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함에 자꾸 쌓이는 책들을 좀 털어내보려고 한다(머릿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이 벌레들!). 이번에 다룰 책들을 뭉뚱그리자면, "곤충들의 도서관에서 세계의 명작들을 읽으며 내면의 침묵에 빠져들다가 끝내 국경을 넘어 중세로 달아나버린 한 책벌레"에 관한 이야기 정도가 되겠다(이 이야기에 캐스팅되지 않은 책들은 또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그럼, 먼저 '전략의 귀재들, 곤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제일 먼저 꼽을 책은 토마스 아이스너의 <전략의 귀재들, 곤충>(삼인, 2006). 원제는 'For Love of Insects'(하버드대출판부, 2005)이고 원서의 표지는 국역본의 표지와 같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파리 종류인 거 같다. 국역본의 제목은 다소 튀는데, 같은 제목이더라도 '곤충, 전략의 귀재들'이라고 배치하는 게 보통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아이스너 교수는 코넬대학의 석좌교수인데, 동물행동학과 생태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아주 작고 놀라운 곤충의 세계. 반세기 동안 우루과이, 호주, 파나마, 유럽, 북아메리카 대륙을 넘나들며 관찰하고 실험하여 발견한 곤충들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고. 특히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곤충들의 생존 전략, 진화에 승리한 비밀을 해독해내는 과정과 연구 순간순간을 포착한 원색 사진들이 돋보인다"고 한다.

568쪽 분량에 책값도 5만원에 육박하지만, 사실 이 정도 설명뿐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한데, 역시나 세계적인 개미학자이자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이 책은 프랑스의 위대한 곤충학자 파브르를 계승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유능하고 열정적이며,박학다식하고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가 반세기 넘는 시간을 곤충에 투자한 노력의 산물이다"라는 최상급의 추천사를 쓰고 있지 않은가? 흔한 말로 '강추'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더 눈길을 주는 수밖에(참고로, <파브르 곤충기>는 아직도 완역되지 않은 듯하다. 분량이 방대하긴 하지만).

거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의 정복자 - 곤충>(다른세상, 2005)의 저자 메이 베렌바움이 거들기를 "곤충학의 세계에도 초인적인 영웅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토머스 아이스너일 것이다. 톰은 화려한 업적을 쌓아오면서 곤충이 화려한 색상이나 기이한 돌기, 아주 고약한 분비물을 지닌 이유를 수도 없이 밝혀냄으로써,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과학자들의 기를 꺾어왔다. 이 책에서 그는 재치 넘치는 문체와 입이 떡 벌어지게 멋진 사진들을 통해 흥미진진한 과학의 세계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곤충과 그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정도 밀어주는 분위기라면 소장용 도서로 꽂아두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원색 사진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하니까 초등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도 유용할 듯싶다. 어른이야 곤충을 '사랑할'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두번째 책은 책벌레들의 전당, 도서관에 관한 것이다. 로널드 맥케이브의 <도서관, 세상을 바꾸는 힘>(이채, 2006)이 그것인데, 딱히 이 책에 주목해서라기보다는 그간에 도서관을 표제나 주제로 해서 나온 책들을 이 참에 호명해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령, 얼마전에 출간된 최정태 교수의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한길사, 2006)이 소장가치로는 더 앞선다. 도서관의 역사를 다룬 책들도 있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미궁 같은 도서관의 모델의 되었다고 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관한 책도 눈길을 주어볼 만한 책이다.

원제가 'Civic Librarianship: Renewing the Social Mission of the Public Library'(2001)인 신간은 '도서관과 사서의 위기 극복을 위한 철학적 고민'이란 부제를 갖고 있으며, "책은 미국 공공도서관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펼치며 도서관 사서들이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커뮤니티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시민사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미국 공공도서관 역사를 짚어가며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의 새로운 공공도서관의 청사진을 이야기한다"는데, 순전히 미국적 상황과 처지에 관한 내용일 듯하지만 '기적의 도서관' 건립운동 등에서 촉발된 도서관에 대한 관심과 여론을 보다 체계화/구체화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 보인다.

아마도 도서관 사서들의 연수교재용으로 딱 알맞아 보이는데, 이 '공적인 책'에 따분함을 느끼는 독자라면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들의 풍광을 잠시 훔쳐보아도 좋겠다(저자는 러시아 도서관들을 훑어볼 포부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공부가 절로 될 만하지 않는지?.. 

 

 

 

 

그럼, 우리의 아름다운 (가상의) 도서관에서 무슨 책들을 읽어야 할까? 최근에 나온 따끈따근한 고전 명작들은 어떻겠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학사에서나 자주 접하던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1811-1972)의 <모팽양>(열림원, 2006)이다. <미라 이야기>(열림원, 2006) 같은 청소년물이 지난 7월에 출간되기도 했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 고티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다(이런 유미주의 작가로 가장 유명한 이로는 영국작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 있다).

작가 고티에가 고작 24살 때 발표한 작품이라는 <모팽양>은 "관습적인 성역할을 넘나드는 여주인공을 통해, 사회적 성정체성인 젠더(gender)를 치열하게 성찰한 작품"으로 "주인공 '모팽 양'의 실제 모델은 17세기의 남장 여가수이자, 후에 모팽 부인이 되는 '마들렌 도비니 양'이다.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자존심이 높았고, 기사복을 입고 다녔으며, 결투를 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봤을 때도 다소 '전복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듯한데, "이 작품은 1835년 출간되어 발자크, 위고의 극찬을 받았고, 당시의 프랑스의 고전비평과 부르주아 신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특히 동시대 공리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아름다움의 무용성을 극단적으로 주창한 서문은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니 작가의 나이는 잠시 잊어주는 게 좋겠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버티고, 2006)도 최근에 나온 작품이다. 한데 엄밀히 말하면 이미 출간됐던 작품이다. 지난 1990년에 나온 중앙일보사의 소련동구문학전집 중 한권으로 밀란 쿤데라의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과 함께 묶여 있었던 것이다. 중앙일보사판은 역자가 이윤기씨로 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국내 최초의 체코어 완역본"이라는 건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아무려나 흐라발은 쿤데라와 함께 체코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고 하다. 안면이 좀 있었던 체코출신의 한국 유학생은 대단한 작가라고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적이 있었다.

그 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1965년 작인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체코를 배경으로, 독일에 점령당한 체코인들의 삶을 그렸다. 냉혹한 현실에 우스꽝스러운 등장인물들을 배치,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든다. 수습 역무원 흐르마는 소심한 성격의 스물두 살 청년. 여자친구와의 첫 경험에 실패하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벽돌공의 도움으로 살아나 3개월 만에 근무에 복귀한다. 하지만 독일군에 점령당한 기차역의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신호를 잘못 보냈다고 총살당할 뻔하고, 화물차량 가득 실려 오는 아사 직전의 불쌍한 가축들을 보아야 한다..."

