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읽은 조간신문이 다소 '심심'했는데, 그나마 흥미를 끈 건 원로비평가 유종호 선생의 무라카미 하루키 비판 기사였다(유종호 선생에 대한 페이퍼는 이전에 한번 쓴 바 있다). 한국일보에서 읽었지만, 동아일보도 관련기사를 다루고 있어서 같이 옮겨놓도록 한다. 새로운 문제제기라기보다는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은 '뒷북'처럼 읽히지만(물론 그의 발언은 하루키에 탐닉하는 세대에 대한 문학 교육자로서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평론가 유종호 씨 '무라카미 ‘노르웨이의 숲’은 음담패설집'”이란 호들갑스런 제목을 달았다

나는 '음담패설'이란 말을 쓰지 않겠지만(나는 나이브한 감상적 허무주의를 그냥 '포르노'라고 부른다), 그의 문학이 '데카당스'의 문학이라는 건 새로운 사실도, 지적도 아니다. 나는 좀 눅여서 '감상적 허무주의와 무라카미 현상'이라고 제목을 바꿔단다. 이 제목이라면 한가할 때 비평문을 써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 초점은 '무라카미 문학'이 아니라 '무라카미 현상'이며, 나의 관심은 사회학적 관심이다.  

동아일보(06. 05. 25) 원로평론가 유종호(71·사진) 씨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유 씨는 문예지 ‘현대문학’ 6월호에 기고한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무라카미 바람’을 일으킨 책. 유 씨는 대학 초년생 중 가장 감명 깊게 혹은 흥미 있게 읽은 문학책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드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면서, 자신이 본 바로는 “성적으로 격리된 수용소 재소자들이 일상적으로 나눔직한 성의 얘기로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유 씨는 이 작품 속에 “성적인 문제로 좌절이나 일탈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고 성적 호기심을 부추기는 성적인 얘기가 전경화되어 있고, 고교 3년 여학생의 자살을 위시해서 수수께끼 같은 자살이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유 씨는 또 “소설의 화자가 대학생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는 등 등장인물들이 다소간 학교교육의 피해자 내지는 희생자란 함의를 풍기고 있다”며 “요컨대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고 주장했다. 유 씨는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이 책은 마약과 같이 단기간의 안이한 위로를 제공해 줄 것”이라면서 “약삭빠른 글장수의 책이지 결코 예술가의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 씨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 없는 시대의 언어 상품”이라며 작품을 낳은 시대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무라카미가 거둔 상업적 성공을 비하하거나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면서 “다만 그의 문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학의 이상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하급문학일 뿐”이라고 말했다.(*물론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요즘의 학생들이 '고급문학'을 읽어낼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인지, 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유 씨는 2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상당수의 대학생이 문학적 위엄을 보여 주는 고전을 제쳐놓고 <노르웨이의 숲>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서, 곤혹스럽고 우려가 되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나는 유종호 교수의 평가에는 동의하지만, 우려에는 동감하지 않는다. '문학적 위엄'을 먼저 내팽개친 건 독자보다 문학계/출판계가 먼저라고 보기 때문이다. 팔아먹을 만큼 팔아먹은 책에 대해서 '음담패설'이라고 깎아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비록 음담패설이라고는 해도, 가라타니 고진의 지적대로, 하루키의 음담패설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다. 문학이 아닌 상품의 자리에 서면, 하루키 문학은 타기의 대상이 아니라 벤치마킹의 대상이다(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를 부러워하는 것인지!)

 

 

 

 

한국일보(06. 05. 25)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가 우리 문학의 저급화와 교양 퇴조 풍조에 대한 고언(苦言)을 25일 예술원 세미나에서 발표한다.

-‘문학의 전락 - 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그는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감상적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음담패설집”이며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폄하했다. 그는 “청춘은 성(性)적인 계절이지만 동시에 성숙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며 “이 책은 성숙을 위한 모색이 없다는 점에서 (작중 화자가 거론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대척점에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대학 교육과 교육을 통해 축적한 인문적 교양이 신분의 표지였던 과거와 달리, 대학교육이 보편화하고 생활스타일이 다원화하면서 ‘교양’ 역시 ‘구제도의 하나’가 돼버렸다고 개탄했다. 그는 문학의 길이 ‘기쁨으로 출발하나 / 종당에는 낙망과 광기가 온다’고 했던, 낭만주의 시인 워드워스의 시 ‘결의와 독립’의 시행을 인용하며, ‘(이미) 낙망과 권태를 체험하고 있는 연구자나 교사의 비문학적 관심과 정열’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문학의 매혹에 눈뜨게 하는 기회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 근거로 범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문학계의 ‘이론’ 탐닉 현상을 들고 있다. “작품 읽기보다 이론 읽기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정전 개념의 해체를 통해 나태한 젊은이들에게 고전기피 현상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또 교수들의 연구업적 경쟁체제도 “교수들로 하여금 ‘이론’ 도입을 통한 논문 엮어내기를 강요하여 작품을 한갓 논문의 자료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했다.

(*)문학계의 이론 탐닉을 독자들의 하루키 탐닉에 견주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요컨대, 작품 읽기/읽어내기를 기피하면서 논문 엮어내기에나 탐닉하는 문학 연구자들 또한 데카당스들이다...  

06.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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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25 11:55   좋아요 0 | URL
노르웨이 숲에 대한 유종호 씨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루키는 그 전에 단편집 읽어봤는데 꽤 좋았어요. 그래서 노르웨이에 도전했는데 좀 실망스럽더라구요. 그래도 먼 북소리를 비롯해서 한 두권은 더 읽어줄 마음도 있었는데, 지금도 마음 뿐이네요.

로쟈 2006-05-25 12:30   좋아요 0 | URL
하루키가 처음 붐을 탈 당시에 소개된 비평문들을 몇 개 읽었더랬는데(거기에 포함된 인용문들까지), 소위 괜히 폼잡는 '감상적 허무주의' 스타일이어서 이후론 눈길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 시절이었다면 혹 다르게 읽혔을지 모르겠지만...

보르헤스 2006-05-25 13:34   좋아요 0 | URL
독서는 일종의 오락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로써는 유씨의 '허드레 문학'이라는 정의에 동의하기 힘들군요. 평론가들의 문제는 언제든지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그들이 만든, 그들만의 잣대로 너무나도 쉽게 뭉뜨끄려 보인다는 점이지요. 그것이 철학이든 예술이든, 문학이든 말입니다. 평론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링 위에 올라가 보라고 말입니다. 비록 실컷 주어 터지더라도 말이죠...

로쟈 2006-05-25 14:28   좋아요 0 | URL
'독서는 일종의 오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죠. '오락'은 '허드레'보다는 나은 것인가요?..

보르헤스 2006-05-25 19:50   좋아요 0 | URL
감각적 쾌락만이 오락의 본질은 분명 아닐테지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글은 분명 읽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글을 읽는 독자의 개인적 체험과 결합하여 어떤 의미로든 표현되어 집니다. 비록 허드레 문학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비틀즈의 Yesterday가 구스타브 말러의 교향곡에 비해 작곡기법상으로 분명 '허드레' 할지는 모르나, 그것만으로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비록 폼만 잡는 감상적 허무주의인지는 모르나, 그것이 특별한 개인적 체험과 결합하여 어떤 의미로 한 개인의 내면에 자리잡는다면 그래도 그것이 아무 "가치"없는 일일까요? 언제나 도프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만을 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언제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만을 들을 수도 없는 법이죠.

로쟈 2006-05-25 20:48   좋아요 0 | URL
"언제나 도프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만을 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언제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만을 들을 수도 없는 법이죠." 맞습니다. 가끔씩 하루키를 읽거나 비틀즈를 들으면 되는 것이죠...

고영 2006-05-25 23:37   좋아요 0 | URL
근데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티코는 저급이고 벤츠는 고급이다. 아니면 많이 팔리면 저급 적게 팔리면 고급? 뭐 그런 건가요? 그리고 왜 많이 팔린다는 이유로 어느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비판 혹은 폄하 대상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을 읽어야 하지만 전 고전이 고전이기 때문에 읽지는 않습니다. 동시대의 작품들보다 소위 고전이라 불리 우는 작품들이 오히려 신선하고 느낄것이 많기 때문에 읽죠. 고전을 따로 구분하는 것이 고전을 멀게만 하는 일이라 느껴집니다.

로쟈 2006-05-26 00:08   좋아요 0 | URL
고전을 '정전화'의 문제와 연계시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가령, 무엇이 정전이며, 누가 정전을 말하는가, 라는 반문이 가능하니까요. 한데, 기준은 잠정적으로라도 필요하고, 제가 갖고 있는 기준은 문제를 얼마나 복잡하게 사고하도록 해주는가, 삶의 근원적인 어려움과 대면하도록 해주는가 등입니다. '감상적 허무주의'나 '냉소주의' 등에 별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태를 단순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유행 같은 자살은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눈팅 2006-05-26 00:37   좋아요 0 | URL
유종호 선생이 현실참여적인 비평을 하셨군요. 문학사상사에서 보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더 일찍 나왔어야 했을 비평입니다. 수많은 알라딘 리뷰가 별 네개를 주는 것이 너무 싫었는데 비평가의 정당한 권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큰 잘못입니다. <창작과 비평> 봄호엔가 폴 오스터를 분석한 글도 주목할만 합니다. 폴 오스터의 소설도 결국 포스트모던 우파 계열에 속한다는 우려를 하더군요. 필자는 포스트모던이 잘못이 아니라 포스트모던 좌파 소설가를 발굴하고 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알라딘의 독자리뷰는 양이나 질에서 상당한 수준이지만, 소설 분야의 독자평점은 좀 헤프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pax 2006-05-27 09:31   좋아요 0 | URL
음... 아마 책 자체를 통해 독자들의 성격마저도 간단하게 추리를 하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라고나 할까요? 또한 그 추리 자체의 맞고 틀림을 넘어서 윤리적으로도 그런 평가는 올바르다고도 보기 힘들 거 같습니다. 가령 그는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자기 성숙을 준비하라는 도덕적 훈계와 함께 온갖 고전들을 처방하겠죠.

로쟈 2006-05-27 12:05   좋아요 0 | URL
현 비평계의 문제는 오히려 아무도 그러한 '처방'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작가나 독자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베스트셀러 추수적인 수사학만 남발하는 것이 비평의 책무는 아닙니다. 독자도 그러한 쓴소리에 맞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되는 것이구요...
 

