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대학원신문에서 흥미로운 글 하나를 옮겨놓는다(교수신문에 링크돼 있다).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의 가상대담: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란 제목이며 필자는 문학평론가 복도훈씨이다.

코기토(Cogito)……: 정신분석과 맑스주의

슬라보예 지젝: 안녕하십니까. 93년이었던가요, 제가 가라타니 고진 씨가 관여하던 ‘비평공간’에 초대되어 선생의 후배인 아사다 아키라 씨와 대담을 나눈 지가. 그 잡지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연재번역한 때로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났군요. 상이한 조건 속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하는 지식인들을 만나는 일은 제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에 대한 선생의 끈질긴 열정은 감동적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최근에 선생께서 제 책인 <트랜스크리틱: 칸트와 맑스>(2003; 영문판)에 대해 쓰신 서평 ‘시차視差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4)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의 역작인 <까다로운 주체>(2005; 일역판)에 대해 짧게나마 서평을 썼습니다. 거기서 해체론을 포함하는 탈근대주의 이론에 맞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옹호하는 선생의 제스처는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일찍이 저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일본에서 <탐구>1·2(1986; 89)와 같은 이론적 저작을 통해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옹호한 바 있지요. 그래서 선생의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 말마따나 상이한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데도 ‘섬뜩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말 그대로 시차(時差, 視差)죠(웃음). 그 전에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경력을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지젝: 좋습니다. 저는 49년에 지금은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연방 국가였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공산국가였기 때문에 저는 맑스주의와 친숙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맑스주의,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당과 체제의 공식이론이었고 저는 거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별도로 프랑스의 (탈)구조주의에 적극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함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를 대학 1학년 때 번역했는데, 68년의 일이었으니 아마 세계 최초의 번역이 될 겁니다(웃음). 이후에 저는 라캉정신분석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80년대 초반, 저와 친구인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고 라캉의 사위이자 수제자인 자크-알랭 밀레를 초청했습니다. 그때 밀레가 저와 돌라르에게 유학을 권해서 함께 파리 8대학에 갔습니다. 저는 88년에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증자: 헤겔이 지나간다>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영어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펴냈습니다. 동구사회주의가 무너질 즈음이고 자유주의 만세의 합창이 울려 퍼지던 분위기였죠. 그 무렵 유고슬라비아도 해체되었고 저는 슬로베니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가 다행히 떨어졌지요(웃음).

그로부터 약 20여 년 동안 저는 주로 영어권에서 활동하여 30권 가량의 책을 펴냈는데, 최근에 당신 책에 대한 서평을 토대로 <시차적 관점>을 냈죠. 저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좌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런 학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웃음). 그냥 저와 돌라르가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해 각각 회장, 부회장을 맡은 격이지요. 그렇지만 돌라르를 비롯한 제 동료들인 알렌카 주판치치, 레나타 살레츨, 미란 보조비치 등은 매우 독창적인 저작을 펴내고 있지요. 저는 현재 라캉정신분석과 헤겔철학,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비판을 결합하여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설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고진: 저는 41년생입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당시의 좌익운동이었던 전공투에 몸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좌익운동이 테러리즘으로 귀결되고 난 후 저는 문학비평을 하는 동시에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4)과 같은 저작을 썼습니다. 맑스주의를 죽은 개 취급할 그 당시에 맑스에 관한 책을 써서 욕 좀 먹었지요(웃음). 한편으로 저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과 같은 문학비평적 저작을 통해 근대문학이 제국주의적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공모하고 그것을 은폐한 흔적을 쫓으면서 일종의 해체론적 비평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푸코의 구성주의나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연관성이 있지만, 이른바 그것들의 속류판인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릅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일본근대 초창기의 대작가에서 저는 문학의 다른 가능성을 엿보았지요.

<트랜스크리틱>을 쓴 최근까지 제 관심사는 자본=국민=국가라는 보로메오 매듭을 해체하는 신연합운동(New Association Movement)의 구체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데에 있습니다. 실패로 끝났지만 지역통화(LETS)에 기반을 둔 NAM운동을 했던 것도 그런 연유였지요. 돌이켜보면, ‘맑스, 그 가능성의 중심’의 자본주의 비판,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의 국민국가비판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종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트랜스크리틱>까지 저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비판과 문학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느라 부심했지요. 최근에 <근대문학의 종언>(2005)을 통해 저는 문학을 떠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그 소임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혼자서 1인 2역을 담당하느라고 거의 분열될 지경이었지요. 라캉학파 정신분석가에게 정신분석치료를 받다가 그만두었을 정도니까요(웃음). 아시다시피 일본은 라캉학파 시장(市場)입니다.

……에르고(Ergo)……: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비판

지젝: 저 역시 밀레로부터 정신분석임상훈련을 받다가 그만두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둘이서 교활한 분석가 대 음험한 히스테리증자로 지적 곡예를 벌였다는 느낌이지요. 그나저나 그때부터 저는 라캉정신분석의 임상치료에 대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밀레와도 사이가 소원해 졌죠. 물론 라캉에 대한 그의 정교화작업은 여전히 찬탄을 불러일으키지만요. 저는 정신분석의 사회적·문화적 활용을 더 중요시 합니다. 저는 선생이 문학에 대해 비평작업을 수행한 것에 상응해서 대중문화에 대한 일종의 ‘증상적 독해’를 해왔지요. 그러나 저는 <삐딱하게 보기>(1991)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1992) 등을 통해 할리우드 영화와 고급이론을 접목시키고 거기서 사람들이 대중문화를 ‘즐기는’ 방식을 관찰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온갖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꿈, 말실수, 소망충족, 특히 죽음충동과 향유(jouissance)의 뒤틀린 형태를 발견했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저는 포스트이데올로기 시대의 인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둔 냉소적(풍자적) 형태로 이데올로기에 붙들려있다는 공식을 내놓았습니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리를 둔, 맑스로부터 알튀세에 이르는 비판적 독해로는 만족할 수 없었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서 바로 자신들이 ‘즐길만한’ 뭔가를 발견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릇된 것인 줄 알면서도 (거리를 두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그것에 참여하는) 이상한 역설이 생겨납니다. 예컨대 90년대 이후의 인종주의, 특히 제 조국이 속해있던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인종적 증오와 폭력의 향유는 사실 그에 대해 경악한 서구의 냉소주의와 구조적으로 상동관계입니다. 돌라르는 발칸반도는 서구유럽의 무의식이라고 했죠. 저는 라캉, 특히 후기라캉의 정신분석을 이데올로기비판의 강력한 형태로 재가공했습니다. 실재(The Real)와 향유, 증환(sinthome) 등과 같은 개념이 제게 중요하죠.

고진: 저는 선생과는 조금 다르게 맑스, 특히 <자본론>을 제 비판적 사유의 준거점으로 삼고 출발했습니다. 제가 하부구조만 선생이 상부구조만 문제시했다는 건 오해가 되겠죠. 저와 선생 모두 상품형식에 대한 맑스의 비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치경제라는 매트릭스를 문제 삼고 있죠. 저도 '일본정신분석’이라는 글에서 정신증적 폐제(foreclosure)라는 라캉의 개념을 통해 안으로는 포스트모던적이지만 밖으로는 자폐적인 일본의 담론공간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뭐, 일본의 어떤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남경대학살(1938)은 구성된 담론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니까요(웃음). 지나가면서 언급했지만 <트랜스크리틱>에서 자본=국민(nation)=국가(state)라는 삼항조는 실재=상상계=상징계라는 라캉적 보로메오 매듭과 연결됩니다. 이건 단순한 유비는 아닙니다. 저는 오랫동안 <자본론>을 읽으면서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숨 막힐 듯한 영구적 순환이 자본주의경제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기묘한 틈새, 예컨대 공황(위기)을 통해 자본주의가 더욱 가속화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젝: 상처는 상처를 낸 창만이 치유한다!

