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에 대한 연구 붐이 국내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소위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를 짚어보고 있는 학술동향 기사를 교수신문에서 옮겨온다. 개인적으로 아렌트는 지젝과 함께 지난 2002년인가부터 읽고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철학자이다. 그간에 리뷰와 페이퍼들을 꽤 쓰기도 했는데, 한동안은 적요했다. '르네상스'라니까 관심을 되살려볼까도 생각중이다(어차피 갖고 있는 자료만 해도 차고 넘치는 탓에. 한데,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올해 안으로 새롭게 나오거나 개정판이 나올 번역서들이 꽤 된다는 사실이다. 지출을 고려하면 반가운 소식도 아니지만 아무려나 아렌트 연구자들이 가장 바지런하다는 인상은 받게 된다.

교수신문(06. 10. 30)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주요 내용들

아렌트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성찰하는 학술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혁명과 폭력의 세기 한 가운데 살다가 타계한지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아렌트는 왜 학계의 ‘우상’이 되고 있는가. 과거의 사상을 현재에 재현시키는 요인은 아렌트의 학문세계에 내재돼 있는가, 아니면 외재하는가. 아렌트 연구자든 애호자든 이런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최근 아렌트 연구는 정치학과 철학 영역에 머물지 않고 문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신학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렌트의 저작들은 출판 당시에도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듯이, 최근의 아렌트 연구 역시 복잡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외형적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을 ‘타락(왜곡)’과 ‘순수’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전제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는 전체주의의 타락한 정치를 극복하고 순수한(또는 진정한) 정치를 모색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의도가 연구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에 따라 최근 연구의 특징적 양상을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아렌트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분야는 단연 (정치)철학이다. 전체주의의 악을 규명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집착은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된다. 9·11테러 이후 이데올로기 정치와 테러를 연결시키려는 논문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는 것. 아렌트 전기작가인 영 브륄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현재의 세계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는 요소로서 이데올로기를 들고 있으며, 나치의 ‘자연’이데올로기와 스탈린주의의 ‘역사’이데올로기에 이어 오늘날 도덕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도덕’이데올로기의 충돌을 강조하고 있다(*영-브뢸의 책은 아렌트에 관한 가장 자세한 전기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악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정치행위와 세계사랑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랑을 정치학적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순수한 정치의 근거로 삼고자 한 아렌트의 열망은 신 치바의 논문 ‘사랑과 정치적인 것: 사랑, 우정, 시민권’에 의해 명료하게 해석되고 있다. 아울러, 시작능력을 말살한 전체주의 악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주목해 아렌트의 인권사상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국제정치적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코소보 사태 등을 계기로 아렌트의 인권사상을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들도 다수 있다(*일반적인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캠브리지 컴패니언>(2000)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편자인 다나 빌라는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의 저자이다).

문학예술 분야에서 아렌트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 분야에선 특히 이분법적 구도가 뚜렷하다. 아렌트와 오든의 사상을 조명한 수잔나 영 고트리브의 ‘고통의 영역’은 두 사람의 사상에 나타난 메시아니즘을 부각시켰다. 두 사람은 대재앙을 공동으로 경험했으며 새로운 현상, 즉 전례없는 뿌리상실감을 경험했다. 고트리브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과 고든의 ‘고뇌의 시대’가 메시아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아렌트는 새로운 시작으로서 행위를 역설한 ‘인간의 조건’에서, 오든은 그의 시 ‘깐조네’에서 의지에 내재된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메시아니즘은 정치적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적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렌트 연구에 있어서 정치(철학)과 문학을 연계시킨 탁월한 연구다.

아렌트는 정치적 삶의 우연성과 특이성을 강조하기에 구조적 인과론에 집착하는 학문인  사회학과 심리학의 특정 연구경향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전체주의를 연구한 피터 베어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지적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즉 전례없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전체주의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아렌트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빌스키의 연구는 괄목할만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행태를 심리학적으로 탁월하게 분석해냈다. 빌스키는 ‘아이히만 재판의 다른 목소리’라는 논문에서 정치적 악에 대한 재판과 관련된 논쟁을 심리학적으로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교육학에서도 아렌트를 응용해 적절히 수용하고 있는데, 특히 아렌트 사상에서 ‘탄생’의 근본성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적절한 수용이라 할 수 있다(*'탄생'은 'natality'의 역어인 듯하다). 전체주의의 악이 시작능력의 말살이란 점에서 새로운 시작, 탄생은 죽음에 대한 안티테제다. 따라서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기초로서 교육은 정치적 악과 투쟁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다. 레빈슨은 ‘아렌트 교육사상에서 탄생의 역설’을 제시한다. 교육의 보존기능과 재생기능은 상반되면서도 상호 연계돼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신학분야 역서 선악문제와 관련해 아렌트를 통해 관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버밍햄은 ‘망각의 소용돌이: 근본적 악의 평범성’이란 주제아래 전체주의의 ‘근본적 악’에 내재된 악의 평범성을 지적하고 있다. 매튜 역시 ‘두 가지 판단에 관한 이야기’라는 논문에서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신화를 벗겨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아렌트의 선악이론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역사학 분야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아렌트는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렌트의 저작들은 역사적 지식을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야기하기’로서 역사와 ‘시대의 비판적 중재자’로서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라케르의 논문 ‘아렌트 우상: 정치평론가로서 한나 아렌트’에서는 정치평론가나 정치철학자보다 시대의 탁월한 비평가로서 아렌트의 위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각 학문분야의 특징적 양상을 고려하면, 선과 악, 타락과 순수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대한 전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 그 어느 측면만을 분석할 때 장점을 고려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에서 내적 긴장구조를 상정하고 있는 아렌트의 의도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아렌트의 경우, 타락과 순수, 선과 악을 구분짓는 기준은 시작 능력의 유지와 상실이다. 최근 아렌트 연구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면, 학문 영역에 관계없이 ‘새로운 시작’ 또는 ‘탄생’이란 범주를 소개함으로써 아렌트의 ‘출생의 철학’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렌트 연구가 현대인의 삶에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하겠지만, 아렌트 르네상스의 한 요인으로 정서적 또는 낭만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여성 정치철학자’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아렌트 정치철학을 서예의 필치로 특징화하자면, 섬세한 선과 굵은 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한 측면만을 집중할 때, 우리는 아렌트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이해와 곡해의 양면성이 존재하지만, 최근 경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의무로 남게 된다.(홍원표 / 한국외대·정치철학)

국내 아렌트 연구 붐 - 번역서 속속 출간 … 불교학으로까지 확대

아렌트 탄생 1백주년을 맞기 전부터 아렌트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상당했다. 연구자들의 숫자는 몇 안되지만 아렌트 주요 저작들은 속속 번역돼 나왔다. 김선욱 숭실대, 홍원표 한국외대, 서유경 경희사이버대 교수 등 정치철학자들을 주요 멤버로 해서 얼마 전에는 ‘한나아렌트연구회’가 본격 출범되기도 했다. 이들이 주축이 되고 정치사상학회와 사회와철학연구회가 뜻을 모아 지난 14일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이라는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탄생일인 10월 14일에 맞춰 김선욱 교수가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을 번역·출간했으며, ‘전체주의의 기원’(이진우 옮김), ‘정신의 삶 2’(김석수 옮김), ‘정신의 삶 3: 칸트정치철학강의’ 등도 곧 번역돼 나온다. 또 ‘공화국의 의지’(김선욱 옮김)는 재번역판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권영빈 옮김)은 개정판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하지만 아렌트 사상은 이들만의 관심사는 아니며 이미 여러 곳으로 뻗쳐나가고 있다. 정치학에선 아렌트의 정치적 입헌주의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학 및 막스 베버와 비교해 고찰하는 등 연구가 활발하다. 페미니즘, 교육학, 나아가 불교연구자의 응용연구도 주목할만하다. 이은선 세종대 교수(세종대)는 아렌트의 ‘탄생성’과 왕양명의 ‘치량지’의 교육관을 비교해 연구물을 내놓았으며, 김인순 동국대 강사(정치철학)는 논쟁이 많은 아렌트 사상의 페미니즘적 측면을 고찰했다. 특기할만한 건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고옥 스님이 발표한 ‘탈속과 귀환의 중도에서 만난 아렌트’로서 아렌트 사상의 확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이은혜 기자)

06. 10. 31.

 

 

 

 

P.S.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폭력의 세기>까지 포함하여 현재까지 번역/소개된 아렌트의 저작은 8권 가량이며 이 중 5권이 2002년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거기에 조만간 네댓 권이 보태진다고 하니까 '아렌트 르네상스'란 말이 빈말은 아닌 셈이다...