해서, "파시즘에 저항하는 영웅적인 이야기이지만, 진한 휴머니즘도 내재되어 있다. 체코에서 영화화되어 196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으며(*영화의 스틸 사진들은 보시는 바와 같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소련, 동구 현대 문학전집'에 이윤기 씨의 영어 번역으로 소개된 바 있다(*여기 내용이 다 나오는군). 함께 실린 단편 '간이주점'은 비가 몹시 내리는 어느 날, 결혼 피로연이 열리는 왁자지껄한 간이주점에서 목을 매고 죽은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곧 분량도 많지 않으므로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에 유쾌하게 다 읽을 만한 소설이겠다.

그리고, 또 우리에겐 <주홍글씨>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국작가 나다니엘 호손(1804-1864)의 장편소설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문학과지성사, 2006). "사회주의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모인 남녀들의 다층적인 연애 사건을 그린" 작품으로 "1852년 발표되어 '호손의 형식 미학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번에 국내에 초역된 작품이라고.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19세기 미국 매사추세츠 부근, 일군의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회주의 공동체를 만들고 '블라이드데일'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행복의 골짜기라는 뜻처럼, 처음 이 공동체 생활은 밝고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고무적으로 펼쳐진다." 호손의 지명도를 고려하면 한번쯤 읽어둘 만한 작품이겠다.

 

 

 

 

네번째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내면의 침묵>(열화당, 2006)이다. 이번에 그의 에세이집 <영혼의 시선>(열화당, 2006)이 같이 출간됐다. 지난 여름에 출간된 평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유문화사, 2006)까지 갖춰놓으면, 게다가 좀 무리해서 사진집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그는 누구인가>(까치글방, 2003)까지 마련해놓으면 국내 출간된 '브레송 컬렉션'은 일단 완벽하다 하겠다.

<내면의 침묵>이 먼저 눈에 띈 건 사실 표지로 쓰인 사뮤엘 베케트의 초상 때문이다. 말년의 베케트를 역시나 대가다운 솜씨로 포착하고 있는 사진이다. 혹은 아래와 같은 사진의 베케트.

 

한동안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다시 상기해보자면 올해는 베케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내에서는 이렇다할 기념 출판이 없어서 다소 아쉬웠는데, 베케트를 표지로 한 브레송의 사진집이 그 아쉬움을 얼마간 달래준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그의 드라마 한두 편을 다시 읽어볼 수 있을까? 한국어 베케트의 목록을 뒤적거려보지만 빈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기 이전에 베케트를 먼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책벌레가 어느덧 국경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다섯번째 책은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경을 넘는 방법>(일조각, 2006). 몇년전에 <국민이라는 괴물>(소명출판, 2002)로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저자는 근대 국민국가의 비판과 극복에 학문적 화두를 두고 있는 듯하다. '문화, 문명, 국민국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부제로 갖고 있는 이번 책에서도 "문명과 문화가 근대 국민국가의 국가통합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지적하면서, 우리들이 얽매인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예리하게 파헤친다"고 한다. 

요컨대, "문명과 문화라는 말은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며, 뛰어난 근대적 이데올로기임을 밝힌다. 따라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을 둘러싼 역사 또는 국민국가 스스로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문명, 문화라는 용어나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마저도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한다"는 걸 지적하는바, "책은 문화를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사문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문화의 대안을 모색한다."

이에 대한 임지현 교수의 추천사는 이렇다: "'서양'에게는 '동양'이자 '동양'에게는 '서양'인 일본, 오리엔트화되는 오리엔트이자 오리엔트화하는 오르엔트인 일본에 대한 니시카와 나가오의 날카로운 성찰은 비교문화 연구의 진경을 보여준다. 비교문화의 단단한 이론 틀 속에서 '일본적인 것' 혹은 '일본 고유 문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문화적 본질주의를 해체하는 그의 차가운 시선은, 좌우를 막론하고 '국민문화'의 회로 판에 갇혀 있는 일본 지식사회에 대한 엄정한 자기비판이다."(강조는 나의 것)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저자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중요한 이론전 전거로서 참조한다. '오리엔탈리즘'을 주제로 한 국내서/번역서 몇 권을 같이 꼽아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림은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의 표지로 쓰인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보통 다섯권의 책을 꼽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번엔 서양 중세사의 거장 조르주 뒤비의 책을 보너스로 더 집어넣는다.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생각의나무, 2006) 가 그것인데,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프랑스 아날학파의 거장 조르주 뒤비가 쓰고 백과사전의 명가 라루스 출판사가 출간한 책으로 그림과 지도로 보는 대 세계사 연감이다. 인간 역사의 파노라마를 520개의 사건으로 분류하여 편집 기술이 집약된 지도 위에 그 전개 상황과 개요를 새겨 넣어 역사 기술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책값이 12만원에 이르는 만큼 뭔가 대단한 걸 보여줌에 틀림없다! 아, 세계는 넓고 서민-책벌레로선 이 책값들을 벌기가 참으로 어렵도다!..

06. 09. 22-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스크바 통신에 올려놓았었던 짤막한 단편을 옮겨놓는다. 재작년 6월말 모스크바 영화제 기간에 번역한 것인데, 주인공인 '겐까'가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영화광이기도 했다. 작가 알렉신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는데, 그래도 꽤 저명한 '아동문학가'라 한다(자료를 찾아보니 재작년에 그는 80세 생일을 맞았다). 주로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다고 하니까 '청소년문학가'라고 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주제는 이 시기 주인공의 ‘눈뜸’이겠다(‘아담이 눈뜰 때’ 같은 것!). 

Писатель Анатолий Алексин

원제는 ‘프라우다(=진실)’의 반대어인 ‘니프라우다(=거짓)’인데, 우리말로 자연스러운 ‘거짓말’로 옮겼다. 중학생 정도인 주인공의 나이와 제목만 가지고도 짐작할 수 있는 바는, 이 단편이 ‘겐까의 눈뜸’을 다룰 거라는 것. 무엇에 대한? 거짓(허위)에 대한. 누구의 거짓에 대한 눈뜸인지는 한번 읽어보시길. 페트루솁스카야의 <복수>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적 읽기’를 한번쯤 자극하는 단편이다(역시 괄호 안에 *를 단 건 역주이다).



겐까는 16세 미만은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보는 걸 무척 좋아했다(*러시아영화는 ‘12세 미만 관람불가’ ‘16세 미만 관람불가’ ‘18세 미만 관람불가’ 등으로 분류된다. ‘16세 미만’이면 준-성인영화이며, 러시아에서는 18세 이상이면 포르노성 영화도 관람가능하다). 그는 나이 표시가 돼 있지 않은 책들, 그러니까 어른들의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다(*겐까의 나이가 이 단편에서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대략 13-14세 정도일 걸로 보인다).