고진: 그렇죠. 예컨대 물건은 팔리지 않으면, 다시 말해 유통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상품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특유의 ‘목숨을 건 비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황 때에 생산된 물건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 것이지요. 그건 상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통과정, 즉 화폐(M)-상품(C)-화폐(M) 사이에 틈새,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생산과정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파업, 스트라이크와 같은 폭력적 형태로 자본주의에 저항해왔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유통과정에 주목하면 문제가 풀리죠. 생산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맑스가 2천년 동안 지속해온 수수께끼라고 말했던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물건을 생산해서 상품이 될 때 넘겨지는 차액이지만, 이것은 또한 노동자=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할 때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통화나 NAM을 통해 잉여가치가 0(zero)인 교환형태를 구상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노동력 상품을 팔지 마라’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론과 함께 ‘자본가의 상품을 사지 마라’는 간디의 노력은 소중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듯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비판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국민=국가를 재조명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국민에 대해 소비자연합을, 국가에 대해 소비자 연합단체나 기구를 상상해보면 됩니다. 그것은 국민=국가 ‘사이에 존재하는’(in between) 새로운 코뮌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숨(Sum): 레닌주의와 신연합운동

지젝: 칸트 식으로 말하면 국민=국가=자본은 초월적 가상과 같은 것이라서 계몽주의적 비판만으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다문화주의적 탈식민주의와 국민국가비판에 대해 제가 마뜩해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선생도 이에 대해 언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칸트철학에서 초월적 가상은 보통 신·세계·영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이성 자체에서 연유하는 형이상학적 가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비판의 탄환으로 쏘아 죽였다싶더라도 흡혈귀처럼 살아남죠. 억압된 것의 회귀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나 저나 오늘날에 벌어지는 ‘칸트로의 회귀’에 일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있을 듯 합니다. 저는 독일관념론에서 헤겔을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생각하는데, 선생은 좀 다른 듯 합니다. 선생의 헤겔 비판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헤겔 비판, 즉 절대지에 가보지도 않고 의식과 절대지의 순환을 처음부터 닫힌 체계로 파악하는 듯…

고진: 이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만 남은 건가요(웃음).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참조하는 철학자의 계열이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데카르트-칸트-셸링-헤겔과 함께 기독교철학자인 말브랑슈-파스칼-키르케고르를 중요시하지요. 현대철학자 중에서는 플라톤주의자인 알랭 바디우가 선생의 이론적 동지이고요. 저는 데카르트-스피노자-칸트-니체와 함께 데리다-푸코-들뢰즈의 사유노선에 아무래도 가까운 듯 합니다. 참,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2004)을 읽어보니 선생은 모두가 사랑하는 스피노자를 홀로 싫어하고 계시더군요. 상징계를 고려하지 않은 상상계의 철학자라고(웃음).

지젝: 들뢰즈의 표현을 비틀어 저는 그것을 스피노자 뒤에서 하는 헤겔의 비역질이라고 했죠(웃음). 사실 헤겔의 절대지는 의식의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그것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구조적 불가능성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실재라고 부릅니다. 사드 소설에는 자신의 성기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는 기괴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점에서 의식을 절대지 뒤에 삽입시켜 닫힌 원환 고리를 완성하는 도착증적 꿈을 꾸는 자들은 바로 헤겔에 대한 비판자들인 거죠.

고진: 글쎄요. 정신분석적인 사후(事後)의 시점에서 헤겔을 전유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공평을 기하자면, 헤겔의 ‘법철학’과 같은 저서는 중요합니다. 헤겔은 다양한 욕망의 형태를 긍정하는 시민사회(자유)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불평등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평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둘의 불일치는 국민(형제애)이라는 상상력으로 보완되지요. 이것은 나중에 맑스가 각각 <루이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1852)과 <자본론>(1867)에서 행했던 근대국민국가비판과 정치경제학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공교롭게도 맑스는 헤겔에 대한 긍정적 언급으로 두 책을 시작하고 있죠. 헤겔에겐 확실히 이러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타인을 수단뿐만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라고 말하는 칸트에서 코뮤니즘의 시작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계몽에 내재하는 ‘적대’(antagonism)에 대해 누구보다도 민감했습니다. 칸트는 계몽이 먼 미래에는 완성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스탈린주의자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죠.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을 상상하고 투쟁해도 좋습니다. 환경문제나 석유전쟁, 기아, 치명적 전염병 등이 일어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체제에서 칸트의 정언명법은 훌륭한 21세기 윤리입니다.

지젝: 그렇군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지구적 자본주의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데요.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짧은 대담을 끝낼까 합니다. 네그리·하트의 <다중multitude>(2005)에 대해 말해보죠.

고진: 점점 더 가혹해지고 있는 후기자본주의체제에서 다중은 분명 긍정할 만한 요소가 있는 대항운동의 우세한 작인이지만, 뭐랄까, 지나치게 낭만적(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체제가 허용하는 한에서의 일시적 축제라고나 할까요. 다중은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21세기 판본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요점은 ‘만국의 노동자여, 일하지 말자’입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이것 역시 생산력의 측면에서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을 구상하는 전통적 발상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국가개념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면 알 카에다도 다중이 아닙니까. 다중은 애매모호합니다.

지젝: 다중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동성애자이고 전업주부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이고 팔레스타인인이다…’ 이것은 은유, 시(詩)라면 문제가 없지만, 분명 정치는 아닙니다. 연대는 필요합니다만, 저는 다른 관점에서 다중이 성, 인종 등의 범주를 들여오면서 계급문제를 흘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들도 계급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 인종과 같은 종(鍾)으로 격하됩니다. 계급은 종이되 종이면서 유(類)입니다. 유일무이한 적대죠. 역시 문제는 정치경제학입니다(웃음)! 다중이론가들은 스피노자의 정동(affect)개념을 근간으로 삼지만, 이 정동이야말로 파시즘의 구성요소이기도 하죠. 그들은 ‘권력 없는 권력’을 원한다 말하지만, 이건 손안대고 코풀자는 거 아닙니까. 만일 그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오히려 당파적 레닌주의나 바디우식의 마오이즘이 역으로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진: 다중에 대한 선생의 비판에는 동의합니다만, 레닌주의, 마오이즘의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은?

지젝: 저는 세계를 비난하되 자신은 거기에 빠져있는 좌파적 ‘아름다운 영혼’의 자기기만을 선택하느니보다 보수주의자처럼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단두대를 선택하는 행위(act)가 낫다 생각하는 편입니다.

고진: 쉽지 않은 문제군요. 선생 식대로라면 자코뱅적 테러와 알 카에다의 테러를 어떻게 식별하죠? 저는 오히려 자본의 적대를 인식하는 새로운 소비자운동이야말로 대안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지만 저나 선생이나 자본에 내재한 적대로부터 코뮨적 유토피아를 구상한다는 점에서는 동지입니다.(웃음)

지젝: 네(웃음). 아마도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유토피아적인 순간에서 영원을 창출하는 행위일 겁니다. 자, 이것으로 짧은 대담을 아쉽게 정리해야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복도훈 문학평론가)

06.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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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1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뻬빠는 어디에 있나요? 한데, 그럴 수도 있죠. 뭐...