재작년 11월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을 이미지 버전으로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러시아 TV에서 보고 적은 감상이 주된 내용이다. 해서, 지난번 정리해서 다시 올린 <사마리아> 읽기에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젯밤(21일)에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보았다. 지난주 <사마리아>에 이은 것으로, 같은 채널(REN TV)에서는 다음주에 <해안선>을 방영한다. 이 김기덕 시리즈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나는 한국에서도 안 보거나 못 본 영화들을 모스크바에서 보고 있다(*<봄여름가을겨울>은 2004년 러시아의 한 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3편의 후보작에는 그의 <빈집>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해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한(그러니까 김기덕은 더 이상 한국 영화계의 비주류가 아니다, 는 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최신작 <시간>을 국내 극장에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하니까 그는 '비주류'가 맞다, 아직은) <봄여름가을겨을 그리고 봄>은, 내가 보기에, 이 ‘잘나가는 김기덕’의 자기 점검용 영화, 혹은 ‘숨 고르기’용 영화이다. 하도 정신 없이 영화들을 찍어댔기 때문에, 감독 본인도 자신이 도대체 무얼 찍고 있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을 법하다(더불어, 내가 영화를 왜 찍는 거지?).

해서, 그가 내린 결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를 찍는 것인데, 그게 가장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가 된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일단, 사계(四季)를 담아야 했던 이 영화는 제작기간이 무려 1년이나 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평소 3개월이면 하나씩 해치우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잔혹한 장면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그는 살인장면을 삽입할 수도 있었다). ‘잔혹하지 않은 김기덕 영화’라는 게 모순형용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김기덕의 불교영화?(더 리얼하게는 ‘절간[절깐]영화’?) 설마?!

지난 봄에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러시아의 영화비평가 세르게이 아나슈킨에 따르면, “그런 영화를 김기덕에게서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상식적’인 판단인데, 거기에 진실이 있다. 즉, 이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A Film by Kim Ki Duk)’가 아니라, ‘김기덕에 대한 영화(A Film on Kim Ki Duk)’이다! 오죽하면, 이 영화가 자신의 영화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김기덕 자신이 직접 출연했을까!(물론 속사정은 안성기를 캐스팅하려던 일이 불발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니, 아무리 상을 받고,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김기덕의 필모그라피에서 ‘예외적’이며, (극단적으로 말해서) 제외되어도 무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이 영화를 빼더라도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구성’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은 김기덕의 영화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 태도, 자세, 결의 등을 아무리 나열해 봐야, 그건 컨텍스트로서, 영화 ‘이전’이며 영화 ‘바깥’일 따름이다(그러니 일급의 비평가라면, 혹은 눈치 있는 비평가라면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일부 조심스런/성급한 비평가들의 진단처럼 김기덕의 ‘변화’를 예고하는 영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그는 <사마리아>와 <빈집> 등을 통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김기덕 자신도 이 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라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인바, <나쁜 남자>나 <해안선>에서 <봄여름가을겨울>도 ‘이행’하는 건 (영화)논리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런 게 가능한 경우는 돈 받고 영화를 찍어주는 ‘직업’ 감독들이다). 사실, <해안선>인가는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간에 겹쳐 찍었을 법한데, 그것이 암시해주는 바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역시나 그의 영화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거듭 말해서 (김기덕이 나오는) 이 영화를 (김기덕이 나오지 않는) 다른 영화들과 연관지어서 ‘진지하게’ 이해/해석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기대에 걸맞는 성과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무얼 찍은 것일까? 사계의 순환을 인생의 사계에 비유하는 것은 물론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일이다. 불교에서의 ‘업보’를 순환적인 삶의 근거논리로서 제시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다. 그러니, 등에 돌멩이를 맨 물고기나 개구리/뱀과 허리에 맷돌을 둘러매고 ‘업보’를 씻기 위해 고행에 나선 김기덕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관객이 감동을 받는 것도,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모든 건 (정신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후적/소급적으로만 의미를 갖는다. 봄여름가을 장면이란 겨울 장면을 찍기 위한 도구이고 핑계였을 따름이다(우리는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젊은 날의 방황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럼, 겨울장면은 무엇이었나? 여름날에 병을 고치기 위해 물위의 절간을 찾아온 한 여자에 빠져 욕정이 이끄는 대로 스승의 곁을 떠났던 20대의 ‘기덕’(네 명의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을 그냥 ‘기덕’이라고 하자. 이름이 있었던가?)은 10년이 지난 가을날 바람난 아내를 살해한 살인자가 돼 다시 물위의 절간을 찾는다(스승은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라고 반문한다). 스승은 그의 뒤를 쫓아온 형사들에게 말미를 얻어서 그가 참회의 문구들을 절간의 나무 바닥에 다 새기도록 하고, 그 일이 끝나자 그는 잡혀간다. 그리고, 겨울. 아마도 10여 년의 형기를 살고 난 40대의 기덕은 다시 절간을 찾고 스스로 소신(燒身) 봉양한 스승의 사리를 수습한다. 그리고는 교본을 발견해서는 무술을 연마한다(한국의 전통적인 ‘절간영화’에는 없는 내용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러던 차에 얼굴을 천으로 가린 한 아낙이 어린아이를 절간에 맡기러 왔다가 되돌아가던 길에 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서 죽는다. 자신의 ‘업보’를 확인한 기덕은 맷돌을 단 줄을 허리춤에 매고 불상을 손에 들고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고행을 감행한다(이 장면과 겹쳐지는 건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에서 장신구를 끌고서 폭포를 오르는 로버트 드니로인데, 한국 영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배경음악으로는 (엔리오 모리코네 대신에) 김영임의 '정선아리랑'이 깔리고.

화면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민요이지만, '정선아리랑'은 사실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가령 <서편제>에 쓰인 '진도아리랑'과 비교해 보아도 '정선아리랑'의 정서는 사뭇 다르다. 한데, 왜 안 어울리는가? '정선아리랑'은 (자식 못 낳는) 우리 여인네들의 한(限)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민요인데 반해서 화면은 여인네를 죽게 한 사내/스님의 업보 씻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거기에 더 어울리는 건 '남자는 강해야 한다' 같은 <황비홍>의 주제가이다. 어차피 안 맞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말이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 김기덕이 몸으로 때우는 영화이다. 맷돌을 끌고 산을 오르는 그의 ‘용맹정진’에 논리적인 해명/설명을 다는 건 부질없다. 그것이 이제까지 그가 영화를 찍어온 방식이고 앞으로 찍어갈 방식이다. 해서,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정신은 ‘불교 정신’이나 (변형된) ‘기독교 정신’ 따위가 아니라 ‘무대뽀 정신’이다. 그게 전부이다. 죽이든 밥이든 난 그런 식으로 영화를 찍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찍을 것입니다, 라는 결의가 거기에는 담겨 있다(그에게 영화는 ‘업보’, 혹은 ‘업보 씻기’인가?).

그건 ‘말’로 될 일이 아니어서 그는 ‘몸’으로 때운다(사실, 겨울 장면에 등장한 김기덕은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절간을 배경으로 가지고 온 이유의 하나는 대사가 필요하지 않아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고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지 않는가. 이 테마를 ‘현대적인’ 상황에 맞게 고안/각색해본다고 생각해보라. 적절한 대사를 쓰기도 힘들 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로서 이 영화가 김기덕에게 갖는 의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우화’, 즉 알레고리이며, 이 알레고리가 김기덕이 챙긴 몫이다. 그럼 관객은? 관객은 무슨 이유로, 혹은 무슨 업보로 김기덕의 자기점검용 체력단련과 정신수양에 동참해야 하는가? 의외로 ‘소심한’ 김기덕이 이런 걸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해서 (폭력 장면 대신에) 등장하는 것이 판타지적인 배경이다. (지난번에 <사마리아>를 말하면서 지적한바 있지만)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알레고리가 불가불 배제/희생할 수밖에 없는 디테일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는 ‘물위의 절’이라는 가상의 회화적인 공간을 가져온다(알려진 바이지만 한국에 그런 절은 있어본 적이 없으며, ‘주상지’란 연못에 세워진 이 절은 자연보호 차원에서 현재는 철거되었거나 철거될 예정인 걸로 안다, 그리고 벌써 철거되었다). 아마도 외국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어필하는 것도 이 배경공간이 갖는 수려한 이미지일 것이다(거기에 뭔가 심오한 듯한 불교철학과 뜻은 모르지만 애절한 듯한 주제가가 덧붙여지고, 등등).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감독 자신에 대한 우화적 알맹이(=속사정)가 ‘관광상품’으로 포장된 영화이며(실제로 세트장은 한동안 관광명소 역할을 했다고), 현학적으로 말하면, 알레고리적 이그조티시즘(Allegorical Exoticism)의 영화이다(이 영화는 ‘불교’와 무관하며 ‘한국’과 무관하다). 김기덕이 알레고리를 챙겼다면, 관객이 챙기는 건 이그조티시즘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볼 것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 한가지만 빼놓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 관심을 끈 장면이 있는바, 그건 겨울에 한 아이를 데리고 엄마인 듯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등장한 장면이다. 이 장면의 처리에 대해서 러시아의 비평가도 궁금해 하던데, (한국인이지만) 사실 내가 그보다 더 아는 것도 없다. 아니, 관음보살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있는 아나슈킨과 비교해 본다면, 내가 더 무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영화를 본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이 여자가 나병환자여서 당연히 얼굴을 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아이를 절간에 맡기려 한다고).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가 붙일 수 있는 논리적인 설명은 그것뿐이다. (아랍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며 예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아이를 맡기러 온 자신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렸다는 건 따라서 부족한 설명이다. 또 ‘기덕’과 무슨 관련이 있는 여인이어서 얼굴을 가렸을 거라는 한 관객의 설명도 근거가 없다. 여인은 아이를 놓고 불상 앞에서 한참을 울다가 떠나는데, 그 울음은 한스러움의 울음이다. 내 짐작에 그 한스러움은 자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갖는 한스러움이다(그는 ‘스님’에게 잘 부탁 드린다는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한국인의 억척스런 모정을 고려해본다면 그녀가 아이를 떼놓으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일 것이다. 해서, 그녀의 업젝션(abjection)은 자신을 비천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인바, 그건 그녀가 몹쓸 병에 걸린 경우를 고려할 때 이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무슨 업보 때문인지 아이를 두고 바쁜 걸음을 옮기다가 스님(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 이어지는 마지막 봄 장면에서 그녀의 아이는 동자승 시절의 기덕을 연기했던 배우가 다시 연기하는바(인연의 사슬?), 거꾸로 되짚으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죽은 것이 된다. 여기서 은근히 암시되는 것은 (부친살해가 아닌) ‘모친 살해’의 모티브이다(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수취인 불명>에서도 비천한 모성, 혹은 모친 살해의 모티브가 다루어졌을 법하다).