아버지가 먼저 겐까에게 ‘흡독(吸讀)’ 전쟁을 선포했다(*‘흡독’이란 단어는 작가가 ‘책빨아들이기’란 뜻으로 만든 신조어를 옮긴 것이다.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이듯이 책의 내용을 흡수하는 것인데 ‘속독’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전에 안 나오는 단어를 썼길래 ‘흡독’이라고 옮긴다). 그는 모든 군사학 수칙들에 따라서 공격해 왔다. 그는 먼저, 척후부대를 보냈다. 그 결과 겐까의 머릿속에서는 책과 저자의 이름마저 헷갈리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겐까는 쿠퍼를 쿠프린으로, 스타뉴코비치를 그리고로비치로 혼동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결정타를 먹이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아들을 비웃었다. 겐까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때 아버지는 ‘돌격대’로 편성된 주력부대를 내보냈다.

-이젠 책을 같이 읽도록 하자!
-어떻게, 같이 읽어요? – 겐까가 놀래서 말했다. – 같이 소리내서요?
-그건 아냐… 하지만, 너무 ‘속으로만’ 읽으면 안된다. 내가 충고해 주는 대로 책을 읽어라. 그리고 같이 토론을 해보자.

저녁을 먹으면서 시험이 시작됐다.
-너 자연 묘사는 또 빼먹었니? – 아버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빼먹었어요. -겐까가 변명했다.
-거짓말!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거짓말을 하는 거다. 그럼 어디, 여기서 첫눈의 냄새는 무엇에 비유되고 있지?

겐까는 자리에서 멈칫했다.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어나가서 눈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럼, 무엇에 비유되고 있는지 아버지한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는 첫눈의 냄새를 수박 냄새에 비유하고 있어! 이건 정확한 비유야! 넌 이 대목을 빼먹은 거야!(*쿠프린의 소설에 나오는 대목이라고 한다. 우리에겐 <석류석팔찌>란 작품으로 알려진 쿠프린(꾸쁘린)은 고리키와 동시대 작가로 그와 함께 흔히 ‘네오리얼리즘’ 작가로 분류된다. 1890년대 러시아 문학의 경향은 귀족적 상징주의와 체호프, 그리고 서민적 네오리얼리즘이었다.)

이따금 토론에 엄마가 끼어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금방 엄마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엄마는 화를 냈다.
-여자들한테는 버스에서나 자리를 양보하는 거예요. 논쟁에서는 그런 예의가 필요없다구요!

아침마다 엄마는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아버지와 겐까에게 아침을 준비해주었다. 집을 나설 때마다 아버지는 엄마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매번 똑같은 말을 했다.

-안녕, 나의 사랑스런 난쟁이!(*원어는 ‘malysh’로 러시아인들이 자주 쓰는 ‘애칭(愛稱)’인데, 원래는 ‘키가 작은 사람(=난쟁이)’을 가리킨다. 이런 류의 애칭으로 ‘토끼(zajchik)’도 있다).

그러면, 엄마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겐까는 엄마가 일찍 일어나는 것이 순전히 그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쟁이’란 말은 엄마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전혀 작은 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소년인 아들을 부를 때, 아버지는 엄격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겐나지’라고 불렀다(*‘겐나지’는 애칭이 아니라 공식적인 호칭이다. 학교 출석부에나 올라가 있을. ‘겐나지’의 애칭은 ‘겐까’나 ‘게나’이다).

저녁마다 겐까는 아버지의 퇴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를 대번에 알아챘다. 천천히 울리는 초인종 소리… 겐까는 무척이나 아버지에게 문을 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엄마가 훨씬 더 기다렸을 거라는 걸 알았고, 엄마에게 양보했다. 아버지는 다시 엄마의 이마에 키스를 했고, 아침과 거의 똑같은 인사를 했다. “잘 있었어, 나의 사랑스런 난쟁이!” 하지만, 이 단어들은 훨씬 더 상냥하게 들렸는데, 왜냐하면 아버지는 틀림없이 하루 종일 엄마를 무척이나 그리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겐까는 다정스런 말들이 질색이었지만(*겐까도 사춘기인 것이다), 엄마에게 하는 아버지의 말에서는 뭔가 아늑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다…
겐까에게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공부는 잘 돼가니?

그는 한번도 아들이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일기장을 열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 때문에 겐까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나쁜 성적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대로 다 얘기했다. 겐까는 꾸중을 듣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런 저녁이면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나, 아버지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똑똑한 사람들’과 ‘멍청한 사람들’로 분류하는 엔지니어들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겐까의 한 가지 약점에 대해서만은 아버지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약점이란 건 영화에 대한 그의 제지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겐까가 집에 흥분해서, ‘멍해진’ 눈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눈으로 그에게 경고했다. “꾸며댈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영화보고 온 거 다 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는 아무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말했다.
-오늘 새로 영화가 들어왔더군. 재미있겠던데. 무슨 내용이지?
그러면 겐까는 내용을 다 털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느날 겐까는 집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서 옛날 영화를 상영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영화는 겐까가 볼 수 없었던 것인데, 처음 개봉됐을 때 겐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보통 때라면 겐까는 저녁 상영시간에는 보러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날 아버지가 늦게 돌아오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겐 중요하고도 축하할 만한 날 - 새 기계를 시험해보는 날이었다(*‘기계’에는 ‘자동차’란 뜻도 있다). 아버지가 말하길, 아직도 예기치 않은 문제들이 터져나올 가능성이 있으며, ‘멍청한’ 엔지니어들 중 누군가가 반대하고 나설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흥분해 있었다!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며 엄마가 흥분해 있었을 때처럼?

겐까는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내기 위해서라도 영화관에 더욱 가고 싶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엄마(특히 엄마!)의 얼굴을 보고, 모든 일이 잘 됐다는 걸,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됐다는 걸 확인해보고 싶었다…

겐까는 멀대같이 키가 큰 7학년생 조라를 같이 데리고 갔다(*7학년이면 우리의 중1 정도이다). 조라는 아무런 문제없이 모든 표를 다 살 수 있었다(*키가 크니까). 둘은 저녁 무렵의 거리를 내달렸다. 하지만, 극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늦었다는 걸 알게 됐다. 모든 표가 매진이었다. 바로 앞 상영이 끝난 시간이었다… 영화관에서는 사람들이, 불빛에 눈을 찌푸리면서(*갑자기 환한 곳에 나오니까), 외투를 걸치며 걸어나오고 있었다(*러시아에서는 모든 공연장 출입시 입구에 있는 보관소에 외투를 맡겼다가 다시 찾는다)… 그때 겐까에겐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춥지 않아, 난쟁이?
겐까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허리를 숙여서 웬 낯 모르는 금발 여자가 스카프를 매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겐까는 구석으로 재빨리 피하고 싶었다. 그에겐 저녁 상영시간에 영화를 보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의지와 무관하게 위로 향했고 아버지의 시선과 부딪혔다. 그리고 겐까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문득 아버지도 그를 보고 놀라신 걸 알았다. 그래, 그래, 아버지가 놀라셨어! 언제나 신중하고 침착하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바빠지셨다. 금발 여자의 손에서 어색하게 손을 빼더니, 겐까가 보기엔, 심지어 기둥 뒤로 숨으시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둥은 전혀 그를 가려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기둥은 좁고 가는데 반해서 아버지는 거구에다가 어깨가 넓었기 때문이었다.

