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중순에 '사마리아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다. 물론 러시아 TV에서 방영된 <사마리아>를 보고 느낀 소감을 주로 적은 것이었다. 당시엔 잡담들까지 잔뜩 늘어놓았었는데, 영화와 관련한 내용으로만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    

 

 

 

 

러시아에서 뤽 베송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영화의 ‘거장’으로 확실하게 대우 받고 있는 사람은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이다. <도그빌>의 제작노트가 올해 처음 나온 영화비평총서의 하나로 <독일의 가을>을 찍은 독일 감독 클루게의 책과 함께 지난 여름에 나오기도 했고, STS 채널에서는 지난주까지 ‘봉까르바이’에 이어서 이번주부터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을 방영한다. 거꾸로 봉까르바이(왕가위)는 현재 홍콩영화, 혹은 중국어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 기타노 다케시이고,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은 김기덕이다.

나는 김기덕의 최신작인 <빈집>은 아직 보지 못했고, 그 외에도 몇 편을 보지 않았지만(내가 본 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나쁜 남자> 등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보지 않은 건 <수취인 불명>, <해안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등이다, 는 건 그때 얘기이고, 나는 거명된 영화들을 모두 보았다) 일요일 밤에 본 <사마리아>는 일종의 ‘누빔점’으로서, 그의 영화들을 소급적으로 해석하도록 자극하는 영화였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마무리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국내외의 과대/과소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사람의 ‘영화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며, 따라서 나의 주된/한정된 관심은 그의 영화 ‘텍스트들’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판타지, 혹은 트라우마(외상)란 무엇일까에 쏠린다.

자신의 판타지를 영화적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시대의 또 다른 ‘영화작가’ 홍상수와 구별된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홍상수의 영화는 철저하게 판타지를 부정/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와는 대척관계에 놓여 있다. 그건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홍상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실의 디테일(혹은 그가 ‘표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김기덕만큼 디테일을 과소평가하는 감독도 드물다(그 점이 나로 하여금 그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영화들을 저예산으로, 속성으로 찍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많은 예산과 많은 시간이 필요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러니까 김기덕은 블록버스터나 ‘세밀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란 디테일과 상호배제적이다. 우리가 꿈(=판타지)을 꿀 때 사소한 디테일들에 주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다만, 몇 가지 상징만이 중요하게 사용될 따름이며, 그것들의 의미작용만이 관심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플롯과 몇 가지 상징, 그것이 김기덕의 판타지를 구성하는 재료의 전부이다. 11일회 촬영만으로 완성했다는 <사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원조교제’의 디테일이 다 생략돼 있다. ‘더럽다’는 대사는 자주 나오지만, 정작 더러운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인가? 그런 디테일은 감독의 판타지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언제나 그렇지만, 판타지를 구하기 위해 디테일을 희생한다. 대신에 몇 가지 자극적인 상징(이 상징의 가시적 등가물은 ‘피’이다)을 늘어놓음으로써 그러한 ‘희생’을 보상/은폐하고자 한다. 즉, 그의 영화에서 소위 과격한 장면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여자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카바하기 위해 화려한 액세서리들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희생된 디테일과 대체된 상징들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주로 전자의 편에 서 있지만(나는 디테일을 편애한다, 해서 영화에서의 판타지나 알레고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후자의 자리에서 <사마리아>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러시아어로 더빙된 걸 봤기 때문에, 디테일한 대사들은 놓쳤지만, 사실 그런 디테일 정도는 김기덕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대범한 사람이니까(그는 해병대 출신이 아닌가?!).