로쟈 2006-09-14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난해한' 발음에 오히려 일가견이 있으신 듯.^^

pax 2006-09-1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도 될까용^^??? 근데 도대체 어떻게 요로코롬 그럴듯하게 가상대담을 잘쓸까욤?

로쟈 2006-09-1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용은 퍼온 건데요.^^

Ritournelle 2006-10-21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퍼가겠습니다.^^*
 

London Review of Books(LRB) 최근호에 실린, 지젝의 'The Parallax View '(MIT Press, 2006)에 대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평 '첫인상들'을 옮겨온다. 몇달 전에 구입해둔 책이긴 한데, 책상맡에 놓아두고 아직 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제임슨의 서평이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다.

LRB | Vol. 28 No. 17 dated 7 September 2006

First Impressions

Fredric Jameson

The Parallax View by Slavoj Zizek · MIT, 434 pp, £16.95

As every schoolchild knows by now, a new book by Zizek is supposed to include, in no special order, discussions of Hegel, Marx and Kant; various pre- and post-socialist anecdotes and reflections; notes on Kafka as well as on mass-cultural writers like Stephen King or Patricia Highsmith; references to opera (Wagner, Mozart); jokes from the Marx Brothers; outbursts of obscenity, scatological as well as sexual; interventions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from Spinoza and Kierkegaard to Kripke and Dennett; analyses of Hitchcock films and other Hollywood products; references to current events; disquisitions on obscure points of Lacanian doctrine; polemics with various contemporary theorists (Derrida, Deleuze); comparative theology; and, most recently, reports on cognitive philosophy and neuroscientific ‘advances’. These are lined up in what Eisenstein liked to call ‘a montage of attractions’, a kind of theoretical variety show, in which a series of ‘numbers’ succeed each other and hold the audience in rapt fascination. It is a wonderful show; the only drawback is that at the end the reader is perplexed as to the ideas that have been presented, or at least as to the major ones to be retained. One would think that reading all Zizek’s books in succession would only compound this problem: on the contrary, it simplifies it somewhat, as the larger concepts begin to emerge from the mist. Still, one would not have it any other way, which is why the current volume – which, with its companion The Ticklish Subject (1999), purports to outline the ‘system’ as a whole (if it is one), or at least to make a single monumental statement – inspires some apprehension.

It will be dialectical to say that this apprehension is and is not confirmed. The first chapter, which explains the title and seeks to ground Zizek’s philosophy in some definitive method, is tough going indeed; I’ll come back to it. But later chapters – on Heidegger and politics, on cognitive philosophy and its impasses, on anti-semitism, on politics today – are luminous and eloquent, and will surely stand as major statements, with enough to provoke and irritate people from one end of the ideological spectrum to another (I am myself attacked in passing as some kind of gullible practitioner of commodification theory). Nor are they lacking in jokes, as tasteless as you might wish, and in passing remarks on current films (Zizek seems to have got Hitchcock out of his system, if not out of his unconscious – one never does that).

As for what has persisted through this now considerable oeuvre, I will start with the dialectic, of which Zizek is one of the great contemporary practitioners. The old stereotype is that Hegel works according to a cut-and-dried progression from thesis, through antithesis, to synthesis. This, Zizek explains, is completely erroneous: there are no real syntheses in Hegel and the dialectical operation is to be seen in an utterly different way; a variety of examples are adduced. Still, that stupid stereotype was not altogether wrong. There is a tripartite movement in the Hegelian dialectic, and in fact, Zizek goes on, he has just illustrated it: stupid stereotype, or the ‘appearance’; ingenious correction, the underlying reality or ‘essence’; finally, after all, the return to the reality of the appearance, so that it was the appearance that was ‘true’ after all.

What can this possibly have to do with popular culture? Let’s take a Hollywood product, say, Fritz Lang’s Woman in the Window (1944). (Maybe now Fritz Lang belongs to high culture rather than mass culture, but anyway . . .) Edward G. Robinson is a mild-mannered professor who, leaving his peaceful club one night, gets caught up in a web of love and murder. We think we are watching a thriller. At length, he takes refuge in his club again, falls asleep from exhaustion, and wakes up: it was all a dream. The movie has done the interpretation for us, by way of Lang’s capitulation to the cheap Hollywood insistence on happy endings. But in reality – which is to say in the true appearance – Edward G. Robinson ‘is not a quiet, kind, decent, bourgeois professor dreaming that he is a murderer, but a murderer dreaming, in his everyday life, that he is a quiet, kind, decent, bourgeois professor’. Hollywood’s censorship is therefore not some puritanical, uptight middle-class mechanism for repressing the obscene, nasty, antisocial, violent underside of life: it is, rather, the technique for revealing it.

Zizek’s interpretative work, from page to page, seems to revel in these paradoxes: but that is itself only some ‘stupid first impression’ (one of his favourite phrases). In reality, the paradox-effect is designed to undo that second moment of ingenuity, which is that of interpretation (it looks like this to you, but in reality what is going on is this . . .): the paradox is of the second order, so that what looks like a paradox is in reality simply a return to the first impression itself.

Or perhaps we might rather say: this is not a paradox, this is perversity. And indeed, the dialectic is just that inveterate, infuriating perversity whereby a commonsense empiricist view of reality is repudiated and undermined. But it is undermined together with its own accompanying interpretations of that reality, which look so much more astute and ingenious than the commonsense empiricist reality itself, until we understand that the interpretations are themselves also part of precisely that ‘first impression’. This is why the dialectic belongs to theory rather than philosophy: the latter is always haunted by the dream of some foolproof self-sufficient system, a set of interlocking concepts which are their own cause. This dream is of course the after-image of philosophy as an institution in the world, as a profession complicit with everything else in the status quo, in the fallen ontic realm of ‘what is’. Theory, on the other hand, has no vested interests inasmuch as it never lays claim to an absolute system, a non-ideological formulation of itself and its ‘truths’; indeed, always itself complicit in the being of current language, it has only the vocation and never-finished task of undermining philosophy as such, by unravelling affirmative statements and propositions of all kinds. We may put this another way by saying that the two great bodies of post-philosophical thought, marked by the names of Marx and Freud, are better characterised as unities of theory and practice: that is to say that their practical component always interrupts the ‘unity of theory’ and prevents it from coming together in some satisfying philosophical system. Alain Badiou has recently coined the expression ‘anti-philosophy’ for these new and constitutively scandalous modes of intervening conceptually in the world; it is a term that Zizek has been very willing to revindicate for himself.