겐까는 아버지를 도와주었다. 그는 거리로 뛰쳐나가서는 긴 다리의 조라조차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하지만, 어느 사거리쯤에 이르러 겐까는 걸음이 멈춰졌다. 그의 귀에선 아버지의 목소리가 윙윙거렸다. “춥지 않아, 난쟁이?” 아버지가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매어주던 금발 여자는 실제로 키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겐까로선 엄마에게 속하는 말들을, 오직 엄마에게만 속하는 말들을 그녀에게도 쓰는 것은 야만적인 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기계 시험은 도대체 뭔가? 거짓말이었던 말인가? 기계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인가?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 거다… 겐까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것이 용납이 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모든 게 거짓말이란 말인가? 책에 관한 얘기들도, 아버지의 충고도, 저녁식사 때의 토론도? 모든 게, 모든 게 거짓말이다!

집에 돌아온 겐까는 곧바로 침대에 가 누웠다.
-무슨 일이니? 그렇게 상기돼서… 너 열이라도 있는 거니? –엄마가 걱정스러워하며 물어보셨다.
-걱정마세요, 엄마…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 평소답지 않게 겐까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실제로는, 오늘 그로선 엄마가 문을 열어주었을 때 아버지가 하는 인사를 듣고 싶지 않았고,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04. 06. 20/ 06. 09. 22.

P.S. 아래는 2004년 11월 21일 자신의 80세 생일을 기념하는 조촐한 자리(러시아 예루살렘 도서관)에서 '테러와 아이들'이란 주제로 강연하는 노작가 알렉신의 모습. 청중들은 어릴 적에 알렉신의 이야기들을 읽고 자란 독자들로 보이지만 어느새 모두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아닌가 싶다.

Писатель Анатолий Алекси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자 한겨레 책-지성 섹션의 '한국의 글쟁이들' 코너에서는 '동양철학 저술가 도올 김용옥씨'를 다루고 있다. 돌이켜보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민음사, 1985/ 통나무, 1987)와 <여자란 무엇인가>(통나무, 1989)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지 어즈버 20년이 넘었다. 하버드대 박사 출신으로 고려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이후로 언제나 화제와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이 지식인-저술가, 혹은 한 저작의 표현을 빌면 '우리시대의 문화무당'도 어느덧 세는 나이로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그간에 출간한 저작목록을 일별하는 일이 곧 내가 살아온 지난 20년을 회고하는 것과 겹친다는 것은 '묘한 느낌'을 가져다준다(이미 '살아버린 세월'을 마주할 때의 느낌 말이다). 그의 파격의 지지자였으면서 한편으론 과장된/낭비된 언어들을 유감스러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비록 최근 몇 년간의 저작들을 나는 읽어보지 않았지만(하지만 그가 문화일보 기자시절 쓴 칼럼들을 나는 대부분 읽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책들을 얼른 떠오르는 대로 나열하자면, 앞에서 꼽은 데뷔작들 외에 <절차탁마 대기만성>,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화두, 혜능과 셰익스피어>, 그리고 화이트헤드 번역서인 <이성의 기능> 등을 더 얹어볼 수 있겠다. 그런 밑그림을 갖고서 한겨레의 기사를 부분적으로 다시 읽어본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저술가로서 도올이 거둔 대중적 성과는 일반인들의 예상 이상이다. 지금까지 모두 41종 52권을 펴냈고, 총 판매부수는 250만부를 넘겼다. 80년대 그의 이름을 알린 <여자란 무엇인가>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각각 40만부와 20만부, 방송강의로 화제가 된 <노자와 21세기>(전 3권)가 50만부 넘게 팔렸다. 이 밖에도 10만부를 넘긴 책이 여럿이다. 인문학자의 인문학책으로는 놀라운 수치다.

-그러나 저술가로서 그가 대단한 점은 판매부수보다도 20년 동안 활동을 계속해 온 생명력, 그리고 꾸준히 변화해온 데에 있다. <여자란…> <동양학…> 등 도올의 초기 책들은 인기는 높았지만 일반 교양서 차원이었다. 하지만 이후 도올의 책은 점점 그만의 사유를 담으며 일관성을 갖고 진화해갔다. 그의 관심은 동양철학에서 시작해 조선사상사를 훑은 뒤 동학과 개화기 독립운동사를 거쳐 최근에는 현대사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민족주의를 매개로 한반도와 민족문제를 다루며 고유의 목소리로 비전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강점으로는 독자들의 반응이 크게 엇갈리는 ‘강력한 문체’가 꼽힌다. 단번에 써내려가는 집필 스타일이 더해져 흡인력이 더욱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도올의 글쓰기 스타일은 전형적인 ‘몰아쓰기’에 ‘일필휘지’형. 스스로 “나는 항상 글이 잘 써진다”며 “문장을 시작하면 글로 써달라고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쳐서 귀찮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체상의 강점은 바로 대중성이다. 도올의 글은 어려운 용어를 쓰지만 소화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이처럼 자기 사유를 알기 쉬운 대중적인 언어로 펼쳐보이는 학자는 무척 드물다(*도올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이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덕목이다). “저술의 기본 대상을 항상 25~35살로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에요. 어떻게 하면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끈을 놓치지 않느냐는 것이 내 삶에서 끊임없이 벌여야만 하는 사투라고 할 수 있지요.”

-저술가로서 도올의 최대 승부처는 바로 ‘시간과의 싸움’. 자신이 정말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자리가 아니면 참석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저술세계가 신이 되는 것, 원고를 쓰는 게 신에 대한 경배가 되는 것이 중요해요. 권력이나 명예도 저술을 위해서는 뭉개버릴 수 있다는 프라이드가 없으면 저술가가 못돼.” 이는 동시에 학자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학자는 곧 저술가에요. 궁극적으로 학자의 사명은 책을 쓰는 데 있지 강의하는 게 아니야. 그 시대에 결국 남는 것은 강의가 아니라 책이에요. 강의는 사람의 마음속에 남겠지만, 그건 듣는 이들이에게 밑거름을 주는 것이지 내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도올은 그러나 “프로 지식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해본 사람은 상상 못한다”고 강조한다. 요즘에는 인문학의 위기가 겹쳐 더욱 상황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립대 교수 연봉이 한 7000만원쯤 될거에요. 내가 그 정도 벌려면 1만원짜리 책을 7만권을 팔아야 해요. 요새는 책이 안나가서 일반 교수들 정도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뭔가 끊임없이 지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인거지. 그나마 나는 방송하고 연계하는 등 새로운 방식을 개척해왔는데도 요즘에는 불가항력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저술만으로 먹고 살 수 있다면 방송은 안해도 되는 거에요.”

