에 구입했다. 하지만, 캄파노(?)의 <오르페우스의 노래> 초판본은 10년 전에 우연히 (경매)목록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천 3백만(리라)에 구한 것이다(물론, 이 가련한 사람이 이런 책을 뜯어볼 기회를 가진 것은 다해봐야 몇 권에 불과했다). 하지만, 20세기 책들에 대한 훌륭한 수집(컬렉션)도, 피자가게에서 저녁을 먹는 걸 제외하고 이따금 모든 걸 희생하면서라면, 가능하다.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나의 학생 하나는 특이하게도 다양한 시대의 여행 안내책자를 수집했다. 처음엔 그런 발상이 나에겐 좀 별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퇴색한 사진들로 채워진 이 책자들에 기초하여 이 학생은 나중에 아주 훌륭한 졸업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에서 그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시각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별로 가진 거 없는 젊은이들도 ‘포르타 포르테제’나 ‘상트 암브로지오’ 시장에서 뜻하지 않게 16세기나 17세기 책들과 맞닥뜨릴 수 있다. 이 책들이 지금은 좋은 운동화 한 켤레 값 정도이고, 진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시대를 증언해 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책 수집은 우표 수집과 아주 유사하다. 물론, 진짜 수집가들에게는 언제나 엄청난 고가의 어떤 것이 있다. 하지만, 내가 회상하는 건, 아직 어린 꼬마였을 때 신문판매점에서에서 10장 혹은 20장으로 포장된 우표를 사서는 그날 저녁을 내내 이 다채로운 색깔의 직사각형(=우표)에서 본 마다가스카르나 피지 군도를 상상하면서 보내던 때이다. 이런 우표들은 물론 결코 드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것들에 대한 향수(노스텔지어)를 경험한다.

06. 0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