먼저, 줄거리. 여진과 재영이라는 두 여고생이 있다. 여진은 망을 보고 재영은 몸을 판다(걔네들 말로 ‘발랑 까진 것들’이다). 소위 원조교제인데, 명분은 유럽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란다. 그러다가 재영은 단속 나온 경찰들을 피하려고 여관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죽고(1부), 여진은 그런 재영을 ‘위로’하기 위해 유업(遺業)을 이어서 다시 몸을 판다. 아니, 이번엔 아저씨들을 ‘산다.’ 돈을 지불/환불해주는 건 여진이니까. 그런데, 그런 행각을 형사인 여진의 아버지가 뒤쫓게 되고, 그는 딸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에게 복수를 하는바 끝내는 살인까지 하게 된다(2부). 아버지는 여진을 데리고 죽은 아내/엄마의 산소에 갔다가 오는 길에 여진에게 운전을 가르친다. 그리고 아직 소나타를 서툴게 모는 여진을 홀로 남겨놓은 채 그는 동료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호송된다(3부). 이 1, 2, 3부의 타이틀은 각각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이다.



그럼, <사마리아>는 “딸의 원조교제를 목격한 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를 다룬 영화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표면적인 플롯만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영화는 너무 싱겁다.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답지도 않다(그런 복수라면, 오히려 박찬욱에게 더 어울리는 테마 아닌가? “딸을 납치당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 말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표면적인 줄거리를 좀더 세심하게/삐딱하게 읽는 것이다. 즉, (1)여진과 재영의 ‘원조교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2)‘딸(여진)과 아버지’는 어떤 관계인가? (3)‘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는 것들이 다시 해명되어야 할 물음들이다.

영화는 재영의 바수밀다 얘기로 시작된다. 인도의 창녀인데, 같이 잔 남자들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다나 어쨌다나. 그러니까 바수밀다는 기독교의 ‘성녀’인 셈이다. 창녀이면서 성녀(혹은 보살, 아님 부처? 불교에서는 정확하게 뭐라고 이르는지 모르겠다). 사실,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다 창녀이거나 성녀이며, 그건 그의 기본적인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판타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성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텅 빈)‘실재’를 가질 수 없는데, 그는 언제나 못 미치거나 넘어서기 때문이다.

라캉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비유로 든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는 있지만, 정확히 거북이에 이르지는 못한다. 즉,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과소평가하거나(창녀) 과대평가한다(성녀). 그러니까, 남성의 판타지 속에서 창녀와 성녀는 서로의 이면일 뿐이며, 대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바수밀다냐 사마리아냐”가 아니라, “바수밀다나 사마리아나”이다. <사마리아>의 1, 2부는 그래서 잉여적이면서 불가피한 반복이며, 판타지의 경제 안에 있다. 재영은 아저씨들한테 돈을 받고 섹스를 했지만, 여진은 돈을 (되갚아)주면서 섹스를 한다. 둘을 합산하면 등가교환일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등가교환으로서의 “성관계란 없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동시 오르가즘이란 없다.”) 언제나 한쪽이 더 주거나 덜 주는 관계이다.



해서 원조교제라는 한국사회의 이슈 혹은 치부는 <사마리아>의 소재일 뿐이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바수밀다/사마리아라는 보편적 (여성)신화, 혹은 판타지이다. 가장 단순한 거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의 ‘아빠’이다(당연한 일이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여성은 항상 ‘대상’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영이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고, 여진이 친구를 대신에서 원조교제에 나선다는 설정은 이 문제적인 아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기 위한, 무대화/장면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그건 근친상간에의 판타지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딸 여진은 딸이면서도 동시에 딸 이상의 존재였는바, 아빠의 연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아빠’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쓴 건데, 두 부녀가 사는 집안에 부재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이다. 이때 아버지는 ‘부권적 기능’의 대행자로서의 ‘아버지의-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들 부녀는 부재하는 엄마/아내의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한다. 여진에게 아빠는 아빠이면서 엄마이고, 아빠에게 여진은 딸이면서 아내이다. 먼저, 아빠이면서 엄마. 부녀가 나오는 첫 장면에서 아빠는 ‘앞치마’를 입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보고서 ‘어수룩한 김기덕이 또 한 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40대 중반의 강력반 형사인 아빠가 앞치마를 입고 밥을 차리고 또 그걸 벗지도 않고 밥을 먹는다는 건 비현실적인 설정 아닌가?), 영화를 다 보고 뒤집어서 생각하니까 ‘의도적인’ 설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두른 ‘앞치마’는 그가 집안에서 ‘엄마’를 대신하고 있다는 기호인 셈.