-그토록 ‘튀던’ 그도 이제 환갑을 앞두면서 바뀌는 듯하다. 요즘에는 특유의 ‘잘난척’과 ‘오버’, 그리고 ‘공격성’이 많이 덜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내가 지금 내 책을 봐도 과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수용해준 사회에 감사해요. 사실 내가 그렇게 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를 까대고 뭉개려는 인간들에 대해 ‘너희들이 그래도 도올은 사라질 수 없다’는 생명력을 보여주려는 과시이자 생명력의 표출이었어요. 이젠 정갈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그가 진화할 방향은 어느쪽일까? 분야로는 ‘현대사’, 구체적 주제로는 ‘재즈’와 ‘동학’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요즘 현대사를 다루는 것은 현대사에서 모든 학문이 출발해야겠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보고 이념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가 관찰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특히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동학이란 주제도 급해요. 동학의 마지막 세대들과의 작업이 필요한데 이젠 워낙 나이 드신 분들이어서…, 시간이 부족해요.”(구본준 기자)

06. 09. 22.

P.S.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들을 며칠 전에도 옮겨다놓은 바 있지만, 사실 그런 위기는 도올과 무관해 보인다. 적어도 그는 대학이나 국가에 자신의 학문을 의탁하거나 의존하지 않았기에. '프로 지식인' 혹은 '프로 저술가'의 곤난에 대해서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가 엄살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쨌거나 우리 현실의 삶과 학문을 '통섭'시키고자 부단히 애쓴, 드문 사례로 기억되어 마땅하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의 자기과시와 튀는 언변이 튀어보이지 않을 만큼 다양한 분야, 다양한 목소리의 '도올들', (그가 애용하는 표현을 가져오자면) '돌대가리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도들이여, 무소의 뿔처럼, 돌대가리처럼 혼자서 가라!..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마천 2006-09-2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은 창대해도 끝이 미약한 쪽 아닌가요? 1권만 내고 다음권은 그 다음에 이렇게 이야기하고서는 절대로 다음권이 안나옵니다. 여자, 동양학 등등 대부분에서 그런 실망을 했습니다.
요즘 나오는 책을 보다보니 베트남 간 이야기 등은 자기 사적인 잡담도 버젓이 책으로 내더군요. 지나친 종이낭비가 아닐까요?
정치적 참여를 여러차례 시도했는데 노태우에 편지, 노무현 탄핵 반대 최근 새만금 하면서 노무현 욕하기... 아직 입장의 정돈이 덜 된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시대의 인기작가이지만 해외에 번역될만큼의 한국적인 응축이 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로쟈 2006-09-23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에 대한 호오가 분명하게 갈린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좌충우돌형이지요. 하지만 제가 인정하는 건 대중과의 소통/교감 능력입니다. 가령, 동학과 동학사상에 대해서 과연 그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그 의의와 요체를 광고하고 전달한/전달할 수 있는 '학자'가 우리에게 또 있는지 의문입니다. 대신에 우리 주변에 넘치는 건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다가 작전권환수반대에는 또 우국지정으로 서명하는 고고한 학자-교수들이지요...

사마천 2006-09-23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저는 사상은 사회적 결과가 있었냐 그렇지 못했냐로 평가받아야 하는 입장이라. 동학도 실패한 혁명이고 실학도 실패한 개혁시도 정도로만 보고 있습니다. 의욕은 가상했지만 거기서 얻어질 수 있는 결과물은 의외로 작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는 교수가 상아탑에 너무 많다고 하셨는데 그건 백프로 공감합니다. 지식이 자기 현학에 빠질 때 대학 경계 그 안에서만 머물죠.
그렇지만 여전히 저는 작전권환수에 찬성했다고 해서 꼭 무조건 훌륭해보이지는 않더군요. 선과 악을 분명히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게 간단히 나누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9-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전권환수 문제에 대한 찬반 자체에 대해 제가 문제삼은 건 아니구요(사마천님의 입장은 확실한 '프래그머티즘' 같습니다), 사회적 발언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신 분들이(연구서의 출간도 극도로 자제하는 경우가 많지요) 갑자기 '집단'으로 애국심을 발휘하는 타이밍이 절묘하다는 것이지요. 덧붙여서, 모든 혁명은 실패한 혁명을 밑거름으로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실패했지만 그 흔적은 남으니까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철학이 새로운 사유의 물꼬를 틀듯이...

biosculp 2006-09-2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란 무엇인가 이책은 일본어로 번역되었고요. 일본어 읽지를 못해서 사놓기만 했습니다. 해외활동은 유엔등에 우리 문화사절단이 갈때 설명문을 쓰거나 취화선같은 영화 자막을 맡는 등의 활동은 하나의 한국적인 응축을 담은 문화활동을 봐야하지 않을까요.

비로그인 2006-11-0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은 스스로 서양철학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별 볼일 없는 것, 하찮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걸로 봐서 그의 사상을 형성함에 있어 서양철학이 일종의 안티테제의 역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거기까진 좋은데;) 왜 하필 그에 대한 신테제가 김용옥만에 어떤 것이 아니라 다만 동양철학으로서의 '회귀'인지,참 난감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물론 님이 쓰신 것처럼 편협한 전문가주의를 벗고 대중과 호흡하려는 그의 자세는 맘에들지만 말입니다.
 

재작년 모스크바 통신에 러시아 단편들을 두어 편 번역해서 올려놓은 바 있었는데, 생각난 김에 페트루셉스카야의 <복수>를 이미지 버전으로 옮겨놓는다. 국내에도 일부 단편과 드라마가 번역돼 있는 작가 류드밀라 스테파노브나 페트루솁스카야(뻬뜨루셰프스까야)는 물론 이름에서 알 수 있지만, 여성작가이다. 1938년생이고, 모스크바대학의 언론학부를 졸업했다. 1972년부터 잡지에 단편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극작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주된 관심은 인간관계에서의 소외 현상과 비정함, 그리고 잔혹성에 있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데, 1960-90년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 10명 안에 꼽힌다(아동문학작가이기도 하다).

출간된 그녀의 작품집들을 여러 권 구경할 수 있었는데, 아직 잘 정돈된 전집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만, 3쪽짜리 단편 하나 읽을 거 가지고 크게 떠들 일도 아니어서(나는 이 작가의 이름은 들어봤었지만, 직접 작품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작가소개는 이 정도에 그치도록 한다. 참고로, 문단은 원작과 일치하지 않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번역에는 작품에 대한 나의 ‘읽기’가 얼마간 반영돼 있다(모든 번역은 원작을 얼마간 ‘구부리기’ 마련인데, ‘왜곡’과는 구별되는 이 ‘구부리기’는 번역의 불가피한 조건이기도 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엔 괄호 안에 *표시를 하고 역주를 달았다.