조금 넘겨짚어서 말하자면, 김기덕 영화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이 ‘모친 살해’(=비천한 모성)이며, 여성에 대한 그의 공격성은 그것과 연관되는 것이지 않나 싶다(이건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과 견주어볼 만하지만,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에 대해서만 내가 흥미를 느낀 이유이다(이 장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몇 마디 늘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인 장면은 이 영화에 대한 ‘읽기’를 자극하는 ‘대상 a’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절간의 세계는 여성/모성 부재의 세계가 되었는바, 그것은 스승-제자의 세계이면서 남성들만의 단성(單性)적인 세계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아이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아’로 버려지며, 그를 거두어 키우는 건 스승(=아버지)이고, 그는 스승의 대를 이어서 또 다른 고아를 제자(=아들)로 키워낸다. 그게 그들의 업(業)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작년에 나온 가장 남성중심적(혹은 남근주의적) 영화를 꼽으라면 <봄여름가을겨울>을 꼽아야 할 것이다(이 영화와 <안토니아스 라인> 같은 ‘여성중심적’ 영화를 비교해 보라). 이와 비교한다면, ‘최악의 남성영화’로 잔뜩 욕을 먹은 <나쁜 남자>는 차라리 ‘심약한’ 남성주의 영화라고 해야 옳다. 그 영화에서 한기(조재현)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대생을 윤락가에 넘기면서 ‘나쁜 남자’를 자임하지만, 정작 그는 자기 욕망의 대상(‘대상 a’로서의 여성)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분열적/히스테리적 주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형편이 돼서 이 여성을 숭배하며 모든 걸 갖다 바치는(백만 송이의 장미?) 행위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이 동일한 태도의 이면에서 ‘여성주의’를 발견한다면, 그건 넌센스이다. 한 여자를 숭배하거나 학대하는 남자는 ‘동일한 남자’이다. 그래서 같은 여자와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의 ‘패악’은 그러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이고 가면일 뿐이다. 결국 <나쁜 남자>에서 패배하는 건 여대생이 아니라 한기 자신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영화는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이기도 하다.

여자는남자의미래다

사실 올해 나온 또 다른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가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이 영화 또한 최악의 反여성주의적 영화로 꼽히는 모양인데, 왜 맨날 (담대한 남성들은 놔두고) ‘가련한 남성’들만 얻어맞는 것인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여성 관객 일반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아니면 ‘엘리트’ 여성주의 비평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그런데, 배용준의 근육질 몸매에 환호하고, 디카프리오의 미소에 숨 넘어간다는 관객들도 (일부 비평가를 포함한) 여성 관객 일반 아닌가? 아마도 내가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여자들도 남자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올해의 남성영화니 여성영화니 하는 걸 선정하는 건 그저 그들의 알리바이 정도라고 해두자(참고로, <낮은 목소리>의 여성감독 변영주가 만든 <밀애>는 전혀 ‘여성주의적’이지 않았다).

하여간에, 전혀 잔혹하지 않으면서 ‘담대한’ 남성주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에서는 두 여자가 소리 없이 죽어나간다. 하나는 30대의 기덕이 죽인 아내(여름 장면에 등장했던 그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그가 ‘간접적으로’ 죽이게 되는 한 여인이다. 아내의 죽음/살인은 스승이 보는 신문쪼가리의 기사를 통해서 전해질 뿐 영화 속에서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그래서, ‘얼굴 없는 죽음’이다). 스승은 자신이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하는 제자에게 “그런 줄 몰랐더냐?”(이건 그 자신도 젊은 날에 겪어보았다는 얘기다)라고 다그치고 죄업을 씻는 방도를 일러준다. 아내를 죽인 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겨울 장면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 또한 정말로 찍소리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이 또한 ‘얼굴 없는 죽음’이다). 그 죄업을 씻기 위해서 기덕은 맷돌을 끌고 산을 탄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러니까 자세하게 묘사되는 것은 이 두 남자(결국 같은 남자)의 글자 새기기와 산 타기이다. 거기에 비하면, 두 여자의 죽음은 일도 아니다! 이 어찌 담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번의 죄업을 씻은 기덕은 마지막 봄 장면에서 평정한 마음으로 동승(童僧)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이 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바, 스님 기덕은 화가, 즉 예술가이고 (알레고리적으로) 영화감독이다. 모든 죄업은 그가 그러한 평정과 예술가로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련)과정이었을 뿐이다. 여인네의 유혹/죽음은 그 한 코스에 불과했던 셈. 그리고, 이러한 자기 알레고리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은 단성생식(單性生殖)에의 판타지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그의 업보는 스승-제자, 곧 남성-남성의 관계를 반복하기 위한 핑계거리였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 스승-제자 관계가 이 영화적 세계의 본질이고 ‘진리’이다. 그것만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고정불변하는 진상(眞相)이며, (여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속세의 환상(幻相)일 따름이다. 만약에 당신이 이러한 결말에서 ‘평온함’을 느낀다면, 그거야말로 ‘섬뜩한(uncanny)’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이러한 절간의 세계보다는 나처럼 속세를 더 사랑한다면 말이다…



P.S. 지난 11월 12일자 <이즈베스찌야>지에 실린 김기덕 인터뷰를 여기에 정리해서 옮긴다. 인터뷰한 통신원(기자)는 키릴 알료힌이다. 사전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독학-영화감독 김기덕은 분기마다 영화를 찍어서 개인적으로 국제시장에 영화를 공급하는데, 이번 가을에 두 차례 모스크바에 올 예정이었다(한국영화제 개막식과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빈집> 시사회 때). 하지만, 그의 빡빡한 작업 스케줄 때문에 그의 방문은 취소되었다.(*표시를 한 건 나의 군말이다.)

빈집

이즈베스찌야: <빈집>은 2004년에 러시아에서 개봉된 당신의 네 번째 영화이다(*짐작에,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집>과 <해안선> 혹은 <나쁜 남자>인 듯하다). 당신은 영화를 무척 많이 찍는다.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김기덕: 특별한 비밀은 없다. 나는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작업할 따름이다. 한 영화를 끝내면 나는 곧장 다음 영화로 들어간다. 이건 샐러리맨들이 매일같이 출근해서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구상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프로젝트에 달려든다. 그게 ‘영화감독이 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즈베스찌야: <빈집>의 주인공은 파리의 아가씨 아멜리를 닮았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어서 그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김기덕: 아직 <아멜리>를 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영화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진 않는다. 영화의 거리[꺼리]들은 생활에서 얻은 것들이다.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빈집>을 관객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될까(*따라하게 될까) 두렵지는 않는가? 영화는 타인의 일상을 한번 맛보기 위해서 여러 집들에 잠입하는 걸로 시작한다(*나는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만 아는바, 거기에 준해서 옮겼다).

김기덕: 나는 아직 나의 주인공들을 닮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한 미국 여자가 빈집에 들어가서는 편안하게 살더라는 얘기는 들어봤다. 하지만, 그녀는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가 <빈집>을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2년간 파리에 체류한 적이 있다. 유럽 영화, 혹은 프랑스 영화가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는가?

김기덕: 카메라를 잡기 전에 내가 본 프랑스 영화는 다해서 세 편이다. 때문에, 내가 유럽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가진 생각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즈베스찌야: 비평가들은 해마다 당신이 최고작을 찍었다고 말하곤 한다. 처음엔 <나쁜 남자>에 대해서 그런 평을 쓰더니, 그 다음엔 <봄여름…>에 대해서, 지금은 <빈집>에 대해서 그렇다고들 한다. 당신 생각에는 어느 작품이 최고작인가?

영화-악어 (1996)의 장면들

김기덕: 나의 영화들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서로 닮았다. 그들은 전부 내적으로는 서로 통한다. 나에게 특별한 선호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악어>를 지목하겠다(김기덕의 데뷔작으로 익사자들의 시신을 찾아주고서 유족들에게 돈을 받아 챙기는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 이즈베스찌야).(*이런 주석으로 봐서 <악어>는 아직 러시아에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특이하게도.)

이즈베스찌야: 당신의 성공에 대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떤가?

김기덕: 나는 물론 해외에서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 영화를 보지 않는다. 설사 본다고들 하더라도 너무도 이해들을 못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의 영화들은 한국사회의 추한 면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러시아언론과의 인터뷰 사진.



이즈베스찌야: 러시아에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블록버스터들이다(*얼마 전에 <쉬리>가 또 TV에서 방영됐다. 1년에 최소한 네댓 번은 나오는 모양이다).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를 모방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몇몇 감독들이 실제로 서양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한국 관객은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하다. 그래서 흥행작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몇몇 감독들은) 미국 영화를 모방한다(*사실 강우석이나 강제규 감독의 영화보다는 김기덕의 영화가 흥미롭다).

이즈베스찌야: 예전에 당신은 세계화 반대론자였다. 지금 당신은 세계시민이 되어 각종 영화제들을 날아다니면서 자신의 영화를 판다. (세계화 반대론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은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그렇다. 나는 예전부터 세계화에 반대해왔다. 모든 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세계문화는 발전할 수 있고 다양해질 수 있다(*참고로, <복수는 나의 힘>에서 보듯이 당신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냐는 다른 인터뷰에서의 질문에 박찬욱은 어떤 면들에 대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두 감독의 견해는 ‘상식적’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이 러시아에서 뭔가를 찍을 거라고들 말한다. 소문일 뿐인가?

김기덕: 나는 자주 유럽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장애물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저예산으로 작업한다.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러시아에서도 한번 찍어보고 싶다. 하지만, 당장의 구체적인 계획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현재의 지명도라면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영화 <활>(2005)의 러시아판 포스터.