Still, what can be the theoretical, if not indeed the philosophical content of Zizek’s little interpretative tricks? Let’s first take on the supremely unclassifiable figure who somehow, in ways that remain to be defined, presides over all Zizek’s work. One of Jacques Lacan’s late seminars has the title Les Non-Dupes errent. The joke lies in the homophony of this enigmatic proposition (‘the undeceived are mistaken’) with the oldest formula in the Lacanian book, ‘le nom du Père’, the name of the Father or, in other words, the Oedipus complex. However, Lacan’s later variant has nothing to do with the Father, but rather with the structure of deception. As everyone knows, the truth is itself the best disguise, as when the spy, asked what he does in life, answers, ‘Why, I’m a spy,’ only to be greeted with laughter. This peculiarity of truth, to express itself most fully in deception or falsehood, plays a crucial role in analysis, as one might expect. And as one might also expect, it is in that great non- or anti-philosopher Hegel that we find the most elaborate deployment of the dialectic of the necessity of error and of what he called appearance and essence, as well as the most thoroughgoing affirmation of the objectivity of appearance (one of the deeper subjects of The Parallax View). The other great modern dialectician, Theodor Adorno (whose generic tone compares with Zizek’s, perhaps, as tragedy to comedy), was fond of observing that nowhere was Hegel closer to his heroic contemporary Beethoven than in the great thunderchord of the Logic, the assertion that ‘Essence must appear!’

Yet this insistence on appearance now seems to bring us around unexpectedly to the whole vexed question of postmodernism and postmodernity, which is surely nothing if it is not a wholesale repudiation of essences in the name of surface, of truth in the name of fiction, of depth (past, present or future) in the name of the Nietzschean eternally recurring here-and-now. Zizek seems to identify postmodernism with ‘postmodern philosophy’ and relativism (an identification he shares with other enemies of these developments, some of them antediluvian, some resistant to the reification of the label), while on the other hand he endorses the proposition of an epochal change, provided we don’t call it that and provided we insist that it is still, on whatever scale, capitalism – something with which I imagine everyone will nowadays be prepared to agree. Indeed, some of his basic propositions are unthinkable except within the framework of the epochal, and of some new moment of capitalism itself; Lacan is occasionally enlisted in the theorisation of these changes, which have taken place since Freud made his major discoveries.

Take the new definition of the superego. No longer the instance of repression and judgment, of taboo and guilt, the superego has today become something obscene, whose perpetual injunction is: ‘Enjoy!’ Of course, the inner-directed Victorian must equally have been directed to enjoy his own specific historical repressions and sublimations; but that jouissance was probably not the same kind of enjoyment as that taken by the subject of consumer society and of obligatory permissiveness (Marcuse called it ‘repressive desublimation’), the subject of a desperate obligation to ‘liberate’ one’s desires and to ‘fulfil oneself’ by satisfying them. Yet psychoanalysis always involves a tricky and unstable balance between the theorisation of an eternal human psyche and the historical singularity of culture and mores: the latter tilts you back into periodisation, while the ‘eternal’ model is secured by the simple reminder that desire is never satisfied, whether you are a Victorian in thrall to duty or a postmodern intent on pleasure.

This is the point at which we reach the most persistent of all Zizek’s fundamental themes: namely, the death wish, the Thanatos, or what he prefers to call the ‘death drive’. Modern theory is indeed haunted by Freud’s death wish, that better mousetrap which any self-respecting intellectual owes it to himself or herself to invent a theory of (Freud’s own version having satisfied nobody). But we also owe it to ourselves to retain everything that is paradoxical (or perverse) in Zizek’s (or in Lacan’s) version of the matter; for here the Thanatos has nothing to do with death at all. Its horror lies in its embodiment as life itself, sheer life, indeed, as immortality, and as a curse from which only death mercifully relieves us (all the operatic overtones of The Flying Dutchman are relevant here, all the mythic connotations of the Wandering Jew, or indeed the vampire, the undead, those condemned to live for ever). The death drive is what lives inside us by virtue of our existence as living organisms, a fate that has little enough to do with our biographical destinies or even our existential experience: the Thanatos lives through us (‘in us what is more than us’); it is our species-being; and this is why it is preferable (following the later Lacan) to call it a drive rather than a desire, and to distinguish the impossible jouissance it dangles before us from the humdrum desires and velleities we constantly invent and then either satisfy or substitute.

As for jouissance, it is perhaps the central or at least the most powerful category in Zizek’s explanatory resources, a phenomenon capable of projecting a new theory of political and collective dynamics as much as a new way of looking at individual subjectivity. But to grasp the implications it is best to see jouissance as a relational concept rather than some isolated ‘ultimately determining instance’ or named force. In fact, it is the concept of the envy of jouissance that accounts for collective violence, racism, nationalism and the like, as much as for the singularities of individual investments, choices and obsessions: it offers a new way of building in the whole dimension of the Other (by now a well-worn concept which, when not merely added mechanically onto some individual psychology, evaporates into Levinassian sentimentalism). The power of this conception of envy may also be judged from the crisis into which it puts merely consensual and liberal ideals like those of Rawls or Habermas, which seem to include none of the negativity we experience in everyday life and politics. Zizek, indeed, includes powerful critiques of other current forms of bien-pensant political idealism such as multiculturalism and the rhetoric of human rights – admirable liberal ideals calculated to sap the energies of any serious movement intent on radical reconstruction.

All these ideals presuppose the possibility of some ultimate collective harmony and reconciliation as the operative goal or end of political action. It would be wrong to identify these ultimate aims with utopian thinking, which on the contrary presupposes a violent rupture with the current social system. Rather, they are associated, for Zizek, with that quite different absence of antagonism denounced in his very first boo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1989), a target also identified by Lacan and which has always been central in Zizek’s tireless explanations and propagation of Lacanian doctrine. This is the conviction that human subjectivity is permanently split and bears a gap within itself, a wound, an inner distance that can never be overcome: something Lacan demonstrated over and over again in an extraordinarily complex (and dialectical) articulation of the original Freudian models. But taken at this level of generality it is a view that might easily lead to social pessimism and conservatism, to a view of original sin and the incorrigibility of some permanent human nature.

It is to forestall and exclude just such a disastrous misunderstanding of the social and political consequences of the Lacanian ‘gap’ that is the task of The Parallax View. The book does so, however, not by any immediate extrapolation of the gap or constitutive distance from individual to collective; but rather by juxtaposing the theoretical consequences of split subjectivity on a variety of disciplinary levels (whence the difficulty of the opening chapter).

A parallax, Webster’s says, is ‘the apparent displacement of an observed object due to a change in the position of the observer’; but it is best to put the emphasis not on the change or shift, so much as on the multiplicity of observational sites, for in my opinion it is the absolute incommensurability of the resultant descriptions or theories of the object that Zizek is after, rather than some mere symptomal displacement. The idea thus brings us back to that old bugbear of postmodern relativism, to which it is certainly related. (Popular locution mutes this scandal by way of narrative: X tells the story of quantum theory, or modern dictatorship, this way; Y tells a different story. These convenient and widely accepted turns of phrase efface all the serious philosophical debates about causality, historical agency, the Event, philosophies of history, and even the status of narrative itself, which is probably why Zizek, assimilating the problems themselves to ‘postmodern philosophy’, has often been dismissive of narrative as such.)

The more fundamental difference at issue can be measured by comparing the parallax idea with the old Heisenberg principle, which asserted that the object can never be known, owing to the interference of our own observational system, the insertion of our own point of view and related equipment between ourselves and the reality in question. Heisenberg is then truly ‘postmodern’ in the assertion of an absolute indeterminacy of the real or the object, which withdraws into the status of a Kantian noumenon. In parallax thinking, however, the object can certainly be determined, but only indirectly, by way of a triangulation based on the incommensurability of the observations.