그리고 딸이면서 아내. 역시 같은 첫 장면에서 아침을 차린 아빠는 여진을 깨우기 위해서 헤드폰을 머리에 끼워주고 달콤한 음악을 들려준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장면을 본다면, 이건 남편이 연인으로서의 아내에게 하는 애정표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진은 아빠에게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가정에 부재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당연하게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아버지와 딸이 각각 아버지와 딸로서의 제자리를 찾으면서 끝난다. 그러한 자리 찾기에 대응하는 것이 '판타지에서 현실로'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핵심인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여진의 원조교제를 알게 된 ‘아빠’가 딸을 바로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미행하면서, 같이 잔 ‘아저씨들’한테만 분노를 표출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딸을 제지하지 않는가? 딸이 충격을 받을까봐서? 그런데, 여진의 원조교제는 죽은 친구를 위로한다는 명목의 ‘자발적인’ 행위이며, ‘애꿎은’ 아저씨들 또한 여진의 연락을 받고서 그녀의 바수밀다 판타지(=재영 판타지) 혹은 바수밀다행, 즉 ‘보살행’에 동원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제정신이 좀 아닌) 여진이 아버지에게 발각된다고 해서 ‘충격’을 받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 사정을 아빠가 몰랐다고 해도, 딸이 수첩에 적힌 아저씨들 모두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까지 뒤를 쫓아다니는 게 딸을 아끼는 아빠의 ‘상식적인’ 행동인가?(어디까지 가나 보자?!)

아마도 보다 적절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그에게서 딸이자 연인으로서의 여진에 대한 욕망이 금지된 욕망이자 판타지의 대상이었다면, 그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것은 그 금지된 욕망이 너무도 쉽게 구현된 현실이었다. 그가 당혹과 매혹을 동시에 느낄 법한 것은 판타지와 현실의 그러한 일치, 혹은 근접조우이다. 그는 여진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판타지를 대리적으로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러한 아저씨들(혹은 자기 자신)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에게 새겨진 ‘법’(상징적 질서)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게 아빠의 두 얼굴이다. 자상하면서도 아주 잔혹한.



김기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아빠’ 또한 다른 딸들에 대해서는 아저씨들이 여진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시선을 던졌을 거리고 얘기했는데(내 기억이 맞다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즉, 금지된 욕망, 금지된 향락에 대한 자기징벌인 셈. 그가 딸에 대한 이중적인 욕망의 주체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것은 이 욕망/향락의 주체를 제거함으로써이다. 화장실에서 그가 죽인 아저씨는 자신의 분신, 곧 자기 자신이었던 셈. 더불어 그를 대신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한 또 다른 아버지/아저씨를 상기해보자. 요컨대, 그가 ‘아버지’로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은, 즉 ‘아빠’에서 ‘아버지’로 이행하게 되는 것은 이 두 죽음을 대가로 지불함으로써이다. 모든 판타지의 끝은 죽음인 것(혹은 판타지에 의해서 유예되는 것이 죽음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가 2부이다.

3부 소나타는 ‘현실’의 장면이다. 부녀가 먼저 찾는 것은 아내/엄마의 무덤이다. 그들이 서로 대행해왔던 엄마/아내는 죽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는 아빠는 싫다는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려고 한다(이게 중요하다!). 이제껏 그는 딸에게 무얼 강요하거나 금지해본 적이 없을 듯한데(즉, 그는 ‘부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해서 여진이 역할모델로 찾은 것이 친구인 재영이다), 이번만큼은 고집대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강요에 뒤이어서야 강가에 세워둔 차에서 잠깐 잠이 든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매장하는 꿈을 꾼다(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 설정이다). 즉, 그녀에겐 더 이상 다정다감한 ‘아빠’가 아닌 (억압적인) ‘아버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더불어 그녀에겐 ‘죄의식’이란 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여진은 아빠의 연인(=판타지)이 아닌 딸(=현실)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아빠가 헤드폰을 끼워주던 ‘연인’으로서의 여진은 죽은 것이다.