P.S.2. 국내 아렌트 학자 중 한 사람인 서유경 교수의 '아렌트 이야기'를 보충자료로 옮겨놓는다. 아렌트 입문에 값할 만큼 자세하고 친절하며 우리 현실과의 접점에 대해서도 짚어주고 있는 글이다. 서교수는 아렌트의 <과거와 미래 사이>와 함께 다나 빌라의 <아렌트와 하이데거>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프레시안(06. 10. 23) 2006년 가을, 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

1996년 가을이었다. 당시 박사과정에 있던 나는 '현대정치철학'이라는 강의을 듣고 있었다. 푸코, 하버마스, 가다머, 롤즈, 료타르, 데리다, 아렌트의 저서들을 두루 읽게 된 것도 그때였다. 맨 처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란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는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직감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다수성(plurality)', 즉 '세계 속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조건'을 인간의 실존적 조건(굴레)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벼운 마음으로 <인간의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한 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바다 한 가운데 턱 버티고 있는 홉스의 웅장한 리바이어던의 흉상, 바로 그것이 내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다고 느꼈다.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헤겔, 맑스, 후설, 하이데거,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구 철학 2500년 역사의 광활한 대지 위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내게 놀라움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지적 충격 속에서 나는 아렌트 사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후, 민선 2기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 접어들었다. 문민정부는 과거 정권과 달리 시민단체 인사들을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상에 부응하기 위해 정치학자들은 그때까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시민'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주목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아렌트는 소수의 대표자가 국정을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고대 폴리스에서 행해졌던 방식의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치를 복원하자고 제안하는 정치이론가였다. 아렌트가 주창하는 시민 주도의 참여민주주의 패러다임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90년대 중반, 당시까지만 해도 하버마스는 잘 알아도 아렌트는 모른다는 것이 학계와 일반의 반응이었다. 물론 하버마스가 이미 70년대 중반에 자신의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원출처가 아렌트의 정치행위 모델이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무튼 그 때 나는 아렌트를 통해 우리 사회 내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시민이 주도하는 정치지형의 이론적 타당성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었고, 3년 뒤 그것을 아렌트의 정치적 실존주의 맥락에서 '정치행위와 인간실존의 역학'으로 설명하는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하지만 지난 10년을 거치며 우리 학계에 나처럼 전문적으로 아렌트를 연구하는 '아렌티안(Arendtian)'들의 수가 제법 늘어났다. 그 덕분에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 대부분이 번역 출간되었고 관련 논문들도 꾸준히 발표돼 왔다. 이런 연구 성과의 축적에 힘입어서인지, 요즘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근래 크고 작은 신문과 잡지의 칼럼이나 기사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경우가 부쩍 잦아진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예로 지난 14일 경희대에서 "한나 아렌트와 Amor Mundi(세계사랑)"라는 제하에 열린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도 예상 밖으로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이런 광경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됐던 '인문학의 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늘 왜 우리 한국인들이 아렌트 사상에 그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한나 아렌트의 본명은 Johannah Arendt로 1906년 10월 14일 프러시아 영토인 하노버의 유태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성장했는데 그곳은 칸트가 태어나서 평생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아렌트는 16세에 이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정도로 철학적 소양이 뛰어난 매우 명석하고 지적인 소녀였다. 그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후 마르부르크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된 것은 당시 철학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하이데거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그곳에서 아렌트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듬해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동의 하에 프라이부르크로 떠난다. 그곳에서 후설에게 반년에 걸쳐 현상학을 배운 다음, 다시 하이데거의 친구인 실존철학자 야스퍼스가 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그의 지도 하에 1929년 <사랑 개념과 성 어거스틴>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동급생이자 유태인 저널리스트인 귄터 슈테른과 결혼하여 베를린의 한 신문사에서 서평 담당기자로 일한다.
  
그러던 중 1933년 히틀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유태인 핍박이 시작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한 유태계 기관에서 일하는 한편, 발터 벤야민, 레이몽 아롱 등과 친교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던 슈테른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역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독일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한다. 그들은 1970년 블뤼허가 사망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서로에게 지적 동반자이자 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이어 비시정부가 더 이상 자국 내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자 미국행을 결심한다. 1941년 미국에 도착한 아렌트는 뉴욕에 정착한 뒤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시민으로 살았다. 그는 유태계 잡지사 편집장을 거쳐, 시카고, 버클리, 프린스턴, 뉴스쿨 등의 대학의 정치학과와 철학과에서 강의했다. 생전에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고, 특히 기성의 틀을 깨는 급진적인 주장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아렌트는 인류에 대한 지적 공헌을 인정받아 1959년 레싱상, 1967년 프로이트상, 1975년 소니그상을 수상했다. 또한 1972년에서 1974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앙리 베르그송, 가브리엘 마르셀, 레이몽 아롱과 같은 세기의 지성들이 초빙되었던 철학계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아버딘 대학의 기포드(Gifford) 강연의 최초의 여성 연사로, 그것도 두 번 연속해서 초빙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이처럼 확고한 사회적 지위와 학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아렌트는 늘 '국외자'였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서구 학계에 불어 닥친 아렌트 재해석 열풍과 더불어 화려한 부활을 하기까지는 그랬다.
  
이른바 '아렌트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이런 아렌트 사상의 부활 현상에 기폭제가 된 것은 동유럽 시민사회의 태동이었다. 이들 나라들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사이 구소련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한 후 각기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공동체 운영 실험에 돌입했다. 오랜 기간 유지했던 사회주의 국가통제 체제가 하루아침에 시민들이 세운 민선체제로 바뀌게 됨에 따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요구됐고, 그런 그들에게 정치이론가로서 한나 아렌트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아렌트 사상이 부활하게 된 이유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유행한 탈근대적 사회이론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 때문이었다.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한계 말이다. 예컨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해체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만일 해체가 기존 체제의 비판을 넘어서는 게 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무정란(無精卵)에 불과한 이론이 될 것이다.
  
반면 아렌트의 정치행위 이론과 판단행위 이론은 시민들 각자의 행위와 정치적 결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게 보이는 탈근대 사회이론과 차별화되었다. 이 점이 바로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1972년 한 학회에서 "당신의 정체가 뭐요?"라고 현실주의 정치학자 한스 모겐소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아렌트는 "좌익은 나를 보수주의자라고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때때로 나를 좌익이라고 하거나 이단자라고 하기도 하는 것 같던데, 그것 말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르겠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요즘 학자들은 아렌트를 '반정초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서구 철학전통 속에 나타난 어느 학파로도 분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아렌트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명해야 한다면 그는 첫번째 '아렌트주의자'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렌트 사상의 대가 다나 빌라는 "아렌트의 사유 방주(方舟)는 정치악의 문제를 규명하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로 시작하여 우리가 이런 현상들을 다룰 때 의존하는 정신기능들의 탐색으로 끝나고 있다"고 논평한다. 사실 철학도였던 아렌트는 1930년대 유럽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현실정치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정치이론을 통해 진정한 정치의 복원과 공적 행복을 주창하였고, 70년 중반 사유(思惟)의 정치적 의미를 밝힌 정치철학자로서 삶을 마치게 된다.
  
무명의 독일-유태계 망명 지식인 아렌트가 미국 학계에서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그의 첫 번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의 출간 이후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 군국주의라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때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책이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아렌트는 냉전의 반공 이데올로기 기류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전체주의 분석을 단순한 전체주의 체제 비판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아렌트는 나치와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의 무고한 생명 대학살을 서구 역사 속에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반유태주의나 민족주의의 잔재로 간단히 치부할 수만은 없으며, 그러한 체제들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통치형태"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전체주의 체제는 체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하나의 집체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시민 개개인의 개별성을 그 아래 복속시킨다. 그들은 개별 시민들 사이의 모든 대화 장치들을 분쇄함으로써 정권의 공식 대화채널만이 작동하도록 하며, 이에 저항하는 자들은 테러로 응징하는 이중의 통치방식으로 체제를 운영한다. 결국 시민들은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체제 순응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연장선 상에서 아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사회 역시 이런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우선 대중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 대다수는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사적인 영역에서 상품의 소비와 향락산업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또한 국가의 근대화된 행정체계는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규율하는, 미셸 푸코의 표현인 '파놉티콘'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국가의 시민은 전체주의 사회 내에서 못지않게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행위론을 정초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렌트는 여기서 인간은 정치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본래 '정치적 존재(zoon politikon)', 즉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찾아낸다. 폴리스에서 자유인, 즉 시민들은 정치의 장에서 동료 시민들과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대소사를 함께 심의하고 결정했다. 요컨대 그들은 이러한 '정치행위'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삶과 별개로 시민으로서의 공적인 행복을 향유했던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고대 폴리스라는 직접 민주주의의 정치무대를 배경에 깔고 자신의 독특한 정치행위 개념을 제시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정치행위는 유일하게 사물 또는 물질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언어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이다. 이 정의에서 방점은 '언어'와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에 주어져 있다. 바꿔 말해서 아렌트의 정치행위는 사적인 삶의 관심에서 해방되어 공적인 장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 행위를 뜻한다. 나중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아렌트의 정치행위 개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상적 담론상황"과 의사소통적 행위론,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 이론을 구축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인간의 조건> 이후 정치이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아렌트에게 또 한 번의 학문적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는 1961년 <뉴요커>의 특파원 신분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되며, 1963년 자신이 재판정에서 본 것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자신이 만난 아이히만이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 악마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당시 유태인 사회 내에서 하나의 필화사건으로 전화한다. 결국 아렌트는 유태인 사회로부터 "유태민족에 대한 애정을 결핍한 자"로서 파문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아이히만의 경우를 통해 사유의 결여가 곧 악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견고한 확신을 얻게 된다.
  