한 여자가 혼자서 애를 키우는 이웃여자를 증오했다. 아이가 자라서 점점 온 집안을 뛰어다닐 때쯤 되자, 이 여자는 전혀 고의가 아닌 듯이, 복도 바닥에 끓는 물이 담긴 양동이나 가성소다(*양잿물)가 든 물통을 놓기도 하고, 복도 바로 앞에 바늘곽을 떨어뜨려놓기도 했다. 불쌍한 아이 엄마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딸아이가 아직 잘 걷지 못하는 데다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복도로는 나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가 방에서 널찍한 복도로 저 혼자 나갈 수 있는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엄마는 이웃여자에게 아이가 다닐 만한 길목에 물통이 놓여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혹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라에치카, 당신은 또 바늘곽을 흘렸더군요.” 그러면 이웃여자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정신머리가 없어서 그랬노라고 푸념했다.

한때 그들은 절친한 친구였다. 그럴 만한 것이 그들은 방 두 개짜리 집에 같이 사는 독신여성들이었다(*방 두 개는 각자가 쓰고, 복도나 화장실 등을 같이 쓰는 러시아식 가옥 형태이다. ‘집’이라고 옮겼는데, 대개는 아파트나 공동주택이다). 그들에겐 많은 것들이 공동의 것이었으며, 심지어 손님들도 공동의 손님이었다(*한쪽에 손님이 오더라도 같이 먹고 놀았다는 얘기다). 생일날이면 그들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지냈는데, 그러던 어느날 지나가 어느새 잔뜩 부른 배를 하고 다니게 되자, 라야는 그녀를 거의 미칠 지경으로 증오하기 시작했다(*‘지나’와 ‘라야’가 두 여자의 이름이다. ‘지나이다’ ‘지노치카’ 등이 ‘지나’의 별칭이며, ‘라이사’ ‘라샤’, ‘라에치카’ 등이 ‘라야’의 별칭이다).

그녀는 순전히 증오 때문에 병이 나기 시작했으며, 집에 늦게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에겐 벽 너머 지나의 방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내내 들려오는 듯했고, 지나가 진짜로 혼자 있는 시간에도 말소리와 노크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나는 반대로, 라야에게 전보다 더 애착을 느꼈다. 심지어 하루는 그녀에게 말하길, 자신에게 큰언니 같은 좋은 이웃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 때에라도 결코 자신을 내버리지 않을 큰언니.

라야는 실제로 지나가 출산준비물을 바느질하는 걸 도와주었고, 때가 되자 그녀를 조산원에 데려다 주었지만, 단 한번도 산모와 아이를 보러 가지 않았다(*직역하면 “갈 수가 없었다”이다). 때문에, 지나는 하루 더 조산원에서 아무런 출산준비물 없이 앉아 있다가 결국, 반환 약속을 하고 누더기 같은 관용 모포에다가 아이를 감싸서 데리고 왔다(*라야가 출산준비물을 갖다 주지 않은 것이다. ‘관용 모포’란 표현에서 지나가 사설 조산원이 아닌 국영/관영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은 걸 알 수 있다.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카테리나가 딸을 낳은 조산원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라야는 아파서 못 가봤다고 변명을 했고, 내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단 한번도 지나를 위해서 상점에 가지 않았고, 그녀가 물건을 사는 걸 도와주지 않았다. 그저, 어깨에 찜질 같은 걸 하면서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지나가 아이를 손으로 안고 목욕탕에 갔다가, 부엌에 갔다가,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와서 한번 보란 듯이 내내 방문을 열어놓고 있었어도 아이를 단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지나는 미리,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로 일거리를 바꾸었고, 재봉틀에 익숙해졌다. 그녀에겐 친척이 없었기 때문이고, 이웃 사촌이란 말은 그저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했다. 사실상 그녀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으며, 혼자서 모든 걸 해나가고, 혼자서 짐을 날라야 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지나는 아이를 재운 다음에 일거리를 날라왔고, 혼자서 노임을 받으러 갔다. 하지만, 딸아이가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고 좀더 크게 되자 일이 번거로워지기 시작했다. 지나가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하게 된 것이다. 한편, 라야는 자신의 어깨 관절에만 고집스레 매달렸고, 심지어는 그 때문에 병원에 입원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잠깐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하는 게 지나로선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라야는 아이를 죽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점점 자주, 버둥대는 아이를 양손에 안고서 복도를 다니면서(*복도에 위험한 것들이 있어서), 지나는 부엌 바닥에 물컵인 듯한 게 놓여 있는 걸 보거나(*가성소다가 담겨있을 듯), 탁자에 뜨거운 찻주전자가 손잡이를 늘어뜨린 채 놓여 있는 걸 보게 되었다. 하지만, 지나에겐 아무런 의심도 들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는 “엄마라고 말해봐!”라고 말하면서 딸아이에게 항상 즐겁게 종알댔다. 하지만, 상점이나 직장에 나갈 때는 아이가 못나오게 가둬두고 다녔고, 이건 좋게 넘어가지지 않았다. 라야는 극도로 화가 났다.

지나가 무슨 일인가로 밖에 나갔을 때, 방안에 있던 아이가 잠이 깨서는, 아마도 침대에서 떨어진 듯했다. 문쪽까지 기어와서는 울어댔다. 라야는 아이가 잘 걷지 못하고, 침대에서 떨어졌으며, 빽빽 울어대는 걸로 봐서 아마도 크게 다쳤고, 바로 문 앞에 누워있는 걸로 짐작했다. 라야는 더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목욕탕에서 거기 보관하고 있던 가성소다 병을 가져와서 양동이에다 따르고는 복도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용액을 문 밑쪽으로 끼얹었다. 아이가 누워있는 쪽으로. 울음소리는 자지러지는 소리로 바뀌었다. 라야는 복도바닥을 닦아냈다. 양동이와 수세미와 장갑까지 모두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고는 옷을 입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가 왔다간 후에 그녀는 영화관에 갔다가 상점을 들러서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지나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고, 조용했다. 라야는 텔레비전을 한동안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나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라야는 도끼를 들고와서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먼지투성이인 방안에서 침대 옆 바닥에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과 문쪽에 있는 더 큰 핏자국을 보았다. 가성소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라야는 이웃여자의 방바닥을 닦아내고, 정돈한 다음에 흥분 어린 기대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침내 일주일쯤이 지나자 지나가 돌아왔다. 그녀는 딸의 장례를 치렀고, 주야로 일하는 직장을 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의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움푹 들어간 눈과 누렇게 뜨고 늘어진 피부가 그녀를 대신해서 모든 걸 말해주었다. 라야는 지나를 위로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집안에서의 삶은 이제 숨이 멎은 듯 고요했다. 라야는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았고, 지나는 주야로 하루를 일하면 온종일 잠을 잤다. 그녀는 마치 정신이 나간 듯이, 사방에다가 딸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라야의 병은 더 심해져서, 그녀는 팔을 들어올릴 수도, 걸어다닐 수도 없었고, 심지어 관절주사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의사들은 관절염이라고 진단했다. 사태는 더 나빠져서, 라야는 자신의 끼니를 챙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심지어 차를 끓일 수도 없었다(*러시아에서 차를 끓이기 위해서는 가스렌지를 켜고 성냥 등으로 불을 붙여야 한다. 우리의 갈비집에서처럼. 라야에게 그런 불을 붙일 힘도 없어졌다는 얘기다). 지나가 집에 있을 때는 그녀가 손수 라야에게 음식을 먹여주었다. 하지만, 지나가 집에 들르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고, 일이 힘들다는 핑계를 댔다. 어깨의 통증 때문에 라야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나가 무슨 병원 같은 곳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한다는 걸 알고서, 라야는 그녀에게 모르핀 같은 강한 진통제를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지나는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맡고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럼 이걸 더 많이 먹어야겠어. 나한테 30알만 세줘.>
<아니, 안돼.> 지나가 말했다. <내 손으로 죽게 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손을 움직일 수가 없잖아.> 라야가 따지듯이 말했다.
<넌 그렇게 값싸게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지나가 말했다.
그때 환자가 초인간적인 힘으로 병을 입에 갔다 대더니, 이빨로 마개를 빼내고, 약을 몽땅 입에다 털어넣었다. 라야는 아주 오랫동안 죽어갔다. 아침이 밝아오자, 지나가 말했다.