The object thus is unrepresentable: it constitutes precisely that gap or inner distance which Lacan theorised for the psyche, and which renders personal identity for ever problematic (‘man’s radical and fundamental dis-adaptation, mal-adaptation, to his environs’). The great binary oppositions – subject v. object, materialism v. idealism, economics v. politics – are all ways of naming this fundamental parallax gap: their tensions and incommensurabilities are indispensable to productive thinking (itself just such a gap), provided we do not lapse into some complacent agnosticism or Aristotelian moderation in which ‘the truth lies somewhere in between’; provided, in other words, we perpetuate the tension and the incommensurability rather than palliating or concealing it.

The reader will judge from the case-studies in this volume whether parallax theory has been fruitful. In particular, the chapter on the dilemmas of cognitive science – the material brain and the data of consciousness – is a superb achievement which transcends Spinozan parallelism towards the ultimate Hegelian paradox: ‘Spirit is a bone.’ As far as politics is concerned, it seems to me that Zizek’s lesson is as indispensable as it is energising. He believes (as I do) that Marxism is an economic rather than a political doctrine, which must tirelessly insist on the primacy of the economic system and on capitalism itself as the ultimate horizon of the political situation (as well as of all the other ones – social, cultural, psychic and so forth). Yet it was always a fundamental mistake to think that Marxism was a ‘philosophy’ which aimed at substituting the ‘ultimately determining instance’ of the economic for that of the political. Karl Korsch taught us eighty years ago that for Marxism the economic and the political are two distinct and incommensurable codes which say the same thing in radically different languages.

So how to think about the concrete combinations they present in real life and real history? At this point, we glimpse what is clearly Zizek’s basic Lacanian model for parallax: it is the Master’s scandalous and paradoxical idea that between the sexes ‘il n’y a pas de rapport sexuel’ (Seminar XX). ‘If, for Lacan, there is no sexual relationship,’ Zizek writes, ‘then, for Marxism proper, there is no relationship between economy and politics, no “meta-language” enabling us to grasp the two levels from the same neutral standpoint.’ The practical consequences are startling:

To put it in terms of the good old Marxist couple infrastructure/superstructure: we should take into account the irreducible duality of, on the one hand, the ‘objective’ material socioeconomic processes taking place in reality as well as, on the other, the politico-ideological process proper. What if the domain of politics is inherently ‘sterile’, a theatre of shadows, but nonetheless crucial in transforming reality? So, although economy is the real site and politics is a theatre of shadows, the main fight is to be fought in politics and ideology.

This is a far better starting point for the left than the current interminable debates about identity v. social class (it also seems to me a more appropriate climax than the enigmatic reflections on ‘Bartleby’ that actually close the book).

But it is appropriate, in the light of the earlier discussion, to ask just how dialectical this now turns out to be. I think an argument would run something like this: that third moment of the dialectic which returned to appearance as such is sometimes described (in Hegelian jargon) as returning to ‘appearance qua appearance’, to appearance with the understanding both that it is appearance and that nonetheless as appearance it has its own objectivity, its own reality as such. This is precisely what happens, I believe, with the two alternatives of the parallax, let us say the subjective and the objective one. To discover that neither the code of the subject nor the code of the object offers in itself an adequate representation of the unrepresentable object it designates means to rediscover each of these codes as sheer representation, to come to the conviction that each is both necessary and incomplete, that each is so to speak a necessary error, an indispensable appearance. I would only want to wonder whether there are not more complex forms of the parallax situation which posit more than two alternatives (on the order of subject and object), but which rather confront us with multiple, yet equally indispensable codes.

I cannot conclude without explaining my hesitant apprehensions about Zizek’s project. Clearly, the parallax position is an anti-philosophical one, for it not only eludes philosophical systemisation, but takes as its central thesis the latter’s impossibility. What we have here is theory, rather than philosophy: and its elaboration is itself parallaxical. It knows no master code (not even Lacan’s) and no definitive formulation; but must be rearticulated in the local terms of all the figurations into which it can be extrapolated, from ethics to neurosurgery, from religious fundamentalism to The Matrix, from Abu Ghraib to German Idealism.

Yet theory was always itself ‘grounded’ on a fundamental (and insoluble) dilemma: namely, that the provisional terms in which it does its work inevitably over time get ‘thematised’ (to use Paul de Man’s expression); they get reified (and even commodified, if I may say so), and eventually turn into systems in their own right. The self-consuming movement of the theoretical process gets slowed down and arrested, its provisional words turn into names and thence into concepts, the anti-philosophy becomes a philosophy in its own right. My occasional fear is, then, that by theorising and conceptualising the impossibilities designated by the parallax view, Zizek may turn out to have produced a new concept and a new theory after all, simply by naming what it is probably better not to call the unnameable.

06.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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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2006-09-13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메일로 편지 한 통 보냈습니다. 제대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

로쟈 2006-09-1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인해봤지만 없습니다. 그냥 서재주인에게만 보이기로 내용을 적어주시길...

2006-09-13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9-13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답장 보내드렸습니다...

로쟈 2006-09-1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다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해보시길...
 

이번 학기는 월요일이 죽음이다. 두 군데 대학에서 다섯 시간의 강의가 있고, 덕분에 네 시간 반을 버스와 전철을 타며 보낸다. 아마도 외판원들의 일상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늦은 저녁시간에 집에 돌아오면 또 골골대는 식구들 탓에 마음 한 구석이 무겁고,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마저 무거워진다. 커피 한잔 마시고, <맥베스>에 관한 글을 마저 정리할까 하다가 잠시 20대에 쓴 시들을 읽어본다. 늦게 저녁을 먹었기에 허기진 상태는 아닌건만 '만두를 생각하며'란 시가 눈에 들어온다(하긴 '닭곰탕을 먹으며'도 옆에 있긴 하다). 냉동실에 유통기한이 지난 물만두도 있긴 하지만, 내가 떠올리는 만두는 설연휴에 온가족이 달려들어 빚어먹는 김치만두국이다(그러고 보니 좀 뜬금없군).

 

다진 고기에 두부와 김치를 잘게 썰어넣고 당면도 넣고

그걸 자루에 넣어 잘 쥐어짜면 만두 속이다, 만두의 속마음

물기 빠진 속마음은 그렇게 잘 다져진 칼로리들의 집적이고

맛의 배합이며 뻗친 정성의 맛깔스런 빛깔이다

만두의 속마음


그걸 끊는 물에 넣어 만두국을 만들고

그걸 튀겨 튀김만두를 만들고

그걸 삶아 물만두를 만든다


피가 너무 얇은 만두는 때로 터지기도 한다

이미 속마음의 핏줄이 보이던 만두

저 혼자 온몸이 부서져라 통곡하기도 한다


터진 만두도 맛은 괜찮다

 

 

옮겨놓고 보니까 좀 싱겁다는 생각도 드는군(간장도 갖다 놓아야 할까?). '만두'하니까 러시아식 '고기만두'인 피로그(복수형은 '피로기')가 생각난다. 하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어떤 모양의 어떤 맛이라고 꼬집이 말하기 어렵지만. 게다가 '고기만두'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은 '파이'에 더 가깝다. 그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헐리우드 영화 <아메리칸 파이>가 러시아판으로는 <아메리칸 피로그>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래는 '치즈를 넣은 피로그'인데 이쯤되면 그냥 피자 아닌가? 그러니까 피로그는 만두이자 파이이고 피자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주 비싸게 먹은 아르메니아식 만두가 생각나는군. 그건 그래도 우리식 '고기만두'에 가장 가까웠다. 터무니없이 비쌌다는 걸 제외하면...