아렌트의 유작 <정신의 삶>은 바로 이 때 얻은 확신을 논증하는 정치철학적 저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의 사유행위와 정치행위의 연계성을 밝힐 목적에서 우리의 정신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현상학적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이 사유작용(thinking), 의지작용(willing), 판단작용(judging)의 세 가지 기능을 분리하여 수행하는 동시에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사유작용은 의지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사양을 제공해주고, 판단작용은 의지작용의 과정에서 선택된 것의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개별 행위자가 주관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렌트의 논점은 개인의 사유행위는 보편타당한 정치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그는 이런 설명 방식을 통해 '사유의 정치적 중요성'을 적시하는 한편, 서구 지성사에서 소크라테스 이래로 분리되었던 정치와 철학이 결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의 사상은 시기별로 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이는 아렌트의 학문여정이 철학, 정치학, 정치철학으로 세 번의 전환을 하면서, 주장의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점에 기인한다. 1996년 당시 내가 처음 아렌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정치학적 주장들에 주목했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그의 정치행위 개념에 담긴 시민정치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혁명 이후 지난 20년간 우리 시민사회는 매우 강력한 정치력을 획득했다. 우리 시민들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무력한 대중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시민 정치는 때로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번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 사이에 각자 자기주장과 입장만 내세우는 이기주의적 행태도 빠르게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이제 아렌트의 '정치학' 이론보다는 '정치철학'적 지혜에 주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의 무책임한 범죄행위는 그의 사유행위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적 평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늘 아렌트는 우리에게 행동하기에 앞서 사유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 속에서 생각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서유경/경희사이버대 NGO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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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6-10-31 10:1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열린 생각과 마음을 그냥 늘 지나기가 미안해서 메모 남깁니다. 그런데 이 많은 책을 언제 어떻게 다 읽는지 비결이라도 있으면 알려주실랍니까. 책을 이렇게 읽다보면 머릿속엔 활자들만 살진 않나요.^^

로쟈 2006-10-31 10:18   좋아요 0 | URL
다 읽지 않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소설책들도 아니구요).^^ 다만, 저는 마치 '지도제작자'처럼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를 가늠해놓을 따름입니다. 급하게 읽는 편도 아니어서 주로 우선적으로 손에 잡히는 책들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편입니다...

로쟈 2006-10-31 15:30   좋아요 0 | URL
빗발은 아니고, 바람만 좀 부는 거 같습니다.^^ 소설들 만큼은 재미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수습이 된 건가)...
 

TV에서 상상플러스가 나오는 걸 잠시 보다가 채널을 돌리니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세계적 석학'이란 말이 미리 나오는 자크 아탈리다(그에게서 내가 받는 인상은 딱 이어령 선생의 그것이다). 아마도 'TV, 책을 말하다'에서 아탈리와의 인터뷰를 특집으로 꾸민 모양인데, 손석춘 한겨레 기획위원이 패널로 나와서 거들고 있다. TV를 끄고 책상으로 와서 무슨 일로 온 건지 '아탈리'를 검색해본다. 얼마전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차 내한했다가 방송분을 녹화한 모양이다. "21세기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한다는 게 이번 포럼에서의 그의 메시지였던 모양이다(그럼, 지금까지는 이기주의자들이 지배해왔구만).

 

 

  

 

따져보니까 아탈리의 책을 내가 완독한 건 한권도 없는 듯하다. 한데, <합리적인 미치광이>, <21세기 사전>, <호모 노마드>를 구입했었고 부분적으로 읽었다(<인간적인 길>과 <마르크스 평전>은 읽어볼 요량으로 있다). '형제애'나 '노마드'에 대한 방점 같은 게 키워드로 떠오르지만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대해서는 아직 가늠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비슷한 처지라면 아래 기사가 요긴한 도움이 되겠다.

 

뷰스앤뉴스(06. 10. 20) 자크 아탈리 "21세기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총재를 지낸 세계적 석학인 자크 아탈리(63) 플래닛파이낸스 회장이 앞으로 세계경제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자크 아탈리(63)는 19일 OECD 사무총장 출신인 도널드 존스턴 국제리스크관리위원회(IRGC) 이사회 의장 사회로 수파차이 운크타드 총장과 함께 '창조 경제의 시대'를 주제로 가진 대담에서 선진국의 과도한 지적재산권 보호 정책을 질타했다.

그는 "지적재산권(IPR) 보호가 오히려 사람들의 창의력을 억제하고 전 세계적인 지식의 확산을 막고 있다"며 "앞으로 세계 경제에서 지적재산권은 보호받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아이디어나 지식은 희소성이 있는 게 아닌데 지적재산권이라는 인위적인 장치로 이를 희소한 것으로 만들었다"며 "지식은 전 세계적인 확산을 통해 성장을 촉진해야 하는데 지적재산권이 이를 막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의 수는 2백억개로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무료로 들을 수 있다"며 "음반산업이 CD 판매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더 이상 음악이 무료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도 번역소개된 저서 <호모 노마드> <마르크스 평전> 등을 통해 강조해온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현재 세계경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타주의"라며 "앞으로 이타주의적 새로운 엘리트집단이 출현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과거에는 희소성에 가치가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네트워크경제 시대에는 오케스트라에서 다른 연주자가 잘 해야 나의 연주도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이 정보는 많이 공유할수록 이익이며 이를 위해 지식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고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 타인의 성공이 나에게도 이익이 되는 이타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며 "좋은 자동차는 나 혼자 갖고 있는 게 좋지만 좋은 휴대전화는 나 혼자 갖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구체적 예를 들기도 했다. 그는 또 시야를 세계문제로 넓혀 "테러나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빈곤과 어려움이 나에게 이득이 아니라 해를 끼칠 것"이라고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향후 50년 간 장기적으로 세계화와 전쟁, 권력 이동과 같은 일련의 현상들을 겪고난 후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생길 것이며 이 '새로운 엘리트 집단'은 기본적으로 '이타주의자'들로 구성될 것"이라며 "나아가 반세기 전 자본주의가 미친 영향만큼 비정부기구(NGO) 인사들, 예술가들, 과학자들 특히 뇌 연구 과학자들이 미래 사회에서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그들은 이미 세계 총생산의 10%를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85년 처음 사용한 '유목주의'(노마디즘)에 대해 "당시와 달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은 유목성이 보편적 규범이 됐으며, 계속 이동하고 변화하는 유목성이 낳는 창의성은 오늘날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며 " 한국의 젊은이들은 사회가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자신의 꿈을 좇아야하며, 예술가, 과학자, 요리사, 광대 등 어떤 꿈이더라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로 프랑스 최고 지도자 양성소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고 경제학ㆍ정치학 2개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탈리는 <21세기의 승자>(1995) <21세기 사전>(1997년) <호모노마드-유목하는 인간>(2003) <인간적인 길>(2005) 등의 많은 저서를 펴냈고 그의 모든 책은 국내에서도 번역됐다. 오랜 기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경제고문과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초대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 노벨평화사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가 빈곤층을 위해 설립한 마이크로크레딧 금융기관인 그라민은행에서 힌트를 얻어 1998년 ‘플래닛 파이낸스’를 설립해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김홍국 기자)

06. 10. 31.

 

 

 

 

P.S. 오늘부터 이타주의자가 되는 연습을 해야겠다(이기주의자들, 너넨 이제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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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6-10-31 09:49   좋아요 0 | URL
듣기만 해도 기분좋은 글이군요...^^

정말 저 분의 예측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딸기 2006-10-31 09:49   좋아요 0 | URL
아 큰일이다... 나의 시대는 갔구만... (혼잣말입니다)

로쟈 2006-10-31 13:2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이타주의자들은 향후 50년간 참호 속에서 숨어지내야 될 거 같습니다. 그 담에 진짜로...
 

지젝의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의 마지막 두 절을 옮겨놓는다. 영화 <크라잉 게임> 얘기가 공통적이고, 이 새 번역에서 '<크랑잉 게임>이 동쪽으로 가다'란 마지막 절에는 일부 번역이 누락돼 있기 때문에 그냥 같이 묶어놓는 게 좋을 듯하다. 지젝의 정치론/혁명론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어놓기 위해서라도 '궁정식 사랑' 이야기는 빨리 마무리짓는 게 좋겠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향락의 전이>의 200-213쪽, 그리고 영어본의 102-109쪽이 이 새 번역에 대응한다(본문 중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

닐 조던의 <크라잉 게임>이 거둔 예상치 못한 특별한 성공의 열쇠는 그것이 궁정식 사랑의 모티프에 가한 결정적인 변주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개요를 상기해보자. 포로가 된 영국 흑인 병사를 감시하는 IRA의 단원인 퍼거스는 그 병사와 친해진다. 병사는 사살되기 전에 그에게 런던의 교외에 살고 있는 자기 여자 친구 딜을 찾아가 마지막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병사가 죽은 뒤 퍼거스는 IRA에서 탈퇴해  런던으로 이주하고, 병사의 연인이었던 아름다운 흑인 여성을 방문한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나 딜은 그에 대해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독립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접근을 허용하지만 그들이 침대로 가기 전 그녀는 잠깐 나가서 투명한 잠옷을 입고 돌아온다. 퍼거스는 그녀의 몸에 갈망하는 시선을 던지는 한편, 갑자기 그녀의 페니스를 지각한다. ‘그녀’는 복장도착자였던 것이다.