<이제 잘 들어둬. 난 너를 속였어. 우리 레노치카(*딸의 이름)는 죽지 않았어. 아주 잘 뛰놀고 있지. 그 아인 탁아소에 있어. 나는 거기서 간호보조사로 일하고. 그리고 네가 문밑으로 끼얹었던 건 가성소다가 아니라 일반 식용소다야. 내가 바꿔놓았었지. 바닥에 있던 피, 그건 레노치카가 침대에서 떨어졌을 때 난 코피야. 그러니까, 넌 아무런 잘못도 없어. 누구도 그것 때문에 너를 문책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나도 잘못이 없어. 우린 서로에게 빚이 없는 거야.>

그리고 그때 그녀는 죽은 이의 얼굴에서 천천히 행복한 미소가 번져 나오는 걸 보았다.

 

 

 

 

04. 06. 03/ 06. 09. 2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01-20 0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2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부지런도 하셔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파트 얘기를 꺼낸 김에('아파트값 거품빼기와 진보' 참조) 이 문제와 관련한 영화평(이란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를 옮겨온다. 레디앙에 게재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이 그것인데, 올 상반기에 개봉되었던 영화들 가운데 <짝패>, <비열한 거리>, <아파트>를 다루고 있다(나는 세 영화 모두 아직 보지 못했다). 오래전에 스크랩해놓았던 것인데, 이젠 창가에 두어도 무방하겠다.

 

 

 

 

레디앙(06. 07. 18) 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 

나는 올해 상반기에 본 영화 중 세 편의 영화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류승완의 <짝패>와 유하의 <비열한 거리>, 그리고 안병기의 <아파트>이다. 세 편 모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영화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편의 영화를 곧 잊었다. 당연하지! 

그런데 김소영이 <비열한 거리>에 관한 평을 쓰면서(씨네21, 제 560호, “호스티스에서 호스트로, <강적>과 <비열한 거리>가 몸에 의지하는 이유) <짝패>에 이어 이 영화를 ‘부동산 활극’이라고 불렀다. 그 순간 문득 두 편의 영화가 부동산에 집착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평을 읽으면서 그날 우연히도 <아파트>를 보게 되었다.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환기. 먼저 <짝패>. 서울 형사 태수(정두홍)은 친구가 ‘칼에 맞아’ 죽었다는 말에 고향에 내려간다. 범인을 찾던 끝에 부동산 개발을 둘러싸고 옛 친구인 필호(이범수)가 벌임 음모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수는 후배 석환(류승완)과 함께 쳐들어가 결투를 벌인다. 결말은 당신의 예상대로 끝난다.



그 다음 <비열한 거리>. 똘마니 조폭 두목 병두(조인성)은 스폰서를 잡기 위해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른다. 그에게는 철거 직전에 갈데없는 노모와 여동생이 있고, 자기만 바라보는 조폭 동생들이 있다. 병두는 스폰서‘께서’ 아파트 분양사업을 위해 검사 한 명이 문제라고 하자 그마저 해치운다. 그런데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옛 고등학교 동창 민호가 그를 찾아와 조폭 영화를 준비 중이라서 취재차 만나러 왔다고 말한다. 병두는 어느 날 민호에게 술김에 검사를 해치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민호는 그걸 영화로 찍고, 병두는 이제 민호를 없애지 않으면 문제가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엔딩은 나쁜 놈들만 살아남는다.

마지막으로 <아파트>. 디자이너인 세진(고소영)은 아파트에 혼자 산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9시 53분만 되면 아파트 전체의 불이 꺼지고 한 명이 죽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 다음 그 시간이 되면 아파트가 불이 꺼지고 한명씩 죽는다. 세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 비밀을 자기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는 (누구라도 이미 눈치 챈)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 세 편의 영화 중 어느 영화도 아파트, 혹은 부동산 문제를 다루려고 만든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그저 소재이거나 무대이거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이건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일종의 핑계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 세 편의 영화는 내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자기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가장 설득력 있는 무대는, 배경은, 소재는, 핑계는, 그들이 서로 만나서 의논한 적도 없는데 거의 동시에 부동산이라는 견해에 ‘엉겁결에’ 동의했다. 여기서 방점은 ‘거의 동시에’라는 말에 있다.

지난 봄 오세훈도, 강금실도,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서울의 약한 고리가 아파트라는 것을 알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년 내내 강남 아파트를 붙잡기 위해 악전고투하였지만 이제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우리가 아파트 주인인가, 아파트가 우리 주인인가
강남 아파트는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요지부동의 철통같은 자본주의의 요새, 부동산. 혹은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우리 모두의 주인 담론으로서의 아파트. 그런데 아파트는 진정 우리들의 주인인가? 사실 아파트는 사이비 주인이다. 그 진정한 주인은 물론 자본이다.

그러나 내가 우석훈의 글을 읽고 깨달은 점은 아파트가 자본의 대상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주인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우리 시대의) 집행자라는 사실이다. 그때 이 아파트는 사이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으스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사이비 주인을 그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그림자는 자본의 중복이지만, 일단 현실의 순환 안에 들어오면 아파트와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관계로 전도되면서 아파트 전체의 자본의 구조 관계를 은폐하기 시작한다.