P.S.2. 거기까지이다. 기사로는 3단짜리 인터뷰이지만,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에 분량은 소략하다. 오늘 산 책의 하나는 <‘자신들’ 속의 ‘타자들’: 세계화와 현대 영화에서의 문화간 융합>이란 제목의 신간 영화비평서인데(허름한 모양새에 비해서는 비싼 책이다. 116쪽에 6,000원쯤이니까), 6편의 평론 중에서 제일 첫머리에 실린 것은 세르게이 아나슈킨의 김기덕론이다. 제목은 '김기덕: 추방자들의 복수'.

‘추방자’(=추방된 자)란 뜻의 러시아어 ‘이즈고이’는 ‘추방자’ 혹은 ‘천민’을 뜻하는 영어 ‘파리아(pariah)’의 번역어로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이즈고이’란 말은 ‘호모 사체르’(아감벤)에 대응하는 말이면서 ‘서얼’(고종석)이라 옮겨질 수도 있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낙오자란 의미에서) ‘떨거지’라고 옮겨질 수도 있다. 그러한 ‘계급적인’ 배경을 암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견지할 때, 김기덕의 영화는 <악어>나 <수취인 불명>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작’이 된다(<나쁜 남자>도 부분적으론 그런 함의를 갖는다).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완전히 제거/거세돼 있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계급적 배경이다(해서, 남근주의적인 이 영화에서의 ‘남근’은 말 그대로 ‘결여의 기표’이자 순수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허울뿐인 ‘문간’처럼). 그런 의미에서도 이 영화는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이며, ‘문제작’이 되기엔 많이 모자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주류적 코드를 상징하는 ‘대종상’이 주어진 것은 역설적이지만 순전히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대종상은 김기덕의 ‘뛰어난’ 영화나 ‘문제적인’ 영화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더불어, 대종상은 ‘관광/홍보 영화’를 편애한다).

하지만, 그런 ‘추방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최신작인 <빈집>은 그가 자신의 ‘본령’으로 되돌아온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사가 좀 부자연스럽다는 평(김기덕 영화를 좋아하며 모두 본 룸메이트의 평이다)에도 불구하고 반갑다(*이 영화를 나중에 본 감상은 따로 올려놓은 바 있다) . 그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미학이 아닌 사회학/정치학의 자리에 좀더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죄다 반면교사(反面敎師)거리들이지만, 한국 영화계에는 미학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추락한 감독들이 여럿 된다. 화엄경을 들먹이다가 고꾸라진 감독을 비롯해서. 거꾸로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이나 돈 되는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걸 오래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홍상수처럼 속물적인 걸 내내 붙들고 있거나. 한편으로, 똑같이 판타지를 다루지만, 김기덕을 한참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감독으로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이 있지만(그는 김기덕과 달리 디테일에 강하다), 그는 김기덕만큼 다작(多作)이 아니기에 그의 영화를 기다리다가는 목이 빠지겠다. 그러니 김기덕식의 다작에도 장점은 있는 것이다.

06.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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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들을 핑계로 '최근에 나온 책들'을 외면해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울 리는 없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빨리 해치우는 게 제일 속편한 일일 듯싶다. 연재를 조금 늦추는 바람에 다루어야 책들이 좀 많다. 성큼성큼 보폭을 좀 늘려잡아야겠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책이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휴머니스트, 2006)이다. 소위 '고전해제'류에 해당하는 책인데, 기획과 편집에 꽤 손이 많이 간 것으로 입시 논술 등을 준비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생, 일반인들에게도 '서양 고전'에 대한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는 동양편으로 이미 2권을 출간한 바 있는데, 아마도 4권까지 나온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의 '성공'에 힙입어(내가 이 출판사의 책을 처음 접한 것도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시리즈를 통해서였지 않나 싶다) '고전'에까지 손길을 뻗은 게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교양'과 '고전'은 거의 '한 식구'라고도 할 수 있으니(고전에 대한 식견이 바로 교양 아닌가?) 이 '손길'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잠시 소개를 옮겨보면, "총 네 권에 걸친 방대한 분량으로 각 분야/각 권마다 '시간과 문명의 파노라마', '정의와 권력, 정치 변증법' ,'영혼과 성장' 등의 주제에 따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20세기 현대 지성들의 저서까지 고전들을 선정, 소개한다. '교과서적인 고전 편식'을 지양하고 우리 사회에 가장 깊고 넓게 영향을 끼치는 책, 21세기 한국의 문화 상황에서 다시 읽으면 좋은 작품을 선정했다."

 

 

 

 

그렇게 선정된 목록을 죽 훑어보았는데, 인문/자연과 정치/사회 분야에서 특별히 억지스럽게 들어앉아 있는 책은 보이지 않는다. 대개가 고전으로서의 평판을 얻고 있는 책들이란 얘기이다. '문학'쪽에는 다소 눈길을 끄는 책들이 몇 권 포함돼 있는데, 먼저 시집들. 릴케의 <릴케 시집>과 하이네의 <노래의 책>(이상 독일어권), 푸슈킨의 <서정시집>(러시아), 엘리어트의 <황무지>(영미권), 네루다의 <모두의 노래>(스페인어권) 등이 언어권별로 선정된 듯한데, 프랑스 시인들이 빠진 것이 좀 특이하다(요컨대, 보들레르가 빠져 있는 것). <모두의 노래>를 제외하면(음반에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모두가 번역본이 나와 있는 작품들이다(푸슈킨의 경우엔 단도직입적으로 운문소설 <예브네기 오네긴>을 꼽는 게 어땠을까 싶다).

 

 

 

 

소설의 경우에도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이나 발자크의 <잃어버린환상>, 만초니의 <약혼자들> 등이 포함된 것은 안심할 수 있는 번역본들이 출간된 사실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특이사항이라 할 만한 것은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피어시그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등이 포함된 것인데, 파농의 책이야 번역서라도 있지만, 생소한 피어시그(1928- )의 책은 어떤 연줄로 포함된 것인지?(굳이 지적하자면, 플로베르와 조이스도 빠졌는데 말이다. 프루스트는 분량 때문에 뺐다손 치더라도.)

물론 그의 작품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이 멜빌의 <모비딕>에 비견되기도 할 만큼 중요한 작품이라지만, 문제는 독자가 우리말로 읽을 수 없다면 말 그대로 '그림의 떡' 아닌가? '21세기 한국이 문화적 상황에서 다시 읽으면 좋은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읽을 수라도 있으면 좋은 작품'이 문제가 되는 것이니까. 여기서 '고전'에 대한 한 가지 원칙에 합의할 수 있는데, 그건 일차적으로 '번역'돼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손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번역본이 나와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같은 경우는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2005)에 따르면 다수의 번역본들에도 불구하고 추천할 만한 번역이 한 종도 없는 걸로 돼 있는데(제목은 '막대한 유산'으로 하고), 이 해제를 읽은 (청소년을 포함한) 독자들은 어떻게 '고전'과 만나야 하는 걸까? 궁극적으로 '고전해제'라는 것은 고전 읽기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읽기를 제안하고 유혹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할 때 말이다. 해서,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또다른 원칙은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어야 한다는 것.

 

 

 

 

거기에 마지막 원칙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가벼운 해제'와 함께 '부피 있는 독해'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필요에 따라 우리는 고전을 (다이제스트로) 줄여 읽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고전의 '본때'를 맛보게 해줄 만한 책들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원칙이 고전 읽기와 이해의 3박자라고 생각한다(우리네 인생살이는 네박자라지만, 교양은 세박자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한 고전 작품에 대해서 우리는 적어도 3종의 책들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해서,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에게 서양 고전을 어떤 의미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그런 물음을 가능하게 할 만한 조건을 우리가 충족시키고 있는가를 따져물어야 한다. 그건 우리 사회의 교양지수를 묻는 것과 같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 최근에 나온 <파우스트> 번역과 주해서, 연구서 3권이다. 이 책들은 교양 3박자에 대한 요구조건을 상당 부분 충족시키고 있기에 그러하다.

먼저, 이인웅 교수의 새번역 <파우스트>(문학동네, 2006). "괴테가 1773년 집필을 시작해 1831년 완성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걸작 <파우스트>를 들라크루아의 석판화 연작, 막스 베크만의 펜 소묘 삽화와 함께 수록했다. 국내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번역 및 연구 성과를 집적한 완결판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책"이라는 것이 의의로 제시돼 있는데, 의당 기대해볼 만하지 않는가? 거기에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담은 <파우스트 주해>(한국외대출판부, 2006)과 공동 연구서 <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문학동네, 2006)은 <파우스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심화시켜줄 것이다. 작년에 나온 <괴테 -그리고 그의 영원한 여성들>(서울대출판부, 2005)까지 챙겨두게 되면, 가히 전문가 수준의 교양이라 할 만하다.  

 

 

 

 

해서,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에 한정하더라도 선정된 68종에 대한 이러한 검토작업이 필요하다. 번역되었는가, 신뢰할 만한 번역인가, 주해서가 나와 있는가, 새로운 독해/연구가 소개돼 있는가, 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살펴볼 형편은 아니지만, 3박자가 고루 갖춰진 경우도 있고 2박자 정도의 빠른 템포에 엇박자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가령,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처럼 예전에 두어 종이 번역돼 나왔지만 모두 절판되어 현재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역설적인 건 2차 참고문헌들은 다수 나와 있다는 것), 다윈의 <종의 기원>처럼 여러 종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지만 전공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책들도 적지 않다(일반인들은 '대에충' 읽으면 된다는 뜻인가?). 때문에 우리사회는 분류하자면, '아직도 교양이 고픈 사회'이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의 취지는 이렇다: "단순한 고전 해제를 넘어서 21세기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동시대인들과 청소년들에게 걸맞는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고전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들 대표독자들이 제시하는 고전에 대한 시각과 문제의식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고전해제'를 읽고서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간다는 건 물론 오버이고 과장이다.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가기 전에 '있는 고전들'만이라도 꼼꼼히 자신의 힘으로 읽어내는 것이 우선적이며, 그게 '진짜 교양'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만 하더라도 수 종의 번역서 중 하나 정도는 읽어주고,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선언>(그린비, 2005)로 역사적 배경을 확인해둔 다음,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선언>(뿌리와이파리, 2006) 같은 책을 통해 한 장이라도 자세히 따라 읽어보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것. 강유원에 따르면 그게 '근대인'의 기본조건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세계를 구축하자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왕의 권력을 신이 준 것이라고 하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인간 중심의 사회를 이룩하려 하였다. 이들은 긴간의 힘에 의해 파악된 지식을 바탕으로, 이른바 근대의 교양을 형성하였다. 이들이 부르주아로 불리는 근대의 시민인데 고전적 의미에서의 우파, 즉 오늘날의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다. 즉, 근대의 지식인이라 하면 일단 누구나 다 우파 수준의 교양을 갖춘 셈이다... 그러니까 일단 '근대인'이라 하면 우파적인 교양을 갖추는 게 기본이다. 우파적 교양을 기본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골고루 먹고사는 문제, 그러니까 평등의 문제 등을 고민하면 좌파인 거다. 우파건 좌파건 근대인이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람들 모두 교양인이다."(50-1쪽, 강조는 나의 것)

 

 

 

 

흥미로운 대목인데, 일단 '근대인=교양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때의 '교양인'이란 '우파 부르주아지(시민)'라는 것. '좌파'는 그 '우파 부르주아지'에서 나온다는 것(일단 기본 교양을 갖춘 우파가 평등의 문제를 고민하면 좌파라는 것이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교양 대가리' 없는 놈들이 좌파 행세하면 안된다). 예전에 나는 강유원이 '배고픈 우파'가 아닐까란 지적을 했었는데, 크게 잘못 짚은 것 같지는 않다. 좌파가 되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교양있는 우파가 될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하는 것이니까('이사야 벌린' 정도 된 이후에 '칼 마르크스'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니까. 마르크스 또한 일차적으론 '근대적 교양인'이었다).