그는 구역질을 하면서 그녀를 잔인하게 밀쳐낸다. 딜은 떨면서 눈물에 젖어 자신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주인공은 그녀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기에 그들이 늘상 만난 술집이 복장도착증자들의 회합장소였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증가가 되는 일련의 세세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항상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실패한 성적 만남의 장면은 프로이트가 페티시즘의 원초적인 트라우마라고 언급한 장면의 정확한 역전으로 구조화된다. 성기 쪽으로 여성의 벗은 몸을 훑어 내려가는 아이의 시선은 무언가(페니스)를 보기를 기대했던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충격을 받는다. <크라잉 게임>의 경우, 충격은 시선이 아무것도 기대치 않았던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야기된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폭로 이후에 둘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딜은 그녀의 사랑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퍼거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변덕스럽고 아이러니하며 군주스러운 여인에서, 절망적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과 같은 애처로운 인물로 변모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 즉 엄밀하게 라캉적인 의미에서 은유로서의 사랑이 솟아오르는 것은 오직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eromenos)가 그녀의 손을 뻗어 ‘사랑을 되돌려 줌으로써’ 사랑하는 자(erastes)로 변모하는 숭고한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사랑의 ‘기적’을, ‘실재의 대답(answer of the Real)’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라캉이 주체 그 자체는 실재의 대답이라는 지위를 갖는다고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말을 바꾸자면, 이러한 전도 이전까지는 사랑받는 자는 [아직까지는 주체가 아니며] 하나의 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얘기다. 사랑받는 자는 ‘그 안에 있는 그 자신 이상의’ 것 때문에 사랑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그 질문, 즉 나는 타인에게 하나의 대상으로서 어떤 존재인 걸까? 그는 내 안에서 과연 어떤 (그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비대칭성에 직면한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비대칭성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각각의 사랑하는 이가 사랑받는 이에게서 보는 것과 사랑받는 이 각각이 알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발생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부조화에 의한 비대칭성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받는 이의 위치(position)을 정의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교착상태를 발견한다. 타인은 내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내게서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에게 줄 수는 없다, 혹은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사랑받는 이가 갖고 있는 것과 사랑하는 이가 결여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사랑받는 이가 이러한 교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이에게 손을 뻗어 ‘사랑을 되돌려주는’ 일 뿐인데, 말하자면, 은유적인 몸짓으로, 사랑받는 이로서의 그의 지위를 사랑하는 이의 지위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은 주체화의 지점을 표시한다. 사랑의 부름에 대답하는 순간,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사람]이 주체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런 역전에 의해서만 솟아오른다. 내가 단지 타인 속의 아갈마(agalma)에 의해 매혹당했을 때에는 나는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타인을, 즉 사랑의 대상을, 연약하고 [무언가를] 상실한 것, 즉 ‘그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할 때, 그 때 나는 진정 사랑에 빠진다. 나의 사랑은 이 상실을 견뎌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역전의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이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라고 하는 처음의 이중성 대신에 두 명의 사랑하는 주체를 갖게 되었지만, 비대칭은 여전히 존속한다. 왜냐하면, 주체화되면서 그 자신의 결여를 고백했던 것은 바로 대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역전 속에는 무언가 매우 당황스럽고 정말 스캔들스러운 것이 존재하는데, 신비롭고 매혹적이며 잡히지 않는 사랑의 대상이 그 자신의 교착[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는 난관]을 폭로하고, 그로써 또 다른 주체의 지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러소설들에서 동일한 역전과 만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은 괴물이 주체화되는 순간, 즉 (무자비한 살인 기계로 묘사되어 온) 괴물-대상이 일인칭으로 그 자신의 불행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실존을 드러낼 때가 아닌가?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근거한 영화들이 이러한 주체화의 몸짓을 회피해 온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궁정식 사랑에 있어서는, 귀부인이 하인에게 자비(Gnade)를 베풀 때, 오랫동안 고대되어온 최고의 충족 순간은 여인의 항복, 즉 성행위를 갖는 것에 그녀가 동의하는 순간도, 어떤 신비로운 입사식도 아니며, 여인 편에서 보내는 사랑의 사인(sign), 즉, 대상(Object)이 애원하는 이에게 그 자신의 손을 뻗어 대답했다는 그 ‘기적’인 것이다.  

그러면, <크라잉 게임>으로 돌아가 보자. 딜은 이제 퍼거스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퍼거스는 점점 더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갖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에 감동받고 매료당해 그녀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고 그녀를 지속적으로 위로한다. 마침내 IRA가 그를 다시 테러행위에 연루시키고자 할 때, 심지어 그는 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녀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다시 도발적으로 유혹적인 여성으로 옷을 차려입고 그를 방문한 감옥에서 벌어지는데, 면회실의 모든 남자들은 그녀의 외양에 자극받는다. 퍼거스가 사천 일 이상 - 수감일 총계 - 을 견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맹세하고 그를 정규적으로 면회한다…

여기서 외부적 장애물 - 어떠한 육체적 접촉도 막는 감옥의 유리 칸막이 - 은 궁정식 사랑에서 대상으로의 접근을 막는 장애물과 정확히 등가를 이룬다. 따라서 그것[유리 칸막이] 때문에, 이 사랑의 내재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즉 그는 철저한 이성애주의자고 그녀는 동성애적 의상도착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출간된 영화 각본의 서론에서 닐 조던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야기는 일종의 행복과 더불어 끝난다. 난 일종의 행복, 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행복 안에는 감옥이라고 하는 분리(separation)와 그 외의 더 심원한 분리들이, 즉 인종적, 민족적, 성적 정체성의 분리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저 연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구분(division)하는 것들이 그들을 웃을 수 있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구분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웃을 수 있게 하는 구분 - 극복할 수 없는 장벽 - 이란 것은 궁정식 사랑의 가장 간명한 메커니즘이 아니겠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오로지 입장한 관객들의 응시를 매혹시키기 위해 고안된 가장(假裝)된 광경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 실현에 대한 기대가 끝없이 연기(延期)되는 것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이 사랑이 계급, 종교, 인종의 장벽뿐만 아니라 성적 지향성과 성적 정체성의 장벽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장벽조차도 뛰어넘는 한, 이 사랑은 분명히 절대적인 사랑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역설이 존재하며, 또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성애적 사랑을 남성적 억압의 산물로서 거부하지 않고, 이러한 사랑이 오늘날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보유할 수 있게 되는 딱 들어맞는 환경을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 말이다.    

<크라잉 게임>이 동쪽으로 가다

크라잉 게임에 대한 이런 독해는 곧장 라캉 이론에 대한 표준적인 비난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적 비일관성[모순], 그리고 기타 등등에 대한 그의 모든 이야기들에서, 라캉은 오직 남성적 담론 속에서 나타나거나 거울반사되는 여성에 대해서만,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비친화적인 매체에서 그녀들이 왜곡되어 반영되는 모습에 대해서만 다룰 뿐, 여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다루지 않는다는 비난 말이다. 일찍이 프로이트에게도 그랬듯, 라캉에게도 역시 여성 섹슈얼리티는 ‘어두운 대륙’으로 남는다[고 비난자들은 말한다]. 이 비난에 답할 때, 우리는 만약 반영성에 대한 헤겔의 근원적 역설이 어디에선가 유효하다면, 그것이 유효한 곳은 바로 여기라는 것을 단호하게 강조해야만 한다. 여성-그-자체로부터 거리를 두고 물러나서, 부재하는 원인(absent Cause)으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남성적 담론을 뒤트는가에 주목해야만 우리는 ‘여성적 본질’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여성’이란 궁극적으로는 단지 남성적 담론을 뒤틀리게 하고 굴절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닌가? '여성-그-자체‘라는 유령은 이러한 뒤틂의 능동적 원인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 뒤틂의 물화-물신화된 효과인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질문들은 그 부제를 ’<크라잉 게임>이 중국으로 가다‘라고 붙여볼 만한 영화 <마담 버터플라이M. Butterfly>에서 함축적으로 언급된다.[이하 <마담 버터플라이>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 이어지는 4개의 단락(영어본 pp.105-107) 생략]

영화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그의 죄를 완전히 인정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감옥에서 주인공은 속물적이고 소란한 동료 죄수들 앞에서 연극을 상연한다. 그는 나비부인처럼 차려입고(일본 기모노를 입고 얼굴에는 짙게 화장을 하고) 푸치니의 오페라를 발췌하여 그의 이야기를 고쳐말한다. “화창한 날에 우리는 보리라”라는 절정에서 그는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죽어버린다. 이렇게 여장을 하고 공개적으로 자살하는 남자의 장면은 오래고도 훌륭한 역사가 있다. 히치콕의 <살인Murder>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그 영화에서 살인자 핸들 페인이 여자 곡예사의 복장으로 그의 차례가 끝난 후 혼잡한 집에서 목을 매단다.