겉모양으로는 다 제각각이지만 속터지는 마음들만큼은 다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06.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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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터지는 마음들이야 다 비슷비슷해서일지도 모르지요...

마노아 2006-09-12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은 걸요. 근데 이 밤중에 배고파졌어요ㅡ.ㅜ

로쟈 2006-09-12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지요.^^

이네파벨 2006-09-1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장을 갖다놓아야 할까" 멋진 농담입니다. ^0^
시로는 배를 채울 수 없을뿐더러 더욱 허기지게 만들지요...

만두먹고싶어요!!!
(저도 그 김치 넣고 만든..집에서 손으로 빚어먹는 만두...너무 좋아합니다. 저희 할머니가 이북분이셔서..어릴때 명절이면 실컷 먹곤 했지요...첫애 가져 입덧할때도 다른 음식은 다 먹기 싫은데 이 만두가 먹고싶어서 친정엄마가 잔뜩 만들어서 얼려서 공수해주셨던 기억이....지금은 친정엄마도 기력이 약하셔서 만두만들 엄두를 못내시고 저는 아예 시도조차 해본 일이 없고..남편도 김치만두를 좋아하지 않아서...집에서 만든 수제만두는 먹어볼 일이 없어요....가끔 아들내미 학원 끝나고 데리고 오면서 그 근처 만두집에서 황해도식 만두를 사먹는데...그런대로..꿩대신 닭이예요~)

sommer 2006-09-1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만두 속은 터질 운명이었군요...^^ 들키지 않게 꼭꼭 숨겨 놓아도...

자꾸때리다 2006-09-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만두와 물만두 뭐가 더 맛있을까연?

로쟈 2006-09-13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군만두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만...

노부후사 2006-09-1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이 어떤지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배가 고파서 그런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로쟈 2006-09-1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기 맛이 궁금하신 건가요? 만두도 마찬가지지만, 밀가루피 같은 거에 이것저것 넣어서 싸먹는 걸 총칭하는 게 아닌가 싶고, 맛은 당연히 내용물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제가 먹어본 건 몇 종류 안되지만). 허기를 때울 정도는 됩니다...
 

마땅한 핑계가 없을 때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주일 예배를 다녀온다. 대개는 설교 시간에 졸다가 오기 십상이지만(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설교시간이 아니라 기도시간이다) 그래도 '다윗의 덫'이란 제목의 오늘 설교말씀은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어서 절반은 졸지 않을 수 있었다(이럴 때는 들고 간 한영성경과 러시아어성경을 이리저리 들춰보기도 한다). '다윗의 덫'이란 설교말씀은 사뮤엘하 11장 1-5절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 유명한 '다윗과 바세바'의 일화를 다룬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남의 아내와 동침하고서는 그 남편을 죽게 만든 후에 그 여자를 아예 아내를 맞아들인 다윗의 '색욕'과 '주책'에 관한 일화인데, 다윗에 관한 허다한 일화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재미있는' 일화가 아닌가 한다. 이게 내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건 헐리우드에서 이미 <다윗과 바세바>(1951)란 영화를 만든 바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레고리 펙과 수잔 헤이워드 주연이다. 그레고리 펙은 '맥아더 장군' 역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여기에 다 늘어놓을 형편이 되지 않기에 성경말씀과 함께 몇 가지 이미지들만을 먼저 저장해둔다. 사무엘하 11장의 1-5절을 읽단 읽어보기 전에 렘브란트가 그린 '바세바'(<다윗왕의 편지를 받은 바세바>)를 잠시 감상해본다. 성경의 구절은 우리말로 읽기 편한 공동번역 성경에서 인용한다.   

1 해가 바뀌는 때가 왕들이 싸움을 일으키는 때였다. 그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 부하 장교들과 이스라엘 전군을 맡겨 내보냈다. 그들은 암몬을 무찌르고 마침내 라빠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2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침대에서 일어나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3 다윗이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니, 사령은 돌아와서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 바쎄바인데 남편은 헷 사람 우리야라고 보고하였다.
4 다윗은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다가 정을 통하고는 돌려 보냈다.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
5 바쎄바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렸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 목사님이 설교말씀을 하시는 중에 내가 한 딴짓은 4절에서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한 대였다", 즉 '목욕했다'의 시점 문제를 따져본 것이었다. 러시아 성경에서는 다윗과 정을 통한 이후에 목욕하고 집에 돌아갔다는 식으로 번역돼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갖고 있는 한영성경에서는 모두 다윗에게 오기 전에 목욕하고 온 것으로 돼 있다. 러시아어 성경의 오역일까? 하긴 오며가며 했을 목욕일 텐데, 순서야 대수롭지 않을 듯도 하지만. 아래는 영화속에서 목욕하는 바세바 역의 수잔 헤이워드.

50이 넘은 '늙은' 나이에 남의 아낙을 탐한 다윗의 '정력'이 부러워할 만한 것인지 지탄받을 만한 것인지는 다윗과 바세바를 그린 다른 그림들을 보건대, 다윗과 바세바의 관계가 영화에서처럼 멋있는 커플 관계였을 법하진 않다. 한 산부인과 의사는 ''핍쇼' 중독자 다윗'이란 칼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관음증은 다른 사람이 옷을 벗거나, 나체의 모습 혹은 타인의 성관계하는 장면을 몰래 보는 것을 즐기고 성적 쾌감을 느끼는 경우를 말한다. 사춘기를 거쳐 청소년 시기에는 누구나 이러한 경향이 있으므로 병적이고 비정상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청소년기를 지난 후에도 강박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사회생활, 직장생활에 비건전한 악영향을 준다면 진단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위대하고 현명한 유대의 왕으로 추앙받는 다윗 역시 ‘관음증’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큰데, 그림(*어느 그림인지는 모르겠다)에 묘사된 것을 보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떠있고 눈부신 햇살만큼 투명한 알몸을 드러낸 저 멀리 옥상의 아찔한 눈부신 여인의 알몸은 이민족과의 전쟁을 앞두고 깊은 시름에 잠긴 왕의 눈동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번쩍 태양보다도 강렬한 자극에 이성을 잃은 왕은 백성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부녀인 그녀를 차지하고야 만다. 믿을 수 없게도 이 과정에서 음모를 꾸며 그녀를 과부로 만들어 버리는 만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바세바, 그녀가 별볼일 없는 남편에게 실망해 화려한 권력을 꿈꾼 채로 대낮의 목욕이라는 치밀한 각본 끝에 스트레스 쌓인 왕을 유혹한 것인지, 정말로 우연한 대낮의 목욕에 ‘핍쇼’중독자인 늙은 왕이 주책없이 매료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남성의 부정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들은 그의 욕망을 추악한 관음증 탓으로 돌리지 않고 천하의 악녀 바세바가 그의 페니스에 술수를 부린 것으로 해석해 남성을 단지 어쩔 수 없었던 희생자로 격상시킨다('스포츠서울' 05. 10. 10).

적어도 이후에 벌어진 결과는 다윗의 '주책'보다 바세바의 '각본'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11장의 나머지 절들을 마저 읽어보기로 하자. 