조금 확대해석하면, 그는 고전적인 역사적 유물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좌파 혁명)'보다 '부르주아 혁명(=우파 혁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그런 관점에 설 경우, (조급했던) 러시아 혁명이 정통에서 일탈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더불어, 교양이 아닌 '품성론'에 기초한 현실 사회주의가 '전근대적' 체제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없는 것들'이 순서도 모르고 나서면 곤란한 것이다.  

아무려나 우파이건 좌파이건 간에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근대인이 알아야 할 모든 것'으로서의 '교양'이란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는 그 문턱에서 요긴한 가이드북 노릇을 해줄 것이다(하긴 68종의 고전에 대한 3종 세트를 구입하여 읽을 만한 여가를 프롤레타리아가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전무할 터이니 교양은 우파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아닐 도리가 없다. 이건 혹 딜레마가 아닐까?).

 

 

 

 

교양 있는 분들을 위한 책으로 또한 꼽을 만한 것이 <브레히트 희곡선집1, 2>(서울대출판부, 2006)이다. 예전에 '한마당'에서 브레히트 선집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정격 번역이 두 권 분량으로 묶여서 출간된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역자는 브레히트와 독일 희곡의 전문가이며 유려한 문장을 자랑한다). 사실, 폴 존슨의 보고에 따르면, 브레히트야 말로 '배부른 좌파'의 표본적인 작가였다(고가의 노동자복을 맞춰 입고 다녔던 브레히트는 자기PR의 귀재이기도 했다). '배고픈 좌파'라는 게 편견일 수도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곡들은 고전으로서의 '명망'을 유지하고 있다. 한 작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천적인 재능(=문학적 재능) 못지 않게 후천적인 재능(=정치적 감각)도 갖추어야 함을 웅변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 -동양문학편>(휴머니스트)에 '해제'가 포함돼 있는 시선(詩仙) 이백의 시선집 <이백 오칠언절구>(문학과지성사, 2006)를 꼽아두기로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이백 시세계의 백미를 담아낸 책. 현전하는 이백의 절구시(絶句詩) 전체인 187수를 우리말로 옮기고, 이백 시의 전문 연구자 황선재 씨의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소개했다. 이백의 시 중에서 가장 짧은 형식인 '오.칠언절구시'만을 묶어 펴낸 것은 중국을 포함하더라도 이 책이 세계 최초이다." 이 어이 아니 주목할 수 있겠는가?

"오칠언절구(李白 五七言絶句)는 이백의 작품 1천여 편 가운데 가장 짧은 형식의 시로서, 작품 한 편이 오언절구는 20자, 칠언절구는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시 한편은 비록 짧지만, 그 가운데는 오묘한 진리와 풍부한 음악성이 스며들어 읽으면 읽을수록 운치 있는, 즉 말은 다했지만 뜻이 무궁하게 남는 경지(言有盡而意無窮) 속으로 몰고 간다. 이백 시를 내용에 따라 15장으로 분류하고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백 시로 추정되는 17편을 추가해 이백 오칠언절구 전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했다. 한시 원문을 읊고 적확한 우리말로 음미한 뒤, 이백의 생애와 역사 등 시가 씌어진 배경 해설을 함께 읽을 수 있다."

 
 
 
 
 
 

러시아 문학에서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당시(唐詩)에서 '이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알다시피 시성(詩聖) '두보'이다. 이 기회에 두 시인에 관한 책들과 두보 시선도 몇 권 눈여겨 봐두도록 한다(두시에 대해서는 고전적인 '언해'와 현대적인 '언해'가 제법 출간돼 있다). 자, 이런 것들이 '고전'들이다. 이걸 읽고 음미할 만한 여유만 각자 마련하면 되겠다...

06. 05. 24-28.

 

 

 

 

P.S. 그럴 만한 여유/형편이 안되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그런 이들은 '세계의 고전'이니 '서양의 고전'이니 다 (개)무시하고, 백석의 시집 한 권과 최근에 나온 고형진 교수의 <백석 시 바로 읽기>(현대문학, 2006) 같은 책 한 권 정도 사놓고 틈틈히 읽어보면서 노트에다 시와 자기만의 감상을 적어보는 걸로 '교양'을 대신하면 되겠다. 백석의 절창 '흰 바람벽이 있어'(1941)에 나오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시인 안도현이 자신의 시집 제목으로도 갖다쓴 시구이지만, 그가 멋있는 제목에서 빼먹은 것은 '가난하고'란 단어였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오늘도 '흰 바람벽'을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과 함께 오래 응시해볼 일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절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 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격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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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 2006-08-09 09:17   좋아요 0 | URL
언급하신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은 이미 우리말 번역본이 있습니다. 절판되었지만, 도서관에서는 찾아볼 수 있지요. <선을 찾는 늑대> 로버트 M. 퍼시그 저 ; 一指 옮김 고려원미디어, 1991.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인 <라일라>(로버트 퍼시그 지음 ; 정영목 옮김 김영사, 1994)도 나왔지만 역시 절판되었군요.

로쟈 2006-08-09 11:43   좋아요 0 | URL
그랬었군요.^^ 동명의 책이 검색되지 않아서 나온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참에 새 번역본이 나왔으면 싶네요...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이매진, 2006)는 얼마전 출간된 손호철 교수의 신간이다(생각만큼 팔리는 책은 아닌 모양이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인데, 마침 프레시안(06. 05. 22)에 자세한 서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한데, 기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에 주로 할애돼 있다). 필자는 강이연 기자이고, 타이틀은 '노무현 정부, YS와 똑같은 비극 반복'으로 돼 있다. 그 '비극'의 내용까지 동일한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현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걸 보면, 뭔가 '반복'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해서 내년엔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비판적 개방과 공세적인 세계화 전략이 한건주의와 결합해 나라를 거덜 낸 비극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도 노무현 정부는 YS와 너무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과)가 집권 4기에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노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모하고 무비판적인 공세적 세계화 전략의 전형으로서 YS의 OECD 가입을 빼닮았다"는 것(*한국일보의 칼럼에서 그가 종종 내비치던 의견이다).
  
-손 교수는 "정말 안타까운 것은 YS는 처음이라 몰라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YS의 경험을 생생하게 목격한 노 대통령이 정치적 스승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 미련한 것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는 것이다"고 쏘아붙였다.
  
-한발 나아가 손 교수는 "'내가 세계경제를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한 결정에 국민들은 무조건 따라오면 된다'는 계몽군주식 정책 결정은 박정희 시대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며 "반대하는 사람은 농민이건, 영화감독이건, 교사건 '변화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으로 모는 오만은 오히려 군사독재보다 더 심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손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해방 50년의 한국정치>(새길, 2005) 이후 10년 만에 새롭게 펴낸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책은 단순히 최악의 사회적 양극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한국의 발전모형에 대한 국민적 논의를 조직하고 만들어내는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손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의 두 가지 과제로 내세운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한미 FTA 추진은 모순된 처방이라는 문제점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것은 한미 FTA일 뿐이어서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복지국가 건설은 선거용 립서비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은 과연 한미 FTA를 체결하라고 표를 던져준 것일까?" 손 교수는 노무현 정권의 등장 이후 발생한 이런 모순과 한국 사회의 갈등양상을 두 가지 전선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하나는 냉전적 보수(수구) 세력과 개혁적 보수(자유주의) 및 진보세력 사이에 있는 '민주 전선'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에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대립이 보여주듯 민주개혁을 둘러싼 이 전선은 자유주의적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연합이 냉전적 보수세력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다른 하나는 개혁적 보수(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전선으로 이는 '신자유주의 전선'으로 명명된다. 그간 FTA 문제에서 이를 지지하는 개혁적 보수(자유주의)와 냉전적 보수세력이 연대해 이것에 반대하는 진보세력과 대립하는 양상이었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두 개의 전선을 분리하면 노무현 정부가 외쳤던 '개혁'의 성격이 명확해진다고 했다. "정작 해야 할 민주개혁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무한경쟁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개혁(개악)은 과감하게 추진했다는 점"에서 그간의 정부들과 차이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민주개혁'과 '신자유주의 개혁'이 혼재된 개념 속에서 노무현 정부를 '개혁적'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 교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는 97년 체제의 연속이라고 해석했다. 97년 체제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사회를 구분 짓는 개념이다. 극우반공 체제였던 48년 체제, 개발독재로 상징되는 박정희의 61년 체제, 그 61년 체제의 정치적 독재 부분을 6월 항쟁으로 해체한 87년 체제를 거쳐 세계화 전략과 IMF 사태로 국가주도형 정치경제 체제를 해체한 것이 97년 체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체제에서 핵심으로 남은 건 신자유주의 정책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97년 체제가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손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을 4개의 구간으로 시기구분해 이를 설명했다. 손 교수의 구분에 따르면 제1기(출범~2004년 총선 전까지)는 탄핵 등으로 민주개혁도, 노동운동 등의 반대로 신자유주의 개악도 제대로 못한 시기다. 제2기(총선~2005년 초까지)는 총선 승리에 기초해 민주개혁을 추진한 시기로 봤다. 그 후 제3기(2005년 초~2006년 전까지)는 전략 부재로 국보법 폐지에 실패한 뒤 사실상 민주개혁을 포기하고 '경제 살리기'라는 이름 아래 신자유주의 개악을 주로 추진했으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의로 상징되는 시기라고 구분했다.
  