그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거기 초대받은 손님들에 불과해진다. 법칙은 간단하지만 잔인하다. 가난한 손님들은 쫓겨나고, 부자 손님들은 초대받는다. 그때 이 세 편의 영화는 초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우선 이 세 편의 공통점. 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신기하게 그들 중 누구도 아파트를 결국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파트를 둘러싼 현실 속의 싸움의 목표는 간단하다. 그걸 소유하는 것이다. 이걸 둘러싸고 전세금과 재산세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 한다
영화에서도 싸움이 반복된다. 친구까지 죽여가면서 필호는 고향의 개발 사업에 끼어들려고 한다.(<짝패>) 병두는 철거민이 되어 떠도는 가족에게 근사한 아파트 안겨주고 멋진 연애의 꿈을 꾸지만 결국 그가 찔렀던 수많은 희생자들처럼 그도 칼에 찔려 죽는다.(<비열한 거리>) 그 방에 가서 그 소녀를 구하려고 하지만 세진은 결국 그 아파트에서 그녀가 본 수 많은 희생자들처럼 뛰어내려 죽는다.(<아파트>)

영화 속의 누구도 그걸 끝내 소유하지 못한다. 이 세 편의 서로 다른 영화에서 아파트를 둘러싼 갈등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집이 없는 자(homeless)’로서의 자리에 갈 때에만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은 같은 자리에 도착할 때에야 끝난다. 그때 이 자리는 아파트가 집(house)일 수는 있지만 집(home)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다음 차이점. 그런데 이게 남자들이 주인공인 장르로 들어오면 (조폭들의) 액션 활극이 되고(<짝패>와 <비열한 거리>), 여자들이 주인공인 장르로 들어오면 공포영화가 된다. (<아파트>) 장르는 현실의 질서를 이야기의 컨벤션으로 바꿔치는 것이다.



“집을 소유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이걸 단순히 남자들의 폭력과 여자들의 비명이라는 식으로 단순화시키면 안 된다. 그건 영화가 현실을 마치 거울처럼 복제한다고 성급하게 착각하는 것이다. 반영은 그렇게 단순하게 옮겨오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문화가 지니고 있는 메타-예언이라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 세 편의 영화의 공통점을 말하면서 내가 놓친 것은 이 세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건 아니건) 집을 소유하려는 이들은 결국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자신이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고, 이미 죽은 여자는 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승인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왜 부동산은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운명의 순환에 넣었을 때만 이야기로서 성립되는 것일까? 생각해야 할 점. 그 순환이 한 번은 원인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고, 다른 한 번은 죽음이라는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향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된다. 그런데 그렇게 읽으면 영화 안에 머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파트를 중심에 놓은 다음 이야기를 거꾸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때 아파트를 둘러싼 폭력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죽지 않으면 이 폭력이 끝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미 죽은 사람이 자기의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악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들어가려는 자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 그러니까 그 둘은 사실상 하나의 순환이다.



아파트, 들어가려는 자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들의 싸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폭력이고, 나가지 않으려는 것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이것이 반복이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 둘은 하나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악순환이다. (내 생각에) 비밀은 여기에 있다.

아파트는 존재론적인 일관성을 상실했을 때에만 비로소 순환으로서 성립된다. 들어오려는 것과 나가는 것 사이의 불일치. 폭력과 공포. 폭력이 끝날 때 공포가 시작되고, 공포를 떨칠 때 폭력이 시작된다. 그때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환상을 끝내기만 하면, 욕망을 멈추기만 하면, 아파트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건 (이미 아파트에 안전하게 살고계신 교수님들의) 기만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부지불식간에 진실을 이야기한다. 환상을 멈출 때에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릴 때, 환상을 끝낼 수 있을 때, 욕망을 멈추려면, 더 이상 주거의 필요성이 사라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건 물론 내가 죽는 것이다. 그때 폐기되는 것은 아파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가공할만한 집값 앞에서 날아가 버리는 우리들의 바람
말하자면 산다는 문제. 내가 발을 뻗고 잠들 수 있는 작은 방. 내가 힘겹게 모은 책과 음반, DVD들을 쌓아놓을 수 있는 집. 그건 내가 소망하는 유일한 바람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사실상 저 가공할만한 집값 앞에서 그저 바람결에 간단하게 날아가 버릴 주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집을 가진 자들에게 증오심을 매일 키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작은 집에서 매년 전세 값에 전전긍긍하면서 그저 쫓겨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므로 나는 매년 두려움에 하여튼 버티고 있다. 폭력적인 전복에의 유혹과 공포에 차서 일 년에 한 번씩 내게 찾아오는 계약일. 그 사이의 줄타기. 우리 일부의 삶. 그런데 너무 많은 일부.

덧붙여진 약간의 잡담. 나는 얼마 전 강남의 유명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들이 그렇듯이 들으러 오는 수강생들은 그 동네 아줌마, 혹은 소녀들이다.(수강생 중에 단 한 명의 남자도 없었다) 휴식시간에 그냥 무심코 여기 주민들께서는 자녀들의 학군 문제 때문에 이 지역을 고집한다고 신문에 실려 있는데 정말 자녀문제인가요, 라고 묻자 앉아계신 아줌마들이 모두 웃었다. (정말 모두 웃었다. 진짜 웃기는 농담을 들었을 때처럼 격의 없이 웃었다)

다 유학 갔는데 학군이 뭐 중요하겠어요?
그러더니 한 아줌마가 대답했다. “이 동네 애들은 다 유학 갔는데 학군이 무슨 문제겠어요, 저희는 이 동네에 무슨 학교가 있는 지도 잘 몰라요. 그냥 아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 살잖아요.” 물론 이 대답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귀에 남는다. “아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 살잖아요.” 이 대답은 어느 동네에 대입해도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 함께 살면서 서로 잘 알고 있는 모두는 누구일까? 도대체 그들이 누구 길래 그 모두가 힘을 합치면 정말 대통령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일까? 말하자면 정치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제의 승리.

06. 09. 21.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6-09-21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공감이 가서 섬뜩합니다.ㅡ.ㅜ

이리스 2006-09-2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다른 지역은 서로 잘 아나요? ㅎㅎ 여튼 끼리끼리 비슷한 데에 사는 건 맞습니다. 결혼 앞두고 청첩장 돌릴테니 댓글에 주소 달아줘요.. 라고 누가 글을 올렸는데 많은 댓글 주소가 간단히 정리되더군요. 압구정동, 청담동, 논현동, 양재동. 아, 분당도 한둘 있었던듯. 신기하게 일산도 없고 안국동, 가회동도 없더이다.

사마천 2006-09-2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수의 부동산 거품에 대한 책과 박태견의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문제점 관련 책도 꼭 읽어볼만합니다.

로쟈 2006-09-21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자연스러운 일상도 꼼꼼히 들여다보면 섬뜩하지요...
낡은구두님/ 유유상종인 건 당연하지만 역지사지에 기반한 상종이어야겠어요...
사마천님/ 유용한 정보 감사합니다. 책들은 바로 띄워놓았습니다...

클래식 2021-08-0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글이 재밌어서 혹시 제가 다른 글에서도 내용을 인용해도 될런지요?ㅎㅎ

로쟈 2021-08-07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스크랩해놓은 거에요. 제가쓴게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