<살인>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담 버터플라이>에서도 이 행위는 엄밀히 윤리적인 성격을 지닌다. 두 경우 모두 주인공은 그의 사랑의 대상과의, 즉 그의 증환(존재하지 않는 여성, 즉 ‘버터플라이’라는 종합적 형성물)과의 정신병적 동일시를 상연한다. 다시 말해, 그는 대상 선택으로부터 대상과의 직접적인 동일시로 ‘퇴행’한다. 이러한 동일시의 해소되지 않는 곤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궁극적인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으로서의 자살이다. 주인공은 자살 행위를 통해 죄의식을, 그리고 대상이 그의 환상의 틀 바깥에서 그에게 주어졌을 때 그 대상에 대한 그의 거부를 보상한다.

물론 구식 반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컨대, 궁극적으로, <마담 버터플라이>는 여성과의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남성 판타지의 희비극적인 혼합물 덩어리를 제공하는 것 아닌가? 영화의 모든 행동들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플롯의 그로테스크하고도 믿을 수 없는 성격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의상도착자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의 사례라는 사실을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 아닌가? 하는 식의 반론 말이다. 영화는 정말 솔직하지 않으며, 이러한 뻔한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한다[즉, 이 영화는 이러저러한 구식 논리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설'은 <마담 버터플라이>의 (그리고 <크라잉 게임>의) 진정한 수수께끼를 다루는 데 실패한다. 어떻게 해서 남자 주인공과 여장 남자인 그의 파트너 사이의 희망 없는 사랑이, [남성의] 여성과의 일반적인 관계보다 훨씬 더 ‘본래적으로(authentically)’ 이성애적 사랑의 관념을 [이들 영화에서처럼] 실현할 수 있는가? 라는 수수께끼 말이다. [물론, 이들의 사랑이 이성애적 사랑보다 더 이성애적인 이유는 그 안에 궁정식 사랑의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젝의 답변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궁정식 사랑의 모체가 이렇게 보존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궁정식 사랑의 모체가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 페미니즘이 어떤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맞다, 그의 여인에게 봉사하는 남성의 궁정식 이미지는 남성 지배의 현실을 감추는 하나의 가상(semblance)이다. 맞다, 마조히스트의 연극은 남성의 사회적 지배에 의해 짐 지워진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사적인 연출[미장센]이다. 그리고 맞다, 여성을 숭고한 사랑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그녀를 수동적 재료로, 혹은 남성적 자아-이상의 나르시즘적 투사를 위한 스크린으로 가치 저하시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라캉 그 자신, 궁정식 사랑이 성행했던 바로 그 시기에, 남성적 권력 놀음 속에서 교환의 대상들로 존재한 여성의 실제 사회적 지위는 아마도 최하였으리라고 지적한 터다.

그러나 그의 여인을 섬기는 남성의 바로 이러한 외양은 여성에게 그들의 정체성의 환상-실체를 제공하며, 그것의 효과는 실제적인[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소위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는 모든 특질을 제공하며, 여성을 그녀의 여성적 향락(jouissance féminine)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성과의 (잠재적) 관련 속에서 그녀가 그녀 자신을 참조하는 방식으로서, 즉 그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정의한다는 것이다. 거의 공황에 가까운 (남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의) 반작용들이 이 환상-구조로부터 일어나, 여성들에게서 그녀들의 바로 그 ‘여성성’을 박탈해버리기를 원하는 페미니즘으로 도약한다. ‘가부장적 지배’에 반대함으로써, 동시에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의 환상-밑받침을 침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일단 두 성 간의 관계가 대칭적이며 상호보완적이고 자발적인 협력 혹은 계약으로 간주되면, 궁정식 사랑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환상 모체(the fantasy matrix)는 권력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이다. 왜? 성적 차이가 상징화를 거부하는 실재적인 것인 한, 성적 관계는 비대칭적인 비-관계로 남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비-관계 안에서 타자는, 즉 주체가 되기 이전의 우리의 파트너는 하나의 물(Thing), 즉 ‘비인간적인 파트너’이다. 그래서, 성적 관계는 순수한 두 주체 간의 대칭적 관계로 옮겨질 수 없다.

동등한 주체들 간의 계약이라는 부르주아적 원칙은 오로지 도착적-마조히즘적-계약의 형태로서만 섹슈얼리티에 적용될 수 있다. 그 계약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균형 잡힌 계약의 바로 그 형식이 지배관계를 구성하는 데 봉사한다. 소위 대안적인 성적 실천(‘사도 마조히즘적인’ 레즈비언 그리고 게이 커플) 속에서 주인-과-노예 관계가 마조히즘적 연극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채로 심각하게 재등장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말을 바꾸면, 우리는 궁정식 사랑이라는 모체를 대체할 만한 어떤 새로운 ‘공식’도 발명해 낼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크라잉 게임>을 사생활로 도피하는 반정치적인 이야기로 독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정치적 파워게임의 잔인함에 환멸을 느껴 개인적 실현, 즉 진정한 실존적 충족의 유일한 영역으로서 성적 사랑을 발견하는 혁명가의 주제의 변종으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그 내적인 배경으로 작용하는 아일랜드적 대의에 충실하다. 역설은 주인공이 안전한 천국을 발견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사생활의 영역 속에서, 그는 훨씬 더 현기증 나는 혁명을 그의 가장 내밀한 개인적 태도 속에서 완수하도록 강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라잉 게임>은 ‘정치적 파워게임으로부터 면제된 진정성의 섬으로서 사생활’ 대 ‘정치적 활동의 여전히 또다른 영역인 섹슈얼리티’라는 통상적인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를 피해간다. 그보다 영화는 공적인 정치적 활동과 사적인 성적 도착 사이의 적대적 복합성을(*'복합성'은 '공모성complicity'의 오역이다) , 즉 정치적 혁명의 궁극의 성취로서 성적 혁명을 요구한 사드에게서 작동하고 있는 그 적대를 볼 수 있게 한다. 간단히 말해, <크라잉 게임>의 부제는 “아일랜드인들이여, 당신이 공화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또다른 노력을 해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0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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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0-30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명령문을 곱씹어 보다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모아지네요. "공화주의자의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주권의 역설- 인민에 기반을 두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을 '주체와 대상'이라는 '가면 놀이'라는 역할극이 수시로 상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연애라는 무대 위에서 말이죠..."

로쟈 2006-10-3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니까 마지막 문단에는 오역이 포함돼 있습니다(번역을 제가 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멘트를 저는 좀더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정치적 혁명이 다가 아니다. 성적 혁명이 더 필요하다(yet another effort), 라는 것이죠. "Irishmen, yet another effort, if you want to become republicans!"
 

다소 과장된 타이틀로 보이지만, 최근에 불역된 이승우의 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이 그렇다. '한국문학 유럽서 뿌리내린다'. 이전에 한국문학 번역현황과 관련된 페이퍼를 올린 거 같은데,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기사를 옮겨놓는다. '문학의 뒷계단'이란 카테고리에도 맞을 듯하고(우리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유감스럽게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평일에 한국문학이 아니라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인지라 마땅히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게 핑계이다). 재작년에 러시아 체류시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서 단한권의 한국문학 작품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씁쓸했던 기억이 있는데, 러시아쪽 사정도 나아지기를 이 참에 기대해본다.

 

 

 

 

서울신문(06. 10. 27) 한국문학 유럽서 뿌리 내린다

한국문학이 유럽에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프랑스, 독일 등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 유럽 각지에 소개돼 평단의 호평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오래됐지만 최근 들어 평론가의 관심은 물론 일반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며 판매에서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프랑스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승우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지난 8월말 프랑스 줄마출판사에서 출간한 ‘식물들의 사생활’은 한국소설로는 이례적으로 출간 한달 만에 초판 2500부가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 ‘생의 이면’을 통해 이미 프랑스 문단에서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이승우의 소설은 출간과 동시에 일간지 ‘르 피가로’와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등 언론매체에서 앞다퉈 기사를 다뤘고, 이어 프랑스 최대 서점체인망인 프낙의 ‘가장 주목받는 신간 외국소설 10권’과 또다른 대형서점 버진의 ‘가을 신간 권장도서목록 30권’에 선정됐다(*독역본 이미지들만 뜬다. 아래는 독역본 <생의 이면>).

번역을 지원한 대산문화재단 곽효환 팀장은 “프랑스에서는 바캉스 시즌이 끝난 가을에 신간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데 올 가을 680여종의 신간 중에 이승우의 소설이 주목받았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며 줄마출판사측도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이승우 특유의 지적이고 관념적인 작품세계가 프랑스 독자들의 성향과 잘 맞았다는 분석이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독자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는 점에서 이승우의 소설은 한국문학의 진정한 세계화에 장밋빛 기대를 걸게 하는 사례다.