-2006년 신년사에서 노 대통령이 사회적 양극화를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로 거론하며 해소를 위한 조치를 할 가능성을 시사한 시점을 계기로 4기로 들어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개악이 기본 골격이라는 점에서 손 교수는 오히려 "3기의 연속일 뿐 4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신자유주의 전선에서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한노연(한나라당+노무현정부 연합)을 깨고 '노노연(민주노동당+노무현 정부 연합)'을 복원해 민주전선을 유효화하라"는 주문 속에는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동안 수행해야 할 바에 대한 손 교수의 고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해야 할 민주개혁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무한경쟁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과감하게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말에 이런 궤도전환을 모색할 수 있을까? 손 교수 역시 이에 대해선 대단히 부정적이다(*그럼 뭐, 정권교체는 필연적인 대세이겠다. 그런데, 현 진보정당은 내년까지 집권을 위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까? 혹은 맨날 죽만 쑤는 것일까?).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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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5-24 11:05   좋아요 0 | URL
손호철의 처음 질문 왜 노무현 정부는 김영삼정부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노무현 정부에게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진보세력은 설득력있는 답을 주지 못하고 그나마 설득당한게 한미FTA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상가집에서 애기하다 공통된 의견은 한나라당이 한 10년 정권잡을 생각가지고 가야겠다였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개혁만으로 해결이 될런지.

pax 2006-05-24 11:25   좋아요 0 | URL
윗분에게//음... 그러니까, 님의 말씀은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누군가가 설득력 있는 비젼을 제시하고 있다는 뉘앙스로도 들릴 수 있겠네요. 그리고 그 새로운 발전 모델은 우리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집약된다? 혹시 한미 FTA도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발전 모델의 연장으로 간주 될 수 있을까요?

로쟈 2006-05-24 11:32   좋아요 0 | URL
어제오늘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 지지도가 거의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진보세력'은 소위 이 '반동적인' 50%에 대해서(대개는 '먹고사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죠) 어떤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 건지 저도 궁금합니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라고 생각하니까 거의 70% 되겠네요. '당신들의 진보'로 만족하는 건지, 70%에 대한 '인간개조' 계획이라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의문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도덕적 우월주의를 내세우지만(소위 '강철 같은' 품성을 갖춘 인간), 도덕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미담사례'에 속할 만큼 예외적이며, 사회적 진보는 이러한 '이기적인' 인간들(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대충 못할 게 없는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간주하고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pax 2006-05-24 11:31   좋아요 0 | URL
혹시 그 개혁으로는 해결 못하는 "먹고사는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에서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논리와 무관한 것인지... 다시 말해 누군가 잘먹고 잘사는 목표 실현을 위해 누군가가 못먹고 못살아야만 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해소하는 것도 그 "먹고사는 문제"에 포함이 되는 것이며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인가 뭔가 하는 것이 고려하는 문제인지? 현실의 이미 요란하게 선전되고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이 그것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당위적 차원에서 포함해야하는 것에 사람들은 동의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누가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인지? 결국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은 '개혁'(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과 상호배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지? 에구... 복잡하다 복잡해...

pax 2006-05-24 11:38   좋아요 0 | URL
로쟈님에게//로쟈님이 품고 계신 의문은 저의 의문이기도 합니다.(님의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것에는 유보적이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먹고사니즘 비판"은 아니며 더더욱 '영웅적인' 도덕성을 타인에 대한 우월함으로 내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먹고 사는 문제'를 너무 편협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존재하는 것 뿐입니다.(가령 저 역시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민노당을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님이 말씀하신 70%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천하다고 말할 이유는 저에게도 그리고 다수의 '진보'에게도..... "원칙적으로"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혹 진보진영 내부에 님이 그동안 줄기차게 비판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로서도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yoonta 2006-05-24 12:52   좋아요 0 | URL
진보진영에 있으면 모두 강철인간인가요? 진보를 하려면 모두 강철인간이 되어야 하나요? 전 로쟈님의 풍부한 식견과 지식에는 늘 탄복하는 편이지만 정치적 판단에는 문제가 많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수 없네요. 지난번 김규항씨관련 님글을 보면서도 느낀겁니다. 저도 님이 말씀하시는 진보진영의 도덕적 우월감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소위 진보가 그것만으로 추동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적이 있습니다..자본주의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고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어쩔수없는것 아니냐...라는 저의 말에...
그것은 "실천적 허무주의"일수도 있다..라는 코멘트...

이 말에 저는 매우 공감했습니다..그것은(그러한 저의 공감)은 저의 도덕적 우월감때문도 아니고..저의 품성이 강철같아서도 아닙니다.

로쟈 2006-05-24 16:43   좋아요 0 | URL
yoonta님/ '강철인간'으로서 품성 없이 진보를 자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저로선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물렁하고 게으르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할 수 있을까요?). 님은 진보라는 걸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동일시하는 듯하지만, 그러한 근본주의적 관점에 설 경우에 '진보'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나요, 혹은 자본주의의 외부에 대한 '상상'에 있는 것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진보는('변화'라는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지만), 평균적인 인간의 일상적 의식과 삶이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년의 자영업자이면서 한나라당 지지자인 '평균치'의 한국인에게서 현재 어떤 삶이 가능하며, 그것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외부를 말씀하지만, 현체제에서나 사회주의에서나 혹은 미-래의 어떤 체제에서든 그 구성원은 지금의 '우리들'입니다(이 중 70%는 보수라고 분류될 수 있는). 박근혜와 정동영과 노회찬도 다 공존하는. 아시다시피, 자본주의의 적은 자본 자체이며, 자업자득으로 언젠가 붕괴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얼굴을 마주볼 사람들은 지금 서로가 다 지겨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변화되는 것인가요? (소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 혹은 열망을 갖고 있지 않은, 혹은 그럴 필요를 갖고 있지 않은) '현재의' 인간들은 소위 '인간해방'의 새로운 시대를 살 만한 자격이 있는 건가요?(그런데, 누가 해방되는 것인지요? 혹 죽음이란 인간 조건 자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사실, 이런 물음들이 얼마나 공소한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 대학생들 몇몇의 의식이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 적당히 이기적이면서 적당한 선량한 사람들의 삶과 행복입니다. 저는 많은 부분 우리 자신이기도 한 그들이 삶을 훨씬 더 복잡하고 진지하게 사고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나이브한 관념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최근 정세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한나라당 지지자가 50% 이상이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의 절반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진보야, 나는 아니야!'라는 건 면책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나야, 우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yoonta님과 관련한 건 아니지만) 최근의 정세에 대한 냉소와 조롱을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특권처럼 남용하는 건, 더불어 모든 걸 '노무현 정권'과 '낙후된 사회의식'의 탓으로 돌리는 건 유치한 일입니다...

biosculp 2006-05-24 16:53   좋아요 0 | URL
물질적 이해관계라는게 이렇게 징그러운것일줄은 예전엔 정말 미쳐 몰랐었습니다.
지금 지방선거에서 민노당후보들이 내놓는 공약을 보면 정말 물질적이해관계는 도외시하는것은 아닌지, 그 물질적 이해조건의 외부에서 사고하면서 물질적이해조건을 변경시킬려는것은 아닌지 그런생각이 듭니다. 좀 허공에 떠있는 공약들.

저도 한미 FTA에 찬성하는 쪽은 아닌데 그렇다고 별다른 수가 없으면 해야되지 않나 뭐 그런쪽입니다.

다시 화두랄까요. 왜 김영삼 정부의 비극을 노무현 정권이 반복할까요. 이 비극의 반복이 지금 민노당이 들어선다고 비극의 주인공이 안될까요.
이래야 된다라고 쓰면서 이래야 되려면 이렇게 하라도 할수있어야되지 않을까 뭐 그런생각입니다.
그리고 돈벌기가 생각을 지우면 그리어렵지는 않지만 생각을 가지고 돈벌려면 이거 쉽지 않은 일인데 진보진영에 보면 돈벌이는 전혀 생각하는것 같지 않고요.

pax 2006-05-25 02:33   좋아요 0 | URL
오히려, 딱히 진보가 아니어도 '강철인간'을 요구하는게 요즘 사회의 트렌드가 아닐련지... 극한의 자기계발과 헌신 인내 그리고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인간개조 프로젝트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련지... 저로서는 로쟈님이 우려하고 있는 사태가 이미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두렵습니다. 이 것이 "젊은이의 나이브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조롱과 냉소를 특권처럼 이용하는 사람(예컨대, 진중권?)들이 모든 것을 사회의식과 노무현 정권 탓으로 돌리는 것이 님의 말씀대로 유치한 행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사 세상에 대해 삐딱한 태도로 냉소와 조롱을 던질지라도 그것이 지금까지 일상 지겹도록 부대끼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적대와 직결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전체가 낯설고 기괴한 것으로 비추어질지라도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신뢰할 수는 있고 그들 속에서 충분히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설사 그가 한나라당 지지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 조건이 딱히 그들이 강철인간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강변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네요.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이 다수라고 했지만 이건 이미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드는군요. 역시 너무 나이브한가요? 아니면..... 그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단한 원한감정을 가지고 인간개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강철인간들이 있는 것일까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설사 지금 진보가 30%이고(이마저도 안될지도 모르죠)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50%라 할지라도 딱히 그들 모두에게 원한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오버일지도 모르죠. "당신네 진보진영 사람들이 그토록 신뢰하던 노동자대중(혹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면)들은 다 어디로 갔나? 당신들의 눈에 원래는 당신들과 함께여야할 이들마저도 개혁대상인가?"라고 누군가 빈정거릴도 모르겠지만 그런 빈정거림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그들을 개혁대상, 계도의 대상으로 놓고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우월한 위치에 놓는 한가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는 이미 진보로서의 자격 상실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아니, 진보운동이든 뭐든 한다고 보기에는 이미 너무 한가한 인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상황은 항상 유동적이고, 그들 한나라당으로 돌아선 집단을(로쟈님이 보기에 그것이 일반 대중의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본성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확고부동한 실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성급한 것이고, 의식적 차원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기만한다 치더라도 그들이 다시금 진보진영과 연대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로쟈님은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설정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 확실히 이는 매우 현실적인 날카로움을 갖춘 안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사람들이 충분히 선량하지도 못한 동시에 충분히 이기적이지도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선량하고 전혀 이기적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오히려 좌파나 진보진영의 세계관에 있을 수 있는 지나친 선량함이 수반하는 자기극기, 자기 채찍질과 같은 우스운(어쩌면 숭고한) 요소들은 이미 현 사회에서 충분히 넘쳐나지 않나요? 일상을 근근이 살아가는 주체는 진정으로 이기적인가요? 어떻게 보면 로쟈님의 말씀이 부분적으로 맞다고 생각되네요... 문제는 적당하게만 이기적인 것일지도...