6 그러자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헷 사람 우리야를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요압이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냈다.
7 우리야가 당도하자 다윗은 요압과 병사들의 안부를 묻고 싸움터의 형편도 알아보고 나서
8 집에 돌아가 푹 쉬라고 하였다. 우리야가 어전에서 물러나올 때 왕은 술상까지 딸려 보냈다.
9 그러나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대궐 문간에서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10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가 집에 돌아가 자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야에게 물었다. "그대는 먼 길에서 돌아온 몸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집에 내려가 보지 않았는가?"
11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온 이스라엘 군과 유다 군이 야영 중입니다. 법궤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 상관 요압 장군이나 임금님의 부하들도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집에 가서 편히 쉬며 먹고 마시고 아내와 더불어 밤을 지내다니,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12 다윗은 "그럼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도록 하오." 하며 우리야에게 내일은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우리야는 그 날도 예루살렘에서 묵었다.
13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들여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게 하여 그를 흠뻑 취하게 만들었다. 우리야는 그 날 저녁에도 어전에서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14 날이 밝자 다윗은 요압 앞으로 편지를 써서 우리야에게 주어 보냈다.
15 다윗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심한 곳에 앞세워 내보내고 너희는 뒤로 물러나서 그를 맞아죽게 하여라."
16 요압은 성을 지켜보고 있다가 강병이 지키고 있는 데를 알아내어 그 곳으로 우리야를 보냈다.
17 그러자 그 성에서 적군이 나와 요압의 군대를 쳤다. 다윗의 부하들은 쓰러지고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
18 요압은 다윗에게 전황을 보고할 전령을 보내면서
19 이렇게 지시하였다. "이번 싸움의 보고를 드리면,
20 왕께서 화를 내시며 '어쩌자고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쳐들어갔었느냐? 성벽에서 화살이 날아올 줄도 몰랐느냐?
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이 누구의 손에 죽었느냐? 데베스 성벽 위에서 어느 하잘것없는 한 계집이 내려 던진 맷돌에 맞아 죽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성벽 가까이 갔었느냐?' 하고 꾸짖으실 것이다. 그 때 너는 왕의 부하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고 아뢰어라."
22 전령은 길을 떠나 다윗에게 와서 요압이 이른 대로 보고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화를 내며 전령에게 호통을 쳤다.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쳐들어갔었느냐? 적군이 성벽에서 화살을 쏘아댈 줄도 몰랐더냐?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이 누구의 손에 죽었느냐? 데베스 성벽 위에서 한 계집이 내려 던진 맷돌에 맞아 죽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갔었느냐?"
23 전령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적군이 들에까지 나와 우리를 몰아대기에 우리도 마주나가 놈들을 쫓다 보니 성문 가까이까지 쳐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4 그 때 성 위에서 활을 쏘아대는 바람에 임금님의 근위병도 몇이 죽었고 임금님의 부하인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25 이 말을 듣고 다윗은 전령에게 말하였다. "요압에게 돌아가거든, '전장에서는 누구든지 죽을 수 있는 것이니, 이 일로 걱정하지 말고 힘을 다하여 기어이 그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시오.' 하고 일러라." 이런 말로 그에게 용기를 주라고 하였다.
26 우리야가 전사했다는 전갈을 받고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곡을 했다.
27 곡하는 기간이 지난 다음,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여인을 궁으로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그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다윗이 한 이 일이 야훼의 눈에 거슬렸다.

야훼(여호와)의 눈밖에 난 다윗과 바세바의 아이는 결국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곧 둘째 아들을 갖게 되는바 그가 바로 (생전에!) 다윗의 대를 잇는 솔로몬이다. 우리야의 아내로 남아있었다면 바세바가 솔로몬의 어머니, 곧 국모가 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이 솔로몬은 다윗뿐만 아니라 야훼의 사랑마저도 독차지하게 되는데 말이다(사무엘하 12:24 "다윗이 아내 바쎄바를 위로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니 바쎄바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야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내가 들은 설교말씀의 결론은 성도들이 '다윗의 덫'에 빠지지말아야 하다는 것이었는데, 좀 일면적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랬다면 다윗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 악은 선을 잉태한다. 그것이 선악의 변증법인가? 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은 죽게 했지만 둘째 아들은 사랑한 게 또한 야훼의 법이었으니 이 또한 사랑과 증오의 변증법이라 할 만하다.

해서, 러시아 화가 마르크 샤갈이 다윗과 바세바에 관한 그림을 이처럼 그릴 때, 그가 염두에 둔 건 '불륜'이 아니라 '섭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은총'이었는지도. 인간의 우연한 의지란 그렇게 역사의 필연을 만들어가는 것 아닌가?..

06. 09. 10.

P.S.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내가 궁금해한 '목욕' 문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답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성경의 난해구에 대한 질의응답인데, 답변은 민영진 목사의 것이다. 바세바/밧세바는 혼용돼 있다.

 

 

 

 

질문: <개역 개정판> 삼하 11장 4절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의 이해를 따르면, 1) 다윗이 자기 부하를 바세바에게 보냅니다. 2) 그 들이 바세바를 다윗에게 데려 옵니다. 3) 바세바는 자기 집을 떠나기 전에 벌서 월경(月經) 을 끝내고 깨끗하게 목욕을 하였습니다. 4) 다윗이 바세바와 동침합니다. 5) 그 일이 끝나자 바세바는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의 번역을 따르면, 1) 다윗이 바세바에게 자기 부하를 보냅니다. 2)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합니다. 3) 다윗이 그 여 자와 동침합니다. 4) 다윗이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 니다). 5) 그래서 그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개역 개정판>)

바세바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것은 그가 자기 집을 떠나기 전입니다. 이 진술 이 다른 진술보다 시제상(時制上)으로 먼저 일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에 일어난 다른 연 속적 사건들 속에 진술되기 때문에 번역판들은 이 진술을 연속적인 사건 전개 속에 들어 있 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 본문을 괄호 속에 넣기도 합니다. 우리말 <공동번역>도, <표준새번역>도 이러한 <개역>의 이해와 상치하지 않는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개역 개정판>은 "다윗이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 여자와 동침 하고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개정판>) 라고 달리 번역하였습니다. 이러한 개정의 배경을 묻고 싶습니다.

Het toilet van Bathseba

대답: 이미 질문 안에 대답이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말 번역들을 좀 구체 적으로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다윗은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다가 정을 통하고는 돌려보냈다.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 (<공동번역>)
 
    그런데도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데려왔다. 밧세바가 다윗에게로
   오니, 다윗은 그 여인과 정을 통하였다. (그 여인은 마침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 다음에, 밧세바는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표준새번역>)
  
    다윗이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 여자와 동침하고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개정판>)

<개역>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이 문제의 본문을 같게 번역하였는데 반하여, <개역 개정판>만이 같은 본문을 달리 번역하였다면, 일단 {개역 개정판}을 의심해 볼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역 개정판>에는 다윗을 가리키는 "그"와 바세바를 가리키는 "그 여자"의 용법에도 부정확한 데가 있습니다.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 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에서, 앞의 "그가"는 다윗인데 반하여, 뒤의 "그가"는 문맥 으로 볼 때 "바세바인데도 불구하고,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다윗을 가리킨 것처럼 들리기 도 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 동사의 주어를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다음 과 같습니다.