이에 앞서 지난 4일 스웨덴 최대 일간지 ‘다켄스 니헤테르’는 박완서의 소설 ‘나목’을 문화면에 대서특필하며 큰 관심을 드러냈다.‘한국전쟁의 그늘 아래’라는 제목으로 실린 서평은 “한국전쟁과 1950년대라는 특수한 시공간을 다룬 작품임에도 모든 전쟁에 내재된 무감각한 증오 및 문화적 억압 그리고 전쟁 속에서 성숙해지는 주인공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고 호평했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출간된 한국문학 작품은 세계 45개국, 총 1220여종. 작가별로는 고은 시인의 작품집이 8개국에서 16종이 소개됐고, 황석영 7개국 23종, 이문열 12개국 31종, 이청준 10개국 28종 등이다. 곽효환 팀장은 “한국문학이 세계 각국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지만 이중 재판을 찍는 경우는 10권에 1권 정도”라며 “작가 선호도가 나라별로 다른 만큼 명확한 타깃마케팅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문화교류 차원을 넘어 세계 문학시장에서 우리 문학의 상품가치를 높이기위한 지원책도 적극 모색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원장 윤지관)은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3일까지 프랑스 파리, 스웨덴 스톡홀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지에서 문학행사와 출판지원 조인식, 해외독후감 대회 시상식 등을 가졌다. 소설가 김훈, 은희경, 윤흥길, 황석영, 김인숙, 시인 김선우, 평론가 신수정 등이 참여했다. 번역원은 특히 내년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해외독후감대회를 확대할 방침이다. 윤부한 팀장은 “전세계 12곳의 한국문화원을 통해 독후감대회를 열어 현지 평론가와 독자 모두에게 우리 문학을 좀더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이순녀기자)

06. 10. 29.

P.S. 아래가 불역본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여느 프랑스책들처럼 표지는 단촐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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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0-29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뿌리 내리다'와 '뿌리 내린다'의 차이. 후자는 뭔가 주술적인 바램이 포함된 것 같아요. ^^
날이 갈수록 번역된 문학 작품들을 도저히 못 읽겠어서 한반도에서 쓰인 것을 빼고는 띠엄띠엄 영어권의 작품만 읽어내고 있습니다. 흠.

로쟈 2006-10-2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오타'가 났었네요.^^

테렌티우스 2006-12-02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서재를 읽는 것이 일상생활의 하나가 되었네요...^^
불어본 이미지는 아래의 프낙 서점 사이트에 있고요... 그림을 클릭하면 큰 사진이 뜹니다...

http://www4.fnac.com/Shelf/article.aspx?PRID=1843378&Mn=6&Ra=-1&To=0&Nu=2&Fr=3


로쟈 2006-12-0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미지를 옮겨놓았습니다. 프랑스쪽은 표지장정에는 돈이 별로 안 들 거 같습니다.^^
 

오랜만에 '한겨레21'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눈에 띈 칼럼을 옮겨온다 제목이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지면?'이니까 '로자의 방주'라는 카테고리에 딱 맞는 테마이기도 하다. 필자는 저명한 과학칼럼니스트 김동광씨이다. 예전에 교양과학서 전문번역집단이었던 과학세대의 리더격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저술에도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그와 함께 과학 저술가로서 기억해둘 만한 이름은 이인식씨이다). 그가 번역한 책들을 검색해보니 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스티븐 제이 굴드나 스티븐 호킹의 책들이다. 국내에서도 굴드급의 과학 저술가가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해본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겨레21(06. 10. 24)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지면?

진화생물학자들은 생물의 기나긴 진화 과정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위치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생물의 진화 과정을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했고, 단세포 생물에서 영장류에 이르는 과정을 일직선이나 계단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단일한 경로로 간주하곤 했다. 인류의 탄생이 지극히 우연적인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생물 총회’가 열리면 인간은 퇴출 대상

그런데 인류가 등장한 세상은 그 이전에 견줘 너무나 크게 변화했다. 이제 인류가 등장하기 이전의 세계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 인간들이 생태계 깊숙이 들어가면서 자연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의 해안에서 하마 떼가 떠내려가고 있다.(사진/ REUTERS)

그 변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됐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인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생산성의 약 40%를 무단으로 징발해서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상당 부분이 먹고사는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적 생활을 위해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물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로 인해 불과 100여 년 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쏟아낸다. 사람들이 도시를 짓고 농장을 만들면서 전유하고 있는 토지는 지구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이른다. 울창하던 숲과 지구의 허파이자 생물다양성의 보고로 알려진 열대우림도 이제는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대양의 주요 어장들 중 상당수는 이미 오래전에 어자원이 고갈됐다. 남획과 오염, 그리고 서식지 파괴로 생존 기로에 서 있는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류는 터무니없는 탐욕과 횡포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인류는 자신들끼리의 다툼으로 시시각각 생물권 전체의 존재 가능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 종식 이후 상당량의 핵무기를 해체하면서 핵으로 인한 절멸 가능성을 크게 줄이는 듯했지만 얼마 전부터 파키스탄 등이 다시 핵무장을 하면서 일촉즉발의 위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북한과 미국이 핵을 둘러싸고 마주 달리는 폭주족처럼 누가 끝까지 버티느냐를 가리는 ‘겁쟁이 경기’를 벌이면서 자칫 한반도가 재앙의 터전이 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핵으로 인한 재앙은 생물권 전체의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쯤 되면 유엔이 아니라 생물들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서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 고조를 생물권 전체의 위기로 간주하고 시급한 해결책을 논의하는 생물권 임시 총회가 열릴 법도 하다. 거기에서는 사람과 도롱뇽, 귀신고래, 들국화 그리고 미생물까지 모든 생물종이 똑같은 의결권을 가진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결정이 내려질까?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늦게 무대에 등장해서 가장 빠른 시간 동안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온갖 포악과 전횡을 해대는 골치 아픈 막내둥이를 영원히 퇴출하기로 결론짓지 않겠는가? 사실 그런 결정이 나도 우리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셈이다.

인간이 퇴출되어 어느 먼 외계 행성에서 재교육을 받기 위해 강제 송환됐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뉴사이언티스트> 최근호는 ‘사람이 없는 지구를 상상해보자’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지구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모두 사라졌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했다(*이 기사는 아래에 옮겨놓았다). 미국 샌타바버라에 있는 국립생태분석종합센터의 보전생물학자인 존 오록은 사람의 자취가 사라지는 순간 지구의 생태계는 즉각적으로 호전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로 밤하늘에서 인공 조명이 사라지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돌아오게 된다. 지구 전체의 18.7%가 인공 불빛에 오염됐다지만, 웬만한 도시 지역에서는 별을 보기 힘든 지경이다. 한동안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하는 자동 전등들이 빛을 내더라도, 유지·관리가 되지 않기에 지구의 밤에서 문명의 불빛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원전의 방사능 누출도 빨리 복원돼

건물들과 도로는 어떻게 될까? 오늘날의 건물은 약 60년, 교량은 120년, 댐은 250년가량 견딜 수 있게 설계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누군가가 유지·관리를 하고 벌어진 틈을 메워주는 등 수리와 보수를 해줄 때 지속될 수 있고,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훨씬 빨리 무너진다. 체르노빌 사고로 사람들이 철수한 프리프야트시가 실례이다. 올해로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지 꼭 20년이 된 이 도시의 건물들은 이미 붕괴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태풍,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입는 손상이 누적되면서 훨씬 빨리 폐허로 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건물이나 도로의 잔해들, 특히 콘크리트와 돌로 된 구조물의 일부는 수천 년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 지구촌의 약 19%가 인공 불빛에 오염됐다. 거대 건축물이 즐비한 이 지역은 인간이 사라진 상태에션 느리게 복구 될 수 밖에 없다(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현재 가동 중인 원자력 발전소는 어떻게 될까? 핵폐기물 관리 전문가인 로드니 윙은 원자력발전소를 유지·관리하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면 냉각수가 증발하고 결굴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참사가 빚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누출된다. 그렇지만 자연의 복원력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고 한다. 체르노빌의 경우에도 사람들이 철수한 뒤, 몇 년 만에 생태계가 복원되기 시작해서 현재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늑대까지 번성하고 있다.