에궁... 잡설이 길어졌네...

pax 2006-05-25 02:27   좋아요 0 | URL
아참, 이건 공자님 앞에서 문자쓰는 꼴인데, 아도르노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올바른 인간에 대한 증오로부터 나온다" 올바른 맥락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참고로 로쟈님과 관련한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라는 매우 사려깊은 행동이 자칫하다가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 드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은 한편으로, 올바른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증오로 흐를 위험에 대한 로쟈님의 감수성만큼의 경각심을 가져도 좋을 듯 싶습니다...

로쟈 2006-05-25 18:39   좋아요 0 | URL
정치 얘기만 나오면 말씀들이 길어지시는군요.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든가 해야겠지만, 아무튼 제 관심은 구체적인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더 맞춰져 있습니다. 추상적인 사랑에 아무런 관심이 없듯이 추상적인 이념들에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그런 것들이 저에겐 기만이거나 알리바이 정도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의 경우, 제 관심은 '일관성'입니다. 자신의 모토와 이념에 맞게 일상적 삶을 모두 재구조화하는 것. '말'은, 정치인들의 말이 웅변적으로 보여주지만, 믿을 만한 게 아닙니다. 좌파건 우파건 상투적인 정치적 구호들에 제가 염증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눈팅 2006-05-26 02:11   좋아요 0 | URL
학자들의 현실 분석은 너무 조심스러워 핵심을 비켜가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문제를 아무리 제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보수화 내지 반동적으로 변한다면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병들면 논리적인 분석이나 학문은 무력할 뿐입니다. 대중이 노무현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좌향좌가 아니라 오히려 우향우를 한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개인의 삶이 바뀌려면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개인들의 의지가 필요하겠지요. 개인들 각자가 유토피아적 동경을 꿈 꿀 수 있도록 예술이 충격을 가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소모적인 논쟁은 별로 결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 설득보다는 도덕적 진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눈팅 2006-05-26 02:38   좋아요 0 | URL
강철같은 품성이나 도덕적 우월주의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란 개념이 불투명하듯이 도덕적이란 개념도 아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해관계가 사람들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특정한 도덕적 관점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도덕은 이해관계를 떠난 습관화된 가치 평가일겁니다. 도덕을 떠나면 이기적일 수도 없는 일이지요. 단지, 좌파와 우파의 도덕 유형은 아주 판이한 것 같습니다. 우파는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고 좌파는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한다는 비유는 지난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습니다만...또 다른 버전으로는, 우파는 공동체의 통합과 조화를 강조하고 좌파는 공동체 내의 적대를 드러낸다는 지젝의 언급이 있습니다.

biosculp 2006-05-26 17:12   좋아요 0 | URL
도덕적 진실을 구현하기위해 정치적 설득력이 있어야 된다. 뭐 이런 애기가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덕적 진실은 있는데 정치적 설득력은 없고 건드릴수록 덧만 나게 하면 참 답답해지는것이죠.
집값버블 애기에 1주만에 제가 사는 동네쪽에 1억이 집값이 떨어진게 아니라 올랐습니다. 더불어 인터넷부동산들어가보면 이제 왠만큼 큰평수도 전세가 아니라 월세로 돌리고 있습니다.
바라는 사회는 적절한 집값이 되는 사회가 좋지만 건드릴수록 집값만 올려버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도덕적진실은 애기조차 못꺼내고 저건 완전 무능아냐 이런애기밖에 안나옵니다. 좌파우파 뭐 가릴게 있나요. 제일 집값잘잡은 정권은 노태우정권같더군요. 그때는 토지 공개념이니 신도시 건설이니 해서 제일 안정적인 집값으로 되었었는데.
도덕적 진실은 기본이고 정치적 설득까지 갖추어야 세금받아먹을 자격이 있는것은 아닐런지요.

로쟈 2006-05-28 21:41   좋아요 0 | URL
모비딕님/ 사회주의적 인간형, 내지는 품성론은 제가 이해하는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핵심입니다. 주체사상은 그 품성론의 김일성 버전이라고 생각하구요. 중국의 '문화혁명'이 바로 그러한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인간 개조운동이었다고 봅니다(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러한 '개조'의 다른 편이 자유주의적 '개량'이 아닐까요? 저는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개조'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를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biosculp님/ 이전에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이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모스크바 통신에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참조하시길. 개인적으론 도덕과 정치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정치적 리더십을 사람들은 대개 도덕성에서 찾곤 하니까 무시할 수 없는 정도라고...
 

2004년 11월 중순에 '사마리아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다. 물론 러시아 TV에서 방영된 <사마리아>를 보고 느낀 소감을 주로 적은 것이었다. 당시엔 잡담들까지 잔뜩 늘어놓았었는데, 영화와 관련한 내용으로만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    

 

 

 

 

러시아에서 뤽 베송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영화의 ‘거장’으로 확실하게 대우 받고 있는 사람은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이다. <도그빌>의 제작노트가 올해 처음 나온 영화비평총서의 하나로 <독일의 가을>을 찍은 독일 감독 클루게의 책과 함께 지난 여름에 나오기도 했고, STS 채널에서는 지난주까지 ‘봉까르바이’에 이어서 이번주부터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을 방영한다. 거꾸로 봉까르바이(왕가위)는 현재 홍콩영화, 혹은 중국어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 기타노 다케시이고,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은 김기덕이다.

나는 김기덕의 최신작인 <빈집>은 아직 보지 못했고, 그 외에도 몇 편을 보지 않았지만(내가 본 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나쁜 남자> 등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보지 않은 건 <수취인 불명>, <해안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등이다, 는 건 그때 얘기이고, 나는 거명된 영화들을 모두 보았다) 일요일 밤에 본 <사마리아>는 일종의 ‘누빔점’으로서, 그의 영화들을 소급적으로 해석하도록 자극하는 영화였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마무리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국내외의 과대/과소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사람의 ‘영화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며, 따라서 나의 주된/한정된 관심은 그의 영화 ‘텍스트들’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판타지, 혹은 트라우마(외상)란 무엇일까에 쏠린다.

자신의 판타지를 영화적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시대의 또 다른 ‘영화작가’ 홍상수와 구별된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홍상수의 영화는 철저하게 판타지를 부정/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와는 대척관계에 놓여 있다. 그건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홍상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실의 디테일(혹은 그가 ‘표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김기덕만큼 디테일을 과소평가하는 감독도 드물다(그 점이 나로 하여금 그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영화들을 저예산으로, 속성으로 찍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많은 예산과 많은 시간이 필요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러니까 김기덕은 블록버스터나 ‘세밀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란 디테일과 상호배제적이다. 우리가 꿈(=판타지)을 꿀 때 사소한 디테일들에 주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다만, 몇 가지 상징만이 중요하게 사용될 따름이며, 그것들의 의미작용만이 관심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플롯과 몇 가지 상징, 그것이 김기덕의 판타지를 구성하는 재료의 전부이다. 11일회 촬영만으로 완성했다는 <사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원조교제’의 디테일이 다 생략돼 있다. ‘더럽다’는 대사는 자주 나오지만, 정작 더러운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인가? 그런 디테일은 감독의 판타지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언제나 그렇지만, 판타지를 구하기 위해 디테일을 희생한다. 대신에 몇 가지 자극적인 상징(이 상징의 가시적 등가물은 ‘피’이다)을 늘어놓음으로써 그러한 ‘희생’을 보상/은폐하고자 한다. 즉, 그의 영화에서 소위 과격한 장면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여자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카바하기 위해 화려한 액세서리들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희생된 디테일과 대체된 상징들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주로 전자의 편에 서 있지만(나는 디테일을 편애한다, 해서 영화에서의 판타지나 알레고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후자의 자리에서 <사마리아>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러시아어로 더빙된 걸 봤기 때문에, 디테일한 대사들은 놓쳤지만, 사실 그런 디테일 정도는 김기덕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대범한 사람이니까(그는 해병대 출신이 아닌가?!).



먼저, 줄거리. 여진과 재영이라는 두 여고생이 있다. 여진은 망을 보고 재영은 몸을 판다(걔네들 말로 ‘발랑 까진 것들’이다). 소위 원조교제인데, 명분은 유럽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란다. 그러다가 재영은 단속 나온 경찰들을 피하려고 여관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죽고(1부), 여진은 그런 재영을 ‘위로’하기 위해 유업(遺業)을 이어서 다시 몸을 판다. 아니, 이번엔 아저씨들을 ‘산다.’ 돈을 지불/환불해주는 건 여진이니까. 그런데, 그런 행각을 형사인 여진의 아버지가 뒤쫓게 되고, 그는 딸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에게 복수를 하는바 끝내는 살인까지 하게 된다(2부). 아버지는 여진을 데리고 죽은 아내/엄마의 산소에 갔다가 오는 길에 여진에게 운전을 가르친다. 그리고 아직 소나타를 서툴게 모는 여진을 홀로 남겨놓은 채 그는 동료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호송된다(3부). 이 1, 2, 3부의 타이틀은 각각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이다.



그럼, <사마리아>는 “딸의 원조교제를 목격한 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를 다룬 영화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표면적인 플롯만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영화는 너무 싱겁다.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답지도 않다(그런 복수라면, 오히려 박찬욱에게 더 어울리는 테마 아닌가? “딸을 납치당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 말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표면적인 줄거리를 좀더 세심하게/삐딱하게 읽는 것이다. 즉, (1)여진과 재영의 ‘원조교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2)‘딸(여진)과 아버지’는 어떤 관계인가? (3)‘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는 것들이 다시 해명되어야 할 물음들이다.