1) 부하들을 보낸 이는 다윗이다.
2) 부하들을 시켜 밧세바를 데리고 온 이도 다윗이다.
3) 다윗에게 온 것은 바세바이다.
4) 그 여자와 동참한 것은 다윗이다.
5)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이는 밧세바이다.
6)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은 밧세바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발생 순서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건을 히브리어 본문으로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1) 다윗이 부하를 보냈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2) 그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3) 밧세바가 다윗에게 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4)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였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5) 밧세바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다 (히브리어 분사)
6) 밧세바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위에서 보듯이 여섯 개의 동사 중에서 다섯 번째의 동사를 제외한 다른 다섯 개 동사가 모두 와우 연결법(waw consecutive) 형태를 지니고 있는 완료태 동사임을 확인할 수 있습 니다. 그리고 이들 동사들의 발생 순서는 여기 나열된 순서 그대로입니다. 다만 밧세바가 자 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것만은 완료태가 아닌 분사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사 로 표현된 동사의 사건이 다른 완료태 동사와 관련된 다른 사건들과 같은 맥락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의 본문은 밧세바가 이미 다윗에게 오기에 앞서서 월경을 끝 낸 상태에서 목욕을 하여 자기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고, 그런 상태에서 다윗과 동침하여 임신을 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역 개정판>의 모호한 표현도 다음과 같이 고치면 더 분명해 질 것입니다. 

    다윗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
   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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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6-09-1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만 생물학적으로만 보자면 월경을 막 끝낸 상태에서는 임신이 안되지 않을까요?

로쟈 2006-09-1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 그렇게 디테일하게 서술하는 것 같지는 않구요(^^), 그냥 논리적인 순서가 그렇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톡톡캔디 2008-11-25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에서는 월경 중에도 임신하는 여자도 있더군요...(더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만 -__-ㅋ)
 
류블랴나학파 혹은 '지젝과 그의 친구들'

지젝과 그의 친구들을 흔히 'Slovenian Lacanians'라고 부른다. '슬로베니아 라캉주의자들' 혹은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라고 옮길 수 있겠다(이들에 관해서는 언젠가 '지젝과 그의 친구들'이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얼마전에 나온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의 서론에서 이들에 대한 한 문단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오역들이 눈에 띄어서 교정해둔다.  

"지젝은 뛰어난 사상가이다. 그러나 그는 고립되어 작업을 하지 않는다."(14쪽) 

원문은 "Zizek is a leading thinker, but he does not work in isolation."이다. 번역에 흠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붙은 각주에서(이 책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각주인데) 거명되고 있는 지젝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 동료들이 이렇게 표기돼 있다: "영어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는 밀러던 도러, 레나타 살레츨, 알렌카 주판치치 등이다. 그 외에는 마이란 보조비치, 라호 리아, 즈드라브코 코베가 있다."(255쪽) 찾아보기에 보면, 'Mladen Dolar'는 '믈라덴 돌러'로 표기돼 있다.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모두 제각각으로 표기돼 있는 것인데, 부주의하달 수밖에. 그리고 국역본이 나와 있는 'Miran Bozovic'의 표기는 그냥 '미란 보조비치'라고 해야겠다. 그런 정도는 사실 독해에 장애가 된다고는 볼 수 없다. 계속 읽어보자.  

"그는 1949년 옛유고연방인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서 류블랴나에 있는 철학연구소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일원이다."  

일반적으로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라고 부르고 국내에서는 그 총서까지 나오고 있지만, 사실 '학파'란 말은 좀 거창하다. 모임의 실체라는 건 '지젝과 그의 몇몇 동료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젝이 류블랴나에서 세운 건 '이론정신분석학회'이며, 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인 2인 학회였다. 물론 이후에 걸출한 후배들/제자들이 합류하게 된다.

"이 단체의 특징은 대륙철학(데카르트, 칸트, 헤겔, 마르크스)의 배경을 공유한다는 것과 라캉식의 정신분석에 매혹되었다는 것, 타자의 용어로 각자를 설명하려는 치열한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지젝과 그 일당의 이론적 기획이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을 접속에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지젝은 하이데거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로 건너가 알랭 밀레의 지도하에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런데, 번역문에서 '타자'는 무엇이고 '각자'는 무엇인가?

이런 류의 번역서에 '정통한' 독자라면, 그게 각각 '대륙철학'과 ''라캉 정신분석'를 가리킨다는 걸 짐작할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역자는 그런 생각으로 옮기지 않은 듯하다. 그랬다면, 적어도 "언제나 각각을 다른쪽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경향(a relentless urge to explain in terms of the other)" 정도로 옮기지 않았을까? 혹은 풀어서, "그들은 대륙철학을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은 대륙철학의 용어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공유했다"라고 해주던가.  

"진정한 교육자적인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책을 쓰게 한다.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역시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진정한 교육자적 열정'? 그만큼 그들이 쉽고 재미있게 쓴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라캉과 헤겔을 한두 페이지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지젝이 난해하다는 얘기는 할 수 없다. <안티-오이디푸스> 이후 최고의 지적인 경험을 제공해준다고 하지만, "지젝은 들뢰즈와 가타리보다 훨씬 더 재미있기도 하다."(13쪽)

 

"지젝이 편집한 몇 권의 책들이 그를 따르는 슬로베니아인들에게는 연구의 본보기가 된다. 그들은 우수한 언어학자들이고, 지젝처럼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자유롭게 쓰며, 독일어와 프랑스어 원서로 헤겔과 라캉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엔 좀 심한 오역들이 포함돼 있다. 먼저, 첫번째 문장의 원문은 "Several of the volumes edited by Zizek contain examples of work by his fellow Slovenians."이다. 다시 옮기면 "지젝이 편집한 몇 권의 책에는 그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 동료들의 작업 사례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의 이름을 떨치게 해준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지젝은 자신이 편집을 맡은 'Wo ES WAR'(Verso출판사)나 'SIC'(Duke대 출판부) 시리즈에 '동료'들을 대거 참여시킨다. 물론 이 '슬로베니아인'들만으로 시리즈의 목록이 채워진 건 아니지만.

다시 돌아가면,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자유롭게 쓰'는 'linguists' 가 '언어학자들'인가? '언어능통자들'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즉, 이들의 강점은 불어와 독어에 능통하면서 영어로도 저술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변방'의 지식인들이 세계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기본조건이 무엇인가를 시사해주는 듯싶다.  

Žižek, Slavoj: Kako biti nihčeDolar, Mladen: ProzopopejaZupančič, Alenka: Poetika. Druga Knjiga

"그들의 문화는 세계주의적이며 그들 대부분의 작업은 지젝처럼 여러 언어로 이뤄진다. 지젝처럼 그들도 처음에는 주로 그들이 창간한 Problemi지와 시리즈 책인 Analecta에 슬로베니아어로 출판했다."  

그러니까 먼저 슬로베니아어로 발표한 다음에 그것이 다른 언어들로 옮겨지는 식인데, <항상 라캉에 대해>의 경우도 슬로베니아어본이 먼저 출간된 다음에 영어본으로 새롭게 편집됐다...

06.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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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5 17:11 
    '지젝 읽기'를 연재하다 보니 여느 때보다도 더 자주 '지젝'에 관해 검색해보게 되는데, 지젝이 편집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인간사랑, 2010)가 출간됐다.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츨과 같이 편집 책임을 맡은 SIC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왔던 책이다. 원저는 1996년에 나왔으니까 상당히 '오래된' 책이다.    라캉주의 연구서라고 분류할 수 있을 텐데, 전체 8편의 논문
 
 
기인 2006-09-10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 답니다 :) 맨 아래 책들 바로 위에
'다시 돌가아면'이라는 오타 지적하고 자려고요 ㅎㅎ

로쟈 2006-09-1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는 일부러라도 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