생태계의 복원 속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온난하고 습윤한 지역은 추운 지역에 비해 복원이 빠르게 진행된다. 사람의 토지 이용을 연구하는 생태학자 브래드 스텔폭스가 캐나다 지역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 숲은 약 50년이 지나면 전 지역의 80%를 덮고, 200년 뒤에는 95%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면 벼나 밀처럼 단일 품종이 경작되던 지역이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한다. 보전생태학자들은 일부 지역의 경우 사람이 사라져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가축이나 애완동물의 운명은? 일부는 그 선조였던 야생동물의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인위 선택의 결과로 스스로 먹이를 찾거나 번식한 능력을 상실한 동물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미국 환경보호국의 제이 라이히맨은 “사람이 사라진 들판에 푸들이 떼를 지어 달릴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고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유전자조작(GM) 작물들은 어떻게 될까? 일부는 야생종으로 살아남겠지만, 제초제 내성을 갖도록 조작된 식물들은 제초제가 없는 상황에서 경쟁종에 비해 유리할 것이 없기 때문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사람이 사라지면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동물들이 다시 번성할 수 있을까? 서식지 파괴가 멸종의 큰 원인이기 때문에 상황이 나아질 수 있지만, 일부 종은 이미 개체 수가 더 이상 복원될 수 없는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크게 상황이 나아지기 힘들 전망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명맥을 유지하던 멸종위기종 가운데 상당수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더 빨리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 그 원죄는 인간에게 있지만 사람들을 그리워할 생물종은 이들이 유일한 셈이다.

대기과학자인 수잔 솔로몬은 화석연료 사용 등으로 대기 중에 방출된 이산화탄소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1천 년 이상 계속되고, 남아 있는 과잉의 이산화탄소를 바다가 모두 흡수하기까지는 2만 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모든 요소들을 종합해서 지구상에서 인류가 남겼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10만 년으로 예측된다. 먼 외계의 방문자가 지구를 찾아와 겉으로만 훑어본다면 어떤 문명의 흔적도 찾지 못할 것이다.

기후변화, 핵전쟁보다 무섭다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되는 인류 문명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지배적인 종으로 군림하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지구와 생물권이 운행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오히려 피폐해지던 생태계는 즉각 복원 작업을 시작하고, 그 누구도 인간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생태학자들은 핵전쟁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갑작스런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이라고 주장한다. 요즘 한반도는 들어보지도 못한 가을 더위에 시달리고 있다. 핵위기에 떠밀려 하찮은 현상으로 치부되지만, 어쩌면 우리를 더 낯선 상황으로 몰아갈 전조일지도 모르지 않은가.(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Cover of  issue of New Scientist magazine 

Imagine Earth without people

  • Bob Holmes
  • Humans are undoubtedly the most dominant species the Earth has ever known. In just a few thousand years we have swallowed up more than a third of the planet's land for our cities, farmland and pastures. By some estimates, we now commandeer 40 per cent of all its productivity. And we're leaving quite a mess behind: ploughed-up prairies, razed forests, drained aquifers, nuclear waste, chemical pollution, invasive species, mass extinctions and now the looming spectre of climate change. If they could, the other species we share Earth with would surely vote us off the planet.

    15,589 Number of species threatened with extinction

    Now just suppose they got their wish. Imagine that all the people on Earth - all 6.5 billion of us and counting - could be spirited away tomorrow, transported to a re-education camp in a far-off galaxy. (Let's not invoke the mother of all plagues to wipe us out, if only to avoid complications from all the corpses). Left once more to its own devices, Nature would begin to reclaim the planet, as fields and pastures reverted to prairies and forest, the air and water cleansed themselves of pollutants, and roads and cities crumbled back to dust.

    "The sad truth is, once the humans get out of the picture, the outlook starts to get a lot better," says John Orrock, a conservation biologist at the National Center for Ecological Analysis and Synthesis in Santa Barbara, California. But would the footprint of humanity ever fade away completely, or have we so altered the Earth that even a million years from now a visitor would know that an industrial society once ruled the planet?

    9.7 Average eco-footprint of a US citizen, in hectares

    If tomorrow dawns without humans, even from orbit the change will be evident almost immediately, as the blaze of artificial light that brightens the night begins to wink out. Indeed, there are few better ways to grasp just how utterly we dominate the surface of the Earth than to look at the distribution of artificial illumination (see Graphic). By some estimates, 85 per cent of the night sky above the European Union is light-polluted; in the US it is 62 per cent and in Japan 98.5 per cent. In some countries, including Germany, Austria, Belgium and the Netherlands, there is no longer any night sky untainted by light pollution.

    18.7 Percentage of Earth's surface affected by light pollution

    "Pretty quickly - 24, maybe 48 hours - you'd start to see blackouts because of the lack of fuel added to power stations," says Gordon Masterton, president of the UK's Institution of Civil Engineers in London. Renewable sources such as wind turbines and solar will keep a few automatic lights burning, but lack of maintenance of the distribution grid will scuttle these in weeks or months. The loss of electricity will also quickly silence water pumps, sewage treatment plants and all the other machinery of modern society.

    The same lack of maintenance will spell an early demise for buildings, roads, bridges and other structures. Though modern buildings are typically engineered to last 60 years, bridges 120 years and dams 250, these lifespans assume someone will keep them clean, fix minor leaks and correct problems with foundations. Without people to do these seemingly minor chores, things go downhill quickly.

    The best illustration of this is the city of Pripyat near Chernobyl in Ukraine, which was abandoned after the nuclear disaster 20 years ago and remains deserted. "From a distance, you would still believe that Pripyat is a living city, but the buildings are slowly decaying," says Ronald Chesser, an environmental biologist at Texas Tech University in Lubbock who has worked extensively in the exclusion zone around Chernobyl. "The most pervasive thing you see are plants whose root systems get into the concrete and behind the bricks and into doorframes and so forth, and are rapidly breaking up the structure. You wouldn't think, as you walk around your house every day, that we have a big impact on keeping that from happening, but clearly we do. It's really sobering to see how the plant community invades every nook and cranny of a city."

    With no one to make repairs, every storm, flood and frosty night gnaws away at abandoned buildings, and within a few decades roofs will begin to fall in and buildings collapse. This has already begun to happen in Pripyat. Wood-framed houses and other smaller structures, which are built to laxer standards, will be the first to go. Next down may be the glassy, soaring structures that tend to win acclaim these days. "The elegant suspension bridges, the lightweight forms, these are the kinds of structures that would be more vulnerable," says Masterton. "There's less reserve of strength built into the design, unlike solid masonry buildings and those using arches and vaults."

    But even though buildings will crumble, their ruins - especially those made of stone or concrete - are likely to last thousands of years. "We still have records of civilisations that are 3000 years old," notes Masterton. "For many thousands of years there would still be some signs of the civilisations that we created. It's going to take a long time for a concrete road to disappear. It might be severely crumbling in many places, but it'll take a long time to become invisible."

    The lack of maintenance will have especially dramatic effects at the 430 or so nuclear power plants now operating worldwide. Nuclear waste already consigned to long-term storage in air-cooled metal and concrete casks should be fine, since the containers are designed to survive thousands of years of neglect, by which time their radioactivity - mostly in the form of caesium-137 and strontium-90 - will have dropped a thousandfold, says Rodney Ewing, a geologist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who specialises in radioactive waste management. Active reactors will not fare so well. As cooling water evaporates or leaks away, reactor cores are likely to catch fire or melt down, releasing large amounts of radiation. The effects of such releases, however, may be less dire than most people suppose.

    The area around Chernobyl has revealed just how fast nature can bounce back. "I really expected to see a nuclear desert there," says Chesser. "I was quite surprised. When you enter into the exclusion zone, it's a very thriving ecosystem."

    The first few years after people evacuated the zone, rats and house mice flourished, and packs of feral dogs roamed the area despite efforts to exterminate them. But the heyday of these vermin proved to be short-lived, and already the native fauna has begun to take over. Wild boar are 10 to 15 times as common within the Chernobyl exclusion zone as outside it, and big predators are making a spectacular comeback. "I've never seen a wolf in the Ukraine outside the exclusion zone. I've seen many of them inside," says Chesser.

    The same should be true for most other ecosystems once people disappear, though recovery rates will vary. Warmer, moister regions, where ecosystem processes tend to run more quickly in any case, will bounce back more quickly than cooler, more arid ones. Not surprisingly, areas still rich in native species will recover faster than more severely altered systems. In the boreal forests of northern Alberta, Canada, for example, human impact mostly consists of access roads, pipelines, andother narrow strips cut through the forest. In the absence of human activity, the forest will close over 80 per cent of these within 50 years, and all but 5 per cent within 200, according to simulations by Brad Stelfox, an independent land-use ecologist based in Bragg Creek, Alberta.

    In contrast, places where native forests have been replaced by plantations of a single tree species may take several generations of trees - several centuries - to work their way back to a natural state. The vast expanses of rice, wheat and maize that cover the world's grain belts may also take quite some time to revert to mostly native species.

    At the extreme, some ecosystems may never return to the way they were before humans interfered, because they have become locked into a new "stable state" that resists returning to the original. In Hawaii, for example, introduced grasses now generate frequent wildfires that would prevent native forests from re-establishing themselves even if given free rein, says David Wilcove, a conservation biologist at Princeton University.

    Feral descendants of domestic animals and plants, too, are likely to become permanent additions in many ecosystems, just as wild horses and feral pigs already have in some places. Highly domesticated species such as cattle, dogs and wheat, the products of centuries of artificial selection and inbreeding, will probably evolve back towards hardier, less specialised forms through random breeding. "If man disappears tomorrow, do you expect to see herds of poodles roaming the plains?" asks Chesser. Almost certainly not - but hardy mongrels will probably do just fine. Even cattle and other livestock, bred for meat or milk rather than hardiness, are likely to persist, though in much fewer numbers than today.