영화는 재영의 바수밀다 얘기로 시작된다. 인도의 창녀인데, 같이 잔 남자들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다나 어쨌다나. 그러니까 바수밀다는 기독교의 ‘성녀’인 셈이다. 창녀이면서 성녀(혹은 보살, 아님 부처? 불교에서는 정확하게 뭐라고 이르는지 모르겠다). 사실,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다 창녀이거나 성녀이며, 그건 그의 기본적인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판타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성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텅 빈)‘실재’를 가질 수 없는데, 그는 언제나 못 미치거나 넘어서기 때문이다.

라캉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비유로 든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는 있지만, 정확히 거북이에 이르지는 못한다. 즉,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과소평가하거나(창녀) 과대평가한다(성녀). 그러니까, 남성의 판타지 속에서 창녀와 성녀는 서로의 이면일 뿐이며, 대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바수밀다냐 사마리아냐”가 아니라, “바수밀다나 사마리아나”이다. <사마리아>의 1, 2부는 그래서 잉여적이면서 불가피한 반복이며, 판타지의 경제 안에 있다. 재영은 아저씨들한테 돈을 받고 섹스를 했지만, 여진은 돈을 (되갚아)주면서 섹스를 한다. 둘을 합산하면 등가교환일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등가교환으로서의 “성관계란 없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동시 오르가즘이란 없다.”) 언제나 한쪽이 더 주거나 덜 주는 관계이다.



해서 원조교제라는 한국사회의 이슈 혹은 치부는 <사마리아>의 소재일 뿐이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바수밀다/사마리아라는 보편적 (여성)신화, 혹은 판타지이다. 가장 단순한 거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의 ‘아빠’이다(당연한 일이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여성은 항상 ‘대상’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영이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고, 여진이 친구를 대신에서 원조교제에 나선다는 설정은 이 문제적인 아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기 위한, 무대화/장면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그건 근친상간에의 판타지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딸 여진은 딸이면서도 동시에 딸 이상의 존재였는바, 아빠의 연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아빠’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쓴 건데, 두 부녀가 사는 집안에 부재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이다. 이때 아버지는 ‘부권적 기능’의 대행자로서의 ‘아버지의-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들 부녀는 부재하는 엄마/아내의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한다. 여진에게 아빠는 아빠이면서 엄마이고, 아빠에게 여진은 딸이면서 아내이다. 먼저, 아빠이면서 엄마. 부녀가 나오는 첫 장면에서 아빠는 ‘앞치마’를 입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보고서 ‘어수룩한 김기덕이 또 한 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40대 중반의 강력반 형사인 아빠가 앞치마를 입고 밥을 차리고 또 그걸 벗지도 않고 밥을 먹는다는 건 비현실적인 설정 아닌가?), 영화를 다 보고 뒤집어서 생각하니까 ‘의도적인’ 설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두른 ‘앞치마’는 그가 집안에서 ‘엄마’를 대신하고 있다는 기호인 셈.

그리고 딸이면서 아내. 역시 같은 첫 장면에서 아침을 차린 아빠는 여진을 깨우기 위해서 헤드폰을 머리에 끼워주고 달콤한 음악을 들려준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장면을 본다면, 이건 남편이 연인으로서의 아내에게 하는 애정표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진은 아빠에게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가정에 부재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당연하게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아버지와 딸이 각각 아버지와 딸로서의 제자리를 찾으면서 끝난다. 그러한 자리 찾기에 대응하는 것이 '판타지에서 현실로'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핵심인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여진의 원조교제를 알게 된 ‘아빠’가 딸을 바로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미행하면서, 같이 잔 ‘아저씨들’한테만 분노를 표출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딸을 제지하지 않는가? 딸이 충격을 받을까봐서? 그런데, 여진의 원조교제는 죽은 친구를 위로한다는 명목의 ‘자발적인’ 행위이며, ‘애꿎은’ 아저씨들 또한 여진의 연락을 받고서 그녀의 바수밀다 판타지(=재영 판타지) 혹은 바수밀다행, 즉 ‘보살행’에 동원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제정신이 좀 아닌) 여진이 아버지에게 발각된다고 해서 ‘충격’을 받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 사정을 아빠가 몰랐다고 해도, 딸이 수첩에 적힌 아저씨들 모두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까지 뒤를 쫓아다니는 게 딸을 아끼는 아빠의 ‘상식적인’ 행동인가?(어디까지 가나 보자?!)

아마도 보다 적절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그에게서 딸이자 연인으로서의 여진에 대한 욕망이 금지된 욕망이자 판타지의 대상이었다면, 그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것은 그 금지된 욕망이 너무도 쉽게 구현된 현실이었다. 그가 당혹과 매혹을 동시에 느낄 법한 것은 판타지와 현실의 그러한 일치, 혹은 근접조우이다. 그는 여진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판타지를 대리적으로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러한 아저씨들(혹은 자기 자신)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에게 새겨진 ‘법’(상징적 질서)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게 아빠의 두 얼굴이다. 자상하면서도 아주 잔혹한.



김기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아빠’ 또한 다른 딸들에 대해서는 아저씨들이 여진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시선을 던졌을 거리고 얘기했는데(내 기억이 맞다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즉, 금지된 욕망, 금지된 향락에 대한 자기징벌인 셈. 그가 딸에 대한 이중적인 욕망의 주체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것은 이 욕망/향락의 주체를 제거함으로써이다. 화장실에서 그가 죽인 아저씨는 자신의 분신, 곧 자기 자신이었던 셈. 더불어 그를 대신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한 또 다른 아버지/아저씨를 상기해보자. 요컨대, 그가 ‘아버지’로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은, 즉 ‘아빠’에서 ‘아버지’로 이행하게 되는 것은 이 두 죽음을 대가로 지불함으로써이다. 모든 판타지의 끝은 죽음인 것(혹은 판타지에 의해서 유예되는 것이 죽음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가 2부이다.

3부 소나타는 ‘현실’의 장면이다. 부녀가 먼저 찾는 것은 아내/엄마의 무덤이다. 그들이 서로 대행해왔던 엄마/아내는 죽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는 아빠는 싫다는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려고 한다(이게 중요하다!). 이제껏 그는 딸에게 무얼 강요하거나 금지해본 적이 없을 듯한데(즉, 그는 ‘부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해서 여진이 역할모델로 찾은 것이 친구인 재영이다), 이번만큼은 고집대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강요에 뒤이어서야 강가에 세워둔 차에서 잠깐 잠이 든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매장하는 꿈을 꾼다(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 설정이다). 즉, 그녀에겐 더 이상 다정다감한 ‘아빠’가 아닌 (억압적인) ‘아버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더불어 그녀에겐 ‘죄의식’이란 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여진은 아빠의 연인(=판타지)이 아닌 딸(=현실)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아빠가 헤드폰을 끼워주던 ‘연인’으로서의 여진은 죽은 것이다.



한편으로 이 여진의 꿈은 2부에서 자신의 분신들을 죽게 하거나 죽임으로써 판타지로서 벗어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즉, 이 꿈의 주체는 아버지여도 무방하다. 그는 ‘연인’으로서의 딸을 죽임으로써 ‘딸’로서의 딸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 딸은 어떤 딸인가? 바수밀다나 사마리아 같은 신화적 판타지에 둘러싸인 여성이 아니라, ‘초급 운전자’로서 자기 앞가림도 아직 제대로 잘 못하는 10대 소녀이고, 적당히 어수룩하면서 폼잡으며 멋부리는 고딩이다. 한마디로 (약간 귀여운) 멍텅구리(nothing)이다.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법’이 개입돼 있다. 한 가지는 사회의 실정법으로서 살인자인 아버지를 잡아가는 법이고, 다른 한가지는 ‘운전하는 법’으로 가시화된 ‘아버지의-이름’이란 법이다(두 법은 같은 방향의 길을 간다). 이러한 법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딸은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을 잠식하고 있던 판타지(상상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이다.



나는 영화 <사마리아>를 얘기하면서, ‘바수밀다’나 ‘사마리아’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속임수라고 생각한다(감독 자신이 그런 걸 믿는다면, 설마 싶지만, 그건 자신의 속임수에 그 자신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건, 재영이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며 돈을 모은다는 말을 ‘진담’으로 믿는 수준의 속임수이며 핑계이다. ‘유럽’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건 유럽이라는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런 판타지를 차폐막 삼아서 가리고자 했던 건 아마도 죽음충동일 것이다. 아마도 재영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돼 있었을 것이다(그것이 이 소녀가 ‘더러운’ 아저씨들과의 관계에서 밝은 면만 보는 이유이리라). 그러니까 단속에 쫓겼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여진의 원조교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영의 죽음은 이 소녀에게 자신도 금지된 쾌락, 보살행에 나설 핑계가 되어 주었다. 사실, 그러한 비행(非行)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제지해 줄 대타자(the Other)로서의 ‘아버지’이다(수렁에서 건진 내 딸!). 그러니까 여진이 기대하는 대타자의 시선은 죽은 재영의 시선이 아니라 (엄마가 아닌)‘아버지’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아버지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되며, 이 영화는 그 시선의 욕망과 윤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한 부녀의 자기 자리 찾기에 대한 것이다...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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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5-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죽이네요. 최곱니다!

로쟈 2006-05-2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사람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죠.^^

외로운 발바닥 2006-05-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 방송을 통해 중간중간 보아서 거의 다 보긴 했는데, 그냥 원조교제에 관한 이상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었다니 놀랍네요. 역시 무엇이든 아는만큼 보고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

로쟈 2006-05-2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뜻'까지는 아니고, 그냥 '의미가 없지 않은' 정도입니다. 뭔가를 말하거나 쓰도록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인' 영화일 수도 있구요...

kleinsusun 2006-08-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신문에서 김기덕 기사를 보고, 김기덕에 대한 다른 기사들을 찾아 보다 로쟈님의 글을 보게 되었어요. <사마리아>를 보고 뭔가 위악적이다.....라고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를 알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p.s) 연합뉴스 기자에게 보냈다는 김기덕의 e-mail은 아무리 봐도.... ㅠㅠ

로쟈 2006-08-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은 그 자신이 본래 자학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그게 창작의 에너지이기도 하구요. 그의 영화들이 모두 쓰레기이면 쓰레기만도 못한 영화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