한편으로 이 여진의 꿈은 2부에서 자신의 분신들을 죽게 하거나 죽임으로써 판타지로서 벗어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즉, 이 꿈의 주체는 아버지여도 무방하다. 그는 ‘연인’으로서의 딸을 죽임으로써 ‘딸’로서의 딸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 딸은 어떤 딸인가? 바수밀다나 사마리아 같은 신화적 판타지에 둘러싸인 여성이 아니라, ‘초급 운전자’로서 자기 앞가림도 아직 제대로 잘 못하는 10대 소녀이고, 적당히 어수룩하면서 폼잡으며 멋부리는 고딩이다. 한마디로 (약간 귀여운) 멍텅구리(nothing)이다.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법’이 개입돼 있다. 한 가지는 사회의 실정법으로서 살인자인 아버지를 잡아가는 법이고, 다른 한가지는 ‘운전하는 법’으로 가시화된 ‘아버지의-이름’이란 법이다(두 법은 같은 방향의 길을 간다). 이러한 법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딸은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을 잠식하고 있던 판타지(상상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이다.



나는 영화 <사마리아>를 얘기하면서, ‘바수밀다’나 ‘사마리아’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속임수라고 생각한다(감독 자신이 그런 걸 믿는다면, 설마 싶지만, 그건 자신의 속임수에 그 자신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건, 재영이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며 돈을 모은다는 말을 ‘진담’으로 믿는 수준의 속임수이며 핑계이다. ‘유럽’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건 유럽이라는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런 판타지를 차폐막 삼아서 가리고자 했던 건 아마도 죽음충동일 것이다. 아마도 재영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돼 있었을 것이다(그것이 이 소녀가 ‘더러운’ 아저씨들과의 관계에서 밝은 면만 보는 이유이리라). 그러니까 단속에 쫓겼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여진의 원조교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영의 죽음은 이 소녀에게 자신도 금지된 쾌락, 보살행에 나설 핑계가 되어 주었다. 사실, 그러한 비행(非行)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제지해 줄 대타자(the Other)로서의 ‘아버지’이다(수렁에서 건진 내 딸!). 그러니까 여진이 기대하는 대타자의 시선은 죽은 재영의 시선이 아니라 (엄마가 아닌)‘아버지’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아버지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되며, 이 영화는 그 시선의 욕망과 윤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한 부녀의 자기 자리 찾기에 대한 것이다...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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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5-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죽이네요. 최곱니다!

로쟈 2006-05-2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사람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죠.^^

외로운 발바닥 2006-05-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 방송을 통해 중간중간 보아서 거의 다 보긴 했는데, 그냥 원조교제에 관한 이상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었다니 놀랍네요. 역시 무엇이든 아는만큼 보고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

로쟈 2006-05-2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뜻'까지는 아니고, 그냥 '의미가 없지 않은' 정도입니다. 뭔가를 말하거나 쓰도록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인' 영화일 수도 있구요...

kleinsusun 2006-08-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신문에서 김기덕 기사를 보고, 김기덕에 대한 다른 기사들을 찾아 보다 로쟈님의 글을 보게 되었어요. <사마리아>를 보고 뭔가 위악적이다.....라고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를 알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p.s) 연합뉴스 기자에게 보냈다는 김기덕의 e-mail은 아무리 봐도.... ㅠㅠ

로쟈 2006-08-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은 그 자신이 본래 자학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그게 창작의 에너지이기도 하구요. 그의 영화들이 모두 쓰레기이면 쓰레기만도 못한 영화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