    3.3bn Global population of cattle, sheep and goats

    What about genetically modified crops? In August, Jay Reichman and colleagues at the US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s labs in Corvallis, Oregon, reported that a GM version of a perennial called creeping bentgrass had established itself in the wild after escaping from an experimental plot in Oregon. Like most GM crops, however, the bentgrass is engineered to be resistant to a pesticide, which comes at a metabolic cost to the organism, so in the absence of spraying it will be at a disadvantage and will probably die out too.

    Nor will our absence mean a reprieve for every species teetering on the brink of extinction. Biologists estimate that habitat loss is pivotal in about 85 per cent of cases where US species become endangered, so most such species will benefit once habitats begin to rebound. However, species in the direst straits may have already passed some critical threshold below which they lack the genetic diversity or the ecological critical mass they need to recover. These "dead species walking" - cheetahs and California condors, for example - are likely to slip away regardless.

    784 Number of species that have gone extinct in the wild since 1500 AD

    Other causes of species becoming endangered may be harder to reverse than habitat loss. For example, about half of all endangered species are in trouble at least partly because of predation or competition from invasive introduced species. Some of these introduced species - house sparrows, for example, which are native to Eurasia but now dominate many cities in North America - will dwindle away once the gardens and bird feeders of suburban civilisation vanish. Others though, such as rabbits in Australia and cheat grass in the American west, do not need human help and will likely be around for the long haul and continue to edge out imperilled native species.

    388 Number of species listed on the invasive species database

    Ironically, a few endangered species - those charismatic enough to have attracted serious help from conservationists - will actually fare worse with people no longer around to protect them. Kirtland's warbler - one of the rarest birds in North America, once down to just a few hundred birds - suffers not only because of habitat loss near its Great Lakes breeding grounds but also thanks to brown-headed cowbirds, which lay their eggs in the warblers' nests and trick them into raising cowbird chicks instead of their own. Thanks to an aggressive programme to trap cowbirds, warbler numbers have rebounded, but once people disappear, the warblers could be in trouble, says Wilcove.

    On the whole, though, a humanless Earth will likely be a safer place for threatened biodiversity. "I would expect the number of species that benefit to significantly exceed the number that suffer, at least globally," Wilcove says.

    On the rebound

    In the oceans, too, fish populations will gradually recover from drastic overfishing. The last time fishing more or less stopped - during the second world war, when few fishing vessels ventured far from port - cod populations in the North Sea skyrocketed. Today, however, populations of cod and other economically important fish have slumped much further than they did in the 1930s, and recovery may take significantly longer than five or so years.

    The problem is that there are now so few cod and other large predatory fish that they can no longer keep populations of smaller fish such as gurnards in check. Instead, the smaller fish turn the tables and outcompete or eat tiny juvenile cod, thus keeping their erstwhile predators in check. The problem will only get worse in the first few years after fishing ceases, as populations of smaller, faster-breeding fish flourish like weeds in an abandoned field. Eventually, though, in the absence of fishing, enough large predators will reach maturity to restore the normal balance. Such a transition might take anywhere from a few years to a few decades, says Daniel Pauly, a fisheries biologist at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in Vancouver.

    With trawlers no longer churning up nutrients from the ocean floor, near-shore ecosystems will return to a relatively nutrient-poor state. This will be most apparent as a drop in the frequency of harmful algal blooms such as the red tides that often plague coastal areas today. Meanwhile, the tall, graceful corals and other bottom-dwelling organisms on deep-water reefs will gradually begin to regrow, restoring complex three-dimensional structure to ocean-floor habitats that are now largely flattened, featureless wastelands.

    Long before any of this, however - in fact, the instant humans vanish from the Earth - pollutants will cease spewing from automobile tailpipes and the smokestacks and waste outlets of our factories. What happens next will depend on the chemistry of each particular pollutant. A few, such as oxides of nitrogen and sulphur and ozone (the ground-level pollutant, not the protective layer high in the stratosphere), will wash out of the atmosphere in a matter of a few weeks. Others, such as chlorofluorocarbons, dioxins and the pesticide DDT, take longer to break down. Some will last a few decades.

    The excess nitrates and phosphates that can turn lakes and rivers into algae-choked soups will also clear away within a few decades, at least for surface waters. A little excess nitrate may persist for much longer within groundwater, where it is less subject to microbial conversion into atmospheric nitrogen. "Groundwater is the long-term memory in the system," says Kenneth Potter, a hydrologist at the University of Wisconsin at Madison.

    Carbon dioxide, the biggest worry in today's world because of its leading role in global warming, will have a more complex fate. Most of the CO2 emitted from burning fossil fuels is eventually absorbed into the ocean. This happens relatively quickly for surface waters - just a few decades - but the ocean depths will take about a thousand years to soak up their full share. Even when that equilibrium has been reached, though, about 15 per cent of the CO2 from burning fossil fuels will remain in the atmosphere, leaving its concentration at about 300 parts per million compared with pre-industrial levels of 280 ppm. "There will be CO2 left in the atmosphere, continuing to influence the climate, more than 1000 years after humans stop emitting it," says Susan Solomon, an atmospheric chemist with the US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NOAA) in Boulder, Colorado. Eventually calcium ions released from sea-bottom sediments will allow the sea to mop up the remaining excess over the next 20, 000 years or so.

    Even if CO2 emissions stop tomorrow, though, global warming will continue for another century, boosting average temperatures by a further few tenths of a degree. Atmospheric scientists call this "committed warming", and it happens because the oceans take so long to warm up compared with the atmosphere. In essence, the oceans are acting as a giant air conditioner, keeping the atmosphere cooler than it would otherwise be for the present level of CO2. Most policy-makers fail to take this committed warming into account, says Gerald Meehl, a climate modeller at the National Center for Atmospheric Research, also in Boulder. "They think if it gets bad enough we'll just put the brakes on, but we can't just stop and expect everything to be OK, because we're already committed to this warming."

    That extra warming we have already ordered lends some uncertainty to the fate of another important greenhouse gas, methane, which produces about 20 per cent of our current global warming. Methane's chemical lifetime in the atmosphere is only about 10 years, so its concentration could rapidly return to pre-industrial levels if emissions cease. The wild card, though, is that there are massive reserves of methane in the form of methane hydrates on the sea floor and frozen into permafrost. Further temperature rises may destabilise these reserves and dump much of the methane into the atmosphere. "We may stop emitting methane ourselves, but we may already have triggered climate change to the point where methane may be released through other processes that we have no control over," says Pieter Tans, an atmospheric scientist at NOAA in Boulder.

    No one knows how close the Earth is to that threshold. "We don't notice it yet in our global measurement network, but there is local evidence that there is some destabilisation going on of permafrost soils, and methane is being released," says Tans. Solomon, on the other hand, sees little evidence that a sharp global threshold is near.

    All things considered, it will only take a few tens of thousands of years at most before almost every trace of our present dominance has vanished completely. Alien visitors coming to Earth 100,000 years hence will find no obvious signs that an advanced civilisation ever lived here.

    Yet if the aliens had good enough scientific tools they could still find a few hints of our presence. For a start, the fossil record would show a mass extinction centred on the present day, including the sudden disappearance of large mammals across North America at the end of the last ice age. A little digging might also turn up intriguing signs of a long-lost intelligent civilisation, such as dense concentrations of skeletons of a large bipedal ape, clearly deliberately buried, some with gold teeth or grave goods such as jewellery.

    And if the visitors chanced across one of today's landfills, they might still find fragments of glass and plastic - and maybe even paper - to bear witness to our presence. "I would virtually guarantee that there would be some," says William Rathje, an archaeologist at Stanford University in California who has excavated many landfills. "The preservation of things is really pretty amazing. We think of artefacts as being so impermanent, but in certain cases things are going to last a long time."

    Ocean sediment cores will show a brief period during which massive amounts of heavy metals such as mercury were deposited, a relic of our fleeting industrial society. The same sediment band will also show a concentration of radioactive isotopes left by reactor meltdowns after our disappearance. The atmosphere will bear traces of a few gases that don't occur in nature, especially perfluorocarbons such as CF4, which have a half-life of tens of thousands of years. Finally a brief, century-long pulse of radio waves will forever radiate out across the galaxy and beyond, proof - for anything that cares and is able to listen - that we once had something to say and a way to say it.

    But these will be flimsy souvenirs, almost pathetic reminders of a civilisation that once thought itself the pinnacle of achievement. Within a few million years, erosion and possibly another ice age or two will have obliterated most of even these faint traces. If another intelligent species ever evolves on the Earth - and that is by no means certain, given how long life flourished before we came along - it may well have no inkling that we were ever here save for a few peculiar fossils and ossified relics. The humbling - and perversely comforting - reality is that the Earth will forget us remarkably quickly.(From issue 2573 of New Scientist magazine, 12 October 2006, page 36-41)